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지역의 산

합천 남명선생 선비길

정헌의 티스토리 2020. 7. 19. 21:13

   ■ 합천 남명선생 선비길

 

합천군에서 돈 한푼 들이지 않고 남명선생 이름을 팔아먹는? 길이다.

남명선생이 태어난 외가댁이 있는 삼가면 외토리에서 본가가 있는 하판리 지동(갓골)마을을 잇는 양천강 주변 도로에 남명길 이름을 붙였다.

외가가 있는 외토리 입구 커다란 두 그루의 느티나무 아래의 남명길 소개외 어디 한 곳 선비길에 대한 이정표나 안내문은 보이지 않는다.

양천강을 중심으로 하여 대충 방향을 잡아 차도로 가고 싶으면 차도로, 둑방길로 가고 싶으면 둑방길로 걸으면 된다. 본가가 있는 삼가 지동마을로 가는 길은 조금 신경을 써야 할 것 같다. 합천군청 문화관광과에서 제공하는 안내에는 나와있지 않기 때문이다. 선조의 묘소외 다른 문화재 예를 들면 복원한 생가 등은 없는 것 같아 생략해도 되겠다. 

오늘은 삼가에서 시작하여 양천강 물길을 따라 외토리로 내려오는 코스를 탐방해 본다.

 

 

 

 

▷ 가는 길

 

 

▷ 탐방코스

삼가(삼가장터 3.1만세운동 기념탑) - 양천강둑방길 - 외토리(남명생가, 용연사와 용연서원. 뇌룡정과 용암서원) - 외토리 쌍비 - 가회면소재지.   ( 약 11km, 쉬엄쉬엄 3시간 10분  /  2020. 7. 18. )

 

 

참고)

합천군청 홈페이지의 남명선생 선비길

외토리 (쌍비 - 뇌룡정, 용암서원 - 용연사, 용연서원 - 남명생가터) - 도보 2시간(차량 15분) - 삼가면(기양루 - 삼가시장 - 삼가향교)

 

 

 

▷탐방안내도

 

 

 

삼가면 외토리 입구에 있는 이정표이다.

 

 

 

 

▷ 탐방후에

 

 

이곳은 의령군 대의면 소재지이다.

면소재지의 가장 중심가라 할 수 있는 삼거리로 경전슈퍼 건물이 보이고, 우측으로는 택시회사가 있는 곳이다.

평소에는 점심먹으러 제법 다닌 적이 있는 곳인데 오늘 버스 승강장을 찾으니 보이지 않는다.

웬만한 마을(리) 앞에도 승강장이 있는데 이곳은 면소재지인데 어찌 버스승강장이 없지? 하며 두리번 거려 보지만 찾을 수 없다.

버스 시간표가 어디에 있느냐고 마을 주민에게 물어본다.

경전슈퍼 출입문에 붙어 있단다.

 

 

 

 

 

  

보이는 시간표의 좌측엔 부산에서 출발하여 의령, 대의, 삼가를 거쳐 합천으로 가는 시간표이다.

현재는 코로나 19의 영향으로 운행 횟수를 축소하여 운행하고 있다.

의령에서 8:00,  9:30,  11:20,   12:50,  15:30,  17:00,  18:20,  20:00으로 표시되어 있으며, 의령에서 이곳 삼가까지 오는데 약 20분쯤 소요되므로 위 의령 시간에서 20분 후가 대의에서 출발하는 시간으로 보면된다.

표의 우측면은 역으로 합천에서 삼가, 대의를 거쳐 의령, 부산으로 가는 시간이다. 대충 잡아 의령도착 약 30분 전을 삼가출발 시간으로 보면 되겠다.

위 시간표는 부산에서 합천간 직행버스의 시간표이다. 군내버스도 운행하고 있을것 같은데 물어보지 못했다. 위 경전슈퍼 주인에게 물어보았어야 했는데 미쳐 생각을 못했다.

 

 

 

 

 

 

차량을 대의 공영주차장에 주차하고 버스로 삼가까지 이동할려고 했는데, 어느 나이 지긋한 분이 마침 삼가에 갈 일이 있다며 자가용으로 태워줘 쉽게 삼가로 왔다.

 

우리나라에 길고 짧은 수많은 둘레길이 있지만 선뜻 나서기 어려운 것이 교통편 때문이다.

