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지역의 산

안동 군자마을, 도산서원

정헌의 티스토리 2025. 5. 9. 21:23

■안동 군자마을, 도산서원

 

친구들 모임입니다. 오후 4시에 안동 도산면 예끼마을 선성현문화단지 한옥체험관 숙소에서 만나기로 하였습니다.

당일 주요 일정은 선성현과 선성수상교를 걷고 안동에서 저녁식사후 월영교 야경을 보고 숙소로 되돌아와 숙박후 익일 현지 예끼마을에서 조식후 퇴계퇴실, 고산정, 농암종택, 세계유교문화 박물관과 안동친구 농장에 잠시 들런 후 안동시내에서 중식후 헤어지는 일정입니다.

안동까지 가는 김에 조금 서둘러서 친구들 모임 일정에 없는 도산면 일원 군자마을, 도산서원, 퇴계종택과 묘소, 이육사문학관, 토계동 계남고택 등 몇 군데를 둘러보기로 합니다.

그중 군자마을을 둘러보고 예끼마을의 메밀꽃피면이란 음식점에서 중식 후 도산서원을 이 편에 올립니다.

 

▷일정

안동 군자마을 - 예끼마을 메밀꽃 피면 중식- 도산서원 - (퇴계종택,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퇴계기념공원 - 퇴계묘소,   종택 - 이육사 문학관 - 토계동계남고택(안동시내로 이건하고 현재는 없음)

 

 

▷탐방후에

 

◐군자마을

 

안동에서 도산면 예끼마을로 가는 길, 예끼마을 조금 못미쳐 도로 우측편에 있습니다.

차도를 벗어나면 이내 안동   길 들머리가 있으며,  군자마을로의 진입로는 넓지않으며 마을까지는 거리가 가깝습니다. 생각했던 것 보다 현지를 찾으면 작은 마을이다 싶습니다.

 

 

 

 

 

오천 유적지

 

이 곳은 조선시대 초기부터 광산김씨 예안파가 약 20대에 걸쳐 600여 년 동안 세거(世居)하여 온 마을 마을로 세칭 오천군자리(烏川君子里)라 불리는 유적지이다. 이 마을의 입향시조는 농수 김효로(聾叟 金孝盧,  늙은이 수)이며 그의 후손들이 대대로 번창하여 영남사족(嶺南士族)으로서 명성이 높았다.

이 곳 건물들은 1974년 안동댐 건설로 수몰지역에 있는 문화재를 구 예안면 오친리에서 집단이건하여 원형 그대로 보존한 것이다.

이 가운데 탁청정과 후조당은 국가지정 문화재로, 탁청정 종가와 광산김씨 제사 및 사당, 그리고 침락정은 경상북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유물전시관인 숭원각에는 세칭 오천칠군자를 비롯하여 이 가문출신의 인물들이 남긴 고서, 문집류, 교지, 호적, 토지문서, 노비문서, 분재(分財)문서, 각종 서간문 등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 중에 고문서 7종 429점과 전적(典籍) 13종 61점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시계방향으로 마을을 한바퀴 둘러보기로 합니다.

처음 만나는 현대식 건물은 숭원각입니다. 별것 아닌 것으로 생각하고 안으로 들어가볼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이곳의 박물관인 셈입니다.

평소 문을 개방하고 있는지 확인하지 못해 지나고 보니 아쉽습니다.

 

 

 

 

 

숭원각 입구에 의병대장 근시제선생 순국기념비가 있습니다.

 

 

 

 

 

광산김씨 재사 및 사당 / 유형문화유산

 

재사는 학문과 덕행, 충효가 뛰어난 인물이니 입향조, 중시조 등을 추모하는 제사를 지내기 위해 묘사나 사묘 옆에 지은 집을 말한다.

