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의 일상들

우리지역 둘러보기 6-2 / 산청 백운계곡

정헌의 티스토리 2019. 6. 20. 13:18

         ■ 우리지역 둘러보기 6 - 2 /  남명선생장구지소 백운계곡       


               지역학 연구회 6번째 답사일정이다,

               6월 6일 지역학 연구회 회원들과 함께한 남명선생 장구지소 백운계곡을 탐방하였만, 개인적으로 조금 부족한듯 하여

               6월 13일 재 탐방하였다, 백운계곡을 따라 지리산 둘레길과 만나는 지점을 지나  웅석봉으로 오르는 길 중 처음으로

               백운계곡을 건너는 곳까지는 계곡을 따라 오르고, 이후 등산로 및 임도를 따라 웅석봉으로 오르는 분기점까지 답사후

               등산로를 따라 되돌아 왔다,

               덤으로 같은 웅석봉에서 발원하는 청계계곡쪽 광제암문, 단속사지, 정당매 등도 둘러보았으며 문학모임과 관련 두번

               의 답사를 같이 구성하였다,


           ▷ 가는 길,



                                            승용차 주차장은 백운민박 뒷편에 있으나 성수기가 아니라면 도로변에 적의 주차해도 되겠다,




           ▷ 탐방코스  (2019. 6. 6일 및 6. 13일)

               백운 주차장 - 등산로를 기준으로 처음 계곡을 건너는  곳까지 계곡치기 - 이후 등산로 및 임도를 따라 마근담 능선까지

               (마근담봉과 용무림봉 사이) 갔다가 되돌아 옴.



           ▷ 탐방안내도 



                          상부 흑색 점선으로 임도 연장 도로이다,

                          가로로 마근담쪽으로 이어지는 적색 점선은 지리산둘레길이고,

                          백운계곡과 마근담계곡 사이의 능선상 등산로 등 일부 추가하였다,

                          인터넷에서 검색해 볼 때 가장 정확한 안내도로 보면 되겠다,






               백운산은 백운계곡으로 인해 이름을 얻은 산인것 같다,

               등산로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고 산세도 이름만큼 뻬어나지 않다,

               백운계곡으로의 등산로는 영산산장에서 계곡을 오른쪽에 두고 계속 오르다가 안내도 상 산길 건너는 곳( 끊어진

               임도 / 과거에는 임도였으나 현재는 임도 아님)에서 처음으로 계곡을 건너게 된다.(계곡(치기)을 따라 오르면 이

               곳까지는 등산화를 벗지 않고도 무난히 오를 수 있다.)

               이후 계곡을 좌측에 두고 조금 오르면 또다시 계곡을 좌측으로 건너게 되며 이곳에 쌍폭이 있다.

               쌍폭 아래에서 계곡을 건너 이후부터는 다시 계곡을 우측에 두고 오르게 된다. 대체로 초반 길의 상태는 계곡화

               되어있어 불량한 편이나 그런대로 다닐만 하다, 계속 오르면 길은 상대적으로 양호해 지며 나중 임도를 만난다.




           ▷ 탐방후에




              백운계곡 대형 주차장이다,

              백운계곡으로 들어가는 중간 도로변에 대형주차장 표시가 있다,

              이곳에서 백운계곡으로 진입하면 백운 주차장이 있으며, 대형버스의 진입도 가능하다,

              따라서 이곳 도로변 주차장은 성수기에 백운주차장이 만차일때나 이용될 것 같다,








                   중간,


                   용문사

                   한림산 용문사翰林산 龍門사)로 표시되어 있다,

                   대한불교 법상종은 우리나라 불교 18종단의 하나이다, 신라시대의 진표(眞表)를 종조(宗祖)로 하여 전영동(全英東)이

                   1969년 전북 금산사에서 창종하고대한불교 법상종포교원이라 하였다, 1970년 불교재산관리법에 의하여 불교단체등록

                   을 하였고, 1977년 대한불교법상종으로 개칭하였다, 1993년 강남북으로 양분되었던 종단이 분규를 종식하고 다시 통

                   합되었다. 이후 1994년 우영명종정이 취임하였으며, 1997년 제10대 법륜스님이 총무원장으로 취임하였다,

                   총본산은 경기도 안성시 쌍미륵사에 있으며 서울 종로구 숭인동에 총무원이 있다,

                   미륵불의 자비실천, 십선(十善)을 통한 재가실천(재가실천), 국가사회를 위한 공헌, 지상낙원 구현의 이상을 도모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있으며 본존불로는 미륵불을 봉안한다,  <이상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대웅전 건물이 일반 사찰의 건물과는 달라 외견상 운치는 별로이다,






  



                        아랫쪽은 종각이다,








                  백운계곡 주차장,

                  영산산장 주차장앞을 지나 화장실 이정표를 따라 100m 조금 더의 거리에 있다,

                  주변에 공공화장실도 마련되어 있다,








                  위 주차장에 주차후 지나온 영산산장 입구로 되돌아 가면서 백운계곡을 본다,

                  계곡 좌측 일대가 영산산장(펜션)이다,








                   사실 피서철이 아니라면 이곳 영산산장 주변에 주차해도 되지만

                   공공 주차장을 확인할 겸 위 주자장에 주차하고 이곳으로 되돌아 왔다, 

                   이곳 보이는 영산 전용주차장 또는 현수막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뒷편에 바위에 용문동천 각자가 있고,

                   대각선으로 안쪽에 백운동 각자가 있는 바위가 있다,

                   이곳 좌측의 절벽을 사자항(使者項, 몰덜미항)이라 하는데, 기암 절벽이라 하기엔 뭐하다,








                    용문동천,








                   주차장 안쪽의 바위에,








                   백운동 각자가 있다,







                백운계곡으로 향한다,

                우측에 보이는 건물이 영산산장 펜션건물이다,








                  영산산장 펜션,








                 직진한다.