걸음 좀 걷자고 왕복 교통비에 차량 회수를 위한 택시비까지 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 코스는 삼가면 소재지에서 출발하여 양천강을 따라 남명선생의 외가가 있는 외토리를 거쳐 대의면소재지까지 걷는 것으로 한다.

 

 

 

 

 

 

이곳은 삼가 향교이다.

 

오늘 남명선생 선비길을 걸으면서 이곳에서 출발한 것은 아니고, 후일 이곳을 찾았을때의 사진이다.

남명선생 선비길에 이곳 향교와  삼가면소재지 내 가양루를 넣기도 해서 추가로 올려본다.

사실 삼가향교는 삼가면소재지의 장터에서 남서쪽으로 약 1km쯤 떨어진 소오마을에 있고, 또 문화재적으로 일반인이 선호하는 곳은 아니기 때문에 선비길을 걸으면서 꼭 향교를 넣을 필요는 없겠다.

 

 

 

 

 

 

풍화루

삼가향교의 정문이자 유생들의 휴식공간 셈이다.

 

 

 

 

 

 

안으로 명륜당이 있다.

언듯 일반 건물과 다른점은 문이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 건물 배치로 보면 명륜당 좌,우측에 동재와 서재가 있고, 명륜당 앞 좌,우측에 동무. 서무가 있는데 삼가향교에는 이들 건물이 없다.

이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각 기능을 적절하게 변형하여 지었기 때문이라고 안내문세 설명되어 있다.

 

 

 

 

 

 

각도를 달리하여.

 

 

 

 

 

 

향교 동쪽에 책을 보관하는 진사청과 관리사, 사당, 재실 등이 있다.

 

 

 

 

 

 

명륜당 뒷편의 대성전.

 

 

 

 

 

 

안쪽에서 바라본 풍화루

아래 사진에서의  3.1만세운동 기념탑과는 약 0.9km 거리이다.

 

 

 

 

 

 

이곳은 삼가장터 입구의 3.1만세운동 기념탑이다.

 

여기 삼가는 남명 조식선생이 '을묘사직소'에서, 내암 정인홍이 이른바 '회퇴변척소'와 '사의장봉사'에서 주장한 것처럼, 예부터 민본과 기절을 숭항하는 정신이 충만한 지역이었다. 정미의병전쟁 때인 1907~1909년 삼가의병단이 삼가, 산청, 거창, 안의, 함양 등지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경찰에 맞서 의병 전쟁을 벌여 박수길, 한치문, 이차봉, 김화서 등 16명이 순국(애국장)하고, 최남수 등 9명이 옥고(애족장)을 치렀다.

10년 뒤인 1919년 음력 2월 17일. 22일 삼가장날에 2차례에 걸쳐 삼가장터 3.1만세운동이 일어났다.<한일관 계사료집>등에 따르면, 3만명이 참여하여 40여 명 순국, 150여 명 부상, 50여 명이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크고 격렬하게 일어난 혁명적 시위였다. 현재 정부가 서훈한 애국지사는 공재규 등 19명인데, 건국훈장 애국장(순국) 10명, 애족장 등 9명이다. 조형물 옆에 작은 도서관이 2008년 완동되어 있다.

 

<안내문에서>

 

 

 

 

 

 

삼가면은 한우로 많이 알려져 정육식당이 여러곳 있다.

삼가 장날은 2일, 7일이며 면소재지 치고 5일장의 규모가 큰 편이다.

소재지 내 볼 거리로는 기양루와 삼가 향교가 있으며, 이는 남명선생 선비길에 포함되어 있으나 오늘은 패쓰!

삼가면을 가로지르는 강은 양천이다.  황매산쪽에서 발원하여 삼가, 대의, 생비량을 거쳐 진양호 상부인 산청군 신안면에서  낙동강(경호강)으로 흘러든다.

 

 

 

 

 

 

삼가면 금리 가수교 삼거리를 지난다.

면소재지에서 합천 가회 및 산청 신등으로 가는 길목이다.

좌측 가수교, 우측 합천 가회 또는 산청 신등으로 가는 길, 마주 보이는 둑방길은 농로, 앞쪽은 삼가면에서 양천을 좌측에 두고 내려가는 길인 셈이다.

