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특회

경기 화성 모임 / 융건릉, 수원화성, 화성행궁

정헌의 티스토리 2015. 11. 11. 22:03

■ 경기 화성 모임  /  융건릉, 수원화성, 화성행궁

 

농협대학에서 소정의 특별교육과정을 수료후 임지에 발령을 받은지 만30년을 넘고 있다. 

몇은 사망하고, 몇은 중도에서 전직 또는 현직을 떠났다.

이젠 하나 둘씩 정년을 맞이하는 그런 나이가 되었다.

금차 하반기 모임은 경기도 화성이다.

 

▷ 일정 (2015. 11. 7∼8. 1박 2일)

화성 융건릉 - 라비돌 리조트 저녁행사 및 숙박 - 황태랑 조식 - 수원화성 및 화성행궁 - 행궁정 중식 

 

 

 

 

 

▷ 기타

2016년 4월 2주 모임 진주, 12월경 4박 5일 이내 해외 여행,

 

▷ 모임 후에

 

▣ 화성 융건릉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에 있다.

융릉은 조선 제22대 정조의 아버지 장조(사도세자 1735~1762)와 헌경황후(혜경궁홍씨1735~1815)의 합릉이요, 건릉은 그의 아들, 정조와 효의왕후를 합장한 능으로 이 두 능을 합쳐 융건릉이라 부른다.

본래 사도세자의 묘는  경기도 양주시  배봉산(현 서울 동대문구) 기슭에  수은묘(垂恩墓)로 있었으나 왕위에 오른 정조가 사도세자를 장헌세자(莊獻世子)로 추숭하고 난뒤, 묘를 영우원(永祐園)으로 높였으나 그의 지시로  지금의 자리로 옮겨 현륭원 (顯隆園)이라 이름붙였으며 효성이 지극한 정조는 사후 그 곁에 뭍혔다고 전해진다.

1899년 고종은 왕계 혈통상 고조부인 장현세자(사도세자)를 장조로 추승하면서  현륭원이란 명칭도 융릉으로 격상시켰다.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 융건릉 주차장이다.

상당한 연령의 향나무가 뿌리를  하늘로 향한 듯 서있고,

넓지 않은 공간이지만 주차의 여지는 충분하다.

 

 

 

 

 

들머리 원경이다. 매표소, 조선왕릉 세계유산 표지석과,

보이지 않는 맞은 편엔 안내도 등이 있다.

 

 

 

 

 

입장료 안내표시판을 처음보면 난해하다.

타 문화재에서 보기 어려운 년간 또는 월간 입장료 표시로, 한참을 들여다 보아야 한다.

1,000원/ 어른 1인,

주차료는 없다.

 

 

 

 

 

들머리.

조선왕릉 세계유산임을 알린다.

 

 

 

 

  

융릉으로 향한다.

 

 

 

 

 

좌.우 운치있는 소나무가 들어서 있다.

 

 

 

 

 

들머리 조금, 융릉과 건릉의 갈림길이 있다.

융릉과 건릉은 약간? 제법?의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다.

 

 

 

 

 

먼저 융릉으로 향한다.

 

 

 

 

 

산책하기에 아주 좋다.

 가을이 참나무 잎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여러해 전 이곳을 탐방한 적이 있는데.

세월이 흘러 기억은 오간데 없다.

 

 

 

 

 

 

 

 

 

 

 

 

단풍이 곱다,

 

 

 

 

 

 

금천교,

건너로 융릉이 보인다.

 

 

 

 

 

곤신지.

금천교를 건너면 이내 좌측편에 있다.

혹자는 둥근 이 연못을 여의주로 표현하기도 한다.

 

원형연못 곤신지는 융릉이 천장된 이듬해 1790년 조성되었다.

곤신방(坤申方, 남서방향)은 융릉의 생방(生方, 풍수지리 용어로 묘지에서 처음보는 물을 지칭)으로

이곳이 길지이기 때문에 판 연못이다.

 

 

 

 

 

제각?이 릉의 정면을 비껴나 있다.

뒤주에 갖혀 사망한 사도세자이니 死후 앞을  막음은 갑갑할 터이니 옆으로 비켜나 있다한다.

 

조선 중기 왕계를 보면18대 현종 - 19대 숙종 - 20대 경종 - 21대 영조 -  22대 정조- 23대 순조로 대를 이어간다.

숙종은 현종의 외아들로 조선중기 이래 붕당정치 절정기에 왕을 지낸 인물이다.  왕위 즉위 초에는 남인이 득세를 하였으나 후에는 서인이 집권을 하게 된다. 

숙종의 여인을 보면 3왕비와 6명의 후궁이 있다.

