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지역의 산

창녕천 주변과 송현동. 교동 고분길

정헌의 티스토리 2024. 12. 28. 22:08

■창녕천 주변과 송현동 교동 고분길

 

창녕 화왕산 자하곡 계곡에서 발원하여 창녕읍내를 가로지르는 조그만 하천을 창녕천이라 한다.

창녕군에서 이 하천변을 정비하여 산책길을 내었다. 창녕천변 주변 이곳 저곳과 송현동, 교동 고분군을 연결하면 한 코스가 될 것 같아 찾아본다. 읍내 하천변 길 주변은 큰 감흥이 없으나 고분으로 이어진 길은 색다른 느낌이어서 소소한 하루를 보내기에는 손색이 없다.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창녕읍 근교 몇 군데와 영산면 일원을 둘러볼까 했는데 시간이 여의치 않았다.

 

▷탐방코스 

조산마을 공영주차장(송고저수지 인근) - 창녕천 주변 / 술정리 서삼층석탑, 술정리 동삼층석탑, 진양하씨고택, 만옥정공원, 진흥왕척경비원터 - 양반 청국장 중식 - 송현동 고분군과 마애여래좌상 - 목마산성 - 교동고분군 2구역, 창녕박물관 - 교동고분군 1구역, 창녕문화공원 -명덕지 - 석빙고 - 조산마을공영주차장(중식시간, 박물관 관람시간 포함 등 천천히 약 5시간 20분  /  2024. 12. 25)

 

▷안내도

 

일반적인 지도를 보면 윗쪽이 북쪽인데 이 안내도는 북쪽이 아랫쪽으로 표시되어 있다. 안내도 좌,우를 뒤집어 그렸으면 더 알아보기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탐방후에 

 

조산마을 공영주차장에 주차한다.

창녕천변으로 난 전체의 길과 주변을 둘러보며 자하곡 입구까지 간 다음, 양반청국장(자하곡 입구)에서  중식을 시간을 갖고 송현동, 교동 지역 고분을 둘러 볼 것이다.

 

 

 

 

 

저만큼 송고저수지, (일부 지도에 송곳저수지로 표시된 곳도 있다)

송고저수지변에 공원이나 주차장이 조성되어 있지는 않은 것 같다.

 

 

 

 

 

화왕산 자하곡에서 발원한 창녕천이 읍내를 거쳐 송고저수지로  흘러든다.

이곳은 송고저수지에서 창녕읍내쪽으로의 첫번째 다리목으로 자하곡 입구까지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중간 창녕시외버스 주차장 인근의 일부 복개구간 제외)

 

 

 

 

 

겨울철이어서 꽃과 화초는 볼 수 없으나 첫 느낌은 하천변은 깨끗이 정비되어 있다.

흐르는 물은 생활오수인지 아님 다른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혼탁하고 그 찌꺼기가 주변에 달라붙어 있어 시궁창 옆을 걷는 느낌이다.

 

 

 

 

 

하천에서 냄새도 나는 듯 하기도 하고, 주변 창녕읍내를 둘러볼 겸 하천변 도로위로 오르니 오리정 운동장이 있다.

 

 

 

 

 

오리정 운동장 앞쪽에  소공원이 있고 이곳에 술정리 서삼층석탑이 있다.

 

 

 

 

 

술장리 서삼층석탑 / 보물

석탑은 부처의 유골을 모신 조형물로 실제 유골이 없는 경우에도 상징적으로 부처를 모신 곳으로 여겨진다.

석탑이 자리한 사찰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며, 술청리 동 삼층석탑(국보 제34호)과는 한 사찰 안에 있었으나 쌍탑이 아닌 별개의 탑이다. 술정리에 탑이 두 개 남아 있어 이를 구분하려고 동탑과 서탑으로 구분하여 이름을 붙인 것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창녕 술정리 서 삼층석탑은 이중 바닥돌, 삼층의 몸돌과 지붕돌, 머리 장식부로 이루어져 있다.  위아래층 바닥돌의 옆면을 기둥 모양으로 장식하지 않고 위층 바닥돌 각 면에 2구의 안상(眼象 / 불꽃과 연꽃을 표현한 것으로 보이는 무늬)을 조각한 것이 특징이다. 이와 같은 방식은 경주 무장사지 삼층석탑과 같은 방법으로 경주의 석탑 기술이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2009년 4월부터 7월까지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의 발굴조사 과정에서 탑을 장식했던 것으로 보이는 금동 풍경 한 점이 출토되었으며, 석탑이 처음부터 이곳에 세워졌음이 확인되었다.

