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의 일상들

산청 도동영당 석채례

정헌의 티스토리 2023. 3. 19. 23:41

■ 산청 도동영당 석채례

 

석채례(釋菜禮).

일반적으로 다음이나 네이버에서 검색해 보면 어디에서 석채례를 봉행했다는 내용은 있어도 석채례가 뭔지에 대한 설명은 찾기 어렵다.

한국예학용어대사전(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한국학 자료원)에서 어렵게 석채에 대한 자료를 찾았다. 아래의 자료는 위 사전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석채라 함은 고대에 처음으로 학교에 들어갈 때 선사(先師)에게 예물로 채소류를 바치던 일을 말한다.

釋菜는 석채(舍采)라고도 한다. 고대에 학교에 학생이 입학하였을 때에 평번(苹蘩/개구리밥 평,평산흰쑥 번)의 등속으로 선성(先聖) 선사(先師)에게 제전을 드리는 것을 석채(舍采)라고 하였다. 석(舍)과 석(釋)은 음과 뜻이 같다. 석은 놓다(舍) 또는 두다(置)의 뜻을 지닌 글자(집 '사' 자로 찾는 것이 빠르다.)로서 베풀다 또는 차려놓다라는 뜻이다. 주례(周禮) 대서(大胥)에  "봄에 학교에 들어갈 때에 석채를 행하고 음악에 맞추어 춤춘다(春入學, 舍采, 合舞)"라고 하였다. 석채는 음력 2월과 8월의 상정일, 그 달의 첫째 정일(丁日)에 올리는 대규모 제사로, 석전. 석전대제. 석채라고도 한다. 석채는 학생들이 입학하여 마름 따위를 제수로 사용하여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禮記 월령에 "중춘에 해당되는 달 상정일에 악정에게 명하여 춤을 익히고 석채한다(仲春之月上丁,命樂正習舞, 釋菜)"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한 정현(鄭玄)의 주(注) 에 "춤을 추고 반드시 선사에게 석채를 올려 예를 갖춘다(將舞, 必釋菜於先師以禮之)"라 하였다.

 

석전은 고대에 학교에서 주식(酒食)을 차려놓고 선성(先聖). 선사(先師)에게 제사를 지내는 일종의 전례(典禮)를 말한다. 공자를 비롯하여 동서배향(東西配享)의 선현들에게 올리는 제향으로 서울은 성균관 문묘에서, 각 지방은 향교 대성전에서 음력 2월과 8월의 첫 정일(上丁日)에 거행한다.

석(釋)은 놓다(舍), 두다(置) 뜻을 지닌 글자로서 베풀다, 차려놓다는 뜻이며, 전(奠)은 추(酋)와 대(大)의 합성자로서 酋는 숲병에 덮개를 덮어놓은 형상이며, 大는 물건을 얹어두는 받침대를 상징한다. 석전은 생폐(牲幣)와 합악(合樂)과 헌주(獻酒)가 있는 성대한 제전으로 석전제, 석채, 상정제, 정제(丁祭)라고도 한다, 석채는 오직 나물(菜)만 드릴 뿐 일체 음악을 연주하지 않는 조촐한 의식이란 뜻이고, 상정제, 정제는 봄2월(음), 가을8월(음)의 상정일(첫 丁日)에 모시기 때문에 이렇게  불린다. 본래 석전은 산천에 베풀기도 하고 혹 묘사에서 베풀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학교에서 올리기도 하였으나, 시대를 내려오면서 학교의 의식만을 뜻하는 것으로 굳어졌다. 산천.묘사에는 여러 제향이 있는 반면 학교서는 오직 석전만 있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先聖으로 모시는 대상은 周代에서는 舜, 禹. 湯, 文王이었는데 한나라 이후 유교를 국교로 받들게 되자 공자를 점차 先聖, 先師의 자리로 올려 문묘의 주향(主享)으로 모시는 동시에 석전으로 모시는 관례가 정착되었다. 위.수. 당나라 이후로는 대체로 공자를 선성, 안회를 선사로 받들어 석전을 올렸다. 명나라에 와서 태학의 문묘를 대성전이라 일컬어 석전을 올리는 사당으로 확립이 되었다.

