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

영주, 봉화여행 / 무섬마을, 소수서원, 부석사, 닭실마을

정헌의 티스토리 2018. 10. 30. 23:08

           ■ 영주, 봉화여행 / 무섬마을,  소수서원,  부석사,  닭실마을

 

               산청선비대학 현장학습 일정이다,

               영주 무섬마을, 소수서원, 부석사를 둘러보고 봉화로 이동하여 닭실마을을 둘러본다,

               가을 한창 무르익는 날, 평일인데도 불구하고 나들이 나온 분들이 많다,


           ▷ 여행코스

               무섬마을 - 소수서원으로 이동하여 중식 및 소수서원 - 부석사 - 닭실마을.


           ▷ 여행후에  (2018. 10. 26)


               ▣ 영주 무섬마을   


                이 마을은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과 서천이 마을 동쪽 500m지점에서 합류하여 마을 전체를 태극 모양으로 한 바퀴

                   휘감아 돌고 있어, 마을이 마치 물위에 떠 있는 섬과 같다고 하여 무섬이라 불리고 있다, 

                   마을 입향조인 박수(반남박씨) 선생께서 1666년(현종7) 강 건너 '머름' 에서 이곳으로 들어와 마을을 개척하여 터

                   전을 이루었다.  그 후 박수 선생 손자의 사위인 김대 (선성김씨) 선생께서 영주에 있는 삼판서 고택에서 이마을로

                   들어와 함께 살게 되어 지금가지 반남박씨와 선성김씨 두 성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이 마을은 자연 지리적 조

                   건을 최대한 활용하여 뒤로는 산을 배경으로 하고 앞으로는 강을 향하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형태이다,  

              예로부터 많은 선비들을 배출한 부촌으로, 한때는 마을 소유의 토지가 30리 밖에까지  이르렀으나  정작 마을에는

                   농지가 없어 강을 건너 가서 농사를 지었다, 일제강점기에는 3.1만세운동 이후로 각처에서 활동하던 애국지사들이

                   일본 경찰의 탄압과 감시를 피해 이곳으로 본거지를 옮기고 동네 주민들과 함게 아도서숙 (亞島書塾)을 건립하여

                   애국 계몽운동과 독립운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마을에는 해우당 고택, 만죽재 고택 등을 비롯하여 규모가 크고 격식을 갖춘 입구자형(口字形) 가옥, 까치구멍집,

                   겹집, 남부 지방 민가 등 다양한 형태의 구조와 양식을 갖춘 집들이 많이 있어 전통주거 민속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맨 좌측 상단 무섬교, 좌측 수도교.

          앞쪽 외나무다리, 우측 상단 제2 외나무다리.








              무섬마을 찾아가는 길이 멀다,



              우릴 태운 관광버스 기사양반 무슨 연유인지 가까운 길 놔두고 복후면 월전리로 뱅뱅 산을 넘고 

              중앙선 없는 길을 따라 영주댐 옆을 지나 무섬마을 후문?인 무섬교 앞에 내려준다,

              30분여는 더 소요된것 같다,

              이곳 무섬교앞 삼거리에서 무섬마을 까지는 0.9km를 알리는 이정표가 있다,

 



 




            관광버스 진입금지를 알리는 안내표지가 있어 도보로 간다,








           봉화군의 여러 골짜기에서 발원하는 내성천은 영주의 여러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서천과

           이곳 무섬마을 상부에서 만나 내성천을 이루며 무섬마을 앞을 휘돌아 간다,








           무섬마을을 알리는 표지판 뒤로 두러 건물이 뭔지 모르겠다,








          마을이 시작된다,








           섬식당.








            우선은 둑방을 따라 마을을 바라보며 외나무 다리로 간다.








             승용차는 무섬마을내로 진입 할 수 있다,








              수도교,


              마을 앞에 있는 다리이다,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이 다리를 건너 무섬마을을 둘러보게 되지만

              우리는 마을 동쪽 1km쯤 거리에 있는 무섬교에서 이곳으로 왔다,








             마을을 감싸는 제방이 마을보다 조금 높다,

           







             먼저 외나무다리로 간다,

             단연 인기있는 곳이다,

























           폭 30cm 정도의 통나무을 반으로 잘라 다리를 놓았다,

           몰살이 흐르니 조금 어지럽기도 하다,
















































              상류 수도교쪽,





 



              하류쪽,








            되돌아 간다,
















              무섬마을을 둘러본다,








                일명 마당넓은 집.








