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 더 뷰인비토 글램핑장, 순천 충무사, 순천왜성, 정유재란역사공원, 검단산성, 드라마 촬영장
■사천 더 뷰인비토 글램핑장, 순천 충무사, 순천왜성, 정유재란역사공원, 검단산성, 드라마 촬영장
집사람이 지난해 10월 골프존카운티사천에서 홀인원 기념으로 1박 글램핑장 이용권을 받았다. 사천 비토섬에 있는 더뷰인비토 글램핑장이다. 미루고 미루다 만기일이 다 되어서야 찾았다. 1박에 삼겹살, 목살 등 육류와 셀프 바에서 쌈채소, 소세지, 새우, 김치, 쌈장 등등과, 라면, 햇반을 제공하므로 저녁식사를 하는데 충분하다.
다음날, 비토섬은 지난 1월 초에 한바퀴 둘러 본 곳이어서 조금 거리는 있지만 순천 몇 군데를 다녀보기로 한다, 순천 충무사, 순천왜성, 정유재란역사공원이 서로 가까이 있고, 검단산성 또한 멀지않아 같이 둘러본다. 순천드라마 촬영장으로 이동하여 후문 인근에서 중식 후 촬영장을 둘러보는 것으로 하루 일정을 보냈다.
▷가는 길
▷탐방코스
사천 더 뷰인비토 글램핑장 - 순천 충무사(약 10분) - 순천왜성 (약50분) - 정유재란역사공원(약10분) - 검단산성(약 50분) - 행복한밥상 중식 - 드라마 촬영장(약1시간) / (2024. 4. 10)
▷탐방후에
▣사천 더 뷰인 비토 글램핑장
홀인원 인증서.
사천 서포면 비토섬에 위치한 사천 더 뷰인 비토 글램핑장에 왔다,
비토교, 거북교를 건너자 이내 있는 갈림길에서 우측 해안도로를 따르면 멀지 않은 곳이다.
관리동
2인 기준 극성수기 350.천원, 성수기 280.~300. 준성수기 240.~280. 일반 200~240. 비수기 180~220. 수준이다. 2인 초과시 1인당 연령에 따라 무료에서 35천원까지 추가요금 있다.
여기에 육류 및 셀프바(야채, 쌈장. 옥수수, 소세지, 파인애플, 파김치, 김치 등등 무한리필) 이용, 라면 및 햇반을 인당 1개씩 지급하므로 하룻밤 보내는데는 몸만 오면 된다. 집에서 약간의 음식만 가져온다면 아침 식사도 이곳에서 해결 가능하다.
글램핑장에서 기본 제공하는 것 외 장작(10kg, 20.) 술 등등 이곳 매점에서 구입하면 된다.
주변을 둘러본다.
멀리 남해대교가 조망된다,
해안가 전망좋은 곳에 4층의 계단으로 글램핑장이 조성되어 있다.
한여름엔 그늘이 없어 좀 덥겠다.
인피니티 풀
이용시간은 15:00~21:00
이용요금은 숙박비에 포함되어 있다.
숙소동으로 왔다.
오늘 숙소동.
싱크대와 조리기구, 전자렌지, 커피포트, 무드 등, 냉장고, 에어컨, TV 등등 갖출건 다 갖추었고, 시설 자체가 아주 깔끔하다.
그냥 넘어갈려 했는데 오길 잘 했다.
숙박비에 포함되어 제공되는 음식이다.
숯불은 원하는 시간에 주인장이 피워준다.
어둠이 내리니 주변 등이 켜진다.
오길 잘 했다.
사실 글램핑장 이용은 처음이다.
▣ 순천 충무사
순천왜성과 가까이 있다.
순천왜성을 둘러보기 전에 충무사에 왔다.
혹 내비가 뒷편 관리사 쪽으로 안내할 수 있지만 신성리 마을 앞 주차장에 주차하고 앞쪽으로 오면 된다.
