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지역의 산

김해 수로왕릉, 봉황동 유적, 수릉원, 대성동고분 및 박물관, 국립가야박물관, 구지봉, 수로왕비릉, 연지공원

정헌의 티스토리 2022. 10. 10. 23:53

■ 김해 수로왕릉,봉황동유적, 수릉원과 민속박물관, 대성동 고분 및 박물관, 국립가야박물관, 구지봉, 수로왕비릉. 연지공원

 

    부산에 아들을 만나러 갔다가 되돌아 오는 길에 둘러본 김해시내 일원이다. 김해는 과거 무척산, 신어산 등산을 하면서 지나친 적은 있지만 김해 시내의 유적지를 제대로 둘러보지는 못했다. 오늘 오후 약간은 늦은 시간이어서 수로왕릉에서 출발하여 이곳 저곳 조금은 바쁘게 다녔지만 연지공원에 도착하니 어둠이 내린다.

    오늘 다닌 유적지 서로간은 먼 거리가 아니므로 적의 주차후 도보로 가야사 누리길을 따라 이곳 저곳 탐방함은 한나절을 보내기엔 부족함이 없겠다.

 

 

 

▷ 가는 길

 

 

▷ 탐방코스 (2022. 10. 1.)

   

    수로왕릉 - 봉황동유적 - 민속박물관. 수릉원 - 대성동 고분 및 대성동 고분박물관 - 가야 (어린이)박물관 야철 특별전 - 구지봉 - 수로왕비릉 - 연지공원

 

 

 

▷ 탐방후에

 

 

    ▣ 김해수로왕릉

 

 

수로왕릉 주차장에 도착했다.

 

마침 찾는 날이 제7회 허황후 신행길 축제기간이다. 신행길은 첫발을 디딘 망산도에서부터 시작하여 첫날밤을 지낸 흥국사를 거쳐 낙동강지역을 지나 고대 가락국의 수도 김해로 이어지는 길을 말한다,

두어시간 주차한다고 하니 주차요금 4,000원 선불을 요구한다.

축제로 인하여 주변이 복잡하여 마침 빈 자리가 있어 주차는 했지만 요금이 살짝 비싼것 같다. 개인유료주차장인가 ?

후에 생각해 보니 봉황동 유적지에서부터 출발해되 되겠다. 봉황동 유적을 둘러보고 수로왕릉, 수릉원 순서로 둘러보면 되겠으며, 그곳 주차장은 넓진 않지만 무료인것 같은 생각이 든다.

 

 

 

 

 

정문이라 할 수 있는  숭화문 앞에는 색깔있는 모래로 작품을 만들고 있다.

 

 

 

 

 

홍전문

 

 

 

 

 

가락루를 지나,

 

 

 

 

 

성생대에 왔다,

 

성생대는 가락국 수로왕과 왕비의 춘추대제때 진설할 시생(돼지)의 의식을 진행하는 곳이다. 이 의례를 성생례라 하는데, 제례 하루전 음력 3월 14일과 9월 14일에 초헌관 주관하에 제집사들이 참여하여 진행된다.

 

 

 

 

 

능침의 정문인 납릉정문

 

 

 

 

 

수로왕릉

봉분 앞에는 능비(가락국 수로왕릉), 상석, 장명등, 망주가 있다.

 

 

 

 

 

수로왕은 김해김씨의 시조로 서기 42년 가락국의  왕위에 올라 서기 162년까지 12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태자 거등에게 양위를 한 후 지품천 방장산(지금의 산청군 금서면 지리산 자락)에 별궁을 짓고 허황후와 함께 은거하다 38년 만인 서기 199년 158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허황후(본명은 허황옥)는  가락 건국 7년 째이던 서기 48년, 열여섯살 때 인도 아유타국에서 배를 타고 건너와 수로왕의 왕후가 되었으며 수로왕보다 10년 앞선 서기 189년 157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역시 김해 허씨의 시조가 되었다. 허황후는 수로왕과의 사이에 12자녀가 있었는데 그 중 두아들에게 허황후의 성을 따 김해허씨의 시조가 되었다.

