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의 일상들

우리지역 둘러보기 8 / 산청 배산서원. 도천서원, 서계서원, 산청향교, 함양 남계서원

정헌의 티스토리 2019. 9. 14. 22:04

           ■ 우리지역둘러보기 8 / 산청 서원탐방 배산서원. 도천서원, 서계서원, 산청향교, 함양 남계서원


                한국의 서원이 201974일 서원의 발상지인 중국에서도 하지 못한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되어 그 어느

                때보다 서원에 대한 관심이 높다. 조선시대에는 1541(중종36) 풍기군수 주세붕이 경북 영주에 세운 백운동서원을

                효시로 전국 곳곳에 서원이 건립되기 시작해 시간이 점차 지나며 서원 난립으로 폐해가 나타나며 숙종, 영조 시기에

                서원 철폐론을 등장했고, 결국 대원군에 의해 전국에 47(서원20, 사우27)만 남기고 모두 훼철되었다.

 

                유네스코가 문화유산으로 등재할 때 평가하는 요지는  ‘OUV (Outstanding Universal Value)’  , ‘뛰어난 보편적

                가치를 본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된 서원은 한국의 서원 중 제향, 강학, 유식의 공간적 기능과 향촌과 어우러

                진 자연경관 그리고 보존상태가 양호한 9곳이 선정되었다.  역시나 조선시대 정계를 장악했던 노론계의 영남좌도인

                대구경북 지역이 5곳이며, 그 외 경남, 전남, 전북, 충남이 각1곳 씩이다.

 

                     <참고> 유네스코 등재 서원

                소수서원(경북 영주, 1543, 회헌 안향), 옥산서원(경북 경주, 1573, 회재 이언적), 도산서원(경북 안동, 1574,

                      퇴계 이황), 병산서원(경북 안동, 1613, 서애 류성룡), 도동서원(대구 달성, 1605, 한헌당 김굉필), 남계서원(

                남 함양, 1552, 일두 정여창),  필암서원(전남 장성, 1590, 하서 김인후),  무성서원(전북 정읍, 1615, 고운 최

                치원), 돈암서원(충남 논산, 1634, 사계 김장생)


                무릇 선비는 출처를 분명히 해야 된다. 나아가서는 뜻을 펼쳐야 하고, 물러나서는 그 뜻을 지켜야하는 것이다. 조선

                시대 지리산 아래 산청은 당쟁과 사화에 지친 산림처사들의 좋은 은거지였다. 따라서 산청은 자연스레 선비의 고장

                이 되었으며 남명 조식선생을 모신 덕천서원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서원이 무려 20여 곳에 이른다.

 

                덕천서원은 워낙 유명해 자주 다녔던 곳이라 제외하고 오늘 우리는 그중에서 배산서원, 도천서원, 서계서원, 산청향

                교를 탐방하고 마무리는 함양의 남계서원에서 총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 이하 자료는 민영인 님이 작성하신 것이다,>




           ▷ 탐방코스 (2019. 8. 31.)

               배산서원 - 도천서원, - 서계서원,- 산청향교, - 함양 남계서원 - 일두고택,


           ▷ 탐방후에


               ▣ 배산서원




               배산서원으로 왔다,








                     복원유교지 본산,






 

 

            배산서원은 문익점선생이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가져와 처음 심었던 곳인 단성면 배양리에 있다.

                이 서원을 세운 진암 이병헌(1870-1940)의 독특한 이력 때문에 관심을 받는 곳이다.

            진암은 유교의 개혁을 주장하며 중국에 가서 청나라의 개혁안인 변법자강운동을 주도한 강유위의 제자가 되었으며,

                유교를 종교화하는 공교회를 만들어 중국공교회로부터 한국지부로 인정받았다그러나 이러한 활동은 한국의 정통

            유림으로부터 당연히 배척받게 되어 그동안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이 서원에서 눈여겨 본다면, 강당의 배산서당현판은 강유위의 친필이며, 김구, 이시영, 조완구, 박은식의 낙성 축문

            현판이다.

                또한 이 서원의 독특한 점은 사당이 두 개가 있다. 맨 위쪽 문묘에는 공자의 진영을 모셨고, 도동사에는 이원, 이광우

            위패와 퇴계, 남명의 위패를 함께 모시고 있다.








