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지역의 산

보은 삼년산성. 대야리고분군, 최감찰댁

정헌의 티스토리 2024. 2. 25. 23:34

■ 보은 삼년산성, 최감찰댁

 

보은읍내 동쪽 근거리 야트막한 산에 삼년산성이 있다. 이 성은 자비마립간 13년(470), 축성을 시작한지 3년만에 완성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그 후 소지마립간 8년(486)에 실죽이 3천명의 인부를 징발해 개축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가 서북지방으로 세력을 확장하는데 가장 중요한 전초기지였다고 생각되고 있으며, 삼국통일 전쟁때 태종 무열왕(654~661.재위)이 당나라 사신 왕문도를 이곳에서 맞이하기도 하였다. 고려 태조 왕건(918~943.재위)은 이 성을 점령하려다 크게 패하였던 곳으로 안내문에서 밝히고 있다.

이 성만을 탐방하기에는 서문으로 진입하는 것이 가장 무난하나 산성과 더불어 대야리 고분군으로 산행을 하고자 하는 경우에는 북문 들머리로 하는 것이 좋다. 입구에 산림욕장과 복원된 고분군이 있어 이곳을 둘러볼 수 있ㄷ기 때문이다.

삼년산성은 2020년 4월 말에 찾은 적이 있어 그때의 기억이 좋아 친구들과 다시 찾았으니 그의 4년 만이다. 

귀가길 잔여 시간에 보은 최감찰댁, 최재한 가옥, 최혁재 및 최동근 가옥을 찾았으나 대문이 닫혀있다. 지역 주민의 도움으로 최재한 고가는 둘러보았으나 최감찰댁 대문은 열쇄로 잠겨있어 담장 너머에서 둘러보는 것으로 그쳤다. 최혁재. 최동근 고가는 최감찰댁에서 100~200m 떨어져 서로 이웃하고 있으며  최혁재 가옥 역시 대문이 잠겨있을 가능성이 많아 찾지 않았다. 부분적으로 초가로 이엉을 얹었기 때문에 멀리서 집의 위치는 가늠할 수 있다.

 

 

▷가는 길

 

 

 

 

 

 

▷탐방코스 (2024. 2. 25.)

⊙보은 농경문화관 주차장 - 삼년산성산림욕장 - 삼년산성 북문 - 서문 -남문 -동문 - 대야리 고분군 -북문 - 주차장  (1코스 3.5km+ 고분왕복 5km = 합계 8.5km, 천천히 점심시간 40분 포함 4시간 20분)

⊙보은 최감찰댁과 최재하 가옥탐방

 

 

 

▷탐방안내도

 

청색실선으로 표시된 1코스 산성길(3.5km),

2코스 녹색실선(농경문화관- 북문-동문 -고분군 왕복)은 약 8km.

오늘 탐방코스는 1코스와 2코스 중 고분군까지 능선길을 따라 갔다올 것이다.

 

 

 

▷탐방후에

 

 ▣삼년산성

 

 

삼년산성 산림욕장 주차장에서 출발한다.

 

 

 

 

 

 

삼년산성 고분군. 신라인과 함께 걷는 역사탐방로.

삼년산성은 자비마립간 13년(470)년 축조된 성으로 그동안 개발과정을 기록하여 두었다,

 

 

 

 

 

 

삼년산성 산림욕장이다.

중심 산책로를 따라 북문으로 올라가고, 나중 내려올때 순환산책 코스를 따라 내려올 것이다.

 

 

 

 

 

 

오늘 보은 지역은 가는 비가 간간히 내려고 흐리다.

요즘 우리나라 날씨가 1주일 넘게 비 또는 흐리다, 어제밤에 산청 산간지역엔 많은 눈이 내려 온 산이 하얗다. 따라서 이곳 삼년산성에서 눈쌓인 절경을 볼 수 있지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지만 눈이 오지 않았다.

 

 

 

 

 

 

산림욕장 안에 대야리 고분군 모형을 만들었다.

