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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오설록, 중문 대포 주상절리대, 국립제주박물관

정헌의 티스토리 2024. 7. 3. 23:32

■제주 오설록, 중문 대포 주상절리대, 국립제주박물관

 

2박 3일 일정으로 실시된 유림지도자 학술 세미나 및 향교임원 연수 마지막 날이다.

이 행사가 제주에서 개최된 만큼 오늘은 제주에서 경관좋은 중문 주상절리와  국립제주박물관에서 고 이건희특별전시를 견학하는 것으로 일정을 마무리 한다.

 

 

▷탐방코스 (2023. 7. 2.)

펄리호텔 조식 - 오설록 - 중문 대포 주상절리대 - 중식 - 국립제주박물관 - 제주공항 출발

 

 

▷탐방후에

 

▣오설록

 

조식후 중문단지 주상절리 해안으로 가는 길에 오설록에 잠시 들렀다.

오설록은 아모레퍼시픽 그룹의 계열사로 녹차를 제조 및 판매하는 사업을 하고 있다. 본사에서 제조하는 녹차 브랜드의 이름이기도 하다.

 

오(!)설록은 오설록티뮤지엄, 이니스프리 구역이 서로 인접해 있으며 각각 차,화장품류 등등 판매와 카페, 주변으로 크지않은 차밭이 있다.

앞쪽 넓은 도로(신화역사로)를 건너면 서광다원이 있다. 이곳에선 넓은 녹차밭을 볼 수 있다.

 

 

 

 

 

이니스프리

아모레퍼시픽 화장품 브랜드이름이다.

보이는 뒷편으로 직진하여 들어가면 <이니스프리 제주하우스>에서 이니스프리 화장품 등 다양한 제품을  판매하는 매장과  카페가 있다

 

 

 

 

 

티뮤지엄과 이니스프리 제주 하우스 입구 주변 정원을 잠시 둘러본다.

 

 

 

 

 

포토존

 

 

 

 

 

 

 

 

 

 

 

 

 

 

 

 

 

 

 

오설록 티뮤지엄 가는 샛길

 

 

 

 

 

저기 보이는 건물이 오설록 티 뮤지엄인것 같다.

입장료 등은 없으며, 카카오지도를 보니 티뮤지엄 뒷쪽?에도 오설록티뮤지엄서광차밭이 있다.

 

 

 

 

되돌아 도로 건너편 서광녹차밭 구역으로 왔다.

 

 

 

 

 

넓은 면적이다.

 

 

 

 

 

 

 

 

 

 

 

 

 

 

 

 

 

 

 

저쪽 멀리 보이는 대형건물은 서광다원연구소

 

 

 

 

 

 

 

 

 

 

 

 

 

 

 

 

 

 

 

 

 

 

 

 

 

 

20분여 오설록 서광차밭에서 잠시 쉬었다 간다.

 

 

 

 

▣ 중문 대포 주상절리대

제주 중문관광단지 주상절리대를 보러 왔다.

입장료는 어른(25세 이상) 2,000원, 청소년 이하 1,000원이며,

소아 및 경로, 국가유공자 등은 무료이다.

 

 

 

 

검표소를 지나 들어간다.

 

 

 

 

 

중문대포 주상절리대는 입구와 출구를 달리했다.

많은 인파가 몰리는 곳이어서 입구에서 일방통행으로 주상절리대를 한바퀴 돌아서 나오도록 동선을 조절했다.

들머리 석부작 공원같은 이곳은 자연석인가? 싶다.

 

 

 

 

 

데크로드를 따르면  이내 첫번째 전망대에 도착한다.

 

 

 

 

 

독특한 모양의 주상절리대

 

 

 

 

 

줌으로 살짝 당겨본다.

 

 

 

 

 

 

 

 

 

 

 

 

 

 

 

 

 

 

 

저곳에도 주상절리를 볼 수 있다.

 

 

 

 

 

 

 

 

 

 

 

 

 

 

 

 

 

 

 

 

 

 

 

 

 

 

두번째 전망대로 간다.

 

 

 

 

 

 

 

 

 

 

 

 

 

 

 

 

 

 

 

 

 

 

 

 

 

 

 

 

 

 

 

 

두번째 전망대에서 바라본 첫번째 전망대 쪽으로의 경관이다.

 

 

 

 

 

 

 

 

 

 

 

 

 



 

 

 

 

 

출구쪽으로 

 

 

 

 

 

 

 

 

 

 

 

 

 

 

 

 

 

 

 

저만큼 들머리.

