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의 일상들

우리지역 둘러보기 6-1 / 광제암문, 단속사지, 정당매

정헌의 티스토리 2019. 6. 18. 22:27

■ 우리지역 둘러보기 6 -1  /  광제암문, 단속사지, 정당매.

 

단성면 소재지에서 약 13km, 단성면 운리 탑동마을에 단속사지가 있다.

대중교통인 버스는 하루에 몇 대 다니지 않으므로 승용차를 이용하여 접근하는 것이 편하다,  

단속사로 진입하는 들머리라 할 수 있는 청계리 용두마을 뒷편 남사천변의 동산 북쪽 암벽에 광제암문 각자가 있고,

단속사지에 산청삼매의 하나인 정당매가 있어 같이 둘러본다,

 

 

▷ 가는 길

 

 

 

 

 

▷ 탐방코스 (2019. 6. 13)

단속사지(광제암문, 단속사지 동.서 석탑, 정당매)

 

 

▷ 탐방후에

 

▣ 광제암문 각자.

 

 

 

산청군 단성면 청계리 용두마을 뒷편이다,

 

석대산에서 입석리쪽으로 내려오는 능선이 용두마을 인근에서 서남쪽으로 작은 지능선을 뻗어 남사천변에서 조그만 동산을 일으킨 일으킨다, 지금은 이 동산 동쪽으로 모퉁이를 이루는 나즈막한 고개로 도로가 개설되어 있지만 아주 옛날에는 하천변으로 길이 있었을런지 모르겠다.

이 동산 남쪽에 접하여 용두마을이 있고, 북쪽 암벽에 광제암문(廣濟癌門)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먼 과거 하천(남사천)변으로 길이 있었을때 단속사로 들어가는 길목인 셈으로, 이러한 글귀를 입구에 새겨둠으로서 절의 영역과 오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사찰을 찾는 의미를 더하게 하였는지 모르겠다,

 

 

 

 

 

 

 

이곳 고개?를 넘는 곳에 낙서재, 광제암문을 알리는 이정표가 있다,

철판에 구멍을 뚫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이 이정표는 확 눈에 띄지는 않지만 나름 정성을 들여 만들었다,

아마 아랫쪽 낙서재 주인이 세우지 않았나 싶다,

 

 

 

 

 

 

 

광제암문 각자를 찾아가는 길은 광제암문앞 하천 상.하의 농로 또는 도랑을 따라 진입할 수 있으나.

가장 쉬운 길이 이곳 낙서재로 들어가는 길이다,

주자창은 갖추어지지 않았으나 과거 두릅집으로 불리는 00집이나 도로변에 주차하면 된다,

 

 

 

 

 

 

 

낙서재로 살짝 내려선다,

과거 그늘지고, 사람 발길조차 뜸한 음산한 곳이었는데

지금은 한채의 주택을 건립하고 주변을 나름대로 꾸민탓인지 그네 등 이것 저것 볼거리가 있다,

 

 

 

 

 

 

 

낙서재,

주인은 진주에 살고있다 하고,  별장같은 느낌이 든다.

이곳 저곳 주변에 정성을 많이 들였으나 뭔지 산만한 느낌이다,

 

 

 

 

 

 

 

 

 

 

 

 

 

 

 

낙서대 좌측 암벽이다,

우측 하단의 두 바위가 마주보고 있는 원숭이 얼굴의 형상을 하고 있다,

 

 

 

 

 

 

 

이곳 암벽에 광제암문 각자가 있다,

탁본 등의 이유로 주변 바위가 깨끗하여 금새 알수 있는 곳이다,

 

 

 

 

 

 

 

앞쪽 아래로는 용두마을앞 들로 이어지는 수로가 있다,

과게에 이곳을 거쳐 단속사로 오르는 길이 있었을지 모르는 곳이다,

 

 

 

 

 

 

 

광제암문(廣濟癌門,  넓을 광, 건널 또는 구제할 제)

