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의 일상들

산청 대포마을 민씨고가. 오의정. 대포서원. 승마장

정헌의 티스토리 2024. 3. 9. 22:13

■산청 대포마을 민씨고가. 오의정. 대포서원. 승마장

 

한 2년쯤 전에 둘러본 마을이다.

당시 인제대학교의 인문도시 지원사업의 하나로 지역학 모임을 만들고,  우리고장 이곳 저곳을 답사하여  '산청의 정신문화를 찾아서' 라는 제목으로 도서를 출판했다.  그 당시 도서출판외에 우리 고장 이곳 저곳을 본 블로그에 소개하였는데 후에 보니 대포마을이 누락되어 있어 추가로 올려본다,

아래 내용 중 일정 부분은 산청향토사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경북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계시는 오주환님이 저술하신 책으로 산청지역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음이 된다.

 

 

 

 

▷가는 길

 

 

 

 

▷탐방코스

대포 민씨고가 - 오의정 - 대포서원 - 승마장 (2020.  10. 28, 11. 13)

 

 

 

▷탐방후에

 

▣민씨고가

 

 

마을 어귀에 한과마실길 종합안내도가 있다.

특히 걷기좋은 길이라기 보다는 대포마을을 둘러보는 길 정도로만 생각하면 되겠다.

 

 

 

 

 

 

먼저 민씨고가로 왔다.

 

 

 

 

 

 

산청대포리 민씨고가 / 경남문화재자료 163호.

산청군 생초면 명지대포로 236번길 7에 위치한다.

솟을대문은 아니지만 이 집의 정문역할을 한다.

 

 

 

 

 

 

대문을 들어서 도로같은 마당을 지나면 대문채가 있다.

 

 

 

 

 

 

대문채 좌측 편이다.

좀은 특이한 구조다. 그 당시에도 다른 집에서 보기 어려운 구조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뭐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이 고택의 건립 시기는 구전에 의하면 대략 조선말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은 안채, 곳간채, 대문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중 인채는  정면 4칸, 측면 3칸 크기에 ㄱ자형 평면의 골기와 팔작지붕 건물이다.  곳간채는 정면3칸, 측면 1칸 규모에 일자형(一字形) 평면의 골기와 모임지붕 건물이다. 대문채는 정면 6칸, 측면 1칸의 맛배지붕 건물이다.

< 현지 안내문에서>

 

 

 

 

 

 

안채.

ㄱ자 모양이나 언듯 보면 대문채와 연결되어 ㄷ자 형을 하고 있다.

 

 

 

 

 

 

안채 맞은편에 곳간채가 있다.

 

 

 

 

▣오의정

 

 

오의정 앞쪽으론 경호강이 흐른다.

경호강은 산청 지역을 흐르는 남강으로 산청지역에선 경호강으로 부른다.

거울같이 맑은 강이란 뜻이다.

 

 

 

 

 

 

오의정을 둘러보러 왔다.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543호로,  생초면 대포리 115번지에 위치한다.

 

 

 

 

 

 

오의정(五宜亭)

 

 

 

 

 

 

산청 생초면 대포리는 고려말 예의판서를 지낸  농은 민안부(農隱 閔安富) 선생이 조선조의 벼슬을 거부하고 은둔하여 살기 시작하여, 600여 년 동안 여흥민씨의 집성촌이다.

오의정은 농은의 13세손 괴현 민수(槐軒 閔銖)가 88세에 임종을 앞두고 "후손을 위해 공부할 서재를 건립하고 후학 양성에 힘쓰라"한 유지를 받들어 그의 다섯 아들인 老巖 민백주, 明巖민백원, 雙松 민백필, 菊坡 민백충, 菊圃 민백승이 합심하여 1872년 정자를 짓고 학문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 쓴 곳이다.

