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주 둘러보기 / 신륵사, 여주 도자기 축제, 목아박물관, 명성황후 생가, 영릉
위도상으로 볼때 여주는 이천과 원주 사이에 있다.
이천 여행은 사전 준비하고 나선것은 아니어서 고속도로 관광안내소에서 여주지역 안내도를 얻어 코스를 정했으나
가는 날이 월요일이어서 제대로 둘러보지 못한 미완의 여행이 되었다.
황사인지 미세먼지인지 자욱한 날, 여주는 높은 빌딩이 적고 나무가 많아 전원도시 같은 느낌이다.
급하게 서울 갔다오는 날 잠시 시간을 내어 둘러본 여주이다.
▷ 가는 길,
▷ 탐방코스 ( 2017. 5. 8 )
신륵사 - 여주 도자기 축제 - 목아박물관 - 명성왕후 생가 - 영릉(세종대왕 영릉, 효종 영릉)
(서여주 IC로 진입하면 영릉 → 신륵사 → 목아박물관 → 명성황후 생가 순으로 둘러보는 것이 거리 상 절약 될 것 같다.
위 코스외 고달사지, 파시성을 추가하는 것도 고려해 볼만 하다. 이 두곳은 이천시내 북쪽(북서쪽) 이포보에서 가깝다.)
▷ 탐방후에
▣ 신륵사
신륵사와 신륵사관광지는 서로 인접하고 있다.
따라서 신륵사 관광지 주차장에 주차후 관광지(현 도자기축제장?)와 신륵사를 둘러보아도 되고 신륵사 주차장에
주차후 같이 둘러보아도 된다.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 대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고, 고려 우왕 2년 (1376년)에 나옹선사가 입적하면서
유명한 절이 되었다 한다. 절의 위치가 남한강변의 수려한 자연 경관과 어우러져 접근하기 쉽다.
△ 현대내비로 신륵사를 검색하니 신륵사 주차장으로 안내한다.
신륵사 주차장은 넓은 편은 아니며, 신륵사와 신륵사 관광지 사이에 있다.
신륵사관광지에 주차장이 별도로 있어 이곳을 이용하는 분들이 더 많은 것 같다.
일주문을 지난다.
봉미산 신륵사로 표시되어 있다.
신륵사 뒷산은 야트막하여 산다운 느낌은 그의 없는 구릉같은 산이다.
입장료는 어른 2,200원, 청소년 1,700원, 어린이 1,000원, 단체 할인 있다.
△ 불이문으로 간다.
△ 불이문 앞쪽에 불교용품 매점이 있다.
△ 불이문을 지나,
△ 강변에 위치한 절이라 산속의 절과는 숲길에서의 느낌이 다른다.
△ 신륵사로 가는 중간의 정자.
한적하다.
△ 절 앞쪽에 이정표가 있다,
절의 위치가 평지고 크지 않은 절이라
이곳에서 둘러보는 방향을 감 잡을수 있다.
△ 앞쪽 세심정,
물맛은 썩 좋다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 범종각을 둘러보고,
△ 관음전 앞을 지난다.
△ 수령 약 600년의 향나무가 있다.
△ 좌측으로 명부전이 으슥하고,
△ 이웃하여 조그만 건물의 봉송각이 있다.
봉송각은 사십구재 또는 기타의 재를 모신 후 떠나가는 영가들이 극락세계에 다시 태어나도록
마지막 전송하는 전각이다.
△ 향나무 앞에서 기념을 남긴다.
△ 향나무 뒷편, 조사당(祖師堂, 보물 제180호)이 있다.
조사당은 신륵사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물로 지공(指空), 나옹(懶翁), 무학(無學) 3화상이 덕을 기리고
법력을 숭모하기 위해 영정을 모셔 놓은 곳이다. 세 사람은 서로간에 관계가 돈독했던 스승과 제자로 고려말
기울어 가는 불교계에 한가닥 빛이 되었던 스님들이다.