 

 

 

숙종의 부인 인현왕후 민씨는 여러해가 지나도 후자를 낳지 못하는 가운데 숙종은 후궁 장씨를 총애하게 되고. 그가 아들을 낳자 원자로 책봉하고 장씨를 빈으로 삼으려 한다.

당시 집권세력인 서인은 인현왕후가 아직 어리므로  후사가 나기를 기다려  적자로서 왕위 계승함이 옳다하여 원자  책봉을 반대한다.

당시 남인은 숙종의 주장을 지지하였고, 숙종은 서인의 독주를 누르기 위해 남인 등용하고 원자를 자기 뜻대로 정하고 숙빈 장씨를 빈으로 책봉한다. 이때 서인 대표지도자 송시열은 숙종의 처사를 잘못이라고 간하다 제주도로 귀양가고, 후 사약을 받게된다. 이 과정에서 남인이 득세하고 민비(인현왕후)는 궁에서 쫒겨나고 장희빈이 정비가 된다. 이를 기사년에 정치적 국면이 뒤집어졌다 하여 기사환국이라 한다.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권력을 잡게되고, 서인은 인현왕후 민씨 복위 운동을 전개한다.

숙종은 정비로 삼은 장씨의 방자한 행동에 염증을 느끼고 무수리 출신 후궁 최씨 (영조 생모)에 마음을 두게된다, 이러한 정황속에 숙종은 남인을 내치고 서인을 조정 주요 자리에 다시 등용하게 되며 장희빈을 죽이게 되고.인현왕후는 복위된다. 당시 서인은 장희빈 처벌을 강하게 하자는 노론과 세자의 모후로 약하게 처벌하자는 소론으로 나뉘게 된다.

 

경종은 숙종과 장희빈 사이에서 태어났다.

경종이 세자가 됨으로 가장 불안한 세력은 장희빈 처벌을 강하게 주장한 노론세력이다. 경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며 후사가 없고, 병약하였다.  이때 노론의 주장에 따라  경종의 이복 형제인 연잉군(후 영조)을 세자로 책봉되고  경종은 왕위에 오른후 4년만에 병석에 눞는다. 경종의 간호를 맡은 연잉군은 대왕대비전에서 보낸 간장게장을 어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먹이게 되고 경종은 사망한다.

우여곡절 긑에 왕위에 오는 영조는 이로 이해 경종 독살설에 휘말리게 된다. 영인군(영조)이 왕위에 오른 배후에는  노론의 세력이 있었기에,  정치적 평정을 위한 탕평책을 쓰기도 했지만 노론을 무시 할 수 없게 된다.

 

  

 

 

 

출중한 어린시절

 

사도세자(思悼世子) 영조의 둘째 아들이자 영빈 이씨의 소생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영조는 82세까지 살았고 왕위에 52년 동안 머물렀던 조선 왕실의 기록적인 인물이다.그에게는 정비 정성황후와 계비 정순왕후가 있고, 정빈 이씨, 영빈 이씨, 귀인 조씨, 후궁 문씨 등 4명의 후궁이 있었다. 그는 후궁에게만 2남 12녀를 얻었는데, 그 중에 5녀는 요절했다. 영조는 즉위 이전에 정빈 이씨에게서 첫 아들 효장세자를 얻었지만 1719년(숙종 45년) 2월 15일에 9세의 어린 나이로 요절했고, 사도세자는 그로부터 9년 만에 얻은 귀한 아들이었다. 사도세자는 태어난 지 백일 만에 영조의 정비인 정성왕후 서씨의 양자로 입적되었고, 원자로 정호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왕세자로 책봉했다. 초고속 후계구도가 완성된다.  이런 부왕의 기대에 걸맞게 세자는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자질을 발휘했다.

 

 

 

 

 

불안한 세자의 자리

 

영조는 오래전부터 세간에 널리 퍼져있던 자신의 경종 독살설을 불식시키려는듯 경종 비 선의왕후 어씨가 살았던 저승전에 세자의 거처를 정해주었다. 게다가 과거 경종의 나인이었던 한상궁과 이상궁에게 세자의 훈육을 맡겼다. 어린 시절부터 영특했던 세자는 평소 학문에 열중했다.  그런 와중에 틈틈이 상궁들과 전쟁놀이를 즐기기도 했다. 한데  그 사실을 알게 된 영조가 세자를 엄하게 추궁한 다음, 자식을 그릇된 길로 인도했다는 이유로 두 상궁에게  혹형을 가하여 목숨을 빼앗았다.

훗날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을 통하여 이런 극적인 상황이 세자에게 정신적인 충격을 주었다고 회고했다.

