■ 힘 세고 글 잘하고 말 잘하기
옛날에 아주 힘이 센 사람이 있었다.
『뭐니뭐니해도 힘이 제일이야!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고, 어깨를 으스대면 다들 벌벌 떨거든. 힘, 힘, 힘!
나는 역사(力士)야. 항우야!』
그런데 그 옆집에는 글을 잘하는 사람이 있었다.
『뭐니뭐니해도 글이 제일이야! 과거 급제도 글로 하고 문서도 글이고 세상에 남는 것도 글이다. 저 머릿속에
든 것을 종이 위에 쓰윽쓱 누에로부터 실 뽑듯 적어내는 글, 글, 글! 나는 문사(文士)야. 이태백이야!』
그런데 그 아랫집에는 말을 아주 잘하는 사람이 있었다.
『뭐 다들 나 보고는 말 잘하는 변사라고 하는데 사람이 어려서 말부터 배워 쓰지 힘쓰고 글 짓나 뭐?
죽을 때도 유언을 말로 하지 뭐. 임종에 문장 짓고 마지막 때에 용쓰나 뭐? 좀 작작 알고나 자랑을 해.
나는 소진장의(蘇秦長儀: 중국 춘추전국 시대의 말 잘한 사람)야!』
이렇게 한 동네에서 선후배가, 힘과 글과 말을 자랑하고 한치 양보도 없었으니........
『자, 결판이 나지 아니하니까 우리 실험을 해 보자! 저기 아무 골짝에 역적 도둑들이 산다고 하더라.
거기 가서 우리 판결을 짓자. 누가 가장 실력이 있는지 말이다』
이리해서 그 무서운 역적 도둑 군사들에게 다가가니까, 그만 우우 몰려나와서 창과 칼을 겨누고 찌를
듯이 하니까 어찌 하겠는가?
그만 붙들리고 말았다.
도장(집 뒤 창고 같은 방)에 갇히고 말았다.
재주 자랑을 집에서나 할 일이지 왜 역적 도둑군대를 찾아와서 죽음을 자초하는가 말이다.
도둑들이 칼을 숫돌에 써억써억, 쓰윽쓰윽 갈면서,
『저 세 놈에게 우리 근거지가 탄로가 났으니 죽여야겠다. 이 잘 간 칼로 목을 그냥 휘리릭!』
그러지 아니한가?
도장에 갇힌 셋은 난감하였다.
속절없이 죽게 생겼다.
참 맹랑하구나.
『야, 힘이 세면 어디다가 쓰는 힘이더냐? 다 살자는 인생 아니냐? 좀 힘을써서 우리가 여기서 나가야 할 것이
아니냐? 이 항우장사야! 항상 선배라고 으스대는 분아!』
말 잘하는 사람이 그러니까 힘 잘 쓰는 사람이 도장문을 냅다 발로 찼는데 문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힘센 사람이 저쪽 벽에 나가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음, 힘은 안되겠네. 저 글 잘하는 선배가 좀 일을 해 보시지요』
이리하여서 글 잘하는 사람, 이태백 같은 선배가 일필휘지로 선(先)은 이렇고 후(後)는 이렇고 가닥가닥 잡아서
조목조목 따져서 만리장성으로 써서 역적 도둑 군대 대장에게 주었다.
『죽게 된 마당에 무슨 글질이야!』
그러면서 역적 대장이 휘익 집어던져 버렸다.
쓰레기로 들어가서 불에 타 버린 것이다.
그러니 무슨 살 궁리가 있겠는가?
이제 말 잘하는 사람만 남았다.
그만이 살 길을 찾을 것이다.
그러면 오죽이나 좋을까?
『이제 하는 수 없이 내가 나서야겠구먼. 내가 시키는 대로 해! 무조건!』
『어떤 것인데? 알고 해야 할 것이 아니냐?』
『흥, 죽는 마당에는 딱 하나만 알면 되지 무엇을 잡다하게 알겠다는 것이야. 따지겠다는 것이야!
