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

베트남 캄보디아 여행 5 / 와트마이 사원(킬링필드 현장), 바라이 인공호수, 톤레삽 호수,

정헌의 티스토리 2017. 1. 19. 21:34

           ■ 베트남, 캄보디아 여행 5  / 와트마이 사원(킬링필드 현장),  바라이 인공호수,  톤레삽 호수

 

               여행 5일차이자 마지막 날이다.

               오늘 일정은 킬링필드의 현장인 와트마이 사원을 둘러보고, 머지 않은 곳에 위치한 바라이 인공호수로 이동하여

               개구리와 열대과일을 맛보는 것으로 오전 일정을 보내고, 오후엔 톤레샵 호수로 이동하여 수상마을 주변으로 유

               람선 타는 것으로 계획되어 있다.

               조금은 이른 석식후 시엠립 공항으로 이동하여 여행 일정을 마무리 한다.

            

           ▷ 일정 (2017. 1. 7 )

               숙소 - 와트마이 사원 - 바라이 인공호수 - 상황버섯 쇼핑 - 중식 - 톤레삽 호수 - 쇼핑 - 석식 - 시엠립공항 -

               하노이 노이바이 공항 - 김해공항


           ▷ 여행후에  


  

           △ 숙소에서 바라본 아침 풍경이다.






 

 

           △ 숙소앞에서

               근데 이틀이나 묵었는데 호텔 이름을 모르겠다.

               특히 글자 자체가 뭐가뭔지 모르겠다.

               영어로 씌여 있다만 알수있을 것인데....... 상당히 고급스러운 호텔이다.






 

 

           △ 호텔앞의 코끼리 상,







 

           △ 호텔 안쪽의 풀장을 배경을으로,

                베트남에서는 하롱베이의 호텔에서, 캄보디아에서는 이곳에서 각각 이틀을 묵었다.




          ▣ 와트마이 사원

                

                씨엠립에 위치한 조그만 사원이다.

                킬링필드의 현장이라 하나 규모는 소박해 둘러보는데 가이드 설명 포함 20분이면 된다.

 

 

           크메르루주의 캄보디아 통치   

                            < 이하 녹색글씨의 내용은 다음 백과에서 옮겨왔다 >


               캄보디아는 베트남과 라오스와 함께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식민지의 일부였다. 

               베트남 전쟁 중에  북베트남은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지원하기 위한 병참선 호치민 루트를 캄보디아와 라오스

               영내로 우회하여 건설했다.

               당시 캄보디아의 국가 원수였던 시아누크는 표면적으로는 중립을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이웃의 대국 베트남을 적 

               대하지 않을 생각으로 베트남 전쟁에서 북베트남과 베트콩 편을 들었다. 남 트남에서 미군에게 쫓긴 베트콩이  캄

               보디아 영내로 도망할 수 있게 하거나 호치민 루트의 영내 통과를 묵인했다. 나아가 캄보디아 국내 항구에서 베트

               남을 지원하는 군수품을 하역하여 국내를 통과하여 남베트남의 베트민에 전달하는 것도 묵인했다.


 








           △ 이에 미국의 CIA는 캄보디아 정부군 간부를 매수하여 쿠데타를 일으키게 했다.

               1970년 시아누크가 모스크바를 방문하던 중 론 놀 수상이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론놀 정권은 재빨리 미국과

               공동으로 캄보디아 영내에 있는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을 공격했다. 한편 조국에서 쫓긴 시아누크는 중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북경에서 반(反) 론 롤의 지휘를 하게 되었다. 즉 이제까지 캄보디아 국내에서 그 자신이 탄압하고

               있었던 캄보디아 공산당과 손을 잡고 반론 놀 통일전선으로 '캄보디아 민족통일전선'을 결성했다.











           △ 캄보디아 농촌 지역에서는 왕족인 시아누크 전하의 인기가 높았으며, 반 론 놀 세력의 게릴라 활동은 농민의

               지지를 얻어 국내에서 그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이때 활동의 중심이 된 세력은 폴 포트가 지도하는 캄보디아 공산당(크메르루주)과 그들을 지지하는 북베트

               남군이었다. 또한, 미국은 미국군이 베트남으로부터 철수하기 위해서는 캄보디아 영내에 있던 북베트남군의

               기지를 파괴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여 캄보디아 동부 지역에 폭격을 되풀이했다.  이 폭격으로 많은 사람이

               희생되어 분노한 농촌의 젊은이들이 게릴라 조직에 몸을 던지게 되었다.

