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지역의 산

대구 달성 도동서원, 도동유교문화관, 관수정, 송담서원

정헌의 티스토리 2025. 6. 2. 21:30

■대구 달성 도동서원,도동유교문화관, 관수정, 송담서원

 

대구 달성에 위치한 도동서원과 그 주변입니다.

초행이라면 달성지역 또는 가까운 곳으로 송해공원, 용연사, 서문진, 대구수목원, 남평문씨세거지, 바비정벽화마을 등과 연계하여 적의 탐방하여도 좋을 곳입니다. 망우당 곽재우장군과 관련하여 묘소와 유가읍의 용연서원도 있습니다.

오늘은 도동서원과 관수정, 인근의 송담서원을 둘러보고, 현풍에서 중식 후 오후에 달서구 이곡동에 위치한 이곡장미공원, 정자공원, 생수공원을, 시내 두류공원으로 이동하여 이곳저곳 산책하는 것으로 일정을 잡았습니다. 시간이 되면 하중도 샤스테이지 꽃구경을 할까도 했지만 탐방하지 못했습니다.

 

 

▷일정

대구 달성 도동서원, 도동유교문화관 - 관수정 - 송담서원   /  2025. 6.  1.

▷탐방후에

 

◐도동서원

 

도동서원에 왔습니다.

 

 

 

 

 

주차장에 주차후 100m쯤 거리를 걸어가야 합니다.

과거 곽재우 유적으로 망우당묘와 유가읍에 위치한 용연서원을 찾은 적이 있어 그곳인가 하면서 찾았지만 이곳은 초행입니다.

 

 

 

 

 

거대한 은행나무가 한그루 있습니다.

인근 비각옆에 싱싱하고 젊은 은행 나무가 한그루 더 있지만 시선은 이 나무에게로 갑니다.

 

 

 

 

 

수령 약 400년, 나무둘레 879cm,

 

한훤당 김굉필(1454~1504)은 본관은 서흥(瑞興/상서로운 서), 자는 대유(大猷/꾀유), 호는 사옹(蓑翁/도롱이사), 한훤당(寒暄堂/따뜻할 훤)이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김종직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면서 특히 <소학>에 심취하여 스스로 <소학동자>라 칭하였다. 1480년(성종11)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1494년 경상도관찰사 이극균에 의해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주부(主簿), 감찰, 형조좌랑 등을 역임하였습니다.

수령이 약 400년 된 이 은행나무는 1607년(선조40)에 안동부사로 재직중이던 한훤당 김굉필 선생의 외증손이며 이황선생의 고제(高弟)인 한강 정구선생이 도동서원 중건기념으로 식수한 것이라 전하고 있습니다.

<현지 안내문에서>

 

 

 

 

 

 

 

 

 

 

 

 

 

 

 

 

 

 

수월루

 

 

 

 

 

환주문

 

 

 

 

 

환주문으로 오르면서 되돌아 본 수월루입니다.

 

 

 

 

 

환주문을 들어섭니다.

문이 작습니다.

 

 

 

 

 

환주문의 문 열림 방지턱의 생김새가 희귀해 보입니다.

 

 

 

 

 

도동서원 중정당

 

도동서원은 조선시대 유학자인 한훤당 김굉필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자 세운 서원이다.

이 서원은 소수서원, 병산서원, 도산서원, 옥산서원과 함께 우리나라 5대 서원 중 하나이며, 고종 때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보존된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이다.

이 서원은 선조 1년(1568)에 쌍계서원이란 이름으로 현풍 비슬산 기슭에 세워졌지만,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다. 그 뒤 선조 37년(1604)에 보로동서원이란 이름으로 지금 이 자리로 옮겨 다시 세웠으며, 광해군 2년(1610)애 '도동'이라는사액을 받았다.

서원의 정문인 수월루 아래 외삼문과 환주문을 지나면 강당인 중정당과 유생들이 기거하던 동재와 서재가 있다. 중정당 오른쪽 건물은 서원 관리인이 살았던 전사청이고 왼쪽 뒷편의 건물은 목판과 유물을 보관하던 장판각이다. 중정당 뒷편에 있는 돌계단을 오르면 사당으로 들어가는 내삼문과 사당이 있으며, 내삼문 오른쪽에는 제기를 보관하는 증반소가 있다.

