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칠칠회

2015년 가을 안동여행

정헌의 티스토리 2015. 10. 7. 22:20

■ 2015년 가을 안동모임

 

안동에서의 숙박은 고택에서였다.

과거 수애당이 그렇고, 하회마을에서도 그렇고, 이번에는 임청각이다.

음식 또한 지역의 특색을 잘 살리고 있다.

이번 모임은 안동 국제탈춤 페스티벌2015 일정과 맞추었다. 줄불놀이 관람도 의미 있겠다 싶어서이다.

안동은 현재 축제중이다.

 

▷ 모임일 : 2015. 10. 3 ∼ 10. 4.

 

▷ 참석 : 김교장네, 박교수네 이상 6명.

 

▷ 일정

 안동시 풍산읍 풍전한정식(중식) - 병산서원 - 하회마을, 줄불놀이 - 하회고가(석식) - 임청각(숙박) - 안동하부댐 수변공원 - 안동 국제탈춤 페스티벌 (태국, 인도네시아. 카자흐스탄 ) - 까치구멍집(중식) - 학가산 온천

 

 

 

▷ 모임후에

 

▣ 풍산읍 침학정사 / 풍전한정식

만남시간이 오후 1시,

멀리서 오는 거리를 배려하여 점심시간을 쬐끔 늦추었다.

 

 

안동시 풍산읍 소재, 풍전으로 이름붙어 있다.

 

 

 

 

 

 

현관?에 "풍전"간판과 이웃하여 "침학정사"란 현판이 또 있다.

 

 

 

 

 

 

침학정사는 베개枕자에 학鶴자를 써서 "학이 잠자고 가는 서재" 라는 뜻이다,

 

1956년 운강 송원식 선생(1898 ∼ 1978)이 지었다.

운강 선생은 풍산평야의 한해 방지를 위한 만운저수지 건립에 많은 기여를 한 분으로 민선 풍산면장과 2대 도의원을 지냈으며. 지금 이집에는 선생의 손자, 증손자가 대를이어 살고있다 한다.

 이 식당의 주인이  운강선생의 증손자인지는 모르겠다.

 

 

 

 

              

 

약속 시간보다 30분여 일찍 도착하여 풍산읍내를 차량으로 한바퀴 돌아보고,

이 집에 도착하여 이곳 저곳 둘러본다.

 

 

 

 

 

 

고가의 정취가 흠뻑 묻어있는 집이다. 

골동품이라 할수는 없지만 근대의 여러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기도 하다.

 

 

 

 

 

 

돌잔치, 여행사 단체손님 등등 많은 분들이 오셨다.

음식맛도 정갈하고, 종업원들도 친절하다.

 

 

 

▣ 병산서원

 

병산서원은 선조 5년(1572년) 서애 류성룡(1542-1607년)선생이 31세 때에 후학 양성을 위해 풍산에서 병산으로 자리를 옮겼다. 서당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왜병에 의해 불태워졌다.

1607년 서애 선생이 타계하자 광해군 6년(1614년)에 선생의 제자인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1563-1633)공이 선생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유림과 뜻을 모아 사당 (祠堂)인 존덕사 (尊德祠)를 창건하여 선생을 봉안 하면서 병산서원으로 개칭 되었다. 광해군12년(1620년)에 유림의 공론에 따라 퇴계 선생을 모시는 여강서원(廬江書院)으로 위패를 옮기게 되었다.

그 뒤 인조9년(1629년)에 별도의 위패를 마련하여 존덕사에 모셨으며, 선생의 셋째 아들 수암(修巖) 류진(柳袗, 1582-1635)을 추가 배향하였다.

1863년(철종14)에 사액(賜額)되어 서원으로 승격하였다.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으며, 1868년(고종5)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이 내렸을 때에도 훼철되지 않고 보호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대대적인 보수가 행해졌으며 강당은 1921년에, 사당은 1937년 각각 다시 지어졌다.

매년 3월 중정(中丁:두 번째 丁日)과 9월 중정에 향사례를 지내고 있다.
1978년 3월 31일에 사적 제260호로 지정되었다.

 

< 안동하회마을 자료 참조 >

 

 

 

 

 

병산서원으로 들어가는 약 4km 구간은 비포장 도로이다.

 

옛 길을 그대로 둠이 더 운치가 있다.

조금 욕심을 낸다면 걸맞는 가로수가 있었으면 더 좋지 않을까 싶다.

서원앞 주차장에 주차후 옆문쪽으로 오른다.

병산서원은 초행은 아니다.  오늘이 세번째이지 싶다.