 

 

 

 

 

저곳 출구로 나가면 이내 입구로 이어진다.

이 구간은 제주 올레길 8코스(월평~대평 올레)의 중간쯤에 위치하는 곳으로 여러해 전 이 길을 걸은 적이 있다.

 

 

 

 

 

시간적 여유가 있어 조금더 올레길을 걸어보기로 한다.

 

 

 

 

 

 

 

 

 

 

 

 

 

 

 

 

 

 

 

 

 

 

 

 

 

 

 

 

 

 

 

 

 

 

 

 

 

 

 

 

 

 

 

 

 

 

 

 

 

 

 

 

 

 

 

 

 

 

 

 

 

 

 

 

 

 

 

 

 

 

 

 

 

 

 

 

 

 

 

 

 

 

 

중문해녀의 집, 씨에스호텔앤리조트, 퍼시픽 리솜과 마리나요트 게류장 등등이 있는 곳이다.

 

 

 

 

 

 

 

 

 

 

 

 

 

과거 이곳을 지나간 것 같은데.........

 

이곳은 씨에스호텔(The Seaes Hotel & Resort)의 사유지 입니다.

외부인 출입을 금합니다.

그래서 우측 내륙?쪽으로 우회하여야 한다.

 

 

 

 

 

씨에스호텔을 우회하는 곳 쯤에서 되돌아 간다.

 

 

 

 

 

인근에 제주 부영호텔 앤 리조트이 있다.

 

 

 

 

 

호텔 앞쪽 정원을 살짝 지나

 

 

 

 

 

해안 올레길을 따라 되돌아 간다.

 

 

 

 

 

 

 

 

 

 

 

 

 

 

 

 

 

 

 

 

 

 

 

 

 

 

중문 주상절리대 입구로 되돌아 왔다.

약 50분쯤 소요되었다.

 

 

 

 

▣블랙피그 /인덕면,

 

인덕면소재지 북쪽 근거리에 위치한 블랙피그라는 음식점에서 이른 중식 시간을 갖는다.

제주 시내로의 이동시간을 고려하고, 조금 일찍 제주공항을 출발하는 일행들이 있기 때문이다.

 

 

 

 

 

 

 

 

 

 

▣국립제주박물관

 

제주 국립박물관에 왔다.

 

 

 

 

◐ 고 이건희 회장 특별전 / 기획전시실

 

어느 수집가의 초대 - 故 이건희 회장 기증 국립제주박물관 특별전이 2024. 6. 4.~8. 18.)이 기획전시실에 열리고 있다.

 

 

 

 

 

박물관이 깔끔하다.

 

 

 

 

 

수집가의 환대

 

올레는 당신에게 열려있습니다.

나지막한 담장을 들어서면 소반이 눈에 듭니다.

차 한 모금, 쉰다리 한 사발을 나누는 조촐한 상입니다.

노루가 뛰노는 백록담이 떠오르는 그림 병풍이 펼쳐지고 붉가시나무 궤가 놓여 있는 제주에서

어느 수집가가 당신을 초대합니다.

 

 

 

 

 

제주궤와 산수. 꽃. 새와 짐승

 

 

 

 

 

여러 수집품들

 

 

 

 

 

수집 열망을 담은 책장 그림 책가도(冊架圖 / 시렁 가)   /   작가 모름, 조선 19세기 종이에 색

 

화려한 빛깔의 중국 도자기와 골동품, 값비싼 문방구는 누구나 원했지만 쉽게 가질 수 없는 물건이었다. 조선의 화가는 사람들의 수집욕을 입체적으로 연출한 책장 그림으로 풀어주었다. 이 그림을 그린 화가는 반쯤 열린 문갑을 그리면서 감상자가 책장을 진짜처럼 느끼고, 책장 속의 기물을 실제 수집품으로 여기기를 바랐을 것이다.

 

 

 

 

말총 장식이 아름다운 투구  /조선 19세기, 황동, 문단, 옥, 말총 등

 

이 투구 주인은 알 수 없지만 전투와 예식에서 장군의 위엄을 뽐내준 귀한 물건이었다. 장식 전체가 잘 남아있는 보기 드문 조선시대 투구이다. 제주목사는 행정과 외적 방어를 책임진 지방관이었다. 청백리 이약동(李約東, 1416~1496)목사가 제주를 떠나는 뱃길에 갑옷을 바다에 던져 돌려보냈다는 설화가 목민심서에 전한다.

