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

경북 영덕 괴시리마을, 인량리전통마을. 영양 남악정, 두들마을

정헌의 티스토리 2019. 5. 30. 00:02

           ■ 경북  영덕 괴시마을,  인량리 전통마을,  영양 남악정, 두들마을

 

               영덕의 인물 두사람을 꼽으라면 목은 이색과 나옹선사를 들수 있겠다,

               목은 이색선생과 관련이 있는 영덕 영해에 위치한 괴시리 전통마을을 둘러본다,

               영덕 인량리 전통마을과 영양 남악정, 두들마을는 음식디미방으로 잘 알려진 정부인 장씨와 많은 관련이 있다,

               인량마을을 둘러보고 창수령을 넘어 정부인 장씨와 석계 이시명 선생의 가족들이 넘나들던 길을 따라 두들마을

               로 간다, 산청 선비대학 회원들과 함께한 문화탐방이다,  따라서 여기에 기록된 대부분의 설명은 현지 안내문과

               경상대학교 남명학 연구소에서 만든 자료집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 탐방코스

               영덕 괴시마을 - 중식 - 인량리전통마을 - 영양 남악정 - 두들마을.(2019. 5. 23.)


           ▷ 탐방후에


             ▣ 영덕 영해 괴시리 마을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


                                            









                산청 단성면소재지에서 중간 두어번 휴게소에서 쉬어가면 3시간 30분,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마을에 도착한다,








                 마을앞에 주차장과 화장실이 마련되어 있다,








                영덕 칠보산, 독경산 자락에서 발원하여 영해면 소재지 옆을 지나 대진해수욕장으로 흘러드는 강을 松川이라 한다,

                괴시마을은 동해로 흘러드는 송천 주위에 늪이 많고 마을 북쪽에 호지(濠池, 해자 호(해자, 도랑))가 있어 호지촌이라

                부르다가 고려말 목은 이색(李穡)선생(1328~1396)이 문장으로써 원(元)나라에 이름을 떨치고 고국으로 돌아와 구양

                박사(歐陽博士,구양현(歐陽玄,1273~1358, 허경의 제자로 게혜사와 함께 허문사걸(許門四傑)의 한사람으로 꼽힌다,)

                의 괴사마을과 자신이 태어난 호지촌의 시야가 넓고 아름다운 풍경이 비슷해 괴시(槐市)라 고쳐 이름지었다고 전한다,








             고려말 함창김씨가 마을에 처음 입주하였고, 그후 조선 명종 연간에는 수인김씨와 영해신씨, 인조 8년(1630)에 영양 남씨가

             시거(始居)하였다. 그후 3성(性)은 점차 다른 곳으로 이주하여 지금은 영양 남씨의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영양 남씨의 시조는 영의공(英毅公)이다, 공은 성은 金이요 휘(諱)는 忠이니 중국 여남사람이다, 당현종때(신라 경덕왕 14년

             755년) 봉명사신 안렴사로 일본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태풍을 만나 현 영덕군 축산항에 표착하게 된다,

             경덕왕은 공이 여남(汝南)에서 왔으므로 남(南)시로 사성(賜性)하고 이름을 민(敏)으로 고쳐 영양현을 식읍으로 하여 영의공

             이란 시호를 내렸다,









              마을 동남쪽으로 망일봉과 그 능선으로 인해 이들 지연지형에 맞추어 대부분의 가옥들이 서남향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경북 동해안의 다른 지역에 비하여 전통 건축물이 매우 잘 보존되고 있다,

              마을 네에 영양남씨 괴시파종택을 비롯하여 여러 지정문화재외 고가옥 30여호가 밀집되어 있는 전통마을이다,


 














             담이 토담이다,








                  괴시리 영감댁,


                  이 건물은 호은 남흥수(1813~1899)공이 1847년경 건립하였으며, 1938년 호은 공의 증손 남대철이 중수하였다,

                  호은공은 동의계(同義契)와 접소(接所)를 설치하여 빈민규휼에 앞장섰고, 괴호서숙(槐濠書塾)을 세워 후학교육

                  에도 힘썼다,

                  정침은 정면4칸, 축면 6칸의 ㅁ자형 건물이며. 대문칸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1칸의 방과 우측에 아랫방과 사랑대

                  청을 연결하여 사랑방과 현재 출입문으로 사용하고 있는 통래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옥마을은 대체로 돌담이 많은데 이곳은 흙담이다.
























                 괴시리 천전댁








                이 가옥은 남유용(南有鏞) 공이 1876년에 건립한 건물로 안채와 사랑채, 문간채로 구성되어 있다,

                건축의 특징은 안채와 사랑채 중문간채가 □ 형태의 평면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속칭 날개집이라 불리는 

                유형에 속한다, 

                특히 사랑채는 중문의 우측 앞에 자리잡고 있는데 중문칸보다 건물을 높게 세우고 별도로 팔작지붕으로 꾸며

                독립된 건물처럼 보이게 하였으며 추녀의 곡선이 빼어나 더욱 더 아름답다,








             중문 우측의 사랑채,









                  사랑채의 현판,








              중문 좌측의 방에는 미니까페로 개조했다,

              풍금도 밖에서 눌러볼 수 있도록 배치했다,








            뜰 또한 예쁘게 꾸몄다,

            노거수 향나무 한 그루가 오똑하다,








             중문을 들어서 안채를 본다,


      






