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

부산 공원탐방 / 재한 UN기념 공원, 송도해수욕장, 민주공원

정헌의 티스토리 2017. 4. 30. 12:29

           ■ 부산 공원 탐방 / 재한UN기념공원, 송도해수욕장, 민주공원


               산청·함양사건은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2월 7일(음 1월 2일)  국군 11사단(사단장 최덕신 중장) 9연대(오익경 대령)

               3대대(한동석 소령)가 지리산 공비토벌 작전인 "견벽청야"라는 작전을 수행하면서  산청군 금서면 가현, 방곡마을과 함

               양군 휴천면 점촌마을, 유림면 서주마을에서 무고한 민간인 705명을 학살하였던 사건이다.

               이 부대는 이틀 뒤(1951. 2. 9 ∼10일) 거창군 신원으로 이동하여 719명의 주민을 학살하고 불에 태워죽인다.

               이 때 억울하게 희생된 영령들을 위해 합동묘역 조성은 1996년 1월 5일 거창사건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

               치법 공포와  1998년 2월 17일 거창사건 등 관련자 명예회복심의의원회의 사망자 및 유족 결정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에 산청함양사건 유족 대표 20여명이 6.25때 사망한 UN기념공원을 겸사겸사 둘러보았다.


              #산청. 함양사건 추모공원 바로가기 : http://www.sancheong.go.kr/shchumo/index.do

              #거창사건 추모공원 바로가기 : http://www.geochang.go.kr/case/




           ▷ 가는 길


  



           ▷ 탐방코스 (2017. 4. 25 )

               재한 UN기념공원 - 중식 - 송도해수욕장 - 민주화 공원,

 

           ▷ 탐방후에


               ▣ 재한 UN기념공원


                  # 재한 유엔기념공원 바로가기 : http://www.unmck.or.kr/


                    세계 평화와 자유의 대의를 위해 생명을 바친 각국의 용사들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  유엔에서 지정한 세계 유일의

                    유엔군 묘지이다.

                    한국 전쟁이 일어난 이듬해인 1951년 1월 18일 유엔군 전사자 매장을 위해  유엔군 사령부가 이곳에 묘지를 조성

                    하였다. 2007년 10월 24일 근대문화재로 등록되었으며, 원래는 재한유엔기념 묘지로 불렸으나 2001년 3월 30일

                    한국어 명칭을 재한 유엔 기념 공원으로 변경하였다.

                    공원 내에는 한국 전쟁 중 전사한 4만여 명의 유엔군 전몰장병들의 이름을 새긴 유엔군 전몰장병 추모명비와 유엔

                    군 사진 자료 및 기념물을 전시한 기념관, 유해가 안장되어 있는 묘역 등이 있으며 주변에는 조각 공원, 평화 공원,

                    부산 박물관 등이 있어 역사와 문화를 배우고 느끼기에 좋다.



                   한국 전쟁 중 유엔 참전국 현황

                전투 지원 16개국 : 미국, 캐나타, 콜롬비아,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그리스, 터키, 남아공,

                                            에티오피아, 호주, 뉴질랜드,  태국, 필리핀 

                   의료 지원 5개국 :  노르웨이, 덴마크, 인도, 이탈리아, 스웨덴



 

           △ 유엔기념공원 정문이다.


               옆에 대규모는 아니지만 주차장이 갖추어져 있다.

               공원입장료는 무료이나 주차료는 유료이다.







           △ 공원내 시설물중 건물은 보이는 추모관과 이웃하여 기념관이 있다.

               먼저 추모관에 들러 개략적인 한국전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 기념관은 나중 나올때 둘러보았다.

            


                추모관  

                1964년 건축가 김중업 씨가 설계하고 유엔이 건립하였다.

                건물은 유엔군 전몰장병들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해 추상성, 영원성을 강조하는 기하학적인 삼각 형태로 되어 있으며,

                양쪽 유리창은 평화의 사도, 승화, 전쟁의 참상, 사랑과 평화의 의미를 표현한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으로 되어 있다.








           △ 한국전쟁에 대하여,


                전후의 전개


                1943년 12월의 카이로선언에서 '조선'의 독립을 보장하였고 이는 다시 1945년 7월의 포츠담선언서 재확인되었다.

                다만, 그 독립은 '적당한 시기에' 이룰 지역이었던 한반도는 군사적인 편의에 따라  38선을 경계로 남북한은 미.소

                양군에 의하여 분할 점령되었다.