<현지 안내문에서>

 

 

 

 

술정리 서 삼층석탑 공원에서 다시 창녕천변으로 되돌아 오면 창녕시외버스터미널이 있다.

이 터미널 주변에 창녕천을 복개하여 주차장으로 만들었다.

 

 

 

 

 

이곳 창녕천을 복개한 주변엔 제법 중심가 다운 곳도 있다.

 

또한 자하곡쪽에서 내려오는 하천과 교동쪽에서 내려오는 생활하수가 이 복개천 주변에서 합류되는 듯 싶다.

자하곡에서 내려오는 물은 아주 깨끗한데 교동쪽에서 내려오는 생활하수가 이곳 어디쯤에서 뒤섞여 아랫쪽의 물은 더러워 졌나보다.

 

 

 

 

관조할인마트

창녕시외버스터미널에서 이곳 관조할인마트 주변까지 직선거리로 약 100m쯤 창녕천은 복개되어 있어 복개천은 주차장, 도로 등으로 이용되고 있다.

 

 

 

 

 

관조 할인마트 옆에서  창녕천은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수량이 많지는 않지만 물은 아주 깨끗하다.

 

 

 

 

 

창녕천은 협곡?의 형태로 주변보다 지형이 낮아 아기자기한 맛은 있지만 좌우 축대로 인해 주변을 조망이 폐쇄되어 있어 단조롭고 답답한 느낌이 들 수 있다.

따라서 천변으로 걷다가 다시 도로를 따르기도 한다.

 

 

 

 

 

 

 

 

 

 

 

창녕천은 창녕읍내를 관통하고 있기 때문에 작은 다리가 여럿 있다.

 

 

 

 

 

술정리 동 삼층석탑이 있는 곳이다.

넓은 공터가 잔디밭 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술정리 동 삼층석탑

술정리동삼층석탑은 결구(結構/각 부재들을 얽거나 짜서 만든 모양새) 수법과 각 부분의 조각 수법이 매우 정교하고 안정적인 비율을 보이는 전형적인 전성기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이다. 1965년에 석탑을 해체 수리하는 과정에서 동으로 만든 유리잔 모양의 사리용기, 유리로 만든 황색 사리병, 사리 7과, 향편, 작은 유리구슬 등이 발견되었다.

석탑이 자리한 사찰에 대해서는 확실한 기록이 없어 인근의 인양사비에 언급된 인양사(仁陽寺) 혹은 대곡사(大谷寺)로 추정되었으나 2008년 10월부터 2009년 7월까지 국립가야문화재연수소에서 진행한 발굴 조사 과정에서 '송림사(松林寺)'라고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어 송림사의 옛터로 밝혀졌다.

이 석탑은 당시 수도인 경주 왕경에 세워진 석탑과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조각 수법이 정교하고 안정감이 있어 왕경 내 장인을 직접 파견하여 세운 것으로 보인다. 8세기 무렵 경주를 벗어나 왕경 외곽 지역으로 석탑 문화가 전파되는 과정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가치있는 문화유산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탑의 상륜부가 없으니 뭔가 부족한 느낌이다.

 

 

 

 

 

창녕 진양하씨 고택 / 국가민속문화유산

 

창녕 진양하씨 고택은 진양 하씨가 대를 이어 살아온 조선시대 일반 살림집이다. 진양 하씨 고택은 안채와 사랑채, 대문간채로 이루어져 있는 초가집으로 모두 남쪽을 향해 있다.

안채는 여성 공간으로, 사랑채는 손님을 맞이하는 남성 공간으로, 대문 옆에 있는 대문간채는 주로 아랫사람이 생활하는 공간으로 사용하였다.

이 중 안채가 문화재로 지정되었는데, 안채는 영조 36년(1760)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채는 남부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앞면 4칸, 옆면 1칸의 '一'자 모양의 홑집(한 채만으로 이루어진 구조가 간단한 집)으로 왼쪽부터 작은 방, 마루, 큰방, 부엌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붕은 볏집보다 수명이 긴 억새풀을 엮어서 얹었다. 진양 하씨 고택은 남부지방 일반 살림집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진양하씨 고택 옆의 절이다.

