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지역의 산

문경새재 과거길

정헌의 티스토리 2023. 10. 16. 14:52

■문경 새재 숲길

 

문경새재 과거길이라기도 하고 문경새재 숲길. 옛길이라고도 한다.

과거 제1문을 들머리로 하여 주흘산 정상 영봉에 오른 후 2관문으로, 고사리 주차장을 출발하여 부봉과 연계하여 들머리 또는 날머리를 제 3관문과 동화원 옛터로 다녀온 적이 있어 과거길에 대해 크게 염두에 두지 않았었지만, 문경새재 주차장에서 1.2.3관문을 거쳐 괴산 고사리 주차장으로 문경새재 과거길을 따르면 8~9km전후로 가볍게 한 코스가 될 듯 하여 동갑내기들과 함께했다.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 차량회수가 곤란하므로 3관문 까지 갔다가 되돌아 가면 된다. 두세 곳 주 탐방로 외 동문지나 옛길이 있어 같은 길을 조금 피할 수 도 있다.

길은 넓고 평지 또는 완만하여 가을날 가볍게 걷기에 좋다, 주변의 조령산과 신선암봉, 주흘 영봉과 부봉 등 경관이 수려할 뿐만 아니라 영남과 한양을 잇는 주요 요충지여서 박물관, 오픈세트장, 각종 비석 등 이곳 저곳 볼게 많은 곳이다.

 

 

▷가는 길

문경새재 주차장

 

 

 

 

 

▷탐방코스

문경 주차장 - 제1관문(주흘관) -문경새재 오픈 세트장 - 제2관문(조곡관) - 제3관문(조령관) - 과산군 연풍면 고사리 주차장 

( 점심시간 약 1시간,  문경새재 주차장에서 1문까지 15분, 1문에서 2관문까지  오픈세트장 10분여 포함 약 1시간, 2관문에서 3관문까지 약 1시간 20분, 3관문에서 고사리 주차장 약 40분, 동화원 15분 포함 4시간 30분  /  2023. 10. 13)

 

 

 

▷탐방안내도

 

제1관문 -  2관문(3.0km) -동화원터(5.3km) - 3관문까지 (6.5km / 2시간 소요) 

안내도에 표시된 시간보다는 우리 일행은 중간 점심시간 제외 약 2시간 50분 소요되었다.

 

 

 

▷탐방후에

 

 

주차장이 잘 되어 있다.

축제 등 특별한 날을 제외하고는 주차의 여지는 있을 것 같다.

 

 

 

 

 

 

주변에 음식점, 카페 등 상가도 많아 먹을 걱정은 안해도 되겠다.

 

 

 

 

 

 

문경새재 아리랑

문경새재 아리랑도 있나? 싶어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니 구수한 맛이 애절하다.

 

 

아리랑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소 

문경아 새재야 물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가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홍두깨 방망이는 팔자가 좋아 큰애기 손길로 놀아나에,

아리랑 아리랑 아라니오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 주소 .............

 

 

 

 

 

 

이어 문경새재비도 세웠다.

 

 

 

 

 

 

17명의 조촐한 일행 중 일부이다.

 

 

 

 

 

 

오늘은 10월 13일,

내일부터 문경 사과축제가 열린다.

 

들머리 하천 건너편으로 미로공원이 있다.  공원입장료는 어른 입장료 3,000원(청소년2,000원, 어린이 1,500원)을 지불하고 이곳을 거쳐 올라도 되지만  넓은 탐방로를 따라 오른다,

 

 

 

 

 

 

뒷편 사과가 인조인가 아닌가?

지나치면 시선이 갈 곳이다.

 

 

 

 

 

 

문경새개 과거길 표지석이 반긴다.

어디로 가든 제1관문 앞에서 만나게 되나 도보길은 우측이다.

 

 

 

 

 

 

저만큼 제1관문

아래 주차장에서 천천히 주변 살펴가며 15분여 소요되었다.

 

 

 

 

 

 

1관문 좌측 하천쪽도 경관이 좋다.

 

 

 

 

 

 

제1관문 주흘관

 

이 관문을 지나면 우측편으로 주흘산 정상과 영봉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있다.

이와 연관지어 1관문은 주흘관으로, 2관문은 조령의 골짜기로 들어선다 하여 조곡관,  3관문은 조령 고개에 위치하므로  조령관으로 기억하면 쉬울 것 같다.