폭넓게 세상을 구제하는 곳으로 들어서는 바위문? 많은 사람을 도와 이롭게 한다. 넓게 깨달음을 얻게한다 등의 뜻이 있다한다,

이 바위앞이 과거 단속사로 (안쪽에 사방 산으로 둘러싸인 청계리, 운리등이 있음) 들어서는 좁은 관문으로 볼 때 대문이나 이정표의 역할을  톡톡히 할 수 있는 지형을 하고 있다,

예전 한때 단속사에서 씻는 쌀뜨물이 10리를 걸쳐 내려갔다는 얘기가 있었다 하니 더욱 그렇다,

 

 

 

 

 

 

 

이곳 광제암문 각자는 10여m높이의 암벽사면에 해서체로 새겨져 있으며 

가로 70cm, 세로1m쯤의 사각형 이중 테두리를 둘렀으며, 위에 지붕 모양의 삼각형을 그려 전체적으로 집 모양의 오각형 이중 선을 그어 그 안에 보호하고 있는 느낌이다,

그리고 좌우에 세로로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다,

 

 

         

 

 

 

 

쌍계석문(雙磎石門) 

참고 시내 계 (溪, 谿, 磎)

 

 

 

 

 

 

 

쌍계사 석문 밖의 문같이 생긴 바위에 새겨진 각자이다,

지금은 새로인 길이 나 있어 이 길을 따르면 볼 수 없고 구 길을 따라야 볼 수 있다,

헌강왕(憲康王 재위 875!886)이 최치원에게 '쌍계석문(雙磎石門)' 4자를 쓰게하여 바위에 새겼다고 전하며,

최치원이 쇠지팡이로 쓴 길이라 하여 철장서(鐵杖書)'라고도 한다,

왼편 바위는 타원형으로 쌍계(雙磎)가, 오른편 바위는 마름모꼴로 석문(石門)'이 각각 음각되어 있다,

쌍계사 입구 수문장처럼 서 있고, 법계(法界)와 숙계(俗界)의 경계를 짓는 듯하다,

최치원의 친필로 전하는 쌍계석문 4자는 조선시대 유자(儒者)나 승려들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로 지리산 유람의 명소였으며, 후대인에게 시상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안내문에서>

 

 

 

 

 

 

 

인터넷으로 광제암문을 검색하니 여러 글이 있다,

 

신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진주(晉州) 불우조(佛宇條)에 다음과 같이 기록 되어있다.

 

경주최씨 중앙종친회에서는 <동국여지승람>진주조에 의하면 "불우 단속사(斷俗寺)는 지리산 동쪽에 있다, 골 입구에 최치원이 쓴  광제암문(廣濟癌門) 네 글자를 새긴 돌이 있다"

또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외 선인들이 유산기(遊山記)인 두류록과 조선시대 선비들의 문집들에도 최치원의 작품으로 기록하고 있다, 대표적인 기록들은 추강 남효온(1454~1492)의 지리산일과 (智異山日課), 김일손의 속두류록(續頭流錄1489), 송병선의 두류산기(頭流山記 1879), 성해응(1760~1839)의 동국명산기(東國名山記) 등이 있다,

 

추강 남효온(秋江 南孝溫, 1454~1492)지리산일과(智異山日課)’

丁未年 927일 계해일, 晉州餘沙等村을 출발하여 斷俗寺로 향하였다. 洞 口廣濟巖門이라는 네 개의 큰 글자가 바위 표면에 새겨져 있으나 누가 쓴 것인지는 모른다.

巖門에 들어가서 몇 리쯤 지점에 단속사가 있었다. 隸人의 집이 감나무 숲과 대나무에 어우러져 한 촌락을 이루었고, 그 가운데 큰 伽藍이 있었다.

그 문에 智異山斷俗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문 앞에 坦然禪師碑銘이 있으니, 平章事 李之茂가 짓고, 금나라 12壬辰年 1월에 세운 것이다.”

