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지역의 산

담양 소쇄원. 순창 강천산계곡

정헌의 티스토리 2023. 11. 5. 22:54

■ 담양 소쇄원, 순창 강천산계곡

 

소쇄원(瀟灑園,맑고깊을 또는 강이름 소, 뿌릴 쇄) 은 자연과 인공을 조화시킨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원림(園林)으로 우리나라 선비의 고고한 품성과 절의가 풍기는 아름다움이 있다. 양산보(梁山甫, 클 보 /1503~1557)가 조성한 것으로 스승인 조광조가 유배를 당하여 죽게되자 출세를 버리고 이곳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았다. 소쇄원이라 한 것은 양산보의 호인 소쇄옹에서 비롯되었으며, 맑고 께끗하다는 뜻이 담겨있다. 오곡문 담장 밑으로 흐르는 맑은 계곡 물은 폭포가 되어 연못에 떨어지고, 계곡 가까이에는 제월당(霽月堂;비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이라는 뜻의 주인집)과 광풍각(光風閣 / 비온 뒤에 해가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이란 뜻의 사랑방)이 들어서 있다. 소쇄원에는 영조 31년(1755)당시 모습을 새긴 <소쇄원도>가 남아 있어 원형을 추정할 수 있다. 이곳은 많은 학자들이 모여들어 학문을 토론하고, 창작활동을 벌인 선비정신의 산실이기도 한다. 지금의 소쇄원은 양산보의 5대손 양택지에 의해 보수된 모습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순창 강천산은 단풍으로 유명한 산이다. 입구에서 구장군폭포까지 편도 약3~4km구간이 편안한 길이어서 사철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입구 도로변 주차장에서 구장군폭포까지 가는데 약1시간, 되돌아 오는데 1시간, 합해서 2시간쯤 계산잡으면 된다.

 

 

 

 

▷가는 길

 

 

 

 

 

▷탐방코스

 담양 소쇄원 - 담양 임금님 밥상 중식 - 순창 강천사 계곡 (2023. 11. 2)

 

 

 

▷탐방후에

 

▣담양 소쇄원

 

 

소쇄원 주차장에서 출발한다,

주차료는 없다,

 

 

 

 

 

 

소쇄원 방향으로 들어서면 이내 매표소가 있다,

 

개방시간 9:00 ~ 동절기 오후 5시, 춘주 6시, 하절기 7시에 마감하며, 어른 2,000원(청소년 1,000원), 담양군민, 국가유공자, 65세이상자 등은 무료입장 할 수 있다.

우리 일행은 기로연 행사를 겸하여 65세 이상이 대부분이고 인솔자 2명만 비경로라 1인당 2,000원씩 4,000원을 지불하였다.

 

 

 

 

 

 

 

주차장에서 소쇄원까지는 가까운 거리다.

5분여면 도착할 수 있다.

들머리 진입로 양쪽에 대숲이 무성하다.

 

 

 

 

 

 

양산보 (1503~1557)는 15세에 한양으로 올라가 조광조 문하에서 공부를 하게 된다,

17에 과거에 급제하나 신진사림의 숫자가 많다하여 결국 탈락한다. 그해 기묘사화가 일어나고 스승 조광조는 화순 능주로 귀양와 사약을 받게 됨을 본다.

이에 양산보는 벼슬에 뜻을 접고 이곳으로 내려와 수년이 지난 1520년대 중반 소쇄정이란 조그마한 초가정자를 짓게 된다. 양산보 나이 20대 초반이다.

그는 광산김씨와 결혼하여 3남 1녀를 두었는데 부인은 양산보의 나이 25세에 세상을 떠나고 만다,

 

 

 

 

 

 

도로를 따라오른다.

 

 

 

 

 

 

도로변 이곳엔 장방형의 연지가 있고 계곡 건너편에 광풍루가 있다.

연못엔 가을철, 겨울을 대비하여서 물은 가두어두지 않았다.

 

 

 

 

 

 

연못로 이어지는 물길은 이곳을 통해 내려온다,

 

 

 

 

 

 

입구

배롱나무 몇 그루가 보인다.

 

 

 

 

 

 

대봉대

 

봉황(귀한 손님)을 기다리는 대다, 그래서 앞쪽에 봉황이 깃든다는 벽오동나무가 있다.

