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지역의 산

군산 임피역, 운심사, 발산리 오층석탑과 석등. 구일본인 농장창고, 원형변조, 이영춘가옥

정헌의 티스토리 2024. 1. 31. 19:02

■군산 구 임피역, 운심사. 발산리 오층석탑과 석등. 구일본인 농장창고, 이영춘 가옥

 

친구들 모임이 있어 군산으로 간다,

모임 약속을 오후 4시간로 잡아 조금 일찍 출발하여 과거 찾아보지 못했던 군산 몇 군데 근대유산을 찾아본다.

폐역이 된 임피역은 조그만 역사공원으로 꾸몄다. 구불길의 경과지이기도 하나 별도로 찾아봐도 되겠다.

운심사은 조그만 사찰로 주변 산세는 좋아보이나 외관을 둘러보기 위해서는 별로 볼게 없다.

발산리 오층석탑과 석등은 발산초등학교 뒷편에 있다. 어디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겼는지의 내력에 대해서는 안내문에 표시되어 있지 않다.

이영춘 가옥은 군산간호대학 내에 위치하며, 상시 개방하는 것 같다. 학교 교정내에 있으므로 주차등 편리함이 있고 근무하고 있는 직원 또한 친절하므로 해설을 부탁하는 것이 좋다.

비응항 주변의 탐방로도 염두에 두었는데 먼저와 기다리는 친구를 생각해 다음으로 미뤘다.

 

 

 

▷가는 길

 

 

 

 

 

▷탐방코스  (2024. 1. 28.)

군산 구 임피역 - 운심사 - 발산리 오층석탑과 석등. 구 일본인 농장창고 -  원형변조 - 이영춘 가옥

 

 

 

▷탐방후에

 

▣ 구 임피역

 

 

군산시 임피면 술산리 226-1

내비에 임피역으로 검색하면 이곳으로 안내한다.

크지않은 주차장을 조성하여 탐방객을 배려했고,

입구에 옥구농민 항일항쟁비가 있다.

 

 

 

 

 

 

먼저 인피역을 둘러본다.

1924년 6월 1일 역원배치간이역으로 영업을 개시하여  1936년 12월 보통역으로 승격되고 역사를 신축하였다.(철도청 자료)

현지 안내문에선 1910년대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1936년 개축하여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게되었다고 한다. 서양의 간이역과 일본식 가옥을 결합시킨 임피역사는 그 역사적. 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5년에 등록문화재 제 208호호 지정되었다. 

 

 

 

 

 

 

역내에는 과거 역사의 한장면을 모형으로 만들었다.

 

 

 

 

 

 

 

 

 

 

 

 

 

 

매표소,

 

 

 

 

 

 

역사를 둘러보고,

 

 

 

 

 

 

옛 철도를 본다.

 

 

 

 

 

 

군산 구 임피역은 1936년경 이리역(현 익산역)과 군산을 연결하는 군산선의 역사로 건립되었다. 하지만 2008년 폐역이 되면서 역사로서의 역할은 중단되었다. 현재는 관람 및 교육의 현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건축구조는 목재를 사용하였고, 벽체는 시멘트 모르타르(시멘트와 모래을 물에 갠 접합재)로 마감하였다. 지붕은 맛배집 형태에 박공을 설치하였고, 철로변 사무실에 모임지붕(사각뿔이나  육각뿔처럼 용마루가 없이 하나의 꼭짓점에서 만나는 지붕)이 돌출되어 있다. 대합실과 사무실 사이에 난방시설인 벽난로가 있으며 굴뚝이 지붕위에 세워져 있다.

일제강점기 소구모 간이 역사의 건축형식과 기법을 볼 수 있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역사 주변엔 조그만 공원으로 꾸몄다.