이곳에서 남명선생 본가로 가기 위해서는 우측으로 보이는 도로를 따라야 하지만 오늘 본가는 일정에 들어있지 않다. 직진하여 둑방길을 따라 갈 것이다.

 

 

 

 

 

 

          이곳 삼거리에 할배미륵불이 있어 보고 간다.

 

 

 

 

 

 

 할배미륵불,

 

 

 

 

 

 

또한 이순신 백의종군로가 이곳을 지난다.

백의종군로는 차도이다, 과연 1년에 몇 명이나 걸을까? 궁금하다.

(하동) 화개 114.1km,  합천 율곡 33.7km로 표시되어 있다.

 

 

 

 

 

 

삼가에서 출발한다면 양천을 좌측에 두고 둑방길을 따라 내려가야 한다.

최소한 가수교 삼거리에서 부터는 더욱 그러하다.

 

 

 

 

 

 

삼가면 소재지쪽의 노거수 벚나무 가로수가 하천을 따라 1km쯤 내려오면 젊은 가로수로 바뀐다.

 

 

 

 

 

 

주류를 이루는 양천이 하판천(남명 본가쪽에서 흘러내려오는 하천으로, 하판리를 지나서 하판천이라 하나 보다.) 을 만나 계속 진행된다.

저쪽 하얀 차량이 보이는 곳이 양천인데, 하판천을 건널려다 보니 약간 우회해야 한다.

이후 부턴 그늘이 없다.

 

 

 

 

 

 

가회면 소재지에서 부터 남명선생 선비길에 대한 안내문이나 이정표, 안내리본 등 어느하나 표식이 될만한 것은 보지 못했다.

저 다리를 건너야 하나? 아님? 지나 내려온 하천 건너편으로 남명선비 길이 있는데 길을 잘못 든 것은 아닌가? 등등 의구심이 들었는데 기우였다.

저곳 산세로 보아선 보이는 하천 우측으로 내려가야 할 것 같은데 길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

 

 

 

 

 

 

위 사진에서 보이는 학동교이다.

실제로는 다리 건너편에 남명선생 선비길 이정표가 있나하고 갔다 되돌아 왔지만,

결론은 없다.

 

 

 

 

 

 

위 학동교에서 방향을 가늠해 본다.

강물이 저곳 아래에서 우측으로 휘어져 감으로, 강을 기준으로 하여 우측길을 따라 내려가야 한다.

왜냐하면 산으로는 길이 없기 때문이다.

이곳 학동교를 건너 강을 우측에 두고 300m쯤 내려가다 저~곳 보이는 잠수교를 건너와도 되긴하겠다.

 

 

 

 

 

 

학동교 인근에 있는 옥동교를 건너 도로를 따른다.

이 도로는 삼가에서 가회방향으로 향하던 도로에서 분리되어 남명선생 외가가 있는 외토리를 지나 대의로 가는 길이다.

오늘 남명선생 선비길의 중심이 되는 길인 셈이다. 

남명길은 이 도로를 따라도 되고, 조금 진행 후 인근의 강변으로 난 둑방길을 따라도 되나 오늘은 둑방길을 따라 간다.

 

 

 

 

 

 

둑방길을 따라 간다.

마을 어귀의 노거수 버드나무가 시원하다.

저곳 하천의 둑같아 보이는 곳이 잠수교다.'

 

 

 

 

 

 

가로수로 식재되어 있는 저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 모르겠다.

그늘을 만들어 줄려면 수년은 더 흘러야 되겠다.

 

 

 

 

 

 

 

 

 

 

 

 

 

 

저만큼 다리가 보인다.

삼가면 소재지에서 지금까지는 양천강을 좌측에 두고 내려왔다.

 

 

 

 

 

 

구용계교를 건넌다. 다리 이름이 특이하다.

 

 

 

 

 

 

 

위 구용계교를 건너자 우측 강둑을 따라 내려가면서 바라본 용계마을이다. 마을앞 노거수 한그루와 정자가 눈에 뜨나, 특별한 고택등 시선을 끄는 건물은 보이지 않는다.

 

 

 

 

 

 

 

 

 

 

 

 

 

 

 

 

 

 

 

 

 

 

 

 

 

 

 

 

 

 

용계마을 앞 둑방길은 마을앞을 지나는 도로보다 거리가 조금 더 길다.