외삼문
임진왜란(1582~1598)이 끝난 뒤 약 100년 후 이곳에 이주 해 온 주민들이 신성리성 전투에서 많은 왜군이 죽어 그 왜귀가 밤이면 자주 출몰하여 몹시 불안해서 이곳에 사당을 짓고 충무공 이순신의 위패와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그 뒤부터는 안락한 생활을 하였다 한다.
1943년 가을 일제가 민족정신 말살정책으로 사당을 소각하였던 것을 1945년 조국 광복과 동시에 충무공유적영구보존회가 설립되고 1947년 현 위치에 사당을 새로 건립하였다. 후에 공의 군관 송희립 장군과 정운장군의 위패와 영정을 같이 봉안하고 봄. 가을로 제향을 모시고 있다.
<현지 안내표지석에서>
충무사는 주변에서 보면 숲이 우거진 동산 위에 위치해 누구나 저곳이구나 하고 가늠할 수 있는 곳이다.
강당
내삼문인 동광문(東光門)
내삼문을 들어서면 맞은편에 충무사가 자리한다.
충무사
충무공 위패와 영정을 모시고 있고, 좌우측에 군관 송희립 장군과 정운장군의 위패를 봉안했다.
동재의 위치에 영당이 있고,
서재의 위치에 재실을 배치했다.
충무사를 둘러보고 옆쪽 도로를 따라 나오면 관리사가 있다.
▣순천왜성
대충 해자의 위치가 가늠되며, 해자 밖에도 성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 그림인지는 모르겠으나 <정왜기공도권>이란 말이 나온다.
정왜기공도권은 정유재란시 명나로 수국도독 진린 휘하의 종군화가가 그린 기록화로 알려져 있다. 그림은 폭 30cm, 길이 6.5m의 채색화로 오른쪽으로 부터 왼쪽으로 그려진 두루마리이다.
정왜기공도권에서는 순천 왜교성 전투와 관련된 것은 3개 장면에 걸쳐 있다. 여기에는 왜교성 전체의 형태를 한눈에 볼 수 있다. 그리고 1598년 9월 20일경 강화회담을 가장하여 조명연합군이 소서행장 생포작전을 벌인 직후에 벌어진 수륙합동공격의 전투실황을 비롯하여 조명연합군이 일본군을 공격하는 정면과 왜교성 안에 있는 5층 망해루의 모습, 조명연합 수군 지휘관의 선상회의 장면 등이 사실감 있게 표현되어 있다. 정왜기공도권은 임진왜란 7년 전쟁을 통하여 남겨진 대표적인 전쟁 기록화란 점에서 그 사료적인 가치는 매우 높다.
<정유재란 역사공원 안내문에서>
넓은 비포장 주차장이 있다.
처음은 이곳인줄 모르고 지나쳤는데 진행하다 보니 주차장이 보이지 않아 지나쳤구나 싶어 되돌아 왔다.
조금 주의하면 충분히 알 수 있는 곳이다.
주차장이 넓다.
순천왜성
이 성은 전라도 지방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왜성으로, 1597년 9월 중순부터 11월말에 이르기까지 약 3개월에 걸쳐 쌓았다.
1597년(정유년) 9월에 왜군은 경기도 부근 전쟁에서 패한 뒤 전라도와 경상도 남해안 지역으로 남하하였는데 이 때 각 지역의 요충지를 찾아 새로운 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이곳에 성을 축조하였던 것은 호남지방을 공략하기 위한 전진기지 겸 최후의 방어기지로 삼기 위한 것이었다,
1598년 9월 부터 11월 까지 2개월간에 걸쳐 이곳에서 펼쳐진 싸움이 왜교성 전투이며, 이는 조. 명 연합군과 왜의 장수인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 사이에 벌어진 최대의 격전지였으며, 임진왜란 7년 전쟁의 마지막 전투이기도 하였다. 당시 전쟁의 모습은 <정왜기공도권>에 그려져 있다.
