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지역의 산

산청 중산리, 빨치산토벌전시관, 성모상, 청정암, 중산두류생태탐방로, 반야사, 천왕사 성모상, 중산자연휴양림, 정각사

정헌의 티스토리 2022. 8. 15. 15:58

■ 산청 중산리, 빨치산토벌전시관, 성모상, 청정암, 중산두류생태탐방로, 반야사, 천왕사 성모상, 중산자연휴양림, 정각사 

 

 

지리산 여러 깊은 계곡에서 흐르는 물은 수량이 풍부하고 깨끗하여 전국 어느 지역보다도 탁족을 즐기기엔 좋다. 산청의 중산리 계곡 또한 여름철에는 많은 분들이 찾는 곳이다.

계곡 군데군데 경관이 좋은 곳엔 여지없이 펜션, 모텔(식당겸함) 등이 들어서 있어 여름 한철엔 이들 시설을 적절히 이용함이 더 즐길 수 있는 방법이다.  오늘은 중산리 계곡에서의 쉼에 양념으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하고 중산리 주변 몇 군데를 소개해 볼까 한다. 

정각사는 시천면 외공리에 위치한 사찰로 중산리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 시간이 나면 잠시 둘러볼 만 하다.

등불회 모임이 계곡모텔에서 있어 오후 자투리 시간을 이용하여 이곳 저곳 둘러본 중산리 일원이다,

 

 

 

▷ 가는 길

 

 

 

 

 

 

▷ 탐방코스    (2022.  8. 13.)

    

계곡모텔 모임 및 중식 - 성모상 - 청정암 - 두류생태탐방로(들머리 및 일부) -  반야사 - 천왕사 지리산성모상 - 중산자연휴양림 - 정각사. 

 

 

 

▷ 탐방후에

 

▣ 지리산 빨치산 토벌전시관

 

빨치산 토벌전시관의 설명 내용은 그의 대부분이 전시관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6.25전후 지리산 빨치산과 남로당 등 역사적 사실을 알 수 있다. 

 

 

 

빨치산 토벌전시관 안내도이다.

전시관 뒷편 민가 및 초막 아지트와 조각공원, 인공으로 만드 순두류 아지트로 연결되는 산책로가 있음을 볼 수 있다.

 

 

 

 

 

 

산청 중산리 주차장은 넓어 주차하는데 어려움은 없다.

물론 주차요금을 징수하지도 않는다.

이곳에서 주차장 건물을 바라보았을 때 맨 좌측 끝에 지리산빨치산 토벌전시관이 있다.

 

 

 

 

 

 

지리산 빨치산 토벌 전시관 입구.

입장료는 없다.

 

 

 

 

 

 

입구에 들어서면 탱크와 장갑차가 전시되어 있고,

 

 

 

 

 

 

권영도 경위 흉상이 있다,

 

권 경위는 1926년 7월 산청에서 태어나 1941년 금서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 후 금서면사무소 직원으로 근무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 지역향토방위대원으로 공비토벌작전에 혁혁한 공을 세워 순경으로 임용되었다. 관내 국수봉 전투에서 23명을 사살, 산청군과 함양군 일대에서 20명을 사살하고 13명을 생포하는 등 다수의 적을 사살하고 장비를 노획하는 공을 세웠다. 1952년 7월 산청군 웅석봉 일대의 게릴라 소탕을 위해 5명의 특공대를 조직해 적의 요새를 공격 섬멸하고 26세의 나이로 전사했다.

이에 정부는 권영도 경위의 공적을 기려 생전에 정부 포상으로 화랑무공훈장을 수여했고 전사 후에는 순경에서 2계급 높은 경위로 추서했다.

 

 

 

 

 

 

민족의 아픔,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않기를...

 

한민족이면서도

서로 총칼을 겨누는 분단의 역사속에서 지리산은 지울 수 없는 상처의 현장이며 그 상처의 깊이만큼 잊어서는 안되는 전적지이다, 

 

또 다른 전쟁이었던 이념의 대립,

그로 인한 엄청난 희생.

 

빨치산 

그들이 지향한 이념과 민족적 의미는 과연 무었이었나?

 

불행한 역사 속에서 비운에 쓰러져간 군경과 양민들의 죽음......

더 이상의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소망하며

 

참혹한 전쟁의 교훈을 다음 세대에게 전하는 역사의 장을 연다.

 

 

 

 

 

 

 

 

 

 

 

 

 

 

 

 

 

 

 

 

지리산 빨치산토벌 전시관.

 

 

 

 

 

 

전시실은 2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층은 역사 1실과 2실로 구분되며, 역사1실은 해방과 빨치산을, 역사 2실에서는 전쟁과 빨치산을 다루고 있다.

빨치산(Partisan)이란 말은 프랑스 '파르티', 즉 '도당', '동지'가 그 어원이나 오늘날 이것과 동의어인 게릴라(Guerrilla)라는 말이 보다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다.