                  서원(書院)이란?

                  성리학적 이념을 토대로 강학(講學)과 존현봉사(尊賢奉祀)를 위해 설립한 사립교육기관이다.

                  이러한 서원이 처음으로 새워진 곳은 중국이며, 중국 최초의 서원은 당나라 말기 현종 때 건립한 여정서원(麗正書院,

                         낙양 자미성)이다. 그러나 서원이 본격적으로 교육기관의 역할을 한 것은 북송초기 중국 4대 서원인 백록(白鹿),
                  고
(石鼓), 응천(應天), 악록(嶽麓) 서원이 세워진 이후부터이며, 남송 시기 주희가 백록동서원을 중건하여 강학활동을

                  하면서 활발해져 명대에는 서원만 300여 곳으로 성행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서원이라는 단어는 신라말기에 등장하지만 그때는 교육기관이 아니라 관청이나, 관직을 가리키는

                 용어였으며, 고려시대에도 서원이라는 기관이 있었지만 지금의 도선관과 비슷한 기능을 했다. 교육기관으로서의

                 서원은 조선시대 들어와 1543년 풍기군수로 있던 주세붕이 성리학을 도입한 안향을 기리기 위해 그의 고향인 순

                 흥에 그를 제향하는 사당과 백운동서원을 건립한 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다.








             이1500년대 중반부터 서원이 건립되기 시작하여 선조대에 가속도가 붙어 고을마다 서원이 없는 곳이 없었다.

                 조선시대 서원의 정확한 통계는 알 수가 없으나 학자에 따라 900개에서 최대 1700개에 달한다. 이렇게 서원이 난립

             하다보니 자연히 문제도 많이 발생하여 서원의 폐해를 지적하는 상소가 나오기 시작했다. 따라서 서원의 건립 억제

             와 훼철이 발생한다. 숙종, 영조 시기에 훼철되기도 하였으나 다시 복원되기를 반복하다 대원군에 의해 전국에 47

             서원만 남기고 모두 훼철되었다. (서원 27, 사우 20)











산청의 주요 서원과 사우(祠宇)


 

서원명

배향인물

창건연도

사액연도

덕천서원

조식, 최영경

1576

1609

도천서원

문익점

1461

1554

대포서원

민안부

1693

 

배산서원

이원, 이황, 조식, 이광우

1771

 

서계서원

오건, 오간, 박문영, 오장

1606

1677

신계서원

박익, 박조, 박총

1839

1839

신안정사

주희, 송시열

1538

 

용산서당

홍성해, 홍대해, 홍기범

미상

 

우계당

미상

1562

 

두능사

이조, 이담 등

1708

 

서호사

오장, 박문영

1701

 

청곡서원

이천경

1642

1642

목계서원

이조, 이담

1778

 

문산서원

권달, 권문임

1843

 

펑천서원

배현경, 배신우 등

1694

 

완계서원

권도, 권극량

1787

1788

도정서원

정탁

미상

 


                                                                                            (출처 : 지리산권 서원과 사우)









              서원의 배치와 구조

              한국의 서원은 진입동선을 따라 천일합일의 경지를 터득할 수 있는 배치로 일반적으로 전당후묘’, ‘전저후고의 구조이다.

              바깥공간은 홍살문, 하마비. 외삼문, 누각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자연과 만나는 유식공간이다. 한 마디로 강학공간의 긴장을

              풀어주는 곳으로 학문하는 가운데 쉬고 노닌다는 뜻이다단순히 노는 것이 아니라 산수를 굽어보며 자연과 인간이 하나

              되는 천인합일이다.

 








                강학공간은 강당과 재사(,서재)로 구성된다. 강당에서는 위기지학(爲己之學), 즉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것을 배우며,

                      재사는 기숙사이다. 대부분의 서원들이 소학과 사서오경을 공통 필수과목으로 하고, 그 외 가례, 심경, 근사록 등의

                성리서적과 역사서 등을 교재로 활용했다. 강의는 매일 실시하는 석강과 보름 혹은 한 달마다 하는 월강이 있었으며,

                      구의(口義)라는 구술시험을 통해 평가를 받았다. 도서관과 출판의 기능을 하는 장서각, 장판각을 별도로 갖췄다.



