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지역의 산

강진 문학기행 2 / 백련사. 다산초당. 다산박물관.

정헌의 티스토리 2021. 6. 2. 18:13

■ 강진 문학기행 2 / 백련사. 다산초당. 다산박물관.

 

다산박물관, 다산초당, 백련사를 연계하여 도보로 둘러본다면?

첫째 다산박물관에서 출발하여 다산초당(및 만덕산)을 경유하여 백련사까지 갔다가 같은 길로 되돌아 올 수 있겠고, 아님 백련사에서 도로를 따라 다산박물관 주차장으로 되돌아 와도 된다. 이 경우 백련사 주차장에서 다산박물관 주차장 까지의 거리는 2.4km쯤 된다.

두번째 다산박물관과 백련사 사이를 편도로 걷는다면 백련사에서 출발하는 것이 수월하다. 짧은 오르막을 올라 해월루 능선에 오르면 이후 다산박물관 까지는 대체로 내리막 지형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승용차를 이용했다면 회수가 불편하다.

혜장스님은 해남출신이다. 대흥사로 출가해 백련암등에 거처하였으며 차와 유교경전에도 해박한 지식을 가졌다한다. 정약용 선생이 다산초당에 기거시 서로 왕래하며 교류를 가졌다. 오늘 혜장스님과 다산선생이 걸었던 백련사에서 다산초당간 길을 걸어본다.

 

 

 

 

 

▷ 가는 길

 

 

 

▷ 탐방코스

 

백련사 - 다산초당 - 다산박물관 (- 가우도) (2021. 5. 29.)

백련사에서 다산초당까지 천천히 30분, 다산초당에서 다산박물관까지 25분 정도 소요됨.

 

 

 

▷ 탐방후에

 

 

좌측 하단의 다산수련원은 현 전남인재개발원(공무원 연수원?)이다. 과거 다산기념관이었으나 다산기념관(후에 다산박물관으로 바뀜)이 현재의 자리로 이전되었다.

안내도를 보면 다산초당과 백련사 사이에 두개의 지능선이 있음을 볼 수 있다. 해월루 갈림길 능선에 만덕산 깃대봉으로 오르는 갈림길이 있다. 경사로는 해월루 갈림길로 오르는 곳과, 다산초당쪽 지능선에서 내려서는 곳 약간의 경사가 있다.

 

 

 

 

▷ 탐방후에

 

 

만덕리 입구 주 도로면의 백련사 갈림길에서 약 1.2km.

백련사 주차장이 있고, 주차장과 접하여 일주문을 세웠다.

만덕사로 오르는 길은 일주문에서 숲길을 따라 도보로 오르는 길과 우측 차도가 있다.

 

 

 

 

 

 

백련사 가는 길.

 

 

 

 

 

 

 

 

 

 

 

 

 

중간 해탈문을 지난다.

 

 

 

 

 

 

해탈문을 지나면 이내 좌측으로 새로이 탐방로를 만들고 있다.

이 길은 백련사 좌측편(백련사를 마주보았을 때.) 동백숲으로 연결되며, 현 작업 중이다.

 

 

 

 

 

 

주차장에서 5분쯤 오르면 백련사 아랫쪽에 도착한다.

 

이곳에 백련사에서 다산초당 가는 길이 있다.

(백련사 좌측 동백숲에서 이 인근(정확히는 다산초당 방향으로 쬐끔의 거리에 있는 개울 주변)으로 내려오는 길이 있으나 많은 분들이 다니는 길은 아니며 위 동백숲으로 이어지는 탐방로가 완공되면 이 길을 이용하는 분들이 늘어날 것 같다.

 

 

 

 

 

 

축대 아래를 지나 백련사로 오른다.

 

 

 

 

 

 

만경루 아래를 지나 오른다.

 

 

 

 

 

 

백련사는 조선 후기인 19세기에는 만덕사로 불려졌다.

신라 말에 창건 되었다고 전하나 확실하지 않다. 고려 1232년에 원묘국사 요세(1163~1245)가 이곳에 보현도량을 개설하고 백련결사를 일으켰다.

대웅전은 팔작지붕의 단청이 화려한 정면3칸 측면 3칸의 다포식 건물이며, 1762년에 건립되었다. 각 추녀마다 활주를 세워 건물을 받치고 있으며, 건물 전면 2개의 주두에 용머리 조각을 장식하였다.

대웅전 내부에는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목조 여래삼존상이 봉안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대웅전에는 중앙에 본존불인 여래상과 좌우에 보살상을 봉안하는데, 백련사의 경우에는 보살상 없이 여래삼존상만 봉안하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우측으로 선방.

 

 

 

 

 

 

만경루 옆에서 내려다 본 강진만.