 

   < 삼국유사 가락국기>

 

 

 

 

능을 바라볼 때 우측편에 숭선전과 안향각이 있다.

 

숭선전은 가락국 시조 대왕과 왕후 허씨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을 올리는 전각이다.

가락국 2대 도왕 원년 (서기 199년)에 창건되어 1698년애 새로이 제각을 건립하였고, 몇 차례 걸쳐 중수되었으며,1987년 능 전면에서 현 위치로 이건되었다.

안향각은 춘.추대제전에 예조에서 보내온 향과 축을 봉안하는 곳이다.1987년 현 위치로 이건되었다.

 

 

    <김해시 가야사복원과>

 

 

 

 

 

숭안전

1988년에 신축되어 팔왕조 2대 도왕, 3대 성왕, 4대 덕왕, 5대 명왕, 6대 신왕, 7대 혜왕, 8대 장왕, 9대 숙왕과 왕비의 위패가 봉안된 전걱이다.

 

 

 

 

 

숭안전 우측 뒷편으로 가면 숲이 조성되어 있다.

 

 

 

 

 

 

 

 

 

 

 

 

 

 

 

 

 

 

수로왕릉 경내 고인돌

 

수로왕릉 내에는 두 기의 고인돌이 있다. 조선시대에 제작된 김해부내지도에도 수로왕릉 뒤편에 치석(치석)으로 표시된 고인돌이 그려져 있다.

두 기의 고인돌은 받침돌이 없는 바둑판식이다. 이곳의 고인돌은 덮개돌의 크기가 길이 2m 너비 1.6m 두께 0.6m로 비교적 작은 편에 속한다.

 

 

 

 

 

 

 

 

 

 

 

 

왕릉 뒷편을 한바퀴 돌아 나온다.

 

 

 

 

 

축제 음악 예행연습 중이다.

천천히 수로왕릉을 한바퀴 둘러보는데 20분여 소요되었다.

 

 

 

 

    ▣ 봉황동 유적

 

 

안내도가 선명치 못하다.

현위치와 1번으로 표시된 곳이 주차장이다

 

 

 

 

 

노랑색 실선은 봉황동유적, 대성동유적, 국립김해박물관, 구지봉, 수로왕비릉, 북문, 동상시장, 수로왕릉을 거치는 길로  약5km, 2시간 정도 소요되는 것으로 안내하고 있다.

 

 

 

 

 

봉황동 유적지로 왔다.

우측편엔 뭔지 모를 발굴작업이 진행 중이다.

 

 

 

 

 

봉황동유적 (사적 제2호)

 

가야시대 대표적인 조개무덤으로 1907년 우리나라 최초로 고고학적 조사가 이루어졌던 회현리 패총과 금관가야 최대의 생활유적지인 봉황대가 합쳐져서 2001년 2월 5일 김해 봉황동 유적으로 확대 지정되었다.

패총에서는 소위 김해식 토기와 각종 철기, 골각기 등과 함께 중국 왕망시대(AD8~23)의 화천이라는 동전이 출토되어 당시의 교역상황을 나타내 주고 있으며, 측히 우리나라 최초로 불에 탄 쌀이 출토되어 쌀농사 기원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었다.

또한 구릉위에는 황세장군과 여의낭자의 전설과 관련된 여의각, 황세바위 등이 남아있으며 가야시대 고상가옥, 주거지 등이 발굴되었다.

 

 

 

 

 

주 능선을 따라 정상으로 진행한다.

 

 

 

 

 

봉황동 유적지는 야트막한 동산을 이루고 있어 가볍게 산책삼아 둘러보면 된다.

가락국천제단 표지석이 있다.

 

 

 

 

이곳은 황세바위 

 

 

 

 

 

앞쪽에서 본 황세바위

 

황세는 가락국의 9대 임금 겸지왕(숙왕)때의 인물로 황정승의 아들이다. 황정승과 친구사이인 출정승은 각기 아들을 낳으면 의형제를, 아들과 딸을 낳으면 서로 결혼 시키기로 약속하였으나, 황정승의 집안이 몰락하자 출정승은 딸인 여의를 아들이라고 거짓말을 하였다.