            하류쪽에서 시작하여 마을 안길을 따라 상류쪽으로 둘러 볼 것이다,








              마을 우측 끝,

              체험수련관은 저만큼 떨어져 있다,








               저곳에도 제2외나무 다리가 있다,





 



             전통한옥 체험수련관








               되돌아 이곳 저곳 마을을 둘러본다,















                수도리 김규진 가옥 ?



                안내표지판 위치가 애매하여 이 집인지 모르겠다,

                안내문에 따르면 정면3칸, 측면 2칸으로 구성된 6칸 까지구멍집이다,

                까치구멍집이란 태백산을 중심으로 강원도 지역과 경상도 북부지역에 분포하는 산간벽촌의 서민주택으로

                지붕마루 양단의 하부에 만든 까치구멍에 의해 붙여진 이름이다,

                이 가옥은 일반적인 6칸 가치구멍집의 평면 구성에서 마구간이 있어야 할 자리에 사랑방을 설치하고 외부

                로 통할 수 있도록 세살문을 달았다,

                마구간 자리에 사랑방이 위치한 것은 6칸 까치구멍집의 초기 변화단계로서 겹집의 발달 과정을 보여주는

                과정을 보여 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수도리 김위진 가옥



              정면 5칸, 측면 5칸 반의 목조로 된 기와집으로 홑처마에 ㅁ자형 건물이다,

              건물 전면의 사랑채는 사랑방과 연접된 1칸 사랑마루가 좌측으로 나와 있어 편 날개집을 형성하고 있으며,

              사랑채 앞면에는 툇마루를 설치하고 헌함(軒檻)을 둘렀다, 5량가(五樑架 / 전후 처마도리와 중도리 및 마루도리의

              5개의 도리로 구성한 지붕틀)의 소로 수장집(도리 및 장여 밑에 소로를 받쳐서 장식한 집)이며 팔작지붕을 올려 사

              랑채로서의 격식을 갖추었다.

              건물 안채는 대청을 중심으로 좌측과 우측에 도장방과 안방이 자리하고 있다, 안방 앞쪽으로는 부억과 고방이 전면

              의 마구와 연결되면서 우익사를 형성하였다, 도장방 앞으로 상방과 작은 부엌이 사랑방 뒤의 중방과 연결되면서 좌

              익사(翼舍 / 주 건물의 좌우에 붙여서 한집채로 지은 부속건물)를 이루고 있다,

              19세기 말기에 건립한 집이나 마구간이 주택내에 설치된 점, 사랑채에서 안채로 진입하기 위한 문을 사랑 부엌쪽으

              로 낸 점으로 보았을때 평면구성에서 옛날 형식을 따르고 있다,





























              무송헌 종택,
















                무섬마을의 안내표지판은 담의 경계가 없거나 그 위치가 애매한 곳에 설치되어 있어

                어느집을 말하는지 잘 모르겠다,

             







               만죽재



               만죽재 고택은 마을의 입향시조(入鄕始祖)인 반남박씨 휘(諱) 수(수 1641-1729)가 마을 서편 강건너 머럼 (원암)에

               거주하다가 헌종7년(1666)에 이곳에 들어와 최초로 지은 집이다,

               원래 당호는 섬계초당(섬계초당)이었으나 입향조의 8대손인 승훈이 중수하고 당호를 만죽재라 하였다,

               무섬마을 중심부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고, 건물의 평면구성은 안마당을 중심으로 정면에 5칸의 정침을 두고 양쪽에

               익사를 달았으며, 전면에 사랑을 두어 전체적ㅁ자형 평면을 구성하고 있다,

               안채와 좌.우익사는 납도리 삼량가로 간결하게 처리하였으나 사랑채만은 그 격을 높여 전면에 원주를 세우고 오량가

               에 합각지붕을 얹었다,

               이 마을에 산채하고 있는 ㅁ자형 가옥 중 건립연대가 가장 오래된 집으로 당시의 평면구성을 잘 유지하고 있다,








               본채는 ㅁ자형 건물로 좌측에 있고

               이곳 작을 대문을 지나 들어가면,















               섬계초당(剡溪草堂)이 있다,








              섬계초당은 뒷편 조금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마을이 내려다 보인다,





 



              만죽재 고택의 대문은 우측 계단위의 작은 대문을 통하여 들어가게 된다,

              언듯 보기에 ㅁ자형 건물 내부의 마당은 좁다,























               초가 까페 이채색








              박천립 가옥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구성된 6칸 까지구멍집이다,

              앞 부분의 붕당을 중심으로 좌측에 사랑을 두고, 우측에 부엌을 두었다. 뒷부분에는 마루를 중심으로 좌측에 좌측에

              상방을 두고 우측에 안방을 두었다,

              일반적으로 마구가 있어야 할 자리에 사랑방이 있고, 사랑방 앞면과 옆면, 상방 옆면에 외부로 통하는 문을 설치하여

              개방성을 주고있다,

















              섬계고택








                이 건물(섬계고택)도 ㅁ자형 건물이다,








              기와 또는 초가의 이 작은 건물은 화장실.