               결과적으로는 미국이 캄보디아의 공산 게릴라를 육성한 꼴이 되었다. 그 후 캄보디아는 내전에 휘말리게 되

               었다. 캄보디아 내전에서 50만 명이 사망했고, 100만명이 넘는 난민이 수도 프놈펜으로 흘러 들어와 수도의

               인구가 200만 명으로 팽창했다. 

 








           △ 1975년 4월 17일 '캄보디아 민족통일전선'의 군대는 프놈펜에 쳐들어와 론 롤 정권이 붕괴했다.

              '통일전선'의 군대는 폴 포트가 지도하는 크메르루주의 군대였다. 그것은 남베트남이 붕괴하기 겨우 2주전의

               일이었다.

               베트남에서는 사이공의 함락 후에도 시민 생활의 변화나 구 정부군 병사들이 체포되는 일이 없었으나 캄보디

               아는 달랐다.  프놈펜으로부터 도망치지 못하고 잔류해 있었던 논 롤 정권의 병사나 정부 고관들은 전원 죽임

               을 당했다.




     

      




            △ 폴 포트의 킬링필드 

 

               "이제 내전이 끝났다."라고 희망에 젖었던 시민은 폴 포트 군대를 환영했다.

                하지만 바로 다음 날부터 시민의 운명은 크게 바뀌게 되었다. 다음날 프놈펜시민 200만 명은 한 명도 빠짐없이

                시내로부터 추방되었다.

                입원 중인 환자와 노인, 유아들까지 한 명도 예외가 인정되지 않았고, 시민은 입은 옷 그대로 집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폴 포트는 도시의 주민은 적으로 간주했다. 크메르루주의 게릴라부대가 농촌에서 싸우고 있을 때 농촌

                을 떠나 도시로 도망친 것 자체를 용서할 수 없었다.  도시로부터 주민을 쫓아버리면 그의 지위를 위협하는 세

                력은 더 없을 것이며, 그들은 새로운 농업노동력으로 이용될 것이었다. "너희를 살려 두어야 아무런 득이 없다.

                너희를 잃어도 아무 손실이 없다."라는 말은 도시에서 쫓겨난 '신주민(新住民)'에 대해 폴 포트의 한 간부가 한

                말이다. '신주민' 말살정책이 시작된 것이다.









           △ 정권을 장악한 폴 포트는 원시공산제라 할 수 있는 극악한 정책을 시행했다.


               화폐가 폐지되고, 국민의 대부분이 불교도였던 나라에서 종교가 금지되고 사원이 파괴되었다. 학교와 병원도

               폐지되었다. 모든 국민은 공동농장에 배치되었고, 그 농장의 재산과 수확은 국가의 것이었다. 가족 단위가 해

               체되어 자식들도 5, 6세가 되면 부모에게서 떨어져 '국가의 자식'으로 교육  받았다. 연애도 인정되지 않았고,

               당이 결정한 상대와 결혼하여 자녀를 낳을 것을 강제했다.

               폴 포트 정권의 최대 특징은 '지식인 적시(敵視)정책'이었다.

               글자를 쓸줄 아는자, 책을 읽을수 있는자는 '지식인'이었다. 안경을 썼다는 이유로 '지식인'으로 몰려 살해되

               었다.









           △ 폴 포트와 그의 친구들도 스스로는 프랑스에 유학했던 '지식인'이었으나, 그들이 통치의 편의를 위해 채택한

              '지식인' 말살 정책으로 캄보디아 국내에서는 문맹화가 급속히 확산되었다.

               그들은 "세상을 알고 자신 스스로 머리로 생각"하는 인간은 지배체제에 방해될 뿐이라고 생각했다. 거기에는

              '육체노동만이 모든 것의 기본'이라는 소박한 원시 공산제 사상이 근저에 깔려 있었다.

               예부터 캄보디아는 앙코르와트 등 수준 높은 문화를 자랑하던 자존심이 강한 민족이었다.

               크메르 왕조가 쇠퇴한 후에는 자주 이웃 나라 베트남의 침략을 받았다. 인도차이나 반도가 프랑스의 식민지

               가 된 이후  프랑스는 캄보디아를 직접 지배하지 않고  베트남이 간접 지배하도록 하여  식민지 지배에 대한

               불만을 베트남에 돌리려는 노회한 정책을 시행했다.