 

 

 

 

 

 

옆문쪽으로 오르면 뒷간의 형태가 특이하다.

 

 

 

 

          

 

병산 서원은 크고작은 여러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우측의 건물은 주사라 하는데 관리인 집으로 보면 되겠다.

주사 옆문으로 들어간다,

 

 

 

 

 

 

서원안으로 들어선다.

 

 

 

 

 

 

입교당

 

제자가 스승의 가르침을 받는 강학당(講學堂), 한마디로 수업을 받던 '교실' 이다.

입교당은 중앙은 강학당, 동쪽으로 명성제 서쪽으로 경의제로 모두 세칸을 나누어져 있다.

"가르침을 바로 세운다" 라는 뜻의 입교당은 서원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어, 병산서원의 중심 역할을 하는 곳이다.

 

 

 

 

 

 

입교당과 만대루 사이의 마당 양쪽에 동재와 서재가 있다

동쪽과 서쪽으로 나누워져 있는 이 건물은 당시 학문에 열중하던 유생들의 기숙사였다.

 

 

 

 

 

 

 

 

앞쪽에 만대루가 있다.

     

만대루는 유생들의 행사때 한자리에 모였던 대강당이다.

병산서원에서 가장 알려진 건물로서 건축과 조형미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는 건물이다.

만대루(晩對樓)의 만대(晩對)란 이름은 두보(杜甫)의 오언율시(五言律詩)인 제목:백제성루(白帝城樓)의  "…푸른 절벽은 오후에 늦게 대할만하니...."란 구절에서 명명되었다고 하며, 송나라 주희(朱喜)가 경영한 무이정사(武夷精舍)에도 만대정(晩對亭)이 있었다 한다.

 

 

 

 

 

 

 

옆에서 본 만대루이다.

만대루(晩對樓)의 기둥과 계단 마루를 받치고 있는 24개의 기둥들은 나무가 자란 그대로의 모양을 살려서 사용하여 인공(人工)이 가해진 맛을 줄였으며, 다듬지 않은 주춧돌 위에 세워져 있다

 

이외에 입교당 뒷편으로 존덕사가 있다.

서원 내의 가장 윗부분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애 류성룡선생과 셋째아들인 류진의 위패가 모셔진 사당이.

또한 입교당 뒷편에 장판각이 있다

서원에서 펴낸 책을 인쇄할 때 쓰이는 목판을 보관하던 곳이다.

그외 전사청이 있다.

위패가 모셔진 존덕사의 오른편에 위치하며 존덕사에서 쓰일 제물을 준비하였다.

 

 

 

 

 

 

 

 

 

 

 

 

 

 

 

 

 

 

 

 

 

 

 

광영지(光影池)

 

만대루와 복례문 사이에 물길을 끌어들여 천원지방(天圓地方) 형태의 연못이 조성되어 있다.

천원지방은 우리나라 전통 연못의 조성원리로 조상들의 우주관이 상징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땅을 의미하는 네모진 연못 가운데 하늘을 상징하는 둥근 섬을 두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수심양성(修心養性)을 근본으로 하여 학문에 정진할수 있도록 배려한 서원속의 정원이다.

 

 

 

 

 

 

 

                          

 

 

 

 

 

 

 

복례문,

 

병산서원의 정문으로 정면 1칸의 대문이다.

서원의 정문은 삼문(三門)이 일반적이지만 이 문의 경우에는 가운 칸만 판문(板門)이고, 문의 좌우로 담장과 구분되는 벽채를 한 칸씩 두고 있다. 

 "자기를 낮추고  예(禮)로 돌아가는 것이 곧 인(仁)이다" 에서 따온 말이라 한다.

 

 

 

 

 

 

 

이곳 병산서원은 서원 앞쪽의 병산(屛山)으로 인해 더욱 경관이 좋다.

 

 

 

 

 

 

 

이곳 낙동강이 휘감아 돌아가고,

강변의 풀을 제거하니 백사장이 되었다.

 

 

 

 

 

 

 

강변을 걷는 느낌이 좋다.

 

 

▣ 하회마을

 

하회마을로 이동한다.

저녁 7시에 있을 줄불놀이 구경이 오늘의 주된 관광이다.

초행이라면 이곳 저곳 찬찬히 둘러봄이 좋다. 문화유산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면 기억에 더 오래 남는다.

 

 

 

 

 

 

 

 

 

 

주차장 매표소(승용차 2,000원)를 통과하자 바로 주차를 안내한다.