벽오동 나무의 크기가 소쇄원 조성시기에 비해 크지않아 큰 그늘을 지우지는 못한다,

사진에는 없지만 앞쪽 벽오동나무는 <소쇄원도>에 의거해 15대손 양재영님이 후에 심은 것이라한다.현재의 대봉대에 세원진 정자는 1985년에 재건된 것으로 그전에 초정(草亭)이 있었다한다.

하서 김인후, 송강 정철, 석천 임억령, 면앙정 송순, 고봉 기대승, 서하당 김성원, 옥봉 백광훈, 제봉 고경명 등 소쇄원을 출입한 당대의 저명한 정치가나 성리학자, 문필가들이 드나들었다.

 

 

 

 

 

 

우측으로 긴 담장을 쌓았다.

 

 

 

 

 

 

길이 약 33m의 담벼락이 꺽이는 곳에 애양단이란 글자를 석판에 새겼다.

 

 

 

 

 

 

애양단(愛陽壇)의 단(단 또는 제단터 단)자를 쓴다. 

담장이 아니라 단이다. 이 담장 앞에 어떤 단을 쌓은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어떤분은 겨울철 북풍을 막기위하여 세운 단으로 따뜻한 부모의 사랑을 상징하는 공간이라 표현하고, 이 담장을 애양단으로 이야기 하는 분도 있다. 예전에 양산보의 사돈이자 둘째 아들 양자징의 장인인 하서 김인후의 "소쇄원 48영" 시가 걸려있었으나 홍수로 담장이 떠내려가면서 사라졌다고 한다.

 

 

 

 

 

 

오곡문.

 

 

 

 

 

 

五曲門

 

앞의 계곡이 굽이쳐 오곡을 이룬다 하여 붙인 이름이라 하기도 하고, 옛 조선시대 양반들은 주자의 무이구곡을 본따 자기가 사는 주변의 계곡 중 그래도 경관이 나은 9곳을 지정하여 의미를 붙였다. 일반인들이 보면 별곳도 아닌데 확대하여 높고 큰 의미를 붙이다 보니 글로서는 훌륭한 곳이 되었다. 오곡은 무이구곡의 오곡을 말한다 한다고도 한다. 무이정사가 있었던 곳은 무이구곡중 오곡에 있다. 구곡 중 가장 중심이되는 곳이나 이 오곡문은 소쇄원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외나무 다리 (약작/ 略彴, 별똥박 또는 외나무다리작) 를 건넌다,

다리 건너편 언덕은 돌담으로 단을(梅臺) 만들었음이 보이고 윗쪽으로  소쇄처사양공지려 표지석이 조그마하게 보이는 담이 있다.

 

 

 

 

 

 

외나무다리에서 바라본 오곡문

물길이 흐르는 저곳을 오곡문이라 할 수는 없고, 사람이 다닐 수 있는 좌측의 빈 담장을 오곡문이라 하는것 같은데 현 대문은 없다.

 

물길 가운데 담장을 떠받치고 있는 굄돌은 지금껏 한번도 무너진 적이 없다하며 소쇄원 14영에서 원규투류(垣竅透流/담 원, 구멍 규, 통할 투, 흐를 류 ) 담장 밑 구멍을 뚫고 흐르는 물이라 노래한 공간이다,

오곡문 바깥엔 오석(자라 오)이라는 커다란 바위가 있고, 인근에 오석정이라는 우물이 있다. 더 윗쪽 계곡으로는 수수하나 특별한 경관은 없다,

 

 

 

 

 

 

소쇄( 瀟灑 )처사양공지려(廬)

'려'자는 오두막집을 말한다.

이곳 앞쪽 아랫쪽 단에  옛적엔 매화나무를 심었다하나 지금은 없다.

 

 

 

 

 

 

제월당

 

제월당은 주인이 거처혀며 책을 읽거나 하는 사적인 곳이고, 광풍각은 사랑방 역할을 했던 곳이라 한다,

별서정원의 별서라는 말은 잘 쓰지 않지만 자기 본채에서 멀지 않은 곳의 별장 또는 농막쯤으로 생각하면 쉽겠다. 이곳에서 직접 음식을 조리해 먹지않고 집에서 날라다 먹었으니 집과의 거리가 너무 멀면 곤란하다, 또한 원림과 정원의 차이에 있어서 정원은 인공적인 꾸밈이 많다면 원림은 자연그대로의 상태가 많다고 보면 이해하기 쉽다.

