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과 어사
그리 멀지 않은 옛날 이야기다.
서울 성밖에 고씨 성을 가진 백정이 한 사람 있었는데, 억척으로 일을 해서 돈을 수만금 모았다.
근처에서는 견줄 사람이 없을 만큼 부자가 되었다.
그런데 백정이 아무리 부자가 되면 뭘 해? 천한 백정이라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이놈 저놈 해대니 천대 안 받고 가난하게 사느니만 못하다.
이 백정이 사는 곳에서 얼마 안 떨어진 곳에 윤씨 성을 가진 양반이 한 사람 살았다.
그런데 이 양반은 사는 게 너무 가난하다.
너무 가난해서 먹고 살 길이 없으니까 나랏돈을 좀 꾸어다 쓴 모양인데 그것도 못 갚을 형편이 되었다.
나랏돈을 갚아야 할 기한이 내일모레인데, 이 양반은 그저 치죄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백정이 그 사정을 알고 하루는 남의 눈을 피해 밤중에 가만히 돈을 한 바리 싣고 양반집을 찾아갔다.
아무리 가난해도 양반은 양반이라, 천한 백정을 들일 수 없다고 하인들이 문간에서 내쫓는 것을 어찌어찌 빌고 빌어서 겨우 양반을 만났다.
감히 고개도 못 들고 꿇어앉아서,
『외람된 말씀이오나 듣자니 나리께서 나랏돈을 갚지 못해 걱정하신다기에 돈을 좀 싣고 왔습니다. 천한 돈이나마 소용에 닿으시거든 거두어 주십시오』
하면서 돈을 내놓았다.
양반이 보니 그 돈이면 빌려 쓴 나랏돈을 갚고도 남겠다.
물에 빠진 사람이 배를 만난 격이지만 양반 체면에 넙죽 받을 수는 없었다.
점잖게 사양을 했다.
『그것이 너한테도 중한 돈일 터인데, 내가 어찌 까닭없이 받겠느냐?』
『소인이 비록 미천한 몸이지마는 모아 놓은 돈이 조금 있습니다. 이것을 드린다고 해서 먹고 사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으니 괘념치 마시고 받아 주십시오』
이쯤되니 양반도 더 사양을 못하고 돈을 받았다.
그 돈 덕분에 양반은 나랏돈을 갚고 한숨 돌리게 되었다.
그러고 난 뒤에 얼마 안 있어 백정은 가산을 모두 팔아 가지고 서울을 떠나 경상도 안동 땅으로 내려갔다.
천대 받고 사는 것이 하도 싫어서 내일모레 죽는 한이 있더라도 양반 행세나
한 번 해 보자고 내려갔다.
낯설고 물선 곳에 가면 저를 알아보는 사람도 없을 테니 양반 행세를 한들 어떠랴 싶었던 것이다.
안동 땅에서도 양반이 제일 많이 산다는 곳에 가서 자리를 잡고 사는데, 이 사람이 양반 행세를 하면서도 다른 양반들과 어울리지를 않고 집에만 틀어박혀 지낸다.
평생 백정 노릇만 해 왔으니 양반 노릇을 뭐 어떻게 하는지 알아야 말이지.
섣불리 어울리다가는 본색이 탄로날 것 같으니까 두문불출하고 지내는 거다.
그러니까 다른 양반들이, 저렇게 예의범절 모르는 걸 보니 필시 근본도 없는 상것 나부랭이일 거라느니 뭐니 별별 소리를 다 한다.
그런데 때맞춰 들려 오는 소문이, 전에 저한테서 돈을 받은 서울 양반이 큰 벼슬을 하게 됐다고 그런다.
옳다구나 하고 양반들 많이 모인 곳에 가서 큰소리를 쳤다.
『인사가 늦어서 미안하게 됐소이다. 저로 말하자면 이번에 큰 벼슬자리에 오른 윤 아무개 대감과 아주 가까운 사이요』
그만 해도 좋으련만, 다른 양반들이 어떤 사이냐고 자꾸 묻기에 그 양반이 자기 매형이라고 거짓으로 둘러댔다.
그 뒤로부터는 다른 양반들도 괄시를 못한다.