            이곳은 일계고택(逸溪古宅)


















                  김뢰진 가옥?


                  이 가옥은 사랑채와 정침인 기와 까치구멍집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침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인데 일반적으로 마구간이 있어야 할 자리에 사랑방이 위치하고,

                  마구간은 후에 건립된 사랑채로 이동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1칸반의 一자형 건물이며 부엌 옆에 마구간이 설치되어 있다. 사랑방은 전면에

                  쌍여닫이 세살문을 달고 툇마루를 설치하는 등 정침에 비해 발달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













































              吾軒幽居 (오헌유거 )  / 나의 조용한 삶



               剡溪一曲流  爲我卜居幽 (섬계일곡류  위아복거유)   평온한 시냇가 한구비 물가에다 조용한 나의 살곳 정했도다.

               草漲眠黃犢  沙明檼白鷗 (조창면황독  사명은백구)   초원 모래톱엔 송아지 잠들고 밝은 모래밭엔 해오라기가 평온하네

               山光當戶暎  水勢繞檻浮 (산광당호영  수세요함부)   산빛은 마땅히 나의집 비추고 물굽이 잠기는 곳 난간이 떠 있는듯

               未罷漁樵話  於焉月上樓 (미파어초화  어언월상루)   어부와 나무꾼 이야기도 끝나기전 어느새 둥군달 누각위에 떠 있네.



                                                                 五軒  朴齊淵 (오헌 박재연)
















                해우당 고택








                해우당 고택은

                선성(宣城)김씨(=예안김씨) 입향조 김대의 셋째집 손자 영각(1809-1876)이 1830년에 건립하였고, 고종때 의금부

                도사를 지낸 김낙풍이 중수하였다,

                건물의 평면구성은 전면의 대문을 중심으로 좌우에 큰 사랑과 아랫 사랑을 두었는데, 특히 우측의 큰사랑은 지반을

                높여 원주(圓柱)에 난간을 돌려 누마루를 꾸몄다,  정면 5칸의 안채에는 대청마루 좌우로 상방과 안방을 두고 부엌

                과 고방으로 좌우익사를 구성하였다,  안대청의 상부는 판대공에 첨차를 십입하여 종도리를 받게한 것이 독특하다,

                경상북도 북부지방의 전형적인 ㅁ자형 가옥의 평면구성을 잘 갖추고 있고, 수도리에서 규모가 가장 큰 집이다,

                사랑채에 걸려있는 해우당의 편액은  흥선대원군의 친필이다,

















              무섬마을 안내소,
























































                 관광안내소 옆에 김성규 가옥(조지훈 처가)을 알리는 안내표지판이 있다,



                 김성규는 무섬마을 만운고택에서 김휘걸의 차남으로 태어나 장남인 김호규와 각별한 우애를 나누며 같은 울타리

                 안에 집 두채를 지어 함께 살았는데, 큰  홍수로 김성규 가옥이 유실됨에 따라 이곳으로 이사하여 살았다,

                 그러나 이가옥마져 잦은 수화와 풍화를 겪으면서 폐옥이 되어 빈터로 남아 있던 중 근년에 복원하였다,








            김성규가옥은 안내표지판이 어중간한 곳에 위치하고 있어

            어느 곳이 김성규 가옥인지 모르겠다,








        무섬마을을 둘러보고  마을앞 수도교 건너편 버스로 간다,





 



              수도교에서 바라본 내성천 상류,





 




                  하류,

                  저만큼 외나무 다리가 희미하다,








              무섬마을 건너편 동산,








               정자인가?

               약 1시간 무섬마을을 둘러보고  소수서원으로 향한다,




 

             ▣ 소수서원  











            소수서원과 선비촌은 서로 접하여 있다,








                선비촌 주차장으로 왔다,

                소수서원 주차장과는 가까운 거리이나, 점심 예약된 식당이 선비촌 입구에 있어 이곳으로 왔다,








               사진상으로 개략적으로 훝어보면

               좌측 뒷편으로 선비촌이 있고, 정면 뒷쪽으로 소수박물관, 우측으로 소수서원이 있다,

               도로를 건너 앞쪽 약간 거리를 두고 순흥서원이 있다,








                영주 선비상
















            선비촌 들머리에 몇몇 음식점이 있다,

            이곳은 종가집,








             청국장과 파전에 생탁을 곁들였다,









              저만큼 선비촌 매표소,



              어른  3,000퉌, 청소년 2,000원, 어린이 1,000원 / 1인

              주차료는 없다,
















             선비촌 매표소를 들어서면,








            좌측 선비촌,  직진 소수박물관, 우측에 소수서원이 있다.