 

 

 

 

 

 

서송 이영구 박사(1931.11.16~2020.2.3.) 기념비

 

임피역사는 일문학자 겸 수필가인 이 박사가 광복 전후에 이리공업학교에 통학하고 한국전쟁 기간에는 '文脈(문맥)' 동인들과 문학의 꿈을 키우던 터전이다. 서수면의 소나무를 상징하는 아호 서송(瑞松)처럼 향토를 사랑한 그는 은사 고형곤을 따라 서울대를 졸업한 후, 군산교육대. 숭전대. 중앙대 교수로서 후진을 양성하고, 일본의 대학에서 비교문학을 강의했다.

1973년에 한국일본학회를 창립한  후  '서송한일학술상'을 제정.운영하였고, 1990년 소외된 문인을 위한 '우리문학기림회'를 결성하여 30여년 국내외에 한국문학 선양에 힘썼으며, 문집 <대화와 독백>을 남겼다.

<기념비 내용임>

 

 

 

 

 

 

객차 전시관

한켠에 이런 열차도 갖다놓았다. 좀은 현대적인 열차다.

 

 

 

 

 

 

열차 내부에도 둘러볼 거리를 만들었다.

 

 

 

 

 

 

경암동 철길마을 사진도 있다.

 

 

 

 

 

 

 

 

 

 

 

 

 

 

임피향교에서 임피역을 거쳐 신창마을까지를 구불길 2-1길 - 미소길이라 이름붙였다.

군산엔 근대문화유산들과, 근대역사박물관, 새만금, 고군산군도, 금강철새조망대, 채만식문학관, 진포해양공원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다,

 

 

 

 

 

 

임피면의 역사

군산시 동부에 자리잡은 임피면은 풍요로운 충적평야로 인해 일찍이 번영을 누렸던 지역이다. 삼한시대 임피면은 마한의 54개 부족 중 하나인 시산족의 근거지로 신흥국이라 불렸으며 또한 소도라고도 불렸다. 이후 백제가 세력을 확장하여 임피지역은 시산군이라 불리다가 통일신라 때인 757년에 임피(臨陂)라고 개명되었다. 임피는 방죽에 다다른다는 뜻으로 과거 이 일대에 바닷물을 막기 위한 방죽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임피역

 

       김중수

 

여기 임피역

유년의 그림자 눈에 어려 온다.

 

동쪽 철길가 언덕

소작농 땀 배어든 볏가마

수탈되어 철마에 실려갔던 자리

 

굶주린 배 성난 눈초리

임피, 서수에서 남산재를 넘어온

외마디소리 휘몰아쳤던 날

 

그 날의 임피역

이제 역사의 횃불로 타오른다.

 

 

 

 

 

 

술산리의 화기를 누르는 연방죽

 

 

 

 

 

 

거꾸로 가는 시계탑

 

 

 

 

 

 

논이야기

1946년 <해방문학선집>에 발표된 채만식의 단편소설로 일체치하 일인 토지 침탈 과정 및 해방 후 일본인 재산 처분 과정을 통해 농민의 현실과 부조리한 사회상을 풍자적으로 그렸냈다.

 

주인공 한생원의 아버지는 동학에 가담했다는 누명을 쓰고 논 열세 마지기를 마을원에게 빼앗겼다. 그 뒤 살림이 어려워진 한생원은 일본인 고리대금업자 길천이 땅을 비싸게 사들인다는 소문을 듣고는 남은 논을 팔아 빛을 갚고 다른 땅을 서려한다. 그러나 모두들 길천에게 땅을 파는 바람에 땅을 사지 못한 그는 소작농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세월이 흘러 광복이 되자 한생원은 일본인들이 쫓겨갔으니 논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잇속에 밝은 무리들이 일본인 재산을 부당처분하여 논은 다른 자의 소유가 되어 버린다.

 

 

 

 

 

 

우물터

 

 

 

 

 

 

재래식 화장실

 

 

 

 

 

 

오포대

과거 정오를 알리는 사이렌 소리를 오포라고 했다.

