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지역의 산

고성 박물관, 송산리 고분군, 고성 탈박물관

정헌의 티스토리 2024. 12. 19. 20:24

■고성 박물관, 송산리 고분군, 고성 탈박물관

 

청광리 박진사 고가를 시작으로 다연가에 들러 차 한잔 하고 고성읍내로 오니 오후 2시를 넘고있다.

점심시간이 한참 지났다. 고성에도 맛집이 있을 것인데 시간이 너무 늦어 점심을 때워 넘기기 바쁘다.

중식 후 고성박물관, 송산리 고분군, 고성탈박물관을 둘러본다. 수차례 고성을 지나가면서 외형만 보았지 내부는 들어가 보지 않은 곳이다.이외에도 고성읍내 몇 군데 더 둘러 볼 곳이 있는데 다음 기회로 미루어야 겠다,

○고성읍 :고성이씨선세유허지, 동외동 유적(패총), 석불사(교사리 삼존석불), 남산공원, 수남유수지 생태공원과 대독 누리길(갈모봉 자연휴양림 입구까지 이어짐), 고성생태학습관(고성읍 동쪽 근거리) 등이 있다.

 

▷탐방코스

부산식당 중식 - 고성박물관, 송산리 고분군 - 고성 탈박물관 /  (2024. 12. 18.)

 

▷탐방후에

 

◐부산식당

 

고성시장 인근으로 왔다.

 

어느지역이나 전통있는 한식집이 1~2곳은 있는데, 고성읍에는 전통이 있는 집을 찾으니 고깃집을 제외하고는 없다고 한다.

지금 시간이 오후 2시를 넘고 있어 점심시간을 놓친 셈이기도 하여 고성시장 입구의 부산식당에 들렀다.

 

 

 

 

부산식당 내부이다.

 

 

 

 

 

고성맛집으로 소개하기에는 좀 그렇지만 15가지 정도의 찬이 나오니 가성비 있는 집이다.

할머니들의 음식 솜씨여서 맛 또한 좋다.

 

 

 

◐고성박물관

 

고성박물관은 송산리 고분군과 인접해 있다.

주차료, 박물관 입장료 등은 없다.

 

 

 

 

 

먼저 박물관을 둘러본다,

 

 

 

 

 

박물관은 2층에 마련되어 있다.

 

 

 

 

 

성곽의 도시

고성은 3세기경부터 변진고자미동국, 고자국 등으로 불러었다. 고어에서 '자미', '자'는 '재'와 같은 것으로 성곽을 의미한다.  따라서 통일신라 경덕왕 16년(757) 고성군으로의 개명은 옛 명칭을 한자화하여 표기한 것으로 '대단한 성곽의 도시'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는 고려중기 고성의 이칭인 철성으로 불림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고성은 예로부터 중국과 일본을 잇는 남해안 교역의 중심지로 고성만을 통해 수많은 배들이 드나들었다. 이들이 고성에 들어오면서 처음 만나게 되는 것은 남산과 만림산에 위치한 성곽이다. 이들 성곽은 고성만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위치에 세워져 관문의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유사시 방어요새로 사용되었다. 이들 성곽의 흔적은 현재까지 남아있다.

 

 

 

 

 

소가야의 기마무사

고성 송학동고분군에서는 작은 철판을 세로로 이어 만든 갑옷(찰갑)과 투구가 발굴되었다. 투구(소찰주)에서는 금동장식의 흔적이 발견되어 당시 소가야 무사의 화려한 위용을 보여준다.

<이하 캡션의 대부분은 현지 박물관의 내용이다>

 

 

 

 

 

입구와 출구

 

 

 

 

 

인류문명의 시작

 

초기인류의 출현

인류의 시작은 기원전 약 400만년 전 오스트랄로피테구스의 출현과 함께 시작된다.

이후 호모 에렉투스, 호모 사피엔스를 거쳐 현생인류의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출현하게 된다.

이들 초기인류는 강가나 해안가의 동굴이나 막집을 짓고 살며 간단한 도구를 사용하여 수렵과 채집생활을 하였다.

