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

수원 화성 행궁동 예술마을

정헌의 티스토리 2016. 11. 24. 16:42

           ■ 수원 화성 행궁동 예술마을   

 

               대체로 보면 자연경관으로의 수원은 별 볼거리가 없다,

               수원화성과 인근 화성의 융.건릉 정도가 대표적이라 할수 있다.

               화성을 둘러보면 잠시 짬을 내어 행궁동 예술마을을 둘러봐도 좋겠다.

               현재는 '예술공간 봄'과 '대안공간 눈'이  주요 볼거리이고 주변 벽화마을은 그 규모는 작다.

              

           ▷ 가는 길

               수원시 팔달구 화서문로 76-1






 

           ▷ 팀방코스  ( 2016. 11. 11 )

               용인 한화리조트 - 수원 한우마당(중식) - 행궁동 예술마을(대안공간 눈, 예술공간 봄) 


           ▷ 탐방후에



 

           △ 용인 한화리조트,







 

           △ 이곳에서 2박을 했다.







 

           △ 아침 해가 떠오른다.

























 

           △ 리조트 주변,








           △ 수원성안에 위치한 행궁동 벽화마을에 도착한다.

               뒤로 보이는 요란한 벽화가 그려져 있는 건물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 곡성댁과 함양댁이다.

              















           △ '대안공간 눈과 예술공간 봄'은 이 건물에서 이루어진다.








                        △ 입구,

















           △ 대안공간 눈은  50여년 전 김정집 관장의 부모님께서 직접 짓고 함께 살았던 구옥을 개조하여 만든

               비영리 전시공간이다. 젊고 실험적인 작가들의 예술 활동을 지원하면서 작가. 주민, 지역단체 등과

               함께 마을에 활력을 불어넣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이를 토대로 2011년  공간문화대상 대통령상을 수상함으로써  공간문화가치의 창출을 통해 지역사

               회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 예술공간 봄 또한 서로 붙어있다.









           △ 내부로 들어선다.






 


           △ 수원 화성이 세계문화무산으로 등재되면서  화성 복원과 문화재 보호정책으로 화성  안 사람들의 주거형태는

               60-70년대 모습 그대로 낙후된 상태였고 주민들은 언제든 보상받아 따날 생각에 마을은 점점 슬럼화 되었다.

               2000년 중반 수원시 인구는 100만이 넘어가는데 IMF이후 이지역에 개인 화랑이 한 곳도 없었고 아름다운 화

               성을 찾는 관광객은 늘어 가는데 화성 안 마을에는 빈집, 빈 점포만 늘어가고 있었습니다.








           △ 지역에서 뜻을 함께하는 작가들과 함께 공간을 계획하고 직접 살던 집을 재생하여 지금의 대안공간 눈을

               만들었고, 행궁동을 역사 문화 예술이 살아있는 마을로 만들고자 주민들과 함께 노력하고 있습니다.








           △ 골목길에, 빈 점포에, 철거예정 건물에 작가들이 활동하며 예술을 통하여 주민들과 만나 소통하고 교류하면서

              사람들의 마음에 생기를 부여하고 있으며,

              최근 들어 행정의 적극적인 협조로 행궁동 예술마을 만들기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 나혜석은 이곳 행궁동 출신인가 보다.




                                                          ▼  시대를 앞서 간 최초의 여성 화가 나혜석


                                       나혜석


                                         1896년 04월 28일  - 1948년 12월 10일

                                         대표작 : 〈무희〉, <스페인 국경〉,〈해인사 석탑〉,  계몽소설 〈경희>,〈회생한 손녀에게〉등

                                         여성 계몽 운동에 앞장섰고 대담한 붓질과 생략, 과장을 통해 즉흥적인 감정이나 개성을 드러내는

                                         작품을 선보였다.