             선비촌 매표소에서 소수서원 경내를 거쳐 소수서원 주차장 인근으로 왔다,



             문화유산 해설사를 만나, 소수서원 정문에서 부터 서원 설명을 듣기 위해서다,

             당간지주가 보인다,

             소수서원의 자리는 본래 숙수사(宿水寺)라는 절이 있던 곳이란다, 절의 흔적은 이 당간지주나 소수서원 사료전시관

             마당에 모아놓은 석탑의 조각들이 남아있는데 1953년 손바닥만한 금동불 수십구가 발견되기도 했단다,





 



                소수서원 주차장에서 소수서원으로 들어서는 중간 소나무 숲이 좋다,








             서원은 성리학의 교육기관이다.



             1542년 풍기 군수로 부임한 주세붕이 부임 사흘째 되는 날 죽계계곡으로 나들이를 했다,  숙수사(宿水寺)라는 절이 있던

             곳이다, 때는 가뭄이 연거푸 들어 계곡물은 말랐으나 신임 군수의 눈에는 이리 보였다,  '안향선생이 노래했네. 신령스런

             거북이가 산봉우리에 앉아 있고 시냇가에는 백 척 누각 우뚝하다고, 실로 산수가 중국 여산(廬山)에 못하지 않아, 골짜기

             에 흰구름이 가득하구나,' (주세붕, 죽계지(竹溪志), '목사 안위에게 보내는 편지'). 그래서 주세붕은 이 골짜기를 백운동

             이라 이름짓고 안향을 기리는 사당을 지었다,

             안향은 1289년 고려때 원나라에서 성리학을 들여온 학자 겸 관료였다, 충주목사 안위는 안향의 11세손이었다, 죽계계곡

             이 있는 순흥은 안향의 고향이었다, 중국 여산은 송나라 유학자 주희가 중국의 첫 서원인 백록동 서원을 만든 곳이다,

             그래서 ~,

                                            






                해가 지나고 1543년 주세붕은 백운동에 조선 첫 서원을 세웠다,  산수는 여산과 같고  이름은 백록동과 유사했으며

                고려 성리학 원조 안향의 고향이었으니 딱이었다,  이름을 '백운동서원'이라 지었다,  사당을 지을때 신임군수는 토

                지신에게 제사를 올렸는데, 하늘이 도왔는지 땅을 파자  한 자(尺)도 못 돼 놋쇠 120근이 나왔다, 이듬해 이를 팔아

                '사서삼경'과  '주자대전', '통감강목' 따위 서적을 사고  민간이 불법으로 쓰고있는 국유지를 회수해 서원경비를 조

                달했다.








 

             '겨울에 천둥이 치고 여름에 서리가 내리며 지진이 일어나고 가뭄이 심하니 재변이 이처럼 심한적이 없던' (1542. 중종실록

               5월 15일)때였다, 1542년부터 1543년까지 3년동안 '중종실록'에는 가뭄에 관한 기록이 51번 나온다,  "신임 군수가 세상

               물정에 어둡다"는 주의 힐란에  주세붕은 이렇게 답했다,  "실로 교육은 난리를 막고 기근을 구제하는 것보다 급한 것이다.

               誠以敎急於已亂救飢也"  힐란이 계속되자 주세붕은 격하게 대답했다, " 아, 회옹(晦翁)이 어찌 나를 속이겠는가!"  (죽계지

               서문) 회옹은 송나라 서원 창시자 주희다. 송나라가 망하고 피비린내 나던 금나라 피지배 시절에 주희가 서원을 세웠으니,

               흉년에 서원을 만들어도 틀림이 없다는 뜻이었다, 왜 하필 사립교육기관인  '서원'이었는가, 왜 하필서기 1543년이었는가.



                                          <세상을 바꾼 서기 1543년 / 박종인의 땅의 역사 중에서 >








             소수서원은 주세붕으로 부터 시작되었다,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은 우리나라 성리학의 선구자 안향선생이  젊어서 공부하던 이곳 백운동에 중종37년

             (1542) 영정을 모신 사묘(祠廟)를 세웠다,

             그리고 이듬해에 중국에서 주자가 세운 백록동 서원을 본떠 양반자제 교육기관인 백운동서원을 세웠다,

             그후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부임하면서 명종5년(1550) 왕에게 진언을 올려 소수서웜(紹修書院)이라는 현판

