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지역의 산

남해 바래길 이순신 호국의 길(남파랑길 46코스)

정헌의 티스토리 2023. 12. 24. 22:07

 

■남해 바래길 이순신 호국의 길 일부(남파랑길 46코스)

 

남해 바래길 중 이순신호국길은 서면 중현리에 위치한 새남해농협 중현지점에서 출발하여 고현면 소재지를 지나 남해대교 아래의 노량선착장에 이르는 16.6km의 길이다. 약 6시간 정도 소요된다.

중현농협에서 출발하여 바다와 떨어져 목가적인인 느낌이 물씬나는 마을길과 숲길을 따라 이순신 순국공원까지 걷고, 이후  이순신장군의 유해가 육지로 올라와 노량 충렬사까지 운구되었던 이야기가 깃든 길을 따르면 된다.

오늘은 이순신순국공원에서 출발하여 월곡마을까지는 이순신 호국길을 따르고 월곡마을에서 지름길을 통해 순국공원으로 되돌아 오는 원점회귀 코스를 가볍게 걸어본다. 기대 이상이다. 가볍게 걷기를 원하는 분들에게는 추천해도 좋겠다. 이순신 순국공원, 이락사와 참망대 등 같이 둘러보면 된다.

 

 

 

 

▷가는 길

 

 

 

 

 

▷탐방코스

이순신 순국공원 남쪽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이락사, 첨망대를 둘러보고 월곡마을까지는 호국의 길, 되돌아 올때는 지름길 도로를 따라 원점회귀.  ( 이순신 영상관 영상관람 시간  20~30분 제외 천천히 약 2시간 30분  /  2023. 12. 24)

 

 

 

▷탐방안내도

 

 

이순신 호국의 길은 남해 서면 중현리에 위치한 새남해농협 중현지점을 들머리로 한다.

 

 

 

 

▷탐방후에

 

 

어디 점심이나 먹고 가볍게 걸을 곳을 찾다가 남해 이순신 호국길 중 일부만 걸으면 될 것 같아 늦게 집을 나선다.

이곳은 하동 노량, 점심때가 되어 들런 집이다.

 

 

 

 

 

 

이집 젊은 주인은 식당 분위기를 산토리니풍으로 살짝 물들였다.

 

 

 

 

 

 

양념조림 20,000원

생갈치 정식 25,000원

알음알음 많은 분들이 찾는 집이라 한다.

진주 명석면사무소 인근에 간혹 들러는 갈치조림 집이 있는데 비교하자니 가성비, 맛에서 더 나은것 같다. 

 

 

 

 

 

 

이순신 순국공원에 왔다.

이락사 입구를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이곳은 바다쪽으로 바라볼 때 좌측편의 주차장이다. 한옥의 건물(노량대원)등 이순신 순국공원을 온전히 둘러 볼 생각으로 이쪽 주차장에 주차했다.

 

 

 

 

 

 

이 사진은 며칠 전(12월16일)에 이곳 관음포 이순신 순국공원에 잠시 들렀을 때 찍은 사진이다.

간혹 이곳 앞 도로를 지나치면서도 관음포와 바래길, 이락사. 이순신 순국공원을 무심코 지나쳤었는데, 관음포의 역사적 의미와 이락사 등이 있음을 알고 다음에 한번 찾아도 되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었다.

주변 지형을 살펴보니 대도를 비롯한 일련의 섬들이 바다를 군데군데 가로막고 있어 노량해전시 왜군이 이곳 관음포로 쉬이 진입하게 생겼다.

 

 

 

 

 

 

고려대장경 판각지로 표시되어 있다.

 

인터넷에서 위키백과에 기록된 관음포에 대한 내용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팔만대장경(국보제32호)이 고려 고종 23년(1236) 남해현 북방지역인 관음포(현재 위치는 남해군 고현지역)에서 판각되었다. 불력으로 외적의 침입을 대비하기 위해 전체 민중의 힘을 모았던 대 역사가 남해에서 이뤄졌고, 팔만대장경 중 종경록 권27에 '정미세 고려국 분사 남해대장도감"이라는 간기가 있다. 또한 정인(?~1251)은 사재를 털어 남해에 정림사(定林社)를 짓고 팔만대장경판 간행에 참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경판 판각에 필요한 수많은 목재를 운송하는데는 해상경로를 이용하기에 관음포가 가장 적합한 곳이었던 것이다.

