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지역의 산

장수 방화동 생태탐방로, 논개사당, 산서면 어필각.원흥사.압계서원.호룡보루. 권희문가옥. 오산사.

정헌의 티스토리 2023. 5. 29. 11:25

■장수 방화동 생태탐방로, 논개사당, 산서면 어필각.원흥사.압계서원.호룡보루. 권희문가옥. 오산사.

 

방화동 생태탐방로는 방화동자연휴양림에서 덕산제까지 덕산계곡을 따라 난 약 4.5km의 구간이다. 이 하천명은 용림천이나 덕산계곡 또는 방화동계곡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숲이 울창하고 양쪽으로 계곡이 깊다. 길은 평탄한 편이어서 걷기 좋다.

논개사당은 장수읍 두산리에 위치하며 앞쪽 의암호 주변에 데크 등으로 수변공원을 정비하였고, 인근 징수누리파크 공원을 제법 넓게 조성하여 같이 둘러보면 되겠다,

장수군에서 제공하는 관광안내도를 보면 산서면 지역에 몇 볼거리가  있다. 어필각, 원흥사, 압계서원, 호룡보루, 권희문 가옥, 오산사, 미륵암, 영월암 등이다. 이들은 산서면소재지를 중심으로 근거리에 서로 위치하고 있으나 찿아가기 힘들고 크게? 볼 것은없다. 미륵암은 전에 찾아본 적이 있고, 영월암은 위치가 어디인지 알 수 없어 찾아보지 못했다.

귀가길 인월전통시장내에 위치한 돼지국밥집에 들렀다.

 

  

 

▷가는 길

 

 

 

 

▷탐방코스

 

덕산리 연주마을 주변(백두대간마실길 2코스= 장안산마실길) 차량으로 둘러봄  - 방화동 생태탐방로(덕산제 둑 아래에서 원점회귀) - 논개사당(의암공원, 장수누리파크공원) - 산서면 (어필각.원흥사.압계서원.호룡보루. 권희문가옥. 오산사)    

방화동 생태길은 가고(1시간 20분), 오고(1시간10분), 합하여 2시간 30분 소요  /   2023. 5. 28.

 

 

▷탐방안내도

 

 

방화동생태길은 장안산 생태탐방로, 덕산계곡 산책로라고도 한다.

방화동자연휴양림 주차장에서 장안산군립공원사무소(현 위치/ 덕산제 아래)까지 용림천(덕산계곡)을 따라 난 편도 약4.5km(안내도에 따라 5km 전후로 표시된 곳도 있음) 의 생태탐방로를 말한다.

왕복 2시간 30분정도 소요된다.

 

 

 

 

▷탐방후에

 

▣ 방화동 생태탐방로  

 

 

연주마을계곡(무돌이골)과 덕산계곡 생태탐방로 중 어느 곳을 걸을까? 결정하지 못한채 덕산제(용림제)로 왔는데 장수로 접어드니 추적추척 비가 내린다.

무돌이골을 따라 청산별곡(산장? 펜션?)까지 차량으로 진입헤 보았으나 길바닥에 물웅덩이가 많고 비로 인해 음침한 기운이 도는 깊은 산골이라 되돌아 나와 덕산제 아래로 왔다. 방화동생태탐방로를 걷는게 더 낫다싶은 생각에서이다.

저쪽으로 보이는 곳이 주차장이나 날씨 때문에 아무도 없어 이곳에 주차한다.

 

 

 

 

 

 

들머리.

이곳은 2014년도 12월, 잔설이 있을 때, 방화동 자연휴양림을 들머리로 하여 찾은 적이 있다.

 

 

 

 

 

 

여름철에만 주인이 거주하는지 텅빈 가건물이 즐비하다.

 

 

 

 

 

 

건너편에도 평상이 많다.

 

 

 

 

 

 

일반적으로 방화동 자연휴양림을 들머리로 하는 것이 좋을 듯 싶으나,  계곡이 완만하여 평지나 다름 없으므로  이곳에서 출발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별 것은 아니지만 이곳에서 내려가면  자연휴양림 입장료 1,000원은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

 

 

 

 

 

 

주인을 만나 인사를 나눴더니 어디서 왔느냐 묻는다.