 

지방관 권위의 상징 관인궤 /조선 19세기 나무에 칠, 금속

관인은 행정관청의 문서에 찍는 공식 도장으로, 평소에는 궤에 넣어 보관했다. 궤에는 자물쇠를 걸어 함부로 관인을 꺼낼 수 없도록 해 놓았다. 제주목사 또한 이와 비슷한 관인궤를 늘 곁에 두고 목사의 권위를 과시했을 것이다.

 

<탐라순력도>을 남긴 이형상의 문집 병와집(甁窩集)  / 이형상, 조선 1772년 간행, 종이에 목판 인쇄

1702~1703년 제주목사로 부임했던 이형상의 글을 후손이 모아서 엮은 문집이다. 조정에 올린 <제주 사람이 겪는 폐해를 쓴 장계>가 문집에 수록되어 있다. 말테우리와 해녀의 공납을 줄이고, 다른 지역에서 폐기한 군선을 수리해 선박이 부족한 제주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실질적인 정책 제안이 담겨있다.

 

 

 

 

 

사층사방탁자(四層四方卓子)  / 조선 19세기

이름 그대로 사방이 트여 있는 장식장으로, 기둥과 층널만 짜맞추어 만들었다. 사랑방 모서리에 두고 책과 도자기를 놓아 공간에 우아함을 더해주었다. 조선다운 비움의 미학이 가장 잘 담긴 가구이다.

 

백자 달항아리 (白磁大壺) / 조선 18세기.

높이와 폭의 비율이 그의 같은 단아한 달항아리다. 사발모양 두 개를 빚어 물로 문질러 붙여서 만들었다. 한 아름에 가득 차는 넉넉한 양감과 어딘지 일그러진 비대칭 형태가 편안한 느낌이다, 둥그스름한 모양을 보름달에 비유한 '달항아리'라는 별명이 서정적이다.

 

이층 책장 /조선 18세기

튼튼한 소나무로 짜고 흑칠을 하여 책의 무게와 습기에 잘 견디는 장이다. 이층으로 만들었고 천판은 몸체보가 길게하여 물건을 올려두기 좋게 하였다. 문과 문변자의 균등한 비례가 시원스럽다. 소박한 무쇠 장석과 감잡이의 양식, 비례와 만듦새를 고려하면 18세기에 제작된 가구로 추정된다.

 

약장(藥欌,장롱장)  / 조선 19세기

서랍 일흔두 개가 빼곡히 들어찬 약장이지만 여닫이문을 닫으면 간결한 비례와 나뭇결이 돋보이는 사랑방 가구가 된다. 약재 사용량에 따라 서랍 하나를 두 칸 또는 세 칸으로 구획했다.

 

경상(經床)  / 조선 19세기

경상은 천판 양쪽 끝이 말려 올라간 책상의 일종이다. 두루마리가 떨어지지 않게 고안된  것으로 원래 사찰에서 사용했으나 조선시대 선비들도 애용했다. 이 경상은 서랍을 여덟 면으로 분할하고 다리에 대나무 모양을 투각해 장식했다. 부드러운 오동나무 판재에 얕게 새긴 태극무늬가 멋스럽다.

 

 

 

 

 

무릇 마음에 뜻을 세우고

꾸준하게 실천하는 방법으로

가장 좋은 방법은 널리 모색하는 것이고

가장 편한 방법은 욕됨을 참는 것이고

가장 먼저 해야 하는 방법은 덕을 닦는 것이고

가장 즐거운 방법은 선한 것을 좋아하는 것이고

가장 신통한 방법은 지극한 정성을 다하는 것이다.

<황석공소서> 체4장에서 

 

당신은 깊이 생가하여 다만 이처럼 나아가십시요.

시시때때로 아주 고요한 곳에 머무르면서

"내려놓거라."라는 부처 말씀을 절대 잊지 말고

다만 당장 이 자리에서부터 내려놓는 마음공부를 착실히 하되,

자기가 저지른 잘못을 꼭 두려워하지만 말고,

또 자꾸 떠올릴 필요도 없는 것이니.

떠올리고 두려워하면 도를 깨닫는 데 방해가 될 뿐입니다.

<대혜보각선사서>  증 시랑 천유에게 보낸 답장에서.