                 내삼문을 들어가면 제향공간이다. 신위를 모시는 사당이 있으며, 신위는 주로 밤나무로 만든다. 밤나무는 밤이 싹이

                 트고 자라서 열매가 맺을 때까지 그 껍질이 뿌리에 붙어 있어 근본, 즉 조상을 잊지 않는 나무로 여기기 때문이다.

                 이 제향의식과 관련된 다양한 구조물들이 있다.

                 전사청 제향 때 제수를 마련하는 곳,

                 제기고 제기와 제례용구를 보관하는 곳

                 성생단 향사에 쓸 가축을 검사하는 곳, 주로 제향 공간 밖 강당의 한 쪽 외진 곳에 있다.

                 석등 관솔불을 피우던 곳으로 정료대, 요거석, 명대석 등으로 부른다.

                 관세위 향사 때 헌관들이 손을 씻는 대야를 올려놓는 곳, 주로 사당 동쪽 계단 동쪽에 세운다.

                 망례위 제향을 지내고 축문을 태우는 곳으로 는 태우는 곳을 의미한다. 망료위라고 하면 묻는 곳으로

                            는 묻는다는 뜻이다. 또한 도동서원과 같이 벽에 구멍을 뚫어 만든 곳도 있는데 이곳은 예감이라 한다.

                                       주로 사당 서쪽에 위치한다.

                 고직사 서원 외곽에 있는 집으로 서원을 지키고 관리하는 사람이 거처하는 곳이다




  

 



               배산서원과 진암 이병헌

               단성IC를 나와 지리산 중산리로 이어진 20번 국도로 올라서지 말고 그 전 사거리에서 바로 우회전하면 문익점 면화

               시배지 100미터 못 미쳐 우측 길가에 작은 표지판이 서있다.

               배양(培養)동은 고려 공민왕(1363) 때 사위인 좌정언(左正言 6) 문익점선생이 서장관으로 원나라에 갔다가 돌

               아올 때 붓 대롱 속에 감춰온 목면씨를 퇴헌 정천익선생이 마을 옛집에 심어 배양에 성공하여 '배양동'이 되었다.

               홍살문 안에는 정천익선생의 부친인 형제투금 설화의 주인공으로 기록되어 있는 고려 의조상서 양천(梁川) 정유(鄭愈)

                     선생과 퇴헌 정천익선생의 설단과 신도비가 모셔져 있다.

 








                    작은 산등성이 아래 대나무와 소나무 숲이 드문드문 보이는 배양마을 우측에 배산서원(培山書院)이 보인다.

                           산청군 단성면 배양길 16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1호인 이 서원은 1771(영조 47)에 세워진 덕연사(德淵祠)가 유래로 청향당(清香堂)

                           이원(李源)과 죽각(竹閣) 이광우(李光友)의 위패를 모셨다.

                    그 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덕연사가 헐렸다가 1919년에 진암(眞奄) 이병헌(李柄憲)이 발의하여 문묘(文廟)

                    강당인 도동사(道東祠)를 짓고 배산서원이라 하였다.

                    홍살문을 지나 대문인 숭인문(崇仁門)을 들어서면 정면에 강당, 좌우에 동재와 서재, 뒤편에 문묘로 이루어진 일

                    반적인 서원구조와 다름없다.





  

 

                 이 배산서원은 두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

                 첫째는 문묘에는 공자의 진영(眞影)을 모셨고, 도동사에는 이원, 이광우의 위패와 이원과 교분이 두터웠던 이황,

                       조식의 위패를 함께 모셔 한 서원에 두 개의 사당이 있다는 것이 일반 서원과 다르다.

                 둘째는 최초의 민립(民立)문묘이며, 공자의 고장 중국 취푸(曲阜)의 공교회(孔教會)로부터 승인을 받은 한국공교회 지부이다.

 








               강당(講堂)의 현판 글씨는 중국의 변법자강운동가이자, 공양학자인 강유위(康有为)의 자필이다.

               강당에 붙어있는 김구, 이시영, 조완구, 박은식의 낙성 축문 현판도 눈여겨 볼만하다.