 

 

 

 

 

 

1관문 안쪽에 경북100주년 타임캡슐광장을 조성하였으며, 혜국사를 거쳐 주흘산으로 오르는 등산로 들머리가 있다.

 

 

 

 

 

 

1문 주변에도 주흘산 등산객과 제2관문까지 또는 조령 과거길 탐방객 등이 섞여 많은 사람들이 끓는 곳이다.

 

 

 

 

 

 

조금 오르니 이강년 선생에 대한 안내표지판이 있다.

 

문경새재는 운강 이강년(1858~1908) 선생이 일본군과 두 차례에 걸쳐 전투를 벌인 곳이다. 선생은 1858년 문경 가북면 도태(현 가은읍 상괴리)에서 태어나 1880년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지만, 1884년 갑신정변을 계기로 낙향하여 학문에 전념했다.

1895년 을미사변 이후  갑오.을미개혁으로 단발령이 내려지고, 전기 의병이 일어나자 선생은 1896년 도태장터(가은 상괴1리)에서 창의하여 의병항쟁에 나섰다. 그해 3월 20일부터 약 한 달 동안 일본군의 주요 병참선인 조령의 동원촌(현 동화원)을 중심으로 방어진을 구축하고 수안보와 평천에서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1907년 일제의 정미7조약으로 군대가 해산되자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이때 선생은 제천에서 거의하여 연합의 진을 결성하고 8월 15일 제천 천남전투에서 일본군 1개 소대를 격파하였다. 1907년 문경읍을 장악한 운강의병부대는  9월 9일 주흘루(제1관문) 주변에서 일본군을 격퇴하고, 9월 10일과 11일 양일간에 걸쳐 갈평에서 일본군 1개 소대를 괴멸시키는 등 일제침략에 항거하였다.

선생은 1908넌 작성산에서 일본군에 붙잡혀 그 해 10월 13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여 그 뜻을 기리고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발췌>

 

 

 

 

 

 

도로변에 여러 선정비 등이 있다.

 

 

 

 

 

 

중간,

드라마 오픈 세트장이 있어 둘러보고 간다.

참고로 오픈 세트장은 성인 1인 입장료 3,000원?을 받고 있으며, 상부쪽(광화문 뒷쪽) 출입구는 차단하였으므로 매표소쪽 입구로 되돌아 나와야 한다.

65세이상, 문경시민 등 입장료 면제 대상도 있으므로 참고하시기 바람.

 

 

 

 

 

 

우측편 골목으로 광화문을 재현했다.

 

 

 

 

 

 

좌포도청(左浦盗廳)

포도청의 포자를 捕(잡을 포)자를 쓰는데 이곳에는 浦(물가 포)자를 썼다.

 

 

 

 

 

 

포도청 안쪽이다.

 

 

 

 

 

 

다른 골목을 따라,

 

 

 

 

 

 

광화문 앞으로 왔다.

 

 

 

 

 

 

광화문을 들어서면 근정문이 있고,

 

 

 

 

 

 

근정문 안쪽에 강녕전이 있다.

강녕전엔 용마루 대신 곡와(구부러진 기와)를 설치하여 뭔가 빠진 듯 눈에 익지않은 모습이다.

 

 

경복궁의 강녕전과 교태전, 창덕궁의 대조전은 왕과 왕비의 침전으로 공통점은 용마루가 없다는 점이다.

어떤이는 임금이 용인데 침전에 또다른 용(마루)이 있을 이유가 없어 용마루를 설치하지 않았다고도 하고,  왕비 침전은 배속에 왕자를 잉태하고 있는 중전마가가 계신 지붕에 무거운 용마루를 놓으면 용마루의 기운이 배를 눌러 나쁜 영향을 주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또 어떤이는 용마루를 설치하면 그 무게가 4t정도로, 지붕이 무너지는 징조가 나타나면 피할 시간적 여유가 있지만 잠들었을 때에는 대처능력이 떨어질 수 밖에 없으므로 왕과 왕비의 침전에 용마루를 설치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이가 있으나  어느것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오픈 세트장을 대충 둘러보는데 15분여 소요되어 후문으로 나왔다.(후문은 출입을 통제하여 담치기했다)

 

길은 흙길로 맨발로 걷는 분들도 많다.

이런 길은 제3관 조령관까지 계속된다.

 

 

 

 

 

 

진행 방향에서 볼 때 우측 바위 중간에 현감 구명규의 선정비(善政碑)를 새겼다.

