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안 수선루, 구산서원, 강정리 근대건축, 보흥사, 탑사
■진안 수선루, 구산서원, 강정리 영계서원, 완월루, 영산사, 근대건축, 보흥사(강정리5층석탑), 마이산 탑사
오전 일정으로 진안 백운면 소재 고원화목원과 영모정을 둘러보고 마령면소재지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오후 일정으로 마령면 소재지의 몇 정자를 둘러본다. 수선루는 절벽 아래의 동굴?속에 지어진 정자로 완전히 개방하고 있는 보물이다. 입구에 구산서원이 있어 같이 둘러보면 된다. 되돌아 강정리로 가는 도로변에 쌍벽루가 있어 잠시 둘러보면 되며, 강정리 근대건축은 은근 찾기 어렵다. 마을 입구에서 마땅한 근대건축물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마을 입구에서 볼 때 정면에 보이는 고택을 찾은 곳이 영계서원, 완월루,영산사가 나란히 있다. 이를 둘러보고 카카오 지로도 방향잡아 근대근축물을 찾았다. 대문이 닫혀있어 담 너머로 본다 광대봉 등산로 입구로도 이용되는 보흥사는 대웅전 앞 마당의 5층 석탑이 볼거리이나 마을에서 계곡으로 난 도로를 걸어도 좋겠다.
당초 백운면에 소재하고 있는 운교리삼각주퇴적층과 반취정, 쌍계정을 둘러볼 생각이었으나 눈으로 인해 찾아보지 않았고 입구만 확인하였기에 약간 시간적 여유가 있어 당초 계획에 없었던 탑사를 둘러보았다.
▷일정
진안 마령면 강정리 수선루와 구산서원 - (쌍벽루 / 차창으로 보고 지나침) - 영계서원, 완월루, 영산사, 강정리 근대건축물 - 보흥사(강정리 5층 석탑) - 마이산 탑사
▷탐방후에
◐구산서원, 수선루
마령면 강정리에 위치한 구산서원은 수선루 들머리에 위치하고 있어 자연스래 둘러보게 된다.
내비에 수선루를 입력하면 입구까지 안내한다.
구산서원, 구산재 현판을 달고있다,
일번적인 서원이나 향교의 명륜당과는 달리 가운데 대청마루가 없고 방으로 되어 있다.
구산서원은 단종 때 예조판서를 지낸 송보산을 배향하기 위해 1828년 (순조28)에 창건되었으며 1868년(고종5)에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
1949년 다시 설단되어 봉사하다가 1967년에 중건되었고 진안 유림의 발의로 김문기(세종 시대 이조판서, 1456년 단종 복위 가담)와 월계 송림이 추향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구산사
구산사는 1828년 (순조 28)에 퇴휴재 송보산을 제향하기 위해 창건되었다가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1949년 다시 설단되어 봉향 되었고 1967년에 이르러 중건되었으며, 1969년에 진안 유림의 발의로 백촌 김문기와 월계 송림이 추향되었다.
퇴휴재 송보산은 김종직의 문인이며, 세종조에 등과하여 단종조에 예조판서를 지내다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후학 양성에 힘썼다.
백촌 김문기는 1426년(세종8)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판서를 지냈고, 1456년 단종 복위에 가담하여 이개 등과 함께 살해된 인물이며 월계 송림은 효행으로 그 명성이 높았다.
구산사는 전면 3칸 측면 2칸의 기와 맞배지붕으로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으며 매년 음력 2월 18일에 제향한다.
<현지 안내문에서>
정면에서 바라본 구산사
사면에서 바라본 구산사이다.
구산서원을 둘러보고 수선사로 간다.
입구에서 약 100m의 거리에 있으며 완만한 길이어서 힘든곳은 아니다.
여기는 진안.무자 국가지질 공원, 지질명소 마이산 수선루 입니다.
"마이산 표면에 보이는커다란 구멍(타포니)들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마이산은 주로 역암(자갈이나 진흙, 모래 등이 섞여 굳어진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랜 시간 동안 물에 의해 역암 내 결합물질인 석회질이 녹아 나오면서 결합력이 약해지고, 역암 속의 물이 얼고 부피가 커지면서 균열을 만든다. 역암이 품고있던 크고 작은 바위들이 떨어져 나와 구멍을 만들고 현재와 같은 타포니가 만들어졌다.
이렇게 만들어진 타포니 속에 우리 선조들은 정자를 만들어 이용함으로서 생활속에 지질자원을 활용하고 있었다. 수선루는 연안 송씨 4형제(진유, 명유, 철유, 서유)가 선조의 덕을 기리고 심신을 단련하기 위해 1586년(숙종 12년) 타포니를 이용해서 만들어진 2층 누각으로 지질과 문화가 잘 어울리는 지질명소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절묘한 곳에 정자를 지었다.