                 이곳에선 농장으로 진입로와 계곡길이 확연히 구분됨으로. 길을 몰라 헤맬 우려는 없다,








             영산산장을 지나

             보이는 철대문 우축 안쪽으로 들어서면 이내 계곡이 시작된다,

             물론 보이는 도로를 따라도 된다,








              이곳에서 부터 계곡을 따라 오른다,

              우측, 평상을 설치한 곳으로 오르면 된다,








               반석이 소를 이루며 경관이 좋다,    

               이곳을 청의소(聽義沼/ 의를 듣는다는 곳으로 이곳에서 동북 300m거리에 백운사 절터가 있다.) 라 하는 분도 있는데

               맞는지 모르겠다,     

 







               계곡을 따라 이곳 저곳으로 오른다,

               오르기 쉬워 보이는 곳으로 오르면 된다,









                 지나온 곳,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20분쯤,

                  아래 영산산장 윗쪽 계곡에서 14~5분쯤 오르니 영남제일천석(嶺南第一泉石) 각자가 보인다,








                         이곳 영남제일천석 각자가 있는 바위 주변을 登天대/ 등천대'라고 한다,








                     등천대 조금 윗쪽이다,








                      이곳을 아함소(雅咸沼, 아담할 아, 다 함, / 높이 5m의 경사진 폭포로 폭이 25m, 길이가 40m의 바위에

                      드리워져 있다)라 하는 분도 있는데 아함소 설명과는 조금 다른것 같다 맞는지 모르겠다,

                      아함소는 깊고 푸른 물 웅덩이로 길다란 소라는 의미란다,








                계속해서 계곡을 따라 오른다,








                 골짜기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반석이다,























            다지소(多知沼)?  


            다지소는 양편이 모두 바위요 폭이 26m, 길이 30m인데, 이곳에 목욕을 하면 자연히 많이 알아진다고 하는 곳이다,

            일반적으로 이곳을 다지소라 하는 것 같다,  어느 분은 이곳을 아함소라 한다,       

            이곳 백운동 계곡에는 수많은 작은 폭포들이 있어 그중에 조금 규모가 있는 폭포와 아함소, 다지소 등 이름을 가진

            곳이 있으나,  어느곳이 어느곳인지 정획히는 모르겠다,

          







               폭포 우측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위 다지소 좌측 상부 주변이다,
















































                         용문폭포,

                         4층으로 된 4개의 폭포다. 넓이 40m로 깊게 반석을 이루며 속창 회취바위라고도 한다,

                         소풍놀이 장소로 많이 찾아 들며, 뒤편 바위에 용문천이라 새겨져 있다,







             용문폭포는 남명선생장구지소 바로 아래에 있다,








               주차장에서 약 40분,

               영산산장 위 계곡들머리에서 35분여 오르면 남명선생장구지소에 도착한다,

               저만큼 용문천 붉은 각자가 보이는 바위가 있다,








                남명선생 장구지소 주변이다,








                  어느분의 블로그에서 목욕을 하면 아는것이 생긴다는 뜻이라는 다지소(多知沼)는

                  이곳 남명선생장구지소 주변의 소를 말한다는데 글쎄? 큰 소는 보이지 않는다,








                용문천,

                용문천 각자 좌측 아래에 페인트로 용문폭포라 적혀있다,

                사실 백운계곡에는 조그만 폭포들이 여럿 있다,

                이곳 남명선생 장구지소 주변은 넓은 반석을 이루고 있고 아랫쪽에 조그만 폭포가 있다,

                비가 많이 와 작은 폭포와 반석의 물이 어울려지면 제법 그럴듯 하겠다,








               남명선생장구지소 각자는

               용문천이 씌여있는 바위 좌측 뒷편에 보이는 바위에 있다,








            나무 그늘로 인해 언듯 보면 각자가 있는지 없는지 알아보기 어렵다,










              백운동은 남명 조식(1501~1572)이 지리산권역중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 인정했던 동천(洞天)이다,

              남명이 세번 유람했다고 하여 삼유동(三遊洞)이라고도 불렀다,

              19세기 말 나라가 어려움에 처하자 이 지역의 남명학파 유학자들이 남명정신을 기리기 위해 1893년 용문폭포 윗쪽 바위에

              '남명선생장구지소(南冥先生杖屨之所)' 여덟 글자를 새기고 회합을 가졌다,

              이곳은 남명의 후학들이 남명과 그 정신을 추모하던 문화공간이다,


             ☞ 지팡이 장(杖), 신발(미투리) 구(屨)

                 남명선생 장구지소 : 남명 선생의 발자취가 닿았던 곳.