 

 

현지의 관광해설사님은 제월당과 광풍각 편액의 유래에 대해 설명한다,

송서(宋書) 주돈이(자 무숙,시호는 원공, 주염계1017~1073)전편(傳篇)에, 북송의 시인이자 명필가 황정견이 주돈이를 존경하여 '정견칭 기인품심고 흉회쇄락 여광풍제월( 庭堅稱 基人品甚高 胸懷落 如光風霽月), 정견이 말하기를 그의 인품이 매우 높고, 가슴에 품은 뜻이 맑고 깨끗하여 마치 비 갠 후에 해가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과 같고, 비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과 같다'라고 한데서 따온 말이다,

또한 이 문장내의  황정견이 주돈이의 사람됨을 보고 ' 흉회쇄락 / 가슴에 품은 뜻이 맑다'고 한 말에서 따온 말로 맑고 깨끗하며 고상하고 세속을 벗어난 경지를 표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제월당 편액은 송시열이 썼다고 한다.

 

 

 

 

 

 

 

訪梁兄彦鎭林亭  / 찾을 방. 선비 언, 진압할 진

48詠(읊을 영) 河西 金厚之  

 

1영 소정빙난(小亭憑欄/의지할 빙,난간 난(란)) 작은 정자의 난간에 기대어

2영 침계문방(枕溪文房) 머리맡에서 시냇물 소리를 듣는 글방

3영 위암전류(危巖 전流)

 

12영 매대요월(梅帶邀月/ 부를요)매대에서 달을 맞이한다

13영 광석와월(廣石臥月) 계곡 북쪽 광석에서는 밤에 누워 달 구경하기도 하고

14영 원규투루(垣竅透流) 담장 밑 구멍을 뚫고 흐르는 물

15영 행음곡류(杏陰曲流) 살구나무 그늘 아래 굽이치는 물

16영 가산초수(假山草樹) 가산의 풀과 나무

 

16영 소당어영(小塘魚泳/못 당,헤엄칠 영) 작은 못에 물고기 노나니 

17영 고목 通流(刳木톻류/가를 고) 나무 홈대를 통해 흐르는 물

19영 투죽위교(透竹危橋/사무칠 또는 투과할 투) 대숲 사이로 위태로이 걸친 다리

20영 옥추횡금(玉楸橫琴   /다할 추, 가로횡) 맑은 물가의 남쪽 바위에서는 거문고를 타기도

21영 복류전배(伏流傳盃/ 복자 앞에 삼수변 있음: 보 보 또는 스며흐를 복) 스며흐르는 물길 따라 술잔을 돌리기도 

22영 상암대기(床巖對琪/아름다운옥 기?) 평상바위에서 바둑을 두기도

25영 조담방욕(槽潭放浴) 조담에서 미역을 감고

29영 협로수황(夾路脩篁/포, 닦을수, 대숲 황) 오솔길의 좁은 대숲

 

36영 사첨사계(斜簷四季/비낄 사,  처마 첨) 복숭아 언덕에서 맞는 봄새벽

39영 유정영객(柳㓅迎客/물가 정) 버드나무 개울가에서 손님을 맞으니

41영 산지순아(散池蓴芽/순채 순) 못에 흩어진 순채(수련과에 속하는 다년생 물풀)싹

47영 양단동오(陽壇冬午) 볕 이 든 단(단)의 겨울 낮

48영 장원제영(長垣題詠/ 담 원) 긴 담에 걸려있는 노래

 

 

 

 

 

 

소쇄원의 규모가 크지 않으므로 김인후 선생의 48영을 한글로 해석한 안내문이 있다면 이를 토대로 소쇄원 이곳저곳을 좀더 깊이있게 감상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조금 아쉽다,

 

 

 

 

 

 

 

 

 

 

 

 

 

 

 

 

 

 

 

 

 

 

 

 

 