                 마주 보이는 대청 좌측으로 안방을 배치했다,

































           천전댁을 뒤로 하고,








               백회재 고택,


               고택은 1827년 백회재(百悔齋) 남곤수(南崑壽)가 건립하였고, 증손인 남효악이 1923년에 중수하였다고 전해진다,

               정면 4칸, 측면 4칸의 규모로 안채, 사랑채, 안대문간채 3동이 ㅁ자형으로 배열된 살림집이다,

               작은 규모에 상류주택 본연의 기능을 함축시킨 평면 및 배치구성과 돌출 배열된 안대문채, 지붕형태 등은 주변 뜰

               집과 비교해 그 건축적 특성이 주목된다,

               오늘 이사를 가는지 살림을 옮기는 중이다,







                 영양남씨 괴시파 종택으로 왔다,









              영양남씨 괴시파 종가는 17세기 말에 남붕익(1641~1687)이 건립하였다고 전한다,



              정침(正寢)은 정면 8칸, 측면 5칸 반 규모의 ㅁ자형 건물로 사랑채 부분이 오른쪽으로 3칸 돌출된 날개집의

              평면을 취하고 있으며, 정침 오른쪽 뒷편에 사당이 있다,

              종택은 괴시마을 공간구성에서 핵심이 되는 건물로 평면구성이나 형태에서 약간의 변형이 있으나 조선후기

              주택의 소박한 옛 형식을 잘 간직하고 있다,








               안채. 

               중문과 마주하는 곳은 대청마루로 꾸몄다,



                  





              사랑채.


              남붕익은 자가 자거(子擧) 호는 입천(卄川) 또는 회수(晦叟)이다,

              참봉 남두원의 장남으로, 권경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1673년(현종14)에  영양남씨 괴시파에서 최초로 문과에 급제하여

              영산현감(靈山縣監)과 예조좌랑 등을 역임했다.

              낙향한 뒤 스므나골에 입천정(廿川亭)을 지었다,








             괴장고려(槐庄古廬, 홰나무 괴, 농막장, 옛고, 오두막집 려)









             회수(晦叟, 그믐 회, 늙은이 수, 남붕익의 호, 살만큼 산 노인이 사는 집?)








               우측 뒷편에 사당이 있고,








               우측에 물소와 서당이 있다,








               이 서당은 물소와 남택만(勿小窩 南澤萬)의 학덕을 추모하고 후손들에게 학습의 장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약 150년 전에 건립되었다, 한 때는 사당(祠堂)으로 활용되었다고도 전한다,

               서당은  ㅡ자형으로 앞면 3칸, 옆면 1칸 반 규모의 맞배지붕으로 평면 구성은 전면 중앙에 대청을 두고,

               좌.우측에 방을 설치한 영남지역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현재는 대문은 잠겨있고, 제대로 관리되고 있는 느낌은 적다,








             물소와(勿小窩) 고택



             괴시파 종택 앞쪽에 있으며 조선조 좌승지에 추증된 물소와 남택민이 종가에서 분가한 후 그의 증손인 남유진이

             건립하였다, 정면 5칸, 측면 6칸의 ㅁ자형 정침과 고방, 중문, 사랑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조선 후기 주택양식의

             전형적인 건물이다.

             골목에서 바깥마당으로 출입할 때 사랑채 정면이 여성에게 노출되는 것을 방지하고 사랑마당 오른쪽 구석에 있

             는 우물에서 여성이 가사작업 할 때 노출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밤벽(내외담)을 쌓아놓았다,

             물소(勿小)란 유비(劉備)가 한 말로 '조그만 악행이라도 행하지 말라(勿以惡小而爲之)' 구절에서 인용한 것이라

             한다, 







            물소와 남택만은 이른 나이에 향시를 본 뒤 관직에 대한 뜻을 버렸다한다, 그는 산림에 은거하면서 고요하고

            유유자적하게 살았다, 그는 술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벗들과 술자리를 함께하는 것을 즐겼다, 그래서 그는

           "술 마시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잔을 기울이고 음주하는 것을 보면 내 가슴 속에는 상쾌함을 느낀다"라고 하

            였다 한다,

            일부 방문객이 문창살 훼손 및 쓰레기 투기로 출입을 통제한다는 안내문이 있다,








           영덕 영해 경주댁,








           괴시마을에는 영양남씨, 함창김씨, 수안김씨, 영해신씨 등 4성이 살았는데 3성은 다른곳으로 떠나고 영양남씨만

           남아 집성촌을 이루었다, 경주댁은 그 중에서 수안김씨가 살았던 주택을 후에 남씨가 인수하면서 영양남씨가 계

           속 살게 되었다, 건축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830년경에 지은 것으로 추정하며, 마을에서 천전댁과 더불어

           별도의 대문채가 있는  주택 중의 하나이다, 

           가옥의 구성은 앞면 4칸, 옆면 5칸의 ㅁ자형 몸채와 대문채로 구분되어 있다,

           몸채에 담을 덧붙여 외부공간을 다양하게 구성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안채는 매우 소박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목은 이색 기념관 갈림길이 있는 곳에 괴정이 있다,








                괴정은 영조 41년(1766) 고려 말 대유학자인 가정 이곡과 그의 아들인 목은 이색의 유허지에 괴정 남준형(1703 ~

                1778)이 지은 정자로 순조 17년(1817)에 중건하였고, 고종 13년(1876)에 크게 수리하였다,

                남준형은 1753년(영조29) 식년시에 2등으로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이 정자에서 오직

                학문의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으며 노인을 공경하고 민생에 전력한 결과 향민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한다,

