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지역의 산

공주 중동성당, 효심공원, 역사박물관, 독립운동기념관, 유관순열사상, 반죽동 당간지주, 제일교회, 풀꽃문화관, 고마나루, 메타세콰이어숲길, 수촌리 고분군, 김옥균선생 유허

정헌의 티스토리 2024. 4. 22. 21:22

■공주 중동성당, 효심공원, 충청남도역사박물관, 공주독립운동기념관과 유관순열사상, 중학동 구 선교사가옥, 반죽동 당간지주, 공주 제일교회, 공주 풀꽃문화관, 고마나루, 메타세콰이어숲길(장안천생태공원), (한국민속극박물관), 수촌리고분군, 김옥균선생유허

 

금차 농특회 모임을 공주 정안에서 갖는다. 저녁 시간대에 모임이어서 조금 일찍 출발하여 공주지역 몇 군데를 둘러보기로 한다. 

공주의 대표적 관광지인 공산성, 송산리 고분군(무령왕릉)과 공주박물관 등은 과거 몇 번 둘러본 적이 있어 오늘은 공주시내 근대문화 역사를 둘러 볼 수 있는 몇 곳과 정안으로 가는 길목의 메타숲길, 한국민속극박물관, 수촌리 고분군 등을 찾아보는 것으로 일정을 잡는다. 

이튿날 공주시내 황새바위성지, 연미산자연미술공원, 석장리 구석기 박물관을 둘러보고, 금강수목원은 입구만 확인하고 세종 국립수목원으로 이동하였다.

공주시 남쪽에 위치한 금확생태공원,우금치 전적지, 입림미술관, 신원사, 지당 자연사박물관과 논산 온빛자연휴양림, 반야사 등과 연계하는 것도 마음에 두었지만 국립세종수목원으로 방향을 잡는 바람에 다음 기회로 미뤄야겠다.

 

 

▷가는 길

 

 

 

▷탐방코스(2024. 4. 20.)

공주 중동성당 - 일미당 중식 - 효심공원 - 충청남도역사박물관 - 양명중.고등학교 공주독립운동기념관, 유관순열사상 - 중학동 구 선교사가옥 - 반죽동 당간지주, 제일교회 - 풀꽃문화관 - 고마나루 - 메타세콰이어길 -(한국민속극박물관 외관) - 수촌리고분군 - 김옥균선생 유허

다음날, 고마나루 -황새바위 성지 -연미산 자연미술공원 - (금강수목원 외관) - 국립세종수목원 - 이응교

 

 

▷탐방후에

 

▣중동성당

중동공용주차장에 주차한다.

이곳은 중동성당, 효공원 등 들머리라 할 수 있으며. 토. 일요일은 무료로 개방하고 있다.

 

 

 

 

 

중동성당 입구.

인근에서 첨탑 등 성당의 위치가 가늠되므로 방향을 잡기는 쉬우며, 도로(국고개)를 사이에 두고 중동성당과 충청남도 역사박물관이 마주하고 있다.

 

 

 

 

 

이곳 들머리는 계단으로 되어 있어 성당으로 오르는 정문은 아닌가 보다.

계단은 경사가 제법 있다.

 

 

 

 

 

중동성당은 야트막한 동산위에 건물로는 성당 본당과 사제관이 있으며 마당가 성모상과 최종철 신부 가묘등이 있는 넓지않은 면적에 고목의 숲이 우거져 있다.

 

 

 

 

 

 

공주 중동성당은 공주 지역 최초의 천주교 성당 건물이다.

1897년 프랑스 선교사 기낭(Quinand)이 초대 신부로 부임하여 중동에 부지를 마련하였고 1898년 기와로 성당과 사제관을 지은 뒤, 1937년 최종철 신부가 고딕식으로 성당과 사제관, 수녀원을 완공하였다. 현재는 본당과 사제관이 남아 있다.

본당은 전통적인 목조 건축에서 현대 건축으로 넘어가는 시기의 고딕 양식 건축물과 외관은 붉은 벽돌로 마감되었고, 현관 꼭대기에는 종탑이 세워져 있다. 현관 출입구와 창의 윗부분은 뾰족한 아치로 장식되어 있다.  2층 건물인 사제관은 벽돌로 마감한 좌우 대칭 구조이다.

중동 성당은 공주를 비롯한 충남 일대에 천주교을 전파하는 중심지였고, 단아하면서 고전적인 아름다움이 돋보인다. 현재는 교육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성당의 문을 밀어보니 닫혀있어 외관만 본다.

 

 

 

 

 

사제관

 

 

 

 

 

이곳 중동성당은 동산 위에 건축되어 있어 남쪽으로 조망이 트인다.

도로(국고개)를 사이에 두고 충청남도 역사박물관과 이웃해 있다. 영명 중고등학교 건물도 보이는 능선상 뒷편에 위치한다.

 

 

 

 

 

좌측편 나란히 두개의 비각이 보이는 곳이 효공원이다.

규모는 작다.

 

 

 

 

 

성모 마리아님

 

 

 

 

 

묘지설명

 

이 묘는 중동성당을 지으신 최종철(일구) 마르코 신부님의  하악골(아래턱뼈)을 안치하여 2008년 8월 19일 복원된 무덤입니다.

최 신부님의 유해는 교구방침에 의하여 2003년 4월 9일 전의 신학교 성직자 묘지로 이장되었습니다.

<현지 안내문에서>

 

가묘 좌측에는 최종수 요한 순교비가 있다.

 

 

 

 

 

사제관.

잠시 외관만 둘러본 중동성당이다.

 

 

 

 

▣ 효심공원.

 

 

새즈믄해 기념거리

충남 역사박물관 들머리에 조그만하게 자리하고 있다.

 

 

 

 

 

효열문

 

이곳 효심공원은 공주지역의 효자로 널리 알려진 향덕과 이복의 이야기를 주제로 조성되었다.

