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학 유머

어사와 꼬마사또

정헌의 티스토리 2010. 6. 9. 21:31

어사와 꼬마사또


어느 여름날, 허름한 차림의 사나이가 산길을 걷고 있었다.
사나이는 쉬지 않고 걸었다.
그러나 걸을수록 산길은 점점 더 험해졌다.
사나이는 잠시 서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울창한 숲만 보였다.
「어허, 이거 야단났군. 좀처럼 인가가 보일 기미가 없으니, 그렇지만  이만한 고생쯤이야......」
사나이는 허리춤에 찬 묵직한 물건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그럴 때마다 막중한 책임감으로 가슴이 벅차 올랐다.
「나는 암행어사다」
사나이가 차고 있는 물건은 바로 마패였다.
그리고 이 사나이는 역사에 이름 높은「어사 박문수」였다.
「백성의 삶을 편안히 하여 상감마마의 성은에 보답하자」
어사 박문수는 다시 힘을 내어 걷기 시작했다.

박문수가 대밭으로 이어진 산길을 걷고 있을 때 뒤쪽에서 황급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 왔다.
「갑자기 웬 발자국 소리일까?」
박 어사가 고개를 돌렸다.
「응?」
무심코 뒤돌아본 박 어사가 눈을 크게 떴다.
한 사나이가 쫓기듯 달려왔기 때문이다.
『살려 주세요. 저를 죽이려는 놈이 쫓아와요』
사나이의 옷은 다 찢겨져 있고, 맨발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 자가 묻거든 못 보았다고 해 주세요』
사나이는 허둥지둥 한쪽 대나무 숲으로 숨었다.

쫓기는 사나이가 숨자마자 뒤쪽에서 험악하게 생긴 사나이 한 명이 불곰처럼 튀어나왔다.
사나이의 손에는 시퍼런 칼이 쥐어져 있었다.
『이봐! 금방 어떤 놈 하나가 이 쪽으로 왔지? 그놈 어디 숨었어?』
너무도 험악한 사나이의 기세에 박문수는 크게 당황했다.
『나는 못 보았......』
박문수는 어물쩍 넘겨 보려고 하였다.
칼을 든 사나이가 틀림없이 쫓기던 사나이를 죽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칼을 든 사나이는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았다.
『못 보았다고? 이 놈이 감히 누굴 속이려고. 이놈아! 금방 지나간 놈을 못 보았다고 거짓말을 해?』
사나이가 갑자기 칼을 번쩍 치켜들었다.
『이 놈, 지금 당장 말하지 않으면 가만 두지 않겠다!』
『앗! 잠깐!』
금방이라도 내리칠 듯한 사나이의 기세에 박 어사는 너무도 당황했다.
『저, 저 쪽!』
어사 박문수는 자기도 모르게 쫓기던 사나이가 숨은 쪽을 가리켰다.
『이 놈, 진작 말할 것이지!』
칼을 든 사나이가 숨어 있는 사나이 쪽으로 후닥닥 달려갔다.

『으악!』
뒤이어 쫓기던 자의 비명소리가 들려 왔다.
『으, 이럴 수가......』
어사 박문수는 몸을 떨었다.
「암행어사인 내가 눈을 멀쩡히 뜨고도 한 목숨을 죽게 하다니.....」
어사 박문수는 착잡한 마음으로 잠시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쿵 쿵 쿵!
잠시 후 험상궂은 사나이의 발자국 소리가 산 아래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사방이 조용해졌다.

「암행어사인 내가 이렇게 무력하다니.......」
박문수는 가슴이 터질 듯 괴로웠다.
상황이 워낙 다급했었다고는 하지만 너무도 어이없는 노릇이었다.
살려 달라고 호소하던 사나이의 얼굴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정말 그 사나이의 목숨을 구할 방법이 없었나?」
맥이 풀린 박문수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박문수가 작은 산골마을에 닿은 것은 해가 서산으로 한껏 기운 때였다.
「우선 주막에서 좀 쉬자」
박문수가 주막이 있음직한 마을 어귀로 걸음을 옮길 때였다.
갑자기 안타깝게 호소하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사또, 저를 도와 주시옵소서!』
『사또, 제 문제도 풀어 주소서』
사또라는 말에 박문수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이런 산골에 사또라니」
발을 멈춘 박문수가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박문수의 눈에 아이들 몇 명의 모습이 들어왔다.
담 밑에 한 아이가 의젓하게 앉아 있었다.
사또라고 불린 아이였다.
그 아이 앞에는 여러 명의 아이들이 엎드려 있었다.
아이들은「사또놀이」를 하는 게 분명했다.
「꼬마 녀석들이 별 짓을 다 하는군!」
박문수는 혼란해진 머리도 식힐 겸 잠시 아이들의 놀이를 지켜보았다.