석천 김억령 

우측 金厚之河西和題

 

 

 

 

 

 

신? 宋純 송순

 

 

 

 

 

 

 

 

장택 고경명

 

 

 

 

 

 

소쇄원 뒷편의 굴뚝이 야트막하여 연기가 쑥~ 빠지지 않게 설계하여 온돌을 너무 뜨겁게 하지않은 검소함을 이야기 한 것 같은데 잘 모르겠다,

 

소쇄원 일대엔  면앙정(송순 / 1533), 관수정(조여충 / 1544), 환벽당(김윤제 / 1555), 식영정(김성원 / 1560), 송강정(정철 / 1585) 정자들중 가장 년대가 앞선다.

제월당 서쪽편에 공터가 있다,이곳에 고암정사(둘째아들 고암 양자징이 세운 서재)와 부훤당(세째아들 양자정이 1570년에 세운 서재)이 있었다하나 지금은 공터로 남아있다.

 

 

 

 

 

 

조그만 문(일각문)을 지나 광풍각으로 내려간다.

제월당과 광풍각 사이에 이런 공간이 있다.

 

 

 

 

 

 

광풍각

 

1597년 선조30년 임진왜란때 불타 없어진 것을 1614년 양산보의 손자 양천운이 중수하였다.

소재(小齋), 계당(溪堂), 침계헌, 침계방, 수함(水檻/ 우리 함), 소함(小檻)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광풍각앞에서 바라본 십장(十丈)폭포, 아래의 조그만 소( 조담 / 槽潭 구유 조), 계곡 좌우에는 달구경하던 너럭바위 광석(廣石), 바둑을 두던 평상바위 상암(床巖), 걸상바위 탑암(榻巖,걸상 탑), 윗쪽 반석이 있어 경관이 수려하나 면적이 좁아 썩  훌륭타기엔 그렇지만 많은 의미를 붙인 곳이다, 소쇄원 조성당시 저곳 어디쯤 계곡 암반에 석가산이 있었고, 뒤쪽에는 복숭아나무가 심어진 복사동산이 있었다고 한다.

 

 

 

 

 

 

광풍각 앞쪽.

 

 

 

 

 

 

광풍각 아래쪽 다리.

 

 

 

 

 

 

위 다리에서 바라본 광풍각 방향

 

 

 

 

 

 

대나무.

 

 

 

 

 

 

건너편에서 바라본 광풍각

 

 

 

 

 

 

양산보는 말년에 10년간 병으로 누워있다가1557년(명종12)에 55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그가 죽은 후 300년 뒤에 그를 배향하는 사우인 도장사가 1825년(순조25)에 명옥헌 뒤에 건립되었는데 고종5년 서원 훼철령으로 사라졌고 지금은 유허비만 명옥헌 뒤에 서 있다.

 

 

 

▣담양 행복한 임금님

 

 

담양읍내 위치한 대형 식당이다.

 

 

 

 

 

 

 

 

 

 

 

 

 

 

음식이 정갈하나 담양에는 이와 비슷한 집들이 많다.

집의 규모가 있어 단체일 경우  고려해 봄직 하다.

 

 

 

▣순창 강천산 계곡

 

 

단풍철이라 도로변에 넓게 조성한 주차장에 주차한다,

밀려오는 관광버스를 수용할려니 당초 있었던 저수지 상부를 메워 주차장으로 만들고 아랫쪽에 둑을 쌓아 저수지를 확장했다.

 

 

 

 

 

 

도로를 떠라 상가쪽으로 간다,

이 구간은 보이는 미니열차가 운행된다.(요금은 1,000원?)

 

 

 

 

 

 

상가를 지나,

(상가 입구의 다리 전후로 주차장이 있다)

 

 

 

 

 

표사는 곳

어른 1인 5,000원을 지불하면 내고장 상품권 2,000원을 되돌려 준다.

 

 

 

 

 

 

 

강천계곡도 65세 이상은 무료이나 많은 인파로 인해 주민등록증을 일일이 검사하고 없으면 매표를 요구한다.

여타 지역엔 검표원이 대충 얼굴만 보면 노인네를 구별하여 그냥 들어가게 하지만 이곳은 엄격하므로 입장료를 면제받고자 한다면 신분증을 지참하는 것이 좋다,

 

 

 

 

 

 

단풍이 많이 들었다.