이런 비와 볼 거리는 도로변에 안내 표지판이 있어 조금만 주의하면 알 수 있다.

 

 

 

 

 

 

 

 

 

 

 

 

 

이곳 바위 절벽에는 상주목사 이익저의 불망비(不忘碑)를 새겼다.

역시 조그만 안내표지판이 있어 알 수 있다,

주변 군데군데에서 암벽에 새긴 비석을 볼 수 있다. 

 

 

 

 

 

 

조산(造山)

 

조산은 말 그대로 인위적으로 조성한 산을 일컫는다. 풍수지리적으로 볼 때 공허하거나 취약한 지점에 조산을 만듦으로써 그곳을 보강하고자 하는 의식이 담겨있다. 문경지역에서는 골맥이 서낭당으로 불리며 마을 입구나 경계지점에 세워 마을의 안녕과 풍요을 기원한 곳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위 조산 앞 정자에서 바라본 건너편 부채손이 무성하다.

 

 

 

 

 

 

우측 길 가에 위치한 지름틀바우

상부로 진행방향에서 볼 때는 언듯 보면 지나치기 쉬우나 살짝 지나친 지점에 안내표시판이 있다.

 

 

 

 

 

 

지름틀(기름틀의 경상도 사투리) 바위는 기름을 짜는 도구인 기름틀을 닮아 붙여진 이름이다.

윗쪽에서 아랫쪽 방향으로 보아야 바위가 더 길게 보인다.

 

 

 

 

 

 

 

 

 

 

 

 

 

조령원터 직전이다.

 

이곳에 등룡정 안내표지판이 있다(사진상 좌측 보이는 것)

주변을 두리번 거려 보나 소공원이 조성되어 있을 뿐 정자는 보이지 않는다.

등룡정은 현 서울 종로구 옥인동에 있었던 사정(射亭/활 쏘는 곳)으로서 삼청동의 운룡정, 시직동의 대송정, 누상동의 풍소정, 필운동의 등과정과 더불에 서촌오사정(西村五射亭)으로 불리어 졌으며, 현재는 그 터만 남아있다.

<현지 안내표지판에서>

등룡정이 서울에 있었는데  왜 이곳에 그 터만남아있다고 안내하는지에 대해선 의문이 든다. 

 

 

 

 

 

 

원터을 둘러싼 담이다,

옛날에 쌓은 것인지 근래에 쌓은 것인지 모르지만 정교하게 쌓은 울(담)이다.

 

 

 

 

 

 

조령원터(鳥嶺院址)의 서쪽(계곡쪽) 문이다.

문은 이곳 밖에 보이지 않는다. 굳이 어러개의 문을 낼 필요도 없을것 같다.

 

 

1관문과 2관문 사이에 위치한 조령원터는 고려와 조선조 공무로 출장하는 관리들에게 숙식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한 공익시설이다.

문경새재는 과거 한양과 영남을 이어주던 길목에 위치하여 수 많은 길손들이 오고가는 중요한 통로였으며, 역과 원이 일찍부터 발달하여 새재내에만 동화원, 신혜원, 조령원 등 3곳의 원터가 전해지고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조령원터의 넓이는 600평으로 남북으로 길게 쌓여진 장방형의 담으로 둘러져 있다.

 

 

 

 

 

 

조령원터를 지나 조금 오르면 도로변에 무주암 표지판이 있다,

 

 

 

 

 

 

도로변에서 100m쯤 우측 소로를 따라 오르면 무주암이 있다.

좌측 뒷편으로 돌아가면 바위 위로 쉽게 오를 수 있다,

 

 

 

 

 

 

무주암

 

누구든지 올라 쉬는 사람이 주인이 되는 바위로 옛날에는 이 바위 아래에 무인 주점이 있어 술과 간단한 안주를 준비하여 두었다. 길손들이 이 바위 위에 올라 주변의 경치를 즐기면서 목을 축인 후  마신만큼의 주대를 함에 넣고 가도록 하였다고 한다.<현지 안내문에서>

바닥면이 약간 경사 져 오랫동안 쉬기에 썩 편한곳은 아니지만 주변보다 높고 넓어 쉬어가기 좋겠다. 현재는 도로변에서 약간 벗어나 있어 그냥 지나치기는 분들도 많다.  

 

 

 

 

 

 

되돌아 나와 도로를 따라 오른다,

좌측으로 조령산 등산로 표지판이 있다.