도동서원은 수월루에서 높은 곳을 따라 환주문, 중정당, 사당을 일적선상에 두어 앞에는 학문을 연구하는 강학 영역, 뒤에는 제사를 지내는 사당을 배치한 '전학후묘' 구조이다. 또한 흙과 기와로 쌓아 만든 담장을 둘러서 검소하고 단아하면서도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과 조화를 이룬다는 점에서 한국 서원 건축의 전형을 보여준다.

<현지 안내문에서>

 

 

 

 

 

동재

거의재 편액을 달고있습니다.

 

 

 

 

 

거인재인 서재

 

 

 

 

 

사주문 협문을 지나면 전사청이 있다.

 

 

 

 

 

진사청

 

 

 

 

 

좌 곡간채 정면 문간채

 

 

 

 

 

전사청을 둘러보고 다시 서원으로 들어간다.

 

 

 

 

 

희생단

위치가 낯설어 긴가민가.

 

 

 

 

 

중정당 뒷편에 사당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습니다.

 

 

 

 

 

 

 

 

 

 

 

사당으로 오르는 계단길도 옛스럽습니다.

 

 

 

 

 

사당의 정문이라 할 수 있는 내삼문

 

 

 

 

 

내삼문이지만 맨 좌측은 출입 할 수 없는 문입니다. 아예 계단 자체가 없습니다.

즉 동입동출의 문인 셈입니다.

 

현지 문화관광해설사에게 물어보았더니 서당으로의 출입문은 동입 서출이 일반적이며, 사당의 출입문은 지역 문중에 따라 다른 경향을 보이고 있다고 대답합니다.

즉 동입서출이 일반적이지만 서입 동출, 동입동출, 가운데들 들어가 동문으로 나오는 등 그 집안의 전통에 따라 달라짐을 이야기 합니다. 

가운데 문으로 들어가는 것도 신을 받드는 행위이므로 신과 동격으로 해석하는 문중도 있다고 합니다.

 

 

 

 

 

가운데 문으로 오르는 중간에 이 조형물은 뭐지?

 

 

 

 

 

사당의 문이 잠겨있어 문틈새로 본 사당입니다.

 

 

 

 

 

해설사님 이집 건물구조중 굴뚝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중정당의 굴뚝은 이곳과 저쪽편 두곳에 낮은 지형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굴뚤을 이렇게 낸 것은

1.굴뚝의 연기가 하늘로 솟구쳐 주변 가난한 주민에게 위화감을 주는 행위를 멈주는 것이고,

2.굴뚝의 연기가 이곳 홈을 거쳐 건물주변을 감싸면 건물자체에 살균의 효과가 있거 건축물 보존에 효과가 있기 때문이고,

3.서원의 배치가 북향이라 북풍을 고수란히 받는 곳으로 특히 4월에 불을 때면 연기가 보이는 홈 주변에 얕게 깔려 대청에서 재실쪽 창문을 통해 바라볼 때 안개속에 아련히 비치는 목련꽃고 주변이 환상적이라고 합니다.

근데 맞는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온돌방은 고래라는 통로를 통해 불의 기운이 구들을 덥히고 굴뚝으로 잘 빠져야 합니다. 그럴려면 연기 배출이 잘 되도록 굴뚝 높이는 높게 만드는게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데 방을 따뜻하게 한다는 1차적인 목적보다 스토리텔링에 촛점이 맞춰진게 아닌가 의심스럽습니다.

 

 

 

 

 

 

 

중정당 좌측 뒷편에 장판각이 있습니다.

 

 

 

 

 

한바퀴 돌아 중정당 앞으로 다시왔습니다.

단체 방문객들이 빠져나가니 한적해 졌습니다.

중정당 축대에 보면 용머리 모습의 돌이 몇개(4개) 있습니다. 언듯보면 무슨 형상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거북머리, 물고기를 문 용두, 여의주를 문 용두, 다람쥐 부조(2곳) 등이 있다하나 있는 것만 보고 특히하다고 느꼈습니다.

 

 

 

 

 

도동서원

한강 정구선생은 김굉필선생의 외증손이라 합니다.

이 처마쪽 현판은 한강 정구선생의 글씨라하는 분도 있고, 퇴계 이황선생의 글씨를 뽑아 새긴 글씨라고도 하는데 어느것이 맞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도동서원과 중정당 현판을 같이 달고 있습니다.