                     나혜석은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로, 근대적 여성 해방 운동의 상징적 인물이자 이를 문학으로 표현한 문학가이기도

                     하다. 나혜석은 1896년 4월 28일 경기도 수원에서 나기정과 최시의 사이에서 4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나기정은 대한제국 시기 경기도 관찰부 재판주사 등을 지냈고, 일본 식민 통치기에는 용인 군수를 지내는 등 지배

                     계층에 속하는 부르주아였다.

                     나혜석은 수원 삼일여학교를 거쳐 서울 진명여자보통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1913년 도쿄 여자미술학교에 입

                     학했다. 어린 시절부터 무엇을 보면 곧잘 연필로 그림을 그렸고, 여학교 시절에도 그림 솜씨가 뛰어났다고 한다.

                     두 오빠가 일본에서 유학했는데, 그녀 역시 오빠들의 도움으로 일본 유학길에 올라 신교육을 받았다. 도쿄 여자미

                     술전문학교 유화과에서 유화를 배웠는데, 본격적으로 서양화를 공부한 조선 여성은 그녀가 최초이다.

                     이곳에서 그는 서구 문물을 비롯해 근대사조를 받아들이면서 가부장 제도의 모순을 깨닫고 여성운동에 눈을 떴다.

                     그녀는 〈학지광〉에〈이상적 부인〉이라는 글을 실어 현모양처에 대한 사고를 반박하고, 여성도 실력을 쌓아 자

                     신의 입지를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으며, 여자유학생 모임인 ‘조선여자친목회’를 조직하고, 동인지<여자계〉

                     를 발간하여 여성의 사회 참여를 주장했다.


                     이 시기에 그녀는 둘째 오빠 경석의 친구인 최승구를 만났다. 최승구는 어린 시절 조혼으로 맺어진 부인을 조선에

                     두고 온 상태였으나, 두 사람은 곧 연인 관계로 발전했다.  1916년에 최승구가 폐병으로 사망하면서  나혜석은 큰

                     충격을 받고 잠시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약 1년간 여주 공립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가 다시 일본 유학길

                     에 올랐고,1918년에 귀국했다. 이후 함흥 영생중학교와 서울정신여학교에서 미술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여자계〉에 가부장제를 부정하는 계몽소설〈경희〉와 〈희생한 손녀에게〉를 발표하면서 여성 계몽 운동에 뛰어

                     들었다. 1919년에는 3·1운동 당시 김마리아, 박인덕, 김활란 등 여성 운동가들과 함께 비밀 집회를 열다가 체포되

                     어 5개월 간 옥고를 치렀다.  이때 도쿄 유학 시절부터 그녀에게 구애했던  김우영의 변론으로 무죄로 풀려났으며,

                     이듬해 그와 결혼했다. 김우영은 그녀의 재능을 아끼고 작품 활동을 지원해 주었고, 그녀는 10여년간 미술과 문학

                     양쪽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폐허> 동인에 참여해 다수의 글을 발표했고, 1921년 3월 경성일보사 내청각에서 조

                     선 여성 최초로 유화 개인 전시회를 열었다.

                     또한 1922년 창설된 조선미술전시회(선전)에도 꾸준히 작품을 출품하며 입상과 수상을 거듭했다.

                                        


                     1923년, 외교관이었던 남편 김우영이 만주 안동현에 부영사로 부임했다.  나혜석은 이로부터 약 5년간 만주에서

                     생활했는데, 이 시기에 그녀는 만주의 풍광을 화폭에 많이 담았으며,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에 여성의

                     자각과 사회 진출에 관한 계몽적인 글, 결혼 생활 및 육아에 관한 수기 등을 기고했다.

                     그녀의 미술 세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1927년 남편 김우영을 따라 세계여행을 한 일이다. 그녀는 2년 동

                     안 유럽을 여행했고, 파리 체류, 미국 방문등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당시 파리에서는 피카소, 마티스, 마리 로랑

                     생 등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고, 그녀는 인상주의, 야수파, 입체파의 화풍에 경도되었다. 이시기에 그린<스페인

                     국경〉, 〈파리 풍경〉, 〈프랑스 교외 풍경〉 등의 스케치에서는 인상파 화풍이, 〈무희〉,〈누드〉 연작에서는

                     야수파의 영향이 드러난다.