 

 

 

 

 

 

오의정은 1909년에 이곳으로 이건되었으며, 건물의 규모는 정면3칸 측면 2칸으로 가운데 어칸에는 온돌방을 두었다. 넓은 바닥위에 외벌대 기단을 조성하고 초석 위에 기둥을 세운 뒤 넓은 누마루를 얹고 사방에 계자난간을 두른 누각형태의 정자이다. 넓은 누마루 가운데 방을 둔 평면은 따뜻한 봄, 여름 뿐 아니라 추운 겨울에도 정자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으로 추운 경남 서부지역만의 독톡한 특징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고려는 1392년 34대 공양왕(4년)을 마지막으로 475년만에 멸망하고 배극렴, 조준, 정도전 등에 추대된 이성계가 이 해 7월 17일 수창궁에서 즉위하여 조선을 건국하였다.

고려 멸망의 원인을 요약하면 정치외교적으로 중국의 정권교체기인 친원파와 친명파의 대립,  경제적으로 귀족들의 사전겸병세력 대 사전개혁세력의 대립, 사상적으로 구시대의 정교 이념이었던 불교 대 사대의 현실 정치이념인 유교의 대립, 도덕명분논리상 불사이군적인 체제유지세력대  폐가입진(廢假立眞)의 반체제세력간의 대립 등에 있어서 후자의 승리에 그 원인이 있었다.

역성혁명 후 고려왕조 지지세력인 유신들은 순절, 유배, 은둔 등의 대가를 치루지 않으면 안되었다. 유교적 이념이 강조된 조선에서 고려의 충신은 조선에 있어선 반혁명세력 내지 비협조세력 이었기 때문에  정몽주 등 특정인 이외에는 그들의 충절이 크게 들어나지 못하고 두문동72현 이란 말로 세인들에 의해 전해져 왔다. 그러다 조선후기 특히 영조(1725~1776) 때에 비로소 고려 충신들의 절의가 국가적으로 표창되기에 이르렀다.

영조16년(1740) 왕명에 의하여 고려충신들이 신왕조(조선)에 벼슬을 하지않고 그 고개를 넘어갔다는 부조현에 비석이 세워지고, 치세 27년(1751)에 개경에 두문동 비가 세워졌다. 그리고 영조는 두문동 72현의 자손중 직책을 감당할 수 있는자는 즉시 조사하여 채용하도록 명하기도 하였다.

이에 세전되어 오던 72현의 실적은 그들 자손들에 의하여 들어내게 되었다. 그러나 명확한 전거가 잔존되어 있지 않은 두문동 72현의 인적구성과 실적은 분명히 정립되지 못한채 오늘에 이르고 있는 실정이다.

 

<산청향토사에서 발췌. 이하 같다.  / 오주환 저>

 

 

 

 

 

 

두문동 72현이란 구체적으로 어떠한 사람들인가?

두문동은 개성 동남쪽 만수산 기슭에 있는 洞名이다. 현 북한에 있으나 원래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에 있는 옛 지명이다.

먼저 두문동 72현이란 용어의 해석이 다양할 수 있으므로 개념부터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첫번째 협의의 두문동 72현이다. 즉 이성계가 개국하자 고려의 유신들이 조선의 벼슬을 거부하고 신하되기를 항거하다가 이성계파가 두문동을 불태웠을 때 두문불출하여 몰살당한 사람들이다. 이 개념에 의하면  생존자는 한사람도 없다는 것이 되고, 72현이란 숫자가 명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인물들을 모두 모르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두번째 개념은 이성계의 신하되기를 거부하고 두문동에 들어간 고려 유신 72명을 가리킨다. 이 범주에는 순절자. 유배자. 은둔자 등이 모두 포함될 수 있다. 이 경우 논리가 맞을려면 신왕조를 세운(1392년 7월 17일) 이후에 절의를 지키기 위해 두문동에 들어간 일이 있어야 된다.

세째는 광의의 개념으로 두문동 72현을 고려수절신과 동의어로 사용하는 것이다.

이들 중 두문동 72현과 가장 가까운 개념을 두번째 개념에 세번째 개념을 포괄하여 혼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산청향토사에서 발췌>

 

 

 

 

▣ 대포서원

 

 

산청 대포서원에 왔다.

 

대포서원(大浦書院)은 고려말 충신 농은(農隱) 민안부(閔安富)의 절의를 기리기 위해 1693년(숙종19) 지역 유림과 후손들이 세운 서원이다.