 

濯纓 金馹孫탁영 김일손의 두류기행록

"5리쯤 가니 대울타리 안에 새로 덮은 집들이 있고, 뽕나무는 우거졌는데, 밥 짓는 연기가 이는 것이 보인다,  시내 하나를 건너 1리즘 나가니 감나무가 겹으로 둘러있고, 온 산은 나무는 모두 밤나무 뿐이요, 장경판각(藏經板閣)이 높다랗게 담장 안에 있다,

담장에서 서쪽으로 백 보쯤 돌아가면 樹林속에 절이 있는데, 扁額에 智異山 斷俗寺라 씌였고, 碑가 문전에 섰는데 바로 고려 平章事 이지무(李之茂)의 소작인 대감사(大鑑師)의 명으로 完顔완안(金國). 大定대정 연간에 세운 것이다,"

 

濯纓 金馹孫 (탁영 김일손,1464~1498)속두류록(續頭流錄)’

 

단성(丹城)에서 서쪽으로 약 15리쯤 험한 길을 구불구불 다 지나고 나면 널찍한 언덕이 나온다. 거기에서 단애를 따라 북쪽으로 3, 4리쯤 가면 곡구(谷口)가 나오는데, 그 입구에 바위를 깎아 새긴 광제암문(廣濟巖門)’이라는 네 글자가 있다. 글자의 획이 강직하고 고아(古雅)한데, 최고운의 수적(手迹)이라고 세상에서 전한다.

석문(石門)에서 1리쯤 가면 귀룡(龜龍)의 고비(古碑)가 있는데, 그 비액(碑額)에 전자(篆字)쌍계사고진감선사(雙溪寺故眞鑑禪師碑)’라는 아홉 글자가 새겨져 있고, 그 옆에 전 서국 도순관 승무랑 시어사 사자금어대 신 최치원이 분부를 받들어 짓다. 광계 3(887, 진성여왕1)에 세우다. [前西國都巡官承務郞侍御史賜紫金魚袋臣崔致遠奉敎撰光啓三年建라고 적혀 있다.

 

광계(光啓)는 당 희종(唐僖宗)의 연호이다. 갑자를 따지면 지금 어언 600여 년이 지났으니, 역시 오래되었다고 하겠다. 인물의 존망과 대운의 흥폐가 무궁히 이어지는 속에 이 무심한 비석만이 홀로 없어지지 않고 서 있으니, 식을 한번 발할 만도 하다.

 

 내가 비갈(碑碣)을 본 것이 적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중에서 단속사(斷俗寺) 신행(神行)의 비석은 원화(元和) 연간에 세워졌으니 광계보다 앞선다고 할 것이요, 오대(五臺寺) 수정(水精)의 기문(記文)은 권적(權適)이 지었으니 그 또한 일세의 문사(文士)라고 할 것이다. 그럼에도구하고 유독 이 비석에 대해서 감회가 끝없이 일어나는 것은, 어쩌면 고운의 수택이 여전히 남아 있는데다가 고운산수 간에 소요할 수밖에 없었던 그 금회(襟懷)가 백세(百世) 뒤에까지 계합되는 점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가령 내가 고운의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가까이 시봉하며 따름으로써 고운으로 하여금 고독하게 불교를 배우는 자들과 지내지 않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가령 고운이 오늘날에 태어났더라면 또한 반드시 큰일을 할 만한 지위에 거하면서 나라를 빛낼 문장 실력을 발휘하여 태평의 시대를 장식했을 것이요, 나 또한 그 문하에서 필연(筆硯)을 받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끼 낀 비석만 매만지고 있으니, 그 감회가 어떻다고 하겠는가.

사찰 북쪽에 고운이 올랐다는 팔영루(八詠樓)의 옛터가 있는데, 지금 거승(居僧) 의공(義空)이 자재를 모아 누대를 일으킬 예정이라고 한다.”

500년 전 김일손(金馹孫·1464~1498)25세 때(1489)이곳을 다녀갔다.

단속사에는 고운의 독서당(讀書堂)이 있었다 하니 이러한 주장이 있을 수 있다. 고운이 글을 읽었다고 하는 독서당이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이곳 단속사 외에도 경주 낭산(狼山), 가야산 해인사(海印寺)에도 있었다 한다.

 

최치원 글씨가 아닌 스님의 글씨

그런데, 근세에 들어서 광제암문은 최치원의 글씨가 아니고 어느 스님의 글씨라는 것이 판명되어졌다.