엎드린 한 아이가 꼬마 사또에게 말했다.
『사또, 제가 아끼던 새 두 마리를 잃어버렸나이다. 부디 찾아 주소서』
『흐음, 새 두 마리를 잃었다?』
사또라고 불린 아이에게서는 정말 사또다운 모습이 엿보였다.
앉아 있는 태도도 당당하거니와 목소리 또한 의젓했다.
『예, 글쎄 소인이 잠시 텃밭에 다녀온 사이에 아끼던 새 두 마리가...』
『잠깐, 그 새 두 마리가 지금 어디로 갔다고 했지?』
『예, 뒷산으로 달아난 게 분명하옵니다』
『흐음, 새 두 마리가 뒷산으로 달아났다?』
『그, 그러하옵니다. 부디 찾아 주소서』
『흐음, 알겠다』
꼬마 사또가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떻습니까, 사또. 제가 놓친 새 두 마리를 찾아 주실 수 있겠습니까?』
『새 두 마리가 분명히 산으로 날아갔다고 했지?』
『예』
『그래, 그럼 어서 가서 산을 꽁꽁 묶어 오도록 해라. 그러면 새 두 마리를 당장 찾아 주마』
그러자 엎드렸던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군요. 산을 꽁꽁 묶어 와서 혼을 내면 산이 새 두 마리를 내어 놓겠군요』
멀리서 보고 있던 박문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꽤 영리한 판결이야. 그렇다면........」

박문수는 갑자기 조금 전에 자기가 산에서 겪었던 일을 생각했다.
「저 꼬마 같으면 그런 난처한 일을 어떻게 처리할까?」
잠시 생각하던 박문수가 꼬마 사또에게 다가갔다.
『얘야, 너에게 물어 볼 말이 있구나』
박문수의 말에 꼬마 사또가 얼굴을 찌푸렸다.
『무엄하구나! 너는 웬 놈인데 감히 사또 앞에 불쑥 튀어나와 뻔뻔히 서서  말하느냐. 얘들아!』
꼬마 사또가 주위를 둘러보며 소리쳤다.
『예이 -』
둘러섰던 아이들이 일제히 허리를 굽혔다.
『무엇들 하느냐! 어서 이 무엄한 자를 옥에 가두어라』
『예이 -』
길게 대답한 아이들이 우르르 박문수에게 달려들었다.
『앗, 이 녀석들이......』
박문수가 엉겁결에 소리쳤다.
그러자 아이들이 더욱 엄한 얼굴을 했다.
『무엄하다. 이 녀석들이라니! 우리는 관청의 포졸들이다. 얌전히 오라를 받아라』
아이들이 순식간에 박문수를 꽁꽁 묶었다.
『으음..........』
박문수는 기가 막혔지만 참아 보기로 하였다.
아이들은 꽁꽁 묶은 박문수를 담 밑 한쪽에 가두었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놀이를 계속했다.

「오늘은 정말 재수가 없는 날이군. 이렇게 두 번씩이나 봉변을 당하다니」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박문수는 지루한 줄을 몰랐다.
꼬마 사또가 하는 짓이 무척이나 슬기로웠기 때문이다.
얼마 후 사또놀이를 끝낸 아이들이 우르르 박문수에게 달려왔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이들이 공손히 말하며 묶었던 노끈을 풀었다.
사또놀이를 할 때의 당당하던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박문수는 아이들이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박문수가 아무 말도 않자 아이들은 더욱더 어쩔 줄 몰라 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까 저희들이 그렇게 한 것은 비록 아이들의 놀이기는 하지만 엄숙한 재판의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재판이 공정하지 않으면 어찌 백성들의 신임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사또였던 아이의 마지막 말에 어사 박문수는 마음이 찔렸다.
『아암, 그렇지. 재판은 공정해야 하고말고』

『저희들이 한 일을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어르신!』
사또였던 아이가 공손히 박문수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느냐?』
『아까 무엇을 물어 보겠다고 하셨습니까?』
사또였던 아이는 박문수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다시 묻는 것이었다.
『그래, 얘기하마』
박문수는 산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 주었다.
『너라면 능히 그 쫓기던 자를 살려 낼 수 있겠느냐?』
잠시 생각하던 아이가 입을 열었다.
『방법이 있긴 합니다만......』
『어서 말해 보아라』
『쫓기는 자를 숨겨 준 다음 어르신께서는 서둘러 지팡이를 구하셔야 합니다』
『지팡이를 구해?』
『예, 얼른 나무를 꺾어 지팡이를 만든 다음 두 눈을 꽉 감습니다』
『........』
박문수와 아이들은 사또였던 아이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아무리 사나운 자라도 앞 못 보는 소경에게까지 쫓기는 자가 어디로 갔는지 못 보았다고 사나움을 펼 수 있겠습니까?』
『옳거니!』
듣고 있던 박문수가 무릎을 쳤다.
『내가 소경 노릇을 했더라면 한 목숨을 살릴 수도 있었을 텐데.....』

박문수는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를 바라보았다.
볼수록 아이의 모습은 영리하고 예의 바르게 보였다.
『장차 나라의 훌륭한 일꾼이 되겠구나』
「지혜가 필요해. 깊은 지혜가 없고서야 어찌 암행어사 직을 바로 수행할 수 있을까?」
그 날 밤 박문수는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일들이 실타래가 풀려 나오듯 하나하나 머릿속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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