진양하씨고택도, 이곳 절도 모두 대문이 닫혀있어 들어가 볼 수 없었다.

하씨고택은 맨 안쪽에 안채로 초가집이 보이고, 앞쪽으로 기와의 사랑채(대문에서 볼 때는 본채같은 느낌이다.), 앞쪽에 문간채가 있는 셈이다.

 

 

 

 

 

하씨고가와 3층석탑 주변을 둘러보고 하천변을 따라 자하곡 쪽으로 오른다.

 

 

 

 

 

동명이발

입구의 다양한 글로 인하여 특이한 이발관이다.

 

이별이 하도 설워 잔들고 슬피우니 어느듯 술다하고 임마져 가는구나. 꽃피고 새가우는 봄날은 어이할까. / 두향

술잘먹고 돈잘쓰면 금수강산이요, 술못먹고 돈 못쓰면 적막강산이라. / 주건달

인연

인생을 영위함에 있어서 필연이든 우연이든 서로의 연분에 따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따라서 불가에서 말하는 일천만겁 ...........

 

 

 

 

 

조금 지나 오르면 창녕 상설시장이 있다.

 

 

 

 

 

시장이 길게 형성되어 있으나 들어가 보지는 않았다.

 

 

 

 

 

비사벌문화제전회

아랫층은 화장실이다.

 

 

 

 

 

옛날 빨래터

동네 아낙네들의 정겨운 수다가 담긴 곳.

 

 

 

 

창녕 선교교회

 

 

 

 

 

주변

 

 

 

 

 

지나온 곳을 되돌아 본다.

 

 

 

 

 

 

 

 

 

 

 

만옥정 공원 입구

특별히 만옥정 공원이라는 이정표는 보지 못한 것 같다.

 

만옥정 공원은 송현동, 교동 고분군과 창녕석빙고 등을 둘러보고 난 뒤에 들런 곳이나 이곳을 지나치면서 바로 둘러보는 것이 일정상 좋을 것 같아서 먼저 소개한다.

당일은 중식시간이 늦어져 중식후 둘러본다는게 코스를 조절하는 바람에 실제로는 나중에 둘러본 곳이다.

 

 

 

 

공연장

 

 

 

 

 

창녕 진흥왕 척경비 / 국보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는 진흥왕이 창녕 지역을 신라의 영역으로 편입하면서 세운 비다. 1914년에 발견되어 1924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겼으며, 최초로 발견된 자리에는 표지석을 세워두웠다.

단단한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높이는 가장 높은 부분이 약 3m이고, 가낭 낮는 부분이 1.15m이다. 비석의 왼쪽 윗부분이 오른쪽 윗부분보다 낮으므로 두 행마다 한 자씩 줄여 새겼다. 비문은 27행으로 한 행의 글자 수는 일정하지 않으며 전체 643자 가운데 현재 400자 정도가 판독된 상태이다.

비문의 첫 머리에 '신사년(辛巳年) 2월 1일 세웠다'는 내용이 있어 진흥왕 22년 (5612)에 세워 졌음을 알 수 있다. 앞부분은 심하게 닳아 있어 판독이 어렵지만 뒷 부분은 비교적 선명하게 남아 있다.

진흥왕 대에 세워진 북한산비, 황초령비, 마운령비는 첫머리에 모두 '순수관령(巡狩管境/돌 순, 사냥 수, 대롱 관,지경 경)'이라는 표현이 있어 순수비라고 부르지만, 이 비석은 이러한 표현이 없어 척경비라고 부른다. 

신라6부의 명칭과 중앙 및 지방의 중요 관직 명칭, 지방 유력자의 직명 등이 기록되어 있어 6세기 신라의 정치, 사회, 제도, 군사적 실상을 밝히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현지 안내문에서>

 

 

 

 

 

辛巳年 2월 1일에 세웠다.