 

 

 

 

 

 

용계교를 건넌다.

이곳 용계교를 건너면 외토리이다. 다리를 건너자 왼쪽 둑방길을 따라 뇌룡정으로 내려가도 되지만 도로를 따르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

 

 

 

 

 

 

이름모를 사당 앞을 지나.

 

 

 

 

 

 

마을 가까이서 육각정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오른다.

저곳 언덕위 노거수 한그루 보이는 곳 아래 남명선생 생가지가 있다.

 

 

 

 

 

 

남명선생 생가지 뒷편에서 오른 셈이다.

마을 안길이 좁아 뒷쪽으로 일부 새 길을 내었다.

 

 

 

 

 

 

이곳은 조선 중기 때의 대학자인 남명 조식(1501~1572)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선생은 신유년(辛酉年)인 1501년(연산군7) 6월 26일 이곳 외가에서 태어났다. 원래 선생의 본가는 삼가현의 판현에 있었다. 풍수에 따르면 선생의 외가는 명당자리로 닭의 해에 태어나는 아기는 자라서 현인이 되다고 하였다. 그런 예언 때문인지 선생이 태어나던 날 우물에서 무지개 빛이 뻗치어 온 방을 가득 채웠다고 한다.

 

 

 

 

 

 

조선 중기 경상좌도의 퇴계 이황과 더불어 영남 유림의 쌍벽을 이룬 선생은 특별히 의(義)와 경(敬)을 존중하고, 배운 것을 실천하는 선비정신을 강조하였다. 때문에 선생이 타계한지 20년 후인 임진왜란 때, 정인홍. 곽재우를 비롯한 선생의 제자들이 의병장이 되어손수 전쟁에 나선것도 바로 이러한 선생의 가르침을 모범적으로 실천한 사례라 하겠다.

 

 

 

 

 

 

선생이 태어난 이곳의 건물은 언제 지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얼마 전까지도 이곳에 건물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을 1970년도 이른바 새마을사업 때 철거하여 지금은 폐허로 그 흔적만 남아있는 것을 새로 복원하고 있는 중이다.

 

 

 

 

 

 

 

 

 

 

 

 

 

현 증축공사 중이어서 대문은 닫혀있지만 외쪽 담장이 쌓여지지 않아 둘러 볼 수는 있다.

 

 

 

 

 

 

마을 안쪽의 공터,

남명선생 생가로 가는 길은 저곳 빨간지붕 우측 골목으로 접어들면 된다.

앞쪽 약간 비스듬한 전주에 남명선생 생가를 알리는 이정표가 있어 알 수 있다.

 

 

 

 

 

 

도로변 토평마을 회관앞으로 내려왔다.

만약 이곳에서 남명생가로 가고자 한다면 우측으로 보이는 마을 안길을 따라 오르면 된다.

 

 

 

 

 

 

앞쪽에서 보았을때 외쪽 건물은 용연사와 관련된 이씨 집안의 무슨 건물이지 싶고,

우측 건물이 용연서원과 뒷편 용연사 이다.

 

 

 

 

 

 

강궤평(降櫃坪) 

내려올 강, 함궤, 평평한 평, 금궤가 내려온 들판이란 뜻이란다.

 

 

 

 

 

 

이 건물은 용연서원이다.

뒷편에 용연사가 있다. 용연사는 영모재 이온 선생을 추모 제사하는 사당이다.

이온 선생의 효친정신을 추모하고자 1580년에 처음 세워졌으며 이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사당은 폐지된다.

이후 1910년부터 향사(享祀)를 다시하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용암서원으로 왔다.

위 용연서원과는 농지 한 블럭 거리에 있다.

코로나 19의 영향인지 문은 닫혀있다.

 

 

 

 

 

 

용연서원은 합천 삼가 인근의 유림이 남명 조식선생을 존모하여 향사하면서 강학 활동을 하였던 곳이다.

