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지역의 산

대구 청라언덕 외 대구 근대화 골목투어

정헌의 티스토리 2024. 1. 30. 20:31

■대구 청라언덕. 계산동 성당과 주변 근대골목(계산예가, 이상화고택, 서상돈고택,  김원일의 마당깊은 집,구 교남YMCA,제일교회역사관,약령시한의약박물관), 경상감영 주변(대구 근대역사관, 향촌문화관 대구문학관, 희움 일본군 위안부역사관

 

청라란 푸른 담쟁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언덕 위에 세워진 선교사들의 붉은 벽돌 사택을 푸른 담쟁이가 덮고 있는 곳이라 하여 청라언덕이라 불린다. 청라언덕은 대구의 기독교가 지역사회에 뿌리를 내려 정착하고, 지금의 동산의료원이 사회에 봉사하면서 성장한 중심지이다. 대구 근대화의 빛이 태동한 곳이며 지난 100여년간 지역의 역사와 함께 호흡해 온 유구한 시간의 흐름과 놀랄만한 변화의 과정이 녹아있다. 이러한 역사적 움직임을 지금에 다시 보고 느끼고 체험하려는 사람들이 이곳을 꾸준히 찾고 있다고 안내팜플릿에서 소개한다.

청라언덕을 시작으로 한나절 이곳저곳 대구 근대골목을 찿아본다. 몇 군데 메모해 간 곳은 찾지 못했다. 사전에 지도를 보고 미리 갈만한 곳을 체크하면 많은 도움이 될 듯 하다.

 

▷가는 길

 

 

 

 

 

▷탐방코스 (2024. 1. 27.)

청라언덕 -  계산동 성당 주변 근대골목(계산예가, 이상화고택, 서상돈고택,  김원일의 마당깊은 집,구 교남YMCA,제일교회역사관,약령시한의약박물관  등) - 경상감영 주변(대구 근대역사관, 수제화 거리, 향촌문화관, 대구문학관, 희움 일본군 위안부역사관 등)

 

 

▷탐방후에

 

  ▣청라언덕

 

 

청라언덕 동서를 가로지르는 길을 3.1만세운동길이라 이름 붙였다.

제일교회가 중심부에 우뚝하고 3곳의 선교사 주택,  은혜정원, 사과시배지 표지석 등이 있다.

 

 

 

 

 

 

이곳은 청라언덕 서쪽편 어느곳이다.

 

카카오 내비에 <청라언덕>을 입력하였더니  이 인근으로 안내하는 듯 하다가 청라언덕 주변을 한바퀴 돌아 다시 이 인근으로  돌아와 방금 지나온 길로  또다시 안내한다.

청라 언덕 내 주차장이 있는데 내비가 이곳으로 안내하지 않아 내비 수정하여 주차장을 검색할려니 또다사 청라언덕을 한바퀴 돌아야 할 것 같다. 그래서 뒷골목 이름없는 개인주차장에 주차를 했다.

주차료는 시간당 2,000원으로, 5시간 주차하고 10,000원을 지불했다.(청라언덕 주차장 시간당 2,200원이라 하며 주로 관광객이 이용할 주차장으로 주차 여지는 많음)

 

 

 

 

 

 

청라언덕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의 골목으로 들어선다.

 

 

 

 

 

 

이게 뭐지 싶었는데 차량이 다닐수 있는 일종의 고가도로다.

 

주변에 주차장이 이곳저곳 있다. 주차 공간은 많다.

뒤에 알았지만 지도상 청라언덕 남쪽의 큰 도로변에서 진입로가 있는데 내비가 인식하지 못하나 보다.

 

 

 

 

 

 

청라언덕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길을 3.1운동로라 한다.

 

1919년 3월 1일 서울 파고다 공원에서 폭발한 조선독립만세 운동은 일본군의 감시가 심해 대구에서는 3월 8일 오후에 일어났다. 이날 거사에 동참키로한 많은 계성학교, 신명학교, 성서학당, 대구고보 학생들은 경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동산병원 솔밭길을 이용하여 예정된 큰장안 강씨 소금집 앞으로 접근해 갔다. 그리하여 동산병원 언덕 소나무 숲은 대구 3.1운동 성공에 말없이 이바지 한 비밀 통로 구실을 했던 것이다. 지금은 그 옛날의 우거진 소나무 숲도 그 속에 있었던 오솔길도 다 사라지고 없다. 당시 그 위를 밟고 지나간 애국학생들의 발자취도 땅에선 찾을 길 없다. 그러나 그들의 발자취는 땅 밑에서 큰 진동으로 남아 지금도 크게 숨쉬고 있다. 대구시는 3.1운동 84주년을 맞아 대구 3.1운동과 관계있는 동산병원 솔밭과 닿았던 이 길을 대구 3.1운동길이라 이름지어 3.1운동 정신을 후세에 기리 전하고자 한다.