 

 

 

 

 

 

 

 

 

 

 

 

 

 

 

 

 

 

 

 

 

 

 

 

 

 

 

 

 

 

 

 

 

 

 

 

 

 

 

 

 

 

 

 

 

 

 

 

 

 

 

 

 

 

붉은 간토기 항이리, 검은 간토기 항이리, 주머니모양 항아리, 긴목 항아리, 청자 병,  청자상감 국화 모란무늬의 참외모양 병, 청자 상감 국화무늬 조롱박 모양 주자, 분청사기 상감 파도 물고기무늬 병, 분청사기 인화무늬 병, 분청사기 인화무늬 장군..........................................

 

 

 

 

 

 

 

 

 

 

 

 

 

 

 

 

 

 

 

온전한 한 벌의 그릇 청자 상감 모란무늬 발우와 접시 / 고려 13세기, 보물

 

한 벌이 온전하게 전하는 매우 드문 청자 발우이다. 발우는 승려가 쓰는 그릇으로 공양을 받고 마음을  닦는 수행 그 차제를 상징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반찬, 국, 밥, 물을 담는 네 개의 그릇을 차곡차곡 포갤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 발우는 상감이 정교하고 유약이 맑을 뿐 아니라 네 점의 빛깔이 모두 균일하다. 상감청자 전성기의 최상품 그릇으로 신분이 높은 승려가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지 안내문에서>

 

 

 

 

 

자유롭고 당당한 그릇

분청사기 조화모란무늬 항아리(粉靑沙器彫花牧丹文壺) /조선 15세기 후반~16세기 전반

큼직한 항아리에 흰 흙을 거칠게 바른 후 선으로 긁어 모란무늬를 간략하고 힘차게 표현했다. 갈색 바탕흙과 어지러운 백색 붓 자국위로 무늬를 그린 선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세련된 청자와 다르게 힘차고 자유분방한 아름다움이 돋보인다. 어께에  '上○'리는 글씨를 새겼는데 의미는 분명히 알기 어렵다.

 

 

 

 

 

도화지가 된 그릇,

백자 청화 동정추월무늬병 (白磁靑畵洞庭秋月文壺)  / 18세기 초. 보물.

 

보름달 뜬 강가 풍경을 청화로 그린 병으로, 모양을 따라 '떡메병'이라고 불렸던 그릇이다. 아래쪽이 풍만한 모양, 희고 맑은 바탕과 시원스러운 그림이 잘 어우러진 조선 후기 백자의 걸작이다. 중국 호남성 동정호는 '소상팔경'의 무대로 사랑받았다. 그 인기에 힘입어 우리나라에서도 '관동팔경', '영주십경'과 같이 한 고장의 여러 풍경을 명승으로 꼽는 것이 유행했다. 병에 그린 동정호의 가을 달 아래 조각배는 자연과 벗 삼은 유유자적한 삶을 꿈꾸게 한다. <현지 안내문에서>

 

 

 

 

 

가족의 이야기를 듣고, 짓고, 써준 따듯한 마음

정효자전, 정부인전 (鄭孝子傳, 鄭婦人傳) / 정약용, 조선 1814년, 비단에 먹

 

 

 

 

 

정약용은 전라도 강진에 유배된 지 10년이 되던 해, 정여주의 부탁으로 서른 살에 세상을 떠난 그의 아들 정관일의 이야기를 <정효자전>이라는 글에 담았다. 살아생전 부모를 향한 아들의 지극한 효심과 그를 먼저 떠나보낸 아버지의 절절한 심경이 드러난다. 3년 뒤, 정약용은 정관일의 부인 김씨가 남편을 여윈 뒤 두 아들을 굳세게 키워냈다는 이야기를 시아버지 정여주에게 듣고<정부인전>을 지었다. 정약용은 정관일과 김씨의 아들 정오연이 장만해 온 황색 비단에 두 글을 정성껏 옮겨 써 주었다. 유배의 나날에도 고을 사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이를 글로 옮겨 준 정약용의 마음 씀씀이가 단아한 글씨에 남아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새모양 토기, 

배모양 토기

말장식 뿔잔

토우장식 원통모양 그릇받침

 

 

 

 

 

신을 부르는 영험한 소리

덕산 출토로 전해지는 청동 방울  / 초기 철기시대 청동, 국보

 

청동은 구리에 주석을 섞은 인류 최초의 합금으로, 지배 계급의 초자연적 권위를 뽐내는 데 사용되었다. 제사장은 번쩍이는 청동 방울을 흔들며 소리와 빛으로 신을 불러들였을 것이다. 방울 여덟개가 달린 팔주령, 방울 두 개가 달린 쌍두령, 장대 끝에 박아서 사용한 간두령 등 다양한 종류의 방울이 함께 전하는 귀한 사례다. 몸체에 새간 섬세한 무늬가 당시의 높은 기술 수준을 보여준다.