수선루 (睡仙樓, 잘 수 / 보물)
수선루는 조선 죽종 때인 1686년에 연안 송씨 4형제인 송진유, 송명유, 송철유, 송서유가 아버지와 아버지의 친구들이 이곳에서 바둑도 두고 시도 읊으면 신선같이 늙지 않기를 기원하면서 건립한 2층 누정(누각과 정자를 아울러 이름)이다.
수선루라는 이름은 목사 최계옹이 '아들 4형제가 80세가 되어서도 이곳에서 풍류를 즐기는 모습이 마치 옛날 중국의 4신선의 기상과 같다.'고 하였 붙였다고 한다. 수선루는 조선 고종 때인 1884년과 1884년과 1888년에 송석노와 송병선이 수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누정 건축은 산 중턱 바위굴 속에 자리잡고 있는데 뒤로는 산이 병풍처럼 두르고 앞에는 섬진강 상휴천이 굽이돌아 흐르고 있으며 앞산과 들판이 펼쳐져 수려한 경관을 자랑한다.
<현지 안내문에서>
보물이어서 겉만 보고 가야하나? 했는데 문을 잠궈두지 않았다.
절벽 아래의 굴은 정자(수선루)가 들어서고 뒷편에 이정도 공간이 남는다.
정자에 오를 수 도 있다.
정자 옆쪽으로도 이정도 여유 공간이 있다.
정자에 올라본다.
조그만 방과 마루로 구성되어 있다.
송씨 수선루
수선루 앞 전경이다.
◐영계서원, 완월루, 영산사, 강정리 근대근축
강정리 근대 건축물을 찾아 마을 입구로 들어서니 근대 건축물이 보이지 않는다.
안내표지판이 보이는 곳으로 오니 영계서원이 있다.
영계서원(靈溪書院)
영계서원은 1649년(인조 270에 설립되어 명륜교육을 기본으로 하는 교학과 선조에 대한 향사(향사,제사)를 지내왔던 곳으로, 충익공 최쟝, 충경공 이정란, 쌍첨 이인현, 규암 전계종을 매년 제향한다.
충익공 최양은 고려말 충신으로 1871년 유허비가 세워졌고 1900년에 비각이 건립되었으며, 규암 전계종은 시강원습독과 임란 시에 의거하여 준절함에 인조조에 증직되었다.
1867년(고종6년)에 서월 훼철령에 의해 철폐되었다가 1870년 유허비가 세워졌고. 1900년에 사시 설단 되었으며, 지금의 마령초등학교 전신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이곳은 영계서당은 아닌것 같고, 무슨 사당같다.
옆쪽에 완월루
완월루 /진안군 마령면 강정리 236 / 진안군 향토문화유산 유형 제15호)
완월루는 천안 전씨 문중에서 건립한 사당이다. 건축 연대는 1900년경으로 추정된다. 완월이란 아름다운 달을 완성한다는 뜻으로, 누정의 규모는 정면3칸, 측면 2칸이다.
평상시에는 인근의 이름난 한학자를 모셔다가 학생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는 서당으로 활용하다가 제향 시에는 재사(齋舍)의 용도로 사용하였다. 지금도 강학이나 제사의 기는을 유지해 오고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영산사
고려말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이라 하여 원강정에 은거한 전문식을 모신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맛배지붕 사당이다.
1862년(철종 13)에 설립되었으나 1868년(고종 5) 서월철폐령으로 헐렸다가 1973년에 다시 지었다.
현재 전문식을 비롯한 전극례와 손자인 전자온, 죽헌 전자양 등 4사람이 신위를 모시고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카카오 지도를 검색하여 근대건축물을 찾아왔다.
교회 첨탑이 이정표가 될 수 있겠다.
대문은 잠겨있어 마당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
◐ 보흥사
보흥사에 왔다.
대웅전과 앞쪽의 5층석탑
재정이 빈약하여 이정도로 지었나 보다.
대웅전 내부이다.
보흥사 연혁
보흥사 창건시기는 신라 문무왕 8년(760~800년)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1,200여년 전 당시 광덕산 아래 북진동은 지형이 험준하고 소나무가 울창한 첩첩산중 지역이다 보니 인근 주민들도 찾아오기 힘들었던 장소에 절터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아방 또는 방아라는 처사기 기도를 위해 전국의 명산을 찾아다니던 중 북수 절터에 자리를 잡고 기도를 하면서 절 뒤 15분 거리에 있는 황궁바위굴 기도원에서 필랑과 동요와 함께 3년 수행을 한 후 크게 깨우친 다음 왕궁바위굴로 돌아와 방아선골이라 이름하였다고 합니다.
이후 17년간 대웅전을 비롯하여 극락전, 오방란전, 요사채, 객실, 범종과 범종각, 북과 북각, 운판과 목어조성 등 각종 불사가 진행되었고, 고려시대 당시 5층 석가탑이 조성될 때에는 정읍 원평에서 수십 명 인원이 동원되어 운반되었다고 합니다.