 

 

 

 

마을을 이루고 살다

 

식량을 생산하는 단계부터 대규모로 마을을 이루거나, 외부로부터 방어하기 위한 시설을 갖춘 취락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마을은 원형 또는 장방형의 집을 짓고, 무덤, 논밭, 저장고 및 화덕시설 등을 갖추고 있다. 고성 상리면 무선리, 마암면 두호리, 거류면 신용리에서 청동기인들의 주거지가 확인되었다. 집은 일명 송국리형 주거지로 반지하식이며, 둥근 형태에 가운데 불을 피우는 시설이 있고,  내부에는 4개 기둥구멍이 동일한 간격으로 뚫려있는 형태이다.

 

 

 

 

고성 송학동 고분군, 발굴되다.

 

 

 

 

 

지배자를 묻고 애도하다.

공동체 전체의 생산을 주도하는 우두머리의 죽음과 관련된 장송의례나 고인돌의 축조는 성대하고 대규모로 이루어진다. 고인돌의 축조는 많은 인력과 시간이 필요하며 가장 화려하고 귀중한 물건이 부장된다.

 

 

 

 

 

바다를 기반으로 나라를 만들다.

원삼국시대

활발했던 청동기문화는 기원전후 무렵 고성읍을 중심으로 더욱 발전한다. 동외동유적에서 확인되는 집자리와 무덤, 패총, 의례 공간에서 다양한 유물과 함께 중국, 일본의 문물도 함께 출토된다. 이러한 문화양상은 고조선의 멸망에 따른 철제기술의 유입과 풍부한 철로 만든 철제품을 바탕으로 주변 나라와의 활발한 교류로 남해안에 위치한 고성지역이 주요 거점으로 등장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후 고성은 소가야 등으로 불리는 국가형성의 기틀이 된다.

 

고성 송천리 솔섬유적

동외동유적의 대외교류

고성 동외동 유적

 

 

 

 

 

해상교역의 중심지, 소가야

낙동강과 남해안을 중심으로 작은 나라를 형성한 변한의 제국들은 각자의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며 각각의 가야국으로 성장한다.

 

[삼국유사] 5가야조 "소가야는  지금 (고려초)의 고성이다. "

고고학적으로 볼 때 5세기 전반에는 '소가야양식'이라 부를 수 있는 지역 특색을 갖춘 토기들이 등장한다. 고성을 중심으로 한 소가야는 사천을 포함한 남강 수계로 연결된 진주. 산청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하였으며, 남해안의 해상교역로를 통해 중국, 백제, 왜와의 교역을 중개 하는 등 활발한 해상활동을 통한 교역의 중심지로 5~6세기 전성기를 맞이한다.

 

바다를 다스리던 왕이 잠들다, 고성 송학동 고분

나무로 관을 짜서 무덤을 만들다. 송학동 목곽묘

 

 

 

 

 

 

 

 

 

 

 

고성 송학동 1.2.3호분 무덤 배치

 

 

 

 

 

 

 

 

 

 

 

일제강점기 고성지역 고적조사

1.고적조사 목적과 시작

 임나일본부 실체를 규명하기 위해 식민지배 초기부터 고적조사의 주 타깃이 되었다.

2.고성에서의 고적조사

 

 

 

 

 

고성의 문화재

 

국가지정 문화재

보물(5) :고성 옥천사 청동북, 옥천사 지장보살도 및 시왕도, 옥천사 영산회 괘불도 및 함, 운흥사 괘불탱 및 궤,  운흥사 관음보살도

천연기념물(3) : 독수리, 덕명리 공룡과 새발자국 화석산지, 계승사 백악기 퇴적구조

국가무형문화재(2) : 고성오광대, 고성농요

 

국가등록문몬화재

등록 문화재(1) : 학동마을 옛 담장

 

도지정 문화재

유형문화재(26) : 옥천사 (자방루, 청동향로 및 청동시루, 동종, 대웅전, 소장품, 제석천도, 연대암 지장시왕도, 연대암 신중도, 칠성도, 나한전 목조보상좌상 및 나한상, 대웅전 석조삼불좌상 및 목조대좌, 명부전 불상, 청련암 목조관음보살좌상), 운흥사(대웅전, 목판, 목조삼세불좌상), 정씨동생화회문기, 양화리석조여래좌상(대무량사), 교사리 석조삼존불상(석불사),  고성향교, 송산리 승총명록, 보광사 목조대세지보살좌상,  장의사 석조관음반가상, 이방 박영장 불망비, 거산리 마애약사여래좌상.