산청에서 왔다하니 본인도 산청의 내원사에서 여러해 있었다한다.

스님인가?

이 길은 산속에서 토종벌과 함께 노후를 보내고 있다.

 

 

 

 

 

 

길은 넓고 완만하다.

 

 

 

 

 

 

임도는 이곳까지.(위 주차장에서 대충 1km가 안되는 거리다.)

 

 

 

 

 

 

전망대(팔각정 / 2014년 당시 위험할 정도로 낡은 상태였음)로 오르는 길은 폐쇄시켰다.

 

 

 

 

 

 

데크길이 시작된다.

작은 용소, 큰 용소가 차례로 가까이 있다.

 

 

 

 

 

 

작은 용소의 상부이다.

 

 

 

 

 

 

신선놀음이다.

바둑판도 그려져 있다.

 

 

 

 

 

 

작은 용소,

 

 

 

 

 

 

주변 숲이 무성하다.

 

 

 

 

 

 

이 데크길은 2014년 당시 설치되었던 것 보다 넓고 튼튼하게 바뀐것 같다.

 

 

 

 

 

 

 

큰 용소,

 

 

 

 

 

 

주변 몇 사람들의 이름이 각자되어 있다.

남명선생이 보았다면 쓸데없는 짓이라고 호통이라도 쳤을 것 같다. 

 

 

 

 

 

 

용소 주변은 오늘 최고의 경관을 보이는 곳이다.

 

 

 

 

 

 

데크길은 한동안 이어진다.

저쪽 계곡을 건너는 다리도 폐쇄하였다. 작은 용소 윗쪽의 다리로 연결되는 다리인데 상부의  정자가 너무 낡아서인지는 모르겠다.

 

 

 

 

 

 

되돌아 본 용소쪽,

 

 

 

 

 

 

용소주변 데크길이 끝나는 지점쯤이다.

장안산군립공원 주차장에서 1.1km지점을 알리고 있다.

 

 

 

 

 

 

탐방로는 넓직하다.

 

 

 

 

 

 

조금은 모양새가 괴이하여,

 

 

 

 

 

 

위에서 내려가는 입장에서 볼때 첫번째 징검다리를 건넌다.

계곡을 건너지 않고 우측으로 소로가 있으나 사람들이 별 다니지 않는듯 좁고 수풀이 무성해보인다. (아랫쪽 징검다리 인근에서 서로 만남)

 

 

 

 

 

 

계곡을 우측에 두고 잠시 내려간다.

 

 

 

 

 

 

가을철 단풍이 곱게 들 때 쯤 감탄하겠다.

 

 

 

 

 

 

두번째 징검다리를 건넌다.

 

 

 

 

 

 

이내 

 

 

 

 

 

 

세번째 징검다리를 건넌다.

이곳에도 징검다리를 건너지 않고 계곡 우측으로 소로가 있다. 역시 아랫쪽 징검다리를 건너면 서로 합류된다.

 

 

 

 

 

 

4반쩨 건너는 징검다리다.

이곳 방화동 생태길에는 징검다리가 총 4곳 있는 셈이다.

 

 

 

 

 

 

 

 

 

 

 

 

 

위 네번째 징검다리를 건너면 제법 넓이의 평지를 보인다.

이 주변에 팔각정이 있고 자생식물원?으로 꾸며 탐방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관리차량도 방화동 자연휴양림 방향에서 이곳까지 진입할 수 있다.

 

 

 

 

 

 

팔각정.

 

 

 

 

 

 

우측 한켠에 생태탐방로가 있다.

 

 

 

 

 

 

 

 

 

 

 

 

 

다리를 건너면 바로 황토 탐방로의 상부가 된다.

먼지떨이, 수도 시설이 있어 발을 씻고 먼지를 떨 수 있다.

 

 

 

 

 

 

이후 파쇄석과 황토길이 공존하며, 방화동 휴양림 상부까지 계속된다.

 

 

 

 

 

 

계곡 건너로 목교가 있다.