더 과거에는 사이렌 대신에 대포를 쏘았나? 오포(午砲)

 

 

 

▣ 운심사

 

 

군산시 대야면 산월리 751-2

운심사에 왔다.

대야면소재지 북쪽 근거리에 위치한다.

중간 차도변에서 이곳까지 약 0.3km구간 도로는 노폭이 협소하여 승용차 1대 겨우 지나갈만 하다.

사찰 아랫쪽에 차량 몇대 주차 공간이 있다.

 

 

 

 

 

 

주변은 아담한 산세이나 깨끗하고 단정한 느낌은 들지 않는다.

 

 

 

 

 

 

법당

 

 

 

 

 

 

요사.

외견상으로는 규모가 작은 암자수준의 절이며,  신도가 아니라면 일부러 찾기에는 거시기하다.

요즘은 외관과 주변을 깔끔하게 꾸며  많은 관광객을 끌여들이는 절들도 더러 있다.

 

 

 

 

▣강산식당

 

 

강산식당

대야면사무소 옆에 있다. 앞쪽에 농협이 있어 주요 관공서와 이웃하고 있는 셈이다.

내비에 강산식당으로 검색하면 된다.

 

 

 

 

 

 

강산으 변해도 맛은 절대 지존!

강산식당에서 몸 보신 

와글와글 황기순 외  유퉁의 사인도 보인다.

 

 

 

 

 

 

식당은 조그만 하다.

 

 

 

 

 

 

뭘 먹을까 물었더니만 여기 오시는 분들 대부분이 소머리국밥을 찾는단다,

몇 반찬도 깔끔하고 맛있다.

국물까지 깨끗이 비웠다.

 

 

 

 

▣ 발산권역  / 발산리 5층 석탑. 석등

 

 

발산초등학교 뒷편에 주차장과 화장실이 조성되어 있다.

 

 

 

 

 

 

이곳 발산권역센타에서 최호장군 유지와 전시관 1.47km, 선돌(0.537km), 오줌바위 약수터(1.3km)가 있다.

모두 낯선 지명이어서 쬐끔 궁금하기도 하다.

 

최호장군을 인터넷상에서 검색해 보니 이곳 개정면 발산리 태생으로 선조7년 39세에 무과병과에 합격하고, 2년 후 선조 9년(1576) 무과중시 갑과에 장원으로 합격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서울에서 의주까지 2개월 동안 선조일행의 파천길을 뒤에서 지켰고, 이후 함경남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받아 가토 가요마사를 상대로 의주를 수호하는 등 활약을 한다. 정유재란이 일어나기 10개월 전에 충청도 수군절도사로, 이후 충청 수사로 이몽학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운다.

1597년 이순신이 모함을 받아 삭탈관직 당하고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받았을때 원균 휘하에 종군하였다 정유년 칠천량 해전에서 도주하는 원균을 뒤로 하고 끝까지 왜군과 맞서 싸우다 이억기 등과 함께 전사한다.

칠천량해전은 정유재란때인 선조30년(1597)에,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거제 칠천량에서 왜군의 기습을 받아 대패한 전투다. 원균은 고성으로 도망치다 사망했으며, 전라우수사 이억기는 마산?쪽으로 후퇴하다 사망했다. 배설은 함선 12척을 가지고 달아났으나 훗날 이순신에게 인계되어 노량해전에서 대승을 이끌어 낸다.

 

 

 

 

 

발산리 오층석탑 가는 길

 

 

 

 

 

 

처음엔 저 노랑색 건물이 뭔가 했다.

저 건물 뒷편에 오층석탑, 석등 등이 함께 있다.

 

 

 

 

 

 

발산리 육각부도

 

 

 

 

 

 

이 발산리 육각부도(전북문화유산자료/ 고려시대)는 일제강점기에 현재의 자리로 옮겨왔다.(어디에서 옮겨왔다는 말은 없다./ 여타 인터넷 자료에 의하면  일본인인 시마타니 야소야라는 사람이 위치를 알 수 없는 절터에서 가져왔다고 전한다.)

