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 함양 구송, 운봉 운지사, 지리산허브밸리(지리산자생식물원), 서림공원(서천리 당산)
김성리 교수는 인제대학교 의과대학 인문사회의학교실 조교수 및 인제대학교 인문의학연구소 연구원이셨습니다.
2022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산청.함양 민간인 학살 사건'에 대한 연구결과를 <증언, 잊힌 기억의 서사 1 / 산청.함양 민간인 학살 사건의 전개>와 < 증언, 잊힌 기억의 서사 2 / 기억의 방식을 중심으로> 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셨습니다. 그 주된 배경을 오늘 삼목인문학 회원들이 답사하였습니다.
자투리 시간을 이용하여 남원 운봉에 위치한 허브밸리, 가는 길목의 함양 구송, 운지사는 허브밸리 상부에 위치한 조그만 사찰을 같이 둘러보았습니다. 귀가길 인원 시장식당에서 국밥으로 저녁식사를 하고, 인근 '안내소앞 카페 제비'에 들렀습니다. 전유성씨가 운영하는 카페로 직접 로스팅한 커피와 베트남식 국수 등을 맛 볼 수 있습니다.
서림공원은 익일 임실지역 몇 군데를 둘러보고 귀가길에 들런 곳이지만 지역상 운봉이어서 이 카테고리에 기록하였습니다.
▷일정
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과 현장 보존지 - 함양 구송 - 운봉 운지사, 지리산허브밸리(지리산자생식물원), 서림공원(서천리 당산) -인월 시장식당 석식 - 안내소앞 카페 제비 - 귀가 / 2025. 4. 19.
▷탐방후에
◐산청. 함양사건 추모공원
산청군 금서면 방곡리 가현마을에 왔습니다.
가현희생장소보존지역으로 표시된 비석이 있는, 1951년 음 정월 초이튿날 산청.함양사건과 거창사건의 시작이 된 마을입니다.
주민의 증언에 의하면 현장은 조금 아랫쪽 골짜기이자 전답이 있는 곳이지만 바로 인근에 현장을 조성하고 비석을 세웠습니다.
이곳은 1951년 2월 7일(음력 정월 초이튿날) 당시 가현마을에서 살던 주민이 국군의 총칼에 집단 희생되었던 곳으로 당시 산청군(가현, 방곡), 함양군(점촌, 서주)지역에서 일어났던 네 곳의 집단 희생터 중 하나입니다
이날 국군 제11사단 9연대 3대대 군인들은 아침 7시경 40여 가구를 뒤져 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뒷 계곡으로 몰아 학살하고 시체에 불을 질렀습니다.
이곳에서 123명이 희생되었으며, 자식만은 살리겠다는 어머니의 희생정신 덕분에 불타는 시체 속에서 윤한영(남, 18세)이 기적처럼 살아 남아 그때의 일을 전하였습니다.
<현지 안내문에서>
오늘 일정은 사건의 순서이자 산청읍에서 차도를 따르면 거리가 가장 먼곳이기에 이곳 가현마을을 먼저 답사하고
추모공원이 있는 방곡마을의 현장보존지와 추모공원을 답사하는 순서로 진행하였습니다.
조금 엄숙한 마음입니다.
방곡희생장소보존지역으로 왔습니다.
방곡리 가현마을에서 주민을 학살한 군인은 10시경 방곡마을에 도착하여 온 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끌고 나와 이곳 논바닥에서 학살하였습니다.
이때 사망한 주민이 212명이나 되었고, 후에 이곳 논바닥에서 나온 유골이 80kg들이 쌀가마니로 여섯 가마니 분량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3발의 총탄을 맞고도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정재원(남, 7세)이 그때의 일을 전합니다.
당시엔 말못하다가 몇년 후 후손들이 모여 동심계를 조직하여 이곳 문바위 아래에서 당시의 영혼을 달래며 제를 지내기 시작 하였습니다.
이곳 문바위 아래는 동네 바로 앞이지만 지형상 마을앞에선 잘 보이지 않는 곳입니다.
동심계(同心契)
1951년 2월 7일 산청. 함양 2개군 4개마을 가현, 방곡, 점촌, 서주지역에서 국군에 희해 희생된 사람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1953년 4월에 유족들 중심으로 동심계를 조직하였습니다.
동심계는 산청.함양사건 유족회의 전신으로 매년 곡우날 서로를 위로하고 억울하게 죽은 자의 영혼을 기리기 위한 모임이었습니다.