                6.25전쟁 전후에도 야학의 학당으로 이용되어 남준형의 뜻이 근래에까지 계승되었다,








               괴정 지당


               괴정 지당은 '괴정중건기'에 의하면 1817년(순조17) 괴정 중건을 하면서 서쪽으로 향하고 있던 괴정을 남쪽으로

               바꾸게 되었다고 전한다,  따라서 지당은 처음에는 괴정의 정면에 위치하여 괴정마루에서 지당을 조망할 수 있었

               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동안 괴정은 경북 문화재자료 제 397호로 지정되어 보존. 관리되어 왔지만 지당은 장기간

               방치되어 수생식물과 잡초로 뒤덮여 있던 것을 한옥집단마을 관광자원개발사업으로 지당의 옛 모습을 되찾게 되

               었다, 복원과정에서 백자대접, 접시, 옹기병, 시루, 목제 빗 등 모두 35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지당의 출토유물

               을 통해 볼 때 지당이 지어진 시기는 괴정이 창건된 시기(1766)와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당 주변,      

  







             괴정 뒷쪽, 옆쪽으로도 몇 고택이 있으나 대충 눈가늠만 한다,
























          목은 이색 기념관으로 간다,








                목은 이색선생 유적지


                 서쪽으로는 드넓은 영해 평야가 펼쳐있고,  그 뒷편으로는 낙동정맥의 크고 작은 산이 병풍처럼 솟아 있으며

                 동으로는 일망무제의 창해가 펼쳐 있는 이곳은  고려말 정치가, 대학자이며 대문호이었던  목은 이색 선생의

                 유허이다, 선생의 본관은 한산, 시호는 문정, 가정 이곡 선생과 함창김씨를 부모로 하여 1328년 이곳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 무가정(無價亭)에서 탄생하였으며, 일찌기 20세에 부친 가정공이 머물던 원 (元) 나라에 유학

                 하였다, 귀국 후 26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숙옹부승을 시작으로 30세에 우간의 대부, 40세에는 판개부성부사

                 및 성관의 사사성을 겸직하였고, 47세에는 왕명으로 영덕군 창수면 출신인 나옹선사(懶翁禪師)의 비문을

                 찬(撰) 하였다,








             58세에 이르러서는 벽상삼중대광검교시중에 올랐으며 62세에 판문하부사에 제수되었다, 64세에는 벽상공신삼중대광

             한산부원군 영예문춘추관사에 올랐다,

             65세때에 이성계에 의하여 고려가 망하였으나 고려조에 충성을 다하고자 하였으며, 마침내 69세에 여강(지금 여주의

             남한강) 청심루(淸心樓) 아래 연자탄에서 세상을 떠났다,

             목은 선생은 이곳에서 태어나 일찍이 고향을 떠났으나 종신토록 고향을 잊지 않았다, 특히 영덕과 관련하여서는 관어

             대소부(觀魚臺小賦)와 유사정기(流沙亭記)외 20여수에 이르는 시가 있어 당시 고향에 대한 선생의 생각과 당시의 풍

             습과 문화를 알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영덕 블루로드가 이 곳을 지난다.








                 우측 앞쪽이 만서헌,

                 뒷쪽 건물이 기념관이다,








           괴시리는 1330년 당시 함창김씨 간재 김택(김택)이 세거하고 있었다, 

           가정 이곡 (稼亭 李穀 1298~1351)이 외가인 울산에 머물다가 가까운 영해지방을 왕래하며 독서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가정은 안동관서의 사록참군(司錄參軍)으로 있었는데 그때 이곳 괴시리의 김택 딸과 혼인하게 되었다,

           그 뒤 1328년 이곳 무가정에서 목은 이색을 낳았다,



           이곡 선생 (본관은 한산(韓山, 지금의 충남 서천, 1298년(고려 충렬왕 24년) ~1351년(충정왕3년))은 한산에서 태

           어나 1317년(충숙왕4) 거자과에 합격하여 예문관검열이 되었고 원나라에 들어가 1332년(충숙왕 복위 1) 정동성

           향시에 수석, 전시(殿試)에 차석으로 급제했다.

           1334년 귀국 학교를 진흥시키라는 조서를 받고 가선대부 시전의부령직보문각이 제수되었다  이듬해 다시 원나라로

           들어가 휘정원관구, 정동행중서성좌우사원외랑 등의 벼슬을 하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344년 귀국, 이듬해 도첨의찬성사 한산군에 봉해졌다.(출처 다음백과)

           묘지는 충남 서천군 기산면 광암리 산 10-1번지 (한산모시관에서 멀지 않음)등을 볼때 서천사람으로 보아야 할 듯,








               稼亭牧隱兩?先生遺墟碑 (가정목은양선생유허비) 








               만서헌(晩棲軒)의 한옥 이야기


                                                                                                                    영덕군 영해면 괴시리 340


               호은 남흥수(1813~1899)가 만년에 거처하기 위하여 지신의 집(영감댁) 옆에 터를 잡아 1893년에 건립하고

               1919년에 이건하여 현재까지 이 곳에 위치하고 있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1칸반의 팔작지붕이며 내부는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온돌방 구조이다,

               만서헌의 건물은 옛재목을 구허여 짓는데 번잡하지 않게하고 간소하게 하여 중간에는 마루를, 양쪽에는 방을

               두어 서늘하고 따뜻함을 구하였다, 그 글방에서 손자들과 함께 거처하면서 그들의 행방과 마을을 단속하고,

               날씨가 맑으면 친구를 초청하여 술을 마시거나 책을 보는 곳으로 만년을 여우자적했던 곳이다,

               자수재(自脩齋): 만수헌 안에 있는 방의 명칭을 자수재라 한다, 호은 남흥수가 만년으 나이에도 방종하지 않

               고 수기지학(修己之學)에 골몰했던 학문자세와 정신이 투영된 것이다,








             목은기념관,

















































              관어대소부(觀魚臺 小賦)