 

 

 

 

독립운동가 백초월 스님을 아십니까?

 

백초월(1878~1944)은 경남 고성출신으로 14세에 영원사로 입산, 출가하였다. 영원사. 해인사에서 수행한 이후에는 영원사조실, 범어사 강사를 역임했다. 그는 민족불교 운동인 임제종 운동(1911)에 동참하였으며, 청주 용화사의 포교사로 1918년부터 근무하면서 민족 운동에 관심을 기울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불교계 민족대표인 한용운을 대신해 불교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동국대에 한국민단 본부를 만들어 청년승려를 규합, 사찰로부터 군자금을 모아 상해 임정과 만주 독립군에게 보냈다.

이와같은 항일운동으로 인해 일제에 피체되어 갖은 고문을 당하였다. 일제의 사슬에서 풀려난 그는 지속적인 항일온동을 전개하였다. 진관사. 동학사. 월정사. 봉원사 등의 강사를 역임하면서 승려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1939년 철도국의 노동자 박수남이 용산역에서 만주로 가는 군용열차에 '대한독립 만세'라는 낙서를 한 사건으로 체포되어 3년간 구속당했다. 출옥 후에도 임정에 군자금을 보내다가 체포, 옥고를 치르다 1944년 청주 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전시회를 열며,

 

가야고분군이 우리나라 유산으로는 16번째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세계유산위원회는 "주변국과 자율적이고, 수평적인 독특한 체계를 유지하며 동아시아 고대문명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가 된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OUV)가 인정된다."고 평가했습니다. 인류가 공동으로 보존해야 할 세계사적 가치로서 가야고분군이 제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그동안 가야는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 나아갔던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그늘에 가려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동아시아 고대 역사 속에서 가야는 하나의 단일 체계를 거부하고 여러 나라들이 병렬적으로 서로 관계를 맺으면서 함께 성장했던 나라였습니다. 이 속에서 자연스레 여러 가야는 독자성과 다원성을 유지하면서 찬란한 문명의 꽃을 피워 나갔습니다. 2023년 9월 가야고분군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는 이러한 가야사의 의미와 가치를 다시 새겨 볼 수 있게 했습니다.

이번에 세계유산으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은 가야고분군은 기원후 1~6세기 중엽에 걸쳐 영남과 호남 지역에 존재햤던 고분군 7곳을 묶은 연속유산입니다. 고성 송학동 고분군, 김해 대성동 고분군, 합천 옥전고분군, 함안 말이산 고분군,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고령 지산동 고분군,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 고분군으로 구성됩니다.

 

 

 

 

 

이곳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록기념관인 셈이다.

 

 

 

 

 

가야의 시작, 변한의 다양한 소국들

변한 12국에 관한 기록

 

 

 

 

 

삼국지 위서 동이전

삼국지 위서동이전에 기록된 변한 사회의 모습

변한 12국에 나타난 여러 가야

 

 

 

 

 

철의 왕국, 가야

 

 

 

 

 

 

 

 

 

 

 

가야 사람들, 고분을 만들다.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 고분군,  함안 말이산 고분군,  합천 옥전 고분군, 

김해 대성동 고분군,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고령 지산동 고분군, 고성 송학동 고분군.

 

 

 

 

 

각양각생의 가야 토기

 

 

 

 

 

고대 동아시아 국제 교역 도시, 소가야

 

 

 

 

 

"큰 새의 깃털을 장례용으로 썼는데, 그것은 죽은 사람이 새처럼 날아다니라는 뜻이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 중 변한 -

 

 

 

 

 

1층으로 내려왔다.

어린이 작품? 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은 북카페.

 

 

 

 

◐송학동 고분군

 

고성 송학동 고분군은 고성박물관과 인접하여 있다.

따라서 이곳에 주차후 박물관과 고분군을 같이 둘러보면 된다.

 

 

 

 

 

송학동 고분군은  5세기부터 가야연맹의 유력한 해상세력으로 떠오른 소가야 왕과 지배층의 무덤들이다. 남해안을 조망할 수 있는 고성분지 중심부와 3개의 구릉에 나누어 분포하고 있다.

