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학 유머

번개를 잡이라

정헌의 티스토리 2010. 6. 17. 21:03

번개를 잡아라(하)

(중)에서 계속됩니다

두 집 담은 낡은 기와를 얹었고, 또 다른 담은 토담이었다.
『이 쪽 토담이 수상하다』
박 어사가 토담 쪽을 가리켰다.
『그놈은 이 곳 형편을 잘 알아 둔 다음 평소에도 가끔 이 토담을 이용  했을 거야. 아무리 몸이 가벼운 사람이라도 기와가 얹힌 담은 넘을 때 깨기가 쉽거든. 더구나 지금은 캄캄한 밤이야』
어두운 토담 안쪽으로는 조그만 집 세 채가 나란히 서 있었다.
박 어사는 토담 안쪽에 있는 세 집을 차례차례 조사해 보기로 했다.
『돌쇠야, 네가 한 집씩 차례차례 주인을 불러 내 보아라』
『예』
돌쇠가 첫 번째 집 주인을 불러 냈다.
『무슨 일인가요?』
더듬거리며 나온 사람은 장님이었다.
『누구를 찾으시나요?』
『이분은 한양에서 온 포도군관이오. 그런데 당신은 장님인 모양인데 무얼
  해서 먹고 사시오?』
돌쇠가 물었다.
『예, 저는 소경이라 남의 점이나 쳐 주고 근근이 살아가지요』
장님의 말을 들은 박 어사가 앞으로 나섰다.
『조금 전 번개라는 도적이 이 쪽으로 뛰어왔는데 무슨 소리를 못 들었소?』
『예, 저는 아무 소리도 못 들었는데요』
『쿵쿵거리는 발자국 소리가 골목 밖에까지 들렸는데』
『그래도 전 잠귀가 워낙 어두워서』
『알겠소』
박문수는 두 번째 집으로 향했다.
두 번째 집에는 젊은 부인과 여자 하인이 살고 있었다.
『이분은 한양에서 온 포도군관이오. 혹시 조금 전에 발자국 소리를 못 들으 셨나요?』
『아니오, 듣지 못했는데요』
젊은 여자가 대답했다.
이번에는 박 어사가 묻기 시작했다.
『실례의 말씀입니다만, 어째서 젊은 부인이 혼자 사시나요?』
『부끄럽습니다만, 저는 기생이었나이다. 그래서 떳떳이 결혼도 못하고 몸종 하나를 거느리고.......』
『알겠소』
박 어사와 돌쇠는 대답을 하고 얼른 세 번째 집으로 갔다.
그 집에는「남강 선생」이라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고 있었다.
남강 선생은 환갑을 넘긴 할아버지로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머리에는 귀 밑까지 내려오는 벙거지를 쓰고 있었다.
남강 선생의 집을 나올 때였다.
박 어사가 갑자기 돌쇠의 발을 꽉 밟았다.
『으악!』
돌쇠가 버럭 소리쳤다.
『무슨 일이오?』
깜짝 놀란 할머니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내다보았다.
그렇지만 남강 선생은 멍하니 딴 곳만 바라보고 있었다.
돌아오면서 박 어사가 말했다.
『이 세 집 중 한 곳에 분명 번개가 숨어 든 것 같은데』
이튿날 아침이었다.
박 어사가 잠에서 깨어 보니 번개의 세 번째 편지가 방문 앞에 떨어져 있었다.
한양 포도군관,
이 번개를 잡겠다고 큰소리를 치더니 헛수고만 많구려.
이 번개는 당신을 빤히 보고 있는데,
당신은 바로 내 옆을 스쳐 지나가면서도
이 번개를 알아보지 못하니 얼마나 우스운 일이오.
시골까지 와서 웃음거리가 되지 말고어서 돌아가는 것이 어떻겠소
                         번개
그 날 저녁을 먹은 후였다.
『따라 나서거라』
박 어사가 돌쇠에게 말했다.
『어딜 가시려구요?』
『토담 안쪽의 세 집이 아무래도 수상하다. 다시 한 번 가서 살펴야겠다』
날이 어두워졌다.
거리는 쓸어 낸 듯 조용했다.
도둑이 날뛴다는 소문 때문에 사람들이 밤길 걷기를 꺼리는 까닭이었다.
박 어사와 돌쇠는 번개가 사라졌던 막다른 골목 근처에 몸을 숨겼다.
『사람들이 다니기 꺼리는 길을 스스럼없이 다니는 자는 수상한 자일 테니 이 골목에서 나오는 자는 무조건 체포하도록 해라』
『예, 알겠습니다』
밤이 점점 깊어 가자 긴장했던 돌쇠의 태도가 풀어지기 시작했다.
그 때였다.
어둠 속에서 불이 깜박이더니 검은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쉿! 온다!』
두 사람은 숨을 죽이고 몸을 숨겼다.
검은 그림자가 점점 더 다가왔다.
『잡아라!』
박 어사가 소리쳤다.
『에잇!』
돌쇠가 비호처럼 몸을 날렸다.
『앗, 포도군관 나리!』
『꼼짝 마라, 네놈이 번개지?』
돌쇠가 사나이를 꽁꽁 묶으며 소리쳤다.
『아, 아니오. 보시다시피 저는 장님입니다』
자세히 보니 토담 안쪽 첫 번째 집에 살던 장님이었다.
『아무튼 관가로 가자!』
두 사람은 장님을 묶어 관가로 끌고 갔다.
장님은 사또 앞에 꿇어앉았다.
『그대는 장님이 아니다. 다 알고 있으니 어서 네 정체를 밝혀라!』
박 어사가 소리쳤다.
『.........』
그러자 장님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이번에는 사또가 화가 나 소리쳤다.
『이놈, 어서 바른대로 실토하지 못할까?』
사또의 무서운 호령에 장님이 겨우 더듬더듬 말했다.
『보시다시피 저는 장님 점쟁이입니다』
그러자 박 어사가 벌떡 일어섰다.
『거짓말 마라. 너는 장님이 아니야. 앞 못 보는 네가 어찌 내 얼굴을 알고 보자마자 포도군관 나리라고 했느냐?』
박 어사가 한껏 다그치자 장님이 겨우 입을 열었다.
