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지역의 산

담양 송강정, 광주 5.18 민주묘지. 옛 산동교, 장성 황룡강 생태공원. 필암서원

정헌의 티스토리 2023. 5. 14. 20:25

■ 담양 송강정, 광주  5.18 민주묘지. 옛 산동교, 장성 황룡강 생태공원. 필암서원

 

   오늘의 주 목적지는 광주 5.18민주묘역과 산동교이다. 민주묘역이야 역사상 중요한 사건이어서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고, 옛 산동교는 조금 생소할 수 있겠다.

   영산강은 담양군 용면 가마골의 용소를 그 발원지로 하여 담양댐. 광주시내를 관통하여 목포 앞 바다로 흘러간다, 이곳 광주시 북구 동림동에 영산강을 가로지르는 옛 산동교가 있다. 이 지역은 선사시대의 유적이 발견된 곳이고, 옛 산동교는 근대에 신축된 교량이지만 현 도로로서의 기능은 상실하고 선사시대 유적지,  6.25 한국전쟁시 전적지라는 상징성으로 주변을 공원화하여 보존하고 있다.

  산청. 함양사건의 유족 일부가 5.18유족회장을 만나보고, 광주지역의 유일한 6.25전적지를 견학하기 위해 광주를 방문한다. 오가는 길에 약간 시간적 여유가 있어 송강 정철 선생이 머물었던 송강정,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필암서원 등을 둘러보았다.

 

 

▷가는 길

 

 

 

 

▷탐방코스

   담양 송강정 - 광주 5.18민주묘역, 옛 산동교 - 장성 황룡강 친수공원 , 필암서원  (2023.  5.  10)

 

 

 

▷탐방후에

 

    ▣ 담양 송강정

 

담양군 고서면 원강리 산1번지

송강정 입구의 주차장이 넓직하다.

보이는 쌍교숯불갈비집 때문에 주말 점심때라면 주차장이 복잡할 수 있다.

 

 

 

 

쌍교숯불갈비

이 직역의 맛집으로 통하는지 전 때 많은 대기 손님으로 인해 이 집에서의 식사를 포기한 적이 있었다.

 

 

 

 

 

뒷쪽엔 쌍교카페,

넓은 잔디밭 주변으로 여러 쉼터가 있다.

 

 

 

 

송강정으로 오른다.

주차장에서 바로 보이는 곳으로 들머리는 충분히 알 수 있으며, 우측으로 우회하여 오르늘 완만한 길도 있다.

 

 

 

 

소나무 숲이 좋이 이 길을 따라 오른다.

 

 

 

 

죽록정.

 

조선 선조때인 1584년 대사헌 송강 정철(중종 31(1536) ~선조 26년(1593), 58세에 사망, 서울에서 출생했지만 고향은 담양 청평?. 묘와 사당은 충북 진천. 서인의 영수로 조선 명종대부터 선조대까지 붕당정치의 가운데 있었음)은 동인의 탄핵을 받고 벼슬에서 물러난 뒤 창평으로 내려와 죽록정(竹綠亭)이라는 초막에 은거했다.

그뒤 우의정이 되어 다시 벼슬길에 나갈 때까지 이곳에 4년간 머물면서 시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등을 지었다.

지금의 정자는 후손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1770년에 세운 정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송강정(松江亭)이라 일컬었다. 정면에는 송강정, 측면에는 죽록정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정자 옆에는 1955년에 건립한 사미인곡 시비가 서 있다.

사미인곡은 정철이 50세 때 조정에서 물러나 불우하게 지낼 때 선조에 대한 연군의 정을 남편을 잃은 여인의 마음에 빗대 노래한 것으로, 속편 속미인곡과 함께 우리말의 묘미를 잘 살린 한국 문학 최고 걸작 중 하나로 꼽힌다,  

대표적 작품중 성산별곡은 그가 25세때 처가 당숙인 김성원이 장인 임억령을 위해 지은 서하당의 절기별 아름다움과 풍류를 노래한 작품으로 조선 시대 사대부의 자연관과 풍류를 엿볼 수 있으며, 관동별곡은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한 뒤 내금강, 외금강과 관동팔경을 유람하고 지은 것으로, 절경을 보고 풍류를 즐기는 한편, 관찰자로서위 자신과 풍류객으로서의 자신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현지 안내문, 다음 백과사전에서>

 

 

 

 

 

정면에는 송강정 현판이 걸려있다.