이화령에서 출발하여 조령산 정상에 오른 후 신선암봉 인근에서 연풍면 절골로 하산한 적이 기억난다. 신선암봉 인근에서 내려오면 이곳으로 연결되지 않을까 추측해 본다.

 

 

 

 

 

 

팔왕 휴게소

도로변에서 우측으로 100m쯤 떨어져 있다.

메뉴가 다양하게 적혀있는데 자세히 보지는 않았다. 이곳에서  요기를 할 수 도 있겠다.

전화 010-653 - 6540

참고로 2관문 직전에도 비슷한 휴게소가 한 곳 더 있고, 동화원터와 3관문 인근에도 휴게소가 있다.

 

 

 

 

 

 

조금 오르니 좌측편에 마당바위 표지판이 보인다.

 

 

 

 

 

 

샛길을 따라 50미터쯤 진행하면 마당바위가 있다.

 

 

 

 

 

 

마당바위 

그렇게 크지 않은 바위(4×5m 정도)로 옛날에는 도적들이 이곳에 숨어 있다가 지나가는 사람을 덮치기도 했던 곳이란다.

 

 

 

 

 

 

송진 채취로 상처난 소나무도 보이고,

 

 

 

 

 

 

 

 

 

 

 

 

 

 

주막

 

새재는 조선시대에 영남에서 한양을 오가던 가장 큰 길로서, 이 주막은 청운의 꿈을 품고 한양길로 오르던 선비들, 거부의 꿈을 안고 전국을 누비던 상인들 등 여러 계층의 우리 선조들이 험준한 새재길을 오르다 피로에 지친 몸을 한 잔의 술로써 여독을 풀면서 서로의 정분을 나누며 쉬어가던 곳이다.

이곳에서 약 1시간여 점심시간을 갖는다,

 

 

 

 

 

 

주막 본채

우물도 있고, 조금 떨어져 별채도 있다.

이곳 평상에서 약 1시간여 점심시간을 갖는다.

 

 

 

 

 

 

중식후 탐방로를 따라 오른다.

 

교귀정(交龜亭)

표지석이 있어 주변을 둘러보나 정자은 이곳에선 보이지 않는다.

(현 교귀정은 조금 더 진행하면 약수터 주변에 있다. 옛 이곳에 교귀정이 있었던 곳인가?)

 

교귀정은 조선시대 임금으로부터 명을 받은 신.구 경상감사가 업무를 인계인수 하던 교인처(交印處)로 1470년경(성종 초)에 건립되어 지속적으로 사용되어 오다가 1896년 3월(건양1년) 의병전쟁시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후 폐허로 터만 남아 있던 것을 1999년 6월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매년 경상감사 교인식 재현행사를 이곳에서 거행하고 있다. 건물의 양식은 팔작지붕에 이익공, 정면3칸 측면 1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교귀정 표지석 뒷편 암벽에 현감 이인면의 애휼비와 선정비가 새겨져 있고,

이웃하여 경상감사 도임행차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새로 도임하는 신임감사와 이임하는 감사가 관인을 인수인계 하던 곳으로 감사 도임행차를 미암일기와 탐라순력도를 기초로 하여 그림으로 재현하였으나 많이 낡았다.

 

 

 

 

 

 

위 교귀정 안내 표지석에서 조금 오르면 용추약수를 알리는 목장승이 있고 뒷편으로 교귀정이 위치한다.

재1관문에서 1.89km,  제2관문 1.11km 남은 지점이다.

 

 

 

 

 

 

용추약수

 

용추샘은 바닥돌을 파고 깍아 샘을 만든 뒤 받듯한 천정석과 큰 바위을 층층이 쌓아 만들었다.

규모와 형태로 보아 옛 길손은 물론 성내 군사용으로 요긴하게 쓰이던 샘으로 조곡관(제2관문) 축성 당시(선조27년)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일제 강점기에 새재길을 확장하면서 토석에 뭍혀 오랫 세월 세간에 잊혀 있던 것을 2003년 10월 복원하였다.

 

 

 

 

 

 

용추약수는 교귀정 아랫쪽 하천변에 위치하며 주변 경관이 좋다.

 

 

 

 

 

 

교귀정 소나무

 

이 교귀정 소나무는 경상감사 교인식이 이루어진 교귀정의 역사와 함께한 나무로 전해지고 있다. 특히 나무의 뿌리가 교귀정 방향인 북쪽으로 뻗어 있고 줄기는 길손들이 쉬어 갈 수 있도록 남쪽으로 향해있으며, 마치 여인이 춤을 추는 듯하여 새재를 찾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있다.