 

 

 

 

 

5세기 후반에 축조된 1호분과 6세기 전반에 축조된 2.3호분은 구릉지의 정상부에 연접하고 있고, 그 좌우 능선에 봉토분 8기가 위치한다. 고분군은 백제나 일본에서 유행하던 봉분을 먼저 쌓고, 쌓은 봉분을 다시 파내어 석곽이나 석실을 축조한 분구묘방식으로 축조되었다.

 

 

 

 

 

1~3호분에서 출토된 부장품은 소가야의 대외관계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1호분에는 대가야토기와 마구, 일본토기, 2호분에는 백제, 일본 토기와 마구, 3호분에는 신라의 청동그릇과 마구가 부장되어 소가야가 가야연맹의 교역창구였음을 증명한다,

 

 

 

 

송학동 고분군은 백제 - 가야 - 왜를 연결하는 해양 교역의 창구였던 소가야의 특색이 가장 잘 드러나는 대표 고분군이다.

<이상 현지 안내문에서>

 

 

 

 

고분군 이곳 저곳으로 탐방로가 잘 조성되어 있다.

 

 

 

 

 

 

 

 

 

 

 

 

 

 

 

 

 

 

 

 

 

 

 

 

 

 

 

 

 

 

 

 

 

 

 

 

 

 

 

 

 

 

 

 

 

 

◐고성탈박물관

 

고성 탈박물관에 왔다.

 

 

 

 

 

앞쪽엔 작은 면적이지만 소나무숲이 좋다.

 

 

 

 

 

탈박물관 로비

입장료, 주차료 등은 없다.

 

 

 

 

 

상설전시관

 

 

 

 

 

우리나라 탈의 역사

 

상고시대 : 기원전 5천년쯤 신석기 시대에 이미 탈의 형태가 있었음을 밝혀졌다. 조개 껍질에 구멍을 뚫어 두개의 눈과 하나의 입을 표현한 것이다. 정확한 용도나 기능은 알 수 없지만 악귀를 쫒기 위해  사용한 탈로 보인다.(부산 동삼동 패총)

삼국시대 : 고구려,백제, 신라 모두에서 탈을 쓴 기록이나 흔적이 보인다. 신라의 처용탈은 원래 전염병을 옮기는 역신을 쫓는 부적의 기능을 하는 벽사탈이지만 이후 처용무에 사용되면서 예능적인 기능을 포함하게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연등회나 팔관회 같은 국가적인 큰 행사에서 처용무를 포함한 다양한 산대잡극이 연희되었다.

조선왕조는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하였지만 고려조에서와 같은 규모는 아니더라도 연등회와 팔관회 등의 의식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다. 다만 서서히 종교적 의미가 약화되면서 산대잡극과 나례쪽으로 흡수되는 과정을 겪는다. 산대나희는 풍요를 기리고 귀신을 쫓는 나례로서,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더 이상 관청의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된 '도감패'들은 뿔뿔이 흩어져 차츰 세력을 잃고 말았다. 그러한 와중에서도 산대놀이의 광대들은 그들의 주거지를 중심으로 여러 개의 놀이패를 조직하여 오늘날까지 그 맥을 전승해 내고 있다.

신라시대부터 시작된 처용무는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대표적인 탈춤이었다. 처음에는 한 사람이 붉은 탈과 검은 옷에 사모를 쓰고 춤추었으나 중국의 오방무의 영향을 받아 오방처용무로 확대되었다.

 

 

 

 

 

방상시는 주, 한 등 중국의 고대 나례(궁중과 민간에서 잡귀를 쫓기 위하여 배풀던 의식)의 대표적인 신이다. 눈이 4개인 것이 특징이며 동서남북 사방을 잘 볼 수 있다는 주술적 표현으로 조선 말엽까지 사용되었다.