 

 

 

 

 

송강정

 

 

 

 

 

주변엔 나무들이 자라 조망이 트이지는 않는다.

 

 

 

 

 

사미인곡 시비

 

 

 

 

 

 

 

 

 

 

 

입구 주차장에서 가까운 거리이므로 둘러보는데 20분 정도면 된다.

 

 

 

 

▣ 5.18민주 묘지

 

역사적으로 대단한 사건이고 시설또한 정성을 들였다.

주차시설도 양호하다.

 

 

 

 

정문인 셈이다.

 

 

 

 

 

민주묘역으로 가는 길

 

 

 

 

 

 

 

 

 

 

 

 

 

 

 

 

중앙 우측,

 

 

 

 

정면

 

 

 

 

 

좌측

 

 

 

 

 

 

 

 

합동묘역 참배 후

 

 

 

 

'역사의 문' 쪽으로.

 

 

 

 

제2묘역 표시가 있어 찾아가 본다.

 

 

 

 

 

 

 

 

 

 

제2묘역이다,

 

 

 

 

대충 묘역면적의 4분의 1쯤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이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을 하고 탑골공원에서 최초로 독립만세를 부르는 모습과 일본군이 한국인을 살육하는 장면들을 중심으로, 독립문과 운양호, 명성황후와 안중근의사의 모습들을 두루 표현했다.

제작자 김왕현

 

 

 

 

 

5.18추모관으로 왔다,

 

 

 

 

한줄기 눈물

 

추모관에서 대표적인 추모의 공간으로

2층에 있는 민주의 샘에서 흘러 내린 물이 역사의 강을 건너

원추형의 상징물을 통해 빛과 눈물로 승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켜진 촛불은 추모의 염원을 담았으며, 수조는 눈의 모습을 상징화했다 한다.

 

 

 

 

 

 

 

 

 

 

2층

 

 

 

 

민주의 샘

5.18민주화운동 발생지인 광주가 민주화의 근원임을 상징하고 변하지 않는 순수한 정신이 역사의 강물을 따라 1층에 있는 한줄기 눈물이 되었다는 내용을 연출하였다.

 

 

 

 

 

 

 

 

 

 

주모관을 둘러보고 5.18민주묘역 탐방을 마친다,

 

 

 

 

5.18민주묘역에서 광주시내방향으로 진행하다 큰 도로와 만나는 곳이다.

광주광역시 북구 망월동 572-1, 석곡동 행정복자샌터 인근에 위치한 이 집에서 중식을 한다,

 

 

 

 

내부 분위기는 대충 이렇다.

 

 

 

 

음식이 깔끔하고 맛도 좋다.

 

 

 

▣ 구 산동교

 

호남고속도로 동림 IC와 가까운 곳이다.

넓은 강변에 산동교친수공원으로 야구장, 축구장 등을 만들었지만 상태가 썩 좋지는 않다. 

 

 

 

 

지금은 폐쇄된 교량이라 내비에 제대로 나타나는지 모르겠다.

 

 

 

 

 

교량은 그대로 두었지만 양쪽으로 이어지는 도로는 없다.

 

 

 

 

교각은 이런 형태이다.

 

 

 

 

주변 운동장

 

 

 

 

구 산동교

순간 뭘 보러 왔지 싶은 생각이 든다,

 

 

 

 

한켠에 옛 산동교(국가 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안내표시판이 있다.

 

광주 산동교 전투지

옛 산동교는 1950년 7월 23일 군경합동부대가 북한군의 광주 점령을 막기 위해 첫 전투를 벌였던 광주지역의 유일한 6.25전적지이다.