민안부는 일찍이 등과하여 대소의 관직을 거치고 고려 공양왕 때 예의판서를 지냈다. 1392년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자 선생을 비롯한 72현은 이에 반대하여 두문동에 은둔하였으며, 후에 산청군 대포리로 내려와 살면서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강고산 망경대에 올라 송경(松京)을 바라보면서 고려조를 추모하였다고 한다.

대포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874년(고종11) 유림과 후손들에 의하여 복원되었으며 그 후 수차례의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현지 안내문에서>

 

여기서 현재 지역민이 부르는 강고산은 필봉산 동쪽 근거리에 위치한 조금 밋밋한 봉우리이며,  망경대는 왕산 북쪽 지능선상에 위치한다.  과거에 왕산을 강고산이라 불렀다는 이야기는 듣지못해 뭔가 조금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다. 추모일도 초하루와 보름으로 표시되어 있지만  어느 곳엔 매월 초하루로 나오며 개인적으로는 초하루에 마음이 간다.

 

 

 

 

 

 

<부조현언지록>, <전고대방> 에 의하면 72인 중 두류산에 은둔했다는 인물이 적어도 18명이나 된다. 그들이 은둔했다는 排祿洞(배록동/ 녹을 물리친 마을)이 실재하였는지, 있었다면 어디인지 알 길이 없으나 지리산 주변의 은둔지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마을이 아닌가 한다. 지리산이 남한 제일의 영산이요 심산유곡으로 피난처로 적합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며, 고려 왕실과 친근성, 마야사(일명 왕건의 어머니 위숙왕후의 사당으로 추앙), 반야봉 등 구전설화에서 지리산과 고려왕실과의 친근성을 잘 말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하여 고려 충신들이 지리산 주변에 은거하면서 반체제세력화되자 이성계는 마침내 지리산을 반역산이라 규정하여 전라도로 귀양을 보냈다고 한다. 지리산의 전라도 귀양이라는 구전설화도 이 무렵에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고 산청향토사에 기록되어 있다.

 

 

 

 

 

 

고려시대 우리고장에는 어떠한 명문들이 살았는가?

산음호적에 의하면 17세기 초에도 성관이 없던 사람이 인구의 과반이었으니 그보다 몇 백년 전에 명문이 많이 있지 않았을 것이다. 

강성 배양 산하에 세거해 오던 남평문씨, 초계주씨는 사성가문으로 유명하며, 단계 보암산하에는 김해허씨가 살았다. 남사마을에는 고려시대부터 진양하씨의 세거지로 문효공 하연이 이곳에서 태어났다.

산음 강성 지역에 명문 대족이 세거하기 시작한 것은 려말 조선초 역성혁명기였다. 문익점이 출신한 남평문씨, 생초 대포의 여흥민씨, 생초 노은의 문성배씨(노은동), 금서의 함양오씨(덕촌),  초곡(생초)의 반남박씨, 단계의 안동권씨, 법물의 상산김씨, 남사마을 성주이씨(위 성씨들과는 성격이 다르다. 개국공신 이제의 후손이다.) 등이 이 시기에 이거한 대표적인 대성이었다.

이와 같은 여말선초에 많은 명사 명문들이 산간고을인 산음. 단성에 대거 이거, 은둔하게됨으로써 우리고장에도 학문과 교화의 바람이 일고 지역개발에도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산청 향토사에서 발췌>

 

 

 

 

 

산음. 단성지방에 은둔한 많은 고려유신들 중 두문동 72현의 광의의 개념과 관계되는 인물은 민안부, 문익점, 김후의 세사람이다. 그러나 문익정은 고려의 수절신이기는 하나 엄밀한 의미에서 두문동과는 관계가 없으며, 김후는 <기우집 / 72인중 한사람인 이행의 문집>, <전고대방> 의 72현 명단이나 부조현 언지록에도 그 이름은 나타나지 않는다.

