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지역의 산

완도 보길도 기행 2 / 중리해수욕장, 글씐바위, 통리해수욕장, 예송리 해수욕장, 부용동

정헌의 티스토리 2009. 11. 10. 00:51

  완도 보길도 / 중리해수욕장, 글씐바위, 통리해수욕장, 예송리 해수욕장, 부용동

 

 춘사(春詞)
압개예 안개 것고 뒫뫼희 해 비췬다 

배떠라 배떠라 

밤믈은 거의 디고 낟믈이 미러온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강촌(江村) 온갓 고지 먼 비치 더옥 됴타 

 

날이 덥도다 믈 우희 고기 떳다                     

닫드러라 닫드러라 

갈며기 둘식세식 오락가락 하느고야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낫대는 쥐여잇다 탁쥬ㅅ병(濁 甁) 시럿나냐 

 

동풍(東風)이 건듣 부니 믉결이 고이 닌다  

돋다라라 돋다라라 

동호(東胡)를 도라보며 셔호(西湖)로 가쟈스라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압뫼히 디나가고 뒷뫼히 나아온다 

 

우는 거시 벅구기가 프른 거시 버들숩가 

이어라 이어라 

어촌(漁村) 두어 집이 냇속의 나락들락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말가한 기픈 소희 온갇 고기 뒤노나다 

 

하사(夏詞)                                    

구즌 비 머저가고 시낻물이 맑아 온다 

배떠라 배떠라

낫대를 두러 메니 기픈 흥(興)을 금(禁) 못 할되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연강덥쟝(沿江  )은 뉘라셔 그려낸고 

 

년닙희 밥 싸두고 반찬으란 쟝만마라 

닫드러라 닫드러라

청약립(靑蒻笠)은 써잇노라 녹사의(綠蓑依) 가져오냐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무심(無心)한 백구(白駒)는 내 좃는가 제 좃는가 

 

마람 닙희 바람나니 봉창( 窓)이 서늘코야

돋다다라 돋다다라

녀름바람 뎡할소냐 가는 대로 배시켜라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븍포 남강(北浦南江) 이 어디 아니 됴흘러니 

      

믉결이 흐리거든 발을 싯다 엇더하리 

이어라 이어라 

오강(吳江)의 가쟈하니 천년노도(千年怒濤) 슬플로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초강(楚江)의 가쟈 하니 어복튱혼(漁腹 混) 낟글셰라 

 

추사(秋詞)  

물외(物外)예 조흔 일이 어부 생애(漁夫生涯) 아니러냐
배떠라 배떠라
어옹(漁翁)을 욷디 마라 그림마다 그렷더라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사시흥(四時興)이 한가지나 츄강(秋江)이 읃듬이라                                                         

슈국(水國)의 가을이 드니 고기마다 살져 읻다
닫드러라 닫드러라
만경딩파(萬頃 波)의 슬카지 용여(容與)하쟈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인간(人間)을 도랴보니 머도록 더옥 됴타 

 

백운(白雲)이 니러나고 나모 긋티 흐느긴다
돋다라라 돋다라라
밀믈의 셔호(西湖)ㅣ 오 혈믈의 동호(洞湖)가쟈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백빈홍료(白 紅蓼)는 곳마다 경(景)이로다 

 

그러기 떳는 박싀 못 보던 뫼 뵈느고야
 이어라 이어라
 낙시질도 하려니와 취(趣)한 거시 이 흥(興)이라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셕양(夕陽)이 바애니 쳔산(天山)이 금슈(金繡)ㅣ로다                                                                                              

 

동사(冬飼) 

구룸 거둔 후의 핻빋치 두텁거다
배떠라 배떠라
텬디폐색(天地閉塞) 호대 바다흔 의구(依舊)하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가업슨 믉결이 깁편 닷 하여잇다 

 

주대 다사리고 뱃밥을 박앋나냐
닫드러라 닫드러라
쇼샹(瀟湘) 동뎡(洞 )은 그믈이 언다 하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이때예 어됴(漁 )하기 이만한 듸 업도다 

 

여튼 갣 고기들히 먼 소해 다 갇나니
돋다라라 돋다라라
져근덛 날 됴흔 제 바탕의 나가보쟈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밋기 곧다오면 굴근 고기 믄다 한다                                                                                

간밤의 눈갠 후(後)에 경물(景物)이 달랃고야
이어라 이어라
압희는 만경유리(萬頃琉璃) 뒤희는 천텹옥산(天疊玉山)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션계(仙界)ㄴ가 불계(佛界)ㄴ가 인간(人間)이 아니로다 

 

  고산유고(孤山遺稿)

 

작자가 65세 되던 해인 1651년(효종 2) 가을 벼슬을 버리고 보길도의 부용동에 들어가 한적한 나날을 보내면서 지은 노래이다.