성곽의 구조는 본성과 외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본성에는 별도의 내성이 있다. 내성과 본성의 성벽은 각각 2겹으로 축조되어 있고, 외성은 1겹으로 축조되어 있다. 성곽내에는 천수기단, 문지, 해자 등의 주요 건물지가 남아 있어 성곽 축조 당시의 상황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성곽내 주요 건물지에 관한 내용은 전쟁의 모습이 그려진 정왜기공도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해자
성곽의 본성과 외성 사이에 방어를 위해 인위적으로 넓은 물길을 설치하였다. 해자는 바닷물을 유입함으로써 본성을 성처럼 요새화 하였고, 다리를 만들어 출입하도록 하였다.
1598년 전쟁의 모습을 그린 <정왜기공도권>을 통해 해자, 천수각 등 주변 지형과 건물의 현황을 알 수 있다.
주변 지역이 공업단지 및 농경지화 되면서 바닷물이 유입되지 않고, 지형이 변해 본래의 해자의 흔적은 찾아 볼 수 없게 되엤다.
현재 해자의 모습은 2007년 순천왜성 보수사업으로 일부 지역에 대해 복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우측에 옛 해자였을 연못옆으로 난 탐방로가 나 있다.
문지1
문지 1
이 문지는 본성과 외성을 연결하는 주 출입문이다. 문지 옆으로는 해자를 만들고, 바닷 물을 끌어들여 성처럼 만들어 방어에 치중하였던 건물지로 여겨진다. 만조 때 멀리서 이곳 출입로가 다리처럼 보인다하여 왜교(倭橋), 또는 예교(曳橋)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문지 공사는 2007년 이루어졌으며, 기존에 남아있는 형태를 기본으로, 일본성 축조방식을 자문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문지를 쌓는 방식은 비교적 큰 돌을 이용하여 불규칙하게 쌓았다.
<현지 안내문에서>
문지 상부로 올라갈 수 있도록 계단을 두었다.
1문지에서 2문지로 가는 길
성곽을 따라 성을 보수한게 아니라 성문지 주변만 보수하였다.
문지2
이 문지는 천수에 이르는 주 출입문이다. 일직선으로 진입하지 않고 'ㄱ'자 형태로 꺾어 진입하는 구조이다.
문지의 바깥쪽은 성벽이 남쪽으로 길게 연결된다. 성벽의 서쪽으로는 해자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석축 쌓기 방식은 자연석을 불규칙하게 쌓는 방식이며 문지의 상단부를 큰 돌로 쌓아 적에게 위암감을 주는 심리전에 이용하였다.
<정왜기공도권>에 문루와 성벽 위에 여장 등이 그려진 그림과, <섬호집> '예교진병일록'에 "성위에 여장을 쌓아 포 구멍을 벌집같이 냈다"라는 기록과 일치한다,
<현지 안내문에서>
2문지 주변 소량의 유채꽃이 피었다.
문지 2 상부
내성쪽으로 왔다.
주변엔 겹벚꽃나무를 가로수로 식재했으나 아직 고목이 되지는 않았다.
화장싶 앞쪽에 갈림길이 있다.
어느쪽으로 가든 내성에서 만나게 된다.
우측 길을 따라 올랐다가 좌측 길로 내려올까 한다.
주변은 넓은 공터로 남아있고,
성문지가 보인다.
문지로 들어선다.
지나 들어온 남문지?
내성으로 들어서니 넓고 평편하다.
군데군데 소나무 군락이 있어 그늘을 이루고 있다.
내성의 서문쪽을 둘러본다.
내성 서쪽 문지 주변에서 천수각과 내성 주변을 가장 잘 볼 수 있다.
내성의 서문지.
화장실 앞에서 바로 올라오면 이곳으로 오르게 된다.
나중 내려갈 곳이다.
천수기단으로 간다.
천수기단(天守基壇)
성의 가잔 높은 망루인 천수가 세워졌던 단으로 천수기단 앞에는 부속된 낮은 단이 있다. 천수는 성을 대표하는 귄위와 상징의 건물이다.
<정왜기공도권>에는 3층 팔작지붕의 천수대가 그려져 있으니, 천수각 1층 아래에 오층망해루라고 쓰여 있어, 오층 건물이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천수기단은 오랜 세월 동안에 석축이 흐트러지고 일부가 무너져 2007년 보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석축 쌓기 방식은 자연석을 불규칙하게 쌓는 방식이다. 모서리 돌은 쐐기질히여 포갠 돌을 사용하였고, 쐐기질 흔적이 잘 남아 있으며, 위아래를 교차되게 쌓았다. 전수기단의 상부는 남아있던 초석은 그대로 보존하고 기존 초석 위에 새로운 초석을 놓아 건물의 규모를 알 수 있도록 하였다.