과인은 어려서 왕위에 올라 정사를 보필하는 신하에게 맡겼다. ...일의 끝에 ....사방으로 ...널리...이익을 취하고 수풀을 제거하여 ...토지와 강토와 산림은 ...대등과 군주, 당주, 도사와 외촌주는 살핀다. ..고로...해주의 전답 **와 산림과 하천은 ...비록...그 나머지 사소한 일들은 ...상대등과 고나말전, 법선*인과 상...이로써....몸이 벌을 받는다.

.................

 

 

 

창녕지구 전승비

 

 

 

 

 

창녕 척화비 /경상남도 문화유산자료

 

창녕척화비는1871년(고종8) 서양의 침략을 경계하기 위하여 전국 각지에 세운 비석중 하나이다.

비석 앞면엔 서양 오랑캐가 침입해 오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고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洋夷侵犯 非戰卽和 主和賣國)이라는 글과 함께 작은 글자로 우리 만년의 자손들에게 알린다(戒我萬年子孫), 병인년(1886.고종3)에 짓고 신미년(1871년 고종8)에 세운다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척화비는 1882년(고종19) 임오군란 때 대원군이 청나라로 납치된 후 일본 정부의 요청으로 대부분 철거되었지만, 창녕과 대구, 부산, 서울, 함안 등지에는 그대로 남아 있다. 창녕 척회비는 현재 만옥정 공원내에 있다. 높이 약1.23m, 폭 46cm,, 두께는 약 20cm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창녕 퇴천리 삼층석탑

창녕 퇴천리 삼층 석탑은 통일신라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의 석탑은 퇴천리 일대 민가에 무너져 있던 것을 1969년 10월에 수습하여 지금의 자리인 만옥정 공원으로 이전하여 복원하였다. 탑이 있었던 곳은 절터였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는 흔적을 찾기 어려우며, 석탑과 관련된 절의 기록도 남아 있지 않아 세워진 시기나 역사를 알 수 없다.

 

 

 

 

 

석탑은 이중 받침돌에 삼층의 몸돌과 지붕돌로 이루어져 있고, 머리 장식부는 결실 되었다. 탑의 위아래층 면석(받침돌의 네 면을 감싸고 있는 벽체 부분) 기단이 2:1로 균형이 잡혀있고, 지붕돌 받침의 수가 4단으로 줄어든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부분적으로 파손되었으나 9세기 전반의 특징을 잘 보여 주는 석탑으로 술정리 동서 삼층석탑에 이어 창녕지역 석탑의 변천 과정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탑으로 평가된다.

<현지 안내문에서>

 

 

 

 

 

창녕 현감 비군

창녕현을 관할하는 지방관의 선정비를 모은 것으로 관찰사 7기, 현감 23기, 군수3기, 미상 1기로 모두 34기가 있으며 이외에도 선정비를 모을 때 같이 모은 것으로 보이는 나무아미타불비석 1기가 있다.

선정비는 지방관의 공덕을 칭송하는 문자를 새긴 비석으로 유애비(遺愛碑), 거사비(去思碑), 청덕비(淸德碑)라고도 한다. 수령이 선정을 베풀거나, 청백리인 경우 수령의 정책으로 고을 사람들이 은혜를 입었다는 공론이 형성되면 왕의 칙령으로 허가를 받은 다음에야 비로서 선정비를 세울 수 있었다. 비문에는 수령의 이름과 수령의 공적을 4구 16자 구절로 요약하여 새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비석을 세운 연도인 간지를 적는다.

선정비는 고려시대 승평부사 최석의 팔마비가 최초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 개국 후 어느 시기에 건립이 금지되었다가 성종대 이후 다시 세우기 시작하였는데, 특히  17세기 이후 많이 건립되었다.

<현지 안내문에서>

 

 

 

 

 

창녕객사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

창녕객사는 창녕읍에 있는 객사이다. 객사는 관아의 부속건물 중 하나로 다른 곳에서 온 벼슬아치나 외국의 사신을 대접하여 묵게하던 숙소이자 임금을 상징하는 위패를 모시던 곳이다.

창녕 객사는 언제 세워졌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없으나 건축 양식으로 보아 조선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일제 강점기인 1924년에 창녕군 술정리로 옮겼다가 1988년에 지금의 위치로 다시 옮겨왔다.