참여한 인물은 강말용, 강성봉, 강윤구, 권석조, 김기만, 김명곤, 김성곤, 문계준, 서정백, 서정진, 신상주, 오세상, 오종세,오주환, 우동수, 이귀영, 이용해, 이정기, 전상권, 전점대, 전판문, 정점석, 정찬옥, 최재선, 한상일, 허정옥 등이었습니다.
유족회원과 동심계원 명단등을 기록으로 남겨놓았습니다.
과거 한때 이곳에서 제를 지냈지만 지금은 추모공원에서 제를 지내므로 이곳엔 문바위 제단 표시석을 세워두었습니다.
비교적 근년에 조성된 방곡 저수지입니다.
오봉마을에서 발원한 이 물은 상류지역에 오염원이 별로 없어 물이 깨끗합니다.
추모공원을 둘러보기로 합니다.
먼저 추모공원내 영상실에서 당시 사건현장을 재생한 영상물을 시청하였습니다.
현 현장 해설을 도와주고 계시는 유족회 오세욱이사님이 수고해 주셨습니다.
영상물 시청후 기념관을 둘러봅니다.
견벽청야(堅壁淸野), 천추유한
견벽청야란 "반드시 확보해야 할 전략거점은 벽을 쌓듯 견고히 확보하고, 부득불 포기하는 지역은 모든 곳을 없애 빈 들판으로 만들라"는 뜻으로 삼국지에 등장하는 조조가 쓴 전략중의 하나입니다.
11사단은 6.25한국전쟁중 지리산을 비롯한 국내 공비소탕을 위해 창설된 부대입니다.
1951년 2월 7일부터 2월 11일까지 우리 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가 산청군 금서면, 함양군 휴천면, 거창군 신원면 일원에서 실행한 '작전 제5호'의 작전명이기도 합니다.
인제대 교수로 계시는 김성리 교수님은 관련 논문에서 지금까지 견벽청야로 학계에서 알고있는 작전명이 <건벽청야 建壁淸野>임을 밝힙니다.
11사단 9연대의 이동경로는 산청군 금서면 수철리에서 하룻밤을 야영하고(음 1월 1일 설날) 2월 7일(음 1월2일) 새벽 가현 마을로 이동하여 이곳 주민을, 이어 방곡마을, 점촌마을에서 차례로 주민들을 학살하고, 지혜, 주상, 화계, 지곡, 손곡마을 주민을 서주마을로 집결시켜 선별적 학살을 한 사건이 산청.함양사건으로, 사건 당일 국군은 생초초등학교에서 야영을 합니다.참고로 산청함양사건 희생자 수는 가현마을 123명, 방곡마을 212명. 점촌마을 60명, 서주마을 310명 합하여 705명입니다.(이는 명예회복시 신고된 숫자입니다.)
이어서 거창 신원면으로 이동하여 2월 9일 덕산리 청연골에서 주면 84명, 2월10일 대현리 탄량골에서 100명, 2월11일 과정리 박산골에서 517명, 2월9일~2월11일 기타지역에서 주민 18명을 포함하여 719명을 학살합니다.
당시 사용한 주 총기를 전시하였습니다.
산청 합양사건의 4곳 현장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습니다.
산청.함양사건 및 거창사건의 주범들을 부조상으로 만들이 이들을 벽 속에 가두어 두고, 후세들이 이들의 만행을 영원히 기억하고록 하여 반드시 준엄한 역사의 심판이 있음을 형상화 하였습니다.
최덕신 : 11사단장
오익경 대령 - 11사단 9연대장
김종원 대령 - 경남지구 계엄인사부장
한동석 소령 - 11사단 9연대 3대대장
신종목 위원의 사건 폭로
1951년 3월29일 제54차 국회 본회의에서 거창 출신 신중목 위원이 거창사건(거창 청년단 혐차상씨가 정보를 제공)에 대해 보고하였습니다.(당시 산청지역의 국회의원은 병을 핑게로 회피하여 신종목 의원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으로 전해집니다.) 1951년 3월 30일 국회 본회의에서 거창사건 진상을 재조사하기 위해 국방부, 내무부, 법무부 등 3부 합동 조사반을 보내기로 했고, 더불어 국회 조사단도 파견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국회 진상조사단 현장조사와 방해공작
1951년 4월5일 국회 진상조사단은 현장 조사에 착수하였습니다. 사건 발생지인 거창군 신원면으로 이동 중 신원면 북방리 상사리 고지에서 공비 80여명의 기습을 받습니다. 그러 이 사건은 길 안내를 맡은 경남지구 계엄인사부장 김종원 대령이 신성모 국방장관과 사전 모의한 방해 공작이었습니다.(김종원 대령이 추후 스스로 증언하였습니다.). 양민학살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이 두려웠던 신성모 국방장관과 김종원 대령은 학살 현장의 어린이 시체를 중유리 홍동골 계곡에 암매장하고 작전명령을 변조하였습니다. 또한 지역주민과 치안관계자들에게 함구령을 내리는 등 다양한 방헤공작을 합니다.