                 

 

 

 

 

혜경궁 홍씨와의 만남

 

세자는 1743년(영조 19년) 성균관 장의로 정9품직의 세마(洗馬)에 불과했던 홍봉한의 둘째 딸 홍씨와 혼인식을 치렀다. 그렇게 동갑내기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세자빈 홍씨는 사도세자와 혼인한 뒤 15세 때 비로소 합방을 했고, 1750년아들 의소세손 정(琔)을 낳았다.영조는 늘그막에 얻은 손자를 몹시 사랑했다. 그러나 세손은 1750년(영조 26년) 8월 27일  겨우 두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홍씨는 같은 해 9월 22일 둘째 아들 산(祘)을 낳음으로써 첫째 아들을 잃은 슬픔을 어느 정도 달랠 수 있었다.

 

 

 

 

문무를 겸비한 영재

 

사도세자는 무재가 출중한 인물이었다.

혜경궁 홍씨가 남긴 <한중록>에 따르면 세자는 평소 군복을 즐겨 입는 등 무골의 기질이 있었다 한다. 하지만 영조는 무예나 술을 멀리하고 오로지 학문에만 매진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세자는 학문과 더불어 무예에 심취하여 15세 무렵에는 효종대왕이 쓰던 청룡도와 쇠몽둥이를 자유자재로 다룰 정도가 되었다. 아울러 궁술과 승마에도 일가견을 보여주었다. 세자는 24세 때인 1759년(영조 35년)에 <무기신식>이라는 무예서를 집필하기도 했다.

이 책은 명나라의 장수 척계광의 <기효신서>와 선조 때 한교가 편찬한 <무예제보>를 저본으로 곤봉, 장창 등 6가지 기예에 죽장창, 월도, 쌍검 등 12가지 기예를 추가해 그림과 설명을 붙인 무예서이다.  이 책은 당시 훈련도감에서 교재로 사용되었고, 정조때 간행된<무예도보통지>의 원본이 되기도 했다.

 

 

 

 

대리청정으로 더욱 깊어진 갈등

 

영조는 세자가 15세 때인 1749년(영조 25년)에 대리청정을 명했다.

세자에게 정치적 경험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였지만 민감한 사안은 자신이 판단해 결정할 것이었다. 그해 2월 영조는 세자에게 대리청정의 기본 방침을 제시했다.

세자는 부왕의 폭언과 질책 속에서도 대리청정의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했다.

당시 세자는 여러 지역의 환곡을 조정하고, 현지의 형편에 따라 세금을 증감하는 등의 방법으로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또 군역을 치러야 하는 백성들을 괴롭히던 대전(代錢)과 방납(防納)을 금지시켰다. 이런 선정에 접한 백성들은 몹시 기뻐했다. 그리하여 세자가 온양행궁에 행차하자 환호성을 지르기까지 했다. 럼에도 불구하고 세자가 소론의 정치적 입장에 기울었다고 여긴 집권 노론 일파에서는 세자에 대한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영조는 정치적 평정을 이루려고 탕평책을 쓰기도 했지만 노론의 편이 아닐 수 없었다.

문제는 당대의 정황을 예의 주시한 사도세자가 영조의 정치가 옳지만은 않다는 생각을 키워가고 있었다. 그렇기에 사도세자는 노론 세력이 보기에 눈엣가시였다. 그런데 세자가 영조를 대신해 정무에 임하자 노론에 불똥이 떨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실제로 세자는 조정에서 노론이 소론을 공격할 때마다 부왕의 뜻을 물은 다음 처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론은 세자를 의심했고, 영조 역시 세자를 믿어주지 않았다.노론 측에서는 줄기차게 사도세자의 흠을 들추면서 이간질했고,  이들 배경에는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숙의 문씨등이 있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영조의 변덕으로 영조와 세자와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고, 지쳐버린 세자는 1757년 7월 부터 넉 달 동안 문안인사 조차 드리지 않았다. 그런 상황은 이후에도 4년여나 계속되었다  

 

 

 

 

정신질환의 심화

 

사서에 전하는 세자의 정신질환은 1755년(영조 31년)경부터 시작되었다.

그 무렵 혜경궁 홍씨는 세자가 옷을 입기 싫어하는 의대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중록]에서 밝혔다.

그것은 물론 세자가 부왕을 만나기 싫어서 생겨난 증세였다.  그 후 세자는 수시로 정신질환이 발작했고, 신이 돌아온 뒤에는 몹시 후회했다. 한데 그때마다 부왕이 엄히 책망하니 두려움에 빠지면서 증세가 더욱 깊어졌다. 그렇듯 안팎으로 고립된 세자는 광증에 걸린 천재들이 그렇듯 갑자기 전혀 다른 모습으로 돌변하면서 난폭한 행동을 일삼았다. 1760년경부터 그는 여러 나인들과 환관들을 죽이고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1761년에는 은전군을 낳은 경빈 박씨를 때려 죽이기에 이른다.  그쯤 되니 생모인 영빈 이씨나 아내 혜경궁 홍씨는 도저히 그를 제어할 수 없었다.