            

               




           △ 폴 포트는 이  '반(反)베트남 의식'을 이용하여 베트남이라는 적(敵)을 만들어 자신의 잔인한 통치가 가져온

               실정을 뒤집어씌우려고 했다. 이에 베트남이 반격했다. 베트남에는 폴 포트에게 미움을 사서 쫓겨온 캄보디

               아군의 장교들이 있었다. 이들 장교가 '캄보디아 구국 국민통일전선'을 결성하여 구원을 요청했다.

               1978년 12월 '요청을 받은' 베트남군 10만 명이 캄보디아를 침공했다. 베트남군의 본격적인 침공에 대해 폴

               포트군은 상대되지 않았다. 폴 포트의 숙청으로 군의 유능한 중견간부가 부족했으며,  국민은 기아선상에서

               고통을 당해 더는 저항할 수도 없었다.  오히려 '이것으로 목숨을 구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국

               민은 정권을 지키려 하지 않았다. 베트남의 침공으로 겨우 2주 만에 폴 포트 정권은 붕괴했다.

               3년 8개월간의 폴 포트 정권은 사라진 것이다.

 







           △ 폴 포트 정권의 악행이 만천하에 드러난 것은 그 뒤에 일어났다.


               세계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에 대해 허용할 수 없다는 여론이 우세했으나

               죄 없는 캄보디아 인민이 대량살육 되었음을 알고 경악했다. 신이주민의 거주지였던 '킬링필드'에서는 어디를

               파도 백골이 나오는 비참한 현장이 드러났다.

               그것은 '어떤 나라건 내부적으로 반인도적 행위가 대규모로 행해졌을 때 국제사회의 인도적 개입이 허용된다'

               는 이론의 길을 열게 했다. 베트남군의 침공에 쫓겨 폴 포트는 다시 정글로 도망쳤다.

               그는 헨 삼린 정권에 대항해서 북부의 태국 국경 부근에서 게릴라 활동을 시작하고, 왕궁에 유폐시켰던  시아

               누크를 중국에 피난시켜 다시 통일전선을 조직했다. 이 정권에는 중국과 태국이 지원했다.


              








           △ 베트남군이 침공한 지 11년 후인 1989년 9월 베트남군은 캄보디아로부터 철수했다.


               이를 계기로 하여 캄보디아 화평의 기운이 세졌다.  미국의 베이커 국무장관의 제의로 캄보디아 화평계획이

               성립되었다.  UN이 '캄보디아 잠정통치기구(UNTAC)'를 만들어 이 조직하에서 캄보디아 국내에서 자유선거

               를 시행하고 새 국가지도자를 선출하는 계획이었다.

               캄보디아 내전의 당사자들이 서로 반대하여 저항하곤 했으나, 결국 1991년 10월 파리에서 평화협정을 맺고

               캄보디아는 평화를 찾았다. 1993년 5월 캄보디아 국민에 의한 총선거가 시행되었다. 선거결과 새헌법이 성

               립되고 시아누크는 다시 국왕이 되었다.












           △ 폴 포트파는 일단 선거에 협력하는 자세를 보이면서도 결국 이를 보이콧했다.

               그 후에도 국내에서 게릴라 활동을 계속했다.  중국과 태국으로부터의 지원도 끝나고, 동지들이 서로 분열하던

               와중에 폴 포트는 1998년 4월 사망하고 잔존 부대도 곧 투항등으로 괴멸하게 된다.

   


               크메르루주 정권을 이끌었던 폴 포트의 본명은 살로스 사(Saloth Sar)이다.

               1925년 5월 19일 프랑스 식민지였던 캄포디아 북부 캄퐁 통 지역의 비교적 부유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불교사원에서 6년간 교육을 받았고, 1940년대 초 프놈펜의 기술학교에 진학해 목공을 배웠다.  이때

               그는 호치민 휘하에서 프랑스 지배에 저항하는 운동에 참가하고 1946년 캄보디아 공산당에 입당했다.