정부 공동조사결과 내용
공보처의 발표문은 사건을 왜곡, 축소하여 진실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었습니다. 9연대 3대대의 학살코스가 [거창(우보)→산청(가현.방곡) →함양(점촌,서주) →거청(신원면)으로 이어져서 이 벨트가 사전기획한 '작전명 제5호'에 의해 이루어졌던 것을 알 수 있으나 거창에만 국한하는 것은 사건을 왜곡, 축소하려는 의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재판에서 증언자들이 증언한 날짜와 시간대가 서로 엇갈리고 사건 내용을 종잡을 수 없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위 4인의 행적은 거창사건으로 인하여 1951년 2월 27일 대구고등군법회의에 회부되고 동년 12월 16일 판정판시에서 최덕신은 보직 해임됐지만, 곧 복직하여 1군단장과 외무부장관, 주서독 대사 등을 지냈습니다. 그는 나중에 천도교의 교령자리에까지 올랐습니다. 이후 박정희 전 대통령과 정치적 갈등을 겪으면서 1976년 아내 류미영과 함께 미국에 이민을 갔다가 월북했습니다.
오익경 9연대장은 무기징역을 받은 후 1년 뒤 복직해 대령으로 예편되었습니다.
당시 계엄인사부장 김종원은 1951년 민간인 학살사건과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구속수감되었다가 흐지부치 처리된 뒤 경찰직으로 자리를 옮겨 치안국장(지금의 경찰청장)으로 승진하였습니다. 1960년 4.19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면서 '장면 저격 사건'을 재조사하는 과정에서 배후로 드러나 구속되었으나 1961년 12월에 당뇨병으로 보석으로 풀려난 뒤 1964년에 사망하였습니다.
한동석 3대대장은 10년형을 선고받은 후 1년 뒤 특사로 풀려나 군에 복귀했다가 강릉 시장을 지냈습니다.
방곡마을 앞 문바위 아래에서 동심계원들이 모여 회합과 제를 지냈던 당시를 기념하고자 문바위를 축소제작하여 기념관에 전시하였습니다.
당시 사망하신 분의 명단을 이곳 방에서 볼 수 있습니다.
국가의 민간인에 대한 학살은 그 진상을 철저히 규명하고, 관련자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어야 합니다.
또한 유족에게 배.보상을 하여주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재발방지 약속으로 해야 함이 세계적인 추세입니다.
한국민간인 학살의 기록
과거의 비극적 사실을 배상이 되었던, 보상이 되었던, 생활비 지원이 되었든 공정하게 처리되었슴 합니다.
추모공원을 둘러봅니다.
헌시 / 강 희근
양민을 적이라 하고
작전을 수행했던 이상한 부대
하늘 아래 있었습니다.
가현, 방곡, 점촌 사람
몰살하고
그 아래 야지 마을 사람 반으로 나뉘
무차별 사살했던 이상한 부대
이 나라 땅위에 있었습니다.
대대로 살아온 것 죄가 되는가
흙 파고 씨 뿌린 일 죄가 되는가
제 나라 군대의 총알에 맞아 죽은 백성들
산발한 채 원혼으로 반세기
하늘을 떠돌아 다니는 나라
이 나라 말고 어디 있겠습니까.
그 부대 대장들이 붙들려
눈 가리개로
재판 받고 감옥 갔다 풀려나
승진해 가는 동안
나라의 권력은 善(선)으로부터 고개
돌렸으니
하늘 아래 권력이 이처럼 오래 죄인의 손
들어주고 다닌 나라
이 나라 말고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역사는 義人(의인)들을 내고
진실 화안히 드러내니
이제는 냇물이 제 소리 내며 흐르고
노을과 이슬 저희 허리 펴고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오! 반세기
자리에 한 번 앉아 보지 못한
7백여 원혼들이여 이제는
나라가 법으로 그대들 양민이라 하고
겨례가 입으로 그대를 님이라 부릅니다.
자 이제 앉아 편시 쉬세요
진달래 피고 보리가 익는데
님들이 그리워 새들이 재잘거립니다.
님들이시여 힘 들어도 오히려 불쌍한 죄인
죄인들
새들의 노래 안에 불러 들이세요
중매재 고개마루
깨곰히 달리고 산머루 탐스레 익으면
그기 그 빛깔로 도란도란 오세요
오세요 저희 살아남은 자
곁으로
나라
잘못된 나라 되지 않게 염원 알알히 목에 걸고 어서 오세요
저만큼 큼직한 묘지 두 기가 보입니다.