<현지 표지석에서>

 

 

 

교귀정

 

 

 

 

 

 

용추(龍湫)  / 다할 추

 

용동반와절(龍動盤渦折) 용이 꿈틀거리어 소용돌이 헤치니       / 소용돌이 와, 꺽을 절

함천명일신(涵天明日新) 잠긴 하늘에 밝은 해가 새롭다.            / 젖을 함

청회백홍사?(晴雷白虹瀉) 갠 날 우뢰소리에 흰 무지개 뻗치니   / 갤 청, 무지개 홍, 쏟을 사?

황홀숙궁신(恍惚孰窮神) 황홀하구나, 그가 그 신비를 알리        / 황홀할 황, 황홀할 홀, 누구 숙, 다할 궁

 

면곡 어변갑   (綿谷 魚變甲)

 

 

 

 

 

 

교귀정 앞쪽 주변 경관이 좋다.

 

 

 

 

 

 

문경의 용담폭포

 

처다보니 새재길 아득히 멀고

굽어보니 구불구불 열두 구비라

여기 이곳 용담폭포 참으로 놀랍다

폭포소리 물보라 앞다투어 일어나

 

 

 

 

 

 

안동부사 김수근의 타루비

타루(타루 / 떨어질 타, 눈물 루)비는 '그리워 하며 눈물을 흘리며 세운 비' 로 해석하는 분도 있다.

 

 

 

 

 

 

 

 

 

 

 

 

 

기도굴`50m

탐방로 우측 산기슭으로 암벽 아랫쪽에 있을 것으로 추정해 본다  이곳에서 30~50m정도 될 듯 싶다. 다른 일행과 동행으로 인해 뒤처질까봐 올라가 보지 않았다

 

문경새재 길은 하늘재와 더불어 최양업 신부(김대건 신부에 이은 두번째 한국인 사제)가 경상도와 충청도 지방의 순회 전교활동을 위하여 넘나들던 곳으로 새재입구(문경읍 장안리)에서 순교하였으며 그곳은 천주교 성지로 지정되었다,

새재 기도굴은 길이 7m, 폭 5.5m, 높이 1m크기의 자연동굴로써 이 굴은 조선시대 말기에 박해를 피해 교우들과 함께 숨어 지내며 기도하던 곳으로 추정된다.

<현지 안내문에서>

 

 

 

 

 

 

 

 

 

 

 

 

 

 

꾸구리바위

전설에 의하면 바위 밑에는 송아지를 잡아 먹을 정도의 큰 꾸구리가 살고 있어 바위에 앉아 있으면 물속의 꾸리기 움직여 바위가 움직였다고 한다. 특히 아가씨나 젊은 새댁이 지나가면 희롱하였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과장이 심한건 마찬가지다.

근데 꾸구리가 뭐지 싶어 인터넷을 뒤져보니 크기 6~12cm 정도의 잉어과 물고기로, 주로 금강. 한강. 임진강의 중 상류 지역에 제한적으로 분포하는 고유종, 멸종위기야생동식물 2급으로 나온다.

 

 

 

 

 

 

 

 

 

 

 

 

 

 

우측으로 샛길이 있다.

이 샛길은 문경새재 과거길(옛길)로  그렇게 멀지 않은 상부에서 넓은 길과 합류되는 것 같다.

 

 

 

 

 

 

 

 

 

 

 

 

 

 

 

 

 

 

 

 

 

 

소원성취탑

 

그 옛날 문경새재를 지나는 길손들이 이 길을 지나면서 한 개의 돌이라도 쌓고 간 선비는 장원급제하고 몸이 마른 사람은 쾌차하고, 상인은 장사가 잘 되며, 아들을 못낳는 여인은 옥동자를 낳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조령 산불됴심 표석(경북 문화재자료 제266호)

 

표석의 설치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대체적으로 조선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원추형 자연석에 음각된 순수 한글비석이다.

현재 표석의 위치는 처음 세워질 당시의 장소로 보여지며,  많은 사람들이 오고가는 길목에 산불예방과 주흘산의 자연에 대한 중요성을 널리 알리고자 세운 것으로 보여진다. 현재 국내에 고어(古語)로 된 한글비석은 모두 4점이나 "조령산불됴심" 표석을 제외하곤 모두 국한문 혼용으로 되어 있어 국내 유일의 순수 한글 비석이라 할 수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응암(매바우) 폭포

 

 

 

 

 

 

조곡인공폭포의 물이 이곳으로 흐르도록 통나무로 수로를 내었다.