`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현 북쪽 21리에 신우때에 해도원수 정지장군이 수군을 거느리고 여기에서 왜적을 섬멸하였다. 왜적이 우리에게 패전하게 된 것은 이 전역(戰役)에서 처음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1380년 진포해전에서  왜선 500척이 격침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1383년 120척의 군선을 이끌고 합포(현 마산)를 공략하였다. 이에 해도원수 정지는 나주와 목포에 있던 전선 47척을 이끌고 경상도로 급히 항진하여 현 섬진강 어구에 이르러 합포군사를 소집하여 재정비 할 때 이미 왜구는 관음포에 다다라 있었다. 이에 화포를 사용하여 17척을 대파하였다. 당시 고려군 화포를 운영하는 책임자는 최무선이었는데 움직이고 있는 적선에 화포를 정확하게 적중시킨 진정한 해전이었다.

(최영의 홍산대첩, 나세 등의 진포대첩, 이성계의 황산대첩)

 

관음포라는 지명이 언제부터 붙여졌는지 알 수 없으나 <고려사>에 의하면 위 정지장군의 관음포에서 왜선17척을 격침한 대첩을 남해관음포대첩이라 적고 있다, 지명 유래는 불성지(佛聖地)의 의미가 담겨 있는 관음의 포구였기에 지명이 붙여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선조 31년(1598) 12월 16일 조선과 명나라 수군이 왜적을 대파시킨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은 관음포 앞바다에서 왜군을 대파하고 본인은 사망한다.

 

 

 

 

 

 

옆에서 바라본 고려대장경 판각지,

 

 

 

 

 

 

나대용이 건조한 거북선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고안한 거북선을 실제 건조한 사람은 이순신의 군관인 나대용이다. 거북선은 판옥선을 개량하여 위에 덮개를 씌운 당대 무적의 장갑함이다.

체험은 파이프에 한 사람이 소리를 지르고 다른 파이프에  또다른 사람이 귀로 소리를 듣는 체험이다, 근력. 공간지각력. 유연성, 평형성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현지 안내문>

 

 

 

 

 

 

이순신 순국공원 주차장에서 바다를 향해 섰을때 좌측 끝에 한옥의 건물이 있다.

무슨 건물이지? 싶어 찾아본다.

 

 

 

 

 

 

관음루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노량대원 현판을 달았다.

좌측 한켠엔 사무실로 쓰나보다.

 

 

 

 

 

 

건물의 배치가 향교나 서원의 배치 형태를 하고 있다.

향교의 동재라 할 수 있는 전승관은 교육실로 이용되고 있고,

 

 

 

 

 

 

서재의 위치에 순국관이 있다.

역시 교육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노량대원을 둘러보고 해변으로 나온다. 현재는 바닷물이 많이 빠진 상태다.

 

 

 

 

 

 

해안길을 따라,

 

 

 

 

 

 

관광안내소,

매점,  커피, 흑마늘, 소보루 파이 등 판매장이 있다.

 

 

 

 

 

 

이락사 입구로 왔다.

 

 

 

 

 

 

양쪽의 이순신 순국공원 가운데쯤에 이락사 입구가 있고, 바닷쪽으로 제법 돌출된 곶에 첨망대가 있어 둘러보고 간다. 

 

 

 

 

 

戰方急  愼勿言我死 (전방급 신물언아사)

 

음 1598.11.18. 22시경 조.명 연합함대 묘도 출발, 명 수군은 노량수로 쪽으로, 조선 수군은 관음포로 향함

11. 18.  24시경 관음포에서 이충무공 축천기도 드림. "만약 이 원수를 섬멸할 수 있다면 죽어도 아무런 근심이 없겠나이다.(若殲斯讐  死亦無憾 / 약섬사수  사역무감 )" / 다죽일 섬, 원수 수, 한할 감.

11.19. 2시경 조명연합함대 400여척과 일본군 300여척과 접전 시작

11.19. 아침 전투중 왜군 총탄이 이충무공 왼쪽 가슴을 관통, 임종 전 " 전쟁이 한창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순국

11.19. 12시경 일본 전선 200여척 분멸(焚滅). 50여척 도주. 왜장 '시마즈 요시히로'도 탈출함.