의형제를 맺은 황세와 여의는 어릴때부터 같이 자랐는데, 어느날 황세가 여의에게 오줌멀리누기 시합을 제의하자 여의는 삼대줄기를 사용하여 위기를 넘겼는데, 이 시합을 한 곳이 바로 황세바위다.

여의가 자라면서 점점 여인의 모습을 띠게 되자 이를 수상히 여긴 황세가 거북내(해반천)에서 멱을 감자고 하였는데 여의는 할 수 없이 자기가 여자임을 밝히고 둘은 결혼을 약속하였다.

그 후 신라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 황세가 왕의 명을 받아 유민공주와 결혼하게 되자 여의낭자는 황세장군을 그리워 하며 죽었다.

황세 또한 여의낭자를 그리워하며 병을 얻어 그해에 여의 낭자을 따라 죽었으며, 유민공주는 유민산(임호산)으로 출가하여 여승이 되었다는 슬픈 전설이 남아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봉황동 유적지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로 오른다.

 

 

 

 

 

섬섬대

 

 

 

 

 

봉황동 유적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

 

 

 

 

 

                가락대로 한자와 한글로 씐 각자같다.

 

 

 

 

 

                사색대

 

 

 

 

 

반대편으로 살짝 내려서는 곳에,

 

 

 

 

 

봉황대 각자가 있다.

 

 

 

 

 

이내 여의각

 

 

 

 

 

일원문 편액을 달고있다.

경주이씨 김해 화수정 문이 보인다.

 

 

 

 

 

고상가옥 주거

 

여기에 복원된 고상가옥과 주거 등은 봉황동유적에서 발굴조사된 가야시대 건물지 등을 참고로 하여 2002년 복원한 것이다.

가야시대의 일반적인 주거형태는 반지하식으로 땅을 파고 그 위에 벽과 지붕을 올리는 형태인데, 여기에 복원된 수혈주거지는 봉황대 진입 소방도로내 유적 제46호의 주거지를 참조하여 추정 복원한 것이다.

 

 

 

 

 

고상가옥은 가야시대의 보편적인 주거형태인 수혈주거와 달리 바닥면이 지면보다 높게 만든 건축물로서 주로 곡식 등을 저장하는 창고나 제의 등과 관련한 특수 용도의 건축물로서 주로 곡식 등을 저장하는 창고나 제의 등과 관련한 특수 용도의 건축물이 많다.

즉 고상가옥은 난방시설이 용이하지 않아 일반주거용 건물로는 부적합 하지만 지면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 만들어져 짐승과 습기, 침수 등으로부터 방해, 방재의 효과가 있기 때문에 창고 등으로 사용하기 위해 건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고상가옥 인근의 이정표.

순환산책로 방향으로 간다.

 

 

 

 

 

 

 

 

 

 

 

밍루

 

여기에 세워진 망루는 가야시대 당시의 건축기술과 구조를 고려하여 추정복원한 것으로 높이는 약 10m이다.

망루는 주변을 효율적으로 관찰하고 경계하기 위하여 높은 곳에 지은 건축물로서 외부침입으로 부터 마을을 보호하는 시설의 일종이다.

이러한 망루는 청동기 시대의 취락 유적에서도 많이 확인되고 있으며 가야시대에도 널리 사용 되었다.

특히 봉황유적은 금관가야의 도성유적으로 해안가에 위치하고 있어 선박의 진.출입과 외적의 침입을 관찰 감시하기 위해 어느 곳보다 많은 망루을 설치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는 해반천변의 발굴에서 열을 지은 대형 기둥구멍들이 확인된 데에서 알 수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고상 가옥

 

 

 

 

 

기마무사상

국보인 '도기 기마인물형 뿔잔' 과 '기마인물형토기'와 가야시대의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참고하여 청동주물로 제작한 것이다.