우리나라 기록상 최초의 효자 향덕과 국고개 전설의 주인공 이복의 효행을 기리는 효행비는 윗단에, 아랫단에는 효와 관련된 부조와 더불어 효열문, 효원탑, 효행상, 행복가족상 등의 조형물 4점이 설치되어 있다.

 

 

 

 

 

 

우측은 향덕, 좌측은 이복의 비각이 나란히 있다.

 

 

 

 

 

향덕은 신라 경덕왕때 부모가 가난과 병에 시달리자 자신의 살을 베어 봉양하는 등 지성으로 모셨다. 이에 왕이 향덕에게 벼 300석, 집과 토지를 하사하고 비석을 세워 효행을 널리 알리도록 하였다. 이후 향덕이 살던 마을을 효가리(孝家里)라 하였다.

 

 

 

 

 

공주 소학리 효자 향덕비

삼국사기에 기록된 효자인 향덕의 효행을 기리는 비석으로 원본은 공주시 소학동 76-7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본 비석 및 비각은 2016년 효심공원을 조성하면서 향덕의 효 이야기를 기리고자 모사본으로 제작하였다.

 

비각안의 오른쪽 비는 더 오래된 것으로 윗부분이 잘라져 아랫 부분만 남아 있으며, 비의 내용에 중립(重立)이라는 문구가 있어 경덕왕 때에 세운 비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왼쪽의 비는 영조 17년(1741)에 충청도 관찰사 조영국이 비문을 다시 써서 세운 것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이 비는 고려시대 향리인 이복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고려 말엽에 세원진 것으로 본래는 옥룡동 비선머리에 방치되어 있었는데, 1978년에 새로운 행적비와 함께 옥룡동 산7번지(옥룡동사무소 서남쪽)으로 옮겨졌다가 2016년 공주 효심공원이 조성되면서 이곳으로 다시 옮겨졌다.

 

 

 

 

 

이복에 대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처음 보이는데 고려의 아전이었고 효자였다는 기록만 있을 뿐이다.

그 이후에 작성된 기록에도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다. 다만 효자 이복의 행적을 알 수 있는 전설과 이복이 어머니를 위해 들고 가던 국그릇을 엎었다 하여  "국고개"라 한다는 지명 유래에서 이복의 행적을 짐작할 수 있다.

<이상 현지 안내문에서> 

 

효심공원을 둘러보고 공원뒷편 일미당이란 식당(국수, 만두국 전문점)에서 간단히 요기를 하고 충남 역사박물관을 둘러본다.

 

 

▣충청남도 역사박물관

 

효심공원 바로 앞에 있다.

 

 

 

 

 

효심공원에서 오르는 계단 옆에 엘리베이트를 설치하여 노약자의 편의롤 도모하였다.

 

 

 

 

 

계단을 오르면 저만큼 역사박물관이 있다.

 

 

 

 

 

박물관 1층은 충청남도와 관련된 도서를 비치했다.

 

 

 

 

 

 

 

 

 

 

 

 

2층으로 오른다.

 

 

 

 

 

 

 

 

 

 

 

 

충청도 관찰사.

전근대 왕은 모든 지역을 혼자서 통치할 수 없었으므로, 각 지역에 왕을 대신하는 지방관을 파견했다. 그리고 지방관을 통솔하는 상위 관직을 두었다. 조선시대에는 이를 관찰사라 하였는데, 이 명칭은 1466년(세조12)에 개칭되어 조선 말기까지 쓰였다.

 

관찰사는 고려시대 유사 관직인 안찰사와 달리 지방에 상주하였으며, 임기도 조선시대 지방관인 수령과 동일하게 2년이 되었다. 품계는 종2품으로, 일반적으로 정3품~종6품의 품계를 갖는 수령들보다 높은 지위에 있었다. 또한 관찰사는 보통 각도 핵심 지역의 수령을 겸직했댜. 이에 따라 관찰사의 청사인 감영은 자연스럽게 각도 핵심 지역 관청 역할도 하였다. 관찰사는 주기적으로 도내 각 지역을 순회하며 수령들을 감찰하고 도내 행정과 군사, 사법을 총괄하는 역할을 맡았다.

 

 

 

 

 

충남 명현과 명사

충청남도 지역은 예로부터 비옥한 농경지이자 교통의 요충지였다, 이에 이 지역에는 예로부터 이름난 종가가 자리 잡았고 명사들이 모여들었다.

화첩에 수록된 인물 중에는 이 지역의 대표적인 문중인 기계유씨. 은진송씨, 파평윤씨, 풍양조씨, 한산이씨가 확인된다.

또한 여러 명사들이 적을 둔 곳이기도 하다 그 중 세조 즉위에 반대한 생육신 중 한명인 김시습은 말년에 불교에 귀의한 후 현재 부여군에 있는 무량사에서 생을 마감했고. 숙종때 이름난 정승 남구만은 소론의 핵심 인사였으며, 희빈 장씨와 관련된 일로 70이 넘은 나이에 현재 아산 지역으로 잠시 유배를 오기도 했다.

 

 

 

 

 

절도사는 지방군 통솔을 위해 관찰사 외에 파견한 관직이다.

절도사는 지방군을 지휘하고 유사시 전투에도 참여하는 도 단위 부대장이라 할 수 있는데, 육군부대장이라고 할 수 있는 병마절도사, 해군부대장 격인 수군 절도사 두 가지로 나뉜다. 

병마절도사는 기본적으로 각도 관찰사가 병마절도사를 겸직했다. 따라서 관찰사를 겸병사라고 칭하기도 했다.