월랑진안 팔명당 중의 하나인 북수효종인 종소리는 우렁차고 멀리까지 울려 펴져서 북진동으로 명성을 떨쳤다고 합니다.
당시 강정마을 주민의 80%가 홍씨였는데 그 기세로 인해 큰 절의 건물들은 거의 다 소각되고 이후에 탑과 종만 남은 빈터로 500년의 세월이 흐르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소각되기 전 대웅전 수리 중 발견된 상량문에 보흥사라는 기록이 있었기에 광덕사를 보흥사라 이름하게 되었습니다.
<현지 안내문에서>
대웅전 뒷편이다.
과거 이곳을 들머리로 하여 광덕산과 마이산 능선을 산행한 기억이 난다.
강정리 오층석탑 / 전북 유형문화유산
강정리5층석탑은 1층 기단(바닥돌부)위에 5층의 탑신(몸돌부)을 갖춘 석탑이다. 넓은 기단 위에 두툼한 돌을 놓고 그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렸는데 기단과 1층 탑신에는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다. 1층탑신에 비해 2층 이상은 탑신은 높이가 급격하게 줄어둘며, 옥개석(지붕돌)은 모두 4단의 받침이 갖추어져 있고 네 귀퉁이가 살짝 들려 있다. 상륜부는 꽃무의와 띠로 장식한 노반(머리장식 받침)과 둥근 복발(엎어 놓은 그릇 모양 장식)이 남아 있다. 넓은 기단부와 높은 1층 탑신, 2층 탑신부터 급격하게 높이가 줄어들고 옥개 받침이 4단으로 줄어든 점 등 양식적 환화로 보아 고려 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탑은 현재 보흥사 안에 있는데, 원래 이 터는 신라 따 아선선사가 창건한 광덕사 터였다고 한다. 고려 시대에 보흥사로 사창명이 바뀌었고, 조선 중기에 폐사된 후 1914년 북수사가 세워졌으나 1948년 수리하는 과정에서 1448년에 지은 상량문이 발견되어 다시 보흥사로 바뀌었다.
<현지 안내문에서>
보흥사를 뒤로 한다.
◐마이산 탑사
시간적 여유가 있어 탑사를 둘러보기로 한다.
남부주차장을 들머리로 하였다.
상가를 지나,
저수지
매표소
입장료는 어른 3,000원
그래서 살짝 물어봤다. 다른 곳은 문화재관람료가 폐지되었는데 이곳에서는 징수하느냐고?
이곳은 개인 사유지로 개인사찰이라 한다. 그래서 국가에서 지원을 받지 못한다고.......
마이산탑 /전북 기념물
마이산탑은 마이산 역암으로 이루어진 절벽을 배경으로 마이산 탑사 경내에 쌓여있는 80여 기의 돌탑들을 가리킨다. 돌탑들의 건립 내력은 분명하지 않고 전설로만 전해져 온다. 조선 후기 이갑룡 처사가 마이산 은수사에 수도하던 중 꿈에 신의 계시를 받고 이곳으로 이주하여 30여년동안 혼자서 돌을 쌓아서 만들었다고 한다. 이갑룡처사는 98세로 세상을 따날 때까지 정성과 기도를 올리며 천지음양의 이치와 팔진도법에 따라 탑을 쌓았다고 전한다.
각 돌탑은 크고 작은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하여 서로 맞물리게 쌓은 것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위로 올라가게 하였고, 상부는 비슷한 크기의 돌들을 일렬로 올렸다.
탑의 높이는 1m 이하부터 15m까지이며, 탑의 크기도 제각각이다. 주요 돌탑에는 천지탑, 오방탑, 약사탑, 월광탑, 일광탑, 중앙탑 등의 이름이 붙어 있다. 각 탑의 이름에는 나름대로의 의미화 역할이 부여되어 있다고 한다,
천지탑은 마이산에서 기가 가장 강한 곳에 세워져 있다. 천지탑은 이갑룡처사가 1930년경 3년 고행끝에 완성한 2기의 탑으로, 오른쪽에 있는 탑이 양탑, 왼쪽에 있는 탑이 음탑이다. 천지탑의 하부는 자연석을 원뿔형으로 쌓아 올렸고, 상부는 비슷한 크기의 넓적한 자연석을 포개 쌓았다. 주변에는 여러 개의 작은 탑들이 천지탑을 호위하듯 빙 둘러 있다. 천지탑에서 기도를 하면 한 가지 소원은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한다.
미인산의 특이한 임석 및 아름다운 자연과 어우러진 톨탑들은 마이산 볼거리 중에서도 으뜸으로 평가된다.
<현지 안내문에서>
겨울철이어서 금줄을 쳐 놓은 곳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