                     그녀는 일본식 리얼리즘에서 벗어나 대담한 붓질과 대범한 생략 및 과장 등 작가의 즉흥적인 감정과 개성을 드러

                     내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예컨대 이무렵의〈나부습작〉을 보면 기존의 일본식 관학파적인 화풍에서 탈피하여 인

                     물의 신체를 변형하여 거칠고 대담하게 표현했으며,〈자화상〉에서는 강렬한 흑백대비와 인물의 표정을 통해 내

                     면 상태를 표출했다.

                     유럽 체류는 작품 활동에만 영향을 준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유럽에서 조선과 완전히 다른 유형의 부부 관계와

                     결 생활을 직접 보고 사상적으로 큰 영향을 받았다. 그녀는 귀국 후 〈파리에서 보고 느낀 것. 사람이냐 학문이

                     냐>,  <젊은 부부>,〈불란서 가정은 얼마나 다를까>등의 글을 발표하면서 종래의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을 심화

                     시켰다.

                     이 여행은  그녀에게 화가로서,  여성 운동가로서의 발전에 큰 전기를 마련해 주었으나  한편 불행의 시작이기도

                     했다. 그녀는 이때 파리에 온 천도교 지도자 최린을 만났는데, 곧 박학다식하고 그림에 조예가 깊던 그에게 흠뻑

                     빠졌다. 두 사람의 불륜은 재불 조선사회를 비롯해 조선에까지 퍼져 큰 스캔들이 되었고, 결국 1931년 김우영은

                     그녀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그녀는 이혼이라는 개인적인 아픔에도 1931년 제10회 선전에〈정원〉,〈나부>,〈작약>등을 출품했으며, 그해

                     일본으로 건너가 제12회 일본 제국미술전람회(제전)에 〈금강산 삼선암〉과 〈정원〉을 출품하는 등 화가로서

                     활발히 활동했다. 또한 1933년에는 여자미술학사라는 교육기관을 설립해 여성 화가를 양성하고자 했다. 그러나

                     화가로서의 재능과 학교 운영은 성격이 달랐기 때문인지 학교는 제대로 운영되지 못했다. 경제적 궁핍에 시달리

                     던 그녀는 1년만에 학교일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귀향 후 그녀는 세번째 개인전을 열었으나 언론과 대중의

                     반응은 냉담했다.


                     연이은 실패와 생활고 속에서 순조로웠던 그녀의 인생은 점차 파국을 향해 치달았다.

                     1934년, 그녀는〈삼천리〉에 자신의 연애와 결혼, 이혼에 이르는 과정과 남성 위주의 가부장제 사회에 대한 비

                     판의식을 담은〈이혼고백서〉를 발표했다.

            "조선 남성의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 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게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

             의 정조를 뺏으려고 합니다. (중략) 여자도 사람이외다. 한순간 분출하는 감정에 흩뜨려지기도 하고 실수도 하는

             그런 사람이외다. 남편의 아내가 되기전에, 내 자식의 어미이기 전에 첫째로 나는 사람인 것이오. (중략) 조선의

             남성들아. 그대들은 인형을 원하는가. 늙지도 화내지도 않고 당신들이 원할 때만 안아 주어도  항상 방긋방긋 웃

             기만 하는 인형 말이오. 나는 그대들의 노리개를 거부하오."   

                     당시 사람들의 상식을 뛰어넘는 전무후무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과 더불어 그녀는 그해 최린에게 위자료 청구 소송을 하면서 다시 스캔들의 중심에 섰고, 사회적으로 완

                     전히 매장당했다. 그녀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던 애호가들은 작품을 폐기했다고까지 한다.