광산 김씨 재사와 사당은 광산 김씨 가운데 오천리에 처음 들어온 조상인 김효로(1454~1534)의 묘를 지키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1536년 손자 김부필 (1516~1577) 이 후손들과 함께 세웠다. 김부필의 스승이었던 이황(1501~1570)이 김효로의  묘비명을 직접 써주었는데 그에 따르면 김효로는 '과거시험에 매이지 않고 깨끗하고 바른 품행으로 스스로 학문을 닦으며, 정성을 다하여 제사를 받들고,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로 자손들 가르쳤다'고 한다, 이후 선조 25년 임진왜란 시 영남의병대장으로 활약하다가 순절한 김해(金垓)를 함께 모시고 제사를 지낸다.

재사는 원래 예안면 오천리 낙동강 근처에 있었는데 안동댐을 건설하면서 1975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一'자형 건물 두 채가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앞뒤로 배치되어 있다. 안마당 오른쪽에는 창고로 쓰는 건물이 하나 더 있다. 사당은 재사 뒷편 왼쪽에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이 건물은 대문이 닫혀있어 내부로 들어가 보지는 못했습니다.

 

 

 

 

광산김씨 사당 및 종가 바로 옆의 계단을 오르면 후조당 종택이 있습니다.

 

 

 

 

 

안동 후조당 종택

 

후조당 종택은 광산김씨 예안파 종택에 딸린 별당으로 조선 선조 때 후조당 김부필이 처음 세웠다고 한다. 1972년 안동댐 건설로 현재 위치로 옮겼으며 현판은 그의 스승인 퇴계 이황이 손수 쓴 글씨이다.

정면 4칸, 옆면 2칸의 건물로 왼쪽부터 6킨의 대청을 두었다. 6칸 대청 동쪽에는 2칸의 온돌방이 있고 마루 1칸과 온돌방 1칸이 튀어나와 있는데 이런 형식은 안동 지방에서는 흔하지 않다. 가구의 구성 수법이 고려말 조선초 양식으로, 오래되고 화려한 멋을 지니고 있다.

원래 예안면 오천동 132번지에 있었지만 1972년 안동댐으로 마을이 물속에 잠기게 되어 현재 위치로 옮겨 지었다,

<현지 안내문에서>

 

 

 

 

 

맨 우측의 방은 마루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형태는 조금씩 다르지만 퇴계태실도 이런 형태이며 안동지역에서만 본 것 같다.

 

 

 

 

 

후조당 종택 좌측 뒷편에 조그만 사당이 있습니다.

 

 

 

 

 

후조당 종택을 우측 측면에서 본 모습일 겁니다.(정확히는 기억 나지 않습니다.)

 

 

 

 

 

후조당 종택 우측으로 담이 둘러져 있고 통과하는 문이 있습니다.

 

 

 

 

 

후조당 종택을 정면에서 바라봤을때 우측에 후조당 사랑채가 위치하고 있는데 어느게 어느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좌측 건물이 사랑채인듯 싶습니다.

 

 

 

 

 

사랑채?

 

 

 

 

 

장판각

 

 

 

 

 

아마 읍천정인지 모르겠네요?

 

 

 

 

 

 

 

 

 

 

 

또다른 입구로 내려왔다.

둘러본 지역이 후조당 종택과 사랑채, 장판각 주변이었습니다.

 

 

 

설월당(雪月堂)

 

이 건물은 설월당 김부륜((1531~1598)이 학문과 후진 양성하기 위하여 건립한 정사이다. 원래는 낙동강에 인접한 오천에 있었으나 안동댐 건설로 인해 1974년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건립 후 퇴락하자 1930년 경에 중수한 이 정자는 정면 4칸, 측면 1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기단을 높이 쌓고 전면을 마루로 꾸미고 계자난간을 달아 누각처럼 느껴지도록 만들었다.

김부륜의 본관은 광산으로 자는 돈서이다. 이황의 문인으로 사마시에 합격하고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여러 관직을 억임하였다. 임란시에는 가산을 떨어 향병을 지원하였다. 저서로 설원당집이 남아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마을 약간 우측 뒷편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봅니다.

 

 

 

 

 

 

 

 

 

 

 

수장고

 

 

 

 

 

앞에 둘러본 건물이 재사 내지는 사당구역이었다면 이곳엔 실제 주민이 살고 있는 곳으로 앞뒤로 2집이 있습니다.