                분할된 상태로 미.영.소 3국외상은 그해 12월에 모스크바에서 회동하고  한반도에 5년간  신탁통치를 실시할 것에

                합의하였다. 이에 대하여 한국민은 맹렬한 반탁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좌파세력이 소련의 지령에 의하여  찬탁으로

                선회함으로써 정치적인 혼란을 가져왔다.  한국문제가 반탁운동으로 난국에 직면하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946년과 1947년 두 차례에 걸쳐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으나 아무런 해결책도 강구하지 못한 채 결렬되었다.


                1947년 9월에 미국은 소련의 반대를 뿌리치고 한국문제를 일방적으로 유엔에 제기하였다. 이로써, 38선을 경계로

                한 남북한은 미소의 대립 속에서 이데올로기적인 갈등마저 겪으면서 국제무대에 노출되었다.

                1947년 11월 유엔총회는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을 구성하고 그 위원단의 감시 아래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

                의하였다. 그러나 북한을 점령하고 있는 소련군사령관은 1948년 초에 활동을 개시한 위원단의 입북을 거절하였다.

                이에 유엔소총회에서는 선거의 감시가 가능한 지역에서의 총선거를 결의하여 그해 5월에는 남한에서만의 선거가

                행해졌고, 8월에는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었으며, 그해 12월의 제3차 유엔총회는 한국을 '유일.합법 정부'로 승인

                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북한에서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하여 '최고인민회의'선거를 실시하여 9월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포함에 소련을 비롯한 공산제국은 이를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한반도에서는 남북한이 각각 별개의 정권을 수립함으로써 분단을 공식화하였다.  정부수립을 마친 북한은

                곧이어 미소 양군의 철수를 요구하였고, 이에 부응하여 지정학적으로 유리한 소련은 그해 10월부터 철병을 개시하

                였다. 남한에서는 공산세력의 준동에 대응하여 주한미군의 계속 주둔을 요청한 바 있고, 이에 따라 미군의 주둔은

                잠시 연기되긴 하였으나, 1949년 6월에 미국은 약 500명에 달하는 군사고문단만을 남긴 채  남한으로부터 철병을

                완료하였다.



                유엔의 개입경위

                이렇게 하여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공산군은 38선 전역에 걸쳐 전면 남침을 개시하였다. 전쟁 발발 소식을 접

                한  미국은 25일 유엔안전보장이사회를 긴급 소집하여 북한의 무력공격은 평화를 파괴하는 '침략행위'라 선언하고,

                북한은 즉시 전투행위를 중지하고 그 군대를 38선으로 철퇴시킬 것을 요청하는 결의를 채택하였다. 
                또한 유엔회원국들로 하여금 유엔에 원조를 제공할 것과 북한에 대하여는 어떤 원조도 중단하도록 하였고, 6월 27

                일에 이르러 미국대통령 트루먼(Truman, H.S.)은 미국의 해군, 공군으로 하여금 한국군을 지원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날 안전보장이사회는 유엔회원국들에 대하여 북한의 무력공격을 격퇴하고 국제평화와 한반도에서의 안전을 회복

                하기 위하여 필요한 원조를 한국에 제공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권고를 채택함으로써  미국의 의사조치를 추후 승인

                하기에 이르렀다.


                곧이어 6월28일에는 동경(東京)에 있던 극동군사령관인 맥아더(MacArthur,D.S.)원수가 내한하여 전선을 시찰하고

                미국방성에 지상군의 파견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미국의 군사조치는 다시 7월 7일에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한반도에서의 유엔의 군사활동을 위하여 미국에게 최고 지휘권을 위임하는 결의를 채택함으로써  미국의 맥아더가

                유엔군총사령관에 임명되고 유엔군의 파견이 결정되었다.

                이로써, 한반도에서의 군사지휘권은 미국의 맥아더원수에게 주어졌으며,  한국을 원조하기 위하여 육군, 해군, 공군

                및 지상군을 파견한 16개국의 군대는 유엔군사령관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이때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도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사령관인  맥아더에게 이양한다는 각서를 썼고,  이것이 이른바 대전각서로써 7월 14일에

                수교 되었다



                 반격및 북진


                 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한 유엔군과 한국군은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과 동시에 총반격 작전을 수행하여 서울을 수복

                 하고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9월 말 38도선에 도달함으로써 97일만에 전쟁 이전의 상황을 회복하였다.