 

 

 

 

 

임오화변의 전개

 

세자의 극심한 병증은 정권을 쥐고 있던 노론 일파에게 천재일우의 기회로 다가왔다.

그들은 정신이상으로 인하여 수시로 난행을 일삼던 세자를 빌미로 소론과 남인 잔당을 완전히 제거하고자 했던 것이다. 더불어 그들은 노쇠한 영조의 후사조차 그들의 입맛에 맞는 인물로 바꾸려 획책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정적들의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세자는 1761년(영조 37년) 4월 2일부터 22일까지 세자는 평안도 지방을 여행하고 돌아왔다.

넉 달 후 영조가 그 사실에 대하여 추궁하자 세자는 며칠 동안 금식하면서 잘못을 빌었다. 그렇게 세자의 상태가 악화되고 있던 1762년(영조 38년) 5월 22일, 노론에서는 특단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나경언이라는 자를 내세워 영조에게 그간 떠돌던 세자의 결점과 비행을 10여 조에 걸쳐 고발했던 것이다. 세자가 그 동안 저지른 비행을 알게 된 영조는 그를 죽임으로써 궁중은 물론 정계의 모든 불화 요소를 제거하로 결심한다. 그리하여 1762년(영조 38년) 윤5월13일,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 임오화변이 일어났던 것이다.

1762년 윤5월 13일, 영조는 드디어 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고, 휘령전 앞 뒤주 속에서 가두었다. 며칠 뒤에는 누군가 뒤주의 빈 틈으로 죽과 물을 넣어주었다는 것을 알고  내관을 시켜 뒤주에 유약을 발라서 통풍을 막았다. 결국 8일 뒤인 윤5월 21일 세자는 뒤주 안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14일에는 세자를 모셨던 환관 박필수, 여승 가선 등이 처형되었다.

 

 

 

 

 

사도 세자

윤5월 21일, 이윽고 세자의 죽음을 확인한 영조는 세자의 위호를 복구하고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7월 23일에는 장례를 치르고, 시신은 양주군 배봉산에 있는 영우원에 안장되었다. 1764년(영조 40년) 봄 경복궁 서쪽 순화방에 사당인 사도묘(思悼廟)를 지었다가 그해 여름 창경궁 홍화문 밖으로 옮겨서 수은묘(垂恩廟)라 했다. 8월 1일에는 세손을 동궁으로 책봉했다. 그로부터 2년 뒤 영조는 세손을 효장세자의 후사로 입적하면서  사도세자를  추숭하지 말라는 갑신처분을 내렸다. 그렇지만 아들 정조는 즉위와 동시에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선언했다. 아울러 장헌세자라는 존호를 리고 수은묘의 이름을 영우원(永祐園)으로, 수은묘는 경모궁(景慕宮)으로 올렸다. 아버지의 죽음에 늘 애통해하던 정조는 훗날 영우원을 수원의 화산으로 옮긴 뒤 현륭원(顯隆園)이라 하고 왕의 능묘에 버금가는 규모로 지었다. 효자였던 아들 정조는 생전에 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하려 했으나 집권 노론대신들의 극심한 반발에 부딛쳐 무산되었다. 이런 정조의 애타는 소망은 고종 때 이루어졌다.1899년(광무 3년), 고종황제는 사도세자를 장종(莊宗)으로 추존했고,1901년에는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높였다. 능호는 율릉(隆陵)이다.

 

 

 

 

 

비극의 실상

 

사도세자의 비극을 몰고온 심리적 갈등은 기실 아버지 영조의 깊은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영조는 일찍이 소론의 거센 공세 속에서 김일경의 사주를 받은 목호룡의 고변으로 인하여 목숨을 잃을 뻔했다가 경종의 강력한 비호에 힘입어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적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재위 내내 소론 일파로부터 경종 독살설의 당사자로 거론되었고, 어머니 숙빈최씨가 천한 무수리였다는 유언비어에 시달렸다.  천신만고 끝에 등극했지만 곧 급진적인 소론 일파인 준소가 남인과 함께 일으킨 이인좌의 난으로 인하여 왕위 계승의 정당성에 큰 타격을 입었다.

후 영조는 뒤늦게 얻은 아들 사도세자를 과거 경종을 모시던 나인들에게 맡김으로써  이미지 쇄신을 노렸지만, 오히려 스스로 자식이 소론의 논리에 동조하지 않았나 하는 의혹을 품게 만들었다. 재위 초기부터 정적들의 완강한 저항과 유언비어에 시달리던 아버지 영조에게 뿌리 내린  트라우마는  어린 사도세자에게 깊은 정신적 상처로 전이되었고, 세월이 가면서 수시로 제기되는 부왕의 의심과  질

으로 인해 치명적인 상황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 이상 다음백과 사도세자 중에서 >

 

 

 

 

 

융릉에서 건릉으로 향한다.