 

 

 

 

 

 

첫번째 다리를 건너면서 올려다 본 계곡 상부,

 

 

 

 

 

 

 

 

 

 

 

 

 


매표소에서 3분쯤 오르면 폭포가 있다.

 

 

 

 

 

 

 

물론 인공폭포이다.

 

 

 

 

 

 

 

 

 

 

 

 

 

 

 

 

 

 

 

 

 

 

 

 

 

 

 

 

 

 

 

 

 

 

 

 

 

 

 

 

매표소에서 17~18분,

굵은 메타세쿼이아가 줄지어 있다.

 

 

 

 

 

 

용소

강전산에는 두 개의 용소가 있다. 윗용소(숫용)는 신선이 내려와 목욕을 했던 곳이라 하여 선담(仙潭)이라 부르고, 아랫용소(암용)는 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했던 곳이라 하여 옥녀담(玉女潭)이라 부른다,

 

 

 

 

 

 

 

일주문

 

 

 

 

 

 

 

 

 

 

 

 

 

 

강천사 직전

 

 

 

 

 

 

 

 

 

 

 

 

 

 

강천사

매표소에서 26분쯤 소요되었다.

 

 

 

 

 

 

강천사 앞쪽

 

 

 

 

 

 

 

위 둥근 연못 옆에 샘이 있다.

 

 

 

 

 

 

강천사는 규모가 아담하여 지나는 길에 잠시 둘러보면 된다.

 

 

 

 

 

 

강천사 앞쪽 계곡 건너편에 삼인대가 있다.

현재 기와 지붕을 보수중에 있다,

 

 

 

 

 

 

삼인대는 중종10년(1515)에 중종반정으로 폐위된 단경왕후 신씨의 복위를 주청하는 상소를 올린 순창군수 김정, 담양부사 박상, 무안현감 류옥의 행적을 기념하기 위한 곳이다.

삼인이란 명칭은 세 개의 직인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단경왕후 신씨는 폐위된 연산군의 처남으로 중종반정 때 피살된 좌의정 신수근의 딸이다. 반정공신 박원종 등은 자신의 손으로 죽인 신수근의 딸을 왕비로 세우면 후환이 있을 것이라 염려하여 중종에게 신씨를 폐출하게 하였다.(반정 1주일만에 폐위됨). 그 후 새로 왕비가 된 장경왕후 윤씨가 세상을 떠나자 이 세 사람은 각자의 직인을 소나무 가지에 걸고, 관직에서 물러남은 물론 죽음을 각오하며 폐비 신씨의 복위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이들의 뜻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유배에 처해지는 형벌을 받았다.

영조20년(1744)에 호남과 순창 지역의 유림이 이들을 추모하기 위해 비와 함께 비각을 세우고 삼인대라고 불렀다. 삼인대 비문은 이재가 지었고, 전액(蒃額전자 전 / 篆字體로 비석의 윗부분이나, 머릿돌에 비의 명칭을 새긴 부분)은 유척기가, 글씨는 민우수가 썼다,

<현지 안내문에서>

위 사건은 윤교적 윤리문제, 신하가 강제로 왕비를 폐위함은 불가하다는 문제 등 사림파와 훈구파의 대립으로 이어졌으며 결국 조정은 훈구파의 손을 들어줘 위 3사람은 유배를 가게 된다. 당시 사간원 관리였던 조광조는 자기의 직을 걸고  상소를 올려 대간 전원 사직을 요청하였다. 언론을 확대해야 할 사간원이 언론을 막았다는 이유이다. 대간 파직은 몇달의 논란끝에 결국 대간 전원이 교체된다. 이 사건으로 사간원의 말단직원이었던 조광조는 신망과 주목. 조정의 중심인물로 부상하게 된다.

 

 

 

 

 

 

보호수 모과나무

 

 

 

 

 

 

 

 

 

 

 

 

 

 

삼인정

 

삼인(三印)이란 무었인가?