                                                             <등산로변 안내문에서>







                 남명선생장구지소 주변이다,



                 아래의 글은 지리산 아흔아홉골 <지리 99, Ucc. jiri 99. Com>에서 엉겅퀴님의 글을 대부분 인용하였다,

                 이 웹문서에 들어가면 지리산 주변의 여러 지식들을 많이 배울수 있다,

                 관심있으신 분들은 많이 찾아보길 권하고 싶다,








               우리나라에 백운산이란 이름을 가진 산이 많다,

               대체로 산이 높고 신령스러워 흰구름이 머물거나, 희게 보이는 바위가 많아서일 것이다,

               일부 언어학자들은  백운산은 대부분 우리말「밝은산(뫼)」이 한자로 표기되는 과정에서 변환된 것이라고 보고 있다한다.

               처음에 산이름에 무슨 고유명사가 있었겠는가? 그냥 앞산 뒷산 남산 동산 높은산(수리산․머리산) 흰산 검은산 큰산 작은산

               (앗산) 돌산등 그 산 언저리에 사는 사람들끼리 통하는 보통명사로 불렀을 것이다. 그러다가 교류가 확대되면서 구분할 필

               요성이 생겨 고유명사를 붙였을 거란 얘기다. 


               국어학자 배우리 氏의 연구에 따르면 밝다고 할 때의 ‘밝’(ㅏ는 아래 ㅏ)과 관련된 지명은 한자를 빌어 표기할 때 “박, 백,

               배, 불, 벌, 부리, 부루”등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그래서 백운산 뿐만 아니라  “백산  배산  백양산  백암산  박달산 함백산

               한백산  발왕산 불함산 태백산 소백산 백두산 발교산” 등도 ‘밝’계통의 산이름으로 본다. 높아서 밝은 땅(산)은 신성한 곳

               으로 여겼다는 얘기다. 이와 같은 의견은 일찍이 최남선 양주동 선생 등의 선구적인 연구에서도 비슷하게 확인된다 한다.


               백운동 계곡의 백운 또한 “밝은”으로 보면 딱 어울린다. 바위가 희어서 밝고, 골짜기가 양지쪽이라 밝고, 깎아지른 산이 그

               늘을 드리우면 음습할텐데 그렇지 않아서 밝다. 알다시피 이 밝은 골짜기는 남명선생이 자주 찾았던 곳이며, 또「남명선생

               장구지소(南冥先生杖屨之所)」 각자(刻字)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장구지소(杖屨之所)는 지팡이[杖]와 짚신[屨]을 끌고와 놀던 곳이니, 이름난 사람이 거닐던 자취를 가리킨다.

                  가끔 구(屨) 대신 리(履)를 써서 장리지소(杖履之所)라고 하기도 하는데, 구(屨)와 리(履)는 신발이라는 뜻 같아 꼭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예로부터 관용적 표현은 장구지소였다. 전국의 명승지에는 웬만한 곳에는 다 ‘누구누구杖屨

                  之所’라 새겨져 있다.

                  가까운 것으로는 법계사 옆 가짜 문창대에 ‘고운최선생장구지소’가 있고, 왕산에도 ‘농은민선생장구지소’가 있다.  

                  선생의 발자취가 머문 곳이 어디 여기 뿐이겠는가 마는 장구지소 각자가 있는 곳은 내가 알기론 여기 밖에 없다. 그것을

                  새긴 연유가 기록으로 남아 있어 소개한다. 1893년이었다. 사진자료가 없어 얼마 전에 사진을 담으러 현장에 갔더니 그

                  전에는 각자가 많이 마모된 상태였는데 보강공사를 거쳤는지 선명해졌더라. 앞으로 한 백년은 끄떡없을 것 같다.



  





                백운동에 남명선생의 유적을 새긴 기록 (白雲洞刻南冥先生遺蹟記)



白雲洞刻南冥先生遺蹟記


天王峯北條入山陰界爲會稽山而據乎鏡湖之上泊然若不能休也則又遙遙南馳數十里蟠鬱於晉康赤城之間而介焉是曰白雲其洞壑曼然而橢長窈然而絶邃山益峭而水益駛懸而怒瀑飛練聚而 黝潭展鏡者不可數計龍門振鷺尤其絶勝者也嘉靖中南冥先生嘗臨遊於此以詩記之曰天下英雄所可羞一生筋力在封留靑山無限春風面西伐東征定未收蓋先生懷抱道德蘊畜經綸旣不能回天地入唐虞則慨然欲筮遯於山中作終老講道之地入德山神凝龍游獐項者凡幾度而久未得箚定故於此借留侯事而發自嘆也洞脣又有手栽古松今距樑摧爲三百二十有二載而鬱鬱蒼官儼然勁寒有如仁人志士閱金火遞運之變而剛毅有不挫之氣者然亦可瞻敬嗚呼水石之精秀不改於古杖屨之盤旋宛然如昨合置數架亭子彈壓一洞之勝興起後學之心不容已者也近年議成而未就人心之齟齬良可嘅恨今因斯文重鏤耆德妙英一時集于山天齋語及此洞未嘗不咨嘆曰旣往不可諫然水不忍廢地不忍荒古賢所戒無寧就洞面淨洒處表識先生所賦之蹟以警夫沈酩者不亦善夫有引先生之語難之曰先生之名如靑天白日太史書諸冊廣土銘諸口而區區入石於林莽之間求欲不朽者顧何有於先生乎曰有是哉先生所云警切世之好名不朽者則固是準的也然在吾輩則生已晩矣旣不得供洒掃於門下瞻秋霜烈日之粹容聞直內方外之旨訓則存諸心想寓諸夢寐者無因自發見一手澤之物亦可欽也遇一心賞之地亦可慕也陋巷之泉程伯子銘焉濂溪之橋朱夫子識焉是自不得不然者況今之讀其書講其學者或春秋景明之際徜徉泉石之間發舒精神風詠性情臨此水而濯纓仰高山而興懷乍見巖崖輝煌怳若操几陪隨各自洒然滌慮喚醒庶乎廉頑而立懦則先生之敎儘无窮矣奚可謂無益而且已乎遂相攜入洞刻南冥先生杖屢之所八字于振鷺瀑上而歸振鷺者南黎許愈取昌黎語而命名也臨崖揮洒者河君憲鎭也時則癸巳之重午也纔出洞門雨從龍湫上來一洗山崖宿塵而增潔是又嶽眞之顯濟奇事也