 

하회마을까지 차량 진입이 가능한데,  오늘 주차 차량이 많아서인지 매표소 인근에 주차한다.

도보로 이동하여 탈박물관 앞을 지난다.

         

 

 

 

 

 

 

탈박물관 관람료는 어른 1인 3,000원이다.

 

상가지대, 탈박물관을 지나면 하회마을 관람을 위한 매표소가 있다.

입장료는 어른 1인 3,000원이다.

매표후 이웃에 있는 검표소를 지나면 바로 셔틀버스 주차장이 있다.

이곳 주차장에서 하회마을 입구의 종합관광 안내소가 있는 주차장 까지는 약 1km 거리이다.

오늘은 줄불놀이 행사 때문인지 평상시도 그렇는지 모르지만 매표소에서 하회마을까지 무료로 셔틀버스가 운행한다.            

 

 

 

 

 

 

 

하회마을 안에 있는 버스시간표이다.

 

시간표를 보면 하회마을 정류장이 있고,  마을 입구의 종한안내소 정류장이 있다.   

우리가 타고온 셔틀버스는 마을입구 종합안내소가 있는곳까지 운행한다.

종합안내소에서 마을까지는 200m쯤 될거다.

 

 

 

 

 

 

 

마을 중심으로 난 도로를 따라 하회마을을 둘러본다.

 

몇년전 이곳 하회마을은 지역 문화관광해설사님과 동행하며 상세히 둘러본 적이 있고,

또한 이 마을에서 하룻밤을 묵은적이 있어 오늘은 대충 둘러본다,

 

 

 

 

 

 

 

 

 

 

 

 

 

 

 

 

 

 

 

 

 

 

 

 

 

 

 

 

 

 

 

 

 

 

 

 

 

 

 

 

 

 

 

 

 

 

 

 

 

충효당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충효당 앞,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기념식수한 나무도 잘 자라고 있다.

 

 

 

 

 

 

 

충효당을 둘러본다.

 

 

 

 

 

 

 

보물 414호로 지정된 충효당은 문충공 서애 류성룡의 종택이다.

 

‘서애종택’이라고 부르지만, 현재의 충효당은 서애 생존시의 집은 아니다. 서애는 현재 충효당이 지어지기 이전의 집에서 소년기와 만년을 보냈다. 선생이 30여년 몸담은 관직에서 파직당하고 낙향했을 당시의 집은 극히 단출했다고 한다. 선생은 64세 때인 1605년 9월에 하회마을이 수해를 당해 풍산읍 서미동으로 거처를 옮겨 그곳에서 기거하다가 1607년 5월 6일 삼간초옥 농환재에서 타계했다. 

지금의 충효당은 서애 사후에 지은 집이다.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선생이 초가삼간에서 돌아가신 후, 선생의 문하생과 사림이 장손(長孫) 졸재(拙齋) 원지(元之)공을 도와서 지었고, 증손자 의하(宜河)공이 확장한 조선중엽 의 전형적 사대부(士大夫) 집으로서, 대문간채, 사랑채, 안채, 사당으로 52칸이 남아있다.

충효당 내에는 영모각이 별도로 건립되어 서애선생의 귀중한 저서와 유품 등이 전시되고 있으며, 바깥마당에 엘리자베스2세의 방문 기념식수가 있다.

 

 

 

 

 

 

 

 

 

 

 

 

 

 

 

만지송(萬枝松)

 

이 소나무는 서애 유선생의 13대 종부 무안박씨가 1959년 식목일에 화산)화산)에서 이곳으로 옮겨심을 것이라 한다.

자손들의 번영을 기원하는 할머니의 소원이 담겨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징비록 (국보 132호), 영모각 내에 있다.

 

임진왜란때 영의정으로서 도체찰사를 겸임하였던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1542∼1607)선생이 임진왜란때의 상황을 벼슬을 떠나 귀향한 후에 기록한 것으로, 저자는 임진란의 쓰라린 체험을 거울삼아 다시는 그러한 수난을 겪지 않도록 후세를 경계한다는 민족적 숙원에서 책명을「징비록(懲毖錄)」으로 하였다.

 

 

징비록의 저술 동기에 대하여 서문에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징비록」이란 무엇인가? 임진란 후의 일을 기록한 것이다.

거기에 임진란 전의 일도 간혹 기록한 것은  임진란의 발단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아! 임진란의 전화(戰禍)는 참혹하였다. 수십일 동안에 삼도(三都)를 지키지 못하고 팔도(八道)가 산산이 깨어졌으며,  임금께서 피란하셨으니 그리고서도 오늘날이 있게 된 것은 천운이다.................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내 지난 일을 징계하여 뒷 근심이 있을까 삼가(毖)노라.' 고 했으니 이것이 징비록(懲毖錄)을 쓰는 연유라 하겠다. ............"