<현지 안내문에서>

 

 

 

 

 

영원히 반짝이는 떠난 이의 장신구

귀걸이 /삼국시대 5~6세기. 금과 은

 

금은 녹이 슬지 않고 광택이 변하지 않으므로 인류가 가장 가치있는 금속으로 아껴왔다. 삼국시대에는 지배계급의 지위을 상징하는 금제 장신구가 유행했고, 주인이 죽은 뒤에는 무덤에 함께 뭍었다. 이 귀걸이는 금에 약간의 은을 합금해 강도를 높인 귀걸이다. 금판을 두드려 고리를 만들어서 속이 비어있다.

 

 

 

 

 

백자 철제 인물. 소. 말모양 冥器

백자 철제 인물모양 冥器

 

 

 

 

 

 

 

 

 

 

 

 

은실로 아로새긴 봉황,

봉황무늬 향합 (鳳凰文香盒)  / 고레12~13세기 청동과 은

금속 기물의 겉면에 끌로 무늬를 파내고 가는 금속선을 박아 넣은 입사 기법은 고려시대에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이 합은 향을 담아두는 그릇으로, 은입사 기법으로 무늬를 섬세하게 표현했다.

 

압도적인 크기와 절제된 우아함,

'봉업사'가 새겨진 향로(奉業寺銘香爐) / 고려 11~12세기, 청동,   보물.

불교 의식에서 잡귀를 쫒고 잡념을 없애려고 향을 피울 때 사용한 기물이다. 이 향로는 형태가 간결하고 균형이 잘 잡혀 있으며 고르게 핀 녹이 아름답다. 향로 표면에 새겨진 글씨로 고려 태조 어진을 모셨던 사찰인 봉업사에서 만든 향로임을 알 수 있다.

 

 

 

 

 

 

 

 

 

 

 

 

 

 

 

 

 

 

 

 

 

 

 

 

 

 

 

 

 

 

 

 

◐실감영상실

 

기획전시실 지하로 내려가면 실감영상실이 있다.

 

 

 

 

 

신발을 신고 들어간 바닥에 퍼질러 앉아서 본다.

3벽면과 바닥으로 영상이 투사되며 특히 바닥에 일렁이는 파도 등의 영상이 비춰지면 어지러워 서 있을 수 없다.

 

 

 

 

 

현재 영상은 표해, 바다 너머의 꿈, 심원의 명상, 영주팔경 등 총 3편으로,  편당 12~3분 소요됨으로  3편을 다 감상할려면 40~50분 정도 소요된다.

 

 

 

 

 

 

 

 

 

 

 

 

 

 

 

 

 

 

 

 

 

 

 

 

 

 

 

 

 

 

 

 

 

이외 영주팔경에 대한 영상이 더 있으나 시간 부족으로 시청하지 않았다.

 

 

 

 

 

상설전시관으로 간다.

 

 

 

 

 

 

 

 

 

 

 

 

 

 

 

 

 

 

 

제주도의 돌담

검은색의 현무암을 얼기설기 쌓아 만든 나직한 돌담은 제주의 정겨운 풍경들 중 가운데 하나이다. 제주의 돌담은 살립집의 담장을 이루는 정겨운 공간인 올레를 만들기도 하고, 산과 들이나 무덤가를 두르는 산담이 되기도 한다. 또한 밭의 경계를 이루는 밭담과 바닷가에 쌓아 물고기를 잡는 원담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제주의 거센 바람을 부드럽게 만들어 집과 농작물을 보호해주는 든든한 지킴이 역할을 한다. 돌담은 제주 사람들이 척박한 화산섬을 지혜롭게 개척한 문화유산이다. 이곳에 재현된 돌담은 제주의 전통 돌담인 외담을 가시리마을의 석수쟁이(돌챙이)들이 겹담 형식으로 쌓은 것이다. 담장 안에는 제주에서 일상적으로 사용 되었던 돌로 만든 생활용구들을 전시하였다.