                     결국 나혜석은 경제적 어려움과 세상의 조소, 아이들을 보지 못하는 고통으로  심신이 병들어 1937년 수덕사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고(古)’라는 법명을 받고 불교에 귀의하려 했으나 그마저도 제대로 되지 않았던지 수덕사,

                     해인사, 다솔사 등 산사를 전전하다 다시 속세로 돌아오는 등 방황을 거듭했다.   이런 와중에도  이따금 그림을

                     그렸는데,〈해인사 석탑>, <해인사 홍류동>,〈학서암 염노장>,<다솔사〉등의 작품이 남아 있으며, 1934년에

                     는 소품전을 열기도 했다. 1944년에는 서울의 한 양로원에 들어갔으나  그곳에서도 얼마 있지 못했다. 이후 그

                     녀의 행적은 끊어졌고, 1948년 12월10일 행려병자로 죽었다.

                     나혜석은 당시 여성으로서 누리기 힘들었던 엘리트 교육을 받았고 화려한 결혼 생활과 화가로서의 찬란한 앞날

                     이 보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시대를 앞선 사고방식과 사회생활에 대해 무지하리만큼 순수했던 성품 탓에  결국

                     비극적인 인생을 산 신여성이었다.  그녀의 일생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의견이 분분하나,  확실한 것은 그녀가

                     삶과 작품을 통해 가부장적인 사회제도에 도전하며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자유를 추구했던 조선 근대

                     여성의 얼굴이었다는 점이다.


                                                                < 다음 백과 인물편 >






라켈 셈브리(좌)와 라켈을 기억하다?Big Gold Fish展 포스터(우) ⓒ 대안공간 눈



                                라켈 셈브리


                                행궁동에 살있는 물고기 신화를 만든 브라질 작가,  사랑스런 표정과 감각적인 터치,

                                의미있는 그림들과 행궁동 사랑이 남다른던 친구,

                                삭막했던 마을,  행궁동에 감각적인 벽화와 특유의 사랑스러움으로 활기를 불어넣고,

                                마을 사람들에게 웃음과 행복을 선물해주었던 라켈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세상에 새생명의 축복을 내리고 떠난 영원한 행궁동의 천사이자 가족, 라켈 셀브리를

                                애도하며 대안공간 눈에서 그녀를 위한 작은 전시회를 엽니다.









  









                   수원 행궁동 벽화 그린 라켈 셈브리 <라켈을 기억하다–Big Gold Fish>展


                                                        <라켈을 기억하다–Big Gold Fish>展 포스터(우) ⓒ 대안공간 눈


                                브라질 작가, 라켈 셈브리는 브라질과 수원 행궁동이라는,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두 장소의 연결

                                고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녀가 처음 행궁동을 방문한 것은 지난 2010년 이었는데요,  당시 대안공간

                                눈에서 진행한 이웃과 공감하는 예술프로젝트  <행궁동 사람들> 에 참여하여 금보여인숙 담벼락에 큰

                                <황금물고기> 벽화를 그려 세상에 행궁동을 알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녀의 독특하고 자유로운 예술 정신이 깃들어있는 ‘황금물고기’는 현재 행궁동 벽화마을의 대표 작품

                                으로 평가받고 있지요.


라켈 셈브리가 행궁동에서 그린 황금 물고기 벽화 ⓒ 대안공간 눈







 

          △ 지금은 무슨 연유로인지 황금물고기가 사라졌다.




                                행궁동의 매력에 반한 라켈 셈브리는  그 이후에도 행궁동을 계속 방문하여  거리의 담벼락들을 채워나가기

                       시작했는데요, 2012년에는 한 골목의 담벼락 전체를 긴 문어 다리 벽화로 채워 방문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았

                       습니다. 좁은 골목을 따라 이어지는 문어 다리는 조용하기만 했던 골목에 즐거운 이야기들을 만들어냈지요.