조사당 뒷편으로 오르면 보제존자 나옹스님의 부도(종 모양을 닮아 보제존자 석종으로 불린다. 보물제 228호)
가 모셔져 있으며, 보제존자 석종비(보물제229호), 보제존자석종앞 석등(보물제231호)가 있으나, 그냥 부도려
니 하고 가지 않았다. 지나고 나서보니 조금 아쉽다.
△ 극락보전으로 왔다.
△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보물 제1791호)
주존인 불상을 좌상으로 하고 협시상을 입상으로 한 구성은 고려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전통이다.
불상과 사살상들은 모두 상호와 상체가 긴 편인데, 특히 불상의 육계는 유난히 길게 조성되어 이색적인 느낌마져 들게한다.
불상의큼직한 나발과 단순하게 처리한 법의 자락은 조선초기부터 내려오던 특징이다.
△ 극락보전에서 내려다 본 신륵사 다층석탑. (보물 제225호)
대부분의 석탑이 화강암으로 만들어진데 비하여 특이하게도 흰색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높이는 3m에 이른다.
이 탑은 기단에서 몸돌에 이루기까지 각각 하나의 돌로 조립되었다. 4각형의 지대석 위에 2층 기단을 놓았다. 하층
기단의 하대석에는 연꽃문양이, 중대석의 각 면에는 파도 문양이, 모서리에는 꽃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상층 기단
각 면에는 용과 구름 문양이 조각되어 있다. 탑 몸돌에는 각 층마다 모서리 기둥[우주:隅柱]이 새겨져 있으며 각 층
의 줄어드는 비율이 완만하다. 지붕돌의 추녀는 수평으로 흐르다가 전각에 이르러 반전을 보인다, 팔층 지붕돌 위에
작은 탑몸돌이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 더 많은 층수를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륵사가 세워진 시기는 신라시대까
지 올라간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현존하는 유물이 모두 고려 중엽 이후의 것이고 성종3년(1472년)에 여러 건물이 다
시 건립된 것으로 보아 이 석탑도 같은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 극락보전
△ 앞쪽 구룡정,
△ 극락보전 방향으론 봉미산 신륵사 편액을 달고 있고.
△ 앞쪽엔 구룡루 현판을 달고 있다.
△ 김공 송덕비 뒷쪽의 전탑으로 간다.
△ 주변 은행나무,
△ 전탑은 대체로 귀한편이라 분위기가 다르다.
△ 전탑 윗쪽에
신륵사 대장각기비 (神勒寺 大藏閣記碑, 보물 제 230호)가 있다.
△ 이 비는 신륵사 대장각을 세운 내력을 새긴 것이다.
목은 이색이 공민왕과 부모의 명복을 빌고자 보제존자 나옹의 제자들과 함께 발원하여 대장경을 인쇄하고 이를
보관하기 위해 이곳에 2층의 대장각을 지었다.
비문은 예문관제학인 이승인이 짓고 글씨는 진현관제학인 권주가 썼다. 뒷면에는 대장경 인쇄와 대장각 건립에
참여한 승려와 신도들의 명단이 적혀 있다. 비는 연꽃무늬를 새긴 대석 위에 비몸을 세우고 양 옆에 기둥을 댄
다음 그 위에 지붕 모양의 개석을 올렸다. 이러한 형식은 고려말기에 나타난 것으로 조선시대 초기의 비 (碑)형
식에 영향을 주었다.
△ 대장각기비 뒷편으로 올라본다.
소나무 숲이 좋다.
△ 꽃이 놓여있는 것으로 보아 수목장지 같은 느낌도 든다.
△ 대장각 기비로 되돌아 내려왔다.