육각의 지대석 위에 2단의 하대석이 있는데 하단에는 안상이 새겨져 있고 상단에는 복련과 함께 중대 받침이 높게 각출되어 있다. 육각의 중대석에는 우주를 본떠 새겼으며 양련의 상대석 위에는 낮은 탑신 받침이 있다.

육각의 탑신석은 2개소에 문비를 새겼고, 옥개석 아래에는 3단의 옥개 받침과 함께 연자와 부연을 새겼으며 상면은 기왓골을 선명하게 조각하였다. 오각부에 귀꽃 장식이 있었으나 모두 없어졌으며 상륜부도 없어졌다.

우리나라 불교 조형물에서 6각이 등장하는 것이 고려시대에 들어 중국 송나라의 영형에 의한 것이라하여 그 연대를 어림할 수가 있다.

이 부도는 전체적인 구도와 조각 수법이 뛰아날 뿐만 아니라 6각이라는 형태가 매우 특이하다. 평면형의 특이함과 희소가치를 지닌 이 부도는 비교적 높은 조각 수법과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이웃하여 다른 부도.

 

 

 

 

 

 

 

 

 

 

 

 

 

한쪽 면에는 석등만을 진열하였다.

 

 

 

 

 

 

군산 발산리 석등(국가지정 문화유산 보물/ 통일신라시대 건립) 또한 일제 강점기에 현재의 자리로 옮겨왔다.

( 인터넷 어학사전에 이 석등과 5층 석탑은 완주 고산면 봉림사터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왔다한다.) 

석등은 불을 켜두는 화사석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이를 받쳐 주는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 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받침의 가운데 기둥은 사각의 네 모서리를 둘글게 깎은 모습으로, 표면에 구름 속을 요동치는 용의 모습을 새겼다. 이러한 형태는 우리나라에서는 하나밖에 없는 독특한 모습이다.

화사석은 4각의 네 모서리를 둘글게 깍아 8각을 이루게 하였으며, 각 면에는 4개의 창과 사천왕상을 번갈아 두었다. 사천왕은 불교의 법을 지키는 신이다. 이러한 사천왕을 화사석에 새겨 넣은 것은 등불을 보호한다는 의미를 지나고 있다.

지붕돌은 8각으로 각 모서리 선이 뚜렸하며, 곡선을 그리는 처마는 여덟 귀퉁이에서 치켜올림이 시원하다. 꼭대기에는 연꽃무늬가 조각된 머리 장식 받침대를 마련해 놓았으나, 현재 머리 장식은 남아있지 않다.

화사석의 사천왕상과 지붕돌의 양식 등을 통해 볼 때 발산리 석등은 통일신라시대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듯하다,

 

 

 

 

 

 

 

 

 

 

 

 

 

 

 

 

 

 

 

 

 

 

 

 

 

 

 

발산리 오층석탑(국가지정문화재 보물 / 고려시대 건립)은 일제강점기에 현재의 자리로 옮겨왔다. 

석탑은 2단의 기단위에 5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였으나 지금은 탑신의 한 층이 없어지고 4층까지만 남아있다.

아래의 기단 모두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기단 위로 4층의 탑신에는 각 층의 몸돌마다 네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경사가 급하고 추녀 끝이 약간 들려 곡선을 이루고 있으며, 밑에는 3단의 받침을 두어 고려시대의 모습을 보여 준다. 탑머리 부분에는 머리 장식이 일부 남아 있으나 이는 당시의 것이 아니라 훗날 보충한 것으로 보인다.

이 탑은 전체적으로 균형미가 있으며, 고려시대 석탑의 간결한 아름다움이 잘 나타나 있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옆에 구 일본인 농장 창고의 용도가 귀중품을 보관하기 위한 것이였다 하니 일제시대 이 곳이 일본인 농장주의 건물이  있었고, 주변을 정원으로 꾸미기 위해 탑 등 석물을 가져왔는지도 모르겠다.