 

 

 

 

 

 

 

 

 

 

 

 

 

 

개령현감 이백규의 거사비(去思碑) 현감 이인면의 불망비(不忘碑)

바위에 음각되어 있다.

 

 

 

 

 

 

이 미니차량은 2관문까지 운행한다.

 

 

 

 

 

 

조곡폭포

인공폭포이다.

 

 

 

 

 

 

제2관문 휴게소

감자전, 파전, 부추전, 손두부, 도토리묵, 커피, 오미자차..................

 

 

 

 

 

 

휴게소는 하천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다.

 

 

 

 

 

 

제2관문 앞

 

전동차는 이곳에서 회차하며, 주변에 화장실이 있다.

보통 혜국사를 거쳐 주흘산 주봉(1,075m). 주흥 영봉(1,108m)을 등반한후 꽃밭서들을 지나 이곳으로 하산한다.

 

 

 

 

 

 

제2관문 조곡관

제1관문에서 중간 점심시간 1시간쯤 제외하고 1시간쯤 소요되었다.

 

 

 

 

 

 

 

 

 

 

 

 

 

조곡관 안쪽에는 소나무 숲이 좋다.

하천변에 약수터가 있고, 주변 한시가 있는 옛길이 조성되어 있다.

 

 

 

 

 

 

주변

 

 

 

 

 

 

조곡관을 지나 옛길을 따라 오르면 머지않아 우측 계곡을 건너 부봉으로 오르는 등산로 입구가 보인다,

부붕(910m)  2.5km, 1시간 20분 소요 등산로 험난하다고 표시되어 있다.

 

 

 

 

 

 

 

 

 

 

 

 

 

 

 

 

 

 

 

 

 

 

바위굴

진행 방향에서 볼 때 우측에 위치한다.

 

 

 

 

 

 

바위굴과 새재우

 

옛날 갑작스런 소낙비로 이 바위굴에 들어와 우연히 만나게 된 두 남녀가 깊은 인연을 맺고 헤어진 후 처녀가 아이를 낳았는데 성장하며 아비없는 자식이라 놀림이 심하므로 어머니가 자초지종과 함께 아비의 엉덩이에 주먹만한 검은 점에 대해 이야기 해 주었다.

그후 아이는  아버지를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던 중 어느 깊은 산골 주막에서 중년의 선비가 "어허 그 빗줄기 마치 새재우 같구나" 함으로 아이가 "새재우"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고 어머니와 같은 이야기를 함으로 부자지간임을 알게 되어 행복하게 살았다고 하며,  지금도 청춘남녀가 이곳에 들면 사랑과 인연이 더욱 깊어져 평생을 헤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현지 안내문에서>

 

 

 

 

 

 

위 바위를 각도를 달리하여,

 

 

 

 

 

 

바위굴을 알리는 표지석의 화살표 방향이 애매하다,

개울(하천) 건너편  바위 아래도 바위굴이 있는 것 같다.

 

 

 

 

 

 

귀틀집

 

주로 산악지대에서 사용되던 한국식 통나무집으로 위에서 내려다 보면 우물정(井)자 모양이 되고 "방틀잡" "말집"  "목채집"  "틀목집"  "투방집" 혹은 정한식(井韓式)집"이라고도 한다,

귀틀집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어 3세기 중국의 역사서인 <삼국지 위지 동이전 진한조>에  "나무는 옆으로 쌓아올려 집을 짓는데 모양은 감옥을 닮았다"고 기록되어 있어 삼한시대에 많이 건축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북 시베리아, 파미르 고원, 북유럽, 아메리카 산악지대 등 세계적으로 널리 분포되어 있고, 1970년대 말까지 화전민의 귀틀집이 문경새재 주흘산 등산로변에 남아 있었으며, 현재 울릉도 나리분지에 남아있는 귀틀집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건축방법은 나무와 나무 사이가 엇물리는 귀가 잘 맞도록 아귀을 지어 놓으며, 나무 사이에 진흙을 발라 보온성이 좋고, 특히 자연 소재 그대로 주거 생활에 반영해 습기조절, 산림욕의 효과를  볼 수 있어 오늘날 옛 형식을 보완하여 현대인의 웰빙 주거 공간으로 많이 이용되고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색시 폭포

계곡 건너편 0.3km거리에 있다.