이 도동서원 현판은 선조의 사액현판이라 합니다. 어떤분은 사액현판으로 경상도 도사 배대유의 글씨라고도 하는데 글쎄 맞는말인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대청마루를 가운데 두고 양측에 방이 있습니다.

 

 

 

 

 

방문을 열면 대청마루와 통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사당쪽 창문은 액자같은 느낌을 줍니다.

 

 

 

 

 

 

 

 

 

 

일반적인 서원에서 보면 망료대가 본 건물 앞쪽의 마당가에 위치하고 있는경우가 많은데 이곳엔 마루 앞쪽 축담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발언대처럼 보이는 것이 망료대입니다. 목조건물과 너무 가까이 있는 것 같아 화재의 위험성이 있어보이기도 하고, 대청마루와 마당을 함께 비출수 있는 잇점도 있는 것 같습니다.

 

 

 

 

 

 

 

 

 

 

 

서원구역을 둘러보고 내려갑니다.

 

 

 

 

 

 

 

 

 

 

 

전사청 앞쪽에 있는 문간채 앞으로 왔습니다.

 

 

 

 

 

문간채 앞에 유물전시관이 있습니다만 그 기능은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문경공 한훤당 김선생 오백주기 추모비

 

 

 

 

 

 

서원을 앞에서 바라봤을때 좌측편에 비각이 있고, 한원당 묘소가는 길이 있습니다.

 

 

 

 

 

비각을 둘러봅니다.

 

 

 

 

 

 

 

 

 

 

 

인내문이 없어 비의 내용은 모르겠습니다.

받침돌의 모습이 특이합니다.

 

 

 

 

 

 

 

 

 

 

 

 

동재 뒷편으로 화장실 외벽입니다.

 

 

 

 

 

중정당과 사당의 외벽인 돌담도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시딩 외벽인 셈입니다.

 

 

 

 

 

시당 외벽 담 너머로 사당을 봅니다.

 

 

 

 

 

좌측 협문뒤로 보이는 건물은 증반소

우측 건물은 내삼문입니다.

 

 

 

 

 

한훤당 묘소가는 길 입구와 돌담 외벽을 둘러보고 은행나무 앞으로 내려왔습니다.

 

 

 

 

◐도동 유교문화관

 

도동서원을 바라보았을때 우측 방향에 그럴듯한 한옥이 들어서 있습니다.

 

 

 

 

 

도동유교문화관으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4동의 숙소동이 있고,

 

 

 

 

 

전시관도 둘러봅니다.

 

 

 

 

 

 

 

 

 

 

 

 

 

 

 

 

 

 

 

 

 

 

 

 

 

 

 

 

 

 

 

 

 

 

 

 

 

 

 

 

 

 

 

 

 

 

 

 

 

 

 

 

 

 

 

 

 

 

 

 

유교문화관 정문입니다.

사용료, 운영시간 등이 게시되어 있습니다.

 

 

 

 

 

도동마을회관

 

 

 

 

 

도동서원앞 광장입니다.

 

 

 

 

 

◐관수정

 

아래 보이는 한옥건물이 도동유교문화관 건물입니다.

따라서 도동서원과 유교문화관을 둘러보고 도보로 이곳으로 올라도 가까운 거리입니다.

현지의 문화관광 해설사에게 관수정 위치와 가볼만한 가치가 있는지 물어볼려고 기회를 노렸지만 어린학생이 있는 가족에서 도동서원 설명이  길어 눈치만 보다가 내비 안내를 받아 차량으로 올라왔습니다.

 

 

 

 

 

관수정이 정자만 있는줄 알았는데 옆 건물에서 주인이 실제로 살고있는 곳입니다.

 

 

 

 

 

관수정(觀水亭) / 대구광역시 문화유산자료

 

이 건물은 임진왜란 때 곽재우 장군과 함께 공을 세운 사우당 김대진(金大振 / 떨칠 진, 1571~1644)선생이 경상도 감사 이민구와 향토사림의 협조를 받아 1624년(인조2) 건립하였으나, 1721년(경종 1)에 없어졌습니다.

1866년(고종3)에 후손 김규환(1810~1887)이 다시 지었으며, 맹자가 말한  "원천에 근본이 있고 반드시 그 하류의 물결을 본다"는 의미에서 관수정이라고 하였다고 중건지에 적고 있습니다.