   

                천왕봉에서 북쪽 산줄기가 산음의 경계로 들어가 회계산이 되어 경호강 위에 가만히 웅크리고 있다가 더 이상 쉬지 못하고

                또 다시 저 멀리 남쪽으로 수십 리를 달려 진강 (晉康 진주) 적성(赤城 단성) 사이에서 얽히어 서렸다.  그기에 기대어 끼어

                있는 것이 백운동이다. 그 골짜기는 길게 이어져 길쭉하고 아득하고 깊어 산은 갈수록 험하고 물은 갈수록 빨라진다.  매달

                려 떨어지는 성난 폭포와 흰 비단처럼 흩날리는 물이 모여 시퍼런 못이 되고  거울처럼 펼쳐진 곳은  그 수를 셀 수 없을 정

                도이다.

   

                용문의 진로폭(振鷺瀑)은 그 경치가 더욱 뛰어나다. 가정 연간(嘉靖 명나라 세종의 연호 1522-1566)에 남명선생이 일찍이

                이곳에서 노닐면서 '백운동에서 놀며'라는  시를 지었으니 다음과 같다.

                남명은 시에서 장량의 고사를 인용해 욕심을 경계했다.


                天下英雄所可羞 (천하영웅소가수)  천하 영웅들이 부끄러워하는 바는

                一生筋力在封留 (일생근력재봉류)  일생의 공이 유(留)땅의 제후로 봉해진 것이라지만

                靑山無限春風面 (청산무한춘풍면)  끝없는 청산에 봄바람이 부는데 (푸른 산의 봄바람은 끝없이 불어)

                西伐東征定未收 (서벌동정정미수)  서쪽을 치고 동쪽을 쳐도 평정하지 못하네.(이리저리 쳐봐도 거두어 평정하지 못한다네)


                이것은 아마도 가슴 속에 품은 도덕과 깊이 쌓인 경륜으로도 요순시대는 이미 회복할 수 없으므로, 개연히 산중에 은둔하여

                여생을 보내면서 道를 강론할 땅을 구하려고 덕산으로 들어 와서는, 신응 용유 장항을 몇 번이나 찾았으나 오랫동안 정하지

                못했기에 유후(留侯 장량)의 고사를 빌어 스스로 탄식한 것이리라.

   

                골짜기 입구에는 (선생이) 손수 심은 고송이 있는데, 지금 선생께서 가신 지 322년, 그때의 소나무가 이제 무성하게 자라

                장엄하고 엄숙하게 꿋꿋이 추위를 견디는 모습은  마치 어질고 지조 있는 선비가 쇠와 불이 바뀌는 운세 속에서도 강직하

                여 굴하지 않고, 꺾이지 않는 기운을 지녔으니 또한 우러러 존경할 만한 것과 같다.

                아,  선생이 옛날 거닐며 놀던 수석의 정수는 변치 않고 완연하니 지난날 같았으면 마땅히 몇 칸의 정자를 지어 한 골짜기

                의 좋은 경치를 독차지했을 것이라,  (그것이) 후학들의 마음을 흥기시켜 그만 둘 수 없게 하였다.  그래서 근년에 의논이

                이루어졌으나 실행되지는 못하였으니 인심의 어긋남이 정말 개탄스럽다.

 

                지금 사문(斯文 유학계)의 중망 있는 나이 많고 덕이 높은 사람들과 빼어난 젊은이들이 산천재에 같이 모여, 말이 백운동

                에 미쳐서는 미상불 크게 탄식하며 말하였다.

               “지나간 것은 고칠 수 없지만2) 물은 차마 폐할 수 없고 땅은 차마 황량하게 둘 수 없다는 것이 옛 현인이 경계한 바다. 골

                짜기 안 깨끗한 곳에 나아가 선생이 시부(詩賦)를 읊던 자취를 표시하여 저 술 취한(길 잃은) 사람들을 깨우친다면  좋지

                않겠는가?”