 

 

 

 

 

 

 

 

 

 

 

 

 

 

 

 

 

 

 

 

 

 

 

 

 

 

 

 

 

 

 

 

 

 

 

 

 

 

 

 

 

 

 

 

 

 

 

강변둑으로 난 길을 따라 만송정으로 향한다.

 

 

 

 

 

 

 

 

만송정(萬松亭) 2006년 11월 27일 천연기념물 제473호로 지정되었다.

 

 

 

안동 하회마을(중요민속마을 122호) 북서쪽 강변을 따라 펼쳐진 넓은 모래 퇴적층에 있는 소나무숲이다.
조선 선조 때 서애(西厓) 류성룡의 형인 겸암(謙菴) 류운용(1539~1601)이 강 건너편 바위절벽 부용대(芙蓉臺)의 거친 기운을 완화하고 북서쪽의 허한 기운을 메우기 위하여 소나무 1만 그루를 심었다고 하여, 만송정이라 한다.

1983년에 세운 만송정비에는 이 솔숲의 내력과 함께, 현재의 숲은 76년 전(1906년)에 다시 심은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숲에는 수령 90~150년 된 소나무 100여 그루와 마을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심는 작은 소나무들이 함께 자란다.

 소나무들의 크기는 나무높이 16~18m·가슴높이 줄기지름 30~70㎝ 정도이다.

이 숲은 여름에는 홍수때 수해를 막아주고 겨울에는 세찬 북서풍을 막아주며, 마을사람들의 휴식공간 혹은 문화공간으로 활용된다. 보호면적은 47만 6,430㎡이다.

 

 

 

 

 

 

 

 

 

 

 

 

 

 

 

 

 

 

 

 

 

 

 

 

 

 

 

 

 

 

 

 

 

 

 

 

 

 

 

 

 

 

 

 

 

 

 

 

건너편 부용대이다.

 

저곳에 오르면 이곳 하회마을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보이는 낙동강은 이곳에선 꽃내라 부르나 보다.

저곳 부용대를 중심으로 오른쪽 기슭에 옥연정사가 있고, 왼쪽편에 겸암정사가 있다.

이 두곳을 잇는 길이 부용대 절벽의 3분의 1지점을 지나게 되어있어 한국판 차마고도이다.

물론 부용대 상부로도 길이 있으므로 옥연정사에서 출발하여 차마고도 길을 따라 겸암정사로 이동, 부용대를 거쳐 옥연정사로의 원점회귀 탐방도 기억에 오래 남을 것이다.

 

 

 

 

 

 

 

겸암정사 쪽이다.

 

 

 

 

 

 

 

선유를 위한 배이다.

나중 저 배에서 불을 밝힐 것이다.

 

 

 

 

 

 

 

 

 

 

 

 

 

 

 

 

 

 

 

 

 

 

 

줄불놀이 식전행사가 진행되고 있다.

 

 

 

 

         

 

 

 

 

 

 

 

 

 

 

 

 

 

 

 

 

 

 

장승 퍼포먼스.         

 

 

 

 

 

 

 

나중,

이양반들이 선유를 즐길분들인가 싶다.

유대감 !

한잔 하시게.......... 어흠!

 

 

 

 

▣ 줄불놀이

 

공중에 길게 걸어 놓은 줄에 숯가루를 넣은 봉지를 주렁주렁 매단 뒤 점화하면, 불꽃이 튀면서 떨어지는 장관을 즐기는 놀이이다.

경북 안동시 풍천면 하회마을, 경남 마산시 진동면 진동리, 경기 양주시 유양동에서 전승되었고, 지금은 하회마을과 진동리에서만 전해져 온다.

하회마을의 줄불놀이는 원래 음력 7월 기망(, 16일)에 벌어졌지만, 지금은 안동 국제 탈춤페스티벌 기간(9월 말 ∼10월 초)에 벌어지며, 진동의 줄불놀이는 사월 초파일에 벌어진다.

놀이 장소는 하회의 경우 마을 앞을 휘감아 도는 꽃내[] 일대이고, 진동의 경우 태봉천 문화마당이다.

 

 

 

 

 

 

 

야간사진 촬영솜씨가 이것밖에 안된다.