국무총리 소속 명회회복 심의 위원에에서 사망자 및 유족 등록사항으로 본 사망자는 386명으로 등록되어 있습니다만 신고된 숫자는 705명으로 당시 가족 전체가 몰살당하거나 행방불명된 유족들을 되집어 인우보증을 세울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유족회에서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등록되지 못한 영혼들을 남녀 가묘로 만들었습니다.
위에서 내려보니 참 평온스럽습니다.
가현마을에서 다리에 관통상을 당한 한 가난한 소녀는 보이는 산을 넘어 동면 신아마을로 갑니다.
피나는 다리를 끌고 아픈줄도 모르고 저 산을 넘어 살길을 찾았습니다.
추모공원의 맨 상부에 위패봉안각이 있습니다.
위패 봉안각은 산청.함양사건의 승화공간으로 그 슬픈 넋들을 봉안하고 신원(伸寃 / 펼 신, 원통할 원, 가슴에 맺힌 원한을 풀어 버림)해서 명예회복하며 가신 님들의 영전을 제배하옵고 영혼을 한자리에 모시어 명복을 비는 의미를 담은 곳입니다.
방문하신 여러분들께서 헌화 할 수 있으며, 숙연한 마음을 가져 주시기 바랍니다.
위패 봉안각 내부입니다.
대표로 분향합니다.
묘지의 대부분은 가묘입니다.
세월이 흐르고, 당시 수습하지 못한 시신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2004년 3월 2일, 제16대 국회 제24회 임시회 본회의에서 사건발생 53년만에 거창사건등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특별법이 찬성 210명, 반대 4명, 기권 4명으로 압도적인 숫자로 의결하였으나, 3월23일 당시 대통령권한대행의 거부권 행사로 배보상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후 매년 국회에 동 법안이 제출되고 있으나 본 회의에 오르지 못하고 있음은 참으로 아쉬운 일입니다.
추모공원 앞 정원에서 준비해간 충무김밥으로 점심을 먹었습니다.
떡도 있고, 과일도 있습니다.
중식후 점촌사건 현장을 찾았습니다.
방곡마을과는 가까운 곳입니다.
이곳에서도 주민 60명이 학살됩니다.
서주마을 사건현장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이곳에선 군인과 경찰가족은 제외시키는 등의 행위를 보입니다만 이곳 현장에서도 310명의 목숨이 억울하게 희생되었습니다.
서주마을 서편으로 야트막한 봉우리가 있습니다.
이곳에서 왕산쪽 공비를 소탕하기 위해서 우리 국군이 박격포를 발사하곤 했는데 상당부분이 상촌마을에 떨어져 주민들이 기습시위를 하는 행위가 이 사건 결정에 일부 영형을 미쳤을 거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지금은 둑도 축조하고 보가 생겨 당시와는 지형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저곳으로 당시 붙들려 한겨울을 건너온 어느분은 지금도 발목이 시리다고 합니다.
◐구송대공원(구송힐링공원)
산청.함양사건 현장을 답사하고 나니 시간이 오후1시 30분경입니다.
모처럼 답사 겸 나들이를 나온 셈이기에 봄바람 쐬러 남원 운봉 허브밸리로 갑니다.
가는 길목인 함양 휴천면 소재지에 위치하고 있는 구송을 둘러보기로 합니다.
아홉의 소나무가 아니라 아홉 가지를 가진 반송 한 그루입니다.
함양 목현리 구송(九松) / 천연기념물
목현리 구송은 소나무의 한 품종인 반송으로, 가지가 밑 부분에서 여러 갈래로 갈라져 우산이나 쟁반처럼 옆으로 퍼진 모양의 나무입니다.
이 구송은 조선후기 진양 정씨 화산공이 심었다고 전해집니다. 원래는 가지가 아홉 갈래로 갈라진 모양이어서 마을 사람들이 구송(九松) 이라 불렀습니다. 현재는 2가지가 죽고 7가지만 남았으나 나무 모양에 큰 변화가 없으며 나무 기세도 건강한 상태입니다. 높이 약12m, 가슴 높이 기준 직졍 1.6m의 크기로 나무의 나이는 약 300년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현지 안내문의 내용입니다.>
주변을 조그만 공원화 하였습니다.
◐ 운지사
남원 허브밸리를 좌측에 두고 바래봉으로 오르는 임도를 따라오르면 운지사가 있습니다.