일제강점기인 1919년에 발행 된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P. 232) 단속사동동구석각斷俗寺東洞口石刻에 의하면

서기 995(고려성종 14년 이 절의 석혜釋慧 스님이 쓰고 석효선釋曉禪 스님이 음각하여 새긴 것으로 되어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당시 일본인 학자가 광제암문의 탁본을 위해 각자(刻字) 주변의 이끼와 흙을 걷어내는 과정에서 각자의 좌우에 작은 글씨로 세로로 새겨진 문장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좌우의 세로글씨는 광제암문의 글씨를 쓴 연도와 쓰고, 새긴 사람의 이름을 적은 것으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廣濟 嵒門(광제 암문) : 광제로 들어가는 바위문.

日(통화 십삼년 을미 사월 일):995년 음력 4월에 새김.

 惠暌 刻者 釋 曉禪(서자 석 혜규 각자 석 효선):쓴 사람은 중 혜규이고,새긴 사람은 중 효선이다.

 

 

 

 

 

 

 

또한 광제암문 각자 좌측편에 이름 같은 글자들이 여럿 새겨져 있는데,

뭔지는 모르지만 큰 의미는 없는 것 같다,

 

 

 

 

 

 

 

광제암문을 새긴 바위 다른면에 이런 각자도 있다,

1969.4.6. 단성면에 살고있는 병오생 10명이 모임을 가진후 자신들 이름과 본관을 새겼다,

단기 4302년 을유 4월 6일 도현규 씀

 

 

 

 

 

 

 

광제암문 각자 앞쪽에 있는 바위를 휴수대(休水臺)라 이름붙였다.

아마 이 집 주인이 붙인 이름이리라,

바위위에 오르면 광제암문 각자를 가까이서 볼 수 있다,

 

 

 

 

 

 

 

휴수대를 반대측에서 본 모습이다,

주변에 무위정無爲정)등 주인이 들인 정성은 가득하나 썩 운치있지는 않다,

 

 

 

 

 ▣ 단속사지지, 삼층석탑, 

 

 

 

단성면 운리,

소나무 솦 가장자리에 단속사 당간지주가 있다,

 

 

 

 

 

 

 

앞쪽에는 밀양박씨, 재령이씨 부부의 묘가 있다,

 

 

 

 

 

 

 

신라 경덕왕때 창건되고 솔거가 그린 유마상이 있었다는 단속사지 내에 보물 제72호, 제73호로 지정되어 있는 동.서 삼층석탑과 더불어  그 입구에 길이 356m, 직경 50cm의 당간지주 2기가 윗 부분이 떨어져 나간채 방치되어 있는 것을 84년 5월 부분을 찾아 서쪽 1기는 복원하고 1기는 부분만 복원 현존하고 있다,            

 

 

 

 

 

 

 

 

 

 

 

 

 

 

 

 

 

 

 

 

 

 

 

 

 

당간지주앞에서 바라본 단속사지 방향,

뒤로 보이는 옥녀봉, 사실 위치로 본다면 지리산과는 제법 거리를 두고 있으며 뒷쪽으로 지리산을 잘 조망할 수 있는 웅석봉 달뜨기 능선 아랫쪽이기도 하며,깊은 골짜기가 아닌 야트막하고 볼록한 구릉을 형성하고 있어 양지바르고 따뜻한 곳에 단속사지가 위치한다,

 

 

 

 

 

 

 

단속사지로 오르는 길목에 남명선생 시비가 있다,

 

 

 

 

 

 

 

단속사지 서탑,

 

 

 

 

 

 

 

약간 각도를 달리하여,

 

단속사지 동.서 삼층석탑, / 보물 제 72, 73호.