                어떤 이가 선생의 말을 어렵게 여겨 인용3)하여 말하였다. “선생의 이름은 마치 푸른 하늘의 밝은 해와 같아서 사관이 책 

                에 기록해두고 넓은 땅에 사는 사람들의 입에 새겨져 있거늘 구구하게 우거진 수풀속의 돌에다 새겨 썩어 없어지지 않기

                를 구하는 것은 생각컨대 선생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런 말씀이 있었지. 선생이 말한 바는 사람들이 이름 남기기를 좋아하여 썩어 없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을 경책(경계

                하고 채찍질함)한 것이니 본래 이것이 모범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늦게 태어나 이미 선생의 문하에서 물 뿌리고 비로쓰는4)

                일도 배울 수 없고 추상열일(秋霜烈日) 같은 존안을 우러러 뵐 수도 없고 直內方外[경(敬)과 의(義)]5)의 뜻을 들을 수도

                없다. 가르침을 마음에 간직하고 꿈속에서도 만나기를 생각한다면 직접 맞닿음이 없어도 자연스레 손때가 묻은 물건 하나

                라도 발견하면 흠모하고, 마음으로 즐긴 곳 하나라도 만나면 사모하게 된다. 안회가 마셨던 샘물, 정백자가 새긴 명(銘),

                주렴계가 거닐던 다리, 주부자가 남긴 표식6) 등은 스스로 얻지 못하면 어쩔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지금 그(*그들이

                남긴) 책을 읽고 그(그들이 남긴) 학문을 익히는 자들은 혹 봄‧가을의 밝은 날 泉石 사이를 거닐며 (그들이 말한) 정(精)과

                신(神)을 발산하여 펴기도 하고 바람 쐬며 성(性)과 정(情)을 읊조리기도 한다.이곳 물가에 이르러 갓끈을 씻고 높은 산을

                바라보면 감회가 일어나고 언뜻 바위 벼랑을 보면 휘황하여 황홀하기가 안석(案席=几궤)을 잡고 배행하는 것 같다.7)

                자가 깨끗이 근심을 씻고 스스로 깨우치면 거의 염완입라 (廉頑立懦 완악한 자는 청렴해지고 나약한 자는 뜻을 세우게 되

                는 것)8)에 가까워질 것인즉, 선생의 가르침은 참으로 끝이 없으니 어찌 무익하다고 하며 그만둘 수 있겠는가?”

                마침내 서로 손을 잡고 골짜기로 들어가 ‘남명선생장구지소(南冥先生杖屢之所)’ 여덟 자를 진로폭(振鷺瀑) 위에 새기고

                돌아왔다. 진로9)란 남려 허유(1833-1904)가 창려의 말에서 취하여 이름붙인 것이다. 벼랑에 서서 글씨를 휘날려 쓴

                이는 하君 헌진10)이고, 때는 계사년(1893) 단오였다.


                막 골짜기를 벗어나자 비가 용추로부터 위에서 내려와 한번에 산과 벼랑의 묵은 먼지를 씻어내어 더욱 깨끗해지니 우뚝

                한 산의 참모습이 뚜렷이 드러났다. 기이한 일이었다.   <끝>

 


              【柱】(간단한 주석은 본문의 괄호 속에 작은 청색 글씨로 넣었고, 긴 것은 각주로 달았다.)

  

                1) 한(漢)나라 고조 유방은 천하를 통일한 뒤 공신(功臣)들에게 식읍을 내리고 제후로 봉했다, 특히 자신의 책사인 장량

                    (張良 ,장자방(張子房, ?~ BC 186)에게는  "군막에서 작전을 짜내어 천 리 밖에서 승리를 거두게 했다"며 제나라 땅

                    삼만호를 식읍으로 주었다. 그러나 장량은  "폐하께서 신이 낸 계획을 실행하셔서 다행히 들어맞은 것일 뿐" 이라며

                    이를 사양했다. 그러면서 유방과 처음 만난 조그만 유 땅을 달라고 청했다. 유방에게 천하에 대한 욕심이 없음을 보여

                    준 것으로, 장량은 나중에 다 버리고 적송자(赤松子)를 따라 신선술을 배워 일생을 깨끗이 보전하였으나, 사양할 줄

                    몰랐던 한신 팽월 등 넓은 식읍을 받은 다른 공신들은  고조의 의심을 사  천하를 평정하지도 못하고 결국 토사구팽을

                    당하고 말았다. 이에 천하 영웅들이 장량에게 부끄러움을 느낄 것이라는 얘기다.

                    남명 스스로 벼슬을 탐하지 않고 출처(出處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의 지조를 지킨 것,(한신 퍙월의 치욕을 당하기 보 

                    다는 안분지족(安分知足)하는 장량의 처신이 훨씬 떳떳하다.),에 대한 감회가 있어서인가?


               2) 출전은《논어》『미자(微子)편』이다. “지나간 것은 간할(*고칠) 수 없고, 오는 것은 오히려 쫓을 수 있다.”

                   [往者不可諫 來者猶可追(왕자불가간 래자유가추)] 공자의 말이 아니고 미치광이 접여가 한 말로 되어 있다.

 

               3) 남명은 『유두류록』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중간에 큰 돌이 하나 있었는데 이언경․홍연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고, 오암에도 시은형제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아마도 썩지 않는 돌에 새겨서 억만년토록 전하려 한 것이리라. 대장부의 이름은 마치 푸른 하늘의 밝은 해와 같아서

                   사관이 책에 기록해두고 넓은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의 입에 새겨져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구차하게 원숭이와 이리가 사는

                   우거진 수풀 속의 돌에 새겨 영원히 썩지 않기를 바란다. 이는 날아가는 새의 그림자만도 못한 것으로, 후세 사람들이 그

                   새가 과연 무슨 새인 줄 어떻게 알겠는가?」

                   본문에서 ‘어렵게 여겼다’는 말은 선생의 말은 바꾸기 어려울 정도로 무겁게 여겼다는 말이다.