당시 호남의 방어 부대인 5사단 20연대는 전선으로 이동되었고, 26연대가 새로 편성되었으나 호남지방을 방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50년 7월 22알 장성에서 퇴각한 26연대는 광주지역 사수와 북한군의 전차를 저지하기 위해, 7월23알 새벽 4시경 산동교를 폭파하였다. 군경합동부대는 산동교에서 광주쪽으로 약간 떨어져 잇는 산등성이에 진지를 편성하였다.

오전 11시 30분경 북한군 제6사단 병력 일부가 전차 3대를 앞세우고 산동교에 이르렀을 때 1시간 동안 전투를 벌였으나 북한군을 대적하기엔 중과부적이었고, 결국 군경합동부대는 23일 여수방향으로 퇴각하였다.

전투과정에서 김홍희 총경이 전사했고, 장명규 경감은 다리를 잃는 중상을 입었다.

옛 산동교는 폭 6M, 길이 228M의 다리로 교각이 아치형 기동모양이며, 일제 강점기인 1934년 목포와 신의주을 잇는 국도 1호선 일부로 건설되어 현재 일부 보존되어 있으며 2011년 현충시설로 지정되었다.

 

<이상 현지 안내문에서>

 

 

 

 

다리 상부엔 역사문화체험 관찰로로 만들었다.

이쪽에서부터 차례대로 삼국시대 유적 및 유물관찰체험로, 동림동 역사 관찰로, 동림동 주민자치회 활동, 영산강을 그리는 아이들이라는 주제로 여러 안내표지판 형태로 만들었다.

광주 동림동 유적은 백제시대 마을터로 곡물저장등과 관련된 구덩이 120여기, 무덤2기. 고상가옥64채 인공수로 및 방어시설과 관련된 도랑150여기, 우물2기를 비롯해 국내 최고의 수리시설로 판단되는 보 등 목조구조물과 함께 통일신라시대 도로 등이 함께 조사되었다.

 

 

 

 

어느쪽이 상부고 하부인지 모르겠다.

상류?

 

 

 

 

하류.

 

 

 

 

다리 건너편에는 '산동교카페'가 있어 여러분들이 쉬고 있다.

 

 

 

 

되돌아 간다.

 

 

 

 

▣ 장성 황룡강 생태공원

 

5.18민주화묘지와 산동교를 목직지로 정하고 왔으나 시간상 여유가 있다.

일찍 되돌아 가기도 뭐하고 해서 광주시와 인접한 장성 황룡강 생태공원오로 왔다.황룡강생태공원은 장성대교와 문화대교 사이의 수변공원이 가장 중심지라 할 수 있겠으나  위. 아랫쪽으로 강변을 따라 넉넉하게 탐방로가 개설되어 있으므로 시간적 여유가 있으면 천천히 둘러보면 된다,

이 교량은 장성대교 아랫쪽의 다리인데 카카오 지도상에서는 이름이 없다.

 

 

 

위 다리아랫쪽에 카페도 있다.

 

 

 

 

 

시간상 여유가 많지않아 이 다리에서 아랫쪽 용작교까지 걸어보기로 한다.

 

 

 

 

주변

 

 

 

 

꽃양귀비가 한창 곱게 피었다.

 

 

 

 

문화대교 아래를 지나 용작교로 간다.

 

 

 

 

황룡강이니만큼 황룡의 형태로 만들었다.

 

 

 

 

 

 

 

 

 

 

용작교로 올라서면서 바라본 문화교쪽을 살짝 당겨본다,

 

 

 

 

용작교에서 바라본 상류 문화교.

 

 

 

 

용작교를 건넌다,

 

 

 

 

황룡이 어의주를 쥐고 굽이치며 나아가는 모습을 모티브로 하여 찬란하게 빛날 장성의 미래와 희망을 더 높이 비상하는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문화교 건너편 장성실내체육관쪽으로 간다.

 

 

 

 

되돌아 본 용작교.

 

 

 

 

문화교쪽으로 가는 길.