 

 

 

 

 

이곳 주변엔 넓은 잔디광장이 조성되어 있어 많은 시민들의 휴식처가 되고있다.

봉황동 유적을 대충 둘러보는데 35분여 소요되었으나 패총까지 둘러볼려면 이보다는 좀더 시간을 잡아야 할 듯,

 

 

 

 

▣  수릉원과 김해민속 박물관

 

 

김해수로왕릉 인근에 수릉원이 있다.

수릉원 앞쪽에 김해민속박물관이 있어 둘러본다.

 

 

 

 

 

 

 

 

 

 

 

 

 

 

 

 

 

비라

 

 

 

 

 

 

 

 

 

 

 

수릉원은 넓은 잔디광장 주변으로 숲이 조성되어 있어 적의 둘러보면 된다.

 

"수로왕"을 위하여 

For "King of Suro"

이곳은 가락국을 건국한 수로왕을 기념하는 공간이다. 구실 잣밤나무와 가시나무, 상수리나무 등 곧게 뻗은 참나무들 사이의 나무계단을 따라 낮은 언덕을 오르면 신단수를 의미하는 큰 팽나무를 만나게 된다.

이곳에서는 수릉원 전체 모습과 함께 건너편에 위치한 대성동 고분군, 수로왕릉 등을 바라 볼 수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우측 숲으로난 야트막한 능선길을 따라본다.

 

 

 

 

 

가운데 잔디광장.

한마당. 가야루, 기억원 정원, 사색의 정원, 연못-계류 -샘, 민속막물관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크게 볼 것은 없다.

 

 

 

▣ 대성동 고분군과 대성동고분박물관.

 

 

여느 지역에 볼 수 있는 고분군을 상상했는데 고분은 보이지 않는다.

 

 

 

 

 

주변으로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전체가 하나의 동산이다.

봉분 등을 생각하면 곤란하다.

 

 

 

 

 

김해 대성동 고분군 73호분

73호분은 애구지 언덕 남동쪽 비탈에 위치한 5세기 후반의 돌덧널무덤으로 대성동 고분군에서 조사된 돌덧널무덤 중가장 큰 무덤이다.

몇 고분에 대한 안내문이 있으나 외형상 고분은 없다. 

 

 

 

 

 

대성동 고분군 (사적 제341호)

 

1세기부터 5세기까지 철 생산과 국제교역을 통해 전기 가야연맹을 주도했던 금관가야 지배층의 무덤들이다. 옛 김해만을 조망할 수 있는 김해분지 중심부의 독립된 낮은 구릉지에 분포한다.

 

1. 2세기에는 구릉지의 낮은 쪽에 목관, 목곽묘가 들어서다가 3세기부터 5세기 전반 까지 대형 목곽묘가 구릉지의 정상부를 따라 조성된다. 고분군은 봉분을 높게 쌓아올리지 않는 전기 가야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가야 지배층 고분에 널리 행해진 순장이 대성동고분군에 가장 먼저 나타난다.

 

목관묘에는 와질토기, 청동거울, 철기 등을, 2세기 후반에 나타나는 대형 목곽묘에는 중국의 청동거울, 일본의 바람개비모양동기 등 교역품을 부장하였다. 3세기 후반에 출현한 가야식 토기는 낙동강 하류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전기가야 분포권을 나타낸다.

4~5세기 목곽묘에 부장된 철제무기와 교역품은 중국-가야-일본열도로 이어진 국제교역이 매우 활발했음을 보여준다.

대성동고분군은 전기 가야연맹을 주도한 금관가야의 발전, 계층구조, 대외관계를 잘 드러내는 대표 고분군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제일 높은 봉우리에 김해 대성동 고분군 1호분 안내문이 있다.

대성동 고분군 1호분은 애구지 언덕 남동쪽 정상부에 위치한 5세기 초의 초대형 주부곽식 덧널무덤으로 안내하고 있다.

 

 

 

 

 

대충 언덕을 올라보고 대성동 고분군 박물관쪽으로 내려왔다.