                 유엔군사령부는 아군이 38도선에 도달하자 유엔의 6ㆍ28결의와 군사작전의 '추격권 원칙'에 입각하여 북한군 격멸

                 을 위한 북진작전을 단행하였다. 

                 한국군은 10월 1일 역사적인 북진작전을 전개하였고 유엔군은 10월 9일 38도선을 돌파하고 북진길에 올라 10월19

                 일에 평양을 탈환하고 23일에는 청천강으로 진출하였다.  유엔군은 추수감사절까지는 전쟁을 종결짓는다는 판단하

                 에 10월 24일 중공과의 국경지대를 목표로 진격작전을 시작하였다.

                 이때 유엔군 사령부는 중공군의 참전을 우려하고 있었지만 그 징후를 포착하지 못하고  그들의 참전 시기가 지난 것

                 으로 판단하였다. 그러나 25일 운산, 온정리 일대에서 아군이 대규모 중공군의 기습을 당해 일대 혼란에 빠졌다.

                 비록 이때 한국군 제6사단 제7연대가 압록강변의 초산에 도달하는 쾌거를 이룩하였지만, 이 부대도 곧 퇴로를 차단

                 당하고 말았다. 이와 같이 중공군의 참전은 한국전쟁을 새로운 전쟁으로 변모시켰다


                 남북한 군사력 증강


                 미소에 의하여 잠정적인 군사 분계선이었던  38선은 이제 남북한이 각각 별개의 정부를 수립함으로써 국경아닌 국

                 경선이 되어버렸다.  그러한 분할독립과정에서 우선 북한은 소련에 의한 계획적인 군사력증강에 박차를 가하여

                 1948년 10월에 소련군이 철수할 때까지 북한은 이미 완전무장한 4개보병사단과 소련제 T-34중형전차로 장비한 제

                 105기갑대대가 편성되었다.

                 1949년 3월 17일에는 소련과 북한간에 조소군사비밀협정이 체결되고, 또 3월 18일에는 중공과 상호방위조약을 체

                 결하여 중국공산군에 있던 조선군 2만5000명이 북한에 인도됨으로써 10개사단 13만명이 38선에 배치되었고,10만

                 명의 예비군까지 후방조직이 완료되었다. 막강한 군사력을 갖추게된 김일성은 이어 국내외정세의 변화에 무력통일

                 을 구상하게 되었다.


              국외적 요인
                 ① 1949년 10월 중국대륙이 공산화되었고, 
                 ② 1949년 6월에 주한미군이 철수를 완료하였으며, 
                 ③ 1950년 1월 미국의 극동방어선에서 한국과 대만을 제외시킨다는 애치슨(Acheson, D.G.)미국무장관의 성명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④ 1949년말경 김일성이 모스크바를 방문, 남한의 무력침공계획에 대한 스탈린(Stalin, I.V.)의 승인을 받아냈다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국내적 요인  
                 ① 남로당의 실질적 붕괴에 따라 남한내부에서 '인민혁명' 이 일어날 가능성이 희박해졌고,
                 ② 김일성은 '민족해방을 위한 투사로서의 경쟁'에 있어서 박헌영을 압도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③ 남한이 아직도 정치.경제적으로 혼란상태에 있었고, 
                 ④ 국군의 병력, 장비가 열세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김일성은 1950년 4월초 조선노동당 중앙정치위원회에서 무력통일안을 확정시키는 한편, 이러한

                 침략계획을 은폐하기 위하여 북한공산당은 남북통일 최고입법회의의 서울 개최, 남북국회에 의한 통일정부수립을

                 주장하는 등 평화공세를 벌였다.

                 한편,  남한에서는 1946년 1월에 미군정 산하의 국방경비대와 해안경비대는 1948년 8월에 정부가 수립되면서 국

                 군으로 개편되었고, 같은 해 9월  각각 육군, 해군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949년 4월에는 해병대,  그리고 10월

                 에는 공군이 편성되어 그 병력은 약 10만에 이르렀다.  그러나 장비는 빈약하여  북한의 군사력에는 비할 수 없는

                 상태이었다.  더구나 예비군도 없이 8개 사단 중 4개사단은 38도선으로 부터  먼 후방에 배치되어  공산 게릴라의

                 소탕에 여념이 없었다.