후에 발산초등학교가 들어서면서 이 석물들이 학교 뒷편에 배치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발산초등학교,

 

 

 

 

 

 

발산초등학교 정문으로 진입해도 될 것 같으나 학생들이 있으므로 학교 뒷편으로 길을 내었나 보다.

 

 

 

 

 

 

발산리 구 일본인 농장 창고.

석등 등이 있는 곳에서 보이는 건물이다.

 

 

 

 

 

 

이 구 일본인 농장 창고는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에 일본인 대지주가 귀중품을 보관하기 위해 철근콘크리트로 지은 건축물이다. 반지하와 지상 2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창고의 입구에는 미국에서 들여온 철제 금고문이, 창문에는 이중 잠금장치가 설치되어 있다.

이 창고는 한국정쟁 시기 군산에 주둔한 북한군이 옥구 지역 우익 인사들을 감금하는 데 사용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학교의 부속 건물로 사용되었다. 현재는 일제강점기 수탈사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철제 금고문은 평소 닫혀있으나 열면 열리게 개방하여 두었다.

 

 

 

 

 

 

내부

반지하와 지상 2층을 사다리형 나무 계단을 통해 오르내리게 되어 있다.

 

 

 

 

 

▣원형변조

 

 

이영춘가옥으로 가는 도중 도로변에 원형변조 안내표지판이 있다.

사진상 좌측 안내표지판 뒷쪽 멀리 보이는 건물이 군산 간호대학교이다.

 

 

 

 

 

 

원형 변조가 뭔가? 했는데

과거  변을 거름으로 사용하였다.

변에 섞여 있던 기생충균을 죽이기 위해 대변을 모아 삭히던 똥통으로 생각하면 된다.

 

 

 

 

▣이영춘 가옥

 

 

이영춘 가옥은 일제강점기 전북 지역에서 대규모 농장을 경영하였던 일본인 대지주 구마모토의 별장으로 지어졌다. 광복 후에는 구마모토 농장의 진료소장을 지냈던 이영춘(1903~0980) 박사가 거주하였다,

이영춘 박사는 1929년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하고 1935년 교토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을 받았다. 조선인 교수 밑에서 연구한 최초의 의학박사로 농촌 보건위생의 선구자 역할을 하며,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렸다. 병원. 학교. 영아원 등 의료 사회복지시설을 세우며 국내 처음으로 양호실을 만들었고 농민 의료보험도 도입했다.

이 가옥은 일본식 주택의 기본적인 공간 구성에 서구식 주택의 응접실과 한식 주택의 온돌방을 결합한 단층 목조 주택이다. 정교한 실내 장식과 가구뿐만 아니라, 천연 슬레이트 지붕과 자연석 및 목재로 마감한 서구식 외관이 특징적이다.

이영춘 가옥은 근대 새로운 주거 문화의 이입을 보여 주는 건축물이자, 일본인의 토지 점탈(남의 것을 강제로 빼앗아 차지함)과 이영춘 박사의 지역 의료사업을 동시에 보여주는 근대 문화유산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1.쌍천 이영춘(1903~1980)  한국의 슈바이쳐

2.어린시절부터 공부에 두각을 나타낸 이영춘은 평양고보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교사 생활을 시작

3.어느날 몸에 이상이 생겨 3개월간 치료를 받으면서 의사라는 직업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후 1929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를 졸업 후 일본 교토제국대학에서 최초의 한국인 지도교사(윤일선 교수)로부터 의학박사 학위를 받음

4.1935년, 전라북도 군산시 개정동의 구마모토 농장 직영 의료원인 자혜진료소 소장으로 부임하여 연인원 3만명의 진료를 함. 한달에 20일 간은 자전거를 타고 무료 왕진을 다녔음.