<현지 안내문에서>

 

 

 

 

 

○탐라의 건국신화 : 삼성혈, 혼인지, 온평리 동굴유적(신방굴), 삼사석

○ 선사시대 제주 : 고산리. 사계리. 북천리 선사유적, 김녕리 궤내기 동굴입구 유적과 패총, 월령리 한드르 동굴입구 유적, 서광리 바위그늘 유적, 생수궤 바위그늘 유적, 귀덕리 제사유적, 종달리 제사유적, 고내리패총, 금성리 패총

○ 섬마을의 발전화 변화 : 삼양동.강정동 선사유적, 상예동.용담동.광령리.동일리.외도동.가파도.도련동. 삼양동. 신례리. 색달동. 오라동. 창천리. 일과리. 하귀리. 하모리. 화순리 지석묘, 화순리 패총과 수혈주거지 유적

○ 섬나라 탐라국: 용담동 제사 유적, 용천동굴(미공개), 신례리. 중문동 바위그늘 유적. 가파도. 곽지리 패총

○ 고려시대 제주: 신창리 해저 유물 발견지, 하원동 탐라왕자묘(추정), 항파두리 항몽유적지, 불탑사 오층석탑과 원당사 터, 수정사 터, 법화사 터, 존자암 터와 세존사리탑, 산방굴사

○ 조선시대 제주: 관덕정과 제주목관아, 제주향교, 오현단, 제주성 터, 정의현 관아와 정의향교, 성읍 민속마을, 대정향교, 대정읍성 터, 연북정과 조천진성 터, 별방진성 터, 명월진성 터, 화북진성 터, 서귀진성 터, 모슬포진성 터, 수산진성 터, 차귀진성 터, 김정희 유배지, 명월대, 하멜기념비, 하멜 표류지(신도리 해안, 추정), 삼사석비, 무오(1918)법정사 항일운동 발상지

○ 세계자연유산: 한라산, 성산일출봉, 거문오름, 만장굴

 

 

 

 

 

상설전시관을 둘러본다.

 

 

 

 

 

 

 

 

 

 

 

 

섬, 제주

 

우뚝 솟은 한라산과 수백 개의 오름이 있고

곶자왈의 푸름으로 덮여 있는 

신비롭고 아름다운 풍광을 가진 섬,

약하게 부는 바람(지름새)에서

예기치 못하게 강하게 변하는 바람(궁근새)처럼,

고요한 삶의 터진이자 격한 시련의 공간으로

제주 사람들의 이야기가 오롯이 담긴 섬.

 

그 섬의 이야기, 국립제주박물관에서 들려드립니다.

 

 

 

 

400만년 전 오스트랄로 피테쿠스

100만년 전 호모 에렉투스

70만년 전 구석기 문화

4~5만년 전 호모 사피엔스 

1만5천년 전 제주, 대륙의 끝이었다.

1만년 전 제주, 섬이되다. 신석기 문화의 시작, 제주 고산리

BCE(Before Common Era /공통시대 이전) 3~2C 철기문화 등장

BCE202 중국 한나라 건국/ BCE 108고조선 멸망, BCE 194부여, BCE 57신라, BCE 37고구려, BCE 18백제,

CE 42금관가야 등장

.................................

<현지 안내문에서>

 

 

 

고산리문화, 신석기시대의 시작

약 1만년 전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 문화가 제주에서 확인되었습니다.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 서귀포시 강정동 등지에서는 후기구석기시대 석기인 돌날몸돌과 함께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토기, 눌러떼기 기술로 만들어진 화살촉 등이 출토되었습니다.

<현지 안내문에서>

 

 

 

 

남해안 신석기문화와 제주

1만 년~5천 년 전에는 습한 기후로 참나무속의 온대활엽수림이 생성되었고, 3천 년~2천 년 전부터는 지금의 제주 기후와 비슷해져 다양한 온대 활엽수림이 번성하였습니다. 제주의 신석기인은 변화하는 기후와 섬이라는 환경 속에서 산과 바다를 중심으로 동물 사냥, 낚시와 조개 잡이, 식물 채집을 하며 살았습니다. 한편, 배를 타고 나아가 한반도 남해안 지역과 교류하였고 이 과정에서 새로운 신석기문화가 지속적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현지 안내문에서>

 

 

 

 