건물은 주위와 자연환경과 잘 조화를 이루고, 각 건물의 비례구성이 돋보여 단정하고 안정감을  느끼게 합니다. 또한 건물에 사용된 부재의 치수가 비교적 넉넉하고 치목수법이 치밀하고, 결구 상태가 진실하여 지금까지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습니다.

<현지 안내문에서>

 

 

 

 

 

관수정 현판을 볼 수 있습니다.

 

 

 

 

 

옆에 현 후손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마당가 회화나무 한 그루가 커다란 자태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회화나무 앞에서 내려다 본 경관입니다.

도동유교문화관 건물과 낙동강의 잔잔한 흐름을 볼 수 있습니다.

 

 

 

 

◐ 송담서원

 

도동서원에서 멀지않은 곳에 송담서원이 있습니다.

도동서원과 비교도 해 볼 겸 겸사겸사 찾아보았습니다.

은행나무 수 그루를 함께 식재해 그 규모가 상당합니다.

 

 

 

 

 

관리사인 듯 십습니다.

개가 있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 살고 있는 듯 싶기도 합니다.

 

 

 

 

 

서원의 규모는 단순합니다.

일반적으로 배치하고 있는 동서재는 없습니다.

 

 

 

 

 

송담서원(松潭書院)  / 규장각도서 3814호, 경상도열읍원우사적

 

송담서원은 대암(大庵) 박성(朴惺)선생의 학덕을 추모하여 세운 서원이다. 선생의 자는 덕응(德凝/엉길 응), 휘는 성(惺/영리할 성), 호는 대암(大庵), 본관은 밀양이며 명종4년(1549) 현풍 솔례(현 현풍음 대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린시절 竹齊 郭趕(죽제 곽간/쫓을 간)과 洛川 裵伸(락천 배신/물 락, 펼 신)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24세 때 한강 정구, 동강 김우옹, 송암 김면, 수우당 최영경, 여헌 장현광 등 제현과 도의를 논하고 심경을 강론하면서 당대 명현들과 교류하였습니다.

명종22년 19세 때 母夫人의 권유로 사마시에 응시하여 수석으로 합격하였으나 곧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 열중하였으며, 34세 이후 영남팔현 또는 중외(전국)칠현의 수현(首賢)으로 천거되어 왕자사부 정랑 현감 군수 부사 통예원상례  군자감부정 등 20여 차례나 많은 내외직에 임명되었지만 대부분 사임하고 나아가지 아니하였습니다.

임진왜란 대는 초유사 학봉 김성일의 참모로 의병활동에 참여하였고, 정유재란 때는 청송 학언제로 우거(寓居/살 우)하여 청송 진보 영덕 지역의 의병대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는데 이때 체찰사 李五里(元翼) (이오리, 원익)가 언제나 선생이라 호칭하면서 공경하였다고 합니다. 선조39년 청송에서 5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니, 현풍으로 운구하여 송림 선영아래 장례하였습니다.

선생 사후 28년 경에  장여헌(현광)이 발의하여 쌍계에 서원을 세웠으나 화재로 미쳐 봉안하지 못하였고. 그 뒤 60년만인 숙종 19년(1693)에 사림에서 다시 발의하여 선생의 산소 아래 서원을 건립하여 편액을 송담서원이라 하고 선생을 봉향해 오던 중 대원군때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가 건물이 낡아 헐고, 1993년 부터 자손들이 뜻을 모으고 나라의 지원을 받아 다시 서원을 복원하였습니다.

1996년 9월 2일

경북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황위주

 

 

 

 

 

송담서원 조금 아랫쪽 저쪽 저쪽편에 조그만 비각이 있습니다.

무슨 비각일까 하며, 차창으로만 보고 지나쳤는데 박성 신도비각이었습니다.

박성은 호은 대암으로 위 송암서원의 향사를 받는 분입니다.

 

 

 

 

 

◐현풍밥잘하는 집 / 중식

 

현풍읍 성하리 (현풍읍 서북쪽 가장자리 달성군민체육관 네거리)에 위치한 집이다.

 

 

 

 

 

3대째 운영하는 현풍 맛집으로 광고하고 있습니다.

 

 

 

 

 

찬의 수가 많은 것은 아니지만 깔끔하고  집밥을 먹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돼지 두루치지 정식(13,000원)과 청국장(8,000원)을 시켰는데 한끼 식사로 부족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