<현지 안내문에서>

 

 

 

 

 

챔니스 주택 (의료박물관)

 

청라언덕을 장식하고 있는 근대 주택 3동 중 가운데에 챔니스주택이 자리해 있다. 마치 너른 정원의 별장처럼 이색적으로 생긴 이 집은 1910년경 미국 선교사들의 주거용으로 지어진 것으로 1907년 대구 도심을 품던 대구읍성이 철거되면서 거기서 가져온 안산암 등의 성돌로 기초를  닦고 붉은 벽돌로 미국식 2층 주택을 지었다.

챔니스(O. vaughan Chamness, 한국명 차미수) 목사의 집으로 1911년 계성학교 2대 교장인 레이너와  챔니스,  샤워택 선교사 등에 이어 1948년부터 1993년까지 동산의료원 의료원장을 지냈던 모페드.(마펫 Haward F. Moffett)가 거주했다. 지금도 모페드 병원장의 생활공간이 그대로 전시되어 있어 당시 선교사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으며, 1900년대 전후의 동서양의 읠기기 등이 소장되어 근대의학의 발전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다.

< 안내문에서>

 

당일은 문이 닫혀있어 내부에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각도를 달리하여 바라본 챔니스 주택

건물 용도를 변경할려니 증축한 것인가?

 

 

 

 

 

 

챔니스 주택 옆에 이런 건축물도 있다.

안내 팜플릿을 보니 대구 동산병원 구관(제중관) 현관으로 표기되어 있다.

1931년 제2대 동산병원장 플레처가 신축한 동산의료원 구관의 중앙 입구이며, 2010년 대구도시철도 3호선 공사로 인해 현관을 보존하기 위해 이전하였다. 대구 최초의 서양의학병원으로 1941년 태평양전쟁 중에 경찰병원으로 사용되었고, 1950년 한국전생시에는 국립 경찰병원 대구 분원으로 사용되었다. 대구 향토사 및 건축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어 대구동산병원 구관은 대구 등록문화제 제15호로 지정되어 있다.

 

 

 

 

 

 

챔니스 주택

 

 

 

 

 

 

동무생각

 

작곡 박태준,

작사 이은상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적에

나는 흰나리 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동무생각이란 제목은 낮이 익은데 가사를 보니 영 낯설다. 이 곡을 지은이가 대구가 고향인 박태준이라 한다.

바로 이곳이 푸른(靑) 담쟁이(蘿/소나무겨우살이 라) 넝쿨이 휘감겨있던 청라언덕이고 백합화는 그가 흠모했던 신명학교 여학생이란다.

박태준의 꿈과 추억이 서린 이 곳에 노래비를 세운다, 이 언덕을 찾는 이들의 가슴에 청라언덕의 노랫 소리가 울려펴지기를 기원하면서........

 

<표지석에서 발췌>

 

 

 

 

 

 

선교사 블레어 주택 (교육.역사 박물관)

 

이 건물은 1910년에 미국인 선교사들이 지은 주택이다. 2층인 이 집은 남북쪽으로 약간 긴 네모형태를 이루고 있다. 1층의 서쪽에 현관으로 이어지는 베란다를 두고 현관홀을 들어서면 바로 맞은편에 2층으로 오르는 계단실이 있고, 그 오른쪽인 집의 중앙에 거실과 응접실이 앞뒤로 자리잡과 있다. 거실과 응접실을 중심으로 좌우에 침실. 부엌. 식당 등을 배치하였다. 2층에는 계단 홀을 중심으로 3개의 침실과 욕실을 두고 현관홀 위에는 늘 빛을 받아들이는 선룸(sunroom)을 설치했다. 건물은 기초와 지하실 부분을 튼튼한 콘크리트로 하고, 그 위에 미국식으로 붉은 벽돌을 쌓았다. 이 집의 전체적인 모습에서 당시 미국의 주택 형태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건물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각도를 달리하여 바라본 블레어주택

 

조선시대 서당과 1960~70년대 초등학교 교실이 재현되어 있고 시대별 교과서 및 민속자료, 계명대학교 동산병원의 새병원 홍보관이 마련되어 있다. 또한 대구 3.1운동 및 사진이 전시되어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데 기여하고 있다고 한다.