우리나라에 빨치산 혹은 인민유격대, 인민해방군 이름이 등장한 것은 1946년10월 대구를 비롯한 영남지역 일대를 피로 물들인 좌익 폭도들 일부가 태백, 소백산맥 주변 산악으로 숨어들어 이른바 <야산대> 활동을 시작한 것이 그 효시가 된 것이다.

빨치산은 정규군과는 별도로 상대의 배후에서 그들의 통신과 교통수단을 파괴하거나 무기와 물자를 탈취하고 인명을 살상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6.25사변 전후 각지에서 준동하였던 게릴라를 가리킨다.

 

 

 

 

 

 

비극의 역사 

 

1945. 8.15. 해방

 

1945. 8.20. 소련군 북한 진주

 

1945. 9.07. 미군 남한 진주

 

1946.10.01. 대구10월 폭동사건

남한에서 좌익 게릴라의 효시가 된 사건으로 박헌영 일당이 미군정을 반대하고 공산당의 세력을 확대시킬 의도 하에 영남 일대에서 일으킨 폭동이었다. 진압 후 군정경찰에 쫓긴 일부 좌익 동조자들이 태백. 소백산맥 등으로 숨어들어 <야산대>활동을 시작하였다.

 

1947. 5.02. 남로당 결성

 

1947. 7.19. 미소공동위원회 협상결렬, 냉전사태 시작, 여운형 암살사건

 

1948. 2.07. 2.7사건

                  이 사건은 남한에서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만 선거를 하여 단독정부를 수립하라는 결정을 내린 유엔한국위원단 활동을 저지하고자했던 <민전>과 <남로당>의 준동으로 일어난 폭동으로서 밀양의 조선모직 직원들의 파업으로 시작되었다. 2.7총파업 사건으로 군경을 피해 도주한 상당수의 청년들이 야산대에 합류하자 이를 계기로 야산대는 조직적인 체계를 서서히 이루기 시작했다.

 

1948. 4. 03. 제주 4.3사건

                    남로당은 남한의 총선거를 방해하고 제주도를 공산화 하려는 무장폭동계획을 수립, 1948.4.3일 02시를 기해 제주도내 모든 지서를 습격, 불을 지르고 행정관서를 장악하므로써 경찰에 큰 타격을 주었다. 군은 이 사건을 진압하기 위하여 1948. 5.15일에 수원에 있던 제11연대를 제주도에 투입함으로써 본격적인 토벌작전을 전개하게 된다.

 

1948. 8.15. 남한 정부수립

 

1948. 9.09. 북한 정부수립

 

1948.10.19. 여순10.19사건

군부내로 침투한 좌익세력이 주동이 되어 제주도의 폭동진압을 위해 출동 중인 부대를 선동하여 일으킨 반란은 지방 좌익세력과 동조자들이 가담하게 됨으로서 그 세력은 여수에서 순천까지 확대되었다. 이 사건은 양민들을 학살하고, 방화와 약탈을 자행한 좌익 군인들이 일으킨 반란이었다.

그러나 발생 8일만에 출동한 국군에 의해 진압되었으나 일부 반란군은 백운산을 경유 지리산 일대로 도주하게 된다,

 

1949. 3. 1~ 5. 9.  지리산지구 전투사령부의 토벌작전

 

여순 10.19사건의 주동자 홍순석. 김지회의 최후 

반선에서 빨치산 17명 사살, 7명 생포. 사상자 중에 홍순석도 포함. 며칠 뒤 달궁마을에서 김지회의 처 조경순을 사로잡음. 김지회는 반선에서 중상을 입고 달아나다 뱀사골 입구 연정 마을 골짜기에서 숨짐.

조경순은 제주도 출신으로 생포될 당시 20세였다 광주 전남도립병원 간호원으로 근무하던 중 입원한 청년장교 김지회를 만나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으며, 여순10.19사건이 일어나자 함께 산으로 들어간 여자 빨치산이었다. 그녀는 체포 후 한동안 군경에 동참하여 귀순을 촉구하는 각종 주민대회에 모습을 나타내었으나, 끝내 전향을 거부한 채 1948년 9월 처형됨으로써 짧은 생을 마감했다.

 

군경의 빨치산 토벌작전은 3단계로 나누어 1949.10.30~1949.12.28일까지 진행됨

 

1950. 6.25.  한국전쟁

 

 

 

 

 

 

인민군과 빨치산 / 전쟁 중 인민군의 활동

 

국군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과 낙동강 전선에서 감행한 총반격으로 인하여 인민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공세가 좌절된다,

 따라서 인민군은 압록강 선까지 후퇴하게 되는데 이때 미쳐 후퇴하지 못한 패잔병들이 후방지역에서 활동 중인 지방 빨치산들과 합류하여 지리산 일대에 활동 거점을 구축하고 비정규전 부대를 조직하여 후방 지역을 교란하기에 이른다.