가는 길은 융릉을 앞에서 바라 보았을때 좌측편에 있다.

 

 

 

 

 

 농로?

 

 

 

 

 

농지는 아닌것 같은데?

 

 

 

 

 

 

건릉 가는 길

 

 

 

 

 

          

 

 

 

 

 

 

야트막한 능선을 넘어 작은 다리를 건넌다.

 

 

 

 

 

급수대

 

 

 

 

 

 

 

 

 

 

 

 

 

 

            

 

 

 

 

 

건릉 직전에 이정표가 있다,

 

 

 

 

 

 

          

 

 

 

 

 

 

 

 

 

 

 

 

건릉이다.

정조와 효의황후의 합장릉이다.

 

 

 

 

 

 

         

 

 

 

 

 

          

 

 

 

 

 

           

 

 

 

 

 

 

 

 

 

 

 

 

 

 

 

 

 

 

 

 

 

          

 

 

 

 

 

 

 

 

 

 

 

 

 

 

 

 

 

 

 

융릉이나 건릉 둘다  가까이 접근은 안된다.

 

 

 

 

           

입구로 되돌아 간다.

여전히 비는 내리고 있다.

 

 

 

 

 

융건릉 입구이다.

융릉, 건릉 역사문화관이 있다.

 

 

 

 

 

 

 

 

 

 

 

 

 

 

 

 

 

▣ 라비돌 리조트

 

숙소 라비돌 리조트,

우리가 묵은 곳은 호텔과 별반 차이가 없다.

 

 

 

 

 

농특회 30주년,

 모임은 사모님들에게 기념품 전달부터 시작한다.

             

 

 

 

 

기념품은 방자수저세트와 커피잔 세트이다.

 

 

 

 

 

 

 

 

 

 

 

 

 

 

 

 

 

 

 

 

 

 

 

 

 

 

 

 

 

 

 

 

 

 

 

 

 

 

 

 

 

 

 

 

 

 

 

 

 

 

 

 

 

 

 

 

 

 

 

 

 

 

 

 

 

 

 

 

 

 

 

 

 

 

 

 

 

 

 

 

 

 

 

 

 

 

 

 

 

 

          

 

 

 

 

 

지각생들이다.

진해와 대구에서 왔다.

 

 

 

 

 

홍성

총무님 사회로,

 

 

 

 

 

신바람 나는 농업, 농촌 만들어 보겠다고

원당골에서 반년이 넘는 동안 책속에 파뭍혔고,

85년 10월 1일 농협생활 시작하여

모진풍파 이겨내고 살아온지 30년.

 

검디검던 머리에는 서릿발이 피어나고

팽팽하던 얼굴엔 세월의 흔적 패여있고,

두주불사 주량 줄여 소주3잔에 피그르르

세월의 무게에 짓눌리고 말았구나.

 

 I.M.F 구제금음

다국적 FTA

미국발 모기지 위협등

총체적인 어려움에도 꿋꿋하게 살아남아.

 

매월 단돈 2만원 투자하여

4월 11월 두번만나.

도태만이 안주삼아 소주잔 기울였고,

대한민국 방방곡곡 누비고 다녔는데.

 

눈도 침침 귀도 먹먹

정년퇴임 코앞인데

변치말고 만나고픈 우리들의 굳은 희망

두손모아 합장하며 우뢰함성 질러보세.

 2015년 11월    고죽  허용실

 

 

 

 

 

그동안 바쁘게 살아왔다.

첫 참석으로 건배 제의가 있다.

 

 

 

 

 

멀리 상주에서 오셨다.

성장한 두 아들이 자랑스럽다.

 

 

 

 

 

기념촬영

 

 

 

 

    

한 운율 하시는 심이사.

 

 

 

 

 

연무와 거창북부,

두분 조합장님 열창이다.

 

 

 

 

 

몇년째.

마음고생이 많았구려

 

 

 

 

 

 

 

 

 

 

 

 

 

 

 

 

 

 

          

 

 

 

 

 

 

 

 

 

 

 

 

 

 

 

 

 

 

 

          

 

 

 

 

 

 

 

 

 

 

 

          

 

 

 

 

 

 

          

 

 

 

 

 

 

          

 

 

 

 

 

 

          

 

 

 

 

 

 

          

 

 

 

 

 

 

         

 

 

 

 

 

 

 

 

 

 

 

 

 

 

 

 

 

 

 

 

 

 

 

 

 

▣ 팔도 장

 

 

          

 

 

 

 

 

 

          

 

 

 

 

 

 

용대리 덕장 직영

황태요리 전문점에서 조식이다.

속풀이로 좋다. 찾아도 후회하지 않을 집으로 라비돌 리조트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수원 화성

 

화성(華城)은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와 장안구에 걸쳐 있는 길이 5.4 km의  성곽이다.