   

               4) 쇄소(灑掃, 洒掃 *물 뿌리고 빗자루로 쓰는 것)에 대하여~

                 o 고대 小學(학교)에서는 쇄소‧응대‧진퇴의 예절과 어버이를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하며 스승을 높이고 벗을 사귀는 도리

                     부터 가르쳤으며, 이 모든 것은 大學에서 배우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근본이 되었다고 한다.

 

                 o《논어》 『자장편』

                   「자유가 말하였다. “자하의 제자들은 물 뿌리고 비로 쓸고, 손님을 접대하고, 나아감과 물러섬에 있어서는 괜찮으나,

                     이는 지엽적인 일이요, 근본적인 것은 없으니, 어찌하나?” (子游曰 子夏之門人小子 當洒掃̖ 應對̖ 進退 則可矣 抑末也

                     本之則無 如之何)

                     자하가 듣고 말하였다. “아! 언유의 말이 지나치구나. 君子의 道에 어느 것을 먼저라 하여 전해주고, 어느 것을 뒤라

                     하여 게을리 하겠는가? 草木에 비유하자면 종류에 따라 나누어지는 것과 같다. 君子의 道를 어찌 이처럼 속이겠는가?

                     처음부터 끝까지 구비한 사람은 오직 성인이다.” (子夏聞之曰 噫 言游過矣 君子之道 孰先傳焉 孰後倦焉 譬諸草木

                     區以別矣 君子之道 焉可誣也 有始有卒者 其惟聖人乎)

 

                 o남명은 당시의 형이상학적인 공리공론을 못마땅하게 여겨 퇴계에게 편지를 보냈다.

                   “요즘 공부하는 자들을 보건대 손으로 물 뿌리고 빗자루질 하는 절도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天理)를 말하며, 이름을

                    도둑질하고 세상을 속이려 합니다. … 이는 선생 같은 어른이 꾸짖어 그만두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 십분 억제하고

                    타이르심이 어떻겠습니까?”

                    그에 대한 퇴계의 답변은 이러했다.

                    “배우는 사람들이 명성이나 도둑질하고 세상을 속이는 것에 대한 근심은 그대 혼자만의 근심이 아닙니다. … 본래부터

                    그런 것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만약 세상에서 우려하는 바를 범했다는 이유로 꾸짖어 그만두게 한다면 이는 천하 사람

                    들이 道를 지향하는 길을 끊어버리는 일이 될 것입니다.”

 

                5) 직내방외(直內方外) : 《주역》곤괘(坤卦) 문언(文言)전에 나온다. “군자는 경으로 내면을 곧게 하고, 의로써 외면을

                     바르게 한다.[君子 直內 方外]” 즉 경(敬)과 의(義)를 뜻한다.

                     과거 유학은 2가지, 즉 군자의 기본 과업으로 수기(修己 *스스로를 닦는 것. 인격완성)와 치인(治人 *세상을 다스

                     리는 것)을 들었다. 修己는 大學의 八조목 중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까지로 위기

                     지학(爲己之學)이라 하였고, 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는 治人으로 爲人之學이라 하였다. 고대 유학의

                     궁극적 목적은 治人이었으나, 성리학 이후로는 修己에 더 치중하게 된다.

                     남명 사상의 요체는 「敬‧義」두 가지로 집약된다. 선생은 “안으로 마음을 밝히는 것은 敬이요, 밖으로 행동을 결단

                     하는 것은 義다.[內明者敬 外斷者義]”라고 하였다. 敬이 수양론[修己]이라면 義는 실천론[治人]에 가깝다. 심성론인

                     敬을 일을 도모하고 세상을 다스리는 영역인 義까지 확장한 것은 남명 사상의 독특함이었다. 조선조 성리학에서는

                     소홀히 한 부분이었다. 그래서 그의 문하에서 그렇게 많은 의병장이 배출된 이유일 것이다. 그는 그 두 가지를 상징

                     하는 방울(惺惺子)과 검(劍)을 차고 다녔다. 방울은 그의 제자 김우옹에게, 검은 정인홍에게 물려 주었다.

 

               6) 논어(옹야편)에 「어질도다! 안회여! 한 그릇의 밥과 한 바가지의 물로 누추한 마을[陋巷]에 살면서…(하략)」하였다.

                   그래서 누항지천(陋巷之泉)은 ‘안회가 마셨던 샘물’이라 의역하였다.

                   정백자(程伯子)는 송나라 성리학자 정호(程顥 1032-1085)를 말하며 동생 정이(程頤 1033-1107)와 더불어 程子로

                   일컬어진다. 염계(濂溪)는 주돈이(周敦頤 1017-1073)로 성리학의 출발점으로 치며, 周子라 한다. 朱夫子는 朱子(朱熹

                   1130-1200)이다. 그들과 관계있는 명(銘) 다리(橋) 표지(識)가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이 남긴 학문을 닦으면 그들을 느끼고 만날 수 있다. 하물며 가까이 있는 남명선생의 흔적을 어찌 그냥

                   두랴? … 정도로 이해된다.

 

               7) 큰산은 남명선생 같고 바위벼랑은 선생의 제자나 내 스스로가 선생의 안석을 받들고 선생을 모시며 뒤따르는 모습

                   같다고 상상하니 황홀하다‥는 정도로 해석하면 될 것 같다. 물론 내 생각..

   

               8) 염완입라(廉頑而立懦)는 “백이(伯夷)의 풍모를 들은 자는, 완악한 사내는 청렴해지고 나약한 사내는 뜻을 세우게

                   된다.[聞伯夷之風者 夫有志]”고 한 말을 축약한 것이다. 출전은 《맹자》 『만장下』편이다.