 

6.25 후의 빨치산

한국군과 유엔군의 총반격으로 퇴로를 차단 당한 패잔병 약 10,000여명은 지방의 빨치산과 합류하여 비정규전 태세를 갖추고 유격활동을 개시하였다.

이들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백운산, 덕유산. 회문산. 속리산 일대의 험준한 산악지대에 거점을 두고 호남지구 각처에서 국군 및 유엔군의 보급로를 차단. 식량약탕, 지서습격, 통신망 절단, 살인, 방화 등 갖은 만행을 자행하였다. 특히 이들은 인민공화국 체제를 모방한 통제기구를 설치하여 유격 활동을 전개하였다.

 

 

 

 

 

 

11사단의 토벌작전

11사단은 빨치산 토벌을 위해 1950년 10월 초에 창설되었으며 예하부대는 9연대, 13연대, 20연대가 있었다, 인민군 패잔병을 상대하고 정규전과 다름없는 전투를 치른 타 부대와는 달리 11사단은 오랜 산생활의 골수 게릴라(구 빨치산)를 상대해야 하는 어려운 작전이었다. 그러나 견벽청야의 작전으로 빨치산 토벌에 큰 성과를 올렸다,

견벽청야란 꼭 지켜야 할 전략 거점은 벽을 쌓듯이 견고히 지키고, 포기할 지역은 인력과 물자를 모조리 철수하여 빨치산의 보급로와 연락망을 차단, 적이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없애므로써(소개) 굶주림과 산속의 추위에 대항키 어렵게 하는 것이다.

 

 

1951년 7월 10일 휴전회담이 시작되었다. 회담장소는 공산측의 주장에 따라 공산군 점령지인 개성으로 결정, 당시 북한측은 정치적. 심리적 효과를 노렸다.

이후 유엔군측 요구에 따라 1951.10. 25일 중립지역인 판문점으로 회담장소가 이전되었다. 회담이 중단되자 전투는 다시 격렬해져서, 전쟁은 2년이나 더 계속되었다,

 

휴전협상에서 포로문제는 중요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포로의 강제송환이냐 자유송환이냐의 문제 때문에 회담은 다시 결렬되었고, 공산측은 포로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1951년 8월 이후부터 친공포로에 의한 의도적인 소요사태와 반공포로, 친공포로간의 유혈사태를 일으켰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에는 한 때 17만 명에 이르는 공산포로가 수용되기도 하였다,

마침내 7월11일 이승만은 휴전에 동의하였다. 이로써 1953 .7. 27일에 비로소 휴전협정에 서명함으로써 3년 1개월에 걸친 승리없는 전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빨치산 조직 남부군

남한 빨치산 조직의 총책으로 알려진 이현상은 덕유산 송치골에서 도당 회의롤 통해 독자적인 활동을 펼치던 유격대를 통합 남부군이란 군사조직체로 개편하여 남한 빨치산 지휘 체계를 확립하였다

 

백야전사의 토벌작전

남부군이 종래의 게릴라적 전술에서 벗어나 낮에도 전면적으로 만행을 일삼자 정부는 1951년 11월 26일 백야전 전투사령부(사령관 백선엽)를 남원에 설치하여 대대적은 동계 토벌 작전에 나서게 되었다.

 

빨치산의 재 준동

백야전사의 토벌작전으로 타격을 입은 남부군은 직속의 81사단을 김지회부대로, 92사단은 박종하부대로 개편하고 전북도당의 45사단을 향미연대로, 46사단을 복수연대로 개편하는 등 재기를 위해 안간힘을 썼다

 

제1사단의 토벌작전

제1사단의 호남지역 빨치산 토벌작전은 1952.7.13~8.4일까지 20여일동안 제11연대가 주축이 되어 회문산. 지리산. 장안산, 덕유산 일원의 잔여 빨치산을 소탕하였으며,제12연대는 회문산. 내장산. 장성 일대에서 소탕작전을  전개하였다.

 

휴전후의 빨치산 

1953년 8월 26일 빗점골에서 제5지구당 조직위원회 회의를 열고, 이현상을 <반당. 반국가적 파괴, 암해 분자의 잔재>로 비판하여 이를 근절 청소한다는 결정서를 채택한다. 이것이 조선노동 제5지구당 결정서 제9호이다,

제9호 채택 열흘 뒤인 9월 6일에는 다시 빗점골에서 같은 내용으로 회의가 열려 이현상 숙청을 마무리 짓는 제5지구당 결정서 제10호가 나오게 된다.

이현상의 말로는 남한 빨치산 소멸의 상징이기도 하다.