 

<현지 안내문에서>

 

 

 

 

 

 

관음포 이충무공 유적

 

남해 관음포 이충무공유적은 선조31년(1598) 노량해전에서 충무공 이순신이 순국한 곳이다. 임진왜란의 마지막 격전지였던 이곳에서 이충무공은 관음포로 도주하는 왜군을 쫓던 중 적탄에 맞고 순국하였다. 그 이후 관음포 앞 바다를 '이충무공이 순국한 바다'라는 뜻에서 이락파(李落波)라고도 한다,

순조 32년(1832)에 이순신 장군의 8세손 통제사 이항권이 왕명에 따라 충무공 이순신의 충의와 공적을 기록한 유허비를 세웠다. 충무공이순신유허비는 홍문관 대체학 홍석주가 짓고 예문관 제학 이익회가 썼다.

해방 후 1950년 남해 군민 7,000여명이 헌금하여 정원과 참배로를 조성하고 1965년 박정희 대통령이 '이락사(李落祠)'와 '대성운해(大星隕海/ 떨어진 운)'라는 현액을 내렸다. 1998년 12월 16알 충무공 이순신 순국 400주년을 맞이하여 유언비를 세우고 주변을 정비하였다.

이 유적은 임진왜란의 명장 이순신의 공로와 충의가 담긴 역사의 공간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우측은 첨망대 가는 길

 

 

 

 

 

 

현판엔 대성운해(大星隕海/ 떨어질 운)로 적혀있다. 

큰 별이 바다에 떨어지다는 뜻이다.

 

 

 

 

 

 

議政府領議政諡忠武李公舜臣遺墟碑 (의정부령의정시충무이공순신유허비 /시호 시 )

有名水軍都督朝鮮國三道統制使 贈 (유명수군도독조선국삼도통제사 증)

 

 

 

 

 

 

좌측 비의 비문은 사당의 비와 내용이 같다.

 

 

 

 

 

 

우측엔 이들 몇 그루 소나무 때문인가? 아님 다른 이유인지 조그만 동산이 있다.

 

 

 

 

 

 

이락사를 둘러보고 첨망대로 향한다.

 

 

 

 

 

 

 

 

 

 

 

 

 

 

 

 

 

 

 

 

 

 

 

 

 

 

 

첨망대(瞻望臺 / 볼 첨)

 

 

 

 

 

 

 

 

 

 

 

 

 

주변 나무들이 자라 조망이 썩 좋지는 않다.

 

 

 

 

 

 

되돌아 간다.

 

 

 

 

 

 

이순신 영상관으로 왔다.

 

약20분? 노량해전을 영상화 했다.

상영시간 10, 11, 1, 2, 3, 4, 5시

입장료 어른 3,000원 청소년 2,000원, 어린이 1500원

남해군민, 경로 등 무료이다. 우선은 이순신 호국길을 걷고 나중 시간이 되면 영상을 시청하기로 한다.

 

 

 

 

 

 

영상관이 있는 지역도 이순신순국공원이다.

 

 

 

 

 

 

이순산 장군상 앞을 지나.

 

 

 

 

 

 

해안쪽으로 난 길을 따른다.

 

 

 

 

 

 

이곳 이정표

이순신 순국공원에서 월곡항까지는 3.9km, 남해 충렬사까지는  7.1km,

 

월곡항까지 갔다가 되돌아 온다면 대충 6km. 지나온 길을 더하면 합계  7~8km쯤이 오늘 걸을 거리가  될 듯 하다

 

 

 

 

 

관음포.

 

 

 

 

 

 

저만큼 전주 앞쪽에 갈림길이 있다.

이순신호국길은 우측의 농로를 따라 오른다. 이정표가 있어 충분히 알 수 있다.

 

 

 

 

 

 

 

 

 

 

 

 

 

 

 

 

 

 

 

 

 

 

 

 

 

 

 

 

 

 

 

 

 

 

길가에 굴이 있어.

깊어 보이지는 않는다.

 

 

 

 

 

 

저곳 중간에서 우측으로,  역시 이정표가 있어 알 수있는 곳이다.