단속사지의 법당자리 앞에 동,서로 세워졌던 통일신라시대의 쌍탑이다, 기단은 이중으로 아래 기단은 각 면이 하나의 돌로 구성되어 있으며, 수평을 이루고 있는 지붕돌 아래에는 다섯개의 주름이 있다, 동.서 두 탑은 양식이나 규모가 비슷하여 같은 시기에 만들어 진것을 알 수 있으나, 서탑은 파손이 심한 편이다, 상륜부(上輪部)는 노반(露盤), 복발(覆鉢), 앙화(仰花)등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1967년의 해체 보수 때에 서탑의 일층 몸돌의 윗부분에서 부처님의 사리를 넣는 둥근 모양의 사리공이 확인되었다, 이 탑들은 신라계 양식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다소의 생략을 보이는 9세기 석탑의 정형을 보이고 있다,

 

노반 (露盤) : 탑의 최상부 옥개석 위에 놓아 상륜부를 받치는 부재. 승로반(承露盤)의 준말.                      

복발 (覆鉢) : 탑의 노반 위에 놓는 엎은 주발 모양의 장식, 天上의 돔(Dome)을 상징                       

앙화 (仰花) : 탑의 복발 위에 놓고 꽃모양을 새긴 장식, 33천을 형상화함

 

 

 

 

 

 

 

단속사는 748년(35대 경덕왕 7)에 대나마 이순(李純)이 창건하였다는 설과 763년(35대 경덕왕 22)에 신충(信忠)이  창건하였다는 설이 <삼국유사>의 '신충괘관'조에 실려있다,

경덕왕 때 직장(直長) 이순이 일찍부터 발원하기를 나이 50이 되면 출가하여 절을 짓겟다고 하였다, 748년 마침 그의 나이가 50이 되었으므로 원래 있었던 작은 절(조연사槽淵寺)을 중창하여 단속사라 하고 스스로 삭발하여 법명을 공굉장로(空宏長老)라 하였다고 전한다,

또 763년에 신충이 관직을 사퇴하고 두 친구와 관을 벗어 걸로 함께 지리산에 들어갔는데 경덕왕이 두 번이나 불러도 나오지 않고 머리를 깍고 사문이 되어 왕을 위하여 단속사를 짓고 죽을 때까지 대왕의 복을 빌겠다고 하니 왕이 허락하였다고 한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쪽 탑이다,

 

조선 초기에는 교종에 속하였으며 정확한 폐사 연대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현재 절터에는 보물 제72호인 단속사자 동삼층석탑과 보물 제73호인 서삼층석탑이 원위치에 있으며, 주변에는 금당지를 비롯하여 강당지 등의 초석이 그대로 남아 있어 신라시대의 가람배치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금당지에는 민가가 잇어서 정확한 규모는 확인할 수 없다,

원래 위치에 건립되어 있는 동서 삼층석탑은 전형적인 신라 석탑으로서 삼국통일 이후 이와 같은 쌍탑 가람의 형식이 경주를 떠나 지방의 깊은 산골에까지 전파되었음을 살필 수 있다, 이 밖에도 절터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와당을 위시하여 비 조각이 출토되고 있으며, 근처에는 최치원이 쓴 광제암문 각석이 있다, 경내에는 신라 병부령 김헌정(金獻貞)이 지어 813년(헌덕왕5)에 세우 신행선사비(神行禪師碑), 1148년(의종2)이 절에 들어와 1159년에 입적한 탄연(坦然 : 大鑑國師)의 영당(影堂)과 비, 그리고 최치원의 독서당이 있었다,

현재 신행선사비편의 일부는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그리고 대감국사비편은 숙명여자대학교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또 이 절에는 신라의 솔거(率居)가 그린 유마(維魔像)상이 있엇는데 세상에서 전하기를 신이 그린 그림(神畵)이라 하였다 한다, 또 이 절에서 1226년(고종13)에 간행한 <선문염송집(禪門拈頌集).>이 있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

 

 

 

 

 

 

 

효성왕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 어진 선비 신충과 더불어 대궐 뜰의 잣나무 밑에서 바둑을 두며 하루는 말했다,              