임금의 행차나 중국 사신의 영접 등에서 악귀, 잡귀를 쫓는 뜻으로 사용되었으나 그 후 점차 쓰임이 장례 때 행렬의 맨 앞에서 춤을추며 잡귀를 물리치는 역할을 하였다. 광중(시신을 묻는 곳)에 도착해서는 네 귀퉁이를 찔러 악귀를 쫓았다. 사용한 탈은 무덤 근처에 묻거나 태워버려 장례식마다 새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산대놀이

 

서울과 그 인근의 경기도에서 전승되던 탈놀음을 산대놀이라 부르는데, 양주별산대놀이, 송파산대놀이 등이 현재도 전승되고 있다. 산대놀이라는 명칭은 조선 전기에 산대나례를 관장하기 위하하여 설치했던 나례도감이나 산대도감에서 유래된 명칭이다.

외국 사신을 맞을 때나 여타 국가적 행사를 치를 때 설치했었는데, 인조 이후로 궁중의 탈놀음이 폐지되면서 더 이상 국가의 공식행사로 연행되지 않았고, 대신 민간의 탈놀음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서낭 굿돌이 등등....

 

 

 

 

 

반구대 암각화

암각화란 선사인들이 자신의 바램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커다란 바위에 새긴 그림을 말하는데, 여기에도 육지동물과 바다고기, 사냥하는 장면 등 75종 200여점의 그림이 새겨져 있으며, 육지동물로는 호랑이, 멧돼지, 사슴 45점 등이 묘사되어 있다.

 

 

 

 

 

해서탈춤

황해도의 봉산탈춤, 은율탈춤, 강령탈춤 등을 보통 해서탈춤이라고 부른다. 남부지방의 탈놀음이 정월대보름에 행해지는 것과는 달리, 해서탈춤은 단오날을 중심으로 해서 연행되었으며, 5일장이 서는 거의 모든 장터에서 1년에 한 번씩 탈놀이를 초청해 놀았다고 한다. 여덟명의 목중(혹은 먹중)과 취발이라는 인물이 등장하는 것이 특징이며, 춤사위가 대단히 활달하고 남성적이다.

 

 

 

 

 

야류(들놀음)

낙동강 동쪽의 탈놀음을 야류, 혹은 들놀음이라고 부르는데, 부산의 동래야류, 수영야류가 전해진다. 정월대보름의 지신밟기와 줄다리기 풍속과 더불어 행해지는 것이 보통이다. 야류는  '말둑이 놀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양반을 비판하는 말뚝이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며, 이 외에 성속(聖俗)의 갈등, 반상(班常)의 갈등, 남녀의 갈등, 처첩의 갈등이 강하게 표출된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이 둘씩 서로 화해함으로써 보다 나은 세상을 건설하려는 의지를 드러낸다.

 

 

 

 

 

오광대

경남에서도 낙동강 서쪽 지역의 탈놀음을 오광대라고 부른다. 우리나라 전 지역 중 가장 많은 탈놀음이 성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현재까지도 고성오광대, 통영오광대, 가산오광대, 진주오광대, 김해(가락)오광대 등이 전해지고 있다. 오행사상의 영향을 받아 오방신장이 등장하여 다섯 방위의 악귀를 쫓고 복을 기원하는 춤을 추는 것이 특징이며,  말뚝이와 양반이 등장하여 양반을 비판하는 내용이 중심을 이룬다.

 

 

 

 

 

 

 

 

 

 

 

1970년대 종이탈

1974년경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종이탈들은 박갑준이 만든 탈들이다. 흰색의 한지를 얼굴 크기만큼 넓게 잘라 어려 겹 덧붙여 가볍고 튼튼하며, 탈의 눈구멍을 크게 뚫어 연희자가 탈을 쓰고 밖을 내다보기 편하게 만든 것이 특징이다. 석고로 만든 암틀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코 주변이 움푹 들어간 평면적인 탈들도 보인다. 탈의 표정이나 주름 등 세부적인 표현은 대부분 붓으로 그리는데, 선이 다담하면서도 소박하다.

 

 

 

 

 

 

 

 

 

 

1970년대 후반의 박탈

1977년에 허종복이 박으로 만든 이 탈들은 고성오광대놀이를 전수받은 계명대학교 민속문화연구반에서 공연을 할 때 사용하던 것이다.

고성오광대보존회에서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보존회에서 나무탈을 만들던 허종복이 제작한 탈로서, 같은 제작자라고 하더라도 재료의 변화에 따라 표현방법이 달라지는 양상을 살펴볼 수 있어서 중요하다.