마침 이곳 청라언덕을 찾은 시간대가 점심시간이어셔인지 주변 건물 내부는 들어가 보지 못했다.

 

 

 

 

 

 

이곳은 코로나 19 기억의 공간

상시 개방한다고 하는데 이곳 역시 점심시간이어서인지 문은 잠겨있다.

 

 

 

 

 

 

은혜정원으로 왔다.

 

우리가 어둡고 가난할 때 태평양 건너 머나먼 이국에 와서 배척과 박해를 무릅쓰고 혼신을 다해 복음을 전파하고 인술을 베풀다가 삶을 마감한 선교사와 그 가족들의 안식처이다. 영혼이 깃들어 있는 은혜정원에는 "그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잠들어 있을 뿐이다(She is not dead but sleepth)"라고 새겨진 제일교회 설립자 아담스 목사의 부인 넬리 딕 아담스의 묘비를 비롯해 14개의 묘석이 있다.

 

<현지 표시석 및 안내문에서>

 

 

 

 

 

 

앞쪽 육교같은 도로를 따라오른다.

 

 

 

 

 

 

이곳 육교 또는 성벽 같기도 한 도로위에서  조망이 좋다.

 

 

 

 

 

 

가운데 3.1운동로

좌측 제일교회, 우측에 보이는 건물이 챔니스 주택.

 

 

 

 

 

 

챔니스주택, 블레어 주택쪽은 숲에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앞쪽 비석이 있는 곳이 은혜공원.

 

 

 

 

 

 

 

 

 

 

 

 

 

 

육교같은 도로에서 바라본 선교사 스윗즈 주택

 

 

 

 

 

 

대구사과 시배지, 스윗즈 주택 (선교박물관) 바로 옆에 있다.

 

사과나무 100년

여기에 뿌리내린 이 사과나무는 1899년 동산의료원 개원 당시 미국에서 들어온 한국 최초 서양사과나무의 자손목으로서 동산의료원 역사를 말할 뿐 아니라 대구를 사과의 도시로 만든 의미있는 생명체이다.

초대 병원장인 존슨박사(한국명 장인차)가 미국 의료선교사로 동산병원에 재임하면서 미국 3개 품종의 사과나무 72그루를 들여와 사택 뜰에 심었는데 이중 미주리 품종만 자라 동산의료원 주변으로 보급한 것이 대구 서양 사과나무의 효시로 알려져 있다.

존슨 선교사가 가져온 사과나무에서 떨어진 씨앗이 자연발아하여 자란 나무가 2000년에 대구시 보호수로 지정되었으나 2018년 자연고사하여 현재는 그루터기만 남아있고, 대구수목원에서 보호수의 가지를 접목한 세 그루가 2013년 이곳으로 옮겨져 자라고 있다.

<현지 안내 표지석에서 발췌>

 

 

 

 

 

 

종탑

 

동산의료원은 전국 담장 허물기 운동이 한창일 때 전국에서 처음으로 담장을 허물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당시 담장을 허물면서 본원의 유서깊은 정문 및 중문 기둥과 담장을 여기에 옮겨다 세우고, 그 위에 본원의 초창기에 개척한 수많은 교회의 종들 중 하나를 올려놓았다. 종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를, 두 기둥은 환자를 돌보는 교직원들이 사랑의 손길을, 보도에 놓은 다듬이돌들은 본원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디딤돌임을 상징한다.

<안내표지판에서>

 

 

 

 

 

 

선교사 스윗즈 주택 (선교박물관)

 

이 주택은 1893년부터 대구를 찾아와서 선교활동을 하던 미국인 선교사들이 1910년 경 지은 서양식 건물이다. 이 건물은 1907년(대구읍성 철거 때) 가져온 안산암의 성돌로 기초를 만들고 그 위에 붉은 벽돌을 쌓았다.

현관을 들어서면 거실. 응접실로 직접 연결되며, 거실을 중심으로 주방실. 침실 등이 있다. 2층은 계단홀을 중심으로 남쪽에 2개의 침실과 북쪽에 욕실을 배치하였다. 건물의 전체적인 형태와 내부 구조는 지을 당시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어 대구의 초기 서양식 건물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마르타 스윗즈 여사를 비롯해 계성학교 4개 교장인 핸더슨, 계명대학교 학장인 캠벨 등의 선교사들이 거주했으며, 개신교회사에 관한 사진 자료와 선교 유물, 2층에는 구약과 신약의 세계에 대한 다양한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안내문에서>

 

 

 

 

 

 

각도를 달리하여,

 

 

 

 

 

 

대구제일교회

 

본 교회는 대구.경북지역 최초의 개신교 교회로서, 조선 말 부산선교부에 주재하던 미국북장로교 선교사 베어드(William M. Baird : 한국명 배위량) 목사가 경상도 북부지역 순회전도여행 중 1893년(고종30) 4월 22일 대구 읍성에 첫 발을 디딤으로써 시작되었다.