1963년 사적 3호로 지정되었으며,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조선 후기 정조때인 1794년 착공하여 1796년에 9월에 완공되었다. 기존에 화강암으로 쌓았던 방식을 버리고 벽돌로 쌓는 축성 공사에는 정약용이 고안한 거중기가 사용되었으며, 한국 성의 구성 요소인 옹성, 성문, 암문, 산대,  체성,  치성, 적대, 포대, 봉수대등을 모두 갖추어 한국 성곽 건축 기술을집대성했다고 평가된다. 다른 지방 읍성들과의 차이점은 정조가 양주에 있던 사도세자의 능인 영우원(永祐園)을 화산(花山: 지금의  화성시 안녕동에 있는 융건릉)으로 옮겨 명칭을 현륭원(顯隆園)으로 고쳤으며 능행을 위한 행궁을 화성안에 건축하였다는 점이다.

 <다음 백과>

 

 

 

 

 

 

 

 

 

 

수원 화성으로 이동하였다.

행궁주차장에 주차후 탐방을 시작한다.

 

 

 

 

 

도심에 가을이 한창이다.

 

 

 

 

 

 

성신사.

 

성신사는 화성을 지켜주는 신을 모시는 사당이다.

행궁 주차장에서 성신사로 오르는 차도를 지난다.

              

 

 

 

 

 

 

 

 

 

 

          

서장대

세계 각국으로의 이정표가  있다.

뉴욕 11,094 km, 남극 14,113km .............

 

 

 

 

 

장대(將臺).

 

성곽  일대를 조망하면서 군사들을 지휘하던 일종의 지휘소이다.

화성에는 서장대와 동장대 두 곳이 있다.

이곳은 서장대로 화성장대(華城將臺)라고도 한다 화성장대 편액은 정조가 직접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노대는 성가운데서 쇠뇌를 쏠수 있도록 높이 지은 시설물이다.

서노대와 동노대 두곳이 있다.

 

 

 

 

 

서장대에서의 시내 조망이다.

 

 

 

 

 

 

 

 

 

 

 

 

서장대에서의 한때

 

 

 

 

 

       

 

 

 

 

 

 

 

부부

 

 

 

 

 

 

 

 

 

 

 

 

 

효원의 종각

효원의 종각은 사도세자에 대한 정조의 효심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 수원시가 1991년 만들었다.

 

 

 

 

 

 

장안문 쪽으로,

 

 

 

 

 

 

 

 

 

 

 

 

 

 

 

 

 

 

 

 

 

 

 

 

 

 

 

 

 

 

 

 

 

 

 

 

 

 

 

 

 

 

 

 

 

 

 

 

 

 

 

 

 

 

 

 

 

 

 

 

 

 

 

 

 

각루(角樓)

 

각루는 성곽 부분 가운데 높은 구릉을 택하여 누각 모양의 건물을 세워, 주위를 감시하고, 가끔은 휴식을 즐길  수 있는 정자처럼 다기능성이 있는 건축물이다.  화성에는 동북각루, 서북각루, 동남각루와 서남각루 등 4개의 각루가 설치되어 있다.

 

 

 

 

 

 

 

 

 

 

 

 

 

 

 

 

 

 

 

 

 

 

 

 

 

 

 

화서문(華西門)은 성의 서문이다.

좌측 뒤로 서북공심돈이 보인다,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

 

돈(墩)은 적이나 주위의 동정을 살피기 위하여 지은 망루와 같은 곳이다. 남한산성에도 설치가 되어 있지만

성제상으로 돈의 내부가 비어 있도록 설계된 것은 화성이 처음이다.

 

 

 

 

 

 

 

 

 

 

 

 

포루(砲樓)

 

성벽밖에 3층으로 지은 벽돌건물로 내부를 공심돈과 같이 비워두어서 그 안에 화포를 숨겼다가 위아래를 한꺼번에  공격을 할 수 있도록 만든 시설물이다.

화성에는 남포루(南砲樓), 동포루(東砲樓), 북동포루(北東砲樓), 북서포루(北西砲樓), 서포루(西砲樓) 등이 있다.

 

 

 

 

 

 

 

 

 

 

 

 

 

 

 

 

 

 

 

 

 

 

 

 

 

 

 

 

 

 

 

 

 

 

 

 

 

 

 

 

 

장안문 앞쪽

 

 

 

 

 

 

 

 

 

 

 

 

 

장안문

 

장안문(長安門)은 화성의 북문이자 정문이다.