선유를 즐길 배이다,

 

 

 

 

 

 

 

하회 줄불놀이는 꽃내(낙동강)의 양안에 자리잡은 부용대의 꼭대기와 만송정 솔숲 사이(약 300m) 허공에 여러개의  줄 (보통 5∼6개)을 걸고 수많은 숯봉지를 매다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숯봉지는 한지를 쓰며 크기는 길이 40여 cm, 폭 2.5cm이다.

봉지에 뽕나무 뿌리로 만든 숯가루와 마른 쑥으로 만든 심지를 넣고 굵은 실로 봉지를 촘촘하게 여민다.

그런 다음 달이 떠오르기를 기다리다가 때가 되면 심지에 불을 붙인 다음 서서히 줄을 잡아당긴다.

줄은 각기 두 가닥으로 되어 있어 위 아래로 이동이 가능하기 때문에 만송정 쪽에서 불을 붙여 잡아당기면 숯봉지가 불꽃을 피우며 차츰 부용대 쪽으로 올라간다.

배 위에서는 선비와 기녀들의 시창과 가무가 벌어지고, 꽃내의 상류에서는 수백 개의 달걀불이 떠내려 오며, 하늘에는 여러 개의 줄불이 걸린 모습은 화려하기 그지없다.

게다가 선비들이 시를 한 수씩 지을 때마다 부용대에서 던지는 낙화가 절벽에 부딪히며 떨어지는 모습은 일대 장관을 연출한다.

 

 

 

 

 

 

 

현재 전승되는 하회 줄불놀이와 진동 줄불놀이는 유래와 전승양상이 다르다 한다.

 

과거 하회마을 선비들은 음력 7월 초순이나 중순무렵에 부용대 일대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시회(詩會)를 열고, 뱃놀이.줄불놀이. 계란불놀이를 겸하였다,

이 무렵이 되면 하회마을 선비들은 물론  인근의 시인 묵객들까지 모여서 나룻배를 타고 형제바위까지 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강 중앙에 배를 멈추고 술잔을 나눈다.

이때 부용대에서 강 건너 아랫쪽의 만송정에 이르는 공중에 매달아 놓은 수 가닥의 동아줄에서 뽕나무 뿌리로 만든 수백개의 숯봉지들이 차레대로 타들어가면서 허공을 은은하게 밝히니 이것을 줄불이라 한다.

또한 겸암정사에서 옥연정사에 이르는 강물 위에는 달걀 껍질속에 기름을 붇힌 솜을 넣고 불을 붙인 수백개의 달걀 불들이 수면을 아로새기며 유유히 떠내려 오니 이것을 연화(蓮火)라 한다.

이런 가운데 배위에서는 흥겨운 음주가무와 함께 시회(詩會)가 벌어진다.  표주박에 기름 먹인 솜을 넣고 불을 붙여 강물에 뛰운 뒤에 그 불이 옥연정사의 소(沼)에 이를 때까지 시 한수를 짓는 놀이를 펼친다.

만약 시간내에 시를 지으면 일행은  "낙화(落火)야" 하고 크게 외친다.

그러면 부용대 절벽위에서 미리 준비하고 있던 이들이 잘 마른 소나무를 묵어둔 솟갑단에 불을 붙여서 절벽 아래로 내던진다. 큰 불덩어리가 절벽에 부딪히면서 화려한 불꽃을 일으키며 떨어지는 모습은 참으로 장관이다.

 < 안동시청 문화관광과 >

 

 

 

 

 

 

 

뱃놀이의 부속 행사로 전승되어 온 줄불놀이는 1930년대 초반까지 전승되다가 단절되었으나, 오늘날 다시 복원하여 매년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 기간중에 2회 재현된다.

 

한편 진동의 줄불놀이는 사월 초파일과 특별한 경사가 있는 날 벌어지다가, 1936년의 행사를 마지막으로 전승이 중단되었다.

1995년에 이르러 그때의 장관을 기억하는 주민들이 뜻을 모으고 진동면 청년회가 앞장서서 줄불놀이를 복원하였으며,  ‘진동불꽃낙화대축제’라는 이름으로 해마다 줄불놀이를 벌이고 있다.

[안동시청 문화관광과 및 네이버 지식백과] 줄불놀이 (한국세시풍속사전, 국립민속박물관)

 

 

 

 

 

 

 

달걀불 (蓮火).

 

 

 

 

 

 

 

낙화

 

 

 

 

 

 

 

건너편 낙화와 줄불놀이의 숯봉지를 볼수 있다.