1896년 1월 남성로(약전골목) 구 대구제일교회(현 선교관) 터에 있던 건물을 구입한 후 수리하여서 교회와 선교기지를 마련하였으며, 1897년 봄 초대목사인 아담스(한국명 안의와) 선교사가 부임하여 이 지역의 초기 선교활동에 크나 큰 공헌을 하였다.

본 교회는 남성로의 교회 구내에 이 지역의 최초 신교육기관인 희도학교(1900년), 계성학교(1906년)를 개교하였고, 신명학교(1907년) 설립을 주도하였으며, 의료선교사업으로 1898년에 지역 최초의 서양의술의원인 제중원(동산의료원 전신)을 교회 구내에 개설하였다.

본 교회에서 지금까지 분립한 교회는 1908년 사월교회를 시작으로 범어교회, 서문교회, 남산교회, 중앙교회 등 22개 교회이다. 

<현지안내문에서>

 

근데 국내건축물 치고 상당히 웅장한 고딕양식의 이 교회안을 들어가 보지 않았다. 아니 당시 들어가 볼 생각을 하지 않았었다.

 

 

 

 

 

 

현제명 나무

 

현석 현제명(1902~1960)은 대구출신으로 종로초등학교를 졸업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음악가로 소년시절 대구제일교회에서 성가활동을 하면서 음악적 재능을 키웠을 뿐만 아니라 평생을 연주자로, 작곡가로, 또한 음악교육가로 활동하면서 대구를 빛냈다.

오페라 <춘향전> <왕자호동> <고향생각> <희망의 나라로> <그집앞> <산들바람>등 주옥같은 가곡을 남겼다.

선생께서 한창 감수성이 예민하던 청소년기인 계성학교를 다닐때 등.하교 길목 언덕에 있던 수령 200여년 정도 된 이 이팝나무 아래서 다듬은 악상들이 나중에 훌륭한 작품으로 태어난 것이 아닌가 하여 그가 자주 앉아 생각에 잠겼을 이 나무를 "현제명 나무"라고 부르고자 한다.

<현지 안내문에서>

 

 

 

 

 

 

대구제일교회

 

지금 생각하니 왜 내부에 들어가 볼 생각을 않했을까? 싶다. 

당일 점심시간대에 찾아서 관광해설사도 없고 일부 문이 잠겨 있어서 아예 안으로 들어가 볼 생각을 하지 않은 듯 싶다.

 

 

 

 

 

 

대구제일교회 건물 동쪽편에서 계산동 성당이 내려다 보인다.

 

 

 

 

 

 

청라언덕 주변을 둘러보고 3.1운동로를 따라 계성성당으로 내려간다.

 

 

 

 

 

 

3.1운동로

주변엔 태극기로 장식했다.

 

 

 

 

 

 

3.1운동로를 따라 내려오면서,

이 계단을 90계단이라 부르나 보다. 3.1운동 당시 모습을 되새겨 볼 수 있는 사진들을 발굴 전시하였으며 많은 태극기를 게양하였다.

 

 

 

 

▣ 계산동 성당

 

 

3.1운동로를 내려와 큰 도로를 건너면 계산동성당이 있다.

대구제일교회 동쪽편에서 이 성당이 내려다 보이므로 위치는 대충 감잡을 수 있다.

 

 

 

 

 

 

계산동성당 앞에서 바라본 지나온 곳,

뒤로 첨탑 2기가 보이는 곳이 청라언덕의 대구제일교회이다,

 

 

 

 

 

 

계산동성당의 와관을 찰영하기엔 구도가 잘 잡히지 않는다.

 

 

 

 

 

 

계산동 성당은 서울과 평양에 이어 세번째로 세워진 고딕 양식이 가미된 로마네스크 양식 성당이다. 프랑스인 프와넬 신부가 설계하고 서울 명동성당의 건립에 참여하였던 중국인들이 공사를 담당하여 1902년에 완공하였다. 1911년에 주교좌성당이 되면서 동탑을 2배로 높이는 등 증축을 하여 1918년 12월 24일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평면은 라틴 십자형이고, 종탑부에는 8각의 높은 첨탑 2개를 대칭구조로 세웠으며, 앞면과 양측에는 장미창으로 장식하였다. 대구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며 현존하는 1900년대의 성당건축물로 중요한 가치가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온정밥상 중식

 

 

계산동성당 후문(동쪽편)으로 나오면  <온정밥상>이 있다.