 

 

 

 

 

옛 집을 손질하여 운치있게 꾸몄습니다.

 

 

 

 

 

안동 광산김씨 탁청정공파 종택 / 국가민속문화유산

 

탁정청공파 종택은 탁정청 김유가 조선 중종 36년(1541)에 지었다. 조선 후기에 불이 나서 없어진 것을 다시 고쳐지었다. 문무를 겸비한 김유는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학식이 뛰어났다. 조선 전기 전통 음식의 조리와 가공법을 기록한 조리서 수운잡방(수운잡방)을 쓰기도 했다.

이 집은 정면 6칸, 옆면 4칸으로 모두 22칸이며 주택인 정침과 정자인 탁청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동 지방의 큰 규모 주택들은 보통 5칸을 기준으로 대부분 대청이 3칸인데 탁청정 종택은 대청이 2칸으로 되어 있다. 조선 후기는 사랑채가 발달하여 사랑에 있는 대청을 넓히고 단을 높게 쌓은 경우가 많다 그러나 탁청정 종택은 조선 후기에 중건되었지만 웅장하지 않고 소박한 초기 방상을 지키고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사람이 살고 있는 듯 하여 내부로 들어가 보지는 않았습니다.

 

 

 

 

 

탁청정공파 종택 옆에 탁청정이 있습니다.

 

탁천정(국가문화유산)은 탁청정 김유가 조선 중종 36년 (1541)에 세운 건물로 종택에 딸린 정자이다. 정자의 이름은 김유의 호에서 따왔으며, 현판은 석봉 한호가 쓴 글씨라고 전한다.

탁청정은 정면3칸, 옆면 2칸의 누각건물이다. 오른쪽에 4칸 규모의 세 방면으르로 트인 마루가 있고, 왼쪽에는 2칸 온돌방이 있다. 정자의 공포(처마의 무게를 받치기 위해 기둥머리에 짜 맞추어 댄 나무쪽)는 고급 수법을 사용하였고 그 구성도 오래된 양식이다. 정자의 부재는 매우 건실하여 당당하며, 구성의 비례가 잘 잡혀있다. 따라서 영남지방에 있는 개인 정자로 가장 웅장하고 우아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원래는 낙동강 옆에 닿아있는 오천리(외내)에 있었으나 안동댐이 건설되면서 1974년에 현재 자리로 옮겨 지었다.

<현지 안내문에서>

 

 

 

 

탁청정 앞엔 방형의 연못도 있습니다.

 

 

 

 

 

이웃하여 또다른 정자가 있습니다.

 

 

 

 

 

사진상 윗쪽에 보이는 건물 지애정(芝厓亭/언덕 애)은 카페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일비문(一卑門)?

점심시간 직전이라 주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카페 정원과 건물을 둘러보기로 합니다.

 

 

 

 

 

마당가엔 수십종의 희귀한 화초들이 자라고 마당 한켠엔 탁자를 놓았습니다.

여유있게 여행을 한다면 느긋히 차한잔 하면 좋으련만 오늘 한정된 시간속에 여러곳을 둘러볼려지 일정이 바쁩니다.

 

 

 

 

 

아랫집

 

 

 

 

 

 

 

 

 

 

 

아호고려

 

 

 

 

 

 

 

 

 

 

 

안동군자마을 / 최병익

 

경북 안동시 외내 군자마을

오백년 이어온 광산 김씨 댁

새로 지은 동다헌에서

하늘을 바라본다.

외내 하늘이 이리 높고 푸르름은 

오백년 묵향이 하늘 가득 피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내 솔숲에는

백학이 날아들어 

하늘 청자빛 학 울음이 

강으로 흐로고 바다에 퍼지고

다시 오백년 뒤 어느 날

학이되어 

날아온 군자리에

묵향 더욱 짙기를 

 

2004년 여름

 

 

 

 

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라는 현수막을 걸었습니다.

군자고와입니다

 

 

 

 

 

다른 면에서 바라본 군자고와

 

 

 

 

 

문정공계암김선생신도비(文貞公溪巖金先生神道碑)

 

계암정

 

 

 

 

 

양정당

 

 

 

 

양정당 편액이 달려있습니다.