남한 빨치산 중 가장 완강했던 무력집단의 우두머리인 이현상은 다른 빨치산들과 마찬가지로 처참하게 쓰러져 갔다. 이현상은 빗점골에서 제5지구당 결정서가 채택된지 얼마후인 1953년 9월 같은 장소(빗점골)에서 사살되었다.

 

소멸기의 빨치산 소탕작전 1955. 7. 1 ~ 1956. 12. 31.

 

토벌작전 종료 후 빨치산의 상황

1955년부터 1960년까지는 이응조 일당 3명만이  3개도를 무대로 주로 야간에 외딴 가옥을 침입, 절도와 농작물을 약탈하면서 연명하고 있었다,

1960년 12월 지휘자 이응조가 함양군 휴천면 송대골에서 함양경찰서 사찰유격대에 의해 사살되고 최후로 이홍이와 정순덕 2명만 남았다.

1963년 11월 12일 새벽 1시경에 만 1년간의 끈질긴 공작 끝에 산청군 삼장면 내원리에서 경찰관 2명에 의해 이홍이는 사살되고, 정순덕은 생포됨으로써 지리산 빨치산토벌 작전은 막을 내렸다,

 

 

 

 

 

 

 

 

 

 

 

 

 

 

 

 

 

 

 

 

 

 

낙오된 빨치산을 위한 비상선.

빨치산의 거점 간 연락은 소위 선이라 불리우는 도보통신 수단을 사용하였다. 이 선에서 유래되어 부대에서 낙오하거나 연락이 두절되면 비상함이라는 방법을 이용하기도 한다. 미리 약속한 장소에 통신문을 묻어 놓으면 다른 편의 선요원이 그것을 찾아가는 것이다, 아무리 갑자기 거점이 바뀌어도 이것으로써 연락이 끊어지는 일이 없기 때문에 비상함이라고 한다.

 

 

신입모집

빨치산들이 보급투쟁(약탈)이나 기동투장(기습)중에 현지의 동조자들을 강제 또는 위장선동하여 입대시키는 것을 말하며, 보급투쟁(약탈)때 강제로 짐을 지고 왔던 사람들에게 빨치산이 되도록 협박하거나 빨치산 간부가 인민공화국이 세워지면 모든 토지를 무상분배하고 평등한 사회가 될 것이라는 연설과 선동을 통해 빨치산이 되도록 회유했다.

 

 

 

 

 

 

물자확보

물자 약탈은 비상식량을 제외하고 식량이 5일분 정도 남아있을 때 토벌군이나 경찰이 주둔하고 있는 지역까지 기습 교란전을 펼침.

민간 지역에 은거하고 있는 도당이나 군당 소속의 지하조직을 통해 토벌부대의 위치, 병력, 화력 등의 정보수집을 충분히 한 후 계획을 수립.

탈취한 식량과 물자가 너무 많아 옮기기가 어려우면 빨치산들이 은거한 지역 주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나누어 주기도 했다.

 

 

악양 약탈사건

지리산 속에서 월동준비를 서두르고 있던 이영회 부대는 약양을 습격하여 도장골까지 쌀 가마를 운반하는 우마차와 지게의 행렬은 7일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7일째 되는 아침 이영회 부대는 토벌대의 대대적인 공세에 밀려 후퇴한다, 엄청난 세를 자랑하던 이영회 부대는 오합지졸이 되고 7일동안 밤낮없이 날랐던 수백 가마의 쌀들은 토벌부대가 악양을 공격하기 앞서 도장골로 들어가 모두 불태워 버렸다.

 

빨치산의 아지트로 순두류 아지트, 법계사 아지트, 칼바위 아지트, 소막골 아지트, 중땀암반굴 아지트, 조개골 아지트 등이 있다.

 

 

 

 

 

 

2층 복도를 통하면 뒷쪽 아지트로 연결된다.

 

 

 

 

 

 

 

 

 

 

 

 

 

민가 아지트

 

내원골에 있는 민가의 구들장을 교묘히 이용한 아지트였다.

토벌군(군.경)가 검문 검색을 하면 아궁이의 솥단지를 들어내고 방고래를 통해 구들장 밑으로 숨은 뒤, 아궁이에는 다른 곳에서 태운 재로 소복히 덮어 놓고, 솥에는 뜨거운 물을 채워 토벌대의 눈을 속여 은신처로 이용하였다.

1963년 11월 12일 새벽 1시경, 잠복 중이던 산청경찰서 경찰관 2명이 이홍이를 현장에서 사살하고, 정순덕을 오른쪽 다리에 관통상을 입혀 생포함으로써 지리산 빨치산 토벌작전이 막을 내린 곳이다.

 

 

 

 

 

 

구들장 아래 아지트를 재현했다.

 

 

 

 

 

 

초막 아지트

 

빨치산들이 산속에서 가장 쉽게 조성하여 생활했던 초막아지트 형태는 원두막형태(네모골)와 움집형태(원뿔형)로서 수목류와 억새, 산죽 등으로  즉석에서 지어 생활하였다.