방화동 자연휴양림에는 산림욕장이 두 군데 있으며, 이정표에는 1, 2인가?  A, B인가로 구분하여 표시되어 있다.

오고 갈때 산림욕장을 둘러보면 되겠다.

 

 

 

 

 

 

이곳은 상부 산림욕장아다.

데크를 깔고 쉬기 좋게 만들었다.

 

 

 

 

 

 

상부 산림욕징을 지나면 (내려가는 입장에서) 좌측으로 또다른 산림욕장이 있고, 우측의 계곡 절벽에 방화폭포가 있다.

방화폭포는 상시 흐르는 폭포가 아니고 많은 비가 오거나 할 경우  볼 수 있으며 평시는 암벽이나 다름없다.

 

 

방화폭포

 

방화동에는 백약을 써도 나을 수 없는 아이를 위해 아버지의 지극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켜, 산신령의 도움과 호랑이의 안내로 명약의 약초를 구해먹고 나았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높이 110m의 산에서 떨어지는 폭포의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이 느껴지는 곳이기도 하다.

<현지 안내문에서>

 

 

 

 

 

 

조금 거리를 두고 되돌아 본 방화폭포쪽,

 

 

 

 

 

 

 

 

 

 

 

 

 

 

 

 

 

 

 

 

중간 계곡으로 난 육교가 있어 상.하 계곡을 보고 간다.

 

 

 

 

 

 

아랫쪽.

 

 

 

 

 

 

이곳은 아랫쪽 삼림욕장 들머리,

날머리는 방화폭포쪽에 있다.

 

 

 

 

 

 

방화동 생태길을 지나왔다.

 

 

 

 

 

 

 

 

 

 

 

 

 

좌측에 보이는 건물이 숲속의 집, 총 4동이 있다.

방화동 자연휴양림중 가장 상부의 건축물인 셈이다.

 

 

 

 

 

 

현위치.

숲속의 집 입구에 표시되어 있다.

 

 

 

 

 

 

청소년 일반 야영장을 지난다.

취사시설은 리모델링 중이다.

 

 

 

 

 

 

과거엔 계단에 그림을 그려두었는데 지금은 많이 낡았다.

 

6월중 요금 인상한다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1.야영장 : 오토캠팡장 30,000원,  캠핑가 아영장 35,000원, 야영데크 30,000원으로 50~100% 인상이다,

2.기타시설 : 평상 20,000원으로

3.주차료 : 15인승 이하 3,000원, 15인승 이상 10,000원

 

 

 

 

 

 

살짝 송림 우거진 곳을 넘어간다.

 

 

 

 

 

 

다리 건너 좌측은 캠핑가 전용구역, 우측은 오토캠핑장이다.

 

 

 

 

 

 

위 다리를 건너기 직전 우측으로 이런 길이 보인다.

 

 

 

 

 

 

오토캠핑장.

 

 

 

 

 

 

매점 및 식당 앞족으로 왔다.

 

구입할 것이 없어 매점엔 들어가 보지는 않았으며 , 뒷편으로 목재문화체험장과 다문화체험동(베트남방, 필리핀방, 중국방, 일본방 등)이 있다.

 

 

 

 

 

 

건너편엔 체육광장, 야영데크 평상 등이 있는 곳이다.

 

 

 

 

 

 

식당 및 매점 앞에서 준비한 중식 후 되돌아 간다.

 

 

 

 

 

 

캠핑카 전용구역 앞을 지나오른다,.

 

 

 

 

 

 

청소년 일반야영장이 건너다 보인다.

 

 

 

 

 

 

 

 

 

 

 

 

 

 

숲속의 집앞으로 되돌아 왔다.

 

 

 

 

 

 

되돌아 간다.

 

 

 

 

 

 

 

 

 

 

 

 

 

저만큼 용소

 

 

 

 

 

 

윗 용소

 

 

 

 

 

 

 

 

 

 

 

 

 

이곳에서 방화동 자연휴양림까지 내려갈 때 1시간 20분, 되돌아 올라올 때 약 1시간10분, 합하여 2시간 30분쯤 소요되었다.(점심시간 제외하고 천천히 쉬어가며 걸은 시간이다.)