버스를 장성 실내체수영장 앞쪽으로 호출하여 필암서원으로 간다.

과거 10억송이 꽃축제때 이곳 장성을 찾은 적이 있었다. 당시 가장 큰 애러기 주차문제였는데 강변 몇 군데 주차시설을 확충하였고, 이곳 실내수영장 주차장 이용도 가능하겠다.

 

 

 

▣ 필암서원

 

장성읍내에서 멀지않은 곳(약 3km)에 필암서원이 있다.입구에 추자장이 넓지는 않으나 아담하게 자리하고 있으며, 주차장에서 필암서원으로 이어지는 소나무 숲에는 도로를 보수?하는 중으로 진입을 금지하는 금줄이 쳐저 있어 도로를 따라 필암서원으로 간다.

 

 

 

 

필암서원으로 왔다.

필암서원은 조선의 대학자인 하서 김인후(1510~1560)선생의 학덕과 정신을 추모하기 위해 1590년 장성읍 기산리에 창건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때 불타 없어졌으며, 1624년에 황룡면 증산동에 다시 건립했으냐 지형이 낮고 물난리가 나자 1672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1662년 현종 임금때 필암이라는 사약을 받았으며 평탄한 지형에서 전학후묘의 전형적인 서원 배치를 보여주는 대표적 서원이며,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도 헐리지 않은 호남을 대표하는 서원으로 2019년 7월 10일 필암서원을 포함한 9개 서원이 <한국의 서원>이란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되었다.

 

 

 

 

2019년 7월 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한국의 서원'이란 이름으로 세계유산목록에 등재되어 새로운 조형물이 생겼다.

함께 등재된 서원은 소수서원(영주), 남계서원(함양), 옥산서원(경주 안강), 도산서원(안동), 도동서원(대구 달성), 병산서원(안동), 무성서원(정읍), 돈암서원(논산)등 9개소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금빛노을 주목을 기념식수했다.(2019. 10. 23)

 

 

 

 

홍살문 옆에 하마석과 안내문이 있다.

 

 

 

 

확연루 (廓然樓/ 클 확)서원의 정문인 문루 겸 누각이다.

김인후 선생의 마음이 맑고 깨끗하여 확 트여있고 크게 공정하다는 "확연대공(廓然大公)"에서  따왔으며, 글씨는 송시열 선생이 썼다.

 

 

 

 

확연루를 들어서면 맞은편에 청절당 뒷편이다.

좌측 보이는 작은 문으로 들어선다.

 

 

 

마당으로 들어선다.

경장각, 계생비, 동재등을 가늠해 볼 수 있다.

 

 

 

 

 

 

 

 

 

경장각은 조선 12대 임금 인종이 내린 묵죽도(墨竹圖)와 그 판각(板刻)을 보관하는 건물이다.

정조 10년(1786)에 건립된 것으로 짐작된다. 현판 글씨는 정조가 손수 썼다고 알려져 있다. 임금이 쓴 글씨는 존엄하고 신성하게 여겼기 때문에 현판을 얇은 천으로 가렸다. 건물은 정면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형식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동재 진덕재(進德齋)

동재와 서재는 원생들이 공무하며 생활하던 공간이다.

진덕재와 서재 숭의재의 현판은 송준길 선생이 썼다.

 

서재인 숭의재(崇義齋)

당시 이곳에서 숙식하며 공부한 유생은 12~3명 정도였다 한다.

 

 

 

 

청절당

서원 유생들이 회의하고 공부하는 공간으로 가운데는 대청이고 좌.우에는 작은 방이 잇으며, 옛 진원현의 객사 건물을 옮겨 지었다고 한다.

 

 

 

 

열심히 해설해 주시는 예쁘고 마음씨 착해보이는 해설사님.

 

 

 

 

현판은 송시열 선생이 쓴 김인후 선생 신도비문 중 "청풍대절(靑風大節)"에서 인용했으며,

글씨는 송준길 선생이 썼다.