 

 

 

 

수령은 조선시대 중앙정부에서 파견한 지방관 중 관찰사를 제외한 모든 관리를 지칭한다. 게다가 관찰사는 대체로 경기도를 제외하고 도내 핵심 관직을 겸임했으므로 수령은 사실상 조선시대 거의 모든 지방관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행정구역을 부, 목, 군, 현으로 정비하고 모든 지역에 지방관을 파견했다. 그리고 지방관 품계를 일률적으로 정비했으며, 관찰사 등 특별한 직무나 사유가 없다면 지방관이 다른 지역 사무를 겸임하지 않도록 했다. 이에 따라 지방관이 말단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어사

조선 왕은 각지에 지방관을 파견하여 말단까지 통치력이 미치게 했다. 하지만 때로 홍수, 가뭄 등의 자연재해나 반란, 지방관의 부패 등으로 인하여 지역 민심이 동요하기도 하였다. 또한 특정한 정책을 시행한 후에 현황을 파악할 필요도 있었다. 이 때 왕은 사태 파악, 문제 해결, 민심 수습 등을 위해 임시직인 어사를 파견하였다.

일반적으로 어사는 고위관료 협의 기구인 의정부나 비변사에서 추전한 관료를 왕이 임명하여 파견했다.

 

 

 

 

 

 

호서 산림

조선시대 충청도는 호서로 불렸는데, 호수의 서쪽이라는 뜻이다. 호서에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무를 맡지 않고 민간에서 학계와 정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들이 많았다. 이들을 산림이라고 칭했다. 산림은 산골에 숨어 살면서 독서하는 선비(山林讀書之士)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심원 충신 정려 현판(충신 주계군 심원지려)

조선 성종~연산군 때의 문신인 이심원(1454~1504)의 충절을 기리는 정려 현판이다. 이심원은 김종직의 문인으로, 성질이 엄정하고 학문과 의술에 정통하였다. 성종9년(1478) 주계부정에 제수된 후 성종 18년(1487)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정의대부에 임명되었다. 고모부인 임사홍 부자의 간사한 시실을 알고 성종임금에게 임사홍을 중요한 자리에 쓰지 말 것을 다섯차례나 상소로 올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로 인해 1504년(연산군 10) 심사홍 등 간흉배들이 갑자사회를 일으킬 때 모함을 받아 두 아들 이유령, 이유반과 함께 참혹한 화를 입었다. 1518년(중종 14) 조광조. 정광필 등의 상소로 죄를 면하고, 주계군으로 증직되었다. 이후 홍록대부로 추증되어 그의 충절을 기리는 정려문이 세워졌다.

 

 

 

 

 

왼쪽 금동관모(공주 수촌리 출토)

동 바탕재료에 금도금하여 제작한 관모이다. 무덤의 주인의 사회적 지위를 보여주는 위세품으로서, 백제의 중앙과 지방세력이 관례를 맺으면서 생긴 매개물로 이해된다. 수촌리 1호분과 4호분에서 출토된 금동관모는 5세기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형태와 문양으로 볼 때 그 중에서도 위계가 높은 사람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오른쪽 금동 신발 역시 공주 수촌리 고분에서 출토되었다.

동판에 금도금한 금동신발 한 쌍으로 오른쪽은 피장자의 발에 신겨진 채로 발굴되었으며, 왼쪽은 심하게 파손된 상태로 발굴되었다. 전체적으로 검푸른 녹으로 덮여있던 것을 복원한 복원품이다.

 

 

 

 

 

토착세력과 위세품

한성기 백제는 지방 세력에게 금동관으로 대표되는 위세품을 제작, 수여했다.

이를 통해 지역 주요 거점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고,

지방 귀족 세력을 중앙 지배체제 안으로 포섭하기 위한 목적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따라서 백제 금동관이 출토되는 무덤의 주인은 지방의 유력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속 충청남도

 

 

 

 

 

충청남도 서원

 

 

 

 

 

한산모시

한산은 다른 지역에 비해 기온이 높고 습하며, 토지가 비옥하여 모시의 품질이 우수하다.

한산 모시는 우리나라 전통섬유로서 역사적 가치가 높아,

2011년 모시 제작 기술을 보호하고자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좌측 이기세 도지사 당선통지서

우측 상부 충청남도지사 이기세가 소속공무원에게 준 지표

 

 

 

 

 

 

크기를 축소 하여 제작한 것 같다.

 

 

 

 

 

금영총록과 호패

금영총록은 충청감영에 소속된 역의 현황과 호구. 결전. 각종 세수 등에 대한 총 목록으로 관찰사가 도내 제반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작성된 문서이다.

좌측 호패는 이렇게 생겼다.

 

 

 

 

 

김이교 초상

조선후기 공조판서, 예조판서, 우의정 등을 역임하고 신미통신사로 일본에 파견되었던 문신이다.

 

 

 

 

 

임감호성도

 

 

 

 

 

세계기록유산

신미통신일록(辛未通信日錄)

신미통신일록은 '여정에 대한 기록' 한국측 소장자료로서 1건 3점이 등록되어 있다. 전체 3책(天.地.人)으로 필사본이며, 1책 96면, 2책은 108면, 3책은 102면으로 면당 10행 20자로 구성되어 있다.

책 안에는 1911년 양국 간 사행(使行)에 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된 때로부터 대마도에서 외교활동을 끝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과정까지 담고있다. 따라서 양국외교사절간 의례. 상호간에 주고 받은 물품과 회예단, 그리고 각종 복귀 과정에서 작성된 공문서가 주를 이룬다.

 

 

 

 

마을과 민속문화

이상 사진에 대한 캡션은 현지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영명중.고등학교 공주독립기념관과 유관순 상

 

저만큼, 영명중.고등학교 정문인 셈이다.

입구 우측편에 조그만 주차장이 있다.

 

 

 

 

 

좌측으로 조그만 동산을 둘러보고,

 

 

 

 

 

공주독립운동기념관이 영명중고등학교 정문역할을 한다.

 

 

 

 

 

2층으로 올라왔다.