               남해(南海) 강유위(康有为)선생의 손자인 중국문화대학 강보연(康保延)교수가 이곳을 방문하여 이 글을 남겼다.(돌비석 글씨)

 







                   결코 사족(蛇足)일 수 없는 궁금함이 뭉게뭉게 솟아오른다.


                         강유위선생과 변법자강운동은?

                         1898611일 청나라 제11대 황제 광서제는 변법자강 개혁안을 채택하여 강유위(1858 - 1927)에게 총리아문의

                   장경상행도라는 작위를 내려 '법을 바꾸어 부국강병을 꾀한다'는 변법자강운동을 시행한다.

                         그러나 서태후와 원세개에 의해 이 개혁운동은 백일 만에 막을 내리고, 강유위는 홍콩을 거쳐 15년간 중국을 떠나게

                   되었다.

                         신해혁명 후 귀국하게 된 강유위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수구세력으로 변한 변절자의 언행을 보여 구설에 올랐다.

 









                   공양학과 진암 이병헌의 공교운동은?



                   공양학은 경전해석이 경직되어 있던 고증학이나 주자학 대신 경전의 숨은 뜻을 비교적 자유롭게 해석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병헌(1870 - 1940)선생은 조선말기의 개혁적 유학자다. 본래 면우(勉宇) 곽종석(郭鍾錫)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가, 유학의 개혁을 통한 구국에 뜻을 두고 중국 강유위의 제자가 되어 금문경학(今文經學)을 공부하고 공자교(

                   子教)운동을 전개했다.

                   공교운동은 유교를 복원할 수 있는 방안으로 유교를 종교화하는 것으로유교가 개혁을 통해서만 민족을 이끌

                   수 있고 전통문화를 지켜나갈 수 있다고 봤는데, 안타깝지만 그의 공교운동은 이 배산서당에 문묘를 지어 공자

                   를 향사(享祀) 하는데 그치고 말았다.

                   보수유림들의 반발에 부딪쳐 그의 개혁사상은 비록 좌절되었지만 그는 한국유교사상에서 가장 독특한 사상가

                   요 종교이론가로 평가받는다.

 

 

                                                            <참고자료>

                                             인물세계사, 황규진

                                             진암 이병헌의 생애와 학문, 허권수


































































                ▣ 도천서원


 


                    배양리에서 다시 원지로 나와 3번 국도를 타고 산청방향으로 조금만 달리면 우측으로 옛날 국도변에 삼우당

                    문익점 선생을 모신 도천서원이 있다. 삼우당은 조금 전에 다녀온 배양리에서 생장(生長) 하였으며, 원나라에

                    서 가져온 목화씨도 그곳에 처음 심었다.

                           도천서원이 있는 이 지역은 선생이 조정에서 물러나 낙향하여 강학하던 곳이다. 우리나라에 본격적인 서원이

                    건립되기 이전인 세조대인 1461년에 사당이 건립되고, 도천사(道川祠)라 편액 되었다가 정조11(1787)

                    도천서원으로 사액받았다.


















                  정문이 닫혀 있다.

                  좌측 뒷편으로 가면 샛문이 있다.










                도천서원(道川書院)


                고려의 문신 충선공(忠宣公) 삼우당(三憂堂) 문익점(文益漸) 선생을 향사하는 서원이다. 삼우당은 옛 단성현

                배양에서 생장(生長)하셨다. 문익점 선생이 강학하던 도천의 상류에 건물을 지어 三憂堂이라 편액하였으나

                세대가 아득히 멀어 오래전에 폐허되었다. 세조 辛巳年(1461)에 사림이 요청으로 그 터에 사당을 건립하라

                명하고 건물이 완공되자 도천사(道川祠)  편액 되었다.

                그 후 壬子年에 수해를 입어 훼손되자 1리 정도 위쪽으로 移建하였다가, 선조 임진년에 방화로 소실되었다.

                광해군 4(1612) 다시 중건하였다 다시 현종 13(1672)에 현손 광서의 거주지로 이건하면서, 선비들의

                청원으로 동계 권도를 배향하였고, 향당 이원도  봉안되었다.