『장님이 아닌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제가 장님인 체하는 것은 번개 이기 때문이 아니라 점쟁이 노릇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건 정말입니다』
장님 흉내를 내던 점쟁이는 자기는 번개가 아니라고 계속 소리쳤다.
『알았다. 그렇지만 두 눈이 멀쩡하면서도 장님인 체한 것도 잘못이다.
  오늘 밤은 옥 안에서 지내라. 내일 좀 더 조사를 해 봐야겠다』
박 어사는 점쟁이를 관가의 옥에 가두고 돌아왔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보니 번개의 편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리석은 포도군관이여,
앞으로 얼마나 더 부끄러움을 당해야 한양으로 돌아가겠는가.
더 이상 웃음거리가 되지 말고 어서 한양으로 돌아가도록 하시오.
                         번개
편지를 읽던 박 어사가 갑자기 소리쳤다.
『그렇다! 바로 그놈이 번개야!』
『누, 누구 말입니까?』
돌쇠가 깜짝 놀라 물었다.
『돌쇠야, 어서 따라와라. 와 보면 안다』
박 어사가 달려간 곳은 토담 안에 있는 기생 매월의 집이었다.
매월의 집 대문 안에 들어서니 매월의 신발과 나란히 남자의 신발도 있었다.
『바로 저 신발의 임자가 번개일 게다. 돌쇠야, 너는 방 안에 있는 자를 무조건 체포하도록 해라』
『예』
박 어사와 돌쇠가 조심조심 방문 앞에 이르렀다.
『방 안에 있는 자는 꼼짝 마라!』
벽력같이 소리치며 박 어사가 방문을 활짝 열었다.
『앗!』
깜짝 놀라 돌아보는 사나이는 귀가 먹었다던 남강 선생이었다.
『무슨 짓이냐?』
사태를 짐작한 남강 선생이 칼을 빼어 들었다.
그러나 비호처럼 들려든 돌쇠가 남강 선생의 손목을 쳐서 칼을 떨어뜨렸다.
『왜들 이러세요? 죄 없는 사람에게』
기생 매월이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쳤다.
그렇지만 순식간에 돌쇠가 오라로 남강 선생을 꽁꽁 묶어 버렸다.
『귀가 먹었다더니 잘도 듣는구나. 우선 이 벙거지부터 벗겨 봐라!』
돌쇠가 남강 선생이 썼던 벙거지를 벗겼다.
『앗!』
박 어사와 돌쇠는 깜짝 놀랐다.
환갑이 넘었다던 남강 선생의 얼굴은 뜻밖에도 마흔을 갓 넘긴 것처럼 보였다.
40대의 얼굴에 벙거지를 써서 환갑이 넘은 늙은이로 교묘히 위장한 것이었다.
남강 선생은 곧 사또 앞으로 끌려갔다.
『이 자가 번개인지 어떻게 알았소?』
『장님이나 귀머거리 남강 선생 둘 중 한 사람이 번개일 것이라고 처음부터 의심했었지요. 게다가 남강 선생의 벙거지 밑으로 드러난 귀를 보니 귓속에 언뜻 하얀 것이 보였습니다. 그건 귀머거리 노릇을 하려고 일부러
  넣은 촛농이었지요』
『.......』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박 어사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말고 또 있지요. 매월의 집에 남강 선생과 다른 젊은 사내가 번갈아 들락거린다고 마을 사람들이 귀띔해 주었지요. 그래서 저는 남강 선생이 변장하여 두 사람처럼 보이게 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과연 당신은 대단한 분이구려』
사또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이 번개는 꾀가 많아 훔친 많은 돈 중에서 몇 푼을 떼어 내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체하여 의적 행세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쩌다
  번개가 나타나도 아무도 신고를 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도와 주려 했던 것이지요. 그러니 포졸들의 힘만으로는 체포가 어려울 수 밖에요』
설명을 마친 박 어사가 손을 털며 일어섰다.
『자, 그럼 저희는 가 보겠습니다』
『수고했소! 내일 꼭 들러 주시오. 골치 아픈 도둑 번개를 잡았으니 잔치라도 열어야겠소』
『허허허, 그러지요』
주막으로 돌아온 박 어사는 오랜만에 다리를 쭉 뻗고 잠을 잤다.
이튿날 아침이었다.
박 어사는 일찍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나리, 이렇게 일찍 사또를 뵈러 가시려구요?』
돌쇠의 말에 박 어사가 씩 웃었다.
『사또에게는 가지 않는다』
『어제 잔치에 들르기로 약속하지 않았나요?』
돌쇠가 불만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난 참석한다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럼 도적을 잡은 공으로 사또께서 준다는 상금은요?』
『허허허, 이 미련한 놈아, 상금은 무슨 상금이냐? 백성들 마음을 편안하게하는 것이 바로 내가 할 일이 아니더냐?』
사또가 한창 잔치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박 어사는 이웃 고을로 통하는 산 고개를 넘고 있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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