40여 년 동안 놀이에 사용했던 탓에 수리한 흔적이 많이 남아있지만, 박탈의 특징인 자연스럽고 개성적인 얼굴 형태와 크기가 돋보인다.

 

 

 

 

 

1980년대의 종이탈

1987년경 허종복이 제작한 종이탈은 동일한 제작자가 나무탈과 박탈에 이어 종이탈을 제작한 드문 예이다.

뒷편을 검게 칠한 것이 특징이다. 현재 고성오광대의 탈을 제작하고 있는 이도열의 탈은 닥종이를 풀에 이겨 석고틀(암틀)에 떠낸 것이다.

타원형의 틀을 사용하기 때문에 얼굴의 운곽선이 그의 비슷하지만 틀에서 떠어난 다음 탈 표면에 종이죽을 다시 덧뭍이는 작업을 통하여 비교적 표정을 풍부하게 표현해낼 수 있다. 가볍고 잘 깨어지지 않는 장점이 있다.

 

 

 

 

 

고성 오광대

 

 

 

 

 

가산오광대

가산은 진주일대의 곡물을 거두어 배에 실어 한양으로 운송하던 조창이 있던 곳이다.

 

 

 

 

 

 

 

 

 

 

 

종이탈을 만드는 여러가지 방법

 

1.두꺼운 종이를 자르거나 접어서 만든다. 대체로 평면적이다. 가산오광대, 오방신장탈, 진주오광대탈 등이 있다.

2. 흙으로 탈 모양을 만든 아음 틀 위에 석고 등을 부어 탈모양을 음각으로 떠낸 후 그 위헤 한지를 여러겹 발라 형상을 떠낸다.  눈.코. 입을 뚫고 물감을 칠하여 완성한다. 북정사자탈이 대표적이다.

3.닥종이나 마분지, 신문지 등을 물에 불려 풀과 섞어서 만든 종이죽으로 탈을 만든다. 고성오광대탈은 이렇게 제작되는데 그 재질감으로 인햐 표면이 매끈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진주오광대 /경상남도무형문화재 제27호

 

오방신장, 문둥광대, 양반.말뚝이, 중광대, 할미.영감의 다섯 과장에 30개의 탈를 쓰는데 오방신장뿐만 아니라 다섯 문둥이도 오방색으로 채색한 것이 특징이다.

대부분의 탈은 종이탈인데 평평한 종이에 코만 세모꼴로 접어 덧붙이고 코를 중심으로 반을 접어 쓰기 때문에 좌우대칭을 이룬다. 바가지로 만드는 문둥이 탈은 형태의 과감한 변형과 자유로운 배치, 화려하면서도 조화로운 채색 등 조형적인 감각이 돋보여 현대적인 느낌마져 들게한다.

 

 

 

 

 

통영오광대 /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 6호

 

문둥탈, 풍자탈, 영노탈, 농창탈, 포수탈의 다섯 과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22개의 탈을 쓴다,

고성오광대와 상당히 비슷한 점을 가지면서도 양반들을 비판하는 정도가 심하며, 담보를 잡아먹은 사자를 다시 포수가 죽이는 내용이 톡특하다.

원래 탈을 나무로 만들었다고 하나 정확한 형태는 알 수 없고, 일제시대에 바가지로 만들다가 보관상의 어려움 때문에 현재는 오동나무로 만든다. 사자탈과 담보탈 등 크기가 큰 것은 대소쿠리를 쓴다. 전해져오는 1930년대의 탈들은 대부분 얼굴 모양이 역삼각형이고 표현이 회화적이며, 종이로 코를 덧붙이는 등 지금의 탈과는 다른 점이 많다.

 

 

 

 

 

 

 

 

 

 

 

수영야류와 동래야류

 

오광대와는 달리 낙동강 동쪽의 탈놀이는 들놀음  혹은 야류(野遊)라고 부른다. 부산의 수영과 동래 등에 전해지며 오광대놀이와 공통적인 특징을 가지면서도 이 지역만의 특징을 보여준다.

수영야류는 정월보름의 세시행사로 행해지던 것으로 탈놀이는 양반과장, 영노과장, 할미.영감과장, 사자무 순으로 이어진다.