초막아지트는 기본적으로 빨치산들이 먹고 자는 주거로 이용하였고, 또한 정치학습을 받거나 주요한 작전을 짜기도 하였다.

 

 

 

 

 

 

 

 

 

 

 

 

 

조각공원

넓은 면적은 아니나 몇 점의 작품을 볼 수 있다.

 

 

 

 

 

 

작품명 : 축제의 제단

 

 

 

 

 

 

작품명 : 조용한 아침.

 

 

 

 

 

 

이 외에 몇 작품이 더 있다.

 

 

 

 

 

 

아래로 내려오면 순두류 아지트를 재현해 놓았다.

 

급경사 지형에 거다한 바위들로 형성되어 자연적인 요새를 이루고 있으며, 아지트 가까이에 계곡 물이 흐르고 외부를 살피기에도 좋은 곳이다.

당시 순두류아지트 소개이다. 이곳 재현해 놓은 곳이 그렇다는 얘기는 아니다.

 

 

 

 

 

 

 

 

 

 

 

 

 

 

 

 

 

 

 

 

 

 

지리산 빨치산 토벌전시관을 약 50분에 걸쳐 둘러보았다.

 

 

 

▣ 지리산 성모상

 

지리산 성모는 천왕, 천왕할매, 마고할매, 마야부인 등의 속칭을 가지고 있는 지리산 수호여신이다.

1970년대 초까지 천왕봉에 있었으나 그 뒤 행방불명 되었던 것을 천왕사 주지 혜범스님이 찾아다가 절에 봉안했다.

1991년 경남도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동문선 권 68 박전지의 영봉산용암사중창기에 의하면  " .....옛적에 개국조사 도선이 지리산 주인 성모천왕에게 은밀히 부탁하기를......" 이라는  대목이 있고, 조선 초기 김종직의 점필재집 권2 유두류록에 보면 천왕봉 상에 있는 성왕묘에 들어가 성모상께 날씨가 개이기를 비는 고사를 지내고,  성모상 앞에서 유숙하며 성모상 목의 상처가 고려 말 왜적이 칼로 쳤기 때문임을 확인하고 있다.

또 성모를 마야부인이니, 고려 태조의 비라고 함은 망설이며, 이는 어디까지나 우리 토속적인 지리산 여신 성모가 옳다는 견해를 주장하고 있다.

또한 김일손의 탁영집 권5  두류기행록에도 "천왕봉 돌담 안에 1칸 판자집이 있고, 그 안에 석부인 상이 있으니 이른바 천왕이라" 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발췌>

 

 

 

 

 

 

시천면 중산리 중산주차장에서 중산1교를 건넌다.

 

산청 중산리에 성모상은 2분이 있다.

한 분은 지리산 성모상으로 중산리 천왕사에 모셔져 있고,  다른 한 분은 시천면민이 새로 조성한 성모상으로 보이는 건물 뒷편에 모셨다.

사진상  붉은색 건물 좌측 뒷편 조그만 정자의 지붕이 보이는 곳이 새로 조성한 성모상이 있는 곳이다.

 

 

 

 

 

 

계단을 따라 오른다,

성모상 50m 이정표가 있어 금새 알 수 있다.

 

 

 

 

 

 

새로 신축중인 건물 뒷편에 이런 상들이 보인다.

 

 

 

 

 

 

 

 

 

 

 

 

 

 

 

 

 

 

 

 

성모상이 설치된 곳의 샘물.

뒷편 폭좁은 계곡에서 불어내려오는 바람이 시원하다.

 

 

 

 

 

 

새로 조성한 성모상이다.

 

원래의 지리산 성모상은 우여곡절 끝에 천왕사에 모셔졌고, 이 성모상 소유권을 두고 천왕사와 시천면민간에 소송이 벌어져 시천면민이 승소했으나 지리산 성모상을 천왕사 윗쪽 거대한 바위를 좌대삼아 시멘트로 고정시켜 놓아 억지로 떼어오지 못하고 면민의 뜻을 모아 새로 조성했다고 지역민이 전한다.

 

 

 

 

 

 

 

 

 

 

 

 

 

 

 

 

 

 

 

 

 

 

 

 

 

 

 

 

 

 

 

 

 

 

삼국시대의 조상들은 크고 높은 영산의 정상마다 천심과 인심을 잇는 여신을 직정?시키고 이를 섬겼었다.

삼신산의 하나인 지리산의 여신은 성모 또는보다 높여 천왕할머니로 불려내리면서 많은 조화를 부렸다. 그 신체인 성모상을 후대까지 보존시켜 내린 우리나라 유일한 여신이기도 한 성모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여러 측면으로 영합되어  우러름을 받아왔다.