무심코 지나치면서 유리창 안으로 내부를 보니 손님이 많다.

마침 점심때도 되었고 하여 이 집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대체로 손님이 많은 음식점은 가성비가 있으면서 음식맛이 있다.

많은 손님들이 기꺼이 대기하는 것을 보면 지역 맛집임엔 틀림없는 것 같다. 

물김치를 더 달라고했다.

 

 

 

 

 

▣계산예가. 이상화 생가. 서산동 고택

 

ㅗㄴ

 

대구 계산동 성당 남쪽 근거리에 계산예가. 시인 아상화 생가,  서상돈(국채보상운동의 거장) 고택이 서로 접하여 있다.

성당 후문인 위 온정밥상에서 남쪽 방향으로 근거리에 위치하고 있는 셈이다.

 

 

 

 

 

 

먼저 계산예가를 둘러본다.

 

 

 

 

 

 

입구 기념품 매장을 지나면.

 

 

 

 

 

 

계산예가 건물이 있다.

 

 

 

 

 

 

 

 

 

 

 

 

 

 

 

 

 

 

 

 

 

계산예가들 둘러보고 이상화생가로 이동한다.

담 없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상화

 

일제의 칼날에 맞선 저항시로, 나라 잃은 민족의 해방을 부르짖은 독립투사로, 학생들에게 민족을 깨우쳐주던 스승으로 짧은 생을 불태운 시인 이상화.

 

봄이 오기를 목 놓아 노래했던 시인 이상하는 제국주의 지배의 모순을 드러내며 현실사회의 개선을 위해 적극적인 사회활동을 벌인 저항시인이다.

 

암울했던 일제시대 민족 광복을 위해 저항 정신의 햇불을 밝힌 <나의 침실로>와 <빼앗길 들에도 봄은 오는가>등 부단한 시작활등을 통해 치열한 저항정신을 보여주었고, 동시에 우리민족 고유의 정서가 바탕이 된 투명하고 아름다운 시적 완성을 이루어 냈다.

<현지 표지석에서>

 

 

 

 

 

 

1901년 대구시 중구 서문로 2가 11번지에서 부친 이시우, 모친 김신자의 차남으로 출생. 아호는 무량. 상화. 박아.

1905년 한문 수학후 상경, 중앙학교 입학

1919년 3월 대구에서 3.1운동 대구거사모임에 참석했으나 사전에 발각. 서울 고향친구 박태원 하숙으로 피신. 그해 10월 공주출신 서순애와 혼인

1922년 백조동인으로 참여 창간호에 <말세의 회탄> <단조> <가을의 풍경> 등 발표. 도일하여 아테네 프랑세 입학

1923년 아테네 프랑세 수료. 관동대지진 당시 인본인의 조선인 학살에 분노, 귀국, <나의 침실로> 발표

1926년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 가> 발표

1936년 백씨 이상정 장군을 만나러 중국행, 남경. 북경. 상해 등지를 3개월간 유람후 귀국

1937년 귀국 후 곧 경찰에 구금되어 심한 고초를 겪음. 교남학교에 복직하여 교가 작사.

1941년 시 <서러운 해조> 발표

1943년 4월 운명. 묘지 달성군 화원면 월성이씨 가족묘지

 

 

 

 

 

 

 

 

 

 

 

 

 

 

서상돈 고택으로 간다.

좁은 도로를 사이에 두고 이상화 고택과 마주하고 있다.

 

 

 

 

 

 

안채

 

 

 

 

 

 

국채보상운동은 일본이 대한제국을 강제적으로 예속시키고자 제공한 차관 1300만원을 갚기 위하여 대구에서 시작된 모금활동이자 주권수호운동이다.

그 시작과 중심에 서상돈님이 있었다.

 

 

 

 

 

 

아랫채

 

 

 

 

 

 

소위 을사조약 이후 일제에 의한 경제식민지화가 본격화 되고 있을 때 지식인을 중심으로 한 각계각층의 우국지사들 사이에서 국채를 상환하지 못하면 국가의 존망이 위태롭다는 위기의식이 고조되고 있었다. 이렇게 국채상환을 통한 경제자립의 모색을 실천하고자 하는 분위기는 전국 각지에서 확산되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와 민중적 여망을 대변하여 처음 국채보상운동을 제창하고 나선 것이 대구 지방의 우국지사들이었다.