              관어대는 영해부에 있는데, 동해를 내려다보고 있어 암석의 낭떠러지 밑에 유영하는 고기들을 셀 수가 있으므로

              관어대라 이름한 것이다, 영해부는 나의 외가가 잇는 곳이므로 소부를 지어서 중원에 전해지기를 바라는 바이다,



              영해의 동쪽 언덕, 일본의 서쪽 물가엔, 큰 파도만 아득할 뿐, 그 나머지는 알 수가 없네,

              물결이 움직이면 산이 무너지는 듯하고, 물결이 잠잠하면 닦아놓은 거울 같도다,

              바람 귀신이 풀무로 삼은 곳이요, 바다 귀신이 집으로 삼은 곳이라

              고래들이 떼지어 놀면 기세가 창공을 뒤흔들고, 사나운 새 외로이 날면 그림자 저녁놀에 잇닿네.

              관어대가 굽어보고 있으니, 눈는 땅이 보이지 않도다,

              위에는 한 하늘만 있고, 아래는 한 물만 있어, 아득히 먼 그 사이가, 천리 만리나 되누나

              오직 관어대 밑에는, 파도가 일지 않아서 고기들을 내려다보면, 서로 같고 다른 놈 있어

              느릿한 놈 활발한 놈이 제각기 만족해 하누나.

              임공의 미끼는 과장된 것이라, 내가 감히 흉내낼 바 아니요

              태공의 낚싯바늘은 곧았으니, 내가 감히 기대할 바 아니로다,

              아 우리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니, 내 형체를 잊고 그 즐거움을 즐기며, 즐거움을 즐기다 죽어서 내 편안히리

              물아가 한마음이요, 고금이 한 이치인데, 그 누가 구복 채우기에 급급하여, 군자의 버림받기를 달게 여기랴

              슬프도다 문왕은 이미 돌아갔으니, 오인을 생각해도 바라기 어렵거니와

              부자로 하여금 떼를 타게 한다면, 또한 반드시 여기에 낙이 있었으리라,

              오직 고기가 뛴다는 짧은 글귀는, 바로 중용의 가장 큰 뜻이나

              종신토록 그 뜻을 깊이 탐구하면, 다행이 자사자를 본받을 수 있으리.



               임공의 미끼 : 임나라 공자가 500마리 소를 미끼로 꿰어서 회계산에 걸터앉아 동해에 낚시줄을 두리워 대단히

                                 큰 고기를 낚았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태공의 낚시 바늘이 곧았으니 : 강태공이 미천했을때 위수에서 낚시질을 할 적에 곧은 바늘을 사용했다는 고사

                                 에서 온 말인데 그 까닭은 고기를 잡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동해바다 해돋이


                외가댁은 적막한 바닷가 마을에 있는데      풍경은 예로부터 사람들 입에 올랐었네

                동녁 바다 향하여 돋는 해를 보려 하니       갑자기 슬퍼 두 눈이 먼저 캄캄해 지누나

                황량한 마을서 하룻밤 단란하게 묵으면서   젊은 시절 회포를 자세히 못 논해 보았는데

                회상컨대 몇 년 새에 선배들은 다 더났고    아침까지 지저귀더니 어느덧 또 황혼일세

                

                                 목은 시고 권 12















              목은 기념관을 둘러보고 내려간다,








               잠시 틈을 내어 홍련암에 들런다,

               목은 기념관 안내문이 있는 곳에 들머리가 있다,








                   이러한 절차로 수행하는 자가

                   근본점에 돌아 가려면

                   망상을 잊지 아니하고는

                   얻을 수 없나니라

                   인연없는 선교로

                   여의주를 잡아서

                   집에 돌아갈 때 분수룰

                   따라서 양식을 얻나니







                아담한 일주문을 지난다,

                연화산 홍련암이다, 








              먼저 포대화상이 넉넉한 웃음으로 맞아준다,








               작은 경내에 조그만 삼성각이 있고,








             아담한 석등을 앞에두고 금빛 불상을 모셨다,








              좌측으론 적묵당(寂默堂)

              입구가 어디지?







            좌측 법당으로 방향을 돌리면,








                 대웅전이 있다,
















                인상고운 비구니스님의 차 한잔 하고가란 소리만큼,

                깨끗하고 아담한 절이다,

                어떻게 이렇게 깨끗할 수 있느냐는 물음에,

                부처님 계시는 곳이니까..............


                





                홍련암은 시골의 어느 작은 가정집만한 작은 암자라 둘러보는데 별로 시간이 소요되지 않는다,









                 괴정 앞으로 되돌아 나와,







              동북쪽으로 몇몇 고택은 남겨두고

              주차장으로 간다,














                 괴시리 마을에서 1시간 20분여 소요되었다,

                 중식시간이다,








               영해면 소재지에 위치한 예주돌솥밥집이다.








                 아주라고는 알 수 없지만,

                 때가 되고, 지나가는 길이라면 찾아도 좋겠다,  9,000원?