   

               9) 창려(昌黎)는 당나라의 문장가 한유(韓愈 768-824)를 가리킨다. 그가 쓴 『연희정기(燕喜亭記)』에 “그 석곡

                   (石谷)을 겸수곡(謙受谷)이라 하고, 그 폭포를 진로폭(振鷺瀑)이라 하였다.”는 구절이 나온다. 그런데 본래 진로

                   (振鷺)는 《시경(詩經)》『주송(周頌)』의 시에서 유래하였다.

                   振鷺于飛(진로우비)  백로떼 날아서

                   于彼西雝(우피서옹)  저 서쪽 옹택으로 간다 <후략>

                   폭포의 모습이 백로 떼가 날아내리는 모습 같다고 진로폭(振鷺瀑)이라 이름지었다.

   

              10) 하헌진(河憲鎭 1859-1926) : 자 맹여(孟汝), 호 극재(克齋), 본관은 진양, 진주 수곡면 출생. 백운동 유계(儒契)의

                   계원이었던 하재문(河載文 1830-1894)이 그의 부친이었다[유백운동기 참조].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두문불출하며

                   일제에 항거하였다.

     

               □ 김진호(金鎭祜 1845-1908) 자 치수(致受), 호 물천(勿川), 본관 상산(商山), 거주지 산청 법물, 저서《물천선생문집

                   (勿川先生文集)》








                 남명선생장구지소 상부쪽,

            보이는 계곡으로 오르기가 조금 어렵다면

            남명선생장구지소 각자가 있는 바위나 아님 좌측 도로변으로 올라선 후 다시 계곡으로 내려서면 된다,

            남명선생 장구지소 주변에서 20분여 머물다(중식시간 포함) 간다,








                비슷한 경관은 계속된다,

                이곳 또한 계곡을 따라 오르는데 큰 지장은 없다,








































                 백운폭포?

                 白雲은 구름같이 하얀 바위자락을 보고 붙인 이름이다,








                약간 각도를 달리하여 한번 더,
























                   물에 가라앉은 낙엽이 공룡을 닯았다,

                   며칠 후 이곳을 찾았을 때는 다른 모습이었다,




































































                 직탕폭포 ?








                 가까이서 본 직탕폭포,


























































































































































                 지리산 둘레길을 만난다,








               남명선생장구지소에서 50분여 소요되었다,
































                 지리산 둘레길과 만나는 곳에서 계곡을 따라 7~8분,



                 아래 백운마을에서 백운계곡을 우측에 두고 오르던 탐방로는,

                 지리산 둘레길 조금 상부에서 계곡을 건너게 된다,

                 과거 시멘트 임도가 있었지만 지금은 파손되어 그 잔재만 남아있다,

                 아래 백운계곡 초입이라 할 수 있는 영산산장에서 이곳 까지는 계곡치기로 오르는데 별 무리가 없다,

                 백운 계곡을 제대로 보고자 한다면 계곡을 따라 이곳까지 오른 후, 더 이상 상부로는 등산로를 따라 오르면 되고,

                 나중 이곳에서부터  탐방로를 따라 내려가면 된다,

   







                  이곳 계곡을 건너는 길 상부에도 아담한 소를 이루고 있다,








                  이후부터 계곡을 좌측에 두고 등산로를 따라 오른다,

                  등산로는 선명한 편이나 흙은 모두 씻겨내려가 자갈만 앙상하게 남았다,


               






                         중간, 계곡으로 암반을 이루고 있는 곳이 있어

                         등산로를 이탈하여 계곡으로 살짝 내려서 본다,
















                    되돌아 나와 등산로를 따라 오르니 또다시 계곡을 건너게 된다,

                    주변 역시 넓은 암반으로 이루어져 있다,








                  보이는 암반위로 과거 시멘트 임도가 있었으나,

                  지금은 양쪽에 그 흔적만 남아있다,









                      그리고 이곳 암반 상류쪽에 쌍폭이 있다,








               쌍폭 아랫쪽,








               이후부턴 다시 계곡을 우측에 두고 계속 오르게 된다,








                 간간이 보이는 우측 계곡,








              뼈대만 앙상히 남은 등산로는 중간 갈수록 심해진다, 








              중간 100여m 정도는 아예 계곡으로 변한 길도 있다.








               등산로는 계곡과 가까이 또는 제법의 거리를 두기도 한다,








                 상부로 오를 수록 길의 상태는 좋아진다.


























                 제법의 소나무가 숲을 이루는 곳에서 우측 계곡으로 내려서 본다,

                 등산로에서 거리는 약 20m 정도,








                 쌍폭 상부쪽에서 가장 쉬어가기 좋은 곳으로 기억될것 같다,








                 계곡가에 이 소나무가 있는 곳이다,









                 되돌아 나와 등로를 따른다,








              이곳은 등로에서 10m쯤,








                 이곳 또한 쉬어가기 좋다,

                 등산로에서 계곡쪽으로 사람다닌 흔적이 있는 곳은 나름 경관좋은 곳으로 보면 된다,








               역시 되돌아 나와 등산로로,
















                 지리산 둘레길 갈림길에서 약 1시간 10분, 아래 쌍폭에서 약 50분 소요되어 임도를 만난다,

                 운리 마을에서 올라오는 임도이다,

                 이 임도는 초반 지리산 둘레길 8코스로 이용되기도 하자만 한동안 오르다 백운산 주능선에서 지리산둘레길과

                 분리되어 이곳으로 오르게 된다.