 

보은 대아리 고분군은 삼년산성이 있는 오정산을 중심으로 동쪽 지역인 보은읍 대야리, 어암리, 성주리, 길상리,  풍취리, 강신리와 탄부면 평각리 등지에  넓게 분포되어 있다. 오정산을 중심으로 비탈진 지역 곳곳에서 볼 수 있으며 600ha에  달할 정도로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2012년 지표조사결과 표면에 확연히 드러나 있는 봉분 309기를 비롯하여 모두 1,644기가 확인되어, 중부지방 최대 규모의 신라 고분군이다. 봉분은 규모에 따라 지름 15~20m의 대형 석실분 돌방무덤(168개소), 지름10m 내외의 중형 돌방무덤(141개소), 소형 석곽분 돌덧널무덤(1,335개소) 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고분은 몇 개의 무리를 이루어 분포하며 대야리와 평각리 경계지역에서는 신라 고분군 중 지름 20m에 달하는 대형 봉토분이 많이 조사되었는데 이렇게 많은 수가 조사된 유적은 영남 지방을 제외하고는 보은 삼년산성 고분군이 유일하다.

고분군의 구조와 주변에 수습된 유물로 볼 때, 삼년산성이 축조 시기가 5세기 중후반부터 6세기 사이에 신라인이 축조한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대야리 고분군은 산성과 고분군이 함께 분포하고 있는 데 그 규모가 중부 지역 최대의 신라 고분군으로서 신라 묘제와 토기편년 연구 및 신라 지방문화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서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있다.

2013년 172호 고분을 발굴한 결과 출토된 55점은 2단 굽다리 접시, 긴 목 항아리등은 5~6세기쯤 신라시대에 사용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고분군 가운데 보은읍 대야리 산 23번지 외 280기(봉문 80기, 기타 200기)는 2013년 충청북도 기념물 156호로 지정되었다. 여기의 모형고분은 보은읍 대야리 소재 제3호, 제7호 고분을 원형대로 복원하였다.

<현지 복원한 고분군과 남문 전망대의 안내문을 합한 내용이다>

 

 

 

 

 

산림욕장 순환산책로변엔 메타세쿼이아가 식재되어 있다.

 

 

 

 

 

 

저만큼 산성의 윤곽이 가늠된다.

 

 

 

 

 

 

삼년산성은 우리나라 가장 대표적인 석축산성으로 평가되며, 성의 둘레는 약 1.7km이고 성벽의 높이는 13m, 폭은 8~10m에 이른다. 이 성에는 서문. 북문. 동문터가 있고, 특히 성벽의 군데군데에 곡성이 있어 우리나라 고대 축성법 연구에 매우 중요시 되고 있다. 성내에에는 아미지란 커다란 연못이 있었고, 이 주위의 암벽에는 옥필, 유사암, 아미지 등의 글씨가 음각되어 있는데 김생의 필체로 전해오고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들머리 샘이 있으나 음용은 부적합해 보인다.

 

 

 

 

 

 

북문으로 올라선다.

 

 

 

 

 

 

성벽이 많이 허물어졌으며, 규모가 상당하다.

 

 

 

 

 

 

북문지

 

북문지는 성문 밖으로 차단벽이 설치되어 있어 북문으로 접근하는 적들을 쉽게 방어할 수 있는 독특한 구조의 성문 양식으로 보았으나, 발굴 조사 결과 차단벽으로 추정되던 시설은 후대에 축조된 치성으로 밝혀졌으며 현재의 성문은 조선 시대에 조성된 것이다.

북문지 입구에는 처음 쌓은 성벽이 붕괴된 후 성벽의 채움석을 정리한 후 문구부(門口部)를 설치하였고 바닥면은 바깥쪽으로 경사지도록 하였다. 규모는 폭은 3.5~3.6m, 길이는 7~7.5m에 이르며 문구부 안쪽으로 성 안으로 통할 수 있는 6m 너비의 계단이 1m간격으로 설치되어 있다.

후대에 조성된 치성은 처음 쌓은 성벽의 바깥 면에 빗대어 축조한 것으로 길이 6.6~7m, 너비 12~13m의 규모이며 양쪽 측벽과 모서리 부분이 심하게 붕괴되어 있다. 또한 치성 상부에서는 4개의 초석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곳에는 정면 5~6칸, 측면 2칸 규모의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지 안내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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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분테마공원(산림욕장)쪽에 올라왔다.

 

 

 

 

 

 

동문지 방향의 성벽을 배경으로 했다.

 

 

 

 

 

 

아랫쪽에 보은사가 가까이 있다.

 

 

 

 

 

 

서문지 쪽으로 간다.

시계 반대 방향으로 성을 한바퀴 돌아볼 것이다.

 

 

 

 

 

 

서문지로 가는 길은 야트막하지만 제법의 경사를 보이는 산을 넘어야 한다.

오르면서 되돌아 본 북문지 쪽이다.

사실 성문지가 정확하게 동서남북 방향에 위치한 것이 아니어서 동문이 북문같고 북문이 서문같고, 서문은 남문같은 느낌이 들어 좀 헷갈린다.