               ▣ 인량리 전통마을











              인량마을은 한옥으로만 구성된 마을이 아니기 때문에

              고택 또는 종택은 이곳 저곳 조금씩 발품을 팔아야 한다,


 






                인량리는 영해에서 서쪽으로 10리쯤 되는 곳에 삼면이 산으로 쌓여있고 남쪽에 내가 가로 놓여있는 산자수명한

                큰 동리로 영남의 명지로 이름이 높다, 마을의 역시는 선사시대부터 오늘에 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

                옛날 지명은 잉량화(仍良火)라 하다가 뒷산 형국이 학이 나래를 펼천 것과 같다하여 비개동(비개동), 나래골, 익

                동이라 하였으며 광해2년(1610)애 인량(仁良)으로 개칭되었다,

                영해부지에 의하면 인량리는 팔성종실(八性宗室)이 거주하고 있는 곳으로 예부터 풍속이 순후하고 예의와 겸양

                이 있고 효행과 학문이 높은 선비가 많아 벼슬이 끊어지지 않으니 부내에서 으뜸가는 동리라 하였다, 광해 7년

                (1615)에 군내에서 처음으로 향약을 제정하였으며 숙종9년(1683)과 1927년에 규약을 시대에 맞게 중수하여 현

                재까지 전해오고 있다,  또한 이곳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및 기미독립운동에 이르기까지 의병으로 구국에 참여

                하신 분들도 많다한다,








                 나라골 보리말 체험학교,

                 과거 학교를 개조하여 전통테마마을 영농조합 법인을 만들었다,

                 승용차라면 이곳에 주차하면 되겠다,



 





              예절관?








               옛 초등학교를 사무실 또는 숙박공간으로 리모델링했다,








                오늘 둘러볼 주요 건물이 갈암종택, 충효당 종택이다,








              멀리서 바라본 갈암종택








                  갈암종택(葛菴宗宅)으로 왔다,








                   건물은 조선 숙종때 문신이자 퇴계 이황의 학통을 계승한 성리학자 갈암 이현일(葛菴 李玄逸)의 종택이다,

                  청송군 진보면 광덕리에 있던 것을 임하댐 건설로 인하여 1992년 갈암 태실이 있던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건물은 정면 6칸, 측면 4칸 반의ㅁ자형 팔작 기와집으로. 오른쪽 측면으로 사랑방와 사랑대청이 돌출해 있다,

                  원래은 건물은 갈암의  8대손 이수악과 9대손 이회발이 항일투장의 거점으로 활용했던 곳으로 역사성이 있는

                  종택이라 할 수 있다,




                 




              가운데 중문을 두고 우측 사랑방과 사랑대청 건물.








                 사랑채 우측 뒷쪽에 사당이 있다,








                 가운데 중문,








                 안채,

                 괴시리 마을이나 이곳의 대부분 주택이 중문을 들어서 마주보이는 곳에 대청마루를 하고 있다,








                 중문 앞 마당가의 건물,

                 봉화지역에서는 서재로 많이 사용하는 것 같은데 이곳은 어떤 용도인지 모르겠다,



 





                      좌측 뒷뜰로 연결되는 대문이 있다,








                우측으로 보이는 건물이 안채, 및 부엌인가 보다,








                갈암 이현일(1627~1704)



           자는 익승, 호는 갈암, 본관은 재령,1627년 (인조5) 영해에서 석계 이시명과 부인 장씨 사이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1646년(인조23)에 초시에 합격했지만 벼슬에 뜻이 없어 복시를 단념하였다,

           40세에 송시열의 기년설(朞年說)을 비판한 영남 유생들의 연명 상소에 참여하였고,

           47세에 석보의 동쪽 골짜기에 남악실(男嶽谷)을 짓고 48세때 이거하였다,

           당시 남인들이 정권을 잡자 허목(許穆)등의 추천으로 누차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부친상 등을 이유로 나아가지 않았다,

           52세에 공조정랑, 사헌부 지평 등에 임명되어 비로소 출사하였으나, 54세때 모친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향리에서 3년

           상을 지냈다. 59세때 남악초당을 완성하고 그곳에 지냈고, 63세(1689)때 기사환국으로 다시 남인이 득세하여 성균관

           사업, 사헌부장령, 공조참의에 제수되었다,

           66세때 대사헌, 병조참판, 우참찬, 이조판서 등에 임명되었고, 68세때 갑술환국으로 함경도 흥원으로 귀양갔다,

           74세때 유배에서 풀린뒤 안동 금소에 정창하였고 78세(1704)에 이곳에서 서상을 떠났다,

            
















                         갈암종택 마당가엔 몇 그루 석류나무가 있다,








                 자운정.

                 갈암종택에서 우계종택, 또는 충효당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자운정과 갈암선생 태실 현판이 걸려있다,








                  우계종택,







                 우계종택은 조선 선조때 재령이씨 영해 입향조 이애의 손자인 의령현감 이함의 차남 우계 이시형의 살림집으로

                 선조 39년(1606) 건립된 후 현재까지 400년 가까이 우계파 종가로 보존되고 있다,








              종택은 정침과 별채로 이루어져  있는데 별채는 외부손님을 접대하던 건물이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ㅁ자형 건물로, 사랑공간이 발달하지 않은 모습의 조선중기적 모습을 가진 양반가옥이다,

              건립당시에는 대문채 및 행랑채가 있었다 한다,















             마당가 조그만 건물이 있고,








                안채쪽을 바라 보았을때 좌측 방아간 초가가 있다.