 

색시폭포는 조령산 줄기와 숲에 가려져 새색시의 수줍은 듯한 모습으로 그 자태를 감추고 있으며 겨울에는 큰 빙폭을 형성하여 장관을 이룬다, 3단의 큰 폭포와 여러 단의 작은 폭포로 이루어진 정상은 평평한 구릉인데 양지쪽에는 다듬은 듯한 큰 암벽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그 끝 부부네는 자그마한 동혈(동혈)이 있으며 건너쪽에는  또 하나의 바위가 마주하고 있다. 시민 공모로 이름지어졌다.

 

 

 

 

 

 

 

 

 

 

 

 

 

 

이진터(이진터)

 

임진년(1592년) 왜장 고니시 유끼나가(소서행장)가 18,500명의 왜군을 이끌고 문경새재를 넘고자 진안리에서 진을 치고 정탐할 때 선조대 왕의 명을 받은 신립장군이 농민 모병군 8,000명을 이끌고 대치하고자 제1진을 제1관문 부근에 배치하고, 제2진의 본부를 이곳에 설치하였다. 그러나 신립장군은 새재에서 왜적을 막자는 김여물 부장 등 부하들의 극간을 무시하고 허수아비를 세워 초병으로 위장 후 충주 달천(탄금대) 강변으로 이동하여 배수진을 쳤다. 왜군 초병이 조선초병 머리위에 까마귀가 앉아 울고 가는 것을 보고 위장된 군인임을 알고 왜군이 쉽게 새재를 넘었다고 한다.,

 

 

 

 

 

 

 

 

 

 

 

 

 

 

 

 

 

 

 

 

 

 

안내표지판은 없지만 이곳도 비석인 듯 싶다.

 

 

 

 

 

 

동화원 휴게소 앞 갈림길이다.

직진은 제3관문으로 가는 길, 우측길은 동화원 휴게소 및 동암문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동암문 쪽으로도 지나온 길과 같은 정도의 흙길이다.

 

 

 

 

 

 

과거 3관문- (동화원) - 동문 - 부봉 - 동화원 - 3관문으로 되돌아 간 적이 기억난다.

 

 

 

 

 

 

휴게소에 들러 소주한잔 하고 가기로 한다.

 

 

 

 

 

 

휴게소.

 

 

 

 

 

 

동화원 삼거리로 되돌아 나와 제3관문으로 향한다.

 

 

 

 

 

 

4각의 정자를 지나 우측으로 휘어져 오르는 길에 갈림길이 있다.

 

 

 

 

 

 

옛 과거길 갈림길로 표시되어 있다.

옛 과거길에 낙동강 발원지, 소원성취탑 등이 있어 이 길을 따라 오르기로 한다.

지나고 보니 위 흙길과 거리상이나 시간상으로는 별 차이는 없다

 

 

 

 

 

 

옛 과거길은 자연그대로의 길이다.

 

 

 

 

 

 

문경초점 / 낙동강 발원지 

 

낙동강의 시원지는 강원도 태백시내에 위치한 용지로 친다.

이곳 조령에서 발원하는 초곡천은 포암산쪽에서 발원하는 시북천을 문경역 인근에서 흡수하여 조령천이 된다,

조령천은 상주 화북면 속리산에서 발원하여 문경 가은읍을 거쳐 내려오는 영강에 마성면 진남교반 인근에서 합류되어 문경시(구 점촌읍) 외곽을 거쳐 상주 사벌국면 퇴강리(낙동강 칠백리 공원)에서 낙동강에 흡수된다.

 

 

 

 

 

 

문경 초점.

 

초점이 무슨 뜻인지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1. 사람들의 관심과 흥미를 집중시키는, 사물의 가장 중요한 점.

2.포커스(focus) 등으로 나온다.

3. 괴산쪽 백두대간 조령 표지석에 이 고개를 옛 문헌에는 초점(草岾/ 풀 초, 재 점)이라 했다.