불로장수와 만사형통을 관장한다는 중국의 신선 마고로 신앙받기도 하고 고려 태조 왕건의 어머니 위숙황후의 기도로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루게 했다하여 왕후와 동일시했던 성모이기도 하다,

이태조가 등극 전에 지리산 깊이 쳐 들어온 왜구와 싸울 때 대첩을 거둔 것이 이 성모가 운무를 조작한 신조 때문이라 하여 호국백이라는  벼슬을 내렸고 이에 왜적은 성모의 신체에 칼질을 하여 보복을 했었다.

한국무속의 기원 설화에 보면 성모는 딸 여덟을 낳아 무술(巫堂무)을 가르쳐 팔도에 퍼뜨린 한국 토속 신앙의 조상이기도 하여 민복을 기원하는 신상이  되 오기도 했다.

일제 때 이 성모상은 배일 여신상이라 하여 골짝으로 굴러버림을 당하는 등 수난을 받아 만신창이가 되고 마모된 것을 찾아 천왕봉에 모셔졌다가 지금은 도 문화재 자료 14호로 지정되어 천왕사에 모셔져 있으며, 금번 산청군 시천면민들이 정성을 모아 중산리에 새 성모상을 실체보다 크게 제작하여 2000년  8월 6일 이곳에 모심으로써 통일과 호국과  민복의 영험을 계승토록 하고 여기 사적비를 세운다.

 

글. 조선일보 논설고문 이규태

 

 

 

 

▣ 청정암

 

 

성모상으로 가는 길의 신축 (묽은색)건물 뒷편이자 성모상 직전에 산허리로 돌아가는 길이 있다.

 

 

 

 

 

 

사람다닌 흔적은 적지만 호젓하니 걸을만 하고, 

누가 왜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무슨 길인가 하고 따라가 본다.

 

 

 

 

 

 

살짝 사면으로 돌아가는 듯 하다가 아랫쪽으로 내려선다.

 

 

 

 

 

 

이 탐방로는 오송펜션 앞으로 내려선다.

보이는 건물이 오송펜션이다.

물론 중산1교에서 이곳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있다.

 

 

 

 

 

 

지나 내려온 곳을 되돌아 본다.

이정표가 있거나 하지는 않다.

 

 

 

 

 

 

청정암을 찾아가 본다.

주변에 현수막과 이정표가 있어 청정암이 궁금하기도 하고 살짝 걸음도 걷고싶어서 이다.

 

 

 

 

 

 

청정암 가는 길

 

 

 

 

 

 

마지막 100여 미터는 제법 오르막 길이다.

 

 

 

 

 

 

사진상 보이지는 않지만 좌측 축대위의 SK텔레콤의 대형 안테나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지능선이 북쪽을 감싸고 있는 곳에 청정암이 있다.

외형상 크게 볼품있는 절은 아니나 아늑하고 깨끗하게 관리하고 있다.

 

 

 

 

 

 

아랫쪽 별채는 정자 역할을 할 듯,

 

 

 

 

 

 

대웅전 옆에 조그만 산신당도 있다.

 

 

 

 

 

 

판사 시험 합격, 육군 사관학교 합격, 건축 공무원 합격, 경찰공무원 합격, 행정고시 화공기술직 합격, 교육행정직 합격, 보건공무원 합격,  총경승진, 국방부 공무원 합격................

 

 

 

 

 

 

스님.

주변 수풀을 깔끔하게 다듬어 놓은 것으로 보아 부지런하고 검소한 분인것 같다.

 

 

 

 

 

 

 

 

 

 

 

 

 

기도발을 잘 받는 절이란다.

신도들이 꾸준히 늘고 있어 나름 보람도 있단다.

 

 

 

 

 

 

청정암을 둘러보고 되돌아 간다.

 

 

 

 

▣ 중산리 계곡과 두류생태탐방로

 

 

중산리 주차장변에 킹 편의점 겸 식당이 있다.

중산 두류생태탐방로 입구이기도 하고, 중산 1교 인근이기도 하다,

 

 

 

 

 

중산1교에서 바라본 계곡 상부,

사진상 보이는 글램핑장은 지리산리조트로,  글램핑장. 수영장 등이 있어 여름철엔 많은 분들이 찾는 곳이다.

 

 

 

 

 

 

중산1교에서 바라본 아랫쪽,

저기 이랫쪽 보이는 다리(중산2교) 아래에 계곡모텔이 있어 그곳 주변에 경관이 좋다.

계곡모텔은 이름이 모텔이지 펜션 겸 식당을 운영함으로 여름철엔 백숙으로 보양겸 피서지로는 아주 좋다.

금년에는 백숙 가격이 올라 마리당 70,000원을 받는다,

 

 

 

 

 

 

위 보이는 다리는 중산1교로, 건너편(오송펜션 인근)에서 본 모습이다,

중산리 주차장에서 중산1교 아랫쪽 계곡으로 내려서는 계단이 건너편 축대 중간쯤 보인다.