 

 

 

 

 

상상연구공간 양정

 

 

 

 

 

침략정

 

 

 

 

 

 

 

 

 

 

 

항일애국지사 김남수선생기적비(金南洙先生紀跡碑)

 

 

 

 

 

이상 군자마을이었습니다.

 

 

 

◐예끼마을 메밀꽃피면

 

 

 

 

 

◐도산서원

 

도산서원에 왔습니다.

 

 

 

 

 

상가.

음식점은 없습니다.

 

 

 

 

 

입장료 성인 2,000원, 경로는 무료입장입니다.

 

 

 

 

 

이곳 도산서원은 지난해 12월초에 다녀간 곳입니다.

집사람이 초행인것 같아 일정에 넣었습니다.

 

 

 

 

 

문화관광해설사의 집

앞쪽에  안동호 전망대가 있습니다.

 

 

 

 

 

 

 

 

 

 

 

낙동강

도산서원은 전면에 낙동강이 흐르는 경사지에 입지하고 있다. 퇴계 선생은 낙동강 가에 천광운영대와 천연대를 조성하여 자연의 정취를 감상하였다.  도산서원 주변의 자연황경을 노래한 도산잠영에는 낙동강을 배경으로 한 시가 여러 수 확인되는데 퇴계선생은 이곳에서 낚시를 하거나 물고기를 관찰하고 휴식을 취하며 자연과 학문의 즐거움을 노래하였다,

 

남녘물가  / 이황                                 南沜(남반/ 물가 반)

바위 길죽하고                                    石之揭揭(석지게게 / 높이들 게, 걸 게, 들 게, 높이처들 알, 걸다. 게시하다 

숲이 무성하네                                    樾之陰陰(월지음음 / 나무그늘 월,  그늘 음)

강가 언덕에서                                    于江之沜(우강지반)

시원하게 바람 쐬네  납량소삼              納凉蕭森 / 맑은 대쑥 소/맑은 대쑥, 물건의 소리, 소란스러운 모양)

기이한 바위 산 어귀에 있고.                異石當山口(이석당산구)

그 곁에 시냇물이 강으로 흘러드네       傍?澗入江, (방?간입강 / 곁 방, 산골물 간,

때로는 내가 와서 세수하고 씻으니 我時來盥濯(아시래관탁, 세수대관, 씻을 탁)

맑은 숲속에 흥취가 짝이 없도다.         淸樾興難雙 (청월흥난쌍)

 

 

 

 

 

천광운영대?

 

천연대로 표시되어 있다.

도산서원을 가운데 두고 양쪽절벽중 서쪽이 천광운영대, 동쪽이 천연대라고 하는데, 동쪽에 천연대 안내표지판이 있고, 이곳에도 천연대 안내표지판이 있다.

 

 

 

 

 

시사단

 

 

 

 

 

 

 

 

 

 

 

 

 

 

 

 

 

매실나무가 여러 그루 있다.

 

 

 

 

 

열정(洌井/ 맑을 렬, 찰 렬(열))

식수로 사용하던 우물입니다. 열정이란 이름은 역경에 너오는 '물이 맑고 차가우니 마술 수 있다(井冽寒泉食)'라는 구절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퇴계는 "서당의 남쪽에 맑고 차며 단맛의 옹달샘이 있다(書堂之南 石井甘冽)."이라며 열정과 관련한 시를 짓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몽천(蒙泉 / 어릴 몽)

몽천은 산골에서 솟아나는 샘물이다.  퇴계가 역경의 몽괘에서 의미를 취해 직접 이름을 지었는데, 몽매한 제자를 바른 길로 이끌어가는 스승의 도리를 뜻한다. 한 방울 샘물이 수많은 어려움 끝에 바다에 이르듯이, 제자들이 끊임없이 노력해서 뜻을 이루라는 의미를 담았다.

퇴계는 이 샘물을 도산서당의 터를 잡은 이유의 하나로 꼽았다. 이 지역의 자연 배경이 학문을 수양하고 제자를 양성하는 데 적합다다고 여겼다.