                 중공군의 침략


                 중공군은 10월 19일 압록강을 은밀히 건너 참전하였다. 그들은 청천강 북쪽으로 전개하여 방어태세를 갖추고 있

                 다가 10월 25일 아군의 공격을 되받으며 기습적 대공세를 취하였다.  이것이 중공군의 1차 공세였다. 중공군은

                 이후에도 4차례의 공세를 가하였으나 그 세력을 상실하고 방어로 전환하였다. 유엔군은 공산군의 1차 공세를 청

                 천강선에서 저지하고 11월에 최종 공세를 다시 폈으나  이미 30개 사단으로 증강된 중공군이 2차 공세로 맞섬에

                 따라 청천강 북쪽과 장진호 일대에서 결전이 전개되었다. 아군은 청천강에서 포위망을  벗어나는 과정에서 많은

                 손실을 입고 평양과 흥남 철수를 단행하였다. 
                 이어 중공군은 재편성한 북한군과 연합하여 1951년1월 1일을 기해 3차 공세를 하였다. 중공군은 전방에 배치된

                 한국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서울을 재점령하였다.


                 유엔군과 한국군은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반격작전을 개시하였으며, 2월 한강남쪽까지 진출할 무렵 다시 중공군

                 의 4차 공세를 받았다.  그러나 아군은 지평리-원주선에서 중공군에게 큰 타격을 입히면서 반격을 계속하여 3월

                 15일 서울을 다시 수복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 중공군은 만주의 추가 부대가 투입되고  원산 부근의

                 부대도 전선으로 합류함으로써 총51개 사단으로 증강 되었으며, 이들은 4월 22일 다시 5차 공세를 시작하였다.

                 춘계공세에는 공산군의 병력과 유엔군의 화력이 최대로 동원되었다.  아군은 즉각 반격에 나서  6월 중순까지 임 

                 진강 -연천-철원-김화-화천-간성선을 확보하였으며, 이로 인해 중공군은 방어로 전환하였다.유엔군은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계속 공격할 것에 대비하여 철군 계획을 수립하는 한편, 핵무기 사용을 포함한  중공 본토 폭격, 해안

                 봉쇄 등의 확전 조치도 심각하게 검토하고 있었다.


                 휴전회담과 교착전


                 전쟁이 발발한지 1년이 지난 후,  쌍방은 38도선에서 약간 변형된 접촉선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였다. 그러나 1년

                 간의 전쟁에서 쌍방 모두 군사 작전으로는 상대의 의지를 꺾기 어렵다는 인식하에  정치적 해결 방안을 모색하기

                 작하였다. 이에 따른 막후 접촉에서 1951년 6월 23일 공산군측이 유엔군의 제의를 수용할 의사를 밝힘에 따라

                 7월10일 휴전회담이 열렸다. 협상의 의제는 군사분계선 설정, 휴전 체제, 포로 송환, 휴전 후 평화 회담등이었다.

                 11월에 군사 분계선 설정에 합의함으로써 곧 전쟁이 종결된 것으로 낙관하였으나, 포로송환 문제가 첨예한 대립 

                 을 가져와 전쟁이 20개월이나 더 계속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포로 협상에 있어서 문제의 핵심은 유엔군이 포획한  공산군포로 중 절반 이상이 공산군측으로 돌아가기를 거부

                 함으로써 제기되었는데 유엔군 측은 복귀를 원하는 포로만 송환하고  거부하는 포로는  인도적 입장에서 석방하

                 겠다는 방침이었고 공산군측은 모두 강제 송환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포로 문제로 이승만 대통령이 반공포로

                 석방조치를 취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게 되었으나,  자원 송환 원칙을 적용하는 선에서  타협점을 찾아 휴전을 성

                 립시켰다.  그동안 전선에서는  쌍방의 휴전전략과 연관된 전투가 거듭되었으나  전선에는  큰 변화가 없었으며,

                 1953년 7월 27일 휴전의 발효와 더불어 한국전쟁은 끝이 났다.






 

           △ 공원을 둘러보러 간다.






 

 

           △ 정문을 들어서면 추모관, 기념관, 화장실 등의 건물이 있다.


               공원은 크게 보아 3구역으로 나눌수 있다.

               맨 상부 (북쪽)는 상징구역, 중간 주묘역, 하부(남쪽) 녹지지역으로 구분 할 수 있다.