5.국내 최초 양호교사를 배치하여 학생들의 병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일에 앞장 서셨고, 구마모토 농장주를 설득하여 결식학생 340명에게 급식을 제공.

6.1948년 농촌위생연구소와 개정중앙병원을 설립하여 농촌 질병에 관한 수많은 연구와 업적을 내셨고, 농민들을 괴롭히던 결핵, 기생충, 매독과 맞서 싸움, 이후 개정간호학교를 설립하여 교육과 보건요원 확보에 힘쓰셨고 국내 처음으로 농민의료보험(평소에는 치료비를 적게 내고 수확 후에 밀린 의료비를 내게 함?) 도입.

7.이후 35년간 농촌위생 사업을 마치고 군산 로터리클럽의 초대회장으로 역임하며 농촌과 도서지방을 찾아다니며 의료봉사 사업.

8.평생을 가난한 농민들에거 헌신하였지만 경제적으로 풍족해 본 일이 평생 단 한번도 없었다고 함. 사택으로 사용한 가옥도 구마모토가 해방 후 한국을 떠난 뒤 사용.

9.1980년 11월25일  박사는 갑작스레 찾아온 천식발작으로 쓰러졌고 78세의 나이로 영면.

10. 2004년 이영춘 박사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이 시작되었고 가옥은 지방문화재로 지정,  2011년 개정마을은 <이영춘 마을>로 이름이 바뀌었고 박사님의 동상과 마을 헌장도 만듬.

11.이영춘박사는 그 동안의 공적으로 대한민국문화훈장. 대한적십자 봉사장을 받았고, 1980년 서거 후에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

 

"30년간 꿈을 가지고 일해왔고 그 꿈을 충분히 달성할 수 없었지만 내가 종전 후 5~6년 사이에 빈약한 시설이나마 지금의 종합병원, 보건소, 간호학교 등 내 목표의 약 7~8할은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기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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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춘박사 추모비

 

 

 

 

 

 

이영춘 가옥 뒷편으로 들어간다.

실제 현관은 사진상 앞쪽  좌측편(가운데 창문 왼쪽 뒷편)과  건물의 앞쪽 두군데 있지만 개방하지 않고, 현재는 앞 또는 뒷편으로 돌아가면 건물의 동쪽 과거 부엌으로 들어가도록 개조되어 있다.

 

 

 

 

 

건물의 뒷편인 셈이다.

각 면을 밖으로 돌출시켜 실제보다 크게 보이도록 건물을 설계하였고, 각 방향의 디자인을 다르면서도 조화를 이루도록 하였다. 건물에서 떨어진 곳과 북쪽에서는 향나무, 모과나무등 키가 큰 나무를 심고, 정면과 전물 가까이에는 작은 나무들을 배치하여 운치있는 풍광을 조성하였다,

 

<이하 건물에 대한 설명은 현지 직원의 설명과 안내문을 기준으로 작성하였다.>

 

 

 

 

 

 

외벽은 윗쪽으로는 황토와 회를 섞어 뿜칠로 마무리함으로써 부드러움과 양감을 살리고, 중간 허리로는 백두산의 낙엽송 통나무를 절반으로 켜서 마치 귀틀집처럼 걸침턱맞춤으로 짜놓았다.

기단부와 벽난로 굴뚝 등은 둥글둥글하면서도 매끈한 호박돌을 허튼쌓기로 마감하였고 외부로 돌출되도록 하였다. 지붕은 널판 모양의 크고 작은 판석들을 자연스럽게 잇대어 변화와 여유로움을 주고 있다.

 

보이는 곳은 건물의 동쪽 측면으로 가운데는 욕실, 우측편은 과거  부엌이었다 한다.

현재 부엌쪽에 출입문을 내고 사무공간으로 꾸며 직원?이  근무하고 있다.

 

 

 

 

 

 

이영춘 박사의 모습인가 보다.