             을 하사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백운동 경(敬)바위,









            경이직내 의이방외 (敬以直內 義以方外)를 경(敬)아란 한 글자로 드러낸 것이라 한다,

            곧 경으로써 마음을 곧게하고 의로써 밖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반듯하게 한다'는 뜻이니 그 글자를 보며 행동을

            바로잡으로는 의미이다,

            다른 얘기로 숙수사를 폐찰하면서 불상들을 죽계천에 모두 버렸더니 밤마다 울음소리가 들려와서, 퇴계 이황이

            경자를 새겨 공경하는 뜻을 나타냈더니 그제야 소리가 그쳤다는 애기며, 단종 복위운동에 스러져간 선비들의

            혼백을 달래려는 것이라는 얘기 등이다,


                              <소수서원. 답사여행의 길잡이 10 경북북부, 초판 1997. 2010. 돌벼개>
















               당일 비로 인해서인지 소수서원 내에서 찍은 사진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먼저 강당인 명륜당과 마주하게 된다,

               백운당 이라는 현판이 달려 있는 이 강학당은 동향으로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기와지붕이다,

               강당안의 대청 북쪽문에 명종의 친필인 紹修書院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소수서원 강학당 뒷편에 있는 일신재(日新齋)와 직방재(直方齋)라는 선비들의 기거공간인 동재와 서재가 있다,

               이웃해 학구재와 지락재가 있으나 사진이 어디론지 사라지고 없다,

               이곳은 유물전시관 앞 옛 절터의 유물이 있다,
















                 당일 문화유산 해설사와 함께하였더니 소수서원을 둘러보는데 50분여 소요되었다,

                 선비촌 주차장으로 되돌아 간다,





                 ▣ 영주 부석사











                  부석사 주차장으로 왔다,







   


               이곳 부석사 입구 주차장 일원에서 영주 사과축제가 열린다,








              주차장 주변으로 제법의 식당가가 형성되어 있으며,

              분위기도 좋아보인다,








              상가지대를 지나 오르면 우측편에 작은 연못이 보인다,








               또한 옹기나라 이정표가 소박하다.








             부석사 가는 길,








              부석사는 삼국통일기인 676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절이다,



              당나라 종남산 화엄사에서 지엄을 스승으로 모시고 불도를 닦은 의상이 670년 당나라가 신라를 침공하려 한다는

              소식을 전하려고 돌아온 뒤 다섯 해 동안 양양낙산사를 비롯하여 전국을 다니다가 마침내 수도처로 자리를 잡은

              곳이란다,








              매표소

              1,200원 / 어른 1인








               은행나무 숲길을 따라,








              일주문을 지난다,
































              부석사 당간지주,


              절에 법회나 기도 등의 행사가 있을 때 절의 입구에는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깃대를 당간이라 하며,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이 기둥의 높이는 428cm이며. 마주보는 안쪽 측면과 바깥쪽 측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고, 앞면과 뒷면에는

              3줄의 세로줄이 새겨져 있다,
































                천왕문을 지나오르면,

                양쪽으로 삼층석탑이 있다,








                고루,








              이 탑은 부석사에서 약 200m 떨어져 있는 옛 절터에 남아 있던 두 탑으로, 1966년 이곳 부석사로 옮겨 세웠다,

              탑을 옮길 때 세워 놓은 비석에 의하면 서쪽의 탑은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에서 나누어 온 사리를 모시고 있다고

              한다. 동탑의 높이는 360m, 서탑은 377m,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것으로 두 탑의 양식은 같다.

              전체적으로 짜임새가 있고 정제된 모습으로 통일신라시대 후기 양식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저만큼 부석사 편액을 달고 있는 건물이 안양루다, 



              일반적으로 누각은 개방된 산야에 위치하는 것이 보통이나  이곳에서와 같이 사찰 경내에 자리 잡고 있는 경우도

              적지않다, 우리나라 사찰은 대부분 산 속에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대중 집회를 여는 장소가 협소하다, 이 문제

              를 해결하기 위하여 법당 앞마당 끝에 누각을 지어 법회나 강학공간으로 사용한 것이 사찰 누각의 연원이다,

              누각이 사찰 정면 경사지에 지어진 관례로 법당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밑을 통과해야 하는 경우가 생

              기게 된다,        








               사찰 누각은 원래 경관 감상보다는 실용적인 목적으로 지어진 경우가 많기 때문에 정면 5칸 내지 7칸 또는

               그 이상의 규모로 된 것이 흔하고 , 마당쪽을 제외한 나머지 삼면이 판벽이나 여닫이문으로 마감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곳의  안양루는 규모가 작고 사방이 훤히 트여있어 산간 정자와 같은 아취와