숯봉지의 외형은 두줄 꽈배기 비슷하게 생겼으며 비교적 촘촘하게 매달아 올린다,

 

 

 

 

              

 

 

낙화는 부용대가 수직의 절벽이라 불이날 우려는 없겠지만 불탄(그을린) 흔적은 어찌하는지 모르겠다.

 

 

 

 

 

 

 

가운데 선유,

줄불놀이와 계란불, 낙화의 4행사를 동시에 볼 수 있다.

 

 

 

 

 

 

 

행사 막바지,

풍등이 하늘을 날고,

때아닌 불꽃놀이가 이어진다.

웬! 불꽃놀이?

 

 

 

▣ 하회미가 / 안동찜닭

 

 

 

하회미가.

 

하회장터에 위치한 음식점이다.

주인 아주머니,

안동찜닭과 무슨 요리가 전문이라 하는데 찾아도 후회하지 않을 집이다.

 

 

 

 

 

 

 

하회마을내 유씨집안의 딸로

하회마을내 자택을 두고 이곳에 음식점을 하는데 요즘들어 장사가 영 신통찮다 한다.

              

관광객은 많으나 장사는 안된다.

이곳 장터의 음식점들은 안동시에서 임대를 주고있는데 요즘 같으면 임대료 내기도 벅차 이 일을 접어야 할까 보다 한다.

식당시설 개선도 어렵다. 나중 계약이 끝나고 반납시에 원상태로 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란다.

이곳 장터에서 하회마을로의 진입로에 가로등 개설, 볼품없고 낡은 셔틀버스의 하회마을 이미지에 맞는 무공해 전기차 도입 등등 하고픈 일은 많은데 지역 주민들 눈앞에 영리는 가깝고 이분 뜻은 먼가 보다. 상업화 되면서 돈에 눈먼 일부 주민들의 행태도 개탄한다.

하회마을내, 일부겠지만 한달전 예약 취소도 예약금 환불을 안해주는 집이 있다하니 주의도 해야겠다.               

 

 

 

▣ 임청각

 

임청각(보물 182호)은 대한만국 임시정부 국무령(수반)을 지낸 석주 이상룡(1858-1932)선생이 태어난 집이다.

세칭 99칸 집으로 불리우는 이 건물은 1519년(중종 14년)에 건축되었으니 약 500년 되었다. 이상룡 선생은 독립운동을 위해 가솔들과 함께 만주로 이주하고, 이 집을 일본인에게 팔았다 한다.

후일 문중 원로들이 위토를 팔아 물렸다고 전하며, 종손 3대가 독립투쟁 중이어서 또 팔까 우려하여 지파자손 두분과 동문수학한 2인 명의로 건물만 등기하고 토지는 미등기 상태로 두었다 한다. 세월이 흘러 이 집의 소유권 문제가 복잡하게 되었고 해결이 어렵나 보다.

 

 

 

 

임청각,

안동댐 조금 못미쳐 강변에 있다.

집 앞으로 철길이 지나고 있어 주차의 공간과 시각적 제약이 따르지만 이 또한 사연이 있다한다.

 

 

 

 

 

 

 

보물 182호로 지정되어 있다는데,

물론 중간 개축은 하였지만 500년된 고택에서의 숙박체험인 셈이다.

 

 

 

 

 

 

 

건물 중앙에 대청마루가 있다. 

우측으로 보이는 곳은 현 부엌으로 사용하고 있고,

 

 

 

 

 

 

 

대청마루 좌측에 있는 방에서 하룻밤 묵었다.

 

 

 

 

 

 

 

아침 식단이다.

조촐하지만 이정도면 되지 않겠는가?

 

 

 

 

 

 

 

겸상으로 나온다.

 

 

 

 

 

 

 

모처럼 안해본 짓도 한다.

 

 

 

 

 

 

 

안동댁!

그동안 고생 많았수.

 

 

 

 

 

 

임청각의 군자정은  남자 주인이 거주하고,

우리가 묵은 방은 안주인이 기거하던 방이라 한다.

 

 

 

 

 

 

 

조식후 집안을 둘러본다.

 

세칭 99칸 건물이라 하나 실제로는 60-70칸쯤 되나보다.

건물이 복잡하여 설명은 어렵다.

 

 

 

 

 

 

 

                           

 

 

 

 

 

 

 

등 체험도 하는가 보다.

 

 

 

 

 

 

 

실제로 군불도 지핀다.

 

 

 

 

 

 

 

자녀들을 데리고 고택체험 온 여러 가족들이 있다.

이용 요금도 일반 펜션 등에 비하면 저렴한 것 같다.