보통 성(城)의 남문을 정문으로 삼으나, 화성은 임금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북문인 장안문이 정문이다.  잘 다듬은 화강암으로 쌓은 석축에 홍예문을 냈고 그 위에 정면 5칸 측면2칸의 다포양식으로 이루어진 중층의 문루가 세워져있다. 또한 가운데에 홍예문이 나있는 벽돌로 쌓은 옹성이 있으며,  양옆에 다른 성벽보 다 높이가 약간 높은 두개의 적대를 설치하였다.

장안문의 이름은 중국의 옛 왕조인 전한(前漢), 수(隋), 당(唐)나라의 수도였던 장안(현재의 시안)에서  따온 것으로 이는 당나라 때의 장안성처럼 화성 또한 융성한 도시가 되라는 정조의 뜻이 담겨 있다.

 

 

 

 

 

 

 

 

 

 

 

 

 

 

 

 

 

 

 

 

 

우측 하단 화흥문,

뒤로 동복각루.

 

 

 

 

 

화홍문

 

화홍문(華虹門)은 성의 북수문이다. 화홍문은 화성의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홍수를 대비하여 수원천 북쪽에  세워진 수문이다.

북수문에는 물이 흐를 수 있도록 7개의 홍예문이 있고, 남수문과 달리 북수문 위에는 누각이 있다. 누각은 전면 3칸, 측면 2칸의 누마루 형식으로 하고 초익공(初翼工)의 겹처마이며, 지붕은 5량 팔작지붕의 형태이다. 누각을 설치해서 홍예에서 쏟아지는 장쾌한 물보라와 주변 환경이랑 잘 어우러져서 수원8경의 하나로 '화홍관창(華虹觀漲)'이라고 불릴 만큼 아름다운 경관을 조성해 놓았다. 복수문의 누각은 평상시에는 수문 및 교량으로서, 비상시에는 군사시설로 활용할 수 있도록 총안과 포혈을 갖추어 설계된 실용성이 있고 아름다운 외관이 조화된 화성 성곽의 대표적인 시설물 중 하나이다.

 

 

 

 

 

화홍문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화홍문에서 성곽 탐방을 마치고 화성행궁으로 방향을 돌린다.

 

            

▣ 화성행궁

사적 제478호 화성행궁은 1789년(정조 13년) 수원 신읍치 건설 후 팔달산 동쪽 기슭에 건립 되었다.

수원부 관아와 행궁으로 사용되다가 1794년부터 96년(정조 18년~20년)에 걸쳐 진행된 화성축성 기간에 화성행궁을 확대하여 최종 완성되었다. 효성이 지극하여 부친 장헌세자(사도세자)의 원침인 현륭원(현재의 융릉)을 13차례나 찾았던 정조는 참배 기간 내 화성행궁에서 유숙하였다.

 

 

 

 

 

 

 

 

 

신풍루.

 

신풍루는 화성 행궁의 정문으로 1790 (정조 14)에  누문 6칸을 세우고 진남루 (鎭南樓)라고 하였다.  1795년 정조는 신풍루로 고치라고 명하여 조윤형으로 하여금 다시 편액을 쓰게 하였다.  '신풍'이란 이름은 일찍이  한나라 고조가 '풍 땅은 새로운 또 하나의 고향' 이라고 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정조에게 있어 화성은 고향과 같은 고장이라는 의미로 편액을 걸게 한 것이다. 1795년 을묘 행차시에 신풍루 앞에서는 정조가 친히 참석하여 화성부의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고 굶주린 백성에게는 죽을 끊여 먹이는 진휼 행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화성행궁 관람요금 1,500원/ 어른 1인.

 

어른 1인 기준 수원화성(1,000원), 화성행궁 (1,500원), 수원박물관 (2,000원), 수원화성박물관 (2,000원)

개별로는 합계 6,500원이나  통합권을 구입시 어른 1인당 3,500원이면 된다.

수원화성 박물관은  성내에 있으나 수원박물관은 동수원 IC가까운 곳에 위치한다.

 

 

 

 

 

 

 

 

 

 

 

 

 

 

           

 

 

 

 

 

 

 

 

 

 

 

행궁 안내를 해 주실 해설사님

 

 

 

 

 

 

 

 

 

 

 

 

 

 

 

 

 

 

 

 

두번째 좌익문을 통과한다.

 

좌익문은 중양문 앞에 있는데,  '좌익은 곧 곁에서 돕는다'는 뜻으로 내삼문을 바로 앞에서 도(도)와 행중을 지키는 중삼문(中三門)이다

 

 

 

 

 

 중양문.

중양문은 궁궐 건축의 삼문 설치 형식에 따라 행궁의 정전인 봉수당을 바로 앞에서 가로막아 굳게 지키는 역할을 하는 내삼문(內三門)이다. 1790년(정조 14)에 완성되었으며, 중앙의 정문과 좌우의 우협문, 좌협문으로 이루어져있고 문 좌우로 긴 행각을 두어 출입을 통제 하였다.