봄 노래(春詞)·여름 노래(夏詞)·가을 노래(秋詞)·겨울 노래(冬詞)로 나뉘어 각각 10수씩 모두 40수로 되었다.

고려 때부터 전하던 어부가 (漁父歌)를 이현보(李賢輔)가 9장으로 고쳐 지었고, 다시 윤선도가 시조의 형식에

여음만 넣어 완성한 것이다.

이현보의 어부사(漁父詞)에서 시상(詩想)을 얻었다 하나, 그 한시구(漢詩句)의 어의(語意)나 어음(語音)에 상응하는 우리말로 전혀 새로운 자신의 언어를 능란하게 구사하여 속계를 벗어나 물외(物外)에 서서 자연에 합치한 어부의 생활을 아름답게 나타내었다.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 가는 길  

완도 화흥포항 -   노화도 동천항 -  보길대교

 

 

          

▷ 여행 코스             

리해수욕장 - 글씐바위 - 통리 해수욕장 - 예송리 해수욕장 - 격자봉(보길도 격자봉 / 전남의 산) - 세연정   ( 2008.  8. 16 )

 

 

▷ 여행 안내도 

 

 

    

 

▷ 여행 후에    

 

 

중리해수욕장

 

해안에 소나무 숲이 있다.

이곳에서 야영으로 하룻밤을 보냈다.

한밤중 바람과 소나기로 인해 편하지는 못했다.

 

 

  

 

  

 

아침. 보길도 동쪽 끝 해안,              

우암선생의 글씐바위로 향한다.               

글씐바위는 주차장에서 도보로 10분여? 거리에 있다.

 

  

 

 

 

 

송시열 글쓴바위는 보길도의 선백도마을 앞 바닷가의 암벽을 말한다.

 

 

 

  

 

 

 

 

 

  

 

 

 

글씐바위,

 

 

 

  

 

 

주변 풍경이다.

 

 

 

  

 

 

글씐바위 앞,

글자의 형체는 쉬이 알아보기 어렵다.

 

 

 

 

  

 

이곳은 선조~숙종조의 대유학자인 우암이 왕세자 책봉문제로 관직이 삭탈되고 제주 유배길에 올라 경치가 좋은 이곳에서 잠시 쉬며 임금에 대한 서움함과 그리움을 시로 읆어 바위에 새겨놓은 것이다.
『여든세살 늙은 몸이 만경창파를 해치며 바다를 가는 구나......』자신의 외로운 처지를 시로 표현하여 바위에
 새겨놓았다. 이후 우암의 후학인 임관주라는 사람이 1707년 같은 바닷길로 유배를 가다 이곳에 들러 『동국의 』 라는 오언 절구를 남겨 오늘에 전하고 있다. 
   

※ 八十三歲翁(팔십삼세옹)   83세 늙은 이몸이
蒼波萬里中(창파만리중)   거칠고 먼 바닷길을 가노라
一言胡大罪(일언호대죄)   한마디 말이 어째 큰 죄가 되어
三黜亦云窮(삼출역운궁)   3번이나 쫓겨가니 신세가 궁하구나
北極空瞻日(북극공첨일)   북녘 하늘 해를 바라보며
南溟但信風(남명단신풍)   남쪽바다 믿고 가느니 바람뿐이네
貂裘舊恩在(초구구은재)   초구에 옛 효종의 은혜 서려 있어
感激泣孤衷(감격읍고충)   감격한 외로운 속마음 눈물 지우네

 

 

  

 

 

 

 

 

 

 

 

 

 

 

 

  

 

 

 

 

 

 

 

 

 

 

 

 

 

 

 

 

 

 

 

 

 

 

 

  

 

 

 

통리해수욕장이다.