              















 

           △ 먼저, 상징구역으로 간다.






 

 

           △ 참배 및 헌화




 
















































 

           △ 이곳 상징구역은

               참전 21개국과 대한민국 국기, 유엔기가 연중 게양되어 있으며,

               상징적인 의미로 11개국 유해의 일부 또는 전부의 묘역이 있다.



 
































 

           △ 상징구역에서 내려다 본 주묘역쪽,

               더 아랫쪽은 녹지구역이다.







 

           △ 주 묘역으로 간다.






 



           △ 주 묘역

               대부분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는 곳으로서,

               호주, 캐나다, 프랑스, 네덜란드, 터키, 영국, 미국 등 7개국의 묘역이 있고.

               영연방 위령탑, 호주 기념비, 캐나다 기념 동상, 프랑스 기념비 등이 있다.

              

 





















 

           △ 영 연방 위령탑

            







 

           △ 영연방 위령탑,


               건립주체는 영국

               영국의 연방국가들 즉 영국을 비롯한 호주, 뉴질란드, 캐나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5개국의 전사자 유해를 찾지못한

               392명의 요사들의 부대, 계급, 성명을 나라별로 벽면에 새겨 그들의 고귀한 생명을 추모한다.







 

           △ 도은트 수로

   

               이 수로의 이름은 유엔 기념 공원에 안장된 전사자 중 최연소자(17세)인 호주병사 J.P.도은트의 성을 따서 지은 것으로,

               삶(녹지 지역)과 죽음(묘역) 사이의 경계라는 신성함을 함축하고 있다.

               수로의 크기는 폭 0.7m, 길이는 110m 가량이며 깨끗한 물 안에는 물고기가 살고 있다.







 

           △ 도은토 수로의 다른쪽,




 




 

           △ 녹지지역으로 내려선다.


                2만여평의 녹지지역은 유엔기념공원의 묘역을 정숙하고 경건하게 유지하기 위한 완충지역으로 관리되고 있다.

                이곳에 유엔군 전몰장병 추보명비를 비롯하여 유엔군 위령탑, 제2기념관, 무명용사의 길 등이 있다.






 

 

           △ 좌측에 보이는 전몰장병 추모명비로 간다.







 

           △ 유엔군 전몰장병 추모명비 현황,


 




국 명
파병자수
전사자수
봉안 유해수
Australia 호주

8,407

346
281
Belgium 벨기에

3,590

106
.
Canada 캐나다

27,000

516
378
Colombia 콜롬비아

5,100

213
.
Denmark 덴마크

630

.
.
Ethiopia 에티오피아

3,518

122
.
France 프랑스

3,760

270
44
Greece 그리스

4,440

186
.
India 인도

346

.
.
Italy 이탈리아

185

.
.
Luxembourg 룩셈부르크

89

2
.
Netherlands 네덜란드

5,320

124
117
New Zealand 뉴질랜드

5,350

41
34
Norway 노르웨이

623

3
1
Philippines 필리핀

7,500

120
.
South Africa 남아공

900

37
11
Sweden 스웨덴

1164

.
.
Thailand 태국

6,326

136
.
Turkey 터키

14,936

1,005
462
U.K. 영국

56,000

1,177
885
U.S.A 미국

1,600,000

36,492
36
유 엔 군 총 계

1,754,400

40,896
-
대한민국
-
-
36
비전투요원
-
-
11
무명용사
-.
-
4
총       계
-
-
2,300









 

           △ 전몰장병 추모명비 입구에 여러분의 기념식수가 있다.



 































 

           △ 유족회 회장님 내외분.

               신정음양연구회 회장님이시기도 하다.





 


 

           △ 유엔군 전몰장병 추모명비  

             40,895명의 고귀한 이름을 기억하다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해 고귀한 생명을 바친 유엔군 전몰자를 추모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검정색 명비에는 40,895명의 전사자(실종자 포함)의 이름이 알파벳 순서(국가별, 개인별)로 세겨져 있으며

                유엔 기념 공원에 안장된 전몰자는 이름 뒤에 O표시를 붙여 구분하였다.

















































































           △ 전몰장병 추모명비를 둘러보고,

               주변에서 주 묘역과 상부 상징구역을 올려다 본다.








          △ 녹지지역 쪽으로(남쪽) 유엔군 위령탑이 저만큼 보인다.