<현지 안내문에서>
천수기단에 오르면 사방으로 조망이 좋다.
광양만쪽이다.
1598년 9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했다.
노량해전은 1598년 12월 16일(음11월 19일) 새벽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겸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과 명나라 수국도독 진린이 지휘하는 조선.명나라 연합함대가, 철수하려는 고니시 유카나가의 일본 함대를 구조하려는 시마즈 오시히로 (사천 선진리성) 의 일본함대를 노량해협에 유인 후, 기습하여 관음포로 몰아넣어 극소수 탈출을 제외한 대다수를 침몰. 나포시켜 큰 승리를 거두었으나, 이순신 장군은 이 해전에서 사망한다.
당해 11월 19일경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는 시마즈의 원군과 합세하여 싸우기 보다는 여수 동쪽 바다를 거쳐 부산으로 도주한다.
북쪽,
가운데 숲에 가려진 동산에 충무사가 있다.
사진상 오른쪽 끝 숲 무성한 곳이 신성리 충무사,
좌측 마을 상부의 옛 초등학교 건물을 리모델링한 정유재란 역사공원이 있다.
정채봉(1946~2001)
전남 순천 해룡면 신성리에서 출생,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데뷔 197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 부문 "꽃다발", 주요경력 2000.7.~2001.1.샘터사 편집이사, 수상 2000. 제 33화 소천아동문학상.
정채봉과 정호승(1950년 대구 출생, 경희대 국문과와 동 대학원 졸업)시인과의 사이는 족보에 없는 동생이라 칭할 정도로 가까웠다고 정호승 시인은 기록하고 있다.
정채봉
동화를 쓰면서
촛불처럼 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차가운 겨울바람이
촛불을 훅 꺼버렸습니다.
고맙습니다.
촛불이 꺼진 뒤에야
꺼지지 않은 촛불이 됩니다.
- 정호승-
정호승의 시가있는 산문집 [외로워도 외롭지 않다]에서 정채봉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사진상 저곳 어디쯤 정채봉이 태어나고 또한 국민학교도 다녔을 곳이어서 정채봉 아동문학가와 정호승 시인의 삶의 세계도 잠시 기억해 봄도 좋을 것 같다.
서쪽,
되돌아 내려간다.
내성 서문지로 내려왔다.
서문지.
쉬엄쉬엄 갔다온 순천왜성이었다.
약 50분여 소요되었다.
▣ 순천정유재란역사공원
순천왜성에서 건너다 보이는 마을 윗쪽 도로변에 있어 찾는데 어려움은 없다.
옛 초등학교를 리모델링하여 역사공원으로 꾸몄다.
왜성
임진왜란 7년 전쟁기간 중 몇 차례에 걸처 왜성이 축조되어는데 1592년 4월경 부산진성과 동래성, 다대포진성을 함락시킨 일본군이 병력과 물자를 보급하기 위해 부산왜성을 축조한 것이 그 시발이었다. 이후 이순신의 조선수군이 해전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고, 각지에서 의병의 활약하는 가운데 명군까지 참전하지 일본군을 어쩔 수 없이 한강 이남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일본군은 그들의 근거지를 확보하기 위해 서생포에서부터 거제도에 이르는 해안 요해처에 왜성을 축조하였다.
또한 일본군은 1597년 정유년에 재침하여 북진하다가 경기도 일원에서 패퇴한 뒤 전군이 전라도와 경상도 남해안지역으로 남하한 후 그해 9월부터 12월 사이에 울산으로부터 순천에 이르는 해안의 요해지에 왜성을 축조하였다. 당시 축조된 왜성은 7개였다고 한다. 대상지는 대부분 경상도지역이었고 전라도 지역에서는 순천이 유일하다.