1795년 봉수당 진찬례 때 봉수당 앞으로는 정조와 혜경궁을 비롯한 왕실의 종친과 대신들이 자리 하였고, 중양문 밖으로 대문을 활짝 열어 승지와 사관, 각신이 반열을 이루었던 바 있다.

 

 

 

 

 

봉수당

 

 

 

 

 

 

 

           

 

 

 

 

 

일월도

봉수당 내부이다

               

 

 

 

 

 

           

 

 

 

 

 

낙남헌

 

낙남헌은 일제강점기에 화성행궁이 철거될 당시 훼손당하지 않고 남아있는 건축물중 하나다.
낙남헌이란 이름은 후한의 광무제가 낙양으로 도읍을 옮기고 궁궐 이름을 '남궁(南宮)'이라 한 것에서 따온 것으로 1794년(정조 18)에 완공되었다. 1795년(정조 19)을묘원행시에는 각종 행사가 이 곳 낙남헌에서 치러졌다. 정조는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기념하여 군사들의 회식을 이 곳에서 하였으며, 특별과거시험을 치러 문과  5명과 무과 56명을 선발 하였는데 급제자에게 합격증을 내려 주는 행사도 이 곳에서 있었다.또한 정조는 혜경궁의 회갑연을 기념한 양로연을 시행 하였다.

 

 

 

 

 

 

 회령전 운한각

 

화령전(華寧殿)은 사적 제115호로 1801년(순조 원년) 정조대왕의 유지를 받들어 화성행궁 옆에 세운 정조의 영전(影殿)이다.

제사를 지내기 위해 신위를 모신 사당과는 달리 영전은 보통 선왕의 초상화를 모셔놓고 생전에 계실 때와 같이 봉안하는 곳이다.

 

 

 

 

 

운한각 주변에서

 

 

 

 

 

 

 

 

 

 

 

 

 

 

 

 

 

 

 

 

 

 

 

 

 

 

 

되돌아 나와 낙남헌 우측 뒷편으로,

 

 

 

 

 

 

득중정

 

중정은 활을 쏘기 위해 세운 정자로 편액을 정조가 직접 써서 걸었고, 상량문은 홍양호가 짓고 썼다. 정조는 행차시에 매번 활쏘기를 하였는데, 1790년(정조 14)에 새로 만들어진 이 정자에서 활을 4발 쏘아 4발 모두 맞히고는 이를 기념하여 '득중정'이라고 한 것이다.
득중정은 "활을 쏘아 맞으면 제후가 될 수 있고, 맞지 않으면 제후가 될 수 없다 (射中 則得爲諸侯 射不中 則不得爲諸侯)" 라고 한 구절에서 '득'자와 '중'자를 따서 붙인 것이다.

 

 

 

 

  

화령전과 뒷편의 경관이 좋다.

 

 

 

 

 

 

득중정 뒷편인 셈이다.

화성성역 의궤를 벽면에 그려 놓았다.

 

 

 

 

 

수원화성이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된것도,

의궤에 의거 복원되었기 때문이라 한다.

 

 

 

 

 

 

가운데 정조대왕 가마.

정조는 가마에 타지않고 뒷쪽의 다른 위궤에서 무관복장으로 어머니를 모시고 있다.

 

 

 

 

 

 

  

          

 

 

 

 

 

 

          

 

 

 

 

 

유여택

 

유여택은 평상시에 화성유수가 거처하다가 정조가 행차시에 잠시 머무르며 신하를 접견하는 건물이었다.  유여택은 복내당 동쪽 행각과 외정리소 사이에 있다.  유여택이라는 이름은 『시경』 중에서 주나라 천명을 받아 나라를 크게 하고 집을 주었다는 데서 따온 것으로

정조의 입장에서는 화성 유수를 임명하여 내려보내는 곳이라는 의미가 된다.
원래 유여택은 1790년(정조 14)에 건립하고 은약헌이라 하였다가, 1796년(정조 20)에 증축하면서 유여택으로 이름을 바꿔 달았다.
건물은 동향으로 왼쪽에 공신루(供宸樓) 1칸을 덧붙여 휴식 공간을 마련하였다.
1795년 행차시에 정조는 유여택에서 각종 행사에 대한 보고를 받고 하교를 내렸다.

 

 

 

 

뒤주,

4개나 있다.

 

 

 

 

 

행궁을 한바퀴 돌아 중양문 앞으로 나왔다.

 

 

 

 

 

          

장금이

좌익문 앞 뜰에 있다.

 

 

 

 

 

화성 행궁을 둘러보았다.

행궁주차장은 매표소 뒷쪽 가까운 곳에 있다.

 

 

 

 

 

행궁주차장 동쪽편,

점심을 맛있게 먹은 집이다.

화성 박경식 지점장님의 추천집으로 감사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