 

                숙종 33(1707) 유생 박항태, 이동직 등이 사액을 청원하였으나 당시는 금압시기라 내려지지 않다가, 정조

                11(1787)에 도천사가 도천서원으로 사액되었다는 장소로 삼았다. 그 후 서원은 복구되지 못한 채 유림들이

                장소를 옮겨 고종 28(1891) 신안면 신안리 갈로산 밑 지금의 위치에 노산정사(蘆山精舍)를 지어 차례를 지

                내왔다. 1952년에 후손들이 중건하여, 1980년 도천서원으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 서계서원





              삼우당 문익점 선생의 애민(愛民) 정신을 가슴에 품고 다시 3번 국도를 따라 산청읍으로 들어섰다.

                   산청읍 외곽 국도변 우측에 있는 서계서원이다.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남명선생의 수()제자인 덕계오건선생을 배향한 곳이다. 남명과 덕계, 스승과 제자 사이인

              그들의 이야기는 산청읍에서 밤머리재를 넘어 덕산까지 줄줄이 이어져 있다.

                   서계서원의 외삼문은 입덕루(入德樓)’이다. ‘입덕은 성인의 덕으로 들어간다는 <중용>에 나오는 글귀로 덕계선생이

              중용을 무려 1000번이나 읽었다는데서 그 뜻을 짐작할 수 있겠으나, 또한 부속 건물로 덕천재가 있는 것으로 보아

              덕산에 거처하셨던 스승 남명을 그리워하는 의미도 담겨져 있지 않을까 싶다.













































































































                 ▣ 산청향교






















               서원이 사교육기관이라면 향교는 지방의 공교육을 담당하여 서울의 성균관을 중심으로 조선조 330여 개 군현에


               모두 설치했다. 앞서 살펴본 서원은 배향인물과 지형에 따라 각각의 특징을 보이고 있으나 향교는 하마비, 홍살문,

                    외삼문, 강당인 명륜당 그리고 문묘공간인 대성전이 거의 동일하다.

               배향한 성현도 공자, 안자, 증자, 자사, 맹자의 5선과 송조6, 동국18현으로 같다. 다만 송조 6현 중 주자, 정자

               2현만 모시거나, 주돈이와 정이를 넣어 4, 또는 소옹. 장재까지 포함하여 6현 모두를 배향하는 차이는 있다.

               산청향교 외삼문 2층 누각의 현판은 욕기루(浴沂樓 )’이다. 일반적으로 외삼문은 유식(遊息) 공간으로 공부하다

               머리를 식히는 곳이다. 서원과 달리 향교에서 공부하는 선비들의 최종 목표는 과거시험이다. 시험공부는 예나 지

               금이나 스트레스가 쌓일 수밖에 없다. 그런의미에서 오후에 들릴 함양 남계서원 외삼문의 풍영루(諷詠樓)와 짝을

               이뤄 기막힌 휴식공간의 의미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각자의 포부를 물었는데, 모두들 정치에 관심을 두었으나 증점(曾點)만은 봄에 여러 친구들과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 언덕에서 바람 쏘이고 시를 지어 노래하며 돌아오겠다라 하였다.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 욕호기 풍호무우 영이귀) 이에 공자는 감탄하며 나도 그대와 함께하고 싶다라고 답한,

                    논어(論語) 선진(先進)편의 이 구절에서 따왔다.

 

               서원과 향교는 그냥 둘러보면 오래 전 페교된 학교에 불과하다. 그러니 곳곳에 걸려 있는 현판과 각종 구조물들을

               확인해보는 것도 이 답사의 쏠쏠한 재미가 있다.

               내삼문을 들어가면 제향공간이다. 신위를 모시는 사당이 있으며, 신위는 주로 밤나무로 만든다. 밤나무는 밤이 싹

               이 트고 자라서 열매가 맺을 때까지 그 껍질이 뿌리에 붙어 있어 근본, 즉 조상을 잊지 않는 나무로 여기기 때문이다.

               이 제향의식과 관련된 다양한 구조물들이 있다.

               전사청은 제향 때 제수를 마련하는 곳, 제기고는 제기와 제례용구를 보관하는 곳, 성생단은 향사에 쓸 가축을 검사

               하는 곳으로 주로 제향 공간 밖 강당의 한 쪽 외진 곳에 있다.