 

 

 

 

 

 

명부전과 천불전이 나란히 있고,

그 아랫쪽에 종각, 저 건물은 요사인가?

 

 

 

 

 

 

비각 앞을 지나.

 

 

 

 

 

 

동백숲으로 왔다.

 

 

 

 

 

 

실제 둘러볼 수 있는 면적은 넓지 않지만 백련사까지 왔으면 동백숲을 둘러보는 것이 좋다.

동백숲에서 백련사로 가는 길은 아랫쪽으로 두어곳 소로가 있어 이 길을 따라 내려오면 백련사 바로 아래에서 다산초당으로 가는길과 만나게 된다.

요즘 동백숲으로 제법 넓은 길을 확장하고 나면 백련사와 동백숲을 더 자연스레 둘러볼 수 있겠다.

 

 

 

 

 

 

 

백련사와 동백숲을 둘러보고 다산초당 가는 길 입구로 내려왔다.

   

   

 

 

 

 

위 안내도의 백련사 갈림길에서 다산초당쪽으로 쬐끔 진행하면 작은 개울을 건너는 곳에 이정표가 있다. 주변에 동백숲에서 이곳으로 내려오는 길이 두어곳 있다.

백련사 0.1km, 주차장 0.2km로 표시되어 있고, 해월루 0.4km, 다산초당 0.9km, 다산박물관 1.9km를 알린다.

즉 백련사에서 다산초당까지는 1km(천천히 30분), 다산박물관 까지는 2km(약 1시간)인 셈이다.

 

 

 

 

 

 

탐방로 좌측으로 접하여 크지 않은 차 재배지가 있다.

백련사 소유는 아닌 듯 ?

 

 

 

 

 

 

연리지?

 

 

 

 

 

 

위 차밭을 지나 조금 오르면 약간의 경사를 보인다.

이 오르막은 해월루. 깃대봉 갈림길 능선까지 계속되나 그리 심하지는 않다.

 

 

 

 

 

 

백련사 아래 다산초당 가는 길 길림길에서 10분여,

대체로 완만한? 오르막? 길을 따라 오르면 해월루. 깃대봉 갈림길 능선에 오른다.

 

 

 

 

 

 

위 갈림길 능선에서 100m쯤 거리에 있는 해월루를 둘러보고 간다.

가는 길이 평탄하여 실제 100m 채 안되는 거리 같다.

해월루.

썩 운치있는 정자는 아니다.

 

 

 

 

 

 

해월루에서 강진만쪽 조망이다.

 

 

 

 

 

 

되돌아 나와 다산초당 가는 길을 따른다.

 

 

 

 

 

 

살짝 내려서는 듯.

산 골짜기 쪽으로 돌아간다.

 

 

 

 

 

 

해월루 지능선에 이어 두번째 지능선을 넘는다.

해월루 능선에서 지금까지 길은 대체로 완만수준이다.

 

 

 

 

 

두번째 지능선에서 약간 경사길을 내려간다.

물론 심하지는 않고 거리도 길지 않다.  

 

 

 

 

 

 

다산초당이 가까워 졌다.

주변 몇 그루 미끈미끈한 나무들이 숲을 이룬다.

 

 

 

 

 

 

이내 천일각이다.

천일각은 '하늘 끝 한 모퉁이'라는 뜻의 천애일각(天涯一閣)을 줄인 것이다.

다산의 유배시절에는없던 건물인데, 돌아가신 정조대왕과 흑산도 유배중인 형님 정약전이 그리울 때면 이 언덕에 서서 강진만을 바라보며 스산한 마음을 달랬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1975년 강진군에서 새로 세웠다.

 

 

 

 

 

 

천일각에서 강진만쪽 조망.

 

 

 

 

 

 

동암.

송풍루라고도 불리는 동암은 다산이 저술에 필요한 책 2천여권을 갖추고 기거하며 손님을 맞았던 곳이다. 다산은 초당에 있는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에 머물며 집필에 몰두 하였으며, 목민관이 지녀야 할 정신과 실천 방법을 적은 목민심서도 이곳에서 완성했다.

1976년 서암과 함께 다시 세웠는데 현판 중 보정산방(寶丁山房)은 추사의 친필을 모각한 것이고 다산동암(茶山東庵)은 다산의 글씨를 접자한 것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

 

 

 

 

 

다산 초당에 왔다.

백련사에서 약 30분 소요되었다.

 

 

 

 

 

 

정약용은 1808년 봄, 해남윤씨 집안의 산정에 놀러갔다. 아늑하고 조용하며 경치가 아름다운 다산서옥(茶山書屋)은 지난 7여년간 전전하던 주막이나 제자의 집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더구나 가까운 백련사에 절친한 벗 혜장이 있었고 다산은그 이름처럼 차나무로 가득했다.