 

 

 

 

 

 

 

 

 

 

 

 

앞의 산등성이를 넘어가야 한다.

 

 

 

 

 

 

 

 

 

 

 

 

 

서문지로 내려간다.

 

 

 

 

 

 

서문이 가까워졌다.

 

 

 

 

 

 

서문 주변이다.

 

 

 

 

 

 

서문지

 

삼년산성의 주 출입문으로 추정되는 서문지는 산성 문지 중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다. 성벽이 안쪽으로 휘어 있고 계곡부의 중앙에서 북쪽으로 약간 비낀 지점의 북쪽 경사면에 있어 성 밖에서는 문의 위치가 확실하게 드러나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 또한 서문지를 중심으로 남북으로 2개의 치성이 배치되어 있어 성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쉽게 공격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1980년 보은 지역의 대홍수로 후대 문지 아래층에서 1차 문지로 추정되는 자취가 노출됨에 따라 발굴 조사를 실시한 결과 서문은 2단계에 걸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1차 문지는 기둥 홈과 문설주 홈, 문확 홈이 파인 신방석으로 되어 있으며 전체 길이 225cm, 폭 422cm의 규모로 되어 있다. 특히 문지방석에서 폭 166cm의 마차 바퀴 마멸 흔적이 발견되어 무척 큰 마차가 통행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일반적인 성문의 구조와 다르게 외부로 열리는 특이한 구조로 되어있다. 

2차 문지는 1차 문지가 매몰된 후 안쪽으로 들여 조성하였는데 수해로 남쪽의 신방석이 위치가 바뀌어 문구부의 정확한 규모는 확인되지 않는다.  2차 문지는 1차 문지와는  반대로 성문이 안으로 열리는 구조로 되어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옛 문지의 흔적이 남아있다.

 

 

 

 

 

 

서문 밖에서,

 

 

 

 

 

 

 

 

 

 

 

 

 

 

 

 

 

 

 

 

 

 

암각자(岩刻字)

 

삼성산성 내 연못 맞은 편 암석 지대에 새겨진 글자들을 말한다. 가장 아랫부분에는 아미지(蛾眉池), 윗부분에는 유사암(有似巖)과 옥필(玉筆), 그리고 보은사쪽 암벽에 남술(南述 /지을 술)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글씨 가운데 '아미지'는 규모도 크고 선명하게 남아있는데 당초의 연못이 점차 줄어들어 서쪽 성벽 근처에 마치 반달 모양으로 남아 있던 모습을 보고 새긴 것으로 짐작된다. 높이 2m, 너비 3.5m크기의 수직 암벽에 높이 66cm, 폭19cm로, 신라의 명필가 김생의 글씨라는 전설이 전해진다. '아미지'가 새겨진 암석 위에는 인위적으로 조성한 평지가 있는데 이곳에는 산성 경관을 조망하거나 적을 감시하려고 지은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남문지로 오른다.

 

 

 

 

 

 

남문지로 향하면서 돌아다 본 서문지.

서문은 정문의 역할을 한 곳으로 대부분의 물자나 사람들이 이곳으로 왕래했을 곳이다. 

 

 

 

 

 

 

동문으로 오름길도 길지는 않지만 제법 경사가 있다.

 

 

 

 

 

 

신축된 성벽

고증을 거쳤는지 모르지만 폭이 무척 넓다.

 

 

 

 

 

 

 

 

 

 

 

 

 

저만큼 남문지

 

 

 

 

 

 

남문지

 

남문지는 남쪽 성벽 서쪽 끝에 위치하며 남서쪽 모서리에 설치된 성위에서 적을 감시하거나 공격하기 위해 지은 치성이 방향을 북쪽으로 회전하며 서쪽 성벽과 연결된다.  문 밖으로는 작은 계곡부가 있으며, 이 계곡부를 중심으로 양쪽의 능선부로 이어지는 성벽에는 반원형 치성이 설치되어 있어 남쪽으로 접근하는 적들을 쉽게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문지의 규모는 너비 3.6m, 길이 10.8m이고 높이는 서쪽면을 기준으로 하면 약5m, 동쪽면을 기준으로 하면 9m에 이른다.

문의 형식은 사다리를 이용하여 오르내리는 현문식으로 두세 차례 개축하다가 결국에는 문 입구를 폐쇄하였으며, 남문지 부근의 성벽도 두세 차례 개축했다. 문지 터에서는 온전한 형태의 바닥 확쇠 한 쌍과 문에 사용되었으리라 추측되는 못과 철제 광두정이 출토되었다.