 

 

 

▣ 논개 기념관

 

 

기념관 앞쪽의 제법의 저수지(의암호)주변에 데크로드를 만들어 공원으로 꾸몄다.

인근 가까운 곳에 장수누리파크 공원을 조성되어 있어  같이 둘러보면 되겠다.

 

 

 

 

 

 

조그만 사당인가 했는데 주변 면적이 상당하다.

 

 

 

 

 

 

가까이

좌측 기념관, 우측은 비각, 

 

 

 

 

 

 

의암사.

 

 

 

 

 

 

의암사에는 논개의 초상화를 모시고 있다.

 

 

 

 

 

 

논개생장향수명비(論介生長鄕竪命碑 / 세울 수)

글이 어렵다   Stele of Nongae 에서 Stele는 중심주, (비문 조각 등을 새긴) 돌기둥, 현판등으로 번역된다.

 

이 논개생장행수명비는 헌종12년(1846)에 논개의 출생지를 기념하기 위해 장수현에서 세운 비석이다. 당시 장수현감 정주석이 비문을 지었으며, 비문은 "호남절의록"의 내용과 설화에 근거하여 씌여진 것으로 보인다.

이 비는 일제 강점기에 파괴될 위기가 있었으나, 장수군의 젊은 청년들이 밭에 묻은 후 곡식을 심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하였다.

광복후 비를 파내어 비각을 건립하고 비를 세웠는데, 1974년 의암사 이전 시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기념관도 둘러본다,

 

 

 

 

 

 

논개는 1574년 장수군 장계면 주촌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마을에서 훈장을 하던 주달문이고 어머니는 밀양 박씨이다. 논개가 5살 되던  해 아버지는 죽고, 어머니는 딸과 자신의 생계를 시동생 주달무에게 의탁하지만 주달무는 도박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고 논개를 마을 부자이던 김풍헌의 집에 민며느리로 팔고 달아난다. 어린 딸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던 논개의 어머니는 논개를 데리고 친정으로 피신한다. 그러자 돈을 낸 김풍헌은 논개 모녀를 관아에 고발하였고 이들의 재판을 맡은 것이 당시 현감이었던 최경회였다.

 

 

 

 

 

 

최경회는 논개 모녀의 띡한 사정을 듣고 이들을 무죄 방면했으며 모녀가 살길이 막연하자 관아에서 잔심부름하며 살게하였다. 최경회는 해주 최씨로 전라도 능주사람이었다. 양응정, 기대승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1567년 과거에 급제하였다.

장성한 주논개는 최경회의 첩으로 들어갔으며, 이후 임진왜란이 터지자 전라도 지역에서 의병장이 된 최경회를 뒷바라지하였다. 그리고 1차 진주성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앃아 경상도우병사가 된 최경회를 따라 진주로 가게 된다,

 

 

 

 

 

 

1592년 10월 1차 진주성 전투에 이어,  1593년 2차 진주성 전투가 일어나고 7월 29일 진주성은 함락되자 최경회는 김천일 등과 함께 남강에 투신하여 자결한다.

왜장들은 승리에 도취하여 촉석루에서 술판을 벌였다. 이때 주논개는 관기들 틈에 끼어들고는 술에 취한 왜장 중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꾀어내어 남강의 바위 위에 올랐다. 그리고 그를 끌어안고 그대로 강물에 투신하여 순절하였다.

 

<이항 현지 자료임>

 

 

 

 

 

문헌속에 살아 있는 주논개

1621년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진주 관기 논개는 왜장을 끌어안고 강물에 뛰어들어 함께 죽었다."

1629년 정대륭이 주논개가 순절한 바위에 "의암(義巖)"이라는 글씨를 새긴다.

1650년 민순지의 <임진록>에 "논개라는 여자가 일부러 예쁘게 꾸미고 있자니 적장이 좋아혀며 다가왔다."

1721년 <충렬실록> 1831에 진주사람들이 의로움을 잊지않고 포상을 요청하는 장계를 올렸으며 관련 내용이 자세히 남아있다.