규모는 자그만하다.

 

공주의 동립운동가들

영명학교와 3.1만세운동, 영명학교의 독립운동가 양성, 영명학교의 의미와 교육, 설립과정 등이 설명되어 진다.

 

 

 

 

 

 

 

 

 

 

 

 

독립운동기념관

공주지역의 독립운동은 한말 의병전쟁으로 시작되었고, 이후 오강표와 이학순의 자결 순국, 청림교의 비밀결사와 독립의군부 활동으로 이어진다. 대한제국기의 국권회복운동은 3.1만세운동으로 이어져 공주 시장과 유구시장, 석송리, 우성면, 장기면에 대한독립만세을 울려 퍼지게 했다. 1920년대와 30년대는 농민운동과 청년운동, 학생운동이 전개되었고, 국내 뿐 아니라 국외에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내걸고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공주의 독립정신은 오늘을 사는 우리의 삶 속에서 별처럼 빛나고 있다.

 

 

 

 

 

성명 : 최태식

본적 : 공주군 정안면 운궁리

출생지 : 공주군 정안면 운궁리

생년월일 : 1901년 10월 4일

죄명 : 보안법

 

성명 : 정진억

본적 : 공주군 우성면 봉헌리

출생지 : 공주군 우성면 봉헌리

생년월일 : 1920년 5월 28일

죄명 : 국가총동원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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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층은 사무공간? 체험실?

 

 

 

 

 

유관순 열사상으로 간다.

 

 

 

 

 

유관순 열사 상

 

 

 

 

 

시애리시 (한국명  / 본명 앨리스 헤먼드 샤프) 선교사

 

1871년 캐나다 노바스코샤에서 출생

1900년 미국감리회선교연합회 소속으로 한국에 파견되었다. 동료 선교사였던 캐나다 출신 로버트 샤프 선교사와 결혼하여 함께 공주에 파송되었다. 남편 로버트 샤프 선교사는 결혼 후 3년이 지나 장티프스로 별세하고, 시애리시 선교사는 재혼하지 않고 39년 동안 인생의 황금기를 한국 선교활동과 교육에 헌신하였다.

이애리시 선교사는 충청 일대에 20여개의 유치원과 보통학교 등 각종 학교를 설립하여 우리나라 근대 교육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특히 현 공주 영명중.고등학교의 전신인 영명여학교에서 유관순 열사, 한국 최초 여성경찰서장 노마리아, 성악가이자 독립운동가인 박화숙 등 많은 여성 지도자를 배출하였다.

그는 천안 병천면 매봉교회에서 총명한 시골소녀 유관순을 만나 수양딸로 삼고, 공주로 데려와 1914년 영명학당 보통과에 입학시켜 2년동안 학업을 도왔다. 이후 이화학당 재학 중은 물론 감옥에 갇힌 유관순을 뒷바라지하였다.

 

1939년 68세에 일제의 강압으로 미국으로 가서 말년을 캘리포니아주 파시데나에 있는 은퇴 선교사 요양원에서 지냈다. 시애리시 선교사는 당시 닉슨 미국대통령과 레이건 캘리포니아 주지사의 축하편지와 함께한 그의 100세 축하연에서 "한국에서의 39년 선교사역은 만족과 기쁨이었다"라고 표현하였다, 그는 1972년 향년 101세로 별세하였다.

 

 

 

 

 

중동 공공주차장에 주차하고 도보로 중동성당, 효심공원, 충남역사박물관, 영명중.고등학교 독립운동기념관과 유관순 열사상을 둘러보고 주차장으로 되돌아 간다.

건너편 상부 건물은 중동성당 사제관이다.

 

 

 

 

 

중동시장쪽 골목

시간이 되면 둘러보아도 좋을 것 같다.

 

 

 

 

▣ 공주 중학동 구 선교사 가옥

 

 

중학동 구 선교사 가옥은 영명 중고등학교에서 멀지않은 곳에 위치하여 도보로 이동할 수도 있으나 조금이라도 시간을 절약하고자 차량으로 이동하였다.

마을? 입구에 소규모 주차장이 있으며, 도로를 따라 조금더 오르면 소형 주차장이 있다,

당일은 비가 보슬보슬 내리고 주변 입구는 공사중으로 전주의 이정표를 보지 못했다.

이곳 이정표에 포크레인이 작업하는 방향으로 선교사 가옥까지 120m로 표시되어 있다.

 

 

 

 

 

올려보이는 저 집이 구선교사 가옥인데,

처음엔 올라가는 길이 어딘지 찾지못해 헤맷다

 

 

 

 

위 구 선교사주택 주차장?을 지나쳐 조금 오니 막다른 곳이다.

산쪽으로 탐방로가 있어 살펴보았지만 선교사 주택으로 가는 길은 아니었다.

 

 

 

 

 

▣ 공주 반죽동 당간지주, 공주 제일교회

 

반죽동 당간지주는 제일교회와 도로를 사이에 두고 접하여 있다.

따라서 제일교회 앞 주차장에 주차하고 양쪽을 다 둘러보면 된다.

 

 

 

 

 

당간지주는 사찰의 깃발인 당(幢 / 기당)들 달거나, 야회 법회때 괘불 등을 걸기위해 세운 당간을 지탱하는 돌기동(石柱)이다 이부근에서 대통(大通)이라는 글이 새겨진 기와 조각이 발견되어 이곳에 대통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대통사는 성왕 5년에 세워졌다.

현재의 당간지주는 받침돌에 새겨진 안상(眼象)을 조각한 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현지안내문에서>

 

 

 

 

 

보물 제150호로 지정된 반죽동 당간지주

주변은 소 공원으로 꾸며져있으나 공사로 인해 어수선하다.