본래 양반이라고 하는 것이 높은 벼슬아치라면 껍뻑 죽는데다 촌수라면 사돈의 팔촌까지도 끌어대기 좋아하는 사람들이니 그럴 수 밖에 없다.
그러고 그냥 넘어갔으면 좀 좋아? 이 소문이 퍼지고 퍼져서 그 고을에 와 있던 암행어사 귀에까지 들어갔다.
그런데 일이 공교롭게 되느라고 글쎄 그 암행어사가 바로 윤 아무개 대감의 맏아들이로구나.
그러니 이게 어떻게 되나.
암행어사가 소문을 들어 보니 고 아무개라는 양반이 자기 외삼촌이 된다는 얘긴데, 저한테는 그런 외삼촌이 없단 말이지.
이건 필시 무슨 곡절이 있겠거니 싶어서 암행어사가 하루는 고 백정네 집을 찾아갔다.
『듣자니 이 댁 주인이 윤 아무개 대감의 처남이라고 하는데, 내가 바로 그 윤 아무개의 아들이오. 그런데 나에게는 그런 외삼촌이 없으니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고 백정이 들으니 청천벽력 같은 소리다. 아이고, 내가 왜 쓸데없는 허풍을 떨어 가지고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나 싶어서 죽을 맛이다.
암행어사 앞에 넙죽 엎드려 사죄를 하고 그 동안의 사정을 죄다 털어놓았다.
백정으로 천대 받고 사는 것이 하도 원통하여 양반 행세나 한 번 해 보려고 하다 보니 이런 일이 생겼는데 죽을 죄를 저질렀다고 말이다.
암행어사가 들어보니 저희 아버지가 늘 은인이라고 이야기하던 바로 그 사람이다.
그래서 아무 염려 말라고 하고는, 다음에 관가에서 사람이 오면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일러주고 갔다.
그러고 나서 며칠 뒤에 고 백정이 사는 집에 관가에서 사령들이 큰 가마를 메고 들이닥쳤다.
동네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우르르 몰려 들었다.
사령들이 가마를 마당에 내려놓고는,
『암행어사 분부 받들고 왔습니다』
하고 야단이 났다.
고 백정은 태연하게 마루에 앉아서 잔뜩 점잔을 빼고 있다.
『그래, 무슨 분부냐?』
『어사께서 이 댁 나리의 생질이라 하시면서, 나리를 모셔 오면 인사를 드리겠다고 하십니다』
그 말을 들은 고 백정이 하는 꼴 좀 보소.
마루를 탕탕 치면서 마구 노발대발이다.
『뭐라고? 그놈이 암행어사로 왔으면 마땅히 제 발로 나를 찾아와서 인사를
해야지 감히 어른을 오라 가라 해?』
이쯤 되니 구경 왔던 동네양반들이 놀라서 눈망울이 화등잔 만해진다.
고을 관장도 벌벌 떠는 암행어사에게 이놈 저놈 하면서 욕을 해대니 놀랄 수 밖에 없다.
이게 다 암행어사와 짜고 하는 일이지만, 사정을 모르는 동네 양반들은, 과연 지체가 하늘을 찌르는 양반이구나 하고 그 다음부터는 백정 앞에서 설설 기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고 백정은 다른 양반들이 우러러보는 몸이 되어 잘 살았다.
그런데 일이 여기서 끝났으면 좋으련만 그게 아니다.
암행어사가 서울에 올라가서 아버지에게 이 일을 낱낱이 고해 바쳤다.
그러니 아버지도 참 잘 했다고 칭찬을 하는데, 옆에서 그 말을 듣고 있던 둘째 아들이 그만 심술을 부린단 말이야.
『아니, 형님. 그래 그 천한 백정 놈을 우리 외숙이라고 떠들고 다녔단 말입니까?』
『그 사람이 비록 백정이라 하지마는 우리 아버지가 곤경에 빠졌을 때 도와주지 않았느냐?』
『아무리 그렇더라도 그 천한 것이 양반행세를 하고 다니는 걸 그냥 둘 수는 없습니다』
둘째 아들이 그 길로 떨쳐 일어나 경상도 안동 땅으로 내려갔다.