농은 민안부(생.몰 미상)는 여흥민씨 시조 청도의 10세손으로 공민왕 9년(1360)에 별시에 급제한 후 여말에 예의판서에 이르렀다. 고려의 국운이 기울어지고 공양왕 4년(1392) 4월에 정몽주가 격살당하고 7월에 역성혁명이 성취되자 민안부도 다른 고려 유신들과 함께 신왕조에 벼슬하기를 거부하고 불사이군의 의절로써 불조현에 모여 각자의 수절의 뜻을 밝혔다.

만안부가 처자와 처족을 거느리고 은둔지로 정착한 곳이 산음 한개(대포)였다.

그의 장인 심연도 석답촌에 은거하니 산음에 세거하게 된 청송 심씨의 선조가 되었으며, 민안부는 여흥민씨의 선조로서 산음 최고의 고관역임자였다.

민안부는 한개(대포)에서의 생활은 농경개척, 충절의 교육과 실천, 세속을 버린 은둔 생활로 요약할 수 있다.

그의 개척자적 노력으로 그의 자손들도 이곳에 자리를 잡아 200년 뒤에는 오곡리(오부)에서 산음 제일의 민씨동족부락을 형성하기에 이르렀고,  다음으로 사생취의의 의리의 교육을 자손들에 가리키며 자손들에게 벼슬에나 과거에 나가지 말 것을 유계해, 72현중 자신들의 당대를 제외하고는 자손들에게 신왕조 츨사를 허락한 사람이 많다는 것을 고려해 볼 때 매우 대조적이다.

<산청향토사에서 발췌>

 

 

 

 

 

 

민안부 자신은 매월 초하루마다 강고산 중턱에 올라 큰 반석위에서 송경을 바라보며 숭모의 절을 하는 수절의 생활을 평생토록 실천하였으며, 후세인들이 그 반석을 망경대라 부르며 비석을 세워 그의 충절을 기리고 있다.

민안부의 수절생활은 강성에 낙향하여 수절하고 있던 문익점과도 전혀 접촉이 없을만치 철저했거니와 자손들에게 부사의 유계를 남겼기 때문에 그의 충절은 오래동안 잊혀져 왔다. 그러나 3세기가 지난 후 조선왕조에 있어서 마침내 고려 유신들의 충절이 숭모되기에 이르렀다.

민안부에 대한 최초의 표절은 도내의 유림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숙종19년(1693) 유림들이 모여 대포에 사우를 지어 그의 충절을 기린 것이다. 이 사우는 그 후 재건, 증축되어 오늘날  대포서원으로 보존되어 왔다.

두문동 72현에 대한 국가적 표절사업은 영조때 부터 시작되었다. 치세 16년(1740)년 가을 개경 부조현의 역사적 연유를 묻고 그 내용에 감동한 영조는 "부조현"이란 어필을 내려 비석을 세우고 비석 뒷면에 그 내력을 적게 하였다. 그 후에도 표절사업을 더욱 확충시켜 영조 27년에는 두문동에 비를 세워 72현을 제사지내게 하고 그 자손들을 탁용하도록 하였다.

<산청향토사에서>

 

 

 

 

 

 

영조를 이은 정조는 치세 7년(1783)에 두문동 10리 거리에 표절사를 건립하고 먼저 충절이 확인된 임선미(휴암), 조의생(원촌), 맹씨성을 가진분(맹호성) 3현을 배향하였고, 순조 11년(1811)에는 공론에 따라 박문수(송암),  성사재(두문자)를  추가로 배향하고 그 뒤를 이어 진사 권충학을 비롯한 관학 및 사도유생 200여명이 민안부와 김충한(수은, 예의판서)의 2현을 선례에 따라 표절사에 배향햐여아 한다고 상소하여 간청하고 주청하는 상소가 연달아 마침내 순조는 그것을  윤허하였으므로  표절사 7현이 배향되었다.

<산청향토사에서 발췌>

 

 

 

 

▣ 산청 승마장

 

 

대포마을에 산청승마장이 있다.

 

 

 

 

 

 

마사회의 지원과 지역주민의 협력사업으로 시작된 승마장이 후에 조금 바뀐것 같다.

 

 

 

 

 

 

 

 

 

 

 

 

 

지역 주민들이 승마를 즐기던 곳인데 지금은 어떻게 변했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