 

 

 

 

▣공주제일교회

공주제일교회는 1931년에 세워진 감리교회 예배당 건물이다. 2012년에 새 성전을 지여 예배처를 옮기기 전까지 80년간 예배당으로 사용하다가 2018년부터는 공주 기독교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공주는 미국 북감리회가 조선 선교를 시작하던 초기 1892년부터 중요 선교대상지로 주목된 곳이다. 공주 제일교회는 초기 선교사들이 남부 선교스테이션을 공주에 설치할 때 그 중심교회로 세워졌다. 초기부터 수원 이남 지역 전체를 이끌던 선교본부로서 외국 선교사들이 상주하며 남부의 선교와 공주의 근대문화를 이끌었다.

 

 

 

 

 

 

샤프와 사애리시의 헌신

미국 북감리교회에서 파송된 샤프와 사애리시 선교사 부부는 1904년 공주에서 그들의 사역을 시작하였다. 샤프는 공주 최초의 신교육기관인 명설학당(영명학교의 전신)을, 유관순의 양모이기도 했던 샤프의 아내 시애리시는 여성 최초의 교육기관인 명선여학당을 세웠다. 샤프 선교사는 논산지방 선교를 다녀오는 중에 진눈개비를 피해 상여집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거기서 장티푸스에 감염되어 34세로 순교했다.

 

 

 

 

 

백년이 갈 아름다운 혼례식이 이뤄진 장소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의 박목월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한국적 아름다움과 인간의 깊은 감성을 노래한 청록파 시인 박목월(1915~1976), 그는 1935년 어느날 기차 안에서 고요하고 단아한 아름다움을 지닌 한 여인과 나란히 앉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듬 해, 맞선자리에 나갔다가 또 다시 그 여인과 만나게 됩니다. 여인은 공주 영명학교를 졸업한 독실한 기독교인 유익순, 이들은 바로 이 곳 공주 제일교회 예배당에서 백년가약을 맺었습니다.

 

빼앗간 들에도 봄은 오는가 ' 이상화

망국의 아픔을 달랠 수 없어, 시로 눈물 흘리던 이상화(10901~1943), 그는 이곳 공주 제일교회 맞은편, 공주의 양가댁 처녀 서온순과 혼례를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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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홍식(1871~1939)

1916년8월 공주제일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34세의 늦은 나이에 그리스도교에 입교한 신홍식은 공주 등지의 목회활동을 통해서 충청도의 초기 교회 형성에 큰 공헌을 하였다. 그는 1919년 3.1운동 때에 민족대표 33인 중 기독교 대표였으며, 목사로서는 처음으로 참여 의사를 밝힌 인물이기도 하다. 당시 체포된 그는 법정에서도 일제가 제시한 동양평화론의 허구성을 질타하면서 독립에 대한 확신을 피력하였으며, 2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이후에도 종교운동과 독립운동을 이어간 그에게 1962년에  대한만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공주 풀꽃문학관 /나태주

 

풀꽃문학관으로 왔다.

입구에 주차장이 조성되어 있다.

 

 

 

 

 

안부  / 나태주

 

오래

보고 싶었다.

 

오래 

만나지 못했다.

 

잘 있노라니

그것만 고마웠다.

 

 

 

 

근대 일본풍의 느낌이 나는 건물에 자리 잡았다.

 

 

 

 

 

아담하고 정갈한 문학관을 기대했는데 장소가 비좁아 어수선하다.

이전? 관련 글귀를 본 것 같기도 한데.....

 

 

 

 

 

풀꽃

 

1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2.이름을 알고 나면

이웃이 되고

색깔을 알고나면

친구가 되고

모양까지 알게되면

연인이 된다.

아. 이것은 비밀

 

3.기죽지 말고 살아봐

꽃 피어봐

참 좋아

 

壬寅 여름

나태주 시인의 풀꽃 3수를 정민 옯겨쓰다.

 

 

 

 

 

나태주 시인의 시를 병풍에 심었다.

 

 

 

 

 

 

 

 

 

 

 

 

대숲 아래서

 

바람은 구름을 몰고

구름은 생각을 몰고

다시 생각은 대숲을 몰고

대숲 아래 내 마음은 낙엽을 몬다,

 

밤새도록 댓잎에 별빛 어리듯

그슬린 등피에는 네 얼굴이 어리고

밤 깊어 대숲에는 후둑이다 가는 밤소나기 소리

그리고도 간간이 사운대다 가는 밤바람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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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1세) 서천군 시초면 초현리 외가에서 출생

1957년(12세) 시초초등학교 졸업

1960년(15세) 서천 중학교 졸업

1963년(18세) 공주사범학교 졸업(10회)  / 맞나? 중학교 졸업 후 3년만에 대학을 졸업?

1964년(19세) 경기도 연천 군남초등학교 교사 발령, 김동현과 2인 동인지<구름에게 바람에게> 1집 발간

1971년(26세)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 <대숲 아래서>가 당선되어 데뷔

 

1989년(44세) 청양군 문성초등학교 교감(이후 충남교육연수원 장학사, 논산 호암초 교감)

2002년(57세) 제7회 시와시학상 수상, 한국문인협회 공주지부장(2년)

2007년(62세) 제2대 충남시인협회장, 장기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직

2009년(64세) 공주문화원장 당선,  41회 한국시인협회상 수상(한국시인협회)

2014년(69세) 충남문화원연합회장, 제26회 정지용문학상수상, 공주풀꽃문학관 개관, 제1회 풀꽃문학상 제정

 

 

 

 

 

 

 

 

 

 

 

 

 

 

 

 

 

 

 

문학관 주변엔 풀꽃을 심었다.

 

 

 

 

 

 

 

 

 

 

 

 

 

 

 

 

 

 

 

 

꽃 장엄이란 말

가슴에 벅찹니다.

꽃송이 하나하나가

세상이요 우주라지요

아, 아, 아,

그만 가슴이 열려

나도 한 송이 꽃으로 팡 !

터지고 싶습니다.