<현지 안내문에서>

 

 

 

 

 

 

 

 

 

 

 

 

 

 

 

 

 

 

 

 

 

중간 내려다 본 남문지와 뒤로는 보은읍.

 

 

 

 

 

 

전망대

이곳 산성에서 가장 높은 곳일 것이다.

 

 

 

 

 

 

저쪽 어디쯤에 대야리 고분군이 있다.

있다 동문지에서 이 능선을 따라 탐방할 것이다.

 

 

 

 

 

 

동문지로 내려간다.

 

 

 

 

 

 

 

 

 

 

 

 

 

동문지

 

 

 

 

 

 

들머리 주차장에서 북문, 서문, 남문으로 돌아 이곳 동문지까지 오는데 천천히 약 1시간 20분쯤 소요되었다.

 

 

 

 

 

 

동문지

 

동문지는 산성에서 가장 긴 동쪽 성벽의 중앙에 있으며, 이곳에는 성벽을 관통하는 수구(水口)가 있다  동문지의 원래 모습은 성벽의 안쪽 약 정반 정도가 다른 곳보다 북쪽으로 돌출되어 있고, 'ㄹ'자형으로 돌아야만 통행이 가능한 형태였다. 지표에 남은 모습을 보아 동문지는 적이 공격해 올 때 방어를 겸비한 특이한 성문 구조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두 차례의 발굴 조사 결과, 동문지는 적어도 서너 차례에 걸처 수축하고 개축했으며, 'ㄹ'형 구조는 후대에 문지 조성 과정에서 축조된 구조물로 밝혀졌다. 

발굴조사 결과 동문지 인접 성벽 위쪽에서는 삼국시대 성 위에서 낮게 쌓은 담인 여장(女墻)이 발견되었고, 안쪽의 평평한 곳에서는 방아확, 돼지 모양의 기와 조각, 목제 망치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현지 안내문에서>

 

 

 

 

 

 

동문성밖에서 바라본 성벽.

이곳 산성벽에서 가장 높은 석벽이다.

 

 

 

 

 

 

대단하다.

 

 

 

 

 

 

 

 

 

 

 

 

 

대야리 고분군으로 가면서 군데군데 보이는 성벽,

많이 무너졌다.

 

 

 

 

 

 

 

 

 

 

 

 

 

 

 

 

 

 

 

 

주 능선으로 올라섯다.

 

 

 

 

 

 

이후 능선은 대체로 완만하다.

 

 

 

 

 

 

삼년산성 1.1 km지점에 소형주차장으로 내려서는 갈림길이 있다.

 

 

 

 

 

 

 

 

 

 

 

 

 

제1전망대

 

 

 

 

 

 

위 전망대에서 바라본 보은읍내.

 

 

 

 

 

 

살짝 오르막을 오르는 곳도 있다.

 

 

 

 

 

 

 

 

 

 

 

 

 

동문지에서 약 40분(느린 걸음이다)소요되어 정자에 도착한다.

정자까지 오면 고분군까지 그의 온 셈이다.

이곳에서 약 40분여 점심시간을 갖는다.

 

 

 

 

 

 

위 정자에서 고분군까지는 0.2km,

 

 

 

 

 

 

사실 너무 오랜 세월도 흘렀고,

전문가들의 발굴결과 일천몇백개의 고분군 이야기는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것을 다 모았을때의 이야기이다.

이곳 주변은 일반인들의 시각으로 보면 대형 고분군이 있어도 많지 않을 장소로 보인다. 

작은 무덤같은 곳이 다수 보이며, 도굴의 흔적도 볼 수 있으나 보이는 곳이 고분의 중심지역으로 큰 기대를 하지는 않는게 좋다.

 

 

 

 

 

 

이곳의 이정표

삼년산성. 정자 방향에서 왔고, 되돌아 갈 것이다.

 

 

 

 

 

 

아랫쪽에 몇 기의 고분군을 복원해 놓았다.

 

 

 

 

 

 

고분군을 둘러보고 되돌아 간다.

 

 

 

 

 

 

정자를 지나,

 

 

 

 

 

 

 

 

 

 

 

 

 

제1전망대를 지난다.

 

 

 

 

 

 

 

 

 

 

 

 

 

 

소형주차장 갈림길.

 

 

 

 

 

 

 

 

 

 

 

 

 

 

 

 

 

 

 

 

 

 

동문지로 되돌아 왔다.