섬마을의 성장

인구가 늘어남에 따라 바닷가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마을의 규모는 점점 커졌습니다. 제주시 삼양동과 용담동, 외도동 등에서는 100여기 이상의 집터가 있는 마을이 확인되었습니다. 서귀포시 예례동과 인덕면 화순리, 제주시 구좌읍 중달리에서도 큰 마을을 이루고 바다를 생활 터전으로 삼아 생활하던 섬마을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현지 안내문에서>

 

 

 

 

탐라의 토기 / 곽지리식 토기

 

 

 

 

 

탐라의 발전

 

 

 

 

 

대몽힝쟁과 제주

고려는 1231년(고종18)에 몽골군이 침입하자 개경에서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고 몽골에 저항하였습니다. 그러나 무신정권이 붕괴하면서 1270년(원종11)에 고려 조정은 몽골에 굴복하고 개경으로 돌아왔습니다. 고려 조정의 개경환도와 몽골의 지배에 반기를 든 삼별초는 강화도에서 몽골에 대항하였습니다. 삼별초는 강화도에서 진도로 거점을 옮겼다가 전세가 기울자 다시 제주로 이동하여 항쟁을 이어갔습니다. 제주도 사람들은 삼별초와 뜻을 같이 하여 대몽항쟁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기도 하였으나 결국 고려정부와 몽골 연합군에게 삼별초가 대패하면서 대몽항쟁도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현지 안내문에서>

 

 

 

 

 

 

 

 

 

 

제주의 교육기관

중앙정부는 제주의 유학 교육을 위한 향교를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 세 곳에 설치하였습니다. 향교는 유교 성현을 모시고 유교적 교양을 갖춘 인재를 기르며 인.의. 예.지에 의한 도덕적인 교육을 중시하였습니다. 조선 후기에는 향교의 기능이 약화되면서 사학으로 귤림서원과 삼천서당을 비롯하여 우학당, 좌학당 등이 세워져 제주 유학교육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현지 안내문에서>

 

 

 

 

 

표류로 얻은 뜻밖의 견문

조선시대는 사대교린의 외교 정책으로 중국이나 일본으로 제한된 항로만 열어두었기 때문에 다른 나라의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그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표류는 이국적인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습니다. 해난 사고가 많은 제주에서는 바람을 잘못 만나 중국 명, 청, 왜, 류쿠(오키나와), 타이완, 여송(필리핀), 안남(베트남) 까지 표류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바다로 나가 표류하면 대부분 돌아오지 못했지만 생사의 위기를 극복하고 무사히 돌아온 사람들은 표류 기간에 보고 들은 것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현지 안내문에서>

 

 

 

 

제주의 인물

제주 밖으로의 이동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간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굻주리고 생활이 어려운 제주민을 위해 재산을 기부했던 거상 김만덕(1739~1812), 탐라사절(耽羅四絶)이라고 알려진 고홍진(1602~1682), 진국태, 양유성, 문영후와 명도암의 유학자 김진용(1605~1663), 안병택(1861~1906), 탐라기년을 저술한 김석익(1885~1956) 등은 이웃과 나라의 어려움을 살핀 제주의 인물입니다.

<현지 안내문에서>

 

 

 

 

유배된 사람들

조선시대 제주에 유배된 사람들은 광해군을 비롯해 왕족, 양반, 도적 등 다양한 신분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사화와 당쟁이 심해지면서 제주도 유배는 정치인이 다수를 차지하였습니다. 이들의 활동은 엄격히 제한 되었지만, 성리학적 학식과 덕망을 갖춘 선비로서 후학을 양성하며 지낸 유배인도 있었습니다. 김정희는 제주에서 추사체를 완성하였고 제주 지역의 학문과 예술 발전에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현지 안내문에서>

 

 

 

 

통계로 보는 제주

1789년 조선인구 총조사에 대한 제주지역 기록을 살펴보면 11,426호에 81,896명으로 조사되어 있습니다.

그 당시 제주목은 39,762명으로 다른 군현의 평균 약21,730명에 비하면 컸으며,

2위 나주 57,782명 《 제주 (제주목+정의현+대정현 =63,314명)  《 1위 전주 72,505명.

조선시대 숙종년간에서 경종, 영조, 정조에 이르는 시기(1700년대)의 인구는 약 700만명으로 숙종 17(1693년)에서 숙종22년(1696)사이에는 700만명에서 560만명으로 약 140만명이 갑자기 인구가 줄었습니다. 자연재해와 17세기 대기근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