1740년 영조임금의 윤허를 받아 정려인 의기사를 짓고 의기논개지문의 현판을 걸게 된다.

1800년 <호남절의록>에서 주논개는 최경회가 사랑했던 사람이며, 고향은 전라도 장수임을 알 수 있다.

1839년 <호남삼강록>에서는 장수 본현에 정려가 있다고 밝힘

1846년 장수현감 장주석이 촉석의기논개생장향수명미를 세우고 "열사들도 어려운 일을 여자의 몸으로 대의를 판단하였으니 그 어찌 열렬하지 아니한가. 논개의 충렬에 옷깃을 여민다"고 하였다.

1872년 <호남읍지>에서는 주논개의 고향이 장수 임내면 풍천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 어필각

 

 

전북 장수군 산서면 오성리,

어필각을 찾아왔다.

어필각은 카카오 내비로 검색되어 쉬이 찾을 수 있다.

 

 

 

 

 

 

안성 강원도 관잘사 고신 왕지

 

왕지란, 임금의 명령이나 전달할 사항을 적어 해당자에게 전하는 문서로, 이 왕지는 태종 14년(1414)에 당시 청백리로 소문난 천곡 안성(安省)에게 내린 것이다.

안성은 고려 말 조선초의 문신으로, 우왕6년(1380)에 문과에 급제하여 보문각직학사, 상주 판관이 되어 이름을 날렸다. 태조 2년(1393) 청백리로 뽑혔으며, 지보주사, 참지의정부사, 강원관찰사 등의 벼슬을 지냈다. 그가 죽은 후 장수의 창계서원에 모셔졌으며, 시호는 사간(思簡)이다.

이 왕지는 영조 27년(1751)에 세운 어필각에 보존되고 있다.

 

 

 

 

 

 

출입문이 잠겨있어 담 너머로 외관만 본다.

 

 

 

 

▣원흥사

 

 

장수군에서 발행한 관광안내도에 원흥사가 있어 찾아볼려니 카카오내비에 검색되지 않는다.

마침 원흥마을이 있어 동네분에게 위치를 물으니 산 기슭으로 안내한다.

초행이라면 찾기가 쉽지 않을 듯 싶다.

 

 

 

 

 

 

원흥사는 백제시대 개로 창건한 고사찰로 고려중엽 가람으로 중건 후 조선전기에 소멸하였다하며 미륵불상만 오랫동안 존속하여 왔다. 그후 단기 4263년에 충담스님이 사찰을 중창하고 원흥사로 개칭하였다.

 

<현지 안내비문에서 발췌>

밑줄친 곳은 뭔가 앞뒤가 맞지않은 듯 싶어 표시한 것이다.

 

 

 

 

 

불상들은 색이 변해 검은 빛을 따고,

 

 

 

 

 

 

 

수풀은 무성하여 뭔가 어수선하다.

제법 규모의 미륵보전과 조그만 삼성각, 그리고 주변의 요사 정도로 조그만 절이다.

주 불전은 미륵보전이며 내부는 보지 않았다.

 

 

 

 

 

 

미륵보전 뒷편의 평화염주탑

 

 

 

▣압계서원

 

카카오 내비의 안내를 받아 압계마을로 진입하니 마을 뒷편으로 안내한다,

좁은 농로를 따라 오르다가 다음 마을이 보이는 곳의 갈림길에서 우측길로 접어들었더니 잘못 진입이다. 차량을 되돌리기 또한 곤란하다. 휴대폰에서 카카오 지도로 위치를 추적하니 압계서원의 위치는 가늠 되는데 진입로가  좁다. 그래서 되돌아 나왔다. 차량 외관이 흙탕물로 범범이 되었다.

귀가 후 압계서원을 검색하니 찾아간 길보다는 조금 넓은 길이 따로 있지만 조건은 썩 좋아보이지 않는다.

 

 

 

 

▣호룡보루

 

 

산서면 소재지에 위치한 산서파출소 옆에 호룡보루가 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후 좌익세력과의 이념 대결로 인해 무력충돌이 일어나자 치안유지를 위해 1949년에 지서의 동.서 양쪽에 보루를 축조하였다. 서쪽 보루는 한국전쟁때 무너졌고, 지금은 동쪽 보루만 남아있다.

