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지역의 산

합천 화양리 소나무, 박소 신도비, 육우당, 묵와고택

정헌의 티스토리 2025. 1. 14. 23:50

■합천 화양리 소나무, 박소 신도비, 육우당, 묵와고택

 

합천군 북쪽 지역에 가야면과 야로면이 있고 대표적인 관광지로는 가야산과 해인사를 들 수 있다. 합천 서북쪽에 봉산면, 묘산면이 위치한다. 이 지역엔 특별한 관광지는 없으나 묘산면 화양리의 소나무, 박소 신도비, 육우당, 묵와고택, 영사재 등을 들 수 있으며, 봉산면에서는 압곡리의 봉서정과 도촌별묘, 면소재지내  벚나무 가로수, 계산리의 성조각예술원  정도를 들 수 있겠다.

합천 화양리소나무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수세나 크기에 있어 감탄할 만하다. 화양리 본 마을에 육우당, 목와고택이 있고, 도로변에 박소 신도비가 있어 같이 둘러보면 되겠다. 또한 이 지역은 거창과 가까운 곳이므로 거창 남부와 연계하여 코스를 잡아도 좋을 듯 하다.

 

 

▷탐방코스

합천 화양리 소나무- 박소 신도비 - 육우당 - 묵와고택    /  2025.  1.  11.

 

▷탐방후에 

◐합천 화양리 소나무 (천년기념물)

 

합천 묘산면 화양리 나곡마을에 왔다.

화양리에서 나곡마을로 오르는 길은 알부 급 커브도 있고 나곡마을로 오를 수록 길이 좁아지나 승용차가 다니는데  별 지장은 없다.

 

 

 

 

 

나곡마을은 10여호 전후쯤 될려나?

주변 지형상 지대가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 입구에서 소나무가 내려다 보인다.

 

 

 

 

 

크기도 대단하고 수세도 좋다.

 

 

 

 

 

합천 화양리 소나무 / 천연기념물

 

해발 500m정도에 위치한 화양리 나곡마을의 논 가운데에 있으며, 수령 500년(지정일 1982년 기준) 정도로 추정된다. 나무의 크기는 높이 17.7m, 둘레 6.15m로, 가지는 3m높이에서 갈라져 다시 아래로 쳐지듯 자랐는데 그 모습이 매우 독특하고 아름답다. 나무껍질이 거북이 등처럼 갈라져 있고 가지가 용처럼 생겼다고 하여 구룡목(龜龍木)으로도 불린다.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를 마을을 지켜 주는 당산나무로 섬기며 오랫동안 보호해 왔다.연안 김씨의 후손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광해군 5년(1613)에 연흥부원군 김제남이 영창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한다는 모함을 받고 역적으로 몰려 삼족이 멸하게 되자 김제남의 6촌뻘 되는 사람이 이곳으로 도망을 와서 이 나무 밑에 초가를 짓고 살았다고 한다.

<현지 안내문에서>

 

 

 

 

 

 

 

 

 

 

 

 

 

 

 

 

 

 

 

 

 

 

 

 

 

 

 

 

 

 

 

 

 

 

 

 

 

 

 

 

 

 

 

 

 

 

 

나무 껍질도 특이하다.

 

 

 

 

 

 

 

 

 

 

 

 

 

 

 

 

 

 

 

 

 

 

 

 

 

 

 

 

 

나곡마을의 다른 쪽이다.

 

 

 

 

◐합천 박소 신도비

 

나곡마을에서 도로를 따라 내려오면 화양머을 직전 도로변에 있어 자연스레 지나치는 곳이다.

박소 신도비외  앞쪽? 인근에 반남박씨 묘지군, 아랫쪽에 사당?이 신축되어 있다.

 

 

 

 

 

합쳔 박소 신도비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산

 

신도비는 종2품 이상의 벼슬을 지낸 사람의 행적을 기록하여 무덤 앞이나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우는 비석이다. 합천 박소 신도비는 조선 중종 때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인 야천 박소의 신도비로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조선 선조 23년(1590)에 세웠다.

박소는 김굉필의 제자로 중종 14년(1519)에 문과에 급제한 후 수찬, 사서, 필선 등을 지냈으며 신진 사대부들과 함께 왕도 정치를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사간으로 있을 때 훈구 세력들에 의해 파직되어 외가가 있는 합천으로 내려와 학문에 전념하였다. 죽은 후에는 그 공이 인정되어 영의정의 벼슬이 내려졌으며, 문장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비석의 몸돌은 높이 205cm, 폭 93cm. 두께 30cm이다. 비문은 사암 박순이 지었고, 글씨는 석봉 한호가 썼다. 1993년에 반남 박씨 문중에서 비각을 세워 비석을 보호하고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앞쪽 양지바른 곳에 일련의 묘소들을 볼 수 있다.

