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학 유머

저승빚

정헌의 티스토리 2012. 10. 12. 17:30

                저승빚

 

옛날 어느 곳에 벼슬하다 물러난 대감이 하나 살았다.
그런데 이 대감이라는 사람, 욕심 사납기가 놀부 뺨 칠만 하다.
자기 곳간에 볏섬이 넘쳐 나도 남의 씨나락 됫박을 탐내는 위인이니 할말도 없다.
욕심만 많은 게 아니라 엉큼하기로도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사람이다.
벼슬할 때 백성들 등쳐 먹은 데 이골이 나서 얼렁뚱땅 어르고 속여서 남의 것 빼앗기를 밥 먹듯 한다.

 

 

이 대감이 사는 마을에  가난한 농사꾼이 하나 살았는데,  한해는 흉년이 들어 집에  곡식이 아주 씨가 말랐다.
봄이 돼서 밭에 씨를 뿌려야겠는데 당최 뭐가 있어야지.
사람 먹는 곡식은 둘째치고 씨 뿌릴 곡식도 없는 판이다.
할 수 없이 대감 집에 찾아갔다.

 

 

『대감님, 밭에 뿌릴 씨앗이 없어서 그러니 수수 한 말만 꾸어 주십시오. 가을에 거두면 이자를 쳐서 갚아드리겠습니다』

그랬더니 웬일로 대감이 선선히 수수 한말을 꾸어 준다.
꾸어 주면서,

 

『무슨 일이든 분명하게 하는 게 좋지 않겠나? 내 증서를 쓸 터이니 도장을 찍게나』
하고서 증서를 한장 쓴다. 그까짓 수수 한 말 꾸어 주면서 증서는 무슨 증서 인가 싶었지만 형편이 형편인지라 도장을 찍어 줬다.
그래 놓고 수수농사를 지었다.  마침 그 해는 농사가 잘 되서 수수 한말을  뿌린 것이 가을에 거둘 때는 두

어 섬이나 되었다.

 

 

그래서 이자까지 쳐서 수수 두말을 짊어지고 대감을 찾아갔다.
『대감님 덕분에 올해 수수 농사를 잘 지었습니다.  꾸어 쓴 수수 한말에 이자 한말 쳐서 두말을 가지고 왔

으니 받으십시오』
그랬더니 대감이 펄쩍 뛰면서 하는 말이,
『이 사람아, 내가 언제 수수 한말을 꾸어 줬단 말인가?』

아, 이런단 말이야. 농사꾼이 어안이 벙벙해져서,

 

 

『아니, 지난 봄에 제가 대감께 수수 한말을 꾸지 않았습니까? 그 때 대감께서 증서까지 쓰셨는데요』했다.

그랬더니,
『그 때 자네가 꾼 것은 수수 한말이 아니라 황소 한 마리일세. 여기 증서가  있으니 다른 말은 못할 테지』
하면서 증서를 꺼내 놓는데,  가만히 보니「수수 한 말」이라고 써야할 곳에「수소 한 마리」라고  떠억 써

놨거든. 
암소도 아니고 수소이니 영락없는 황소 아닌가?

 

 

그 때는 경황도 없고 설마 증서를 속이랴 싶어서 제대로 읽어 보지도 않고 도장을 찍어 줬는데, 이 놈의 대

감인지 땡감인지가 그 짓을 해 놨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수수 한 말」을 「수소 한 마리」로 스리슬쩍 비틀어 써 놨으니,  누가 봐도 황소 한 마리를 빌려 간 걸로

 알 게 아닌가?

『아이고 대감,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일인데 왜 이러십니까? 우리 집에  있는 재산이라고는 황소 한 마리

 뿐인데, 그걸 빼앗으려고 이런 수작을 부리십니까? 제발 그러지 마십시오』

 

 

『아, 정 억울하면 관가에다 송사를 내면 될 것 아닌가?』
관가에 가 봤자  원님이 증서를 믿지 저 말을 듣겠나?  게다가 저쪽은 날고 기는 대감이고  이쪽은 무지랭이

농투성인데 무슨 수로 송사를 이기겠나?
하릴없이 황소 한 마리를 고스란히 빼앗겼다.

 

 

그러고 나니 참 억장이 무너진다.
농사꾼한테 소가 어디 보통 짐승인가? 소가 없으면 당장 농사를 못 짓는데.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라더니,

두 눈 멀쩡하게 뜨고 황소 한 마리를 빼앗기고  나니 참 살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래서 이불을 덮어쓰고 끙끙 앓고 있으니 이웃에 사는 사람이 와서 보고는,

 

 

『자네 무슨 일로 다 죽어가는 꼴이 되었나?』하고 물었다.
그래 이러이러해서 소를 빼앗기고 나니 살고 싶은 마음도 없어서 이러고 있노라고 했다.

 

 

이웃 사람이 그 말을 다 듣더니,
『속임수는 속임수로 고쳐야지 다른 방도가 없네.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하게나』
하고 기막힌 속임수를 하나 가르쳐 준다.