 

 

 

 


대성동 고분 박물관

 

 

 

 

 

가야고분군은 1세기부터 6세기까지 한반도 남부지역을 중심으로 번성했던 가야의 정치체계와 매장문화를 집약해서 보여주는 가야 지배층의 무덤들이다.

 

각 지역을 기반으로 성장한 가야 각국들은 독자적 권한을 행사하면서도 비교적 동등한 수평적 지위로 결속했다.

묘제와 부장품의 세부양식, 교역품은 인접지역이나 다른 가야세력과의 관계를 반영하고 있어 지역을 기반으로 성장했던 개별적인 가야세력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연맹을 형성하였음을 보여준다.

 

가야의 7개 고분군은 중앙집권화된 고대국가로 발전하기 이전의 한반도 고대의 문명을 보여주는 가장 독보적인 증거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김해의 금관가야은 변한의 12개 소국 중 구야국이 성장하여 발전한 나라이다.

일연의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따르면 수로왕이 서기 42년에 세운 후 532년 구형왕이 신라에 투항할 때까지 10대의 왕을 거치며 491년간 존속하였다고 한다. 가야의 역사는 서기 400년 고구려 광대토대왕이 신라와 연합하여 가야을 공격했던 때를 전후하여 전기가야와 후기가야로 나누어지는데, 금관가야는 전기가야의 중심국가였다. 김해에 자리 잡았던 금관가야의 고유한 문화는 무덤에서 출토한 유물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대표적인 유물로는 아가리가 밖으로 꺾인 굽다리접시, 화로모양토기, 고사리문양 판갑옷, 비늘갑옷, 덩이쇠, 철제 말갖춤새 등이 있다. 김해는 철의 주요 생산지로서 우수한 철기 생산 능력을 갖춘 철기문화의 중심지였다. 또한 낙동강 유역과 남해안에 접해 있다는 지리적 이점을 활용하여 철을 매개로 중국 동북지역 및 왜(일본)와 활발한 교역을 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금관가야는 전기가야의 맹주국이 되었다.

 

<현지 자료에서 >

 

 

 

 

 

가야의 7개 고분군은 1~6세기에 걸쳐 한반도 남부에 존재했던, 지금은 사라진 고대 문명인 '가야'의 고분군으로,

사진상 좌측 상단 말이산 고분군, 하단 유곡리와 두락리 고분군, 중앙 상단 대성동 고분군, 중앙 하단 지산동 고분군, 송학동 고분군, 우측 상단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하단 옥전 고분군이 이에 속한다.

이들 고분군은 지역을 기반으로 한 여러 정치체가 내부적인 결속을 다지고, 외부적으로는 정치.사회적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연맹이라는 정치체계를 유지 했음을 잘 보여준다,

가야고분군의 지리적 분포, 입지, 묘제, 부장품은 이러한 가야연맹의 특성을 증거한다.

가야의 7개 고분군은 연맹을 구성하는 정치체 간의 결속과 주변국과의 교섭을 통해 고대 동아시아 사회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하면서 힘의 균형을 유지하는데 기여했던 가야문명을 대표하는 유산이다.

 

<현지 자료>

 

 

 

 

 

남겨진 질문 1. 임나일본부설

 

임나일본부설은 고대 일본이 4~6세기 한반도 남부를 근대의 식민지와 같이 임나일본부라는 중심 통치기관을 설치하여 다스렸다는 주장이다. 임나일본부설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일제관학자들은 고령 지산동고분, 김해 삼산리 고분과 유하리고분, 함안 말이산고분, 선산 낙산동고분 등의 일부를 조사하였지만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1990년 대성동고분군에서 일제 강점기에 그렇게 찾고자 했던 왜의 위세품들이 조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성동고분 발굴 성과는 오히려 임나일본부가 허구임을 보여주는 증거로 활용되고 있다. 그 이유는 첫째 대성동고분의 무덤 구조가 일본과 다르고, 둘째 당시의 일본보다 우수한 철기. 토기 문화를 지니고 있으며, 셋째 청동솥. 동물모양허리띠고리. 굽은칼과 순장 등의 북방문화적 요소를 강하게 지녔기 때문이다.