               격조를 보여준다,








                 누각은 바라만 봐서는 아무 소용이 없고, 누에 올라본 뒤에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다,

                 안양루에 올라 아래를 굽어보면 마치 허공의 바람을 타고 하늘 위로 두둥실 떠올라 있는 느낌이다.  난간과 기둥

                 사이를 스쳐가는 바람은 상쾌하고 시원하다, 새 날개처럼 펼쳐진 기와지붕 위로 소백산맥 연봉들이 잠깐 일어났

                 다가 다시 엎드리고 끊어질듯 이어지면서 서쪽으로 달리고 있다, 안양루 기둥사이로 펼쳐진 광활하고 황홀한 경

                 치는 탐승객의 눈과 마을을 즐겁게 하고 답답한 마음을 풀어주기에 충분하다,








                부석사 무량수전 (국보 제 18호)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본당으로 극랑정토의 아미타여래(국보 제 45호)를 모시고 있다, 

                신라 문무왕때 의상대사 (602 - 702)가 부석사를

                창건할 당시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나 그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고려 헌종 7년에 원융국사가 고쳐지었으며, 고

                려 공민왕 7년에 외적에 의해 불에 타, 고려 우왕 2년 원응 국사가 다시 지었다,

                국내 두번째 오래된 목조건물로, 건물의 조화와 안정을 위해 기중 중간 부분을 불록하게 만든 배흘림기둥으로 유명하다,              








                부석,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불전 뒤에 큰 바위 하나가 옆으로 섰고 그 위에 큰 돌 하나가 지붕을 덮어놓은 듯하다,

                 얼른 보면 위아래가 서로 이어진 듯하나 자세히 살피면 두돌 사이가 서로 눌러져 있지는 않다, 약간의 빈틈이

                 있어 새끼줄을 건너 넘기면 나고 드는데 걸림이 없어 그제야 비로소  떠있는 돌인줄 알게된다. 절이 이 돌 때

                 문에 이름을 얻었으나 이 이치는 알수없다' 하였으나 아무리 봐도 떠 있는 돌은 아니다,
















             부석 아랫쪽으로 내려가는 길이 곱다,








            인근 노상에 불상을 모셨다,
















                아랫쪽에서 올려다 본 부석,








              무량수전으로 되돌아 왔다,


              무량수전은 현재 부석사의 주요 불전으로 아미타여래를 모시고 있다, 서방 극락을 주재한다는 아미타여래는

              끝없는 지혜와 무한한 생명을 지닌 분이라 하여 다른 말로 무량수불이라고 한다,

              그러한 부처님을 모신 전각이니 무량수전이다,

      







                안양(安養)이란 극락, 무량청정토, 안락국의 다른 이름으로 아미타불이 주재하는 불교의 정토를 말한다,

                안양루가 서있는 곳은 무량수전 마당이 확장된 곳이다, 무량수전은 아미타불의 상주처이기 때문에 이 일대의 공간은

                극락정토로 상징화된다, 그런 공간 안에 들어서 있으므로 안양루는 극락정토의 누각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안양

                루에 올라 시야를 무한대로 확장해 바라보는 저 너머의 세계는 사바 세계가 되는 것이다, 안양루에 오른 탐승객은 결

                국 자신이 몸 담았던 사바세계를 극락정토에서 회고하는 셈이다.

                사람이 즐거워하는 것은 마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있다. 마음이 진실로 편하다면 어떤 곳에 가 있더라도

                즐겁게 살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이 불편하다면 아무리 빼어난 승경을 앞에 두고도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아름다운

                경치 속에 있으면서 마음까지 편하면 그보다 좋은 것이 없을 것이다. 안양루가 바로 그런 곳이다,


                                                   < 안양루 관련글은 허균님의 누와 정에서 가져왔다,>
























             석탑 앞쪽에서 바라본 무량수전,








              조사당으로 간다.








             조사당은 국보 제19호로 지정되어 있다,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대사 (625 ~ 702) 상을 모시고 있는 곳으로, 고려 우왕 3년 (1377)애 세웠고, 조선 성종 21년 (1409)에

             다시 고쳤다,  고려 신종 4년인 1201년에 단청을 하였다는 기록도 확인된 바 있어 세원진 연원을 더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출입문 좌우 안쪽 벽에는 고려시대 그려진 제석천과 범천 그리고 사천왕상이 있었는데  1916년 건물을 수리하면서 떼어내여

             무량수전에 보관하다가 지금은 부석사 성보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우리나라 사원 벽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것 이며 고분벽화

             를 제외하면 가장 오래된 채색 벽화이다, 

             조사당 앞 처마 밑에는 의상스님이 사용하던 지팡이를 땅에 꽃았더니 나라났다는 전설이 깃든 골담초가 있다,









                 조사당이 고려말 또는 조선초기 건축물이고, 의상은 신라시대 인물이니 지팡이 전설이 맞는지 모르지만, 택리지에 소개하는

                 내용을 옮겨본다,

                

                 절 문밖에 살아나는 모래가 덩어리져 있는데 있는데 옛부터 부서지지도 않고  깎으면 다시 솟아나서 살아 있는 흙덩이 같다.