객사 건물은 가운데 주 건물을 두고 좌우에 날개집이 있는 일반적인 객사의 형태가 아니라 정면 3칸, 옆면 3칸의 단층 맞배지붕 건물로 되어 있다.  마루바닥이 없고 높이 2.85m의 나무기둥 14개로 지붕을 받치고 있는데 서까래 이음 부분을 비롯하여 건물 전체에 쇠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만옥정 공원 입구에서 하쳔변 도로를 따라 쬐끔 오르면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원위치 100m를 알리는 이정표가 있다.

 

 

 

 

 

척경비 원위치로 찾아가는 길이 좁고 꼬불꼬불하여 적의 방향을 잡아 가야한다.

 

 

 

 

 

창녕 신라진흥왕 척경비(국보 제33호)는 561년 진흥왕이 여러 신료들과 함께 창녕에서 국가적 중대사를 논의하고 그것을 기념하여 세운 비이다. 1914년 일본인 토리이 류조가 창녕의 고적을 조사할 때 보통학교장 하시모토 료조를 통해 고비석(古碑石)이 있다는 사실을 듣고 조선총독부에 조사. 보고함으로써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조선총독부는  1917년  조선고적사조사사업의 일환으로 비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였고, 조사 결과는 <대정6년도 고적조사보고서>에 수록하였다. 비는 1924년 현재의 만옥정공원으로 이전되었다.

<현지 안내문에서>

 

 

 

 

진흥왕척경비원위치

 

 

 

 

주변은 완전히 정비되어 있지는 않다.

 

 

 

 

 

되돌아 나와 하천변을 따라 오르면 창녕여자고등학교가 보인다.

 

 

 

 

 

창녕여고 직전 도로변 좌측의 이 건물은 ?

 

 

 

 

 

주변을 잘 정비하면 근대 건물로 볼 거리가 될 것 같은데 방치되어 있다.

 

 

 

 

 

창녕천 수변길은 창녕여고가 있는 곳에서 끝난다.

 

 

 

 

 

양반청국장집에 왔다.

 

이곳은 화왕산 등산로의 들머리인 자하곡 입구로 공영주차장 아랫쪽이다.

옆에 한우전문집 <창녕대가>가 있고, 가까운 거리에 <도천진짜순대>집이 있으므로 마음내키는 집을 찾아가면 되겠다.

 

 

 

 

 

장어정식을 시켰다.(18,000원)

장어를 빼고 청국장을 시켜도 부족함이 없을 듯 싶다.

음식맛이 깔끔하여 부족한 느낌은 없다.

 

 

 

 

 

주방쪽

 

 

 

 

 

분위기는 대충 이렇다.

 

 

 

 

 

중식 후 송현동 고분군을 둘러본다.

자하곡 입구에 바로 들머리가 있으므로 위치 찿는데 어려움은 없다.

 

 

 

 

 

입구에 창화사가 있다.

 

 

 

 

 

대불보전

2층이 법당이다.

 

 

 

 

 

법당이 화려하다.

 

 

 

 

 

창화사 2층 법당에서 올려다본 송현리 고분군

 

 

 

 

 

창화사를 지나 오르면 이내 우측편에 송현동 마애여래좌상이 있다.

 

 

 

 

 

마에여래좌상은 이 전각안에 모셔져 있다.

 

 

 

 

 

창녕 송현동 마애여래좌상 / 보물

 

일반적인 자연석 바위의 앞면을 깍아서 튀어나오게 조각한 것이 특징으로, 바위 자체를 부처의 몸으로 만들었다.

불상의 머리에는 머리카락이 없으며, 머리 위에는 큼직한 육계(肉髻 /상투 계, 인도 사람들이 머리카락을 올려 묶던 상투에서 유래했으며, 부처의 크고 높은 지혜를 상징함)가 있다. 전체적인 자세와 얼굴, 옷의 모양은 경주 석굴암 석굴의 본존불과 비슷하지만, 옷의 주름이 사실적이지 않고 가슴이 평평한 것으로 보아 불교의 힘이 약해지던 통일산라 후기의 불상 양식을 따랐음을 알 수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고분군 상부쪽으로 오른다.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은 화왕산 서쪽 구릉일대에 조성된 고대 비화가야 왕과 지배층의 무덤이다. 고분군의 범위는 창녕읍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구릉 경사면에서 서쪽으로 뻗은 가지능선까지 이어진다.