 

 

 

 

 

 

 

이항증 옹

광복회 경상북도 지부 지부장직을 맏고 계신다.

 

 

 

 

 

 

 

기념촬영

 

 

 

 

 

 

 

우측 군자정을 둘러본다.

담으로 구분되어 있고, 샛문이 있다.

 

 

 

 

 

 

 

이곳 군자정은 남자 주인이 기거하던 곳이라 한다.

이곳에서도 고택체험을 한다.

 

 

 

 

 

 

 

 

 

 

 

 

 

 

 

 

 

 

 

 

 

 

 

군자정 앞의 우측 석조물 용도는 ?

 

정료대(庭燎臺) ? 정원정, 횃불료 

일부 서원 등에 보면 야간조명을 위한 석조물이 있던데.........

 

 

 

 

 

 

 

          

 

 

 

 

 

 

 

안동 고택에서의 하롯밤이었다.

 

 

 

 

 

 

 

임청각 앞에서  안동댐 방향으로 100-200m쯤,

고성이씨 탑동 종택이 있다.

 

 

 

 

 

 

 

신세동 7층 전탑으로 인하여 외형만 들러본다.

 

 

 

 

▣ 안동 하부댐 월영교 주변 산책

 

 

 

안동댐 하부댐을 가로지르는 월영교가 있다.

 

 

 

 

 

 

 

조식후,

잠깐 동안의 산책길이다.

 

 

 

 

 

 

 

 

 

 

 

 

 

 

 

 

 

 

 

 

 

 

 

 

 

 

 

 

 

 

 

 

 

 

 

 

 

 

 

월영교(月映橋)는 '달빛이 비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다리에는 조선시대 남편과 사별한 '원이 엄마'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고성 이씨 집안 며느리인 원이 엄마는 남편 이응태가 1586년 31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자 남편의 관에 자신의 머리카락을 끊어 만든 미투리와 함께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을 담은 한글 편지를 넣었다.

소설 '능소화'에는 이응태의 이른 죽음에 대한 문학적 상상력이 펼쳐져 있다.

결혼 전 원이 엄마에게는 저주가 씌어 있었다. 그녀와 결혼하는 남자는 요절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능소화가 피어난 담벼락 너머로 그녀를 우연히 보고 사랑에 포박된 이응태는 결혼을 택하고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내용이다.

관에서 나온 미투리 모양을 본떴다는 월영교는 길이 387m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나무다리다.

다리를 건너 오른쪽으로 이어진 안동호반 나들이길은 강을 보며 걸을 수 있는 명품 산책길이다.                                                    < 2015.10.8 조선일보 주말메거진>

 

 

 

 

 

 

 

 

 

 

 

 

 

 

 

 

 

 

 

 

 

 

 

월영교를 건너면 안동호반 나들이길이 있다.

 

 

 

 

 

 

 

이어,

원이엄아 테마길로도 표시되어 있다.

   

 

 

 

 

 

 

사랑병(甁)이다.

열쇄까지 달려있다.

 

 

 

 

 

 

 

        

 

 

 

 

 

 

 

         

 

 

 

 

 

 

 

나들이길 주변에 안동 석빙고도 있다.

 

 

 

 

 

 

 

 

 

 

 

 

 

 

 

           

 

 

 

 

 

 

 

이곳 까지만 왔다가 되돌아 간다.

 

 

 

 

 

 

 

안동댐 호반길 산책 후 탈춤공연을 보러 간다.

 

 

 

▣ 안동 국제 탈춤 페스티벌

 

잘 노는 사람은 건강한 사람이다. 

좋은 축제는 잘놀수 있고 즐겁다.

그래서 축제에서 잘 놀 수 있다는 것은 그 사회가 건강하다는 것과 다름아니다.

그럼 어떻게 잘 놀 것인가? 그것은 축제라는 판, 즉 사람들이 모두 모이는 열려진 판에서 자신의 신명을 발휘하는 것이다. 폐쇄적인 공간에서의 놀이는 개인적일 수밖에 없으며 고인물처럼 썩기 쉽다. 그래서 끊임없이 열린판, 닫히지 않도록 유리창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좋은 축제는 이러한 판을 만들어준다.

 

연회자, 관객 모두가 공연자

공연자와 관객이 격이 없이 어울린다.

공연자만의 판이 아닌 너스레와 덕담을 통하여 관객과 함께 판을 만들어간다.

공연자는 걸펑진 판을 위하여 정해진 각본없이 주변의 사람들에게 말을 던진다.