               1949년 무선전자공학을 배우기 위해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났는데, 1951년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해 '숙청'을

               강조한 스탈린주의와 모택동 사상에 심취한다.  1953년 캄보디아로 돌아온 그는  1963년까지 10년간 프놈펜의

               사립학교에서 역사와 문학을 가르치며 동시에 지하조직인 캄보디아 공산당 활동을 했고, 1963년 공산당 총서기

               에 취임했다. 

               시아누크 정권의 비밀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된 그는 크메르족이 거주하는 북동부 산악지대로 피해 게릴라 활동

               을 시작했다. 폴 포트는 이 때 크메르족의 자급자족 생활에 크게 감명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1975년 4월 17일부터 3년 8개월 10일 동안 캄보디아를 자신이 생각하는 농경 유토피아로 개조하며 '킬링필드'

               를 일으켰다.  폴 포트는 1997년 11월 타 목 군사령관 등 반대파에 의해 종신 자택감금형을 선고받고 캄보디아

               북부 안롱 벵 인근에서 가택 연금 중 1998년 4월 15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크메르루주는 다음날 그의 시신을

               언론에 공개했으나, 자살이나 타살 가능성 등의 의혹이 제기됐다.














            크메르루즈 이후 캄보디아는 30년간 훈 센 총리의 독재 하에 있다. 1993년 9월 총선 당시 캄보디아는 시아누크를

               국왕으로, 제 1당인 민족연합전선의 지도자 노로돔 라나리드(시아누크의 아들)가 제1총리로, 훈 센이 제2총리로

               선출되어 정부를 구성했다. 1997년 훈 센은 유혈 쿠데타를 일으켜 라나리드 왕자를 축출하고 1998년 선거를 통해

               단독 총리에 취임했다. 이후 훈 센은 30년 간 킬링필드의 공포를 적극 활용해 자신의 장기집권을 정당화하며 독재

               를 해왔다.

               캄보디아 곳곳에서는 킬링필드의 현장이 관광지로 운영되고 있다.

               대표적인 집단 매장지 중 하나인 쯔응아익(청아익) 대량 학살센터에는 17층 높이로 쌓아올린 유골이 보관되어 있 

               는 위령탑이 있다.  뚜올 슬랭 감옥은 고문박물관으로 전시 중으로 수많은 아이들을 포함한 희생자를 찍은 사진이

               벽에 걸려있다.







           △ 20분여 와트마이 사원을 둘러보았다.




         ▣ 상황무역공사.



          △ 가이드 鳳 잡았다.

              300년된 상황버섯 하나를 공동으로 구입한다.  




            ▣ 바라이 인공호수,


   

           △ 바리이 호수

 
               바라이호수는 씨엠립 북서쪽에 있는 세계 최대의 인공호수이다.

               앙코르시대 때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식수와 농업용수를 위해 손으로 직접 파서 만들었다고 한다.

               과거 강력했던 왕권의 상징이며 어종이 풍부해 현재는 많은 캄보디아인들이 휴식을 취하는 쉼터로 이용된다.







   

           △ 우측,







  

           △ 좌측,

               유원지에 놀러온 느낌이다.

               호수가에 수상가옥이 줄지어 있다.

  





  

           △ 해외 관광상품으로 왜 넣었는지 조금 이해 안되는 곳이기도 하다.

               차라리 앙코르 사원쪽에 시간을 더 할애했으면 좋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 기념품을 판매하는 가게들,

           


               아이들 호객행위가 만만찮다.

               형님, 아저씨, 언니 등등 웬만한 호칭은 다 안다.

               측은한 생각에 몇개 구입하여도 내것은 사지 않았다고 끈질기게 달라 붙는다. 






  

           △ 주변의 상가들,






 

  

           △ 우린 이곳에서 개구리 튀김과 과일을 먹었다.


               지금은 그의 없어졌지만 한때 우리나라에서의 황소개구리 맛은 닭고기 비슷하다.

               이곳이나 황소개구리나 맛은 비슷한것 같다. 







 

           △ 이곳 호수에서의 행동반경은 30m 전후로,

               크게 기대는 하지 않는게 좋겠다.





            ▣ 선라이즈 뷔페식당과 압살라 민속쇼



 

           △ 고급스럽다고는 할수 없지만,

               상당한 면적을 가진 뷔페식당이다.

               식사중, 또는 식후에 이 식당 무대에서 압살라 민속쇼가 펼쳐진다.




 


















 








 








 








 








 








 








 









 

     

           △ 여행사의 안내 팜플릿에 압살라 민속쇼 관람 등의 내용에 너무 기대하지 말라.