 "뒷날에 만약 내 그대를 잊는다면, 저 잣나무가 증거가 될 것이다" 그러자 신충은 일어나서 절을 했다, 그 후 몇 달 뒤 효성왕이 즉위하여 공신들에게 상을 주면서 신충을 깜빡 잊고 명단에 넣지 않았다, 이에 신충이 원망스런 노래를 지어 이를 잣나무에 붙였더니 나무가 갑자기 말랐다. 왕이 이상히 여겨 여러 사람을 보내어 살펴보게 했더니 노래를 가져다 바쳤다, 왕은 크게 놀라며 말했다 "정무가 복잡하고 바빠 하마터면 각궁(角弓)을 잊을뻔 했구나,"하며 신충을 불러 벼슬을 주자 잣나무는 그 때야 살아났다, 그 노래는 이러하다,

뜰의 잣나무는 가을에도 아니 이울어져 너를 어찌 잊을꼬, 하시던 우러러 보던 얼굴은 계시건만, 옛 못의 그림자가 가는 물살 원망하듯, 너의 모습 바라보나, 누리는 싫어라.           

이렇듯 전귀는 있으나 후귀는 없어졌다, 이로써 신충은 효성왕, 경덕왕 두 왕조에 벼슬을 하여 그 신임이 무척 두터웠다,

경덕왕 22년 계묘(763)에 신충은 두 친구와 서로 약속하고 벼슬을 버리고 남악에 들어갔다, 왕이 두 번을 불렀으나 그 곳에서 나오지 않고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그는 왕을 위하여 단속사를 세우고 그 곳에서 살았다, 평생을 구학(丘壑, 골 학)에서 마치며 대왕의 복을 빌기를 원했으므로 왕은 이를 허락했다. 임금의 진영을 모셔 두었는데 금당 뒷폅에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남쪽으로 속휴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현재는 와전되어 소화리라 한다,

또 별기에는 이렇게 전한다, 경덕왕때에 직장 이준이 일찍이 소원을 빌었더니 나이 50이 되면 조연소사를 고쳐 지어 큰 절로 마들고 이름을 단속사라 했다, 자신도 머리를 깎고 법명을 공굉장로라 하고 절에 거주한 지 20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는 앞의 삼국사에 실린 것과 같지 않으나 두 가지 설을 실음으로 의심하는 점을 덜고자 한다,

 

 삼국유사 <신충괘관(信忠掛冠)조>

 

 

 

 

 

 

 

점필재 삼총사로 불리는 김일손, 정여창, 김굉필이 함께 지리산 전왕봉을 등반한 후 김일손이 쓴 두류기행을 보면 그들은 단속사로 들어가면서 "절이 황폐하여 지금 중이 거쳐하지 않는 곳이 수백칸이 되고 동쪽 행랑에 석불 500구나 있는데 하나하나가 각기 형상이 달라서 기이하기만 했다"고 술회하고 있다,

이 점으로 미루어 보아 조선 초기까지는 숭유배불 정책에 의해 간신히 지탱해 온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곳 단속사터는 한국사상학적인 면이나 금석문적인 면에서 기념비적인 유허라 할 수 있다,

신행선서가 통일신라시대에 법랑에 이어 북종선을 전래한 시사상의 소유자이고. 대감국사는 심품사현의 한 사람인 고려 시대 최고의 명필이었다, 선행선사와 대감국사의 부도비가 바로 이곳에 있었다  조성 중기까지 전하였으나 현재는 비편만이 동국대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고 다행히 탁본집이 전하고 있다,

 

신행선사(?~779(36대 혜공왕 15)는 경주 출신으로 장성한 나이에 출가하여 신라 최초로 북종선을 도입한 법랑선사(생몰년 미상. 27대 선덕여왕때 당에서 북종선을 최초로 도입함) 에게서 선법을 구하였다, 스승 법랑 선사가 입적하자 구법을 위해 당나라로 들어 갔으나 흉년이 들어 도둑이 횡행하여, 그도 협의를 받고 옥에 갇혔다가 40일 만에 석된 뒤, 지공에게서 3년간 공부하여 수기를 받았다,  그 뒤 귀국하여 많은 사람들을 제도하다가 지리산 단속사에서 입적하였다, 그는 법랑이 못다 편 북종선을 좀더 확대 발전시킨 인물로 한국사상사에 한 전기를 마련한 인물이다,

 