 

 

 

 

계생비.묘정비(繫牲碑 맬계, 희생생, 廟庭碑)

계생비는 필암서원에서 제사를 지낼 때 제물로 사용할 가축을 매어 놓는 비석이며, 제관들은 매어 놓은 가축을 검사한 후 제물로 사용할지 여부를 결정하였다. 비석 앞 면에는 "필암서원계생비"라 새겨져 있는데 송일중 선생이 썼다.

묘정비는 서원의 건립 취지와 연혁, 서원에 모셔진 인물에 대하여 기록하는 비석이며 서원비(書院碑)리고도 불린다. 비석 뒷면 묘정비문은 송병선 선생이 글을 짓고 윤용구 선생이 글씨를 썼다.

 <이상 현지 안내문에서>

 

 

 

 

사당인 우동사 출입문은 잠겨있다.

이곳에선 담의 높이가 있어 사당을 잘 볼 수 없다.

 

 

 

장판각

김인후 선생의 문집 목판을 비롯하여 초서천(친?)자문,  백련초해, 해자무이구곡 등의 목판이 보관되어 있다.

이 장판각은 아래로 수맥이 흐르고 있지않아 습기로부터 방해를 받지않은 명당터라고 한다.

 

 

 

 

헌(한?)장사

장판각 옆의 이 건물은 노비중 가장 우두머리가 거처했다고 한다.부엌도 있다.

 

 

 

 

서재 옆이자 경장각 뒷쪽에 조그만 전사청이 있다.

전사정(典祀廳)은 제사에 필요한 물건을 보관하고, 제사 지낼때 음식을 마련하던 건물이다.

 

 

 

 

진사청 담 넘으로 우동사를 본다.

우동사(祐東祠, 도울 우)는 필암서원의 사당으로 북쪽에 하서 김인후 선생과 동쪽에 고암 양자징(1523~1594)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현판은 주희선생의 글씨를 본땄다고 한다.

북쪽과 동쪽이라? 위패를 방향이 궁금하다.

양자징은 소쇄원을 지은 양산보의 아들로 하서 선생의 수제자로 알려져 있다.

 

 

 

서원을 둘러보고 확연루를 나선다.

출입문과 누마루의 높이가 묘하여 머리가 닿을듯 하여 고개를 숙이게 되나 바로 서도(보통의 키) 닿지 않는다. 

 

 

 

 

서원 외곽에 두개의 큰 건물이 있다.

뒷편에 있는 것이 집성관이다.

 

 

 

 

집성관의 용도가 애매하다.

 

 

 

 

청백리에 대한 자료가 상대적으로 많다.

 

 

 

 

앞쪽의 건물이 유물전시관이다

원진각(元眞閣) 현판을 달고있다.

 

 

 

 

시계방향으로 한바퀴 둘러보면 된다.

 

 

 

 

필암서원의 연혁,

이름난 서원

서원의 기능.............

 

 

 

 

필암서원의 조직, 건축구조, 장서, 서원의 교육내용, 교육방법, 교육평가. 하서 선생의 제자등, 방문한 사람들 등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문절공 하서 김인후 선생은 공자를 모신 사당(문묘)에 신주를 모신 우리나라 18현 가운데 한분으로, 중종 5년(1510)  징상햔 대맥동에서 태어났고, 명종 15년(1560) 51세에 돌아가셨다.

오남 유림의 종장으로 추앙받으며 22세때 사마시에 합격하고 31세때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34세때 세자시강원설서가 되었으며, 정도20년(1796)에 문묘에 배향되었다.

기묘사화때 죽임을 당한 선비들의 원한을 선원하였고, 곧이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이류로 고향 장성에 돌아갔다.

 

 

 

 

관직생활. 하선의 문학과 예술,호남가단에서의 하서위 위치, 고암 양자징, 하서의 가르침 등등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어 찬찬히 둘러봄직 하다.

 

 

 

 

귀가길 함양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깨끗하고 친절한 주인과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아주라고는 할 수 없지만 보통이상의 점수는 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