               중국여행 등에서 보는 호화로운 ? 극장의 무대가 아니라,

               식당의 무대여서인지 큰 볼거리로 생각되지는 않는다.




 

            ▣ 톤레삽 호수


               톤레사프호(Tonlé Sap) 또는 똔레삽호는 캄보디아에 위치한 호수로 주요 하천과 연결되어 있다.

                  톤레사프 호는 인도아대륙과 아시아 대륙의 충돌에 의해 일어났던 지질학적인 충격으로 침하하여 형성된

                  호수이다. 동남아시아 최대의 호수이고, 크메르어로 톤레(ទន្លេ[tonle])는 강, 사프(សាប[sap])은 거대한

                  담수호라는 의미가 있다.


   

           △ 톤레샵 호수 가는 길


               앙코르와트 주변은 밀림으로 뒤덮인 평지라면,

               이곳은 끝없이 펼쳐진 농지이다.





              










   

           △ 씨엠립에서 약 30분,

               톤레삽 호수를 탐방하기 위해 유람선 선착장에 왔다.














   

           △ 물이 황토빛이다.

               변두리여서 수심도 깊어 보이지는 않는다.






 

   

           △ 선착장 주변,

               뒤로 보이는 산이 씨엡립 지역에서 볼수있는 유일한 산이다.








          △ 다음백과에서 톤레삽 호수에 대한 개요를 보면,



              1년중 대부분은 수심은 1m 이내로, 면적은 2700이다. 이 때문에 프놈펜과 씨엠립을 연결하는 정기선이

              암초에 부딪치는 경우가 자주 있다.

              생김새는 호리병박 형태이다. 그러나 하계의 몬순 기간에는 호수에서 프놈펜부근 메콩강에 흘러 들어가는

              톤레삽 강이 역류한다. 그 때문에 주위의 토지와 숲을 침수로 하면서 면적은 1만 6000까지 확대되고,

              깊이도 9m에 이른다. 육상에서 자란 식물의 유기물이 풍부하게 공급되고, 또 다량의 플랑크톤이 발생한다.

              이와 같은 일시적 수역에서 번식한 것이 많기 때문에 생선이 대량으로 발생한다.  무게가 100kg이 넘는 메

              콩 오나마주 등을 비롯하여 600종 이상의 담수어가 서식한다. 우기가 끝나고 물이 빠지면, 번식을 마친 생

              선은 하류로 돌아간다. 톤레삽 수계로 생산된 생선은 캄보디아 국민의 단백질 섭취량의 60%를 차지한다.

              물이 빠지면 주위의 양분이 많은 퇴적물을 남기기 때문에, 우계 이외의 기간에는 농지가 드러나 농사를 지

              을다. 벼 등이 재배되고 있다. 톤레사프 강이 역류하면, 메콩강 하류가 종종 홍수가 발생하기도 한다.






 

 

           △ 호수가에는 많은 수상가옥을 볼 수 있다.

               이중 과거 베트남 내전시 메콩강을 따라올라온 사람들이 많이 있단다.

               캄보다아 정부에서 육지로의 상륙은 금하고 호수에서 고기를 잡는 등 생계유지는 묵인하고 있다한다.






































 

           △ 다일 수상유지원으로 표시되어 있다.






 


















































































































 

           △ 학교인것 같다.







 

           △ 학생들.

















































































































 

           △ 톤레삽 호수 탐방은 유람선으로 호수 변두리의 섬?을 한바퀴 돌아오는 일정이다.

               주변 수상가옥을 볼 수 있으나 황토물빛에서 깨끗함은 별 느낄수 없다.

               소요시간은 약 50분 정도였다.





            ▣ 앙코르 수키


 

           △ 조금 이른 시간이지만 출국에 앞서 저녁먹으러 왔다.






 

 

           △ 메뉴는 수키,





            ▣ 씨엠립 국제공항


 

           △ 씨엠립 국제공항.

               베트남, 캄보디아 일정이 마무리 된다.








           △ 씨엡립 공항을 출발하여

               베트남 하노이 노이바이 국제공항에서 환승하여 김해공항으로 갈 것이다.








           △ 때론 아쉬움도 없진 않았지만.

               즐겁게 둘러본 베트남, 캄보디아 6일간의 일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