                운리쪽으로 내려가는 방향,

                도로상 그늘진 곳이 백운계곡을 건너는 다리이다,

                이곳 도로에서 백운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은 다리를(계곡을) 건너기 전 우측으로 있다고 기억하면 되겠다,







                 임도와 백운계곡 갈림길,

                 많은 리본이 달려있어 충분히 알 수 있는 곳이지만 이정표가 없어 초행이라면 여가가 어디쯤인지 궁금해 할 수도 있겠다.








               11시 40분경 백운계곡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지금 시간이 2시 40분을 지나고 있다,

               약 3시간 소요된 셈이다,

               이곳에서 되돌아 내려 갈까 하다가

               시간적 여유도 있고하여 임도에서 웅석봉으로 오르는,(웅석봉 딸뜨기 능선에서 이곳 임도로 내려서는 곳) 확인도 할 겸

               임도를 따라 오른다,








               임도 역시 계곡을 우측에 두고 한동안 오르게 된다,









             임도를 따라 한동안 오르다 12~3분 오르면 계곡을 건너 살짝 오르막을 보이는 곳에 제법 많은 리본이 달려있다,

             그리고 우측으로 길의 흔적이 약간 있다,








                임도의 흔적은 입구에서 끝나고 수풀이 무성하다,



                지형상으로 볼때 이곳이 고려토 채취장쪽 능선으로(안내도상 운리 갈림길 아랫쪽 주의지점으로 표시된 곳) 이어질

                것 같은데 들머리가 많이 묵어있고, 그 흔한 리본하나 달려있지 않다,

                (과거 오래전에 이곳?으로 내려온 것 같은데 세월이 흘러 정확히 모르겠다만 고령토 채취장쪽  길일 것이라 추측된다.)








                  임도를 따른다,

                  임도가 선명하여 RV차량이면 충분히 다닐수 있겠다,








                임도를 만나 13~4분, 위 고령토채취장 갈림길로 추측되는 곳에서 1~2분 거리에 있는

                백운계곡의 발원지인 계곡을 건넌다,

                이 계곡 좌측으로 자세히 보면 등산로가 있다,








                등산로 확인차 들어가 본다,








                   주변 숲속에 제법의 공터가 있고, 개울은 발담그기 좋을 정도의 웅덩이다,

                   좌우 두 계곡이 합수되는 건너편으로 능선으로 희미하게 등산로가 있다,

                   (등산안내 리본도 한두개씩 달려있다)








                임도를 따른다,

                전나무? 조림지를 만난다,

                초반 만나는 도로 아랫쪽 숲은 잡풀이 없어 쉬는 곳으로도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임도를 따르다 보니 또다른 지계곡을 건넌다,








              옆에서 보면 하트 모양의 바위가 있는 곳이다,
















                산의 어깨쯤을 감아 돌아가는 이 임도는 대체로 평탄하여 걷기 수월하다,








                임도를 따라 걷기를 약 40분,

                임도는 마근담 봉(926봉)에서 남쪽 용무림산(793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돌아 마근담으로 돌아간다,

                이곳에서 주변 지형을 둘러본다,








                    이곳 임도에서 마근담봉으로 오르는 들머리,

                    마근담봉을 지나 너머 홍계계곡으로 이어갈 수도 있고, 달뜨기 능선을 거쳐 웅석봉으로 이어갈 수도 있다,

                    마근담 봉에서 아래로 내려선다면 감투봉, 이방산으로 이어갈 수도 있겠다,








                   임도 아랫쪽,

                   용무림산을 지나 벌목봉,수양산, 시무산으로 내려갈 수 있다,

                   지리산 태극종주 하는 분들이 종종 이용하는 길이기도 하다,

                   길의 상태는 마근담봉쪽 보다는 희미해 보인다,







                  이곳에서 되돌아 간다,








                  백운계곡 발원 계곡을 다시 지나,








                  이곳에서 마근담봉과 용무림봉 사이의 임도고개까지

                  가는데 약 40분, 되돌아 오는데 약 40분, 합해서 1시간 20분 정도 소요되었다,

                  임도에서 백운계곡으로 내려서는 등산로로 접어 든다,








              쌍폭을 지나,

















                  계곡을 건너,



               





               상부 임도와 등산로 갈림길에서 약 1시간,

               지리산둘레길을 만난다,


















                   운리, 마근담은 지리산 둘레길,

                   민박, 식당, 주차장 2.1 km 방향이 백운계곡을 따라 내려가는 길이다,








                계곡치기로 올라왔기에 탐방로를 따라 내려간다,









                사진으로 보기보다는 자갈이 많아 썩 걷기좋은 길은 아니다,



















































































                    지리산 둘레길에서 약 40분,(2.1km)

                    영산산장 윗쪽,

                    주차장으로 가는 지름길인가 싶어 이길로 들어섰는데,








                 제법 언덕을 넘어 주차장으로 간다,

                 비 추천이다,

                 당초 온 길을 따라 주차장으로 가길 권한다,








               지금 시간이 5시 50분,

               11시 40분에 이곳을 출발하였으니 6시간 10분이 소요된 셈이다,

               백운계곡만 다녀가도 좋을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