 





             우계종택을 둘러보고 나오면 이정표가 있다,

             충효당 종택으로 향한다,


                






                   저만큼 충효당 종택,







                       충효당 종택 대문 앞쪽에 수백년 은행나무가 있다,








             재령이씨는 경주이씨 이알평에서 시작되었는데 고려 때 문하시중을 지낸 이우칭이 재령군에 봉해지면서 그 후손들은 

             재령을 본관으로 삼았다, 연산군 연간에 이애(李璦)가 영해부사로 부임하는 숙부 이중현을 따라 영해에 내려왔다가

             이 고을 진성백씨 백원정의 딸과 결혼하여 이후 자손들이 영해에 터전을 잡게 된다, 이애가 바로 영해의 입향조이고,

             이함은 그의 손자이다, 이함(李涵1554~1632)은 자가 양원이고 호는 운악이다,








                 충효당 종택


                  이 가옥은 재령이씨 입향조인 이애가 조선 성종 연간에 건립하였으나, 1576년(선조9)에 이함이 원래위치에서

                  조금 뒷쪽인 현재 위치로 이건하였다,

                  가옥의 배치는 ㅁ자형 평면의 정침, 사랑채 그리고 두 건물 사이 뒷편에 사당이 자리하고 있다.








               충효당은 정침과 독립되어 건립된 사랑채의 당호로서 정자와 같은 모습을 취하고 있으나. 대청 삼면에 문을 설치하여

               주거건축 용도에 적합하도록 꾸몄다.








                   충효당,



                  '충효'는 맹자의 오륜설을 적어 존재 이휘일에게 주면서 "충성심을 고무하고 효심을 일깨워야 한다(課忠責孝)"

                   라고 강조한 것에서 가훈이 되었다,

                   이재의 충효당기에 따르면 이함이 자손의 교육을 위해 1602년 것물을 짓고 충효당이라 불렀다,

                   충효당이란 세 글자는 중국 명나라 태조 주원장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여 제작한 것이라고 추측된다 한다,

                   편액은 밖에서 보이지 않고 문을 열고 들어가야 볼 수 있다,








              작은 사랑,



 





                  좌측으로 보이는 건물이 작은사랑,








                안채 중문 저쪽으로 작은 건물과 초가 건물도 보인다,








              안채로 들어가 본다,








                 안채.


                 튼 ㅁ자형 정침은 뒤편에 여성공간이 자리하고 전면 좌측부분에 충효당과 연결되는 남성공간인 작은 사랑을      

                 배치하여 당시의 생활규범을 보여준다,








               작은사랑 뒷편인 셈이다,








                우측,







                   충효당을 좌측으로 돌아 올라가면 사당이 있다,

                   사당은 담장으로 구획되어 선조의 신위를 모시고 있어 조선 중기의 사대부 가옥의 배치와 생활상을

                   잘 반영하고 있어 주택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사당 문 앞에 양쪽으로 배롱나무가 자라고 있고,








                          사당문을 들어서면 커다란 홰나무? 한 그루가 있다,








                          밑둥치에서 두 가지로 분지되어 있어 여기에 이야기를 붙였다,

                          두 가지가 큰 차이야 있겠냐 만은 오른족 가지의 잎이 무성하면 본가가, 왼쪽 가지의 잎이 무성하면 처가쪽이

                          (방향이 맞나 모르겠다) 잘 된다는...............








                   오늘 답사에 가장 애를 많이 쓰신 두분 선생님이다,





                  ▣ 남악정




                충효당 종택을 둘러보고

                창수면 소재지를 지나 구비구비 고개를 돌아 창수령을 넘는다,

                창수령을 넘어 지름길로 석계면으로 이동하는 도중 남악정이 있다,

                남악정은 조선 숙종때 성리학지인 갈암 이현일(1627~1704 인량마을 편에서 소개, 정부인 장씨의 3남)이 학문에

                전념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당시에는 초당이었던 것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치면서 기와집으로 바뀌었다,

                갈암 선생이 이곳에 머문 기간은 그리 길지않다, 47세에 처음 남악골에 집을 지어살다가 바로 부친상을 당해 안동

                에서 시묘살이를 하였고 이어 모친 상도 당하여 계속해서 시묘살이를 해야 했다.

                59세에 남악골로 돌아와 남악초당이라는 이름을 걸고 학문을 연마한지 5년째, 이현일은 사업(司業)에 임명된다,

                사업이란 재야에 있으면서 학덕과 인품으로 이름난 산림(山林)에게난 제수 되는 자리이다.





                ▣ 영양군 석보면 두들마을










                 두들마을 주차장.



                 영양군 석보면 소재지가 있는 마을이다,

                 이곳은 원래 영양현 석보 부곡의 땅으로 1500년대에 광제원이라는 역원이 었어서 원리(院里)라고 불리게 되었다,

                 두들은 언덕,좀 높은 곳의 뜻으로 두들마을은 언덕에 위치한 마을이란 뜻이다,

                 이미 마을이 형성되어 석보(石保)로 부르고 있었던 이곳은 석계 이시명이 병자호란을 피해 들어와 살면서 유명해진

                 곳인데 이시명이 서상을 떠난 뒤 그의 넷째 아들인 이숭일이 터전을 지키며 살면서 재령이씨들의 집성촌이 되었다,

                 석계 이시명의 부인이 음식디미방으로 많이 알려진 정부인 장씨(장계향)이다,








                주차장에서 올려다 보이는 저곳,

                막대한 예산(2백몇십억)을 투입하여 만든 장계향문화체험교육원이다,

          비교적 최근에 완공하여 두들마을 장계향 관련 자료를 저곳으로 모두 옮겼나 보다,

          시간부족으로 둘러보지는 않았다, 








                 주차장 앞쪽의 음식디미방 체험관,

                 지금은 관련시설들이 위쪽 장계향문화체험교육원으로 모았고 지금은 조금 썰렁한 느낌이다,








              앞쪽 휴게실과 식당 건물이 산뜻하다,








              정부인 장씨(장계향 張烓香 1598~1680)


              한국 최초의 한글 음식 조리서 '음식디미방'을 남겼다,

              1598년 경북 안동 금계리에서 석계 이시명의 스승인 장흥효의 딸로 태었다,  말년에 세째 아들 갈암 이현일이 대학자

              이자 국가적 지도자에게만 부여하는 산림(山林)으로 불림을 받아 이조판서를 지내 법전에 따라 세상을 떠난 정부인의

              품계가 내려졌다. 이때부터 '정부인 장씨'라 불리게 되었다.