               석등은 관솔불을 피우던 곳으로 정료대, 요거석, 명대석 등으로도 불린다. 관세위는 향사 때 헌관들이 손을 씻는 대

               야를 올려놓는 곳으로 주로 사당 동쪽 계단 동쪽에 세워져 있다.

               망례위는 제향을 지내고 축문을 태우는 곳으로 는 태우는 곳을 의미고, 망료위라 하면 묻는 곳으로 는 묻는

               다는 뜻이다. 또한 도동서원과 같이 벽에 구멍을 뚫어 만든 곳도 있는데 이곳은 예감이라 한다. 주로 사당 서쪽에

               위치한다.

               고직사는 서원 외곽에 있는 집으로 서원을 지키고 관리하는 사람이 거처하는 곳이다.

               이러한 것들을 모두 갖추고 있는 곳도 있고, 보존 상태에 따라 없는 곳도 있으므로 천천히 살펴보며 그 의미를 새겨

               보자



  




               산청향교(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24)



                     1440(세종 22)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임진왜란 때 일부 소실되었다가 복원하였던 것이 1597년 정유재란 때 완전 소실되어 1601년에 옮겨 세웠다.


                그러나 1636년 병자호란으로 다시 소실되어 1755(영조 31) 현재의 위치에 중건하였다. 1806년에 명륜당을

                중수하고 1870년 대성전, 1874년 명륜당을 각각 중수하였다. 그 뒤 여러 차례의 중수와 개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5칸의 대성전, 5칸의 동재(東齋), 7칸의 명륜당, 4칸의 욕기루(浴沂樓), 내삼문(內三門)

                이 있다.

                이 향교의 배치는 자연경사를 따라 홍살문, 욕기루, 명륜당, 내삼문, 대성전을 거의 일직선상에 놓아 향교의

                일반적 배치형식인 전학후묘를 따르고 있다.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겹처마 도리집으로 전면에는 모두 궁창판이 있는 삼분합의 세살문을

                달고, 그 위로는 교살창을 달았다. 명륜당 좌·우로는 동·서재가 있다.

                특이한 것은 내삼문의 계단이 직선이 아닌 자로 되어있고, 명륜당 뒤의 대성전도 약간 비틀어져 위치하고 있다.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겹처마의 익공계 양식 건물로 각 주간에는 화려한 화반을 놓았다.

                대성전에는 5(五聖), 송조2(宋朝二賢), 우리 나라 18(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유물로는 와준(窩樽) 1, 주배(酒杯) 3, 제구(祭具) 일체, 변두(籩豆) 일체, 유복(儒服), 예구(禮具) 등이 보관되어

                있다.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수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 함양 남계서원     




                 남계서원(사적 제499)



                 산청에서 3번 국도를 따라 북쪽으로 달리다 수동을 지나 3km 쯤 가면 우측에 남계서원이 자리 잡고 있다.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 586-1번지. 여기서 서북방향으로 2km 지점에 있는 지곡면 개평마을은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1450 ~ 1504) 선생의 고향이다. 남계서원은 일두 정여창 선생을 주향으로 1552년에 창건했다.


















                 정여창의 호는 일두(一蠹), ‘한마리의 좀벌레라는 데서 짐작할 수 있지만, 특히 선생이 무오사화에 연루된 말년

                 무렵 태어나 영남 좌우 사림의 거두가 된 남명 조식(1501-1572)과 퇴계 이황(1501-1570)의 글에서 자신을 낮

                 추고 겸손하게 살고자 한 선생의 고매한 인품과 높은 학식을 엿볼 수 있다.

                 남명은 우리나라 현인들 가운데 오직 이분만이 거의 흠이 없을 것이다”, 퇴계는 늦게 태어나 일두선생을 알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기며 그 저술과 행장을 갖고 계신다면 잠시 빌려 읽게 하여 무지하고 답답한 제 심정을 풀

                 수 있게 해주신다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라 했다.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함께 조선 5(五賢)에 속하는 도학자(道學者)인 정여창은 마음이 한 치도

                어긋남이 없어 안음현감으로 있을 때는 경상감사도 옥사는 정여창에게 물어보고 나서 판결했다고 한다.

                      그러나 무오사화(1498)에 연루되어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를 갔다가 끝내 그곳에서 돌아가셨다. 다시 연산군에

                의해 부관참시까지 당하지만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쫓겨나자 김굉필과 함께 복권되었다.