죽기 아니면 살기, 그 중에서도 살기만 알면 돼!』
『사는 것을 누가 모른대? 어떻게 사는 길이 있느냐는 것이지』
『그러니까 무조건 따라 해! 자, 목놓아 울어!』
그러니까 그만 도장 안에서 대성통곡이 나왔다.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데고 데고, 아이고..........』
도장이 떠나가라고, 이 도둑 대장집이 무너지라고 울어 제꼈다.
『아이고 아이구 우리는 죽었네.......』
도둑들은 그 울음소리가 당연하다고 생각을 하였다.
죽을 마당에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것 밖에 더 있으랴?
그러니까 거들떠보지도 아니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인가?
『하하하하, 으하하하하』
『허허허허, 어허허허허』
『거걸껄껄껄, 거걸껄껄껄』
이렇게 웃어 제끼니 도둑들이 이상하였다.
죽는 마당에 웃다니, 저 신명나게 웃는 모습이라, 미쳤구나.
그런데 이것이 또 무엇인가?
『아이고데고 아이고 죽겠네. 아이구 슬퍼라. 아이고데고, 데고 아이고...』
이러니까 도둑은 또 이상하였다.
저 도장에 갇힌 세 놈이 확실히 미쳤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또 웃는구나.
으하하하하 라고 말이다.
궁금한 도둑은 그 도장에 와서 물었다.
『너희들 미쳤냐? 웃다 울다, 울다 웃다. 그러면 엉덩이에서 뿔이 난다!』
『우리가 죽는 마당에 무엇을 또 감추랴! 사실 우리는 홍길동이다. 나라에서 잡으려고 눈이 시뻘겋게 찾아다니는
역적 홍길동이다. 원래 홍길동은 여기서 번쩍 저기서 번쩍 날아다니고 분신(分身)을 하는 기가 막힌 분신술이
있다는 것은 너희도 이 산중에 살 망정 잘 알 것이다』
『그래 안다. 우리는 장차 역적을 하려고 하지만, 그 홍길동은 실제로 역적을 했다고 지명수배가 된 것을 안다.
현상금이 크게 걸렸지!』
『바로 우리가 그 홍길동이다. 홍길동이가 무슨 신출귀몰한 분신술이나
비행술(飛行術)이 있겠느냐? 우리 셋이 동시에 나타나서 경상도에서 내가 홍길동이다, 평안도에 나타나서
내가 홍길동이다. 서울에 나타나서 내가 홍길동이다, 그런 것인데 그만 고스란히 우리 세 홍길동이가 잡힌
것이다』
『아, 그랬었구나. 본디 너희 셋이 홍길동이구나. 셋이라면 현상금이 세 배로구나. 허허허. 이것이 웬 횡재냐?
우리가 아직 역적 도둑인줄은 아무도 모른다. 너희는 이미 들통이 났지만!』
『으하하하하, 죽을 때 죽더라도 속 시원하게 신분을 밝히고 나니까 정녕 시원하구나. 이왕 언젠가 죽을 우리
세 목숨이다만 너희들한테 잘 죽을 것을 생각하니 웃었다. 으하하하라고 말이다.
그런데 한편 생각해 보니 젊은 나이에 벌써 죽다니 억울해서 울었다. 아이고라고.
한편 또 생각을 해 보니 나라에 붙들렸으면 삼족이 다 붙들려서 죽을 것인데 너희한테 죽으니 가족은 안심이
되어서 웃었다.
또 한편 생각을 해 보니 하찮은 너희들 도둑 졸개에게 그래도 역적 대장인데 이렇게 허무하게 죽게 되니 기가
막혀 울었다.
그러다 또 생각을 해 보니......』
도둑은 저도 생각을 해 보니 굳이 자기들 손으로 저 세 홍길동을 죽일 것이 아니라 묶어서 나라에 갖다가
바치면 현상금을 탈 것이 분명한지라, 즉시 도장에서 꺼내서 이 세 사람을 관가에다가 바쳤다.
그 뒤는 어찌 되었는가?
나라에서는 산중 도둑을 잡고 이 셋에게는 큰 벼슬을 주고 그 고장 백성은 다리를 뻗고 잘 살 수 있었다.
힘이 세고 글을 잘해도 말을 잘하는 것만 못하다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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