                 신라 때 승려 의상이 도를 깨치고 장차 서역 천축국으로 떠나면서  거처하던 방문 앞 처마 밑에다 지팡이를 꽃으면서  "내가

                 간 뒤에 이 지팡이에서 반드시 가지와 잎이 날 것이다,  이 나무가 말라죽지 않으면 나도 죽지 않은 줄 알아라" 하였다, 의상

                 이 간 후에 절 스님은 의상의 상을 빚어서 그가 거처하던 곳에 안치하였다. 나무는 창 밖에서 곧 가지와 잎이 나왔으며, 비록

                 햇빛과 달빛은 비치나 비와 이슬에는 젖지 않았다, 늘 지붕 밑에 있으면서 지붕을 뚫지않고, 겨우 한 길 남짓한 것이 천 년이

                 지나도 하루 같다.








                 광해 때 경상감사 정조가 절에 와서 이 나무를 보고  "선인이 짚던 것이니 나도 지팡이를 만들고 싶다" 하면서

                 톱으로 자르게하여 가지고 갔다, 그러나 나무는 곧 두줄기가 다시 뻗어 전과 같이 자랐다, 인조 계해년에 정조

                 는 역적으로 몰려 참형을 당하였다, 나무는 지금까지 사시에 늘 푸르며, 또 잎이 피거나 떨어짐이 없는데 스님

                 들은 비선화수(飛仙花樹)라 부른다,









              옛날에 퇴계가 이 나무를 두고 읋은 시가 있다,



              옥을 뽑은 듯 정정하게 절 문에 의지했는데

              스님의 말로는 지팡이가 신령스러운 나무로 화했다 한다,

              지팡이 꼭지에 제대로 조계(曹溪) 물이 있는가,

              건곤이 내리는 비와 이슬의 은혜를 힘입지 않는 구나


              擢玉亭亭기寺門(탁옥정정기사문)  僧言錫杖化靈根(승언석장화영근)

              杖頭自有曹溪水(장두자유조계수)   不借乾坤雨露恩(불차건곤우로은)

























                 자인당으로 왔다,


                 북지리 석조여래좌상,

                 자인당에 있는 세분의 불상은 원래 부석사 동쪽 절터에 있었던 것을 옮겨놓은 것인데 보물 제 20호로 지정된 불상은

                 세 분의 석조여래좌상 중에 양편에 모셔진 두 분의 비로자나불상이다,

                 대좌와 광배가 완벽하게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 석불로 8각의 하대석에는 향로와 사자상이, 중대석에는 앉아있는

                 형태의 불상과 연꽃 등을 공양하는 보살상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동족 불상은 얼굴이 타원형이며 약간의 미소를 머금은 흔적이 있으며, 서쪽 불상은 동쪽 불상보다 좀 더 당당하며 신

                 체웅 표현하는 선들이 부드러운 편이다,

                 세 분의 불상 중에 가운데 모셔져 있는 불상은 2010년 2월 24일 보물제1636호로 지정된 '영주 부석사 석조석가여래

                 좌상'이다. 동그란 얼굴, 항마촉지인의 수인과 꽃 문양이 조각된 승각기(내의, 內衣), 부드러우면서도 사실적인 옷 주

                 름의 표현, 높은 삼단의 대좌에 부조된 향로와 사자, 합장한 보살상 등에서 통일신라 9세기의 불상 양식을 찾아 볼 수

                 있다, 세 불상 모두 부석사 인근의 절터에서 발견되었으며  조각수법이 같다는 점에서 같은 시기에 동일인에 의해 제

                 작된 것으로 보인다, 


                                                                          < 안내문에서 >








                 조사당과 자인당을 둘러보고 되돌아 내려간다,








































                 무량수전으로 되돌아 왔다,








                 무량수전 앞, 안양루.