              남계서원은 조선 명종7(1552) 개암 강익이 주도하여 당시 군수인 윤확의 도움을 받아 유림들과 함께 창건하였고,

                   명종21(1566) 두 번째로 사액을 받았다. 선조30(1597)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던 것을 1603년에 복원, 1612년에

              중건했다. 숙종 때 강익과 정온을 추가 배향하고, 별사에는 유호인과 정홍서를 배향하였으나, 1868년 별사는 훼철

              되었다.

                   남계서원은 소수서원, 문헌서원(황해도 해주)에 이어 세 번째로 창건되어,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의 하나로 조선시대 인물을 최초로 배향한 곳이다. 연화산(443m)을 주산으로 하고 앞쪽으로 남계천이

              흐르는 배산임수 지형에 홍살문을 지나 입구가 되는 외삼문, 좌우에 유생들의 숙소인 동재와 서재, 가운데 강학공간인

              강당, 뒤쪽 조금 높은 위치에 선현을 배향한 사당 등을 일축선상에 배치한 전학후묘의 서원의 전형으로 여겨져 이후

              지어지는 서원의 모델이 되었다.









                 남계서원의 특징을 좀 더 자세히 알고자 이번 답사에는 평소 친분이 있는 함양군 문화관광해설사 한 분에게

                 설명을 요청했다.

                 일반적인 서원의 입지와는 다르게 남계서원의 첫인상은 개활지에 널찍하게 자리 잡아 툭 터인 느낌이다.

                       물론 뒤쪽 주산인 연화산(443m)이 나지막해 앞에서는 보일 듯 말듯하여 더 넓어 보이기도 하다. 길가에는 퇴계선생이

                 썼다는 표지석이 서있고, 홍살문 옆에는 하마비가 있지만, 지금은 주차장이 한 편에 따로 있으니 이곳까지 차를 가져올

                 수는 없다.


                  堂堂天嶺鄭公鄕( 당당천령정공향)      당당한 천령고을 정선생의 고장이라

                  百世風傳永慕芳 (백세풍전영모방)      백세 청풍 전하니 길이 사모하리라

                  廟院尊崇眞不忝( 묘원존숭진불첨)       묘원에서 존숭함은 참으로 마땅하니

                  豈無豪傑應文王( 기무호걸응문왕)      어찌 문왕에 호응하는 호걸이 없으리오.








                 외삼문은 석주위에 누각을 올린 2층 구조로 풍영루(風咏樓)이다.


                       창건 당시에는 단층의 준도문(遵道門)’이라는 출입문이었다. 준도란 중용中庸군자는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도 도를 쫓아 헹한다에서 어려움을 무릅쓰고 도를 실천해야 한다는 군자의 마음 자세를 의미한다.

                 이후 유생들이 쉬거나 토론과 정담을 나눌 수 있도록 누각을 올리고 이름도 풍영루라 했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각자의 포부를 물었는데, 모두들 정치에 관심을 두었으나 증점(曾點)만은 봄에 여러 친구들과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 언덕에서 바람 쏘이고 시를 지어 노래하며 돌아오겠다라 하였다.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 욕호기 풍호무우

                 영이귀) 이에 공자는 감탄하며 나도 그대와 함께하고 싶다라고 답한, 논어(論語) 선진(先進)편의 이 구절에서

                 풍영(風詠)을 따왔다고 한다. 기문은 정여창선생의 후손인 조선말기 문장가 오담 정환필이 지었다.

                 이러다보니 바깥에서 보면 풍영루, 안쪽에는 준도문 각기 다른 두 편액이 걸려있다



  

 




                 장영훈씨의 우리문화재 풍수답사기서원 편에서 이곳의 지형을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 즉 물위에 뜬 연꽃 형국이라

                 했듯이 남계서원의 뒷산 이름은 연화산이다. 남계(灆谿)에서 도 물 맑을 람이니 물과 관련이 있다. 그래서인지 서원

                 안으로 들어서면 좌우로 연지(蓮池)가 바로 눈에 들어온다.   

                 연꽃이라 하면 일반적으로 불교를 먼저 떠올리나 사실상 연꽃을 좋아한 유학자들도 상당하며 서원에 연못이 있었던 곳도

                 많다.