△ 여주 신륵사 다층전탑 (보물 제 226호)
이 탑은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고려시대의 유일한 전탑으로 높이는 9.4m이다. 이 탑의 기단부는 화강암을 사용하여
7단의 층단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탑신부는 여러단의 벽돌을 쌓아서 만들었는데 몸돌에 비해 지붕들은 매우 간략
하게 처리되어 있다. 탑을 구성하고 있는 벽돌에는 이중의 반원 사이에 연주문과 당초문을 조각하엿으나 배치가 일
정하지 못하며, 신라시대의 전탑이 거의 간격을 두지 않고 벽돌을 쌓는데 비해 이 전탑은 벽돌 시이를 띄워 그 사이
에 면토를 발랐다. 상륜부는 전으로 만든 노반 위에 화강암으로 만든 복발, 보개, 보주 등이 얹혀있다. 이 탑의 건립
연대는 확실히 알수 없으나 벽돌의 문양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로 보는 견해가 많은데, 탑 북쪽에 있는 수리비 내용에
의해 조선 영조 2년(1726)에 고쳐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 전탑 아랫쪽 강변에 강월헌(江月軒)이 있다.
△ 강월헌 주변에서 바라본 남한강.
△ 건너편 유람선 선착장인가 보다.
△ 강월헌을 뒤로하고 신륵사 탐방을 마친다.
▣ 신륵사 관광단지 / 여주 도자기 축제
△ 신륵사 주차장 앞쪽이 신륵사 관광단지인 셈이다.
이곳에서 여주 도자기 축제가 있다.
△ 축제장 가는 길,
△ 한지체험외
주변 많은 도자기를 감상할 수 있고, 전시 판매하는 곳을 둘러본다.
△ 반달미술관
세계 각국의 유명한 도자예술 작품과 함께 고려청자와 조선백자의 맥을 잇는 여주의 고풍스런 멋이 담긴 전통 도자기들이
다양하게 전시되어 있다.
반달미술관은 지난 10년간 경기세계도자비엔날레가 개최되었던 도자 전문미술관으로써 초승달, 상현달, 하현달, 보름달
홀 등 4개의 전시홀에서 예술작품으로써 생활도자의 무한 영역을 보여주는 전시가 상설 개최되고 있다.
반달미술관 바로가기 : https://www.kocef.org/02museum/05.asp
△ 반달미술관 입장료 3,000원 어른1인.
△ 야외 공연장
△ 도자기 전시 판매관,
△ 특별전시관,
대형의 도자기외 다양한 작품을 볼 수 있다.
△ 주변을 둘러보고,
△ 시간이 촉박하여 대충대충 한바퀴 둘러보고 주차장으로 되돌아 왔다.
▣ 목아박물관
△ 목아 박물관
무형문화재 제108호 (목조각장)인 목아 박찬수 선생이 수집한 6,000여점의 불교 관계 유물 및 조각품을 전시한 곳으로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된 전시관에는 불화, 불상 등의 유물과 함께 동자상을 비록한 불교관계 목공예 작품들이 전시
되어 있고, 야외 조각공원에는 미륵 삼존 대불, 비로자나불, 삼층 석탑, 백의 관음, 자모 관음상 등이 조화롭게 자리잡고
있다. 소장품 중에는보물 3점이 있으며 그 밖에도 불교 사찰에서 전해 오던 많은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어 매년 기획전과
특별전을 개최하고 있다.
△ 입장료 5,000원
목아박물관 바로가기 : http://www.moka.or.kr/
△ 오늘은 월요일.
휴관이다.
△ 문틈으로 쬐끔 엿본다.
△ 밖에서 목아박물관 위치만 확인하고.
명성황후 생가로 향한다.
▣ 명성황후 생가.
조선 제26대 고종 황제의 비로 개화기에 뛰어난 외교력으로 자주성을 지키면서 개방과 개혁을 추진하시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인에 의해 시해당하여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쳤던 명성황후가 출생하여 8세까지 살던 집이다.
1687년(숙종 13년) 왕의 장인 민유중의 묘막(墓幕) 으로 건립되었는데 당시 건물로서 남아있는 것은 안채 뿐이었
으나, 1995년에 행랑채와 사랑채, 별당채 등이 복원됨으로써 면모가 일신되었으며 ,명성 황후가 어렸을 때 공부했
다는 방이 있었던 자리에 탄생을 기념해 세운 "명성황후 탄강구리(明成皇后 誕降舊里)" <명성황후가 태어나신 옛
마을>이라 새겨진 비가 세워져 있다.
△ 이런,
날짜를 잘 못잡았나 보다.