 

<현지 자료>

 

 

 

 

 

남겨진 질문 2. 기마민족 가야정복설

 

기마민족 가야정복설에 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첫째로 마한의 목지국 진왕은 북만주의 퉁구스계 기마민족으로, 진왕의 후손 숭신천황은 수도를 임나에 두고 북구주로 침입하여 한왜연합왕국을 세웠다가 4세기 말~ 5세기 초 응신천황때 다시 기내로 진출한 이후 수도를 옮겨 한왜연합왕국을 만들었다는 설이다. 즉 5~6세기에도 임나를 왜왕이 계속 지배하겨 있었다는 변형된 임나일본부설이다.

두번째로 태강 6년(285) 부여가 선비의 침입에 의해 수도가 함락되어 부여 왕실의 일부가 흩어짐에 따라 부여족의 일파가 동해안을 따라 구야국으로 이주하였는데 이를 증명하는 것이 대성동 29호분이라는 부여족 남하설이다. 첫번째설과의 차이점은 부여족이 왜를 정복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북방문화는 철기를 바탕으로 한 기마문화인데 고분시대 전기의 왜는 그러한 특징이 잘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남겨진 질문 3. 신라고분문화의 원류

 

금.은, 금동을 이용하서 만든 착장구(관, 허리띠, 장식큰 칼)와 마구류(말띠꾸미개, 말띠드리개, 말방울), 서역계유리용기의 일괄 부장은 일반적으로 신라고분문화의 주요한 특징이며, 이들은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서 형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장유형이 무덤에서 최초로 확인되는 것은 신라 유적이 아니라 대성동고분군이다. 대성동 29호분에는 금동관과 장식큰 칼, 91호분에는 금동장식말갖춤새+서역계유리용기,  88호분에는 금동허리띠장식+징식큰 칼, 70호분에는 금동허리띠장식+금동장식말갖춤새+서역계유리용기, 1호분에는 고리모양말띠꾸미개가 출토되었다. 이러한 부장유형은 동시기 신라분묘에서는 출토사례가 없어 가야에서 입수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따라서 4세기에 김해의 금관가야가 경주의 신라보다 선진 문물을 일찍이 입수하였고, 금관가야가 쇠퇴하면서 이러한 부장습속은 경주로 이어져 수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현지 자료>

 

 

 

 

<해석>

후한의 세조 광무제 건무 18년 임인 3월 계욕일에 살고 있는 북쪽 "구지"에서 이상한 소리가 부르는 것이 있었다. 백성 2,3백명이 여기에 모였는데 사람의 소리 같기는 하지만 그 모습을 숨기고 소리만 내서 말하였다.

-"여기에 사람이 있느냐"

-"우리들이 있습니다."  아홉 간 등이 말하였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가." 또 말하였다.

-"구지입니다." 대답하야 말하였다,

-"황천이 나에게 명하기를 이곳에 가서 나라를 새로 세우고 왕이 돠라고 하여 이런 이유로 여기에 내려왔으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산봉우리 꼭대기의 흙을 파면서 노래를 부르기를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밀어라. 만일 내밀지 않으면 구워먹으리'라고 하고 뛰면서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대왕을 맞이하여 기뻐 뛰게 될 것이다."

구간들은 이 말을 따라 모두 기뻐하면서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대성동고분군은 1990년 6월부터 2014년 10월까지 경성대학교 및 대성동고분박물관에 의해 9차례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발굴조사를 통해 대성동 고분군이 금관가야 왕들의 묘역이라는 것과 금관가야가 철을 매개로 일본과 교류하여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또한 가야. 신라권역에서 출토된 적이 없었던 중국 대륙계 금동제 유물과 일본계 유물들이 다량으로 출토되어 금관가야가 동아시아 교류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증명하였다.