 

이천십오년 가을 

화엄이란 글을 적습니다.

나태주

 

 

 

 

 

내부는 다소 어수선하지만 풀꽃처럼 아담한 문학관이다.

 

 

 

 

 

▣ 고마나루

 

황새바위 성지를 생각하다가 시간 안배를 위해 고마나루로 왔다,

크지 않은 공주시내의 송산리 고분군(무령왕릉)과 공주박물관 주변의 위치도 가늠할 겸, 정안면 소재지로 가는 도중 메타세쿼이아 숲길, 한국민속극박물관,  수촌리고분군등을 둘러볼려니 시간 안배가 필요해서 이다.

넓지는 않지만 주차장과 화장실이 설치되어 있다.

 

 

 

 

 

아주 넓은 곳은 아니어서 곰사당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고마나루는 송산리고분군 서쪽에 있는 금강변과 나루터 일대를 가리키는 말로 인간과 곰에 관한 전설이 전해 오는 명승지이다.

역사 속의 고마나루는 곰나루라고도 불렸으며, 한자어로는 웅진(熊津)이라고 하였다, 신라 신문왕 때는 웅천주라고 하였고 경덕왕 때는 웅주라고 하였는데 고려  태조 때(940년) 공주로 이름을 고쳐 오늘에 이른다.

고마나루는 백제 수도의 주요 통로이자 물길과 물길이 만나는 지점으로 1010년에는 고려의 현종, 1624년에는 조선이 인조가 이 나루를 통해 공주에 둘어왔다는 기록이 있다.

660년에는 나당연합군을 이끈 당나라 장군 소정방이 백제를 공격하기 위해 금강을 거슬러 와 자리잡은 주둔지이기도 하다.

현재까지도 고마나루에는 금강을 지키는 신에게 제사를 올리던 웅진단 터가 남아 있어 조선에 이르기까지 국가적 제사 공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마나루는 금강변 백사장이 있는 강 언덕과 수백여 그루의 소나무 숲, 굽이치는 금강, 연미산 등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고 있다.

 

 

 

 

 

소나무 숲이 좋다.

 

 

 

 

 

곰사당.

 

금강에 빠져 죽은 암곰과 새끼 곰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제를 지낸 사당이다. 앞마당에 있는 웅신단비에는 곰과 인간에 얽힌 전설이 적혀 있다. 1972년에 백제 때의 유물로 추정되는 돌곰이 웅진동에서 출토되어 현재 공주박물관에.....

조선 시대 향교의 대성전을 본떠 소박하게 건축하였으며 야트막한 담장과 아늑한 솔숲이 어우러져 신묘한 기운을 자아낸다.

 

 

 

 

웅신단(熊神壇)

 

 

 

 

 

고마나루와 돌 곰상

 

지난 1972년, 송산리 고분군 주변 밭에서 돌 곰상이 발견되었습니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돌 곰상은 국립공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고마나루 솔숲에 조성된 곰 사당에도 모형이 있습니다.

돌 곰상의 정확한 내력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백제 시대에 만들어진 유물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 신앙적인 의미가 담긴 소품이거나 무덤에 넣기 위해 만들어진 부장품이라는 의견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백제 시대의 사비, 즉 현재의 부여에서 흙으로 만든 곰상이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부여 구아리 건물터에서 발견된 흙 곰상의 크기와 재료는 돌 곰상과 다르지만 기본적인 모양이 비슷하므로 무덤에 넣는 부장품, 즉 진묘수로 보기도 합니다.

<현지 안내문에서>

 

 

 

 

 

웅신단비

금강의 물이 남동편으로 휘어돌고

餘美山 올려다뵈는 한갓진 나루터

공주의 옛 사연 자욱하게 서린 곳

입에서 입으로 그냥 전하여온 애틋한 이야기

아득한 옛날 한 남자?? 큰 암곰에게 몸이 붙들리어

어느덧 애끼꺼자 얻게 된다.

허나 남자는 강을 건너버리고

하늘이 무너져 내린 암곰

자식과 함께 강물에 몸을 던진다.

여긴 물살의 흐름이 달라지는 곳이여서

배는 자주 엎어지곤 하였다.

곰의 영혼 탓일까 하고 사람들은 해마다 정성을 드렸는데

그 연원 멀리 백제에  까지 걸친다. 

공주의 옛 이름  熊津 고마나루

그 이름 여기에 아직 있어

백제때 숨결을 남기고 있다.

 

공주사범대학 백제문학연구소  찬 

 

 

 

 

웅진 백제, 금강을 통한 국제 교류로 문화 강국이 되다

 

웅진으로 천도한 후 백제는 금강을 통한 해상 무역으로 풍부한 경제적 이익을 거두며 다시 한번 문화 강국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1971년에 발굴된 무령왕릉에서는 백제가 신라 및 일본과 활발하게 교류했음을 알려주는 국보급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2015년 7월, 공산성과 송산리 고분군이 세계 유산으로 등재된 배경에는  "백제가 중국으로부터 도시 계획, 건축 기술, 예술, 종교를 받아들여 더욱 발전시킨 뒤, 일본과 동아시아에 전해 주었음을 증명한다"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는 웅진 백제시대 고마나루가 금강의 나루터로써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현지 안내문에서>

 

 

 

 

 

기다림

돌아오라는 애원을 외면하고 강을 건넌 님에 절망한 곰은 강물에 몸을 던졌다.