<현지 안내문에서>

 

 

 

 

 

도산서당

도산서당은 퇴계가 만년에 머물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던 곳이다. 1560년에 완성되었으며 도산서원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원래 부엌, 온돌방, 마루로 되어 있었는데, 제자들이 늘어나면서 부엌과 마루를 확장하였으며 확장한 마루 위에는 덧지붕을 달았다.

퇴계가 머물던 방의 이름은 완락재(玩樂齋/희롱할 완)인데 '완상하며 즐가다'의 의미이다, 제자를 가르쳤던 마루는 암서헌(巖栖軒/깃들일 서)으로 바위에 깃들어(巖棲/길들일 서) 작은 효험을 바란다.'는 뜻을 포함한다. 두 이름 모두 주자의 글에서 따온 것으로, 학문의 즐거움과 겸손한 마음을 담았다.

<현지 안내문에서>

 

 

 

 

 

 

 

 

 

 

 

 

 

 

 

 

 

 

 

 

 

 

 

도산서당 맞은 편에 농운정사가 있다.

 

 

 

 

 

 

 

 

 

 

 

농운정사는 퇴계의 제자들이 머물면서 공부하던 기숙사이다. 건물은 공(工)자 모양으로 하였는데 학생들의 공부가 성취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퇴계가 설계하였다.

농운정사는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동쪽 마루는 시습재로 공부하는 곳이고, 서쪽 마루는 관란헌으로 휴식을 취하는 공간이었다. 마루 뒷쪽에는 지숙로가 있는 데 서당에 공부하러 온 학생들이 머물렀다고 한다.

<현지 안내문에서>

 

 

 

 

 

도산서원 구역으로 간다.

 

 

 

 

 

광명실은 동.서 두곳 있다.

 

 

 

 

 

광명실(光明室)

광명실은 책을 보관하고 열람하던 곳으로, 이름에 포함된 의미는  '수많은 책들이 밝고 환하게 비추어 준다.'이다. 습기로 책이 망가자는 것을 막기 위해 2층 누각으로 높게 지었다. 편판의 글씨는 퇴계가 직접 썼다.

<현지 안내문에서>

 

 

 

 

 

도산서원

 

 

 

 

 

 

 

 

 

 

 

전교당 편액을 달고 있다.

 

 

 

 

 

동재

 

 

 

 

 

서재

 

 

 

 

 

사당 상덕사 삼문

 

상덕사는 1574년에 지었다. 일반적으로 사당 건물은 간결하게 맞배지붕으로 짓는데 도산서원의 사당은 팔작지붕을 얹었다. 매년 음력 2월과 8월의 중정일에 향사를 받드는데 3일 전부터 준비하여 당일 오전 11시에 지낸다. 사당에는 퇴계의 제자인 조목이 종향되어 있다.

삼문은 상덕사와 같은 때에 지어졌다. 가운데 문은 온이 다니는 문이라 하여 사람이 쓰지 ㅇ낳고 사람들은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고 나온다.

<현지 안내문에서>

 

 

 

 

장판각

장판각은 도산서원에서 만든 책의 목판을 보관하던 곳이다.

 

 

 

 

사당 좌측에 전사청이 있다,

 

 

 

 

서쪽 전사청

 

전사청

전사청인 사당인 상덕사에서 향사를 받들 때 제주와 제수(제사음식)를 보관하던 곳이다. 동쪽 건물은 제수를 보관하고 서쪽건물은 제주를 보관하던 주고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동쪽 전사청

 

 

 

 

 

 

 

 

 

 

고직사

고직사는 도산서원을 관리하고 식사를 준비하던 사람들이 거처하던 곳이다. 전교당과 도산서당 왼쪽에 각각 상고직사와 하고직사가 있다.

상고직사는 도산서원 영역의 관리인들이 거처하던 곳이고, 하고직사는 도산서당의 관리인들이 거처하던 곳이다.

상고직사는 뒤편의 전사청과 앞쪽의 하고직사와 바로 연결되어 관리인들이 편하게 사용하도록 하였다.