계곡모텔 아니면 계곡으로 내려서는 길이 없어 참고로 올려본다.

 

 

 

 

 

 

이곳은 중산 두류 생태탐방로 입구이다.

두류생태탐방로는 편도 약 1.3km의 탐방로로 주변 경관이 좋다. 이 구간중 계곡으로 접근할 수 있는 곳이 너럭바위와 구시소 폭포 아랫쪽이다.

 

 

 

 

 

 

두류생태탐방로 입구의 조그만 공원은 물소리빛광장으로 이름붙였다.

거의 완공되어 머지않아 출입가능 하겠다.

 

 

 

 

 

 

생태탐방로의 모래소 전망대이다.

건너편은 지리산리조트.

 

 

 

 

 

 

중산마을에서 약 500m거리로 지리산 리조트 상부와 연결된다.

중산 두류생태탐방로 중  계곡으로 진입할 수 있는 곳이다.

계곡에서 탁족을 즐긴다면 이곳이 좋다.

물놀이가 지루하다면 두류생태탐방로를 걸어도 좋다.

 

 

 

 

 

 

너른 바위 주변의 소.

 

 

 

 

 

 

너른바위

사진 아랫쪽으로 제법 넓은 반석이다.

 

 

 

 

▣  지리산 반야사. (천왕사. 중산자연휴양림,)

 

 

중산리 주차장에서 도로를 따라 상부주차장(순두류) 방향으로 약 100m,

도로가 급하게(약 270도) 급하게 휘는 곳  좌측으로 중산자연휴양림 이정표가 있다.

중산 자연휴양림  700m를 알리고 있다.

이 길을 따라 차량으로 이동하여도 되고 심심하면 걸어도 된다.

 

 

 

 

 

 

중산자연휴양림 방향으로 향하다 보면 맨 먼저 반야사를 만난다,

 

 

 

 

 

 

도로변 입구에 거대한 자연석 암반을 기단으로 한 석불입상의 공사가 마무리 단계이다.

 

 

 

 

 

 

지리산 대불

 

부처님의 가피력(불가사의한 힘으로 중생에게 이익을 준다는 의미)로 국태민안, 왜란과 전쟁의 참화로 희생된 무수한 원혼의 상처를 달래며, 남북통일을 기원하기 위해 조성되었다 한다.

 

 

 

 

 

 

이곳 반야사의 건립 연대는 추정하기 어렵지만 옛부터 수많은 수행자들이 초암과 죽막을 짓고 수행처로 삼은 곳이다.

임진왜란과 한일합방 등 몇 차례 부침을 격다가 한국전쟁 후 빨치산에 의해 소실되었던 것을 지리산의 수행자들이 다시 조암을 짓고 나한 기도를 하였던 곳이라 한다.

 

<이상 현지 안내문에서>

 

 

 

 

 

대웅전.

건물 내부는 일반 절과는 조금 다른 형태를 보이고 있다.

 

 

 

 

 

 

대웅전 뒷편에 석불상을 조성하였다.

 

 

 

 

▣ 천왕사

 

 

천왕사 입구,

 

위 반야사 바로 뒷편으로, 천왕사를 알리는 아무런 표시가 없다.

보이는 계단 좌측편에 경내로 진입하는 도로가 있어 차량의 경우는 이곳으로 진입하면 된다.

 

 

 

 

 

 

천왕사 부지는 제법 넓다.

 

 

 

 

 

 

짓다가 만 건물과 종무소.

 

지리산국립공원 구역이어서 건축허가가 나지않아서인지 번듯한 건물은 없다,

보이는 건물도 무허가?로 건축하다 중단된 듯한 느낌이다.

 

 

 

 

 

 

좌측으로 방향을 잡아 오르면,

 

 

 

 

 

 

지리산 성모상이 있다.

 

 

 

 

 

 

지리산 성모상  / 도민속자료 제14호

 

지리산 성모에 관해서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가 어머니인 선도성모를 지리산의 산신으로 모시고 국가 수호신으로 숭상했다는 기록과 함께 고려 태조 왕건의 어머니 위숙왕후를 지리산 산신으로 모셨다는 기록도 전한다,

불교계에서는 석가여래의 어머니인 마야부인을 지리산 산신으로 모셨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고, 무속에서는 천신의 딸 마고 성모가 하늘에서 내려와 여덟명의 딸을 낳아 모두 무당으로 키워 팔도로 보낸 다음 자신의 뒤를 잇게 하고, 자기는 무조(무당 무, 조상조)가 되었다는 전설도 전한다.

이처럼 성모에 관해 다양한 이야기기 전해지는 것은 지리산이 영산으로 오랜 세월동안 민간신앙의 대상이 되었고, 따라서 민중은 지리산 천왕봉에  성모사를 세워 성모신을 모시고 숭상하여 왔을 것으로 본다.