이 성을 축조한 주된 목적은 소서행장의 일본군이 북진 중에 패퇴. 남하하여 농성하면서 살아남기 위한 것이었다.
<현지 안내문에서>
조명연합군은 사로병진작전(동로, 중로, 서로, 수로에서 펼쳐진 합동작전)의 총공세를 통해서 전쟁을 끝내고자 하였다. 왜교성 전투는 정유재란의 마지막을 장식한 최대.최후의 전투였다.
명나라 경리 양호가 제안한 작전계획에 의해 1598년 9월 20일경을 기하여 울산, 사천, 순천 등지에 주둔해 있었던 일본군을 일제히 공격했다. 이때 순전 왜교성의 소서행장 군을 공격목표로 했던 조명연합군은 육상의 서로군, 해상의 수로군이 합동으로 작전을 전개하였다. 이 전투는 1598년 11월 중순까지 크게 세차례 치러졌으며, 이순신과 진린의 조명연합수군과 조선 육군은 유정의 명나라 육군의 비협조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괄목할 만한 전과를 거두었다.
순천왜교성 전투는 정유재란기 최대 규모의 전쟁사로 기록되어 있다. 이 전투는 조명연합군만 약 5만명에 달하는 대구모의 병력이 동원되었고, 수많은 희생이 따랐으며, 임진왜란 7년 전쟁을 조선의 승리로 장식하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측면에서 그 역사적 가치는 매우 높게 평가되고 있다.
이 전투의 명칭은 조선 측에서는 '왜교전투' 또는 '왜교성 전투', 일본 측에서는 '순천성 전투'라고 명명하고 있다.
<위 안내문에서>
1.평화군상
작품명 :1597-기억
작품재료 : 브로즈
참여작가 : 김용준,최재덕, 심우삼, 이재덕
정유재란 최후의 격전지 순천에서 삶의 의지를 바탕으로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민초들의 모습과 전란의 아픈 기억을 안고 전쟁이 아닌 평화로 한 걸음 다가서는 어머니와 해맑은 어린아이들의 형상을 통해 자유와 함께 추모의 의미를 담아냄.
2.평화의 판석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평화의 판석은 중국, 일본과 전 국민들을 대상으로 정유재란의 역사에 대한 기억과 평화를 바라는 염원의 메시지를 모아 광장의 1,598개의 바닥돌에 각인함
3히스토리월
한.중.일 삼국의 전적지였던 순천왜성을 중심으로 벌어진 동아시아 3국의 역사적 사실을 년도 별로 굵직한 사건을 중심으로 담아내어 공간의 의미를 이해 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함
▣검단산성
카카오 내비에 <검단산성>을 입력하니 검단산성 북쪽의 성산리마을로( 경호건설 등이 있음) 안내한다. 혹시 싶어 들머리를 찾았으나 길이 없다. (검단산성을 방향잡아 오르다 좌측 갈림길 막다른 어느 개인 농장으로 길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주변에서 잠시 헤매다가 T맵으로 검단산성을 입력하니 이곳 고개로 안내한다.
맞은편에 (주) 하이런더리라는 <세탁공장>이 있다.
이 고개를 기준으로 북쪽 근거리에 순천농협 미곡종합처리장이 있고,
남쪽 고개 가까운 곳에 순천 시내버스 검단산성종점이 있다.
카카오 내비에는 <검단산성 버스종점.회차지> 등으로는 검색되지 않고, <세탁공장>을 입력하면 몇 안내 중 순천시 해룡면 성산리 63-1의 세탁공장을 선택하면 되겠다.
검단산성으로 오르는 임도(사륜구동 차량이라면 오를 수 있겠다.) 들머리에 검단산성 안내표지판이 있다. 거리는 300m로 표시되어있다.
들머리에 주차 공간이 없다.
세탁공장에 빈 공간이 많으나 금줄로 출입을 금지하고 있고, 그렇다고 버스 회차지 주차장에 주차할 수 도 없다.
버스 회차지 주차장의 축대 아래에 승용차 5대 정도 주차 공간과 맞은편 도로 갈림길 주변에 두어대 주차할 수 있어 이곳에 주차하면 된다.