비는 813년 (헌덕왕 5)에 건립되었는데 비석은 파손된지 오래다,  다행이 비의 탁본이 전해오며 유희해의 <해동금원>에 전문이 실려 있다, 이에 의하면 비문은 김헌정이 지었고,  글씨는 승려 영업이 썼다, 서체는 행서로 자체는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한 <집자성교서>와 아주 비슷하다, 영업은 당나라에서 유학한 관계로 당시 당에서 크게 유행 왕희지체를 그의 그대로 썼다고 보녀, 더욱이 당시 신라에서도 왕희지의 글씨가 다수 전해져 유행하였더, <집자교서>에 보이는 약간의 불균형을 정리, 글자의 균형을 이룬 엄정한 품격은 영업의 글씨가 지니는  독자적인 경지라 하겠다, 다소 경직된 느낌은 있으나 힘차면서도 여유있는 점은 김생과 함께 신라 서예의 쌍벽을 이룬다 하겠다,

 < 퍼 옴>

 

 

 

 

 

 

대감국사 탄연(1070, 문종 24~1159, 의종 13)은 밀양 출신으로 15세에 명경과에 합격하여 숙종의 초청으로 세자를 가르치다가 궁중에서 물래 빠져나와 혜소국사 정현의 문하에 들어가서 공부하다가 신지를 전해 받고 다시 총림을 두루 방문하여 중득한 바를 단련하였는데 모슨 학자들이 그를 경모하였다, 뒤에 늙은 어머니 때문에 멀리 떠나지 못하고 고향 근처에 조그만한 절을 구하여 봉양하였다, 45세에 교종의 최고 지위인 삼중대사가 되었고, 62세에 선종의 최고 지위인 대선사가 된 뒤부터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자문에 응하였다, 한편 서예에도 뛰어나 황희지체를 따랐는데 강원도 춘천의 청평사 문수암 중수비를 썼다, 조선 초기 학자인 서거정은 김생, 유신, 최우와 더불어 그를 신품4현이라 부를만큼 글씨가 뛰어났다.

 

비는 1172년 (명종2년)에 만들어진 것이나 망실되어 지금은 파편 일부만 남아있다, 문경 김용사에 탁본이 보관되어 있으며, 이지무가 비문을 짓고 글씨는 승려 기준이 썼다, 비문의 글씨는 그의 스승인 탄연의 글씨를 본받아 왕희지의 필법을 잘 체득하여 쓴 것으로 고려시대의 매우 발젼된 행서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명종13년(1558)년 음력 5월 58세의 나이로 벗들과 함께 열한반째 지리산 유람에 나선 남명 조식은 단속사에서 시 한 수를 읊었다,

 

松下千年寺  人隨獨鶴壽  송하천년사 인수독학수   솔 아래 천년 엣절이 창연한데 사람이 한 마리 학을 따라 찾아드니

僧飢조朝冷  殿古野雲深  승기조조냉 전고야운심   중은 굶어서 부엌이 싸늘하고 금당은 낡아 구름에 파묻혔네

燈點峰頭月  春聲水低砧  등점봉두월 춘성수저침   등불은 봉우리의 달을 밝혀주고 방아는 물밑의 밍칫돌이 대신했네

佛殿香火死  惟見己灰心  불전향화사 유견기회심   부처 앞 향로에는 불도 꺼저 오직 채재럼 식은 마음을 보네,

 

 

 

 

 

 

 

부분적이나마 발굴조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 정당매

 

 

 

단속사지 동서삼층 석탑에서 금당지 쪽으로 약간,

매화나무 한 그루가 있다,

고려 말의 강회백(姜淮伯)은 과거하기 전에 이 절(단속사)에서 글을 읽으면서며 매화 한 그루를 심었는데, 

그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당문학에 이르렀다고 해서 그 나무를 정당매(政堂梅)라 하였다,

그 매화 나무가 현재 쌍탑 뒤에 있는데 수령은 약 600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주변의 돌들도 보통돌은 아닌 것 같다,

 

 

 

 

 

 

 

 

 

 

 

 

 

 

 

 

 

 

 

 

 

 

 

후손들이 세운 정당매비각까지 있다,

 

 

 

 

 

 

 

대충 둘러본 단속사 주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