              19세(1616년) 부친의 제자인 석계 이시명의 계실로 혼인해 영해 인량리에서 결혼생할을 시작했다. 당시 이시명에게

              는 전실 김씨부인 사이에 1남 1녀를 두었고, 장계향과의 시이에서 6남 1녀의 자녀를 두었다, 아들 이현일이 쓴 '광지

              壙誌' 와 '張氏夫人實記장씨부인실기'에 장계향에 대한 여러 행적이 실려있다,

              장계향은 서화와 문장에 뚸어나 풀륭한 필적을 남기고 있다,흉년이 들어 기른으로 백성들이 고초를 겪자 굶주린 백성

              들을 구휼하는데 정성을 다하였다.두들 마을의 서남쪽에 있는 울창한 도토리나무들은 당시 장계향이 가족은 물론 고

              을 사람들을 위해 심은 것이라고 전한다, 또한 의지할 곳 없는 노인을 돌보고 고아를 데려다가 가르치고 기르는 등 인

              덕과 명망이 자자하였다.

              장계향은 이시명을 따라서 1640~1653년까지 영양의 석보에서 살다가. 1653년(효종4년)에는 영양의 수비, 1672년

              에는 안동의 도솔원으로 옮겨 살았다, 1676년(숙종2) 이시명의 상을 끝낸 뒤에 셋째아들 이현일, 넷째 아들 이숭일과

              함께 다시 석보로 돌아와서 현 석계고택의 지리에서 5년 동안 살다가 1680년(숙종6)애 세상을 떠났다,

              장계향의 시문 및 저서 가운데에 '음식디미방'은 우리나라 17세기의 음식 조리법을 알려주는 귀중한 한 글최고의 조리

              관련 문헌이다, 이 책은 장계향의 만년인 1670~80년 시이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책의 표지에는 규곤시의방(閨壼

              是議方)이라고 붓으로 씌어져 있는데, 권두 서명은 '음식디미방'으로 되어 있다. 이 책은 전체 30장으로 된 1권 1책의

              필사본으로 가루 음식과 떡 종류의 조리법을 설명한 면병류(糆餠類)를 시작으로 모두 146가지의 조리법이 설명되어 있

              다,







                 이곳 두들마을엔 석계선생의 서당인 석천서당이 있고, 마을 앞을 흐르는 주남천 가에 있는 암석에는 이시명의 아들

                 이숭일 선생이 새겼다는 동대, 서대, 낙기대, 세심대 등의 글씨가 뚜렸하게 남아있다.

                 이곳에는 석천서당, 석계고택, 유우당, 주곡고택 등 문화재와 정비인 장씨 유적비 등이 많아 1994년 문화체육부로

                 부터 두들문화마을로 지정받았다,







                먼저 석계고택으로 왔다,








             이 건물은 조선 인조, 현종 년가의 학자인 석계 이시명(1590~1674)선생이 인조 15년(1640)애 세운 고택이다,

             선생은 석계 위에 집을 짓고 호를 석계라 하고 이곳에서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정부인 장씨도 석생의 학명 못지않게

             효행과 부덕(부덕), 학문, 예술 등을 겸비한 학자로 세인(세인)이 신사임당과 동등한 인물로 칭송하여 오고 있다,








                  사랑채 우측 뒷편을 담으로 막고 문을 내었다,








                중문으로 들어선다,








                  이 집은 일자형 사랑채와 안채가 이자형(二字形)으로 배치하여

                  토담을 막아 허실감(虛實感)을매운 뜰집과 같은 느낌이 들도록 되어있다,








               약간 각도를 달리하여.








                   15호

                   산림보호

                   일강주물







                  석계고택 인근의 주택,















                         정부인 안동장씨 유적비,








                       석계 이시명 (石溪 李時明, 1590~1674)



                       본관은 재령, 자는 회숙 호는 석계이다,

                       영해출신으로 현감 이함(李涵)의 아들이며, 이조판서 이현일(李玄逸)의 이버지이다.

                       1612뇬 (광해군4)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광해군의 난정을 보고 과거를 단념하였다,

                       1636년(인조14) 병자호란 이후 국치를 부끄럽게 여겨 세상과 인연을 끊고 은거하였다,








              학행으로 강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시문에 능하고 초서도 잘 썼으며, 특히 이황의 학통을 이은 장흥효에게 이학(理學)을 전수받아 다시 아들 이위일,

              이현일에게 전하여 줌으로써 주리학의 전승에 크게 기여하였다,

              저서로는 석계집 6권이 있다,   








                 어렸을 때 석계 이시명은 아버지 이함의 벼슬살이 하는 곳을 따라 서울에 가 있었는데,  일찍이 시장 근처에 한 

                 조용한 방을 세내어 밤낮 부지런히 책을 읽었다. 이곳을 지나가던 주위의 10여명의 아이들이 이 글읽는 소리를 

                 듣고 말하기를 "서생은 어느 집 사람이기에 이 시끄러운 곳에서 부지런히 글 읽음이 이와 같은가?" 라고 하며 

                 소매속에 가득 싸온 단 복숭아를 주고 갔던 일도 있었다 한다.