이 서원의 전신은 1576년에 노흠, 송희창 등이 의논하여 삼가현의 서쪽 회현아래 가회면 장대리에 세운 회산서원이다. 이 서원이 임진왜란때 소실된 뒤, 1601년에 향강 즉 황강주변으로 옮겨 향천서원으로 복원되어 1605년 8월에 남명선생의 위판이 봉안되었다. 이 서원이 1609년에 용암서원으로 사액되었으나, 조선 말기에 대원군이 내린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2000년에 복원추진위원회가 결성되어, 2007년 현재의 자리로 이전 복원되었다. 서원의 건물로는 사당 숭도사, 진사청, 강당 거경당, 동재 한사재, 서재 존성재 및 내외의 삼문으로 지숙문과 집의문이 있다.

 

 

 

 

 

 

을묘사직소 전문을 바위에 새겼다.

 

 

 

 

 

 

남명선생 상

상 주위에는 남명선생이 1554년(명종9)에 현재의 합천군 삼가면 하판리 옛집에 살면서, 당시 종2품 전주부윤에 재직하고 있던 이윤경에게 쓴 편지로, 남명의 안빈낙도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植도 이 세상에 머문 지 오래돼 쇠병이 매우 심합니다. 몇 년 전에 외아들을 잃어 상심이 매우 컸는데 늦게 차자을 얻었습니다.지금은 삼가현에 있는 선친의 옛집으로 이사와 살고 있지만 살림이 빈한하여 매일 끼니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있습니다.그러나 허물이 적고 걱정거리가 별로 없으니, 내 입장에서 공의 처지를 보면 오히려 내가 더 낫습니다.    .....중략 .... 띳집이

시냇가에 있어 부엌에서 일하는 아이가 때때로 송사리를 잡아 오는데, 다만 그물이 없어 못가에서 땀만 흘릴 뿐입니다. 명주실이 있어야 그물을 짜 고기를 잡지요, 잡곡밥도 제대로 못 먹는데, 오히려 고기 먹을 생각을 했으니, 분수에 넘치는 짓이 아니겠습니까.

 

 

 

 

 

 

뇌룡정 건물이다.

 

 

 

 

 

 

이 건물은 남명 조식(1501~1572)선생이 서울 및 김해에서 생활다가 외토리로 돌아온 48세 무렵부터 61세 때까지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들을 가르쳤던 곳이다. 당시 세웠던 뇌룡사는 임진왜란때 소실되었으며, 그 뒤 용암서원의 부속건물로 이건되었다가 용암서원이 훼철된뒤 1883년에 허유, 정재권 등의 의해 원래 자리에 다시 중건된 것이다.

뇌룡이라는 말은 장자에 보이는 '시거이용현 연묵이뢰성(尸居而龍見 淵默而雷聲 / 시동(尸童)처럼 가만히 있다가 때가 되면 용처럼 나타나고 깊은 연못처럼 묵묵히 있다가 때가 되면 우레처럼 소리친다)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의 목조와가 형태이다. 정면에는 원기둥을 세우고, 대청 좌우편에 방 셋을 두었다.

 

 

 

 

 

 

뇌룡정에서 가까운 곳 도로변에 쌍비가 있다.

 

 

 

 

 

 

외토리 쌍비는 이곳 지명이 외토리이고 비각안에 두 개의 비석이 나란히 서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비각의 정면에서 볼 때 왼쪽에 서있는 비는 앞면에 효자리(효자리)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비의 뒷면에는 고려말에 이 마을에 살던 의정 이온(생몰년 미상) 선생의 효행을 기리기 위한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오른쪽에 세워진 비석은 마멸되어 그 내용을 알 수 없다.

왼쪽 비는 1383년에 세워진 것이라는 명확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흔하지 않은 고려시대의 효자비라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크다.

 

 

 

 

 

 

 

 

 

 

 

 

 

 

외토리 입구에 대형 느티나무 두 그루가 있다. 수령은 약 450년으로 추정한다.

이곳에 유일하게 남명선생 선비길 안내도가 조금은 조잡하게 그려져 있다.

 

 

 

 

 

 

남명교를 건너 대의면으로 간다.

외토리에서 대의면소재지 까지는 약 2km가 채 안되는 거리이다.

 

 

 

 

 

 

중간 비석군,

 

 

 

 

 

 

외토리 느티나무 아래에서 천천히 15분여,

대의면 소재지에 도착하여 오늘 일정을 마무리 한다.

중간 휴식시간, 뇌룡정 주변 탐방시간 포함하여 천천히 3시간 10분쯤 소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