              유엔군위령탑은 정면에는 고 박정희 전대통령의 "유엔군위령탑" 친필휘호와  좌우에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가 조각

              되어 있다.

              위령탑 벽면에는 각국별 전투지원 내역과 전사자 수가 동판에 새겨져 있다. 

              주변에 2전시관이 있고 무명용사의 길이 있는데 저곳은 가까이 가지 않았다.  

              위령탑 남쪽으로 있는 무명 용사의 길은 11개의 물 계단, 수로 위 11개의 분수대, 수로 옆에 늘어선 11개의 소나무로

              이루어져 있는데 여기서 11은 유엔 기념 공원에 안장된 11개국과 한국 전쟁에 참전한 22개국(한국 포함)을 의미한다.        





 


           △ 정문 옆이자 추모관옆으로 되돌아 왔다.  





 



           △ 추모관옆에 기념관이 있다.  








           △ 기념관

 

               유엔군 사진 자료 및 기념물 전시

               한국 전쟁 당시 유엔군 사령부가 최초로 사용했던 유엔기를 비롯하여,

               전쟁 당시 유엔군의 활약상을 담은 사진과 기념 유품, 방문 기념패 등이 전시되어 있다.










 









 




 

           △ 한국 전쟁 당시 유엔군 사령부가 최초로 사용했던 유엔기.








           △ 재한 유엔기념공원을 둘러보았다.

               그동안 우리를 도와준 세계 각국의 젊은이들을 너무 잊고 지냈던건 아닌지,

               진정한 평화가 무엇인지  돌이켜 보는 시간이 되었다.   





                  ▣ 송도해수욕장




           △ 중식후,

               민주화 공원가는 길에 송도해수욕장에 잠시 들렀다.
























 


           △ 해상 케이블카가 놓여질거라 한다.






 


           △ 우측,




















 










 




 



 








 



 


            △ 부산의 옛거리, 사라져 버린 기업들, 산복도로, 자갈치 시장 등등 지금은 역사가 되어버렸다.




              ▣ 민주공원 

     

                      부산시 중구 영주동에 위치하고 있다.

                      한국 현근대사의 발전에 결정적 기여를 해온 4.19민주혁명과 부마민주항쟁 및 6월항쟁으로 이어진 부산시민의

                      숭고한 민주희생정신을 기리고 계승발전 시키고자 조성되었다.


                      민주공원 바로가기 : http://www.demopark.or.kr/





 

           △ 영주동 뒷편 산먼당에 조성되어 있다.

















 

           △ 이웃하여 중앙공원이란 표지석도 있다.







 

 

           △ 마주보는 언덕위에 저 건물은?

               천주교? 교회?

               년말이면 저곳은 대형 트리가 된단다.






 


           △ 공원들머리 조각공원으로 조성하였다.





























































 

           △ 소해 장건상 선생 동상


               소해 장건상(1882 -1974)선생은 경북 칠곡출생,

               1916년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동제사에 가입,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였고,

               동년 11월 의열단이 창립될때 총장이 되어 기밀부의 요직을 맡아 국내 무기반입 등을 지휘하였다.

               1924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교총장으로써 의열단원 이종암 등의 입국읠 지원하고,

               1926년 잡지 "혁명"을 북격에서 발간하여 항일의식 고취

               1927년  의열단 간부훈련을 마치고 민족혁명당 당원으로 활동

               1928년 의열단 고문이되어 포탄제조및 국내반입 지휘.

               1945년 임정대표로 연안에 파견

               1986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 조각공원구역을 지나 4.19광장으로 오른다.


















 

          △ 4.19 기념탑,







 

 

          △ 위패 봉안각,







 










 

          △ 겹벗꽃이 화사하다.








 

          △ 민주공원으로 오른다.

              공원은 대형건물로 꾸며져 있다.
















 

          △ 민주항쟁 기념관을 둘러본다.







 





































 

          △ 상부로 오른다.

              나선형으로 되어있다.






 




















          △ 공원(건물) 상부 전망대에서 부산시내 조망이다.



















          △ 뜻기림 햇불(민주화 햇불)









          △ 민주공원을 둘러보고 오늘 일정을 마친다.

              아들이 부산에 살고있어 비교적 근년에 부산을 간혹 찾았는데,

              이들 두 공원은 초행이다. 민주공원은 있는지 조차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