농사꾼이 당장 식구들을 불러 모아서 머리 풀고 곡을 하라 이르고는, 방에 병풍을 둘러치고 그 뒤에 가만히

누워 있었다.

 

 

갑자기 곡소리가 진동을 하니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모여들어서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식구들은 가장이 시킨 대로 지어낸 말을 술술 주워 섬기기를,
『아이고, 남편이 갑자기 목을 매 죽고 말았답니다』
『아이고, 우리 아버지가 무슨 억울한 일을 당했는지』
하고 능청스럽게 울어 대니 모두 그 말을 믿을 수 밖에 없다.

 

 

마을 사람들이 장례 치를 준비를 하느라고 법석을 떠는데, 하룻밤이 지나서  날이 밝으니까 농사꾼이

병풍 뒤에서 슬금슬금 기어 나오는 거다.
죽었다던 사람이 되살아 났으니 마을 사람들이 죄다 기절초풍할 것 아닌가?
이 사람이 병풍 뒤에서 기어 나와 가지고 대뜸 한다는 말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오. 어서 가서 대감님을 좀 모셔 오오. 한시 바삐 저승 기별을 전해야 하오』하거든.
마을 사람들이 대감한테 달려가서 그대로 고해 바쳤다.
대감이 기별을 받고 보니 가슴이 뜨끔하다.
안 그래도 농사꾼이 목을 매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뒤가 켕겼는데,  죽었다던  사람이 살아나서 저승 기별을

전한다니 마음이 편할 리가 없다.
슬슬 겁이 난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평생 남 못할 짓만 하고 살았으니 그럴 만도 하다.

 

 

대감이 농사꾼을 찾아가서,
『자네는 무슨 일로 나를 오라 가라 하는가? 저승 기별이라는 건 또 뭔가?』
하고 짐짓 점잖게 물었겠다. 농사꾼이 하는 말이,
『제가 죽어서 저승에 가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염라대왕님이 아직 올 때가 안 됐다고 하시면서 도로 돌려

보내더이다. 그런데 조용히 여쭐 말씀이 있습니다』하면서 대감을 방으로 끌고 들어가는 거다.
그러고 나서 능청을 떨기 시작하는데, 저승에 가서 대감의 아버지를 만나고 왔다고 그런다.

 

 

『뭐라고? 우리 아버지를 만나고 왔단 말이지』
『예, 노대감께서는 아직 저승에 들지 못하고 저승문 밖에서 짚신을 삼아 팔고 계십디다』
『우리 아버지가 짚신 장사를?』
『글쎄 그렇다니까요. 저더러 돈을 좀 빌려 달라기에 하도 딱해서 빌려 드리고 왔지요』
『아니, 자네가 무슨 돈이 있어서?』

『대감께서는 잘 모르시겠지만 저승에는 사람마다 곳간이 하나씩 있어서 거기에 돈이고 곡식이고 다 들어

 있거든요』

 

 

『자네 저승 곳간에 있는 돈을 빌려 드렸단 말이지? 그래, 얼마나 빌려 드렸나?』
『오백 냥을 빌려 드렸지요. 노대감 말씀이, 그 빚은 이승 가서 대감께 받으라고 그러십디다』
『뭐라고? 우리 아버지 저승빚을 내가 갚으라고?』

『그리 안 하시면 가만 안 두겠다고 그러시던데요』
대감이 들어보니 돈을 안 갚았다가는 무슨 화가 미칠지 모르겠거든.  그래도  이 욕심 사나운 사람이 선뜻

돈을 내놓으려고 하겠나?

 

 

돈 안 갚으려고 슬슬 물러 앉지.
『에이 이 사람아. 거짓말 말게. 그런 엉터리 같은 말을 내가 믿을 줄 알고?』
그 말에 농사꾼이 눈도 꿈쩍 않고 받아치기를,
『그러시겠지요. 그럴 줄 알고 노대감께서 말씀하시기를, 대감께서 안 믿으시거든 당장 모셔 오라고 하셨

답니다』하거든.
모셔 오라면 그게 저승에 모셔 오라는 말 아닌가?

 

 

대감이 기가 막혀 눈만 멀뚱 거리고 있는데, 농사꾼은 태연하게 상여 매려고 잘라 둔 광목 끈 두 개를 가져다가 당장 목을 매자고 한다.
『자, 어서 저승에 가 봅시다. 어서 목을 매시지요』
대감이 그만 기겁을 하고 손을 내저으며 물러앉았다.

 

 

『아닐세, 아니야. 내 그 말을 믿겠네』
『그러면 저승빚을 갚으시는 거지요?』

『그러지, 오백 냥이라고 했나?』

『예, 딱 황소 한 마리 값이니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저께 가져가신 소를 돌려주시겠습니까? 』

『그러지. 암, 그러고 말고.』
그래서 빼앗긴 황소를 도로 찾았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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