 

 

 

 

 

 

노량바다.

 

 

 

 

 

 

우측으로,

 

 

 

 

 

 

구 차도를 만나 이 길을 따르기도 한다.

 

 

 

 

 

 

과거 버스가 다니던 도로였는데 4차선 도로가 생김으로써 농로로 전락했다.

 

 

 

 

 

 

 

 

 

 

 

 

 

갈림길마다 이정표가 있다.

좌측길로 간다.

직진은 월곡마을로 바로 이어지는 길이다, 나중 되돌아 올 때 저곳으로 올라왔다.

 

 

 

 

 

 

 

 

 

 

 

 

 

 

 

 

 

 

 

 

 

 

 

 

 

 

 

 

 

 

 

 

 

 

 

 

 

 

 

 

 

 

 

 

 

 

 

 

 

 

 

 

 

 

 

 

 

 

 

 

 

 

 

 

 

 

 

 

 

월곡마을쪽으로 내려선다.

 

 

 

 

 

 

월곡항

 

 

 

 

 

 

 

 

 

 

 

 

 

월곡마을에서 남해 충렬사까지는 안내도로 보면 3.2km거리로 나오지만 가까운 곳으로, 도로를 따르는 길이다. 노량까지 갔다가 택시로 되돌아갈까도 하다가 이곳 월곡마을에서 되돌아 가기로 한다.

 

 

 

 

 

 

저~기 보이는 곳이 지름길이다.

지나는 길에 주변 어느집에서 시금치를 삿다.

 

 

 

 

 

 

갈림길을 만나,

이순신순국공원으로 되돌아 간다.

지나온 길이기도 하고 마을로 이어지는 길이기도 하다.

 

 

 

 

 

 

이순신 영상관으로 왔다.

 

 

 

 

 

 

시간적 여유가 있어 둘러보기로 한다.

노량해전 영상은 매 정시에 시작한다고 보면 된다.(12시 정각은 점심시간으로 제외)

 

 

 

 

 

 

이순신 영상관은 돔스크린이다.

따라서  드러누워서 영상을 시청하게 된다. 영상물은 쬐끔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20분 정도 상영을 한다는데 시간을 측정해 보지는 않았다.

영상관에서 노량대원쪽 주차장은 가깝다.

영상시간 관람을 제외하고 천천히 2시간 30분쯤 소요되었다.

 

 

 

 

 

▣ 남해 충렬사

 

 

충렬사는 노량마을에 위치한다.

바다에는 거북선전시관이 있고, 마을 가장자리에 충렬사가 있다.

 

충렬사로 가는 들머리에 남해 척화비가 있다.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 서양의 오랑캐가 침입해 오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고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戒我萬年子孫 (계아만년자손) 우리 만대 자손에게 경고한다.

 

척회비는 1866넌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를 승리로 이끈 흥선대원군이 서양 세력을 배척하고 그들의 침략을 국민에게 경고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 세운 비석이다.

남해에 처음 척화비를 세웠던 곳은 노량 선착장 입구였으나 일제강점기 때 무관심 속에 묻혀 있던 것을 해방 후 마을 사람들이 설천중학교 입구로 옮겨 보전하였다. 그 뒤 1988년 남해군과 남해문화원에서 원래 자리와 가까운 마을 안으로 옮겼다가, 남해 충렬사 성역화 사업이 끝나자 다시 원래의 위치로 옮겨 세웠다.

남해 척화비는 받침돌 위에 몸돌이 있고 맨 위에 지붕돌이 올려져 있는 형태로, 다른 척화비와는 모습이 달아 지방 관청에서 대원군의 척회비를 본떠 세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지 안네문에서>

 

 

 

 

 

자암  김구 비 (自庵 金絿 碑)

自庵金先生謫廬遺墟追   (귀양갈 적, 농막집 려)

 

충렬사 입구에 김구 비가 있어 金九선생 비인가? 했는데 아니다.