고분군에는 봉분이 남아있는 무덤 120여기, 봉분이 남아있지 않은 무덤 180여 기 등 모두 300여기가 넘는 무덤이 있다. 고분군은 무덤의 분포에 따라 크게 4개의 지구로 나누어지며, 각 지구에는 대형 무덤을 둘러싸고 중소형 무덤이 밀집 분포하는 독특한 형태를 보인다. 무덤의 구조는 대부분 구덩식돌덧널무덤(수혈식석곽묘)과 앞트기식돌방무덤(횡구식석실묘)이다. 하나의 봉분안에 하나의 덧널이 있는 형태이며, 별도의 딸린 덧널이나 순장덧널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앞트기식돌방무덤은 고분군의 대표적인 무덤양식이다. 가야 고유의 무덤 구조인 구덩식돌덧널무덤에 입구를 설치한 특이한 형태로 비화가야만의 독특한 무덤형태로 알려져 있다. 봉분은 만들어진 위치에 따라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고 공간을 구획하여 쌓아 올렸는데, 이는 철저한 계획에 의해 무덤이 만들어졌음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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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 안내문에서>

 

 

 

 

건너편 자하곡 주차장

주변 차량이 많이 보이는 집이 식당인가 싶에 귀가 후 찾아보니 <산과구름아래>라는 카페이다.

 

 

 

 

 

송현리 고분군 일원을 둘러보고 목마산성길을 거쳐 교동 고분군으로 가고자 한다면  아랫쪽에서 부터 고분주변으로 난 길을 따라 이곳 저곳 둘러보며 윗쪽으로 오르는 것이 낫다.

왜냐하면 목마산성을 거쳐 교동지구로 가는 길이 이곳 송현동 고분의 좌측 상부에 있기 때문이다.

 

 

 

 

이곳 고분군은 송현동 1, 2지구, 교동1, 2지구 등으로 크게 4구역으로 나누는데 송현동 2지구는 어디인지 모르겠다.

 

 

 

 

 

저곳,

고분의 상부쪽이다.

 

 

 

 

 

이곳 고분 상부에서 윗쪽으로 탐방로가 보이는데 무슨길인지 모르겠다.

윗쪽에 목마산성이 있어 그곳으로 이어질 듯 하는데 길의 상태나 주변 경관이 어떤지 궁금하다.

 

 

 

 

 

지나 올라온 곳

 

 

 

 

 

큰 봉분 주변으로 아주 작은 봉분도 있다.

 

 

 

 

 

맨 위쪽에서 내려다 본다.

 

 

 

 

 

 

 

 

 

 

 

송현동1지구 15호분

송현동 15호분은 표형분(瓢形墳, 박 표, 두개의 봉분이 표지박처럼 서로 이어 붙어있는 무덤양식)이다. 16호분을 먼저 만든 후에 봉분을 이어 붙여 15호분을 만들었다.

이곳 15호분에서는 순장한 사람의 뼈가 여러 구 확인되었는데 그중 완전한 형태를 갖춘 사람의 뼈 한 구가 '가야사람 복원연구'를 통해 16세 여성 '송현이'로 복원되었다.

 

 

 

 

 

아랫쪽으로 내려왔다.

 

 

 

 

 

 

 

 

 

 

 

목마산성쪽을 거쳐 교동지구로 가기위해 고분 좌측 상부로 올라간다.

이곳 송현동지구엔 26기의 봉분이 모여있으며, 봉문이 남아있지 않은 무덤이 10기 이상 확인되었다.

 

 

 

 

 

송현동 6,7호 고분

이 고분도 표형분이다.

6호분은 돌방 벽면 전체에 붉은색과 짙은 갈색의 안료를 발랐고 7호분에는 나무배의 아래 판을 재활용한 일본 산 녹나무 관이 출토되었다. 출토된 장신구류는 경주 황남대총이나 천마총 등 신라 고분의 출토품과 유사하고, 표형분의 형태도 신라와 유사하여 비화가야와 신라의 교류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무덤이다.

 

 

 

 

 

송현동 고분군 상부쪽에 교동방향으로 가는 길이 있다.

 

 

 

 

 

이 길은 목마산성 일부를 지나 교동지구로 내려가는 코스이다.