 

우리나라에 유교가 전래한 기록은 없지만 최초로 태학을 설립한 것은 고구려 372년(소수림왕2)으로 석전도 봉행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백제는 태학 설립의 기록은 전하지 않으나 오경박사 등의 명칭이 삼국사기에 나오고 일본에 논어와 천자문을 전한 아직기. 왕인의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태학에서  석전의 의식을 봉행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신라에서는 684년(진덕여왕2) 김춘추가 당나라에 건너가 그곳의 국학을 찾아 석전 의식을 참관하고 돌아온 후 국학 설립을 추진하였고, 682년(신문왕2)에 그 제도가 확립되었다. 717년 (성덕왕 16)에는 당나라로 부터 공자와 십철(十哲, 공자의 제자 중 학덕이 뛰어난 10명) 및 72제자의 화상(畵像)을 가져 와서 국학에 안치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석전 의식이 국학에서 봉행되고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고려에서는 국학에 문묘(文廟)를 모셔 놓고 석전을 올렸고 왕이 직접 헌작하기도 했으며, 조선시대에 이러러서는 1398년(태조7) 숭교방에 성균관을 설치하여 국립 최고학부의 기능을 다하게 하였으며, 정전(正殿)인 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4성 10철과 송조 6현 등 21위(位)를 봉안하고  동무. 서무에 우리나라 명현 18위와 중국 유현(儒賢) 94위 등 모두 112위를 봉안하고서 매년 봄. 가을 두 차례 석전을 올렸다.

 

 

 

▷도동영당 석채례  (2023. 3. 10)

 

산청군 산안면 야정신기로 192번길 80-3

어렵게 도동영당을 찾았다.

약선사 입구로 기억하면 쉬울 것 같다.

 

 

 

 

 

도동강당으로 편액되어 있고 뒷편에 도동영당이 위치한다.

 

 

 

 

 

도동강당 편액

 

 

 

 

 

도동강당을 마주보았을때 서쪽에 자리한 경모재

한 쪽엔 누각의 형태를 하고 있다.

 

 

 

 

 

마을 윗쪽에 위치하며 주변 경관이 수려한 것은 아니지만 제법 운치있게 지었다.

 

 

 

 

 

경모재 편액을 달았다.

 

 

 

 

 

종약(宗約)

 

宗事誠實   

事親致?樂 

對內和睦

對外信義   

年上敬?   

年下寬容   

派閥根絶? 

言行一致

 

 

 

 

 

도동영당 경모?삼경?

 

 

 

 

 

도동영당은 고려시대의 역사가이며 문장가인 익재 이제현 선생을 모시고, 매년 2월 중 정일에 석채례를 봉행하고 있다.

直日 권점현님이 집사분정을 쓰시고 있다.

 

 

 

 

 

獻官 曺穩煥. 

執禮 文炳國, 

祝 權暹鉉,

掌儀 徐廷鉉. 崔在奎. 洪希澤, 

司尊 權由鉉,

贊者 李相祿,

左執事 權漆坤, 右執事 權成根,

贊唱 鄭寅植.

 

 

 

 

 

 

 

 

 

 

 

 

직일 권섬현님이 작성한 분정기를 문병국 집례가 창방을 한다.

 

 

 

 

 

도동강당 뒷편에 위치한 도동영당으로 오른다.

 

 

 

 

 

도동영당에서 석채례를 진행한다.

 

 

 

 

 

석채례를 마치고 기념 촬영.

 

 

 

 

 

 

 

 

 

 

 

 

당임 권영복, 이영유님의 임기가 끝나고 권유현, 권칠곤 님에게로 망기를 전달하고 일정을 마무리 한다.

 

참고로 망기는 

1. 벼슬아치를 천거하는 삼망(三望/ 합당한 세사람의 후보자를 뽑아 임금에게 천거하는 것)의 내용을 기록한 종이

2. 향교나 서원에서 행해지는 향례(享禮)를 집행할 해당 책임자에 천거되었음을 알리는 통지문을 말함

마을에 제의가 있으면 제관 및 집사를 선출하는데 , 예컨대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 축관, 집례 등에게 천거되었음을 알리고 각각을 책무를 알리는 통지문을 망기(望記) 혹은 망권(望券), 망지(望紙), 망첩(望帖) 이라고도 한다.

석채례에서 망기를 받지 못한 사람을 방외인(榜外人)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