1506년 이조참판을 지낸 성희안과 중추부지사 박원종 등이 폭정으로 국가의 기틀을 흔들어 놓은 연산군을 몰아내는 중종반정이 성공하지 연산군의 처남이며 중종의 장인인 신수근을 제거하고 중종의 비인 신씨부인을 폐위하여 숙의윤씨를 비로 책봉했는데 10년 후에 돌아가시자 당시 순창군수 충암 김정(1486~1521)선생, 담양부사 눌재 박상(1474~1530)선생, 무안현감 석헌 유옥(1487~1519)선생이 죽음을 무릅쓰고 신씨 부인을 다시 복위시키고 반정공신들의 죄를 논하여 처벌해야 한다는 상소문을 쓰실 때 이곳 소나무에 세분의 직인을 걸오놓은 것을 말한다,

신씨 부인은 폐위된지 233년이 지나 1739년  영조가 단경황후라 추상(追上)하고 능을 온릉이라고 하였다.

삼인정의 글씨는 하서 김인후(金麟厚 1510~1560)선생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호남에서 유일하게 문묘배향 된 하서 선생은 장성 출신으로 젊은 시절 눌재 박상선생을 찾아가 수학하였으며, 또한 이곳 강천사에서도 공부하셨다. 그리고 처갓집과 어머니 고향은 바로 이곳 순창이시다.

<현지 안내문에서>

 

 

 

 

 

 

 

 

 

 

 

 

 

 

 

 

 

 

 

 

 

 

 

 

 

 

 

 

 

 

매표소에서 35분여,

출렁다리? 아래를 지난다,

 

 

 

 

 

 

 

 

 

 

 

 

 

 

 

구장군폭포방향으로 오른다,

 

 

 

 

 

 

수좌굴 70m이정표가 있다.

수좌굴은 비교적 근년에 탐방로를 개설했다. 구장군 폭포까지 갔다가 되돌아 오면서 둘러볼 것이다.

 

 

 

 

 

 

 

 

 

 

 

 

 

 

 

 

 

 

 

 

 

 

 

구장군폭포

매표소에서 보통걸음으로  45분쯤 소요되었다.

 

 

 

 

 

 

인공폭포지만 주변 경관이 좋다,

 

 

 

 

 

 

 

 

 

 

 

 

 

 

 

 

 

 

 

 

 

 

 

구장군 폭포 앞쪽엔 공원으로 꾸몄다.

 

 

 

 

 

 

 

 

 

 

 

 

 

 

 

 

 

 

 

 

 

 

 

 

 

 

 

 

 

 

구장군폭 포 주변에서 7~8분 소요하다 되돌아 간다,

 

 

 

 

 

 

구장군폭포 인근에서 바라본 수좌측

정면 약간우측 희게보이는 바위 좌측 ▲형으로 보이는 곳이 수좌굴이다.

 

 

 

 

 

 

되돌아 가는 길에 수좌굴을 둘러보러 간다,

갈림길 이정표엔 70m로 표시되어 있어 보기보다 가깝다. 수좌굴이 암벽 중턱에 있어 제법 오르막을 보이나 생각만큼 심하지 않다.

 

 

 

 

 

 

 

 

 

 

 

 

 

 

수좌굴 인근으로 오르면 구장군 폭포쪽 경관이 좋다,

 

 

 

 

 

 

 

 

 

 

 

 

 

 

 

수좌굴

 

 

 

 

 

 

 

수좌굴

굴의 깊이는 몇m 정도로 깊지않다,

 

 

 

 

 

 

 

 

 

 

 

 

 

 

 

 

 

 

 

 

 

수좌굴 앞에서 바라본 구장군 폭포,

아래 수좌굴 갈림길에서 이곳으로 오르는데 4~5분, 되돌아 내려 가는데 3~4분 정도 소요된다,

 

 

 

 

 

 

 

출렁다리를 건너볼까 하다가 오르지 않기로 한다.

 

 

 

 

 

 

 

 

 

 

 

 

 

 

 

 

 

 

 

 

 

 

 

 

 

 

 

 

 

 

 

 

 

 

 

 

 

 

 

 

 

강천산은 대충 주차장에서 구장군폭포까지 약1시간, 되돌아 오는데 1시간 합하여 2시간 정도 소요된다고 보면 된다.

기로연 행사의 일환으로 산청지역 경륜있는 분들 54명과 함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