 

 

 

 

 

창녕 목마산성

 

창녕 목마산성은 목마산을 감싸고 있는 포곡식 산성이다. 목마산성은 둘레가 1,980m에 이른다. 북쪽과 동쪽 성벽의 일부 구간은 원래 모습이 남아 있으며 계곡에 가까은 남쪽 벽에서 남문 터가 확인되었다. 성벽은 신라의 일반적인 성벽 쌓기 기술인 '바른층 쌓기(돌의 면 높이를 일정하게 하여 가로줄눈이 일적선이 되도록 쌓는 방법) 방식이 적용되었다.

목마산성은 6세기 중반 신라시대에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진흥왕 540~576년 재위이 555년에 창녕에 하주(下州)를 설치하고, 561년에 신라 진흥왕 척경비를 세우는 과정에서 목마산성을 쌓았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목마산성은 고대 창녕의 지배 세력이 비화가야에서 신라로 바뀌는 과정을 잘 보여주는 유적으로 주변의 화왕산성과 교동 송현동 고분군,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목마산성에서 있는 듯 없는 듯 한동안 성곽을 따른다,

 

 

 

 

 

일부 제법 경사길이 있지만 거리가 길지는 않다.

성곽길을 따라 오르면 중간 교동지구로 내려가는 갈림길이 있다.

 

 

 

 

 

겨울철 참나무 잎들이 쌓여 미끄럽고 일부 구간은 제법 급경사의 길을 내려오니 완만해 진다.

이후 교동지구로 가기위해 짧지만 윗쪽으로 다시 올라야 한다. 이 길은 조금 완만하게 만들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여행자의 입장에서 볼 때 경사가 심하여 많이 선호하지는 않을 길이다.

 

 

 

 

 

교동 2지구 상부로 왔다,

 

 

 

 

 

고분길을 따라 내려간다.

 

 

 

 

 

 

 

 

 

 

 

중간 도로가 관통되는 양쪽의 넓은 고분군이 교동2지구이다.

 

 

 

 

 

우측으로 저~쪽,

고분 몇 기가 오똑하니 보이는 곳이 교동1지구이다.

 

 

 

 

 

박물관을 둘러보기 위해 이 길을 따라 내려왔다.

 

 

 

 

 

계성고분 이전 복원관

계성고분은 창녕 계성면에 위치한 가야고분군이다. 영취산 남서쪽 능선 끝 낮은 구릉에 위치하고 있으며, 구릉 정상부에 10여기의 고총(거대한 지배계층 무덤)이 열을 이루고 그 중심으로 작은 무덤들이 모여 총 260여 기의 봉토분이 분포한다.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이 창녕읍을 비롯한 창녕 북부의 최대 고분군이라면 계성 고분군은 창녕 남부 최대 고분군으로 창녕지역에 존재한 가야 수장층의 묘역이다.  4세기부터 7세기까지 지속해서 축조되어 비화가야의 성립, 발전과 쇠퇴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으로 가치를 인정받아 2019년 국가지정문화유산 사적으로 지정됐다.

<현지 안내문에서>

 

 

 

 

 

 

 

 

 

 

창녕박물관을 둘러본다.

 

 

 

 

 

송현동 15호 고분에서 주인공과 함께 4명의 순장자가 확인되었고, 가장 안쪽에 있던 인골은 도굴의 피해가 적어 잘 보존되어 있었다. 국립가야문화유산연구소 중심의 여러 연구기관이 함께 복원해 낸 이 인골의 주인공이 1,500년 전 주인을 따라 순장된 비화가야 16세 소녀 송현이이다.

송현이는 분석 결과, 생전에 빈혈을 의심해 볼 수 있는 흔적과 무릎 연골의 손상이 발견되어 낮은 신분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고 안내한다.

 

 

 

 

 

 

 

 

 

 

 

 

박물관엔 여럿 볼 거리가 있지만 사진 량이 많아 이쯤에서 줄인다.

 

 

 

 

 

이곳은 송현이 특별전이 열리는 곳이다.

옆에 어린이 박물관, 놀이터가 있다.

 

 

 

 

 

창녕박물관을 둘러보고 길 건너편 지구(같은 교동 2지구이다)를 둘러본다,

 

 

 

 

 

이곳도 상당한 고분군이 형성되어 있다.