 

 

 

 

 

 

부엌을 지나 중앙 홀로 들어서면 크게 3곳의 방(응접실, 안방, 거실)이 있다.

중앙 침실(부엌(현 사무실)과 연결되며 거실같아 보임) 앞에 위치한 이곳은 거실인 셈이다. 원래 다다미방이었으나 후에 마루로 바꾸었다고 한다.

보이는 창문 밖은 일종의 베란다로 마루가 깔려있다.

 

이곳에 이영춘 가옥의 건축사적 의미 안내문이 있다.

미터법을 적용 건축한 우리나라 최초의 건물로, 일제 강점기때안 1920년대, 개인으로서는 조선 최대의 농장주였던 일본인 구마모토 리헤이의 별장으로 세워진 이 건물은 빙점, 모래시계, 야인시대 등 드라마의 활영지로 많은 사람들의 눈에 익은 곳이다.

외부형태에 있어서는 유럽의 형식을 따르며 평면구조는 일식의 중복도형을 바탕으로 양식의 응접실과 한식의 온돌방이 결합돤 한식.양식.일식의 건축양식이 복합된 모습으로, 벽난로를 설치한 응접실과 외부는 서양식으로, 다다미를 깐 거실과 복도 등은 일본식으로 한 반면, 추운 겨울을 대비하여 침실에는 한식 온돌을 설치하였다.

 

 

 

 

 

 

거실 서쪽편인 이곳은 신?을 모시는 곳이 있고.

 

 

 

 

 

 

맞은 편에는 옷장이 있다.

 

 

 

 

 

 

이곳은 응접실이다.

 

원래의 서쪽 현관을 들어서면 처음 만나는 곳으로 남쪽은 서재(작은 편이며 서재같은 느낌은 없음), 동쪽은 거실로 이어지며 북쪽 벽에는 응회암으로 된 벽난로가 큼직하게 설치되어 있다.

벽난로 위로 영국? 유럽?에서 들여온 그림 액자가 걸려있다.

남쪽과 서쪽에 출입구가 있으며 서쪽은 그 방향을 90도로 꺾으므로써 건물의 좌향과 주출입구를 남향시키면서도 서쪽현관을 통해 편의를 도모하는 한편 외부에 직접 노출되는 것을 막는 이중의 효과를 거두고 있다. 두 현관은 각각 건물의 남쪽과 서쪽으로 돌출되어 있는데, 서쪽 현관은 정문보다 지붕을 조금 낮추어서 그 격에 차이를 두고 있다.

 

 

 

 

 

 

벽난로.

 

 

 

 

 

 

창문

목재도 고급이려니와 창 상부를 가로지르는 중방?이 반 원형으로 되어있음도 특이하다.

바닥과 복도는 두툼한 티크목으로 쪽매널이 직각으로 정교하게 짜여졌으며,

 

 

 

 

 

동쪽 벽에는 넉넉하게 붙박이 책장을 끼워 넣었다.

 

 

 

 

 

 

위 응접실 남쪽으로 서재인데 현 서재같은 느낌은 받지 못했다. 사진상 맨 좌측이 남쪽 출입문인 것 같은데 자세히 보지 못했다.(나중 건물 밖으로 나와서 보니 또다른 현관(남쪽)이 있는 곳임)

거실의 앞쪽의 복도로 연결된다.

 

이곳에 구마모토 농장에 대한 안내문이 있다.

군산에 토지를 소유한 일본인 지주들을 살펴보면 군산에서 처음 농업경영을 목적으로 토지 매수에 나선 것은 1903년 10월에 군산에 도착한 미야사키 케이타로였다. 미야사끼가 군산 최초의 농장주였다면 군산 최고의 농장주는 구마모토 농장의 주인인 구마모토 리헤이였다.