검단산성 들머리 고개까지는 100m 가 채 안되는 거리이다.
입구로 들어서면 검단산성과 제2탐방로 갈림길이 있다.
검단산성길로 올라 나중 되돌아 올 때 제2탐방로로 내려왔다.
2 탐방로는 구 검단산성 가는 길인것 같으며 군데군데 과거에 깔은 야자매트가 있으나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길은 아니다.
검단산성 못미쳐 이정표 있는 곳에서 서로 만나게 된다.
넓은 길을 따라 오른다.
검단산성 자체의 높이는 높지않으나 길은 약간 경사를 이루고 있다.
순천 건단산성 /사적 제418호
준천시 해룡면 성산리 산 84번지 일대에 위치한다.
주민들은 검단산성이 있는 곳을 '안산', '검단산', '피봉산'으로 부른다,
검단산은 비교적 낮은 편이나, 순천의 구도심과 신도심 그리고 광양만이 한눈에 들어오는 조망이 좋은 곳이다.
지금까지 검단산성은 정유재란 때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이 신성리의 순천왜성(왜교성)에 머물고 있던 왜군과 팽팽하게 맞서면서 쌓은 산성으로 알려져 왔으나, 발굴조사 결과 삼국시대(백제)에 쌓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검단산의 7~8부 능선을 둘러싸고 있는 테뫼식 산성으로, 성벽은 내.외벽을 모두 쌓아 올린 협축식으로 축조되었고, 성벽의 총 길이는 430m이다. 성벽의 너비는 500~510cm로 거의 일정하나 남쪽 급경사 부분의 너비는 550cm 내외로 다른 부분에 비해 약간 넓다.
성문이 있던 자리 3곳, 건물이 있었던 자리 3곳, 큰 우물터 1곳, 저장구덩이 2곳이 조사되었다. 또한 기와류, 흙으로 만든 그릇, 나무로 만든 그릇, 돌로 만든 그릇 등 다양한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전남동부지역에서 처음 확인된 백제 때 산성으로 매우 중요하며, 특히 성곽안의 큰 우물에서 나무로 만든 그릇류와 가구가 확인되어 백제시대 산성과 생활상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와 함께 정유재란시기 조명 연합군의 지휘부가 주둔하였다는 역사적 의미를 갖고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팔각집수정
산성의 정상부에 자리잡고 있는 이 우물은 산성에서 수원확보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보여주고 있는 대표적인 시설이다,
구조는 석비례층을 지름 700cm, 깊이 270cm 규모의 평면 원형으로 파고 벽면 90cm 내외, 바닥은 90cm 정도 두께로 점토을 채워 집수정을 만들었다. 내부는 한변 160cm 내외, 너비 420cm 크기로 평면 8각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각 면의 바닥에는 길이 160cm 내외, 너비 20cm 내외, 두께 17cm 내외 크기의 나무를 서로 연결하여 넣었는데 조사당시에는 1단만 남아 있었다. 나무가 서로 만나는 끝부분은 원형으로 뚫고, 그기에 원형의 나무를 세워 고정시킨 것으로 보이는데 지름 10~15cm의 기둥구멍이 일부 확인되었다. 이 대형 우물에서 확인된 구조와 함께 백제시대 목조 건축술을 이해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바닥면에서는 뻘에 가까운 회색점토가 채워져 있는 것으로 보아 물과 관련된 시설로 판단된다. 그런데 자연적으로 솟아나는 물과 내리는 빗물을 저장하는 대형 우물과 달리 이 우물은 외부에서 가져온 물 또는 내리는 빗물을 저장하는 시설이다. 한편 바닥면에서는 기와조각과 도기조각을 재활용하여 만든 용도를 알 수 없는 많은 양의 원판형 토제품이 출토되었다.
8각 집수정 바로 옆에서 길이 480cm, 너비 320cm, 길이150cm 의 네모난 구덩이가 확인되었으나 용도는 알 수 없다.
<현지 안내문에서>
현 넓은 잔디밭으로 볼일 뿐 우물 등은 보이지 않는다.
남문지 인근이다.