 

 

 

 

◐육우당

 

화양리 본 마을에서 살짝 벗어나 작은 마을을 이루는 곳에 육우당과 목와고택이 있다.

 

 

 

 

 

합천 육우당 /경상남도 문화유산자료

 

합천 육우당은 파평 윤씨의 종손인 윤석우가 세운 가문의 재실로, 묵와 윤우의 아들인 윤병구, 윤병래, 윤병은, 윤병주, 윤병호, 윤병민 여섯 형제의 우애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1960년대까지는 서당으로 사용되었는데, 한학자인 춘산 이상학과 성암 윤석희, 그리고 파리 장서 운동에 참여한 애국지사 윤중수가 이곳에서 학문을 배웠다.

육우당은 앞면 5칸, 옆면 3칸 규모의 건물로, 세련된 익공(목조 건축물의 기둥 위에 새 날개처럼 뻗어 나온 부재, 전통 건축 양식 중 하나이며 장식적인 효과가 있다.)과 활주(추녀 밑을 받친 보조 기둥)가 돋보이고 아랫면을 곡면으로 다듬은 창방(공포가 있는 목조 건물의 기둥머리에서 기둥과 기둥을 연결해 주는 가로재)을 사용하였다. 거물의 구조와 세부적인 기법에서 조선후기 건축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육우당(육우당), 돈목재(돈목재), 정양헌(정양헌)의 편액은 독립운동가이자 서예가인 우당 유창환이 쓴 것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돈목재 편액

 

 

 

 

 

육우당

 

 

 

 

 

정양헌

 

 

 

 

 

연못인 것 같다.

 

 

 

 

 

육우당 뒷편에 사당이 있다.

 

 

 

 

 

사당은 세덕사로 표시되어 있다.

 

 

 

 

 

 

 

 

 

 

 

앞뜰에 희양목 노거수 한 그루가 힘겹게 버티고 있다.

 

 

 

 

 

◐합천 묵와고택

 

합천 묵와고택 / 국가민속 문화유산

 

조선 선조 때 선전관을 지낸 윤사성이 지었다고 전해지며 윤사성의 10대손이자 파리장서 사건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인 만송 윤중수의 생가이기도 하다. 이 고택은 가야산에서 뻗어내린 산속에 위치해 있으며 처음 지을 당시에는 집터가 600평에 달할 정도로 넓었다고 한다.

현재는 솟을대문에 들어서면 경내에 안채, 사랑채, 행랑채, 문간채, 사당, 헛간 등의 건물이 짜임새있게 배치되어 있고, 남여의 생활 공간과 동선을 엄격하게 구분하고 있다. 대문채는 5칸 규모이고 그 안쪽 마당 왼편에 높게 자리잡은 사랑채가 있다. 사랑채에는 4칸 크기의 나루(내루)가 앞으로 나와 있고 그 동편으로 중랑채가 이어진다. 중랑채의 중문을 지나면 안마당이 나오고 그곳에는 높은 댓돌 위에 자리 잡은 안채가 있다. 사랑채는 지붕 벽면이 'ㅅ'자형인 맞배지붕 건물이지만 내루 앞부분은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안채는 'ㄴ'모양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로서 대청이 6칸으로 넓게 조성되어 있다.

사랑채의 높은 누각식 마루는 조선시대 양반 주택의 권의와 품격을 잘 표현하고 있다. 또한 기둥과 대들보 등 나무로 된 구조물의 견고한 짜임과 세련된 형식은 조선 중기 양반집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가옥 인근에는 윤우의 여섯 아들의 우해를 기리기 위해 세운 재실인 육우당이 았다.

<현지 안내문에서>

 

 

 

 

 

대문이 굳게 닫혀있어 내부로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솟을 대문(서쪽) 맞은편에 또다른 대문(동쪽)이 있다. 앞쪽에 주차공간까지 충분히 있으며 주인은 주로 동쪽문을 이용하는 것 같다.

당일은 동문도 잠겨있어 집 내부로 들어가 볼 수 없었다.

 

 

 

 

 

목와고택 앞쪽(서쪽 문 앞쪽)에 그럴듯한 한옥이 있어 뭔가? 하고 올라보았다.

 

 

 

 

 

어느 개인의 주택인듯 싶다.

 

 

 

 

 

이집 마당에서 내려다 본 묵와 고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