 

 

 

 

 

 

소원성취탑

 

백두대간이 이어지는 이 곳에서 북쪽으로는 마패봉이 있고, 동쪽으로는 부봉을 이루는 시루봉, 향로봉, 촛대봉, 신성?봉이 어우러져 있다. 이는 분명 가마솥의 시루떡과 정화수를 올려놓고 촛불 밝히고 향 사르며 소원이 이루어지도록 신선이 기원하는 조화로은 형국이다. 또한 칠성단 앞에 있는 책바위, 그 왼쪽의 감투바위, 그리고 오른쪽의 칠성바위와 그 사이의 약수가 신령스러움을 더해준다.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혜국사에 피신할 때 쉬어간 이곳에서 기원하면 천기. 지기. 수기등의 응집된 기를 받아 소원이 성취될 뿐만 아니라 신선이 하늘에 함께 기원헤 주어 장원급하여 매패차고 감투쓰는 벼슬길로 나아가게 된다는 전설이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문경새재 책바위 이야기

 

옛날 인근에 살던 큰 부자가 자식이 없어 걱정인지라 하늘에 치성을 올려 천신만고 끝에 아들을 얻었으나 자식이 자라면서 점점 몸이 허약해져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자 몸을 고치고자 유명하다는 문경의 도사에게 물었다.

'당산 집터를 둘러싼 돌담이 아들의 기운을 누르고 있으니 아들이 담을 직접 헐어 그 돌을 문경새재 책바위 뒤에 쌓아놓고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올려라'라 일렀다.

이후 아들은 돌담을 헐고 삼년에 걸쳐 돌을 책바위까지 나르니 어느새 몸이 튼튼해졌고 공부도 열심히 하여 결국 장원급제까지 하였다. 이후 이곳을 넘나들던 과거객들이 '책바위 앞에서 소원을 빌면 장원급제를 한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지금까지도 건강과 장원급제를 기원하는 영험스러운 곳으로 널리 알려져 많은 사람이 찾고 있으며, 특히 입시철이면 소원성취를 비는 수만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근데 책바위는 어느것인지 모르겠다. 주변 마땅한 바위가 없다,

 

 

 

 

 

 

 

 

 

 

 

 

 

 

문경새재 옛길은 제3관문 조금 아래에서 임도와 합류한다,

2관문 3.5km,

원터 5.2km,

1관문 6.5km

 

 

 

 

 

 

제3관문 조령관

1관문에서 1시간 20분여 소요되었다. 

 

 

 

 

 

 

조령3관문에도 휴게소가 있다.

 

 

 

 

 

 

좌측 약수터 주변이다.

시비의 제목은  '대구 어버이 뵈러 가는 길에 새재를 넘으며,'

 

 

 

 

 

 

조령 약수터.

물맛을 보고 간다.

 

 

 

 

 

 

약수터 인근에서 바라본 3관문

 

 

 

 

 

 

조령 3관문을 지나면  괴산군 연풍면이다.

괴산쪽에서 바라본 3관문이다.

 

 

 

 

 

 

조령의 유래

 

백두대간의 조령산과 마패봉 사이를 넘는 이 고개는 옛 문헌에는 초점(草岾/ 풀 초, 재 점)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조령(鳥嶺)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어원은 풀(억새)이 우거진 고개,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또한 하늘재(麻骨嶺)와 이우리재(伊火峴 /저 이, 자갈 현) 사이에 있다고 해서 새(사이)재 혹은 새(新)로 된 고개라서 새재라고도 한다. 조령은 조선시대에는 영남과 한양을 잇는 중요한 길목으로 영남대로라 불렀으며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충청북도 - 연풍-문경 - 상주 - 대구 - 동래 - 부산진

 

 

 

 

 

 

과거 길,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은 남쪽의 추풍령과 북쪽의 죽령 그리고 가운데 새재(조령)가 있는데 영남의 선비들은 문경새재를 넘었다고 한다.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과 같이 떨어지고 죽령을 넘으면 미끄러진다는 선비들의 금기가 있어 영남의 선비들이 과거급제를 위하여 넘던 과거길이다.

선비상 뒷편으로 탐방로가 보인다.

 

 

 

 

 

 

고사리 주차장으로 내려간다.

 

 

 

 

 

 

위 선비상이 있는 뒷편의 탐방로를 따르면 이곳으로 내려오지 싶다.

 

 

 

 

 

 

조금 아래 조령휴양림 갈림길이 있다.

좌측 길로 내려온 셈이다.

 

 

 

 

 

 

몇 상가를 지난다.

 

 

 

 

 

 

괴산군 연풍면쪽은 문경쪽에 비하여 찾는 사람도, 상가도 적다.

탐방로 관리상태도 문경쪽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소흘하게 관리하는 느낌이다.

 

 

 

 

 

 

조령 3관문에서 중간 휴식시간 포함 40분쯤 소요되어 고사리 주차장으로 하산하여 오늘 일정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