                 1617년(광해군9)에는 아버지가 의령현감으로 나갔는데 이시명의 나이는 약관(弱冠) 무렵이었다,

                 이때 그는 능히 뼈를 깎는 듯한 노력으로 스스로를 키우나감에 조금도 늦춤이 없었으며, 다른 집 자제들이

                 일삼는 놀이나 방종스러운 행동도 하지 않았다, 어느날 우현히 망우당 곽재우(1552~1917)의 앞을 지나게

                 된 적이 있었는데, 이 때 그는 곽재우로 부터 "내 보건대 벼슬하는 집의 자제들이란 노래와 기생, 술과 바둑

                 등으로 서로 즐겨하지 않음이 없는데 지금 자네는 이 같은 지조를 갖고 있음을 보니 정말 다른 집의 자제들

                 보다 훨씬 정도가 높구나" 하는 칭찬을 들기도 하였다,








                 이시명이 도굴산에 들어가 종일 학문하던 해에 광산김씨 문중의 검열(檢閱)  김해 (金垓)의 따님을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광산김씨 세거지 예안은 퇴계 이황(1501~1570)의 교화를 입어 유가의 남은 풍속이 자못 넉넉한

                 곳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곳에 있으면서 도산의 여러 스승이나 벗들과 왕래, 교유함을 통해 흥기한 점이 많

                 았었다, 그러나 1614년(광해군6)에 부인 김씨를 잃는 아품을 당하였고, 2년 후인 1616년(광해군8)에는 안동

                 장씨, 즉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 1564~1634)의 따님을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장흥효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한 이후부터 이시명은 퇴계의 심학(心學)의 학문을 학봉 김성일(金誠一, 1538~1593),

               서애 유성룡(柳成龍, 1542~1607)으로부터 학문을 얻은 바 있는 장흥효를 좇아 더욱 학문하는 방법을 전수받게 된다,

               훗날 그가 시(詩), 예(禮)를 가문에 전승한 일들은 바로 장인 장흥효로부터 배운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석천서당은 보수중이다,








              석천서당.



              이 서당은 석계 이시명 선생이 영해에서 석보로 이사와 세운 석계초당을 후손들과 유림이 중건하여 석천

              서당이 되었다,

              두들산을 배산으로 하고 남서향으로 향하고 있으며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되어 있다, 좌측에서 첫째와

              넷째칸은 통칸방으로 꾸몄고,둘쨔와 셋째칸은 마루를 깔았다, 정면과 좌우면에 2자의 쪽마루를 내어 평난

              간을 둘렀고, 마루로 향하게 한 창호는 4분합의 들어 열개문으로 하여 6칸을 1칸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하

              였다,




 



                석간고택으로 왔다,








                이 가옥은 항재 이숭일(恒齋 李嵩逸, 1631~1698)의 7세손인 좌해 이수영(左海 李秀榮,1809~1892)의 살림집이다,

                고택은 이수영의 5세손인 소설가 이문열(李文烈)이 유년시절을 보냈던 곳이기도 한데, 한국 전쟁이 끝난 후 인척인

                석간 이철호(石澗 李哲浩 1901~1985)가 매입하였다, 석간 고택의 정침은 정면 4칸, 측면 5칸 반 규모의 ㅁ자형 건

                물인데, 정침의 좌측 전면에는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강학을 위한 독서실 석간정사가 지리잡고 있으며 우측에

                는 一자형의 고방채가 배치되어 있다,




 




                  해상고택과.








               석간고택 두개의 편액이 걸려있다,








                석간정사,








                석간고택 옆에 유우당이 있다,









                유우당(惟于堂)은 조선 순조 33년(1833)에 이상도(李相度, 1773~1835)가 건립한 가옥인데,  장자(長子)인

                이기찬(李箕燦)의 호를 따서 유우당이라 하였다,  원래 석보면 주남리에 있었던 것을 후손인 이돈호(李暾浩,

                1869~1942)가 현 위치로 옮겼는데, 이돈호는 3.1운동때 유림의 대표로 파리장서사건에 가담하여 독립운동

                을 하였고, 조카인 이병각(李秉珏)은 조지훈, 오일도, 조세림 등과 더불어 항일 애국시인으로 활약하였다,

                유우당은 정침과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정침은 정면 6칸, 측면 6칸 규모의 ㅁ자형 건물이며 사당은 단칸

                규모의 맞배기와집이다,


















                 여중군자 장계향



                 문화관광부 선정 1999년 11월 문화의 인물,

                 조선중기 문학자, 서예가, 화가, 과학자, 사회복지실천가,

                 한국화 '맹호도'와  자연과 세상을 노해한 시 9편과 서간 1편을 남김

                 당대에 이미 '여중군자'라 칭송받음

                 한국 최초의 한글 음식 조리서 '음식디미방'의 저자

                 퇴계 이황의 학통을 이은 경당 장흥효의 무남독녀

                 시,서 화에 능통했으며 맹자, 정자의 어머니 같은 인물

                 소설가 이문열의 선대 할머니이자, 그의 소설 '선택'의 주인공

 







               여중군자 장계향 예절관과,








                장계향 유물전시관이 있으나 장계향문화체험교육원으로 모두 이전한 듯한 느낌이다,








              두들마을은 소설가 이문열의 고향이기도 하다,
























           중문으로의 출입이 허락되지 않아 밖에서 외관만 본다,

















                두들 책사랑,
























                  장계향문화체험교육원,

                  이곳이 새로 생긴 곳이다,







                  만석꾼 집앞을 지나 오늘 일정을 모두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