 

1907년 1월 29일 대구 광문사의 명칭을 대동광문회로 개칭하기 위한 특별회가 개최되었는데 이 자리에서 광문사의 부사장인 서상돈이 일제에게서 빌려온 국채를 갚아버리자는 국채보상운동을 제의하였다. 서상돈은 국채 1300만원을 갚지 못하면 장차 토지를 주어야 할 것인데, 지금 정부의 국고금으로는 갚을 수 없는 형편이므로 우리 2천만 국민이 담배를 3개월간 끊고 그 대금으로 매월 1명당 20전씩  수합하고 또 특별출연금을 합하여 2천만 동포가 합심 단결한다면 국재를 갚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어서 김광재, 서상돈 등의 명의로 된 '국채1300만원 보상취지'라는 취지서를 발표함으로써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었다. 전 국민의 호응들이 잇따랐고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제국신문> <만세보>등 각 신문이 후원하여 신문 캠페인을 벌임으로써 적극 지원하였다,

 

이 운동이 실시된 이후 4월말까지 보상금을 의연한 국민이 4만명에 이르고 보상금액은 230만원 이상이었다. 이와같이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호응을 얻자 일제는 통감부와 친일단체 일진회를 통해 확산을 방해하여 경제구국운동은 좌절되고 말았다.

 

 

 

 

 

 

안채 맞은편이다.

과거 이곳이 대문(정문)이었나 보다.

지금은 길이 막혀 모양만 유지하고 있다.

 

 

 

 

 

 

계산예가, 이상화생가. 서상돈 고택을 둘러보고  되돌아 계산동 성당 후문(온정식당 앞)으로 간다.

 

 

 

 

 

 

계산동성당 후문(온정식당)에서 서북쪽으로 난 길을 따르면 이내 마당깊은 집 안내표지판을 볼 수 있다.

 

 

 

 

 

 

마당깊은 집

 

 

 

 

 

 

처음엔 무식하게 마당이 좁은 골목 안쪽에 있어 마당깊은 집인가 했다.

소설의 제목이 마당깊은 집이다.

 

 

 

 

 

 

<마당깊은 집>은 소설가 김원일(1942년생)의 자전적 소설로 1988년 발표되었다. 6.25전쟁이 끝난 직후인 1954년부터 1년동안 대구 중심부였던 종로, 장관동, 약전골목, 중앙동 일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주인공 길남이에게 선명하게 기억된 1950년대 대구는 김원일 작가에 의해 세밀히게 재생되어 마치 사진을 보는 듯한 인상을 준다. 고향 진영에서 13살에 대구에 올라와 세 들어 살던 집이 마당깊은 집으로, 길남이네와 같은 세입자들과 주인집까지 모두 여섯가구가 하나의 마당을 공유하면서 살아가는 내용이다. 세입자들을 비롯해서 여러 인물을 통해 당시 대구 피난민들의 생활상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아버지 없는 집안의 장남으로서 가난했던 한 소년이 힘든 시절을 견뎌내는 성장과정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김원일의 마당깊은 집" 은 소설 <마당깊은 집>의 스토리와 등장인물, 대구 피난민의 삶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한 문학 체험 전시공간이다. 여기는 소설에 등장하는 실제 장소는 아니지만, 길남이가 신문을 배달하며 뛰어다녔을 법한 동네 어느 골목 끝집으로, 이곳에서 길남이와 함께 50년대 대구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되돌아 나와 영남대로 과거길 골목을 따른다.

 

 

 

 

 

 

이 집도 맛집인가 보다.

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대기중이다.

 

 

 

 

▣대구 구 교남 YMCA화관, 에코한방웰빙체험관. 구제일교회(제일예배당), 약령시한의약    

 

 

구 계산동 성당 맞은 편이다.

 

대구 구 교남 YMCA회관은 일제강점기 3.1독립만세운동 당시 주요 지도자들의 화합의 공간이었으며, 물산장려운동, 기독교농촌운동, 신간회운동 등 기독교 민족운동의 거점공간으로서 사용된 역사적 장소이다. 1914년에 건립된 2층의 붉은 벽돌건물로 1층과 2층 사이를 돌림띠(cornice)로 장식하고 창호 상부는 아치로 인방을 확보하여 사각형의 창문을 설치하는 등 1910년대~20년대 조적조 건축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교남 YMCA건물 바로 옆에  에코한방 웰빙체험관이 있으나 문은 닫혀있다.

 

 

 

 

 

 

구 대구제일교회.