이렇듯 대성동고분군은 주변의 피지배층 묘역과 구릉 정선부의 지배층과 왕의 무덤으로 구성되어 왕과 지배층, 피지배층의 실체를 보여주는 금관가야의 중요한 유적이다. 동시에 고인돌 유적도 함께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 시기부터 대성동구릉은 이 지역의 무덤영역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국립 김해박물관 가는 길

 

 

대성공고분박물관을 둘러보고 김해박물관으로 간다.

 

 

 

 

 

기마민족 상징 조형물

 

이 기마민족 상징조형물은 국보 제275호로 지정된 기마인물형 토기와 가야시대의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참고하여 청동주물로 제작한 것으로 가야의 우수한 철기문화와 강력한 군사력을 표현하고 가야인의 용맹하고 웅장한 모습을 생동감 있게 형상화하였다.

 

 

 

 

 

 

 

 

 

 

 

 

 

 

 

 

 

유하리 마애불

 

 

 

 

 

 

 

 

 

 

 

 

 

 

 

 

 

국립김해박물관으로 왔다.

 

 

 

 

 

김해박물관을 크게 보아 김해박물관과 어린이 박물관으로 나눌 수 있다.

 

 

 

 

 

박물관 문닫을 시간이 30분 밖에 남지않아 어린이박물관의 야금특별전시관만 둘러본다,

 

 

 

 

 

국립청주박물관, 리움미술관과 공동으로 특별전 "야금. 위대한 지혜"를 개최한다,

야금은 불로 금속을 다루는 모든 과정과 그 결과물을 말한다. 인류 역사는 금속이 등장하면서 크게 바뀌었다. 인간은 금속을 통해 사회의 수많은 변화를 이끌었다. 그리고 지혜와 감성을 더하여 영원불멸의 예술품을 만들어냈다.

이번 전시는 금. 은. 동. 철에 스며있는 인간위 위대한 지혜와 예술성을 담아냈다고 안내한다.

 

 

 

 

 

 

 

 

 

 

 

 

 

 

 

 

 

 

 

 

 

 

구름, 용무늬 운판 /리움미술관

 

운판은 사찰에서 공양 시각을 알리거나 대중을 불러 모을때 사용한 것으로, 구름 모양을 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이 양면식 운판은 치는 고면에 당좌를 두고 다른 면에 2구의 보살입상을 장식한 점이 독특하다.

 

 

 

 

 

용두보당 / 금동, 고려10~11세기, 리움미술관 국보

 

당은 불. 보살의 위신과 공덕을 나타내는 장엄용 깃발로, 마군을 굴복시키는 힘을 상징한다. 절에서는 기도나 법회 등 의식이 있을 때 입구에 당을 두는데, 당을 다는 높은 기둥이 곧 당간이다. 이 용두부당은 실제 당의 축소형으로 당시 실내 봉안용으로 만들어졌다. 석조기단의 모양을 따라 장방형의 2층 기단을 마련하고, 그 위에 2개의 지주를 세우고 한가운데에 따로 주조한 당간을 세웠다.

 

 

 

 

 

용두토수  / 리움미술관, 보물

토수는 전각 지붕의 추녀 끝에 끼우는 장식물이자 보호장치이다.

 

 

 

 

 

풍타?

 

 

 

 

 

거울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 청동 거울의 쓰임새는 제한적이었다. 거울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은 제사장, 권력자 등 소수에 불과했고 실생활보다 의례에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고려시대부터 수많은 청동 거울이 제작되어 실생활에 주로 쓰이기 시작했다. 그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많은 거울이 제작되었으며, 사람들의 요구에 맞추어 다양하고 특이한 형태의 거울이 만들어졌다.

 

 

 

 

 

부처의 모습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는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로 전해져 우리 고유문화와 조화를 이루며 발전했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재료로 불상, 즉 '깨달은 자'인 부처를 형상화하였다.