2010년

작가 김대열

 

 

 

 

 

천리 물길의 중간 정류장, 고마나루의 번영과 발전

강변 포구를 활용한 수운이 발달했던 시절, 고마나루는 전막. 강깃대 나루터 등과 함께 금강을 대표하는 나루 중 하나였습니다. 고마나루는 사방으로 연결되어 있는 교통망 덕분에 조선시대에는 상업의 중심지로서 명성이 높았습니다. 특히 1910년에는 공주와 군산을 정기적으로 항해하는 노선이 생겨 더욱 활기를 띠었습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에 접어들고 근대 교통수단이 도입되기 시작하면서 고마나루는 점차 기능이 줄다가 일제 강점기 이후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이후 고마나루는 유구한 역사 문화유산을 간직한 명승지의 가치를 인정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현지 안내문에서>

 

 

 

 

 

행복한 오후

나무꾼과 정을 나눈 곰은 두 마리 새끼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2010년

작가 서옥재

 

 

 

 

 

 

 

 

 

 

 

 

 

 

 

 

 

 

 

 

 

 

 

 

웅진수신지단(熊津水神之壇)

 

웅진단과 수신제

웅진단 제사는 처음에는 곰에 대한 제사였으나 점차 수신(水神)에 대한 제사로 성격이 변화되었습니다. 조선 시대 웅진단 제사는 연 2회에 걸쳐 다른 산천제와 함께 한번에 치러졌는데, <세종실록>에서는 이 제사를 곰 신이 아닌 용왕 신에 대한 제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민간에서는 여전히 곰에 대한 제사라고 생각했으며 일제 강점기를 살았던 분의 증언에 따르면 해마다 정월 대보름에 마을 사람들이 웅진단에서  00을 드렸고 제사상에는 곰이 좋하하는 도토리묵과 마를 올렸다고 합니다.

지난 2011년  인근 지역을 발굴조사 한 결과, 조선시대 웅진단 건물터가 확인되었습니다.

<현지 안내문에서>

 

 

 

 

 

 

 

 

 

 

 

 

 

 

 

 

 

 

 

 

 

 

 

 

 

 

천천히 걸어도 20분이면 충분히 둘러볼 수 있다.

 

 

 

 

▣메타세쿼이어 숲길(장안천 생태공원)

 

메타세쿼이아 숲길을 보러 왔다.

네비에 메타세쿼리아 숲길을 입력하고 진행하면 메타숲길 입구 주차장으로 안내한다. 일부 내비는 메타세쿼이어 숲 길 중간쯤에 있는 공주시 종합사회복지관으로 안내할 수도 있으나, 입구 주차장에 주차하는 것이 더 낫다.

 

 

 

 

 

장안천 둑방?을 따라 메타세쿼이아 숲길이,  하천쪽으로 연못이 조성되어 있다.

 

 

 

 

 

메타 숲길을 걷는다.

 

 

 

 

 

좌측 연못, 그다음 하천

 

 

 

 

 

 

 

 

 

 

 

 

 

 

 

 

 

 

 

길지는 않지만 최근 황토길도 조성했다.

 

 

 

 

 

중간 공주시 종합사회복지관이 있다.

요즘 노인네 인기짱인 파크골프장도 있다.

 

 

 

 

 

당진 - 영덕 고속도로 조금 못미쳐 메타 숲길은 끝난다.

숲의 길이는 편도 0.3km쯤  전후가 될 것 같다.

 

 

 

 

 

 

 

 

 

 

 

 

메타숲길외  연못과 장안천변을 따라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으나 조금 엉성하다.

 

 

 

▣한국민속극박물관

공주시 의당면 청룡리 357-3번지에 위치한다,

위치를 확인하고 입구가 뭔가 어수선하여 들어가 보지는 않았다.

들머리 김종서장군묘 안내 이정표가 있으나 거리가 조금 된다. 귀가후 검색해 보니 세종시 장군면 대교리 237번지에 김종서역사테마공원이 조성중(2024.11월 예정)이고 뒷편에 김종서 장군 묘가 있다.

 

 

▣공주 수촌리 고분군

 

수촌리 고분군으로 왔다.

도로변에 주차장이 조성되어 있으나 입구에서 소로를 따라오르면, 조금 윗쪽에 화장실과 주차공간이 있다.

(공주시 의당면 수촌리 221-8)

 

 

 

 

 

대충 주변을 가늠해 본다.

 

 

 

 

 

공주 수촌리 고분군은 청동기 이후의 집터와 초기 철기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의 고분이 자리 잡고 있는 무덤 유적지이다.  2002년 유적의 존재가 처음 알려졌으며, 2003년부터 이루어진 발굴 조사에서 다양한 유구( 옛날 토목 건축의 구조와 양식을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되는 자취)와 유물이 확인되었다.

고분군은 지형에 따라 크게 1구역과 2구역으로 나뉜다.  1구역에서는 청동기시대 주거지, 초기 철기시대 널무덤, 백제에서 통일신라에 걸치는 돌덧널무덤과 돌방무덤 등이 확인되었다.  2구역에서는 백제 대형 덧널무덤, 앞트기식 돌방무덤, 굴식 돌방무덤, 구멍식 돌덧널무덤 등이 확인되었다.

이곳은 475년 백제가 웅진(현 공주)으로 도읍을 옮기기 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백제의 묘제(묘에 대한 관습이나 제도)가 변화하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특히 백제의 무덤에서는 금동관모와 귀걸이 등 장신구와 무기, 마구, 중국제 자기와 같은 화려한 부장품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유물은 백제 중앙정부가 지방의 귀족에게 내린 물품으로 4~5세기 백제의 중앙과 지방의 상호 관계를 보여준다.

<현지 안내문에서>

 

 

 

 

 

처음 만나는 곳이 제2구역이며, 

북동쪽으로 몇백미터 떨어진  상부의 무덤군이 제1구역이다.

현재 외경상으로 보이는 봉분은 현행 공동묘지의 봉분과 비슷하거나 일부 조금 큰 정도로 여타 지역에서 볼 수 있는 대형 봉분을 기대하면  곤란하다.

 

 

 

 

 

수촌리 고분군 내에서 출토된 금동관모와 금동으로 만든 장식품은 무덤에 묻힌 사람의 신분을 나타내는 중요한 유물이다.