 

미국 북장로교 파승 선교사인 베어드 목사가 경상도 북부지역 선교활동을 위하여 1893년  대구읍성에 첫발을 디딤으로써 시작되었으며 1896년 대구읍성안 이 터에 있던 주택 8채를 구입하여 대구선교기지로 사용하고, 대구.경북지역 최초의 개신교 교회인 대구제일교회를 세운 곳이다. 1897년에 아담스 목사가 부임하고 1899년 최초의 서양의술기관인 제중원(현 동산의료원)을 이곳에 세웠다. 또한 1900년에 근대교육기관인 대남소학교(현 종로초등학교)를, 1906년 중등교육기관인 계성학교를 이 자리에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하였다. 1908년 교세 확장에 따라 단층 예배당을 새로 지었다가, 그후 1933년 적벽돌 2층 제일예배당을 건축하고, 1936년에 종탑을 세워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 자리는 1994년 동산동의 새 성전으로 이전하기까지 100여년간 대구제일교회로 사용된 곳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현  이 교회는 박물관?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약령시 한의약 박물관

 

 

구 대구제일교회 바로 옆에 약령시 한의약 박물관이 있다.

입장료 등은 없다.

 

 

 

 

 

 

이곳 박물관은 약전골목의 삶과 체취를 직법 보고 느끼며 체험할 수 있는 전시문화공간으로 400여년의 역사의 약령시와 약전골목의 유래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3층은 약령시 역사. 문화존과 한의약 전시존, 2층은 한방체험존과 한방웰빙존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한방문화체험실과 한방브랜드 제품 판매장, 다양한 약초들이 자라는 약초꽃동산 등의 부대시설도 갖추고 있다.

 

 

 

 

 

 

 

 

 

 

 

 

 

 

 

 

 

▣약령시(藥令市)거리

 

 

약령시 거리를 따라 동쪽 방향으로 간다,

 

 

 

 

 

 

종로.

서울에만 종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곳에도 종로가 있다.

 

 

 

 

 

 

종로 거리.

이곳 종로거리를 따라 북쪽 방향으로 직진하면 경상감영공원으로 이어지지만 한구역 더 가서 중앙대로를 따라 감영공원으로 갔다.

이곳이 초행이라면 종로 거리를 따라 가는 것이 이름 때문인지 옛 거리이고, 좌우로 상가구경, 감영공원 길찾기 등에 있어서 더 좋을 것 같은 생각을 해 본다.

 

 

 

 

▣대구 감영공원

 

 

대체로 사각형의 감영공원에서 서남쪽 모서리에 대구근대역사관이 있고, 역사관 맞은편 경찰서? 신축건물 (현 공사중) 앞에 희움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이 가까이 있고,

북쪽 접한 도로는 수제화 거리이고 북동쪽 모서리에서 우측의 수제화 거리를 따르면 대로변에 대구문학관(향촌문화관)이 있다.

 

 

 

 

 

하마비

절도사이하개하마(節度使以下皆下馬)

병마절도사는 도의 병권을 맡은 책임자로 대개 종2품관인 관찰사가 겸임하였다. 

 

 

 

 

 

 

시민의 나무

 

 

 

 

 

 

장청각(澄淸閣 . 맑을 징)

경상도 관찰사의 처소로서 선조34년 경상감영이 대구에 정착하면서 선화당 등 여러 채의 건물과 함께 세워졌다.,

 그후 여려차례 화재로 불탄 것을 순조 7년 1807년 다시 지었고 1970년 공원조성 때에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선화당(宣化堂)

 

경상감영은 조선 초기에 경주. 상주. 안동 등 여러 차례 옮겨졌는데 선조34년에 지금의 자리에 정착하였다. 선화당은 경상감영의 중심 건물로 경상도 관찰사가 머무르며 나랏일을 보던 곳으로 , 대구에 경상감영을 조성할 때 처음으로 지었다. 이후 3차례에 걸쳐 화재를 입어 무너졌다가 순조 7년에 이르러 지금의 건물로 고쳐지었다. 그 후로도 몇 차례 수리하였으나 공포와 부재 등의 제작 기법을 보았을때 당시의 건축양식을 잘 보존하고 있다.