오광대와 유사한 계통이면서도 부산문화권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는 동래야류는 정월 3~4일부터 시작되는 지신밟기와 보름날의 줄당기기로 시작된다. 해가 지면 화려한 길놀이를 하면서 탈놀이 장소로 옮겨 문둥이 마당, 양반 마당, 영노 마당, 할미.영감 마당 등으로 이어지는 한판 춤마당을 벌인다.

 

 

 

 

 

강릉 관노 가면극

원래는 관청의 노비들이 하던 탈놀이로서 강릉 단오제 때 하던 놀이이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검은 천을 뒤집어쓰고 해초와 곡식을 주렁주렁 단 두명의 장자마리와 양반광대, 소매각시, 시시딱딱이(2) 등 모두 6개의 탈을 쓴다. 장자마리 외에는 나무로 탈을 만든다. 한국 탈놀이 중 유일하게 대사가 없는 무언극이다.

 

제주입춘굿탈놀이

제주입춘굿은 신년에 관민이 합동으로 풍농을 기원하던 의식인데 이 입춘굿의 마지막이 탈놀이다. 오방신장.오방양반.오방장군 등을 남성으로 설정한 다른 지역 탈놀이와는 다르게 오방각시가 등장하면서 탈놀이가 시작된다. 여기서 여자는 생산의 터전이라는 의미로 오방각시의 춤은 밭을 기름지게 하는 주술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 농부도 소탈을 쓴 소를 얼르면서 밭을 가는 춤을 추는 등 한해의 농사가 잘 되기를 기원하는 내용이다.

 

 

 

 

 

양주별산대놀이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2호

 

원래 4월초파일과 5월 단오를 중심으로 연희되었으며, 궁중에서 연희되던 본산대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어 일찍부터 주목받았다. 

등장인물들이 풍부하고 예술성도 뛰어나 높이 평가받고 있다, 먼저 놀이판을 정화시키는 상좌, 옴중, 목중이 등장한다. 연잎과 눈끔쩍이는 각각 하늘과 땅을 상징하는 신성한 존재로서 양주별산대탈의 특징적인 등장인물이다.  파계승, 취발이, 양반, 미얄의 이야기 등은 경남지방의 탈놀이의 등장인물과 유사한 면이 많지만, 신주부, 왜장녀, 포도부장, 신장수 탈 등에서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던 양주의 도시적인 면모를 짐작할 수 있다.

탈은 모두 22점으로, 바가지로 얼굴 모양을 만들고 송피로 코와 눈썹 등을 만들어 붙인 후 한지로 마무리하고 채색한다.

 

 

 

 

 

은율탈춤 /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61호

 

황해도 은율지방에 전해져오는 탈춤으로, 다른 황해도의 탈춤들과 마찬가지로 북쪽 지역의 큰 명절인 단오에 2일~3일을 계속해서 놀았다고 한다.

네 명이 들어가는 흰색 갈기의 사자는 한국 사자탈 중에서 가장 크다. 사자에 이어 상좌. 팔목중들이 등장하여 놀이판을 정화 시킨 후, 노쇠한 양반과 기운찬 말뚝이, 젊은 새맥시와 이를 탐하는 노승과 취발이, 미얄할미와 영감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탈은 모두 개이며 종이를 겹겹이 발라 모양을 만드는데, 말뚝이, 취발이 등 얼굴에 큰 혹이 어러 개  나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다른 방으로 이동하면 고성오광대와 함께한 날들이란 주제로 기획전이 열리고 있다.

 

 

 

 

 

학교에 돌아간 황토는 이영래가 탈을 만들고, 의상도 자체 제작하여 고성오광대를 연습한 후 1977년 5월 11일 전국 대학 중 첫 번째로 고성오광대를 공연하게 되었습니다. 공연은 매우 성공적이었으며 고성까지 가서 모셔온 선생님들은 공연을 보고 크게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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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명대학교 민문화연구반 활동 상황

 

 

 

 

 

한국 전통예술 연구회 활동 상황

 

 

 

 

 

 

 

 

 

 

 

전수의 영향과 확산

고성오광대를 배워간 사람들은 학교로 돌아가 고성 오광대 공연을 하기도 하고 고성 오광대의 춤과 탈을 활용하서 마당극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