금동관모 2점(1호분 움무덤, 4호분 굴식돌방무덤), 금동 신발 3쌍(1호분 움무덤, 3호분 돌덧널무덤, 4호분 굴식돌방무덤)이 출토되었다. 3호분 돌덧널무덤에서  출토된 금동신발에는 사람의 발 뼈가 확인되었다.

같은 유적 내에서 2점의 금동관모가 출토된 것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있는 일로 이는 수촌리 일대가 지방세력이 오랜 시간 활동했던 백제의 중요 근거지였음을 보여준다,

무덤의 양식이나 함께 묻은 껴묻거리의 내용으로 볼 때 수촌리 고분군은 한성시기(기원전 18~475) 백제의 중앙문화를 받아들이고 중앙으로부터 최고 권위를 인정받은 지배 세력의 무덤군으로 볼 수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1구역으로 방향을 잡는다.

 

 

 

 

 

저만큼 1구역이 가늠된다.

 

 

 

 

 

 

 

 

 

 

 

 

 

 

 

 

 

 

 

1구역 상부에는 데크를 설치하여 고분을 조망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수촌리 고분군 1구역

 

공주 수촌리 고분군 1구역은 수촌리 고분군의 북쪽 구릉에 해당하는 무덤 유적지이다. 이곳에서는 청동기시대 주거지와 초기 철기시대 널무덤, 백제에서 통일신라로 넘어오는 시기의 돌덧널무덤과 돌방무덤 등이 확인되었다.

일반적으로 백제 무덤은 몇 기의 대형 무덤 주위에 중소형 무덤이 분포하는데 이러한 구조는 1구역에서도 나타난다.이 외에도 고려. 조선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널무덤 10여기가 있으나 출토된 유물이 없어 대부분 정확한 연대를 파악하기 어렵다,

초기 철기시대의 널무덤에서는 세형동검과 칼자루 장식품이 출토되었으며, 초기 철기시대의 대표적인 토기인 덧띠무늬토기와 긴목항아리도 함께 출토되었다. 이것은 청동기시대로부터 초기 철기시대로 이행되는 과정과 부장 유물의 변화상을 살필 수 있는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또한 백제 무덤은 백제가 웅진으로 수도를 옯기기 전에 공주에 살았던 유력자의 무덤으로 추정되는데, 공주 지역 백제 무덤의 변천 과정을 파악할 수 있는 유적으로 평가된다.

<현지 안내문에서>

 

 

 

 

일반적으로 봉분은 능선을 따라 세로로 갸름한데 가로로 갈게 배치된 봉분이 제법 많이 보인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사는 지역의 고분군도 가로로 복원된것 이 여럿 있다.

 

 

 

 

 

봉분의 크기가 작아 고분의 느낌은 덜하나 지형이 완만하여 산책하기 좋다.

 

 

 

 

 

되돌아 간다.

 

 

 

 

 

이곳에서 화장실 쪽으로,

 

 

 

 

 

우중이라 대충대충 둘러보니 20분 정도 소요되었다.

 

 

 

 

 

▣김옥균 선생 유허

 

이곳은 김옥균이 태어나서 살던 곳으로, 원래는 10여 가구가 모여 사는 작은 마을이었는데 불이 나면서 모두 없어졌다.

김옥균은 고종 21년(1884)에 갑신정변을 일으켜 개화당 정부를 수립하고 개혁을 추진하다가 청나라가 개입하면서 3일만에 실패하였다. 이후 일본으로 망명했지만 일본 정부도 그를 박해하여 귀양을 보내고 추방하였다.

고종 31년(1894)에 청나라 실력자 이홍장을 만나러 상해를 방문했을 때 조선에서 보낸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당하였다. 4개월 뒤 갑오개혁으로 개혁파 정부가 수립되면서 반역죄가 용서되고, 1910년에 규장각 대제학으로 품계가 올랐다.

<현지 안내문에서>

 

 

 

 

 

김옥균(古筠 金玉均 1854~1894)

김옥균은 정안면 광정리 감나무골에서 태어난 조선의 개혁을 꿈꾼 개화사상가다, 본관은 안동, 자는 백온, 호는 고균.고우이다.

어렸을 적부터 남다른 재능을 보인 김옥균은 22세이던 1872년(고종9) 알성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10여년간 사헌부, 홍문관, 사간원 등의 주요 요직을 거치는 등 30세 이전애 중견관료로 자리를 굳혔다.

당시 조선에서는 근대문물과 제도를 수용해 근대화를 추구하는 개화사상이 발아하고 있었는데, 김옥균 역시 1869년 박규수(북학파 거두 박지원의 손자로 개화사상의 시조격인 인물)를 만나 그를 스승으로 모시며 많은 영향을 받았다.

1884년 청.프 전쟁에서 청군의 패배가  지속되자 때를 틈타 조선을 근대적 국가로 탈바꿈 하려는 목적으로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정변으로 정권을 장악했으나 청군의 무력개입과 지지층의 결집을 이끌지 못해 3일 만에 끝나고 말았으며, 정변 실패 이후 김옥균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후 1894년 조선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청나라의 이홍장을 만나기 위해 청나라로 떠났지만 이홍장을 만나기 전 상하이에서 근왕주의자 홍종우에게 피살되었다.

김옥균은 그가 죽고 이듬해 갑오개혁으로 개화파 내각이 들어서면소 죄가 사면. 복권됐으며, 1910년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되고 충달(忠達)의 시호를 받았다.

공주시는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에서 태어나 조선을 개혁하여 부국강병을 이루고 외세를 물리쳐 자주 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던 김옥균의 삶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2021년 2월이 역사인물로 선정하였다.

 

 

 

 

 

 

고균김옥균선생추모비(古筠金玉均先生追慕碑/ 대나무 균)

장안면소재지 북동쪽 근거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