이 임도는 바래봉으로 오르는 길입니다. 과거 바래봉에 오른 후 이 길을 따라 내려온 기억은 있는데 어디로 난 길일까 궁금했는데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현 차량은 이곳 운지사 입구까지 오를 수 있습니다만 주차 공간은 협소합니다.
절의 크기는 조그만 하며 외형상 크게 볼 것은 없습니다만 아늑한 느낌이 드는 사찰입니다.
대웅전 크기도 크지않습니다.
대웅전 내부의 모습입니다.
한켠엔 종각도 있습니다.
대웅전 쪽에서 바라본 요사 방향인데 이 건물에 거주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앞쪽 소나무 숲이 좋습니다.
운지사는 남원허브밸리 싱부쯤에 위치하여 임도변에서 허브밸리 상부를 내려다 볼 수 있습니다.
◐남원 지리산 허브밸리
주차료는 없으며, 입장료는 어른 4,000원, 경로 1,500원 입니다.
일반권을 구입할 경우 2,000원권 내고장 상품권으로 되돌여 주니 성인 입장료는 2,000원인 셈입니다.
관람안내도 입니다.
카페 아티나와 오헤브데이호텔 입구는 별도로 있어 지리산허브밸리에서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곳 지리산 허브밸리는 지난 설날에 이어 과거 와 본적이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오늘 모임에서는 많은 사진을 촬영하지는 않았습니다.
먼저 이곳은 열대식물원입니다.
일행중 한분이 빠졌습니다.
아마 사진을 촬영하신 분이겠지요,
오늘 6곳인가? 스탬프를 받아오면 예쁘고 자그만한 꽃 화분을 준다고 하네요,
그래서 허브밸리 이곳 저곳을 다녀와야 겠습니다.
열대식물원 맨 아랫쪽에 스탬프를 찍는 곳이 있습니다.
첫 스탬프 찍는 것이 순조로우니 다른 곳 찾기도 어렵지 않을 겁니다.
오늘 일행중 막둥이
복합토피아관 2층으로 갑니다.
복합토피아관 2층에도 나름 의미를 부여하면 휴식하기 좋은 곳입니다.
오헤브 정원(원형광장)으로 왔습니다.
자생식물 압화관으로 갑니다.
이선생이 보내주신 사진 두장을 올려봅니다.
압화전시관 내부로 들어왔습니다.
허브 식물원
몽환정원, 동화마을을 지나 스카이 트레일,
좌측 느티나무 가로숲길에서 스탬프를 찍고, 자작나무 숲에서 스탬프를 찾고,
전망대, 철쭉동산까지 올라왔습니다.
아직 철쭉이 피지는 않았습니다만 만개할 시기가 얼마 남지않았습니다.
내려 갈 때에는 암석원쪽으로 지리산허브밸리를 대충, 구석구석 둘러보며 이곳에서의 일정을 마칩니다.
◐카페 제비
인월 시장식당은 국밥(돼지국밥, 순대국밥)으로 인해 맛집으로 통하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저녁 식사후 인근 <안내소앞 카페 제비>에 왔습니다.
전유성씨와 환담을 나눈 것은 아니지만, 언젠가 전유성씨 국수집을 한번 찾고 싶은 적이 있었습니다.
◐ 운봉 서림공원
이곳은 운봉읍사무소 인근의 서림공원입니다.
남원 서천리 당산 / 국가민속문화재
당산은 마을이 수호신인 당산신(당산할아버지와 당산할머니)을 모시고 마을의 풍요화 평안 등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는 곳입니다. 남원 서천리 당산에는 남녀 한 쌍의 돌장승이 서 있습니다. 외형상으로는 남녀를 구분하기 쉽지 않은 데 북쪽에 서 있는 장승이 남장승, 남쪽에 서 있는 장승이 여장승이라고 전해집니다. 각각의 돌장승에는 <방어대장군, 진서대장군>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악한 기운을 막는 다는 뜻입니다. 두 장승은 모두 수염이 있고 벙거지를 썼는데 남장승인 방어대장군은 귀가 없습니다. 두 장승이 부부 싸움을 하다가 진서대장군의 목이 부러져 마을 사람들이 붙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니다.
남원 서천리 당산의 돌장승은 마을을 수호한다는 신앙적 의미뿐만 아니라 서민의 소박한 표정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민속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갖습니다.
<현지 안내문에서>
당산나무
각종 여러 비석군
어떤것은 마모가 심하여 상당한 연륜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서림공원
이곳 서림공원은 운봉 지리산허브밸리를 찾은 뒷날 임실군 오수 일원을 둘러보고 오는 길에 잠시 들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