 

대구 경상감영 선화당은 조선시대에 설치했던 지방관청의 건물이 현재까지 남아 있는 드문 사례이다. 일제 강점기 이후 본래와 다른 용도로 사용하면서 일부 변형되기도 했지만 현재까지 약 400년간 건물의 규모와 구조를 그의 원형대로 유지하고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발췌>

 

 

 

 

 

 

측우대

건융경인5월조

 

.국보 제 330호(2020. 2. 27일 지정)

.재료 화강석, 제작연대 1770년(영조46), 기상청 소장

.대구 선화당 측우대는 측우기를 받치는 측우대 중에서 제작 연대가 확인된 유일한 것이며, 1950년 초에 기상청으로 이관되었다,

 

이후 선화당에는 측우대만 모형으로 설치되어 있었으나, 2015년 12월 시민들의 이해를 돕기위해 기상청에 소장되어 있는 측우기(보물 561호, 금영측우기/조선시대 공주 감영에 설치되었던것 / 2020.2.27 국보승격) 모형으로 제작 설치하였다.

<현지 안내문에서>

 

 

 

 

 

 

종각

 

 

 

 

 

 

경상감영지

 

조선시대에는 각 도에 관찰사를 파견하여 지방통치를 맡게 하였다. 대구 경상감영은 조선후기 경상도를 다스리던 지방관청으로서 관찰사가 기거하던 곳이며, 선조34년(1601)에 설치되었다. 대구 경상감영지는 경상감영의 중심건물인 선화당과 징청각이 원위치에 잘 보존되어 있고, 발굴조사 결과 감영지로 확인되었다.

이곳은 조선후기 관아의 격식과 구성을 잘 보여주고 있어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뛰어난 문화유산으로 평가되고 있다. 일제강점기 경상감영 내외로 도로가 만들어지며 그 영역은 현재의 모습으로 크게 축소되었지만 오늘날도 역사적 공간으로서 변함없는 가치를 간직하고 있다.

< 현지 안내문에서 발췌>

 

 

 

 

 

 

경상감영공원 남서쪽 모서리에 대구 근대역사관이 있다.

 

 

 

 

 

 

이 건물은 1932년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으로 건립되어, 1954년 부터는 한국산업은행 대구지점으로 이용된 근대 건물이다. 르네상스 양식으로 조형미가 뛰어난  역사관 건물은 원형이 잘 보존되어 2003년 대구시유형문화재 제49호로 지정되었다.

 

 

 

 

 

 

조선식산은행은 일제 식민지 경제정책에서 금융지배를 담당했던 주요 핵심기관이었다.

당시 정문을 들어서면 은행창구이나 고객대기 면적은 협소하였으며, 천정의 놓이가 높아 위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대구 근대역사관을 대충 둘러보고 경상감영공원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면 수제화 거리가 있다.

 

 

 

 

 

 

빨간구두아가씨 노랫말 거리

가수 남일해

 

 

 

 

 

 

대구문학관과 향촌문화관이 한 건물에 표시되어 있다.

 

 

 

 

 

 

이곳엔 입장료가 있다

어른 1,000원 (경로 50% 할인)

 

 

 

 

 

 

향촌문화관은 4층의 건물로 1층에서 부터 4층 까지 들러보고 엘리베이트를 타고 지하 1층을 둘러보도록 안내한다.

 

 

 

 

 

 

실내에 근대 골목을 만들었다.

 

 

 

 

 

 

 

 

 

 

 

 

 

 

 

 

 

 

 

 

 

 

 

 

 

 

 

 

 

 

 

 

 

 

 

 

 

 

 

 

 

 

 

 

 

 

 

 

 

 

 

 

 

 

 

지하 1층으로 내려왔다.

 

 

 

 

 

 

영상과 함께 오페라 감상을 잠시 했다.

 

 

 

▣희움 일본군 위안부역사관

 

 

대구근대역사관 옆에 대구경찰서 건축 공사가 진행중에 있다.

이 신축건축물 앞족에 희움 일본군 위안부역사관이 있다.

 

 

 

 

 

 

1월까지? 입장료를 받지않지만 곧 받을 것 같은 이야기를 한다.

1층 로비로 들어서면 반지하와 2층의 크지않은 규모이다.

 

 

 

 

 

 

반지하? 1층?

 

일본군 위안소 제도는 어떻게 출발하게 되었을까? 위안소, 위안부 라는 표현은 왜 쓰이게 되었을까?

위안소 제도의 출발과 전개 과정을 살펴보면서, 식민지 상황의 차별적 구조하에 여성들이 어떻게 일본군 위안부 동원되었는지 자료와 사진 등을 통해 확인해 볼 수 있다.

 

 

 

 

 

 

 

 

 

 

 

 

 

 

2층으로 오르는 계단.

사친촬영 금지,

 

천천히 내용을 음미하면 애터지는 일이지만 휙 하니 둘러볼려면 짧은 시간에 둘러볼 수 있다.

해설사의 이야기를 들으며 방문 일정을 잡기를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