관객은 서슴없이 그 판에 뛰어들어 대사를 엮어간다. 그래서 관객은 이판의 주인공이다.

눈요기만 하고 구별하는 판이 아니다. 이러한 것을 거부하고 전통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고자 만들어진 축제가 탈춤페스티벌이다.

탈춤의 온전한 신명이 있고 새로운 세상에 염원으로 만들어진 판이다. 그래서 여기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가 그러한 살아있는 에너지를 가지고자 적극적으로 자신의 본연의 신명을 표출하여야 한다.

 

탈속에 숨은 진실을 드러내야 신명이 난다. 

춤은 몸 동작이며 그것을 살아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탈은 위선을 던지고 자신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문화장치이다.

이러한 두 가지 요소가 합쳐 판을 만든다.

여기서는 모두가 주인이며 모두가 공연자이다.

탈춤은 자신만의 대사가 아닌 우리모두의 대사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자신의 신명을끄집어 내어 판에 뛰어드는 것 함께 대사를 만들어가는 것 이것이 바로 탈춤을 즐기는 것이다.

따라서 탈춤축제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가 주인의식으로 모든 대상에 응대하여야 한다.

광대의 너스레에 서슴없이 대답을 해주고, 뒷풀이판에 모두가 함께 풍물장단에 맞추어 몸을 흔들어야 한다.

아이들은 아이들의 의식으로 어른들은 어른들의 의식으로 판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그 모습은 언제나 같은 장단 같은 환희의 율동이다.

 

주인의식이 건강한 판을 만든다. 

탈과 모습은 다르지만 모두가 한 풍물장단에 춤을 추며 대동의 장을 만든다.

외국의 다양한 공연, 탈춤도 마찬가지이다.

"세계도 하나 신명도 하나"라는 슬로건에서 보이듯 춤과 열정, 신명에는 인간, 아니 생명체는 하나이다.

탈춤축제에서 탈춤을 즐기는 법은 다시 말하지만 간단하다.

바로 판의 주인으로 당당하게 행세하는 것 그것이다.

 

 

 

 

 

 

 

탈춤공원으로 이동하였다. 

 

 

 

 

 

 

 

 

 

 

 

 

 

 

 

 

 

 

 

 

 

 

 

 

 

 

태국팀의 공연이다.

 

 

 

 

 

 

 

 

 

 

 

 

 

 

 

 

 

 

 

 

 

 

 

 

 

 

 

 

 

 

 

 

 

 

 

 

 

 

 

 

 

 

 

 

 

 

 

 

 

 

 

 

 

 

 

 

 

▼ 인도네시아

 

 

 

         

 

 

 

 

 

 

 

 

 

 

 

 

 

 

 

 

 

 

 

 

 

 

 

 

 

 

 

 

 

 

 

 

 

 

 

 

 

 

 

 

 

 

 

 

 

 

 

 

 

 

 

▼ 카자흐스탄 편

 

 

 

태국, 인도네시아 등 동양인에 비해 늘씬하다.

잘생겼다.

 

 

 

 

 

 

 

 

 

 

 

 

 

 

 

 

 

 

 

 

 

 

 

 

 

 

 

 

 

 

 

 

 

 

 

 

 

 

 

 

 

 

 

 

 

 

 

 

 

 

 

 

 

 

 

 

 

 

 

▼  주변, 이곳 저곳

 

 

 

          

 

 

 

 

 

 

 

          

 

 

 

 

 

 

 

          

 

 

 

 

 

 

 

진도 특산물 코너이다.

 

 

 

 

 

 

 

 

 

 

 

 

 

 

 

탈춤공원 정문이다.

 

 

▣ 까치구멍집

 

헛제사밥

옛부터 제사를 지낸후 제사음식으로 비빔밥을 해 먹던 안동지방의 풍습에 따라 평상시 제사가 없을 때에도 제사 음식과 같은 재료를 마련하여 비빔밥을 만들어 먹었는데 각종 나물과 어물, 산적, 탕국이 함께 곁들여진다.             

 

 

 

안동하부댐 주차장 건너편에 있다.

 

 

 

 

 

 

 

이집은 헛제사밥으로인해 많은 분들이 찾는 집이다.

안동엔 안동간고등어,  안동찜닭, 안동식혜, 안동소주 등 안동 이름이 들어있는 여타 음식도 있다.

 

사모님들, 안동에 유명한 온천이 있다느데.........

학가산 온천으로 이동하여 온천욕으로 1박2일 일정을 마무리 한다.

내년 1월 마지막주,

태안의 끝, 안흥항에 가면 옹도 유람을 할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