입장료 1,000원
바로가기 http://www.empressmyeongseong.kr/
△ 담장 너머로 본다.
△ 외부에서 담너머로 명성왕후 생가를 둘러보고 영릉으로 향한다.
▣ 영릉 / 세종대왕릉, 효종대왕릉
현대 내비에서 세종대왕영릉 또는 효종대왕영릉으로는 검색하였더니 결과가 없다 한다.
여주시에서 발행하는 관광안내도에 세종대왕영릉 등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좀 난감하다. 인근의 무슨 서원을
검색하여 이곳에 왔다. 인근에서 영릉으로 검색된다.
생가에서 거리는 12-3km정도,
△ 세종대왕 영릉 주차장이다.
주차장이 아주 넓다.
세종대왕릉
조선조 제4대 세종대왕(재위 1418~1450)과 소헌왕후 심씨의 합장릉이다.
대왕은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군으로 한글을 창제하고 측우기, 해시계등 과학기구를 발명하였으며 아악을 정리하고
북방의 야인을 정벌하여 국토를 확장하였으며 대마도를 정벌하여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학문을 충정하여 학자를 양성
하고 활자를 개량하여 용비어천가, 농사직설등 수많은 책을 발간하였다.
왕릉은 조선왕조의 능제를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능의 하나로서 합장릉임을 알 수 있는 두 개의 혼유석이 있고 봉분
둘레에 돌난간을 둘렀으며 12개의 석주에는 12간지를 문자로 새겨놓았다.
능의 정중앙에 팔각의 장명등이 있으며 주위에 석호· 석양·석마· 문인석· 무인석·망주석을 배치했고 능뒤에는 나즈막한
곡담을 둘렀다. 능밑에는 제사를 지내는 정자각과 제사때 음식을 준비하던 수라간, 능을 지키는 관리가 살던 수복방이
있고 정자각 동편에 능비와 비을 세웠다. 정문을 들어서면 좌측에 해시계 자격루, 관천대, 측우기,혼천의 등 각종 과학
기구를 복원해 놓았으며 세종전에는 대왕의 입적과 관련되어 여러 가지 유물과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효종대왕릉
조선 제17대 효종(재위1649∼1659)과 왕비 인선 왕후 장씨 가 모셔진 쌍릉이다. 효종릉 역시 능역과 푸른 소나무들
이 주변에 울창하여 그윽함을 풍기지만 세종릉과 바로 붙어 있어 찾는이가 적어 사방이 조용하고 호젓하다.
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들로 1619년(광해군11) 5월 22일 태어나 1626년(인조4) 봉림대군에 봉해지고 1636년 (인조
14) 병자호란으로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인질로 8년간이나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가 풀려 나와서 1646년 (인조
23) 소현 세자가 변사하자 뒤를 이어 왕세자에 책봉되고 1649년 (인조27) 5월13일 창덕궁 인정문에서 즉위 하였다.
효종은 즉위 후 대동법을 실시하고 상평통보를 주조하여 화폐를 널리 보급하였다. 조선 왕조가 당한 굴욕을 씻고자
청나라 정벌을 계획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659년 5월 4일 재위10년만에 창덕궁 대조 전에서 승하 하였다.
△ 이곳 영릉 주차장 주변에 별다른 음식점들은 보이지 않는다.
유일하게 휴게소가 있으나 이 또한 금일 휴업이다.
△ 영릉(세종대왕) 매표소,
입장료는 500원, 어른 1인.
이곳도 월요일은 휴관이다.
△ 중앙 하단의 P(주차장)가 현 위치이다.
이곳 주차장 출발하여 세종대왕 영릉을 둘러보고 효종대왕 영릉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도보로 이동하여
참배한 후 다시 이곳 주차장으로 되돌아 오면 되겠다.
△ 주차장도,
영릉앞 공간도 넓다.
△ 이곳 영릉(세종대왕) 주차장에서 효종왕릉으로 가는 길,
△ 세종대왕 영릉 입구,
월요일 휴관이라 틈새로 본다.
△ 주차장으로 되돌아 간다.
△ 여주일정을 마무리 한다.