동문지에서 고분군까지 2.5km, 편도 약 40분, 고분군 주변 10분 정도 잡으면 왕복 1시간 30분 정도면 충분하다,

 

 

 

 

 

 

북문으로 간다.

 

 

 

 

 

 

 

 

 

 

 

 

 

망루?

 

 

 

 

 

 

 

 

 

 

 

 

 

 

 

 

 

 

 

 

망루에서 내려다 본 북문지쪽,

 

 

 

 

 

 

 

 

 

 

 

 

 

보은사를 둘러보고 간다.

지붕의 기와는 동으로 만들어져 있다.

 

 

 

 

 

 

미륵전

 

 

 

 

 

 

보은 보은사 석조여래입상(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12호)

 

보은사는 1902년에 박경하 (朴鏡荷)스님이 창건하였다. 이 불상은 일제강점기 인근 대야리에서 이곳으로 옮겨 왔다. 크기는 높이 210cm, 어깨 폭 50cm이다. 몸체의 조각 기법과 얼굴의 조각 기법이 서로 달라 전체적으로 볼 때 조화롭지는 않으나 수인의 형상과 앞면부터 뒷편까지 이어진 옷 주름의 유려함 등으로 볼 때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현지 안내문에서>

 

 

 

 

 

 

뒤틀려 자란 소나무.

 

 

 

 

 

 

보은사 앞뜰에서 바라본 성내.

10분여 관리인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보은사를 둘러복 되돌아 북문으로 내려간다.

 

 

 

 

 

 

 

 

 

 

 

 

 

 

순환탐방로를 따라 내려간다.

 

 

 

 

 

 

 

 

 

 

 

 

 

 

 

 

 

 

 

 

농경문화관으로 되돌아 왔다.

 

이곳 주차장에서 동문까지 약 1시간 20분,

동문에서 대야고분군까지 갔다 되돌아 오는데 1시간 30분여, 중간 점심시간 40분, 동문에서 중간 보은사 탐방10분여 포함하여 주차장까지 50분 합하여 4시간 20분여 산행을 마무리 한다,

 

 

 

 

 

 

옆에 대장간도 있는데 농경문화관 까페?가는 길

 

 

 

 

▣ 보은 최감찰댁

 

 

보은군 삼송면 선곡리  

이 인근으로 접어들면 우측으로 초가가 보여 이곳이 최씨집안이 살았덧 곳임을 알 수 있다.

현 문화재로 지정된 곳은 4채로 최감찰댁(최태하 가옥), 최재한 가옥, 최동근가옥, 최혁재 가옥으로 보수를 거쳐 말끔히 단장을 하고 있다.

내비에는 <보은 최감찰댁>으로 입력하면 된다.

 

 

 

 

 

 

최감찰댁은 과거 최태하 가옥이라고도 했는데 2017년에 지금의 명칭으로 고쳤 부른다.

조선조 말 고종조에 '통훈대부 行 사헌부 감찰'을 지냈기 때문에 감찰댁으로 부른다고 하며, 통훈대부 행 사헌부 감찰은 문관 정3품 하계이며 당하관중 가장 높은 품계이나 통훈대부 관직수가 한정되어 정 6품 관직인 사헌부 감찰을 맡은 것이라 한다.그러고 보면 높은 직책은 아닌것 같다.

먼저 눈에 뛰는 것이 큰 나무와 긴 담장이다. 담장 중간쯤 아내표지판이 있는 곳(솟을대문 앞쪽)이 정문이다. 입구가 어디야?  하며 주변을 두리번 거린 곳이기도 하다.

 

 

 

 

 

 

보은 최감찰댁 /국가민속문화재 제139호

 

보은 최감찰댁은 2018년 사랑채 보수공사 중에 "숭정기원후 임술 삼월 초팔일 유시 상량 해좌 사향 계해생 성조운( 崇禎紀元後 壬戌 三月 初八一 酉時 上樑 亥坐巳向 癸亥生 成造運)이라는 글이 상량목에서 발견되어 숙종 8년(1682)에 지어졌음이 확인되었다. 안채는 "숭정기원후 오임진(崇禎紀元後 五壬辰"이라는 상량문 기록에 따라 고종 29년(1892)에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 집은 현재 안채와 사랑채, 중문채, 광채를 비록하여 곳간채와 뒤주 등의 부속채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는 기와집이고, 안채와 나머지 건물은 초가집이다. 안채는 초가임에도 큰직한 부재를 사용하여 짜임새 있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앞쪽에는 "ㅡ"자형의 사랑채를, 뒤쪽에는 사랑채와 직각 축으로 'ㅡ' 자형의 안채를 배치하였고, 담으로 경계를 지어 바깥마당에서 안마당까지 'ㄱ'자로 꺾어 들어가게 했다. 이처럼 안채와 사랑채의 방향을 다르게 배치한 것은 방향을 같게 하는 일반적인 배치 방식과는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집은 과거 양반 주택이 고수해 왔던 유교적 규범에서 벗어나 생활의 편의를 도모하면서 부(富)를 과시했던 당시의 시대적 경향을 보여준다,