 

정약용은 시를 지어 머물고 싶은 마음을 전했고 윤씨 집안은 이를 흔쾌히 허락했다. 이곳에서 정약용은 비로소 안정을 찾고 후진양성과 저술 활동에 몰두했다. 10년 동안 다산학단으로 일컬어지는 18명의 제자를 길러냈고, 50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집필했다. 초당을 가꾸는 데도 정성을 기울여 채마밭을 일구고, 연못을 넓히고, 석가산을 쌓고, 집도 새로 단장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윤씨 집안의 산정은 다산초당으로 거듭났고, 정약용은 스스로를 다산초부라고 칭하게 되었다.

 

<현지 안내문에서 >

 

 

 

 

 

다산초당에서 눈여겨 봐야 할 것으로 정석 각자, 약천, 다조, 연지 석가산을 들 수 있다.

연지 석가산은 연못 가운데 돌을 쌓아 만든 산이다. 다산은 원래 있던 연못을 크게 넓히고 바닷가의 돌을 주워 조그만 봉을 쌓아 석가산이라 하였다. 연못에는 잉어도 키웠는데, 유배 생활에서 풀려난 후 제자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잉어의 안부를 물을 만큼 귀히 여겼다. 다산은 잉어를 보고 날씨를 알아내었다고 한다.

 

 

 

 

 

 

다산초당 좌측 뒷편에 약천이 있다.

현 음용불가의 표시가 있으며 물맛이 썩 좋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안내표지판에 가뭄에도 좀처럼 마르지 않는 이 샘은 다산초당의 제2경이다.

처음에는 물이 촉촉이 젖어있던 것을 다산이 직접 파니 돌틈에서 맑은 물이 솟아나왔다고 한다. 다산은 약천의 물을 마시면 "담을 삭이고 묵은 병을 낫게 한다"고 기록하였다.

 

 

 

 

 

 

다산초당 앞쪽 마당에 다조가 있다.

다산선생이 이곳에 오기 전부터 있던 이 돌은 차 다리는 부뚜막으로 쓰던 것이다. 다산은 이곳에서 약천의 물을 떠다 솔방울로 숯불을 피워 찻물을 만들었다. 다산초당 제3경이다.

 

 

 

 

 

 

다산초당 좌측 뒷편으로 약 20m거리의 바위에 다산이 직접 새겼다고 전해지는 정석은 다산초당 제1경이다. 아무런 수식도 없이 자신의 성인 정(丁)자만 따서 새겨 넣은 것으로, 다산의 군더더기 없는 성품을 그대로 보여준다.

 

<현지 안내표지판에서 >

 

 

 

 

 

서암.

 

초당은 다산이 제자들을 가르치고 책을 썻던 곳이다. 원래는 윤단(尹慱)의 산정(山亭)이었으나 서로 교분을 나누면서 그에게 거처로 제공되었다. 1957년 다산유적보존회가 허물어진 초가를 치우고 다시 지으면서 기와로 복원했다. 조만간 짚을 덮은 본래의 초당으로 복원될 예정이다.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친필을 집자해서 모각한 것이다. 서암은 윤종기 등 18인의 제자기 기거하던 곳이다. 차와 벗하며 밤늦도록 학문을 탐구한다는 뜻으로 다성각(茶星閣)이라고도 하며, 1808년에 지어져 잡초 속에 흔적만 남아 있던 것을 1975년 강진군에서 다시 지었다.

 

< 현지 안내표지판에서 >

 

 

 

 

 

 

다산초당에서 정차란 이름으로 차를 판매하고 있다.

코로나 때문이라며 종이컵에 담아내며 가격은 1천원을 받는다.

이곳에서 차를 마시며 30분여 머물다 내려간다.

 

 

 

 

 

 

 

 

 

 

 

 

 

다산초당에서 천천히 25분여,

다산박물관으로 내려선다.

 

 

 

 

 

 

다산박물관 관람료는 어른 2,000원 (단체 20인 이상 1,000원)

매주 월요일은 휴관이며 관람료 면제 및 할인 있다.

주차장은 넓지 않으며, 주차료는 없다. (주차공간은 박물관에서 구 도로를 따라 다산초당방향 조금의 거리에 있다.)

 

 

 

 

 

 

 

 

 

 

 

 

 

 

말씀정원

다산선생 동상을 포함하여 51기의 돌비석에 명언을 새겼다.

다산박물관 탐방을 끝으로 오늘 일정을 마무리 한다. 귀가길 약간의 시간적 여유가 있어 가우도를 둘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