 

 

 

 

 

교동 1지구로 간다,

 

 

 

 

 

가는 길이 평탄하니 걷기 좋다.

 

 

 

 

 

교동 1지구로 왔다.

이곳에 명덕저수지(명덕수변생태공원) 쪽으로 내려서는 길이 있다.

 

 

 

 

 

교동 1지구는 고분군의 서쪽에 뻗어있는 구릉 꼭대기의 대형 무덤을 중심으로 그 무덤을 둘러싸고 있는 중소형 무덤과 이곳에서 남서쪽으로 이어지는 가지능선을 따라 흩어져 있는 소형 무덤을 포함한다. 이곳에서 봉분이 남아있는 무덤은 22기, 봉분이 남아 있지 않은 무덤은 60여기 이상 확인된다.

현재 교동 1지구에는 7호분을 중심으로 14기의 봉분이 정비. 복원되어 있다. 7호분은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내에서 가장 큰 무덤이며, 그보다 작은 대.중.소형 무덤이 주위를 둘러싼 형태로 밀집되어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시계 반대방향으로 둘러본다.

 

 

 

 

 

북쪽 지능선 상으로도 몇 기 고분이 복원되어 있다.

 

 

 

 

 

고분 뒷쪽으로 돌아서니 능선상으로 산책로가 좋다.

 

 

 

 

 

이 산책로을 따라본다.

 

 

 

 

 

이 능선 주변도 외형상으로 고분이 복원되어 있는 곳은 아니지만 고분이 있을런지도 모르겠다.

 

 

 

 

 

문화공원 부지

이곳도 교동 1지구에 포함되어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2004년과 2019년 발굴조사에서 봉분 없는 앞트기식돌방무덤 16기가 확인되었다고 한다.

 

 

 

 

 

저만큼 창녕 향교가 보인다.

 

 

 

 

 

중간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6.25, 월남 참전 기념비

뒷쪽 능선을 따라내려가면 사직단이 있는데 시간적 여유도 적고, 앞쪽 명덕지쪽이 더 궁금하여 명덕지쪽으로 내려선다.

 

 

 

 

 

명덕지로 내려서는 길

 

 

 

 

 

명덕저수지.

 

 

 

 

 

명덕지를 한바퀴 돌 수 있도록 데크로된 탐방로가 개설되어 있다.

오늘 시간이 늦어 창녕향교, 명덕지 둘레길 등 주변은 둘러보지 않았다.

 

 

 

 

 

창녕 석빙고에 왔다.

 

 

 

 

 

석빙고는 봄여름에 사용할 얼음을 저장하기 위해 만든 창고로 겨울에 강이나 하천에서 깨끗한 얼음을 떼어 내 저장하였다. 창녕 석빙고는 창녕현 관아에서 만든 것으로, 입구에 서 있는 석빙고비를 통해 조선 영조 때인 1742년에 창녕 현감이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석빙고를 만들 때는 땅을 판 다음 돌로 벽을 쌓고, 바닥은 앞을 높이고 뒤를 낮게 하여 경사를 만들어 물이 잘 빠지도록 했다. 천장은 기다란 돌을 무지개 모양으로 쌓고 바람이 잘 통하도록 돌을 맞추어 지붕을 얹고 구멍을 냈다.

석빙고는 차가운 얼음을 일 년 내내 서늘한 기온에서 보관하기 위해 배수와 환기가 가능한 구조를 생각해 낸 선조들의 지혜가 돋보이는 문화유산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만옥정 공원으로 가는 길에 만난 창녕교회

 

 

 

 

 

담.

 

 

 

 

 

 

 

 

 

 

만옥정 공원으로 왔다.

만옥정 공원은 편의상 앞쪽으로 편집하였다.

 

 

 

 

 

창녕천변을 따라 출발지 주차장으로 되돌아 간다.

 

 

 

 

 

 

 

 

 

 

 

볶을래? 구울래?

외관으로 보니 맛있을 것 같다.

이 인근 어디쯤 당간지주가 있는 곳인데 오늘은 통과해야 겠다.

 

 

 

 

 

조산마을 공영 주차장에 도착하여 오늘 일정을 마친다.

11시 40분경 이곳을 출발하여 지금 시간이 오후 5시 경이니 점심시간 포함하여 5시간 20분 소요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