라켈 셈브리가 행궁동에서 그린 문어 다리 벽화 ⓒ 대안공간 눈


라켈 셈브리가 행궁동에서 그린 문어 다리 벽화 ⓒ 대안공간 눈




                                    2014년에는 국제협업아트프로젝트였던 신화와 예술 맥놀이 ‘행궁동에 신화를 풀어놓다’에 참여해

                                    예술공간 봄 외벽에  아마존 강에 사는  삐라루크의 아버지나무에 관한 티쿠나족의 신화를  벽화로

                                    그리기도 했는데요, 이와 같은 작품들을 통해 라켈 셈브리의 행궁동 사랑이 얼마나 컸는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예술공간 봄의 라켈 셈브리 추모전 라켈을 기억하다?Big Gold Fish展 ⓒ 대안공간 눈


예술공간 봄의 라켈 셈브리 추모전 <라켈을 기억하다–Big Gold Fish>展 ⓒ 대안공간 눈





                                    하지만 안타깝게도 라켈 셈브리가 최근 출산 중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이에 대안공간 눈의 이윤숙  대표는 라켈 셈브리를 추모하기 위해 그녀가 2014년에 머물렀던 예술공간 봄

                                     2층에서 <라켈을 기억하다-Big Gold Fish>展을 상시적으로 진행하고 있는데요,  아카이브 형태의 이번 전

                                    시에서는 라켈 셈브리의 사진과 작품들을 모아볼 수 있습니다.  먹맛을 좋아했던  한국적 감성의 소유자,

                                     감각적 브라질 작가 라켈 셈브리에게 애도를 표합니다.














        








           








           예술공간 봄


                대안공간 눈 뒷집,

                담장을 털고 집과집을 이어 2014년 예술공간으로 새롭게 재생한 복합문화 공간입니다

                공술공간 봄 개관저 <폭탕(Boomb)>을 시작으로 다양한 전시를 지원하며 2014년 국제협업아트프로젝트

               '산화와 예술맥놀이. 행궁동에서 신화를 풀어놓다'에 참여한 아메리카 대륙 4개국 작가의 신화이야기가 외

                벽에 그려저 있습니다.








            예술공간 봄은 두개의 전시실과 카페,아트샵과 예술체험공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전시실은 1층과 지하에 각각 위치하고 있으며, 1.2층으로 이루어진 카페는 워크샵 및 강의 공간과 휴게공간으로

                이용할 수 있습니다.

                아트샵은 도자, 천연염색, 나무 등 다양한 소재를 이용한 공예가들의 핸드메이드 공예품과 함께 수원 화성이라는

                역사. 문화적 지역성을 반영한  독창적인 관광상품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술 체험공간에서는 모자이크 벽화체

                험, 인두화 체험, 사람의 자물쇠 체험 등 다양한 체험프로그램에 참여 할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습니다. 








             마을기업 행궁 솜씨


                행궁솜씨는 한국관광공사 창조관광사업 공모에서 우수상을 수상한 마을기업으로, 세계문화유산 수원 화성과

                연계하여 행궁동 예술마을 조성에 후원함과 동시에 행궁동 골목관광을 선도하고 있습니다.

                즐거움과 여유를 나룰 수 있는 다양한 투어 및 탐방, 예술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또한 손맛이 살

                아있는 광광소품. 아트상품의 개발및 판매와 주민참여 예술프로젝트 등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 황금물고기는 사라졌다.
























          △ 슬쩍 스쳐가는 사람들에겐 그 범위가 작지만

              의미를 부여하면 또다름을 느낄수 있을것 같다.


'국내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익산 쌍릉  (0) 2017.03.13
부산 태종대 한바퀴  (0) 2017.01.02
원주 뮤지엄 산  (0) 2016.11.24
이천 사기막골 도예촌  (0) 2016.11.23
아산기행 / 외암민속마을, 맹사성고택, 지중해마을  (0) 2016.1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