                 출처로 꼽는, 염계 주돈이는 연꽃을 사랑하여 지은 <애련설(愛蓮說)>에서 "予謂菊花之隱逸者也 牧丹花之富貴者也 蓮花之

                 君子者也  (여위국화지은일자야 목단화지부귀자야 연화지군자자야 : 나는 말하노니, 국화는 꽃 중의 은일자요, 모란은 꽃

                 중의 부귀자요연꽃은 꽃 중의 군자로다!"라고 하여 연꽃을 가장 사랑하였다고 했다.

                 일두선생도 매화와 연꽃을 좋아하여 동재 양정재(養正齋)와 서재 보인재(輔仁齋)에 붙어 있는 누마루의 이름을 애련헌

                 (愛蓮軒), 영매헌(咏梅軒)이라 했다. 동재, 서재는 각 방 1칸에 누마루가 붙어 있는데, 경사를 활용한 구조가 독특하다.

                 양정재(養正齋)주역周易교육함으로써 사람을 바르게 기르는 것은 성인의 공덕이다에서 따온 말로 사람은

                 교육을 통해 양성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보인재(輔仁齋)논어論語군자는 글로써 벗을 사귀고, 벗으로써 인을 돕는다에서 따온 말로 정여창과 김굉필이

                 벗으로써 서로 도운 사우(師友 : 스승으로 삼을 만한 벗) 관계를 함축하고 있다.
































            남계서원은 조선 명종7(1552) 개암 강익이 주도하여 당시 군수인 윤확의 도움을 받아 유림들과 함께 창건하였고,

                명종21(1566) 두 번째로 사액을 받았다. 선조30(1597)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던 것을 1603년에 복원, 1612년에

            중건했다. 숙종 때 강익과 정온을 추가 배향하고, 별사에는 유호인과 정홍서를 배향하였으나, 1868년 별사는 훼철

            되었다.

                 남계서원은 소수서원, 문헌서원(황해도 해주)에 이어 세 번째로 창건되어,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의 하나로 조선시대 인물을 최초로 배향한 곳이다. 연화산(443m)을 주산으로 하고 앞쪽으로

            남계천이 흐르는 배산임수 지형에 홍살문을 지나 입구가 되는 외삼문, 좌우에 유생들의 숙소인 동재와 서재, 가운데

            강학공간인 강당, 뒤쪽 조금 높은 위치에 선현을 배향한 사당 등을 일축선상에 배치한 전학후묘의 서원의 전형으로

            여겨져 이후 지어지는 서원의 모델이 되었다



 

 





              강학당을 왼쪽으로 돌면 그곳에는 성생단(省牲壇)이 있다.



                   성생단은 향사 전날 준비한 제물을 여기다 놓고 원내 제관들이 그 생김새와 흠집을 살펴 제물로써 합당한지를

              검수하는 곳이다.

              남계서원의 성생단은 위엄보다는 다소 겸손하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전사청,








                  제례후 지위를 태우는 곳,








               뒤로 돌아 사당에 오르니 앞쪽 들을 바라보라 하면서 이곳에서 보는 야경이 좋다고 말한다. 야경? 고정관념은

               참으로 무섭다.

              “밤에 뭐 볼게 있어요?” 설명하던 해설사분이 웃으며 선생님 자가 밤이 아닌 들 야()예요라고 한다.

               남계가 흐르는 넓은 들판 너머로 안산인 백암산과 가물가물 보이는 지리산 등......

               색 바랜 단청과 처마에 있는 학이 인상적이라 사진을 찍는데 또 질문한다. “혹시 사당에서 이상한 점 발견하지

               못했어요?” 어설픈 답사자는 글쎄요...”라 답하자, “이곳 사당에는 편액이 없습니다. 사당의 편액은 일반적으

               로 주향한 인물이 서원이 자리한 지역에 거처했거나 후학을 양성하는 등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경우에 다는 것

               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개인적 견해라는 사족을 달지만 수긍할 수 있는 논리라는 생각이 든다








 

 

               인근에는 탁영 김일손의 청계서원(靑溪書院), 일두고택과 일두 정여창 묘소(함양군 수동면 우면리 산 10-9)도 있다






             ▣ 일두고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