그런데 이 성모사의 신상은 1972년 누군가에 의해 훼손되었고 1987년 중산리 천왕사의 혜법스님이 진주의 비봉산과 과수원에 머리와 몸체가 따로 유기되어 있던 성모상을 수습하여 복원한 뒤 천왕사에 봉안하고 지금은 매년 음력 3월, 10월에 천왕제를 올리고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지리산 성모상.

 

 

 

 

 

 

외형이 청동상에 푸른 녹이 슬은 듯 

조금 음산한 느낌이다.

 

 

 

 

 

 

 

 

 

 

 

 

 

옆에서 보면 이 바위에 성모상을 모셨다. (성모상은 바위 맨 좌측 상단에 살짝 보인다.)

 

 

 

 

 

 

성모상 옆에 위치한 대웅전.

쇠락한 느낌이 많이 든다.

 

 

 

 

 

 

성모상을 둘러보고 되돌아 간다.

절 자체의 외관은 별 볼품이 없다,

 

 

 

 

▣ 중산자연휴양림

 

 

중산리에 자연휴양림이 있다 ?

 

반야사, 천왕사를 지나면 아스콘으로 포장된 도로가 한동안 계속된다.

아직은 공사 중이다.

 

 

 

 

 

 

중산자연휴양림이 궁금하여 도로를 따라 올라본다.

 

 

 

 

 

 

현재 보이는 건물 주변이 중산자연휴양림인가 보다.

 

숲으로 가려져 잘 보이지 않지만 아랫쪽으로 건물이 더 있는 듯도 싶고 없는 듯도 싶다.

현 육안으로 언듯 보기엔 여타 지역의 자연휴양림을 생각하면 안 될 것 같다.

앞으로 진입 및 주변 도로가 완공되고 자연휴양림이 정비되면 어떻게 변할 지 모르겠다,

 

 

 

 

 

 

주변으로 도로 확포장 공사가 완료되고,

 

 

 

 

 

 

후에 건물이 들어서 주변이 정비되면 어떤 모습이 될지 모르겠다,

 

 

 

 

 

 

도로를 따라 윗쪽으로 오르면 생태터널이 한 곳 더 있다.

 

 

 

 

 

 

위 터널은 지리산 연하봉에서 분지된 지맥의 중산리와 거림(내대)를 경계짓는 능선상이다.

 

 

 

 

 

 

도로 포장은 이 능선까지이다.

이후 좁은 임도가 이어져는데 어디까지 또는 어디로 이어가는지는 모르겠다.

 

 

 

 

 

 

이곳 능선에서 내려다 본 내대마을.

저곳 어디로 보이는 도로를 따르면 청학동으로 넘어가는 터널이 있다.

 

 

 

 

 

 

위 고개까지 갔다가 되돌아 간다.

 

 

 

 

 

 

샛길 시멘트 임도도 아래로 연결 되는 듯.

 

 

 

 

 

 

이곳으로 내려가 본다.

 

 

 

 

 

 

가까운 아랫쪽에서 서로 만난다.

좌측으로 이어지는 시멘트 길은 위, 위 사진의 샛길로 이어질 듯,

 

 

 

▣ 방장산 정각사

 

 

시천면 내공리 691번지.

정각사에 왔다.

입구의 팽나무, 세상에 이런나무가 !, 

어느 불자가 보내준 팽나무의 형태가 사람모습(신상)을 하고있다고 안내하고 있으나 아무리 보아도 아닌것 같다.

아마 드론이나 사다리를 세우고 조금 상부에서 내려다 보았을때의 모습인것 같다.

 

 

 

 

 

 

입구 천왕문,

 

정각사는 1966년 법농 정국주 부부의 발원으로 수월 천석선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법농 정국주는 소년 시절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귀국, 부산에 정착해 자수성가 했다고 하는데 그 재력으로 이 절을 세우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현재는 대한불교 조계종, 선학원 소속이라 한다.

여느 절과는 달리 절의 연혁을 소개하는 안내문은  보이지 않는다.

 

 

 

 

 

 

천왕문의 사천왕상

 

 

 

 

 

 

법해루.

 

 

 

 

 

 

대웅전

 

 

 

 

 

 

범종루

 

 

 

 

 

 

오층석탑.

 

 

 

 

 

 

대웅전 내부

가운데 3불, 좌우 2불  5분을 모셨다.

 

 

 

 

 

 

죽림선원으로 오르면서 되돌아 본 5층 석탑쪽.

 

 

 

 

 

 

죽림선원.

 

 

 

 

 

 

대웅전의 옆 모습.

 

 

 

 

 

 

법해루 뒷쪽엔 원량수불 편액이 걸려있다.

 

조용하고 수수한 절이다.

지나가는 길에 한번쯤 둘러보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