문의 형태는 크게 성문의 입구 내.외 바닥이 수평을 이루는 평문식(平門式)과 어느 정도의 높이까지 성벽을 축조한 후 그 위에 성문을 만든 현문식(懸門式)으로 나눌수 있다.
검단산성의 성문은 모두 평문지식으로 판단된다.
문지부분의 체성 평면형태는 외벽이 타원형이고 내부에서 직각을 이룬 점이 특징이다.
이 남문지는 등선의 정상에 위치하고 있다. 문의 너비는 안쪽 440 cm, 바깥쪽 380cm이고 길이는 성의 너비와 동일한 500cm이다.
계단과 같은 시설은 확인되지 않았으나 외벽과 나란하게 1~2단의 石列(석렬)이 남아 있었고, 내벽과 동일한 선상에 1 단이 마련되어 있다. 문 입구 바로 아래에서 너비 30cm , 길이 60cm의 문기동구멍(門柱孔) 2개가 노출되었는데, 바닥면에는 납작한 돌(板石) 1매가 깔려있다. 이러한 시설로 보아 문이 설치되어 있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배수로가 성 내부의 동쪽에서 시작되어 문 입구의 서쪽으로 꺾여 내려와 'S'자형을 이루고 있다. 배수로의 바닥에는 납작한 돌이 깔려있고, 뚜껑돌(蓋石)일부가 남아 있다.
<현지 남문지 안내문에서>
동쪽 저만큼 순천왜성이 훤히 조망된다.
집수정
저장구덩이 / 貯藏孔
산성 정상부 평탄면 중앙에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검단산성에서 확인된 저장공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다.
생토면을 길이 700cm, 너비 600cm, 깊이 270cm 규모로 파고 그 내부에 점토를 채운 형태이다.
그런데 이 구덩이의 중간에 가로 400cm, 세로 250cm, 깊이 80cm 규모의 네모난 구덩이를 다시 팠으며 그 안에서 많은 양의 기와, 토기, 철기를 비롯한 유물과 돌들이 함께 묻혀 있었다.
바닥은 자연암반을 그대로 이용하거나 납작한 돌을 깔았다. 물과 관련된 시설물에서는 내부에서 뻘에 가까운 흙이 형성되어 있으나 이곳에서는 확인되지 않았다. 따라서 물과 관련된 시설보다는 다른 용도의 저장시설로 추정된다.
<현지 안내문에서>
다각형 건물지
현재는 4각만 남아있으나 그 형태로 보아 12각 건물지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중앙부를 중심으로 하여 총 3열의 초석이 원형으로 놓여있는데 200cm지점에 1열(초석간격 150cm 내외), 400 cm지점에 2열(초석간격 200cm 내외)의 초석이 놓여있다.
초석 크기는 60~90 × 70 ~100 ×15~20 cm이다. 3열 초석 바깥쪽으로는 깬돌(割石)과 석비레층인 생태면을 이용하여 기단을 형성하였다. 이 곳에서 많은 양의 기와가 출토되어 기와지붕을 한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였던 건물로 여겨진다.
지금까지 다각형 건물은 경기도 광주 이성산성과 충남 공주 공산성, 전남 무안 양장리 유적에서 조사된 예가 있으나 모두 통일신라시대의 건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검단산성에서 통일신라시대의 유믈이 전혀 출토되지 않고 있어 백제시대의 유물로 판단되어 주목된다. 이러한 다각형 건물은 그 형태가 특이하여 제사나 의례를 행하였던 건물로 추정하기도 한다,
<현지 안내문에서>
성벽
검단산성은 해발 135.4m의 산꼭대기를 둘러싼 퇴뫼식 산성으로 성의 둘레는 430m이다. 성벽은 깬돌(할석)로 내.외벽을 모두 쌓아 올린 협축식의 석성으로, 경사가 급한 지역을 포함한 전 구간을 돌로 쌓았다. 또 자연 암반이나 석비레층을 'ㄴ'자형으로 판 후 별도의 시설을 두지 않고 거의 수직에 가깝게 쌓이 올렸다. 경사가 완만한 부분은 1~2단, 경사가 심한 부분은 4~5단의 벽석 높이까지 생토면을 파고 성벽을 쌓아 올렸다.