내려가자마자 바로 관가에 가서, 자기는 서울 윤 아무개 대감의 둘째 아들 이며 얼마 전에 다녀간 암행어사의 동생인데 죄인을 잡으러 왔으니 어서 사령들을 부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니 고을 원이고 육방관속이고 설설 기면서 사령들을 불러 모았다.
윤가가 사령들에게 호령하기를,
『내 외숙이라고 떠들고 다니는 고 아무개가 실은 백정 놈이니, 어서 가서 그놈을 잡아 오너라』
하니 사령들은 영문도 모르고 고 백정네 집에 갈 수 밖에 없었다.
가서 이러이러한 사람이 와서 잡아 오란다고 그랬다.
고 백정이 들으니 이것 참 큰일이 나도 보통 큰일이 난 게 아니다.
지금까지 잘 버텨 왔는데 이제와서 죽여 주십시오 할 수도 없고, 그 심술 사나운 놈한테 대들 수도 없고, 참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게 되었단 말이다.
그런데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더라고 좋은 꾀가 번개같이 떠 올랐다.
고 백정이 시치미를 뚝 떼고 하는 말이,
『어, 그 아이가 어렸을 때 한 번 미치더니 그 병이 도진 게로군. 어서 가 보자』
하고 사령들을 앞세우고 관가에 갔다.
가 보니 윤가는 낯이 불그락 푸르락 해 가지고 서있다가 고 백정이 의관을 갖추고 활개를 치며 걸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눈에 불이 일어 가지고 애꿎은 사령들에게 불호령을 내린다.
『이 놈들아, 저 못된 백정 놈을 오라를 지워 끌고 오지 않고 어째 걸어 들어 오게 하느냐? 당장 오라를 지워라』
그런데도 고 백정은 태연하게 사령들을 돌아보면서,
『내가 뭐라고 하더냐? 저 눈자위 돌아가는 것 좀 보아라. 미쳐도 아주 단단히 미쳤으니 저대로 둬서는 안 되겠다. 어서 묶어라』한다.
그러니 사령들이 누구 말을 듣겠는가?
하나는 눈에 불을 켜 가지고 고래고래 악을 쓰고, 하나는 태연자약하게 뒷짐을 지고 서 있으니 당연히 태연한 쪽 말을 듣지.
당장 달려들어 윤가를 꽁꽁 묶었다.
『이 놈들, 이게 무슨 짓이냐? 백정 놈은 저기 있는데 왜 나를 묶느냐?』
그러나마나 고 백정은 천연덕스럽게 사령들에게 약쑥을 한단 구해 오라고 해서는,
『저 아이가 어릴 때도 저러는 걸 내가 쑥뜸으로 고친 적이 있으니 이번에도 뜸을 지지면 나을 게다』
하고는 뜸장을 주먹만하게 비벼 가지고 윤가의 등에 붙여 놓고 불을 그어 댄단 말이다.
맨살에 쑥이 타 들어가니 죽을 맛이다.
『아이구 아야. 아이구 아야. 이 못된 백정 놈이 날 죽이네』
『어허, 이번에는 너무 많이 미쳐서 한두 곳 떠서는 안 되겠다. 한 열곳 지지면 낫겠지』
뜸장을 한꺼번에 열 개를 비벼 가지고 등에다 붙여 놓고 불을 붙여 놓으니 어떻게 되겠나? 아주 등살이 벗겨지는 것 같다.
『아이구, 아이구』
『아직 정신이 덜 들었나 보구나. 한 백 곳 더 지져 볼까?』
윤가가 그 말을 들으니 이러다가는 죽을 것 같다.
『아이구, 외삼촌. 정신이 듭니다. 이러지 마십시오』
『웬걸. 다시는 병이 도지지 않게 좀더 뜨자꾸나』
『아니오. 다시는 안 그럴 겁니다』
『그게 정말이냐?』
『예, 풀어만 주시면 두말 않고 서울로 올라가겠습니다』
이렇게 다짐을 받고 풀어 줬다. 그러니 찍 소리 않고 서울로 올라 갔다.
고 백정은 그 뒤로도 양반행세를 하면서 잘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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