<현지 안내문에서>

 

 

 

 

 

 

 

 

 

 

 

 

 

옥진각으로 왔다.

 

 

 

 

 

 

 

 

 

 

 

성학십도

 

 

 

 

 

 

 

 

 

 

 

 

 

 

 

 

 

 

 

 

 

 

 

 

 

 

 

 

 

 

 

 

 

 

 

옥진각을 둘러보고 밖으로 나모면 맨 마지막 건물이다.

 

 

 

 

 

역락서재

역락서제는 농운정사와 같이 도산서당의 기숙사이다. 1561년 정사성이 퇴계의 제자가 될 때 정사성의 아버지 정두가 제자들과 협력하여 지었다. 현판의 글씨는퇴계가 직접 썼다.

<현지 안내문에서>

 

 

 

 

 

왕버들

안동댐 조성시 수목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도산서원 전면부 마당을 5m가까이 성토하는 과정에서 지하고 대부분이 땅 속에 뭍였다고 한다.

 

 

 

 

 

 

 

 

 

 

 

천연대

도산서원 양편 산기슭에는 절벽이 있는데, 퇴계가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몸과 마음을 수양하기 위해 산책하던 곳이다. 퇴계는 동쪽 절벽을 천연대, 서쪽 절벽을 천광운영대라고 불렀다.

천연대는 시경에 나오는 '솔개는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노네'라는 구절에서 하늘 천과, 연못 연자를 따서 지었다. 천광운영대는 주자가 지은 관서유감이란 시에 나오는 '하늘의 빛과 구름의 그림자가 함께 감도는구나'라는 구절에서 이름을 지었다.  두 이름 모두 주변의 절경을 나타내고, 퇴계가 말년에 이곳에서 자연의 이치를 벗 삼하 학문을 성취혀려던 뜻을 담고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천광운영대에이어 이곳에서도 시사단이 가까이 건너다 보인다.

 

 

 

 

 

도산서원을 둘러보았습니다.

 

 

 

 

도산십이곡(전육곡)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따하료

초야우생이 이렇다 어떠하료

하물며 천석고황을 고쳐 무엇 하료

 

연하로 집을 삼고 풍월도 벗을 삼아

태평성대에 병으로 늙어가네

이 중에 바라는 일은 허물이나 없고자

 

순풍이 죽다 하니 진실로 거짓말이

이성이 어질다 하니 진실로 옳은 말이

천하에 허다영재를 속여 말씀할까

 

유란이 재곡 하니 자연이 등기 좋아

백운이 재산 하니 자연이 보기 좋아

이 중에 오운 한님을 더욱 잊지 못하네

 

산전에 유대하고 대하에 유수이로다

때 많은 갈매기는 오명가명 하거든

어쩌다 교교백구는 멀리 마음 하는고

 

춘풍에 화만산하고 추야에 월만대라

사시가흥이 사람과 한가지라

하물며 어약연비운영천광이야  어느 그 지 있을꼬

 

 

 

 

 

도산십이곡(후육공)

 

천운대 돌아 들어 완락재 소쇄한데

만권생애로 낙사 무궁 하여라

이중에 왕래풍류를 일러 무었하꼬

 

뇌정이 파산하여도 농자는 못 듣나니

백일이 중천하여도 고자는 못보나니

우리는 이목총명 남녀로 농고같지 말으리

 

고인도 날 못보고 나도 고인 못 뵈

고인을 못 봐도 녀던길 앞에 있네

녀던길 앞에 있거든 아니가고 어쩔꼬

 

당시에 녀던길을 몇해를 버려두고

어디가 다니다가 이제사 돌아온고

이제나 돌아오나니 딴데마음 말으리

 

청산은 어찌하야 만고에 푸르르며

유수는 어찌하야 주야에 긋지 아니한고

우리도 그치지 마라 만고상청 하리라

 

우부도 알며 하거니 그 아니 쉬운가

성인도 못다 하시니 그 아니 어려운가

쉽거나 어렵거나 중에 늙는 줄을 몰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