호룡보루는 호량이와 용처럼 용맹하게 고장을 지키겠다는 뜻을 가진 보루로,  보루는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돌이나 콘크리트 따위로 튼튼하게 쌓은 구축물을 말한다.

1998넌  복원했다.

<현지 안내문에서>

 

 

 

 

 

내부 사다리가 설치되어 있어 윗쪽으로 오를 수 있게 하였다.

 

 

 

 

 

 

당시 전사한 경찰관 4명과 수복대원 11명 등 15명의 명복을 빌며 추모행사도 이루어지고 있다한다.

 

 

 

 

▣ 권희문 가옥

 

 

이 집은 안채와 사랑채, 아래채가 안마당을 둘러싸고 있으며, 문간채, 바깥채 등이 있다. 조선시대 상류 주택의 공간구성을 따라 사랑마당과 안마당을 구분하였고, 안채 뒤에 넓은 뜰을 두었다.

 

 

 

 

 

 

사랑채.

영조 49년(1773)에 지은 사랑채는 남자들의 생활 공간으로, 데청과 방으로 이루어져 있고, 전면에 난간을 두었다.

 

 

 

 

 

 

사랑채 앞의 헛간과 화장실

 

 

 

 

 

 

중문을 들어서면 안채가 있다.

현 주인이 살고 있는 집으로 관광안내도에 소개되어 있어 찾아왔다고 양해를 구하고 집 주위를 둘러본다,

 

 

 

 

 

 

안채의 뒷뜰인 셈이다.

 

 

 

 

 

 

안마당.

 

 

 

 

 

 

안채와 마주하고 있는 이 건물은 아랫채?

 

 

 

 

 

 

안채는 ㄱ자형 건물이다.

 

 

 

 

 

 

안채

고종23년(1886)에 지은 건물로 전북 지역에선 보기 드문 ㄱ자형 건물이다.

사당은 별도로 건립하지 않고 안채의 대청 한 칸을 사당방으로 사용하고 있다한다.

 

 

 

 

 

 

안 마당에서 바라본 사랑채 뒷편이다.

농촌지역의 주택으로 주변이 어수선 하다.

집 주변엔 모양새 고운 토담으로 길게 둘렀다.

 

 

 

 

 

▣ 오산사

 

 

오산사가 절인줄 알았다.

지역민에게 인근 오산사라는 절을 물으니  칠령사로 추정되는 절을 가리킨다.

거리가 멀어 아니다 싶어 카카오 지도로 찾고 보니 권희문 가옥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어느분의 사당이다.

참 무식했다.

 

 

 

 

 

 

대문이 열려있어 들어가 본다.

 

 

 

 

 

 

오산사는 구한 말 호남지역의 유학자이며 애국지사였던 권중원 선생(호 청련재)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선생은 외세의 국권침탈이 날로 격화되어 가자 1885년부터 숙(塾 / 글방 숙)을 열어 인재 양성에 힘썼으며, 1905년 경부터 1910년에 이르던 시기에 정재 이석용이 진안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킬 때 서로 교유하며 군자금을 제공하고, 거사 직전에 이석용의 가족들을 안전한 곳으로 은신시카는 활동을 하였다. 그러던 중 이석용과 의병에 협조한 사실이 발각되어 가옥과 전답 서책이 몰수되고 불태워지는 참화를 겪었으며 이후 도피하던 중에 1910년 51세로 순절하였다.

이에 정부는 2019년 선생의 애국청정과 희생정신을 높이 기리어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고, 국가보훈처에서 동년 현충시설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발췌>

 

 

 

 

 

 

 

 

 

 

 

 

 

송덕비.

 

관광안내도에 미륵암, 영월암 등이 있으나 찾기도 어렵고, 시간도 부족하고, 특별한 것도 없을 것 같아 둘러보지 않았다,

귀가 길 인월에 있는 돼지국밥집에 들렀다.

종종 지나칠 때 들러는 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