<현지 안내문에서 발췌>
현 성을 육안으로 보면 석성이라기보다 토성에 가까워 보인다.
서쪽 아래로,
북문지
남문지, 서문지와 달리 능선 정상부에서 계곡쪽으로 약간 치우친 곳에 위치하고 있다. 외벽에서 타원형을 이루며 안으로 꺾여 그의 직선에 가깝게 뻗어 내벽과 연결된다. 서쪽 내벽은 폐쇄되면서 성돌이 훼손되어 그 형태를 찾기가 힘들다.
문의 너비는 안쪽 390cm, 바깥쪽 360cm이고 길이는 성의 너비와 동일한 510 cm이다.
계단이나 문기둥구멍과 같은 시설은 확인되지 않았다.
문지 가운데를 통과하는 배수로가 확인되었다.
서쪽 아랫쪽에 대형 우물이 있다.
이곳은 성 가운데 가장 낮은 서쪽지역으로 동쪽은 급경사를 이루고 있어 비가 내리면 물이 모이는 곳에 해당한다. 이 우물은 자연적으로 솟아나는 물과 내리는 빗물을 함께 저장하는 시설로 규모 길이 810~890 cm , 너비 400~480cm , 길이 350~500cm이다. 평면형태는 장타원형이고, 단면형태는 역사다리꼴이며, 길이 방향은 남-북이다. 벽은 다양한 크기의 돌들을 주로 가로방향으로 쌓아 올렸는데, 수형을 이루지 않고 면도 고르지 않아 정연하지 않은 편이다. 동쪽에 비해 서쪽 벽의 높이를 낮게 하여 물이 가득 차면 자연적으로 넘쳐 흐르도록 하였다.
<현지 안내문에서 발췌>
인근에 서문지가 있다.
대형 우물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외벽에서 타원형을 이루며 안으로 꺽여 그의 직선에 가깝게 뻗어 내벽과 연결된다. 문의 너비는 안쪽 340cm , 너비 240cm 이고, 길이는 성의 너비와 동일한 500cm 이다.
계단이나 문기둥구멍과 같은 시설은 확인되지 않았다.
3곳의 문지 가운데 경사도가 가장 심하다.
<현지 안내문에서>
우물터로 제법 내려왔으니 다시 올라가야 한다.
성의 상부로 되돌아 올라왔다.
검단산성을 둘러보고 되돌아 간다.
정상에서 쬐끔 내려오면 검단산성 이정표가 있다.
이곳 뒷편으로 소로가 있어 이 길을 따라 내려간다.
초반 제법 급경사를 이루지만 30~40m 내려오면 이내 길은 완만해 지고 넓어진다.
들머리로 내려왔다.
이곳 저곳 둘러보는데 약 50분 소요되었다.
▣ 행복한 밥상
순천드라마 촬영장 인근(후문쪽)에 몇 음식점이 있다.
이 집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메뉴
정어리, 오징어.우렁이. 고등어.제육복음 쌈밥과 정식류로 가볍게 한끼 때우는데는 좋다.
음식 맛도 양호하다.
▣순천 드라마 촬영장
순천시 조례동 22
순천 드라마 촬영장을 둘러본다.
소요시간은 약 1시간 정도이다.
입장료 어른 3,000원, 줄고생 2,000원, 초등학생 1,000유ㅗㄴ
경로 등은 무료입장이다.
중심은 80년대 서울 변두리,
우측(하단)엔 60년대 순천읍내를,
좌측 상부는 70년대 서울 봉천동 달동네를 재현했다.
서울변두리로 들어서, 60년대 순천읍부터 차근차근 둘러본다,
오늘은 4을 10일, 국회의원 선거일이다.
과거 대통령 출마자들의 포스트가 정겹다.
60년대 순천쪽을 둘러보고 80년대 서울변두리 지역으로 왔다.
달동네 가는 길
달동네.
순천 드라마 촬영장을 둘러고 나왔다.
순천 일정을 마무리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