김구 선생의 자는 대유, 호는 자암으로 성종19년(1488) 서울 연희방에서 출생하였다. 약관 16세에 한성시에 장원하고 20세에 중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중종때 조광조에게 발탁되어 32세 나이로 홍문관 부제학에 올랐으나 기묘사회에 연루되어 남해에서 13년간 유배되었다. 조선전기 4대 세예가중 1인인 그가 남헤애서 유배 중에 저술한 <화전별곡>은 일점선도(一點仙島) 남해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경기체가이다. 이 비는 그의 6대 손인 김만화가 남해 현령으로 재직하던 숙종 32년(1706)에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가선대부삼도통제사이공태상 비

 

이태상의 본관은 덕수, 자는 내숙으로 숙종 27년(1701)에 출생하였으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5대손이다.

이태상이 진주병마사로 재직중인 영조36년(1760)에 남해 충렬사를 참배하고 청해루를 세웠다.

이 비는 1882년 전(前) 판관 문경일의 감독 하에 건립된 것으로 이순신장군의 전공을 기리고, 백성의 세금을 탕감해 준 선정을 칭송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충렬사로 들어간다.

 

충렬사는 충신과 열사를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남해 충렬사는 노량해전에서 순국한 충무공 이순신의 충의와 넋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충무공의 유구를 처음으로 안치한 것을 기려서 순국한 지 30년째 되던 인조 6년(1628)에 지역의 선비들이 초가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냈다. 효종 9년(1658)에 다시 지었으며, 현종4년(1663)에 통영 충렬사와 함께 임금이 내려 준 현액을 받았다,

사당 앞에는 우암 송시열이 충무공 이순신의 충의와 공적을 기리기 위해 짓고 동춘당 송준길이 쓴 충무이공묘비(李忠武公廟碑)가 있다. 비를 보하가기 위한 비각. 내삼문, 외삼문, 청해루 등이 있다.

사당 후원에는충무공의 시신을 초빈(草殯/장사를 지내기 전에 시체를 방 안에 둘 수 없는 경우에 관을 바깥에 놓고 이엉 같은 것으로 덮어서 눈비를 가리는 것)했던 곳에 가묘가 있다. 사당을 세운 이후에는 충렬사 옆의 호충암에서 화방사의 승장 1명과 승려 10명이 교대로 사당을 지켰다.

 

<현지 안내문에서>

 

 

 

 

 

입구에  청해루가 있다.

삼도통제사 이태상이 청해루를 세웠다는 비석으로 보아 이 청해루인가 보다.

 

 

 

 

 

 

 

 

 

 

 

 

 

 

계단 양측에 난간이 없어 위험하다고 판단되었는지 가운데 통로로 통과하도록 하고 있다.

 

 

 

 

 

 

비각 뒷편에서 본 모습이다.

 

 

 

 

 

 

비각의 현판이 일욕천보(日浴天補)인가? 보천욕일인가?.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은  이순신 장군의 공로를 보천욕일지공(補天浴日之功)이라고 말했다. 

어느분 블로그를 보니 이 현판은 박정희 대통령이 썼다고 한다,

 

 

 

 

 

충렬사에는 이순신 장군의 초상화를 모시고 있다.

 

 

 

 

 

 

사당 좌측에 충민공 비 (근심할 愍)가 있다.

 

1598.11.19일에 이순신 삼도수군통제사가 노량해전에서 순국하자 1633년에 향인 김여빈과 고승후가 이를 슬퍼하며 초옥 사당을 건립하고 위패를 봉안 추모함에 띠리 현령 이정건이 충민공비를 세웠다. 1643년에 충무공 시호가 책봉되었고1658년에 조정에서 사당을 신축함과  동시 충민공비를 매몰하고 이 충무공비를 건립하였다. 1973년에 남해 충민사가 사적지 233호로 지정되어 재정비 사업중 매몰된 충민공비가 발견된 것을 다세 세운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당을 바라봤을 떼 우측에 충무공비가 있다.

 

 

 

 

 

 

이순신 장군은 1958년(선조31) 음력 11월 19일 아침 관음포 앞바다에서 순국한다.

장군의 주검은 관음포를 출발하여 이곳 충렬사에 잠시 초빈(草殯)되었다가 고금도를 거쳐 충남 아산으로 운구되어 안장되었다. 이 가묘는 당시 이순신 장군을 충렬사 부근에 임시로 안치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조성한 무덤이다.

 

 

 

 

 

충렬사를 둘러보고 오늘 일정을 마무리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