그중에서도 금속은 내구성이 뛰어나고 도금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일찍부터 불상의 재료가 되었다. 금속은 특유의 단단한 성질과 은은한 광택으로 신앙의 대상인 부처의 모습을 더욱 경이롭게 만들었다. 다루기 힘든 금속이 인간의 염원과 손길을 거치면서 위엄과 자비를 갖춘 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만든 불상을 법당에 모시고 자신들의 정성과 바람이 전해지기를 기원하였다,

 

 

 

 

 

귀걸이.

 

 

 

 

 

 

야금 특별전시관을 대충 둘러보고 밖으로 나왔다.

지금 시간이 오후 5시 50분경이다.

 

 

 

 

 

이쪽이 국립김해박물관

시간이 맞지않아 다음기회로 미뤄야 겠다.

 

 

 

 

 

위 국립김해박물관(전시실)을 바라보았을때 바로 좌측에 이정표가 있다,

 

구지봉과 왕비릉 가는 길을 안내하고 있다.

이 길을 따라 왕비릉까지 갔다가 되돌아 와 연지공원을 둘러보았지만(시간이 저녁시간으로 어중간해서 연지공원 야경을 보기 위함임) 연지공원을 먼저 둘러보고 왕비릉으고 가는 것도 좋다. 왕비릉 이후에 향교. 북문쪽으로 방향잡으면 된다. 

 

 

 

 

구지봉 가는 길

 

 

 

 

 

구지봉은 야트막한 봉우리로 심한 오르막길은 아니다.

 

 

 

 

 

 

 

 

 

 

구지봉 정상

저쪽 보이는 비석엔 '대가락국태조왕탄강지지'로 기록되어 있다.

 

 

 

 

 

구지봉 정상석인가 했는데 아무런 표시가 없다.

 

 

 

 

 

정상 한쪽에 고인돌이 있다.

 

 

 

 

 

고인돌은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무덤이다.

지하에 깬 돌로 쌓거나 돌판으로 상자를 짠 무덤칸을 마련하고 그 위에 작은 받침돌(지석)로 큰돌(상석)을 지탱하는 구조가  대부분이다.

구지봉 정상부에 있는 고인돌은 전형적인 남방식 고인돌로 규모는  240×210×100cm로 작은 편이지만 특이하게 구릉의 정상부 부근에 위치하고 있다.

이 고인돌은 아직 정식 발굴조사가 되지않아 정확한 축조시기 등을 알 수 없으나, 주변에서 조사된 청동기시대의 마을유적 등의 사례로 보아 기원전 4~5세기경 이 지역을 다스렸던 추장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구지봉 고인돌의 상석에 새겨진 구지봉석(구지봉석)이라는 글씨는 조선시대의 명필인 한석봉이 썼다고 전해진다.

 

 

 

 

구지봉 정상에서 왕비릉으로 간다.

 

 

 

 

 

 

 

 

 

 

 

거리는 가깝다.

 

 

 

 

 

 

 

 

 

 

 

 

 

 

 

 

 

 

 

 

 

 

 

 

왕비릉만 보고 아랫쪽으로는 내려가지 않았고 되돌아 구지봉 기슭을 따라 내겨가 연지공원으로 간다,

국립가야박물관에서 구지봉 정상을 둘러보고 이곳으로 오는데 13분여 소요되었으니 되돌아 가는데는 이보다 적은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 연지공원

 

 

연지공원으로 왔다.

국립 가야박물관에서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여러 볼록, 오목 거울들,

손녀 생각이 나 이리저리 비춰본다.

 

 

 

 

 

연지공원에 어둠이 내린다.

 

 

 

 

 

 

 

 

 

 

 

 

한바퀴 돌아 볼 수 있도록 공원이 잘 조성되어 있다.

 

 

 

 

 

 

 

 

 

 

 

 

 

 

 

 

 

 

 

 

 

 

 

 

 

 

 

 

 

 

 

 

 

 

 

 

 

공원을 한바퀴 돌아 보고 되돌아 간다.

한바퀴 도는데 천천히 15분쯤 소요된다.

주차한 수로왕릉 주차장으로의 이동은 시간이 늦어 택시를 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