<현지 안내문에서>

 

 

 

 

 

 

최감찰댁의 긴 담장

 

 

 

 

 

 

4그루 회화나무.

 

 

 

 

 

 

저쪽 초가집은 최재한 가옥의 광채로 뒷면인 셈이다.

과거 어느 시기에 이 두집은 서로 형제간이었지 싶다. 세월이 많이 흘러 허물어진 것을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많이 보수를 하여 한번쯤 찾아볼 만한 곳이 되었다.

이집 후손 중 어느분은 어릴때 이 사랑마당의 회화나무 가지가 사랑채 처마에 닿으면 이 집에서 정승 판서가 나온다는 이야기를 듣곤 했단다.

 

 

 

 

 

 

사랑채와 숫을 대문이 나란히 있고 바깥의 정원에 회화나무가 있는 셈이다.

 

 

 

 

 

 

최감찰댁 사랑채

 

 

 

 

 

 

최     와의 집과는 담으로 경계되어 있지않다.

 

 

 

 

 

 

이 사진은 최재한 가옥에서서 최감찰댁쪽으로 바라본 모습이다.

최감찰댁으로 들어갈 수 없이 최재한 가옥에서  저쪽 담장너머로 본다.

 

 

 

 

 

 

최감찰댁

좌측 안채, 가운데 수각, 우측 헛간이지 싶다.

 

 

 

 

 

 

이곳 역시 최재한 가옥의 뒷 담장 너머로 바라본 최감찰댁 안채의 뒷모습이다.

 

 

 

 

 

 

 안채 뒷편(후원)에 장독대가 있고,

 

 

 

 

 

 

탱자나무 또한 연륜을 보여주고 있다.

 

 

 

 

 

▣ 최재한 가옥

 

 

보은 최재한 고가/충렁북도 문화재 자료제 44호

 

보은 최재한 고가의 정확한 건축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부재의 건실함과 치목(治木/ 재목을 다듬고 손질함)에 사용된 세부 기법 등으로 보아 19세기 후반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집은 안채, 광채, 사랑채, 문간채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2칸 규모의 초가집으로, 부엌 1칸, 온돌방 2칸, 대청 2칸, 건넌방 1칸으로 구성하였다. 안채는 초가임에도 큼직한 부재를 사용하여 짜임새 있는 구조를 갖추고 있다. 사랑채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우진각 지붕(네개의 추녀마루가 동마루에 몰려 붙은 지붕)건물이다. 대청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 방을 설치하였다. 2009년에 고증을 통해 복원하였다.

광채는 정면 8칸, 측면 1칸 규모이며, 4칸의 광. 방. 방앗간과 2칸의 외양간으로 구성하였다. 배면 벽은 전체적으로  바람이 잘 통하도록 판벽으로 처리하였으며, 하인방(下引枋/벽의 아랫쪽을 가로지르는 인방)  아래로 방화벽(불이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불에 타지 아니하는 재료로 만들어 세운 벽)을 설치하였다.

이 집은 이 지역의 전통 주거 건축 특성을 잘 보여 주는 사례로, 화순 최씨 씨족 마을 내의 건축을 살펴볼 수 있고 학술적으로도 가치가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최재한 가옥으로 들어선다.

마주 보이는 건물이 안채이고, 우측 건물이 광채이다.

감찰댁과 이집은 특징은 사랑채는 기와집이고 안채나 광채 등은 초가로 지붕을 이었다.

 

 

 

 

 

 

정면에서 바라본 안채.

 

 

 

 

 

 

우물

 

 

 

 

 

 

안채 뒷면이다.

 

오늘 주 탐방코자 하는 집은 국가문화재로 지정된 감찰댁이었지만 들어가 보지 못하고, 최동근. 최혁재 가옥도 건너다 보이나 대문이 닫혀있으면 헛걸음이다 싶어 가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