                 무량수전으로 오를때 절 가운데로 난 길을 따라 올랐다면,

                 이번엔 옆 도로를 따라 내려간다,
















                안양루와 무량수전,
























































































































































               약 1시간여 부석사를 둘러보고, 봉화 닭실마을로 이동한다,





               ▣ 봉화 닭실마을












            봉화군 봉화읍 유곡1리에 자리잡고 있는 닭실마을은

            안동권씨 가운데 충재(沖齋) 권벌(權橃, 1478 ~1548)을 중심으로 한 일족의 집성촌이다,








          닭실마(유곡)은 권벌이 중종14년 기묘사화때 파직 당하여 물러나와 1521년 파평윤씨의 터전이었던 내성 유곡에

          입향하여 세거지를 형성하였다,








               닭실마을은 마을앞에서 마을을 바라보았을때 양쪽 끝에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이곳은 우측의 주차장이고, 좌측 끝에는 충재 박물관이 있다,








                마을 앞길을 따라 충재박물관 쪽으로 간다,

                충재 박물관은 마을 끝에 있다,             








              무섬마을처럼

              마을 안길을 따라 이곳 저곳 둘러보지는 않았다,
















                중간 중간 골목 안길,








































             마을 앞길을 따라 중재박물관으로 왔다,

             이곳에도 주차시설을 갖추고 있다,








                이곳 박물관 앞에 충재선생의 청암정이 있다.








               청암정 대문이 작다,

               안채로 연결되는 대문 또한 이정도 크기이다,









                 청암정은 계곡 주변의 경치 좋은 곳도 아니고, 분위기 그윽한 심산유곡도 아닌 마을가에 위치하고 있다,

                 주변에 논밭이 널려있고, 사람들이 다니는 평범한 길가에 자리를 잡았다.

                 그 이유는 이곳에 집채만한 바위가 있기 때문인가 보다,

                 바위 위에 정자를 세우고 주변에 연못을 만들어 나무를 심었다.








               크고 넓직한 거북 모양과 같은 자연석 위에 형세에 따라 교묘히 기둥을 세워 지은 T자형 정자이다,

               거북바위 주변으로 연못이 조성되어 있고, 주변에는 향나무, 왕버들나무,  소나무가 우거져 있다,
























               보통 정자는 문인이나 학자들의 교류장소였다,

               정자의 빼어남은 기본적으로 주변 풍경이나, 자리 앉음새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누가 그 장소에 와서

               교류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유학자들의 교류의 흔적들이 정자에 많이 나타나면 날수룩 그 정자의 중요성은 크지는 것이다,

              전서체의 청암수석(淸巖水石)이라 씌인 현판은 미수 허목(許穆, 1595 ~1682)이 쓴 글씨라 한다.

              미수 허목은 이 정자의 아름다움에 대한 소문을 듣고 직접 찾아가고 싶었으나 결국 못가고  그 아쉬운 마음을 담아

              별세  3일 전에 편액글시 '청암수석'을 써 보냈다 한다,

              이 편액은 새로 만든 것이고 원본은 충재박물관에 전시보관하고 있다.


















              정자에서 내려다 본 주변,








               향나무, 소나무 등등......








              충재?









              청암정으로 건너는 길은 조촐한 돌다리로 만들었다,
















               








             옥천종택은 살림채로서 정침(正寢)과 글 읽은 별당 기능의 초당 가묘인 사당으로 구성된

             17세기 말 양반주택으로서 한양조씨  옥천 조덕린 선생의 고택이다.

             조덕린은 조석 죽졷때 문과에 급제하고 교리와 동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거북 머리 앞쪽에서,


               옛 선비들이 유독 암석에 대한 애착이 컸던 건은 암석이 삼라만상 가운데 고정불변한 속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고려말의 선비 이곳은 <석문 石問>이라는 글에서  "암석은 견고 불변하여 천지와 함게 종식되는 것, 두터운 땅에 우뚝하게

              박히고 위엄있게 솟아서 진압하며, 만길의 높이에 서서 흔들어 움직일수 없는 것, 깊은 땅 속에 깊숙이 잠겨서 아무도 침노

              하거나 제압할수 없는 존재"라고 하면서 바위의 덕을 칭송한바 있다,








                       또한 돌은 모든 형체중에서 가장 정비된 것으로 군더더기가 없다. 괴이한 모습을 한 괴석이건 매끈한 수석이건

                       간에 돌의 현재 모습은 갖은 풍상을 격어낸 후의 가장 안정된 상태이다, 돌은 사람의 감성에 호소하는 아름다움

                       즐거움, 가련함을 모두 포기하고 오로지 냉정하고 적막한 모습으로 항상 같은 자리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옛

                       선비들은 바위의 냉정하고 부동하지 안흔 그 적막한 모습을 응시했던 것이다,








              중재박물관을 둘러본다,








                 중재선생의 과거시험시 답안지라 한다,

























             허목 선생의 '청암수석' 원본이다,

             40분여, 닭실마을 청암정과 중재박물관을 둘러보고 오늘 일정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