 

구마모토는 게이오대 재학 중이던 23세 때 한국 농촌을 돌아보고 '한국 농업은 전도가 유망하다'는 취지의 내용을 오사카아사이 신문에 기고, 신문을 본 모토야마의 후원으로 토지 매수를 시작하였다.

 

당시 일본인들은 고리대금업으로 이자를 못 갚는 농민들의 토지를 몰수하는 방법으로 토지를 확보했다. 농민은 그 토지의 소작인이 되고 지주에게 수확량의 약 5할을 소작료로 낸다.  비료나 자재는 소작인의 부담으로 이 비용을 대기 위해 또다시 농장주인에게 대출을 받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소작료를 일정한 기간 안에 완납해야 했는데 만약 기일을 어기면 소작지를 몰수당하거나 연체료를 내야만 했다.

 

현 군산 간호대학 터에 자리하고 있던 구마모토 농장은 1935년의 경우 논 3,000정보에 소속한 소작인 3,000가구, 전 가족 2만명으로 개정의 본장과 지경, 대야, 화호(정읍) 및 상관(완주)등 4개소의 지장을 두고 있었다.

 

구마모토 농장에는 회계업무를 보는 경리부, 농사와 소작인 관리를 전담하는 사업부, 그리고 소작인의 무료 진료를 담당하는 진료부를 두고 대농장을 관리하였는데 직원의 수가 50여명에 달하였다.

 

10년간 일본인 지주의 대농장이 조선에 수천개 있었는데 전라북도만 350개가 있었고 약 8할 이상이 일본인 재벌의 농장이었다. 이들 지주들의 농장 건물은 규모가 큰 쌀창고와 넓은 벼 건조장을 지니고 있어 교실과 운동장으로 제격이었는데 그래서 해방 후에 교육 기관들이 자리하는 공통점을 지니게 된다.

 

이처럼 군산의 거대 농장들이 번영을 누리게 되자 군산항의 미곡 수출량도 늘어나는데 1909년 군산항에서는 우리 나라 전체  미곡 수출량의 32.4%를 통관시켰고, 조선의 소작농들은 소작료로 일본인 지주에게 생산량의 50~70%를 착취당하여 굶주림에 허덕여야 했건만 그들이 생산한 쌀들은 1933년에 이르면 우리 나라 전국 쌀 생산의 53.4%가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현지 안내문에서>

 

 

 

 

 

 

서재에서 거실의 창문 밖으로는 이런 복도로 연결된다.

 

 

 

 

 

 

이곳은  서쪽 현관이다.

창문은 도르래가 달린 위로 여는 형태로 되어있다,

 

 

 

 

 

 

서쪽 현관의 문으로 90도 꺽여있으며(북쪽에서 현관으로 들어와 동쪽 응접실로 진입) 지금은 출입문으로의 기능은 폐쇄되어 있고, 그 당시 부엌으로  출입문을 내어 출입하고 있다.

 

 

 

 

 

 

 

우측으로 보이는 문이 현재의 출입문이다.

이곳에 근무하시는 인상 좋으신 직원분, 이영춘 박사의 생애와 건물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셨다.

감사하다.

 

 

 

 

 

 

건물의 앞면인 셈이다.

이곳에 남쪽 출입문이 보인다, 건물 내부의 서재?를 거쳐 응접실로 연결되는데 정작  내부에서는 현관역할을 하는지 자세히 보지 못했다.

현재 이 출입문은 개방하지 않는다.

 

 

 

 

 

 

이영춘가옥을 기분좋게 둘러보았다.

 

누군가 새만금 북로상에 있는 옥녀교차로 포토존을 소개한 것을 본 적이 있는데 내비로 검색하니 도로를 진행하다 유턴하도록 안내한다. 마땅한 배경(밀집된 수목)이 보이지 않아 그냥 지나치기로 한다.

비응항에도 1.몇 km의 해안 데크길이 조성되어 있다.  이곳도 은근 마음에 두었는데  친구들 만날 시간이 어중간해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