제대로 둘러보지 못해 아쉽다.
참고로 여강길, 고달사, 파사성도 둘러볼만 할것 같아 같이 올려 본다.
여강길
여주터미널에서 출발해 ‘달을 맞는 누각'라는 영월루(迎月樓)를 시작으로 남한강(여강)을 볼 수 있는 구간이다.
제방을 쌓기 전 모래에서 은빛이 난다고 해서 은모래 금모래라고 부르는 강변유원지를 지난다. 남한강과 연양천과
합수지점에서 복원된 황포돛배를 탈 수 있다. 수운이 발달했던 시대에 정류장인 나루터를 지나는데 이호, 부라우,
우만리 나루터를 만난다. 치수를 위해 쌓은 제방, 배수문, 취수장 등을 볼 수 있으며 6.25 전쟁에 참전하였다가 전
사한 무어장군을 기념하여 다리이름을 정한 무어장군교(MOORE 將軍橋) 표석도 있다. 강과 바위 어우러진 부라우
나루터는 절경이다.
우만리나루터에는 300년가량 된 느티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과거 나루는 바위나 큰 나무를 중심으로 삼아
배를 운행했는데 느티나무가 이 역할을 했다. 흔암리는 ‘흔바우'라고도 불렀는데 바위가 희어서 이런 지명을 갖게
되었다. 이 마을에는 청동기시대에 농사를 지으며 살던 주거지로 탄화미가 발견된 선사유적지가 있다. 이 마을에서
오래된 풍속으로 ‘액막이'인 쌍용거줄다리기가 있다.
과거시험을 보기위해 넘었던 아홉사리 과거 길을 지난다. 과거엔 도리마을을 향해 난 도로가 단 하나 뿐이어서 들어
온 길을 되돌아 나가야 했으므로 “되래” 혹은 “도리”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도리마을이 나온다.
고달사
신라 경덕왕 23년(764)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며, 고달원이라고도 하는데 신라 이래의 유명한 삼원(三院) 즉 도봉원
(道峰院), 희양원(曦陽院), 고달원(高達院)중의 하나로 고려시대에는 국가가 관장하는 대찰이었으므로 왕실의 비호
를 받았던 곳이다. 현재 이곳에는 국보 제4호인 고달 사지부도와 보물 제6·7·8호가 있으며, 이들 석조유물들은 하나
같이 넘치는 힘과 호방한 기상이 분출하는 가운데 화려하고 장엄한 기운을 간직하고 있다.
창건 당시의 사찰은 광대하여 지금의 상교리 일대가 전부 사역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절 부근의 큰 마을이 형성되
었음을 짐작케 한다. 지금 광활한 사역에는 유물만 남아 있다.
파사성
정상을 중심으로 능선을 따라 축성한 파사성은 성벽 등 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으며, 둘레는 약 943m이며 성벽 중
최고 높은 곳은 6.25m나 되나 낮은 곳은 1.4m되는 곳도 있다. 천서리를 면한 동문지 (東門址), 금사면 이포리를
면한 남문지(南門址)에는 문앵(門櫻)을 세웠던 고주형 초석 2기와 평주 초석이 남았고 동문지에는 옹성문지(甕城
門地)가 남아 있다. 한강에 연하여 있어 성 일부는 강언덕에 돌출된 자리를 잡아 남한강의 상하류를 한눈에 관찰
할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삼국시대에 축성되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선조 25년(1592년) 에 임진란이 일어났을 때 유성룡의 발의에
따라 승군총익인 의암(義巖)이 승군을 동원하여 쌓은 둘레 1,100보의 성첩을 중수한 기록이 있다
.
'국내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립공원 종복원기술원 (0) | 2017.05.21 |
---|---|
고창 선운사, 영광 법성포 백제불교최초 도래지 (0) | 2017.05.19 |
부산 공원탐방 / 재한 UN기념 공원, 송도해수욕장, 민주공원 (0) | 2017.04.30 |
상주 경천대, 경천섬, 도남서원 (0) | 2017.04.10 |
김천 청암사 둘러보기 (0) | 2017.03.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