사진상 해욕장이 끝나는 지점에서 좌측으로 예송리 해수욕장, 우측으로 보길 대교 방향이다.

 

 

 

  

 

 

해수욕장 주변 잎넓은 활엽수 군락이 있다.

바닥은 평탄한 편은 아니며 군데 군데 야영하는 분들이 보인다.

 

  

 

 

 

 

넓기는 하나 그렇게 운치있는 해수욕장은 아니다.

 

  

 

 

 

 

중리해수욕장을 지나.

예송리로 간다,

 

 

 

 

  

 

예송리로 넘어가는 고개에 전망대가 있다.

이곳에서 바라본 예송리 원경이다.

 

 

  

 

 

 

앞쪽 섬과 어울려 느낌이 좋다.

 

  

 

 

 

 

 

         

 

  

 

 

 

 

 

 

  

 

 

 

 

 

예송리 해수욕장,

몽돌 해수욕장이다.

  

 

 

 

 

 

 

 

 

 

  

 

 

 

 

 

 

  

 

 

 

 

 

 

 

 

 

 

 

 

 

 

 

 

 

 

 

 

 

 

 

  

 

 

 

 

예송리 몽돌해수욕장을 둘러보았다.

해수욕장 주변 숲은 통행할 수 없으며 주위 음식점과 민박집들이 있다.

    

  

 

 

 

 

보길도의 동쪽 해안을 둘러보았다.

 

송시열선생 글씐바위, 중리해수욕장, 예송리해수욕장을 둘러보고 부용동으로 향한다,

부용동에서 격자봉 산행후 세연정을 둘러본다. 격자봉 산행은 별도로 전남의 산, 보길도 격자봉에 기록한다,

일정을 맞추다 보니 동천석실은 빠졌다.

  

 

 

 

 

 

세연정,

 

조선 인조 당시 해남에 살고있던 고산 윤선도가 보길도에 정착하게 된 것은 병자호란과 당쟁의 소용돌이를 피해 세상과 은거를 위해 제주도로 향하던 중 풍파로 잠시 귀착한 섬 보길도를 발견한다.

주변 경관이 좋아 이곳을 부용동이라 이름짓고 세연정, 무민당, 곡수당을 비롯하여 바위 등 경승에는 대의 이름을 붙여 정자와 대가 25개에 이른다.

 

  

 

 

 

 

지금의 세연정은 1993년 복원한 것으로 

전면 3칸, 측면 3칸의 누각형 팔작기와 지붕으로 중앙에 한칸 넓이의 온돌방이 마련되어 있고, 사방에는 마루를 놓았다, 정자 안에는 동하각을 비롯한 여러개의 편액이 걸려있다,

              

 

  

 

 

 

윤선도는 (1587~1671)눈 정철, 박인로와 함게 조선시대 3대 가인(가인)중의 한 사람이다,

18세에 진사 초시에 합격하고, 향시와 진사시에 연이어 합격했다, 광해군 8년(1616)에 성균관 유생으로서 이이첨, 박승지, 유희분 등 당시 당시 집권세력의 죄상을 규탄하는 소를 올림으로써 함경도로 유배되는 등 이후 정치적으로 평탄치 못했다, 인조반정 후 의금부도사로 제수되었으나 3개월 만에 사직하고 다시 귀향했다가 인조 6년 (1628)에 다시 세상에 나아가 별시문과 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스승이 되었다,

 

 

 

 

 

 

윤선도가 보길도에 들어와 살기 시작한 때는 인조 15년(1637)으로 그의 나이 51세였다,

처음 보길도에 들어와 낙서재를 짓고 이곳을 거쳐 삼아 지내다가 85세로 세상을 떠날 때 까지 일곱차례에 걸쳐 육지를 다녀가며 13년동안 머물렀다,

 

 

 

 

 

 

그는 조상이 물려준 막대한 재산으로 낙서대, 무민당, 취적헌 등의 거쳐와 대규모 정원을 조성했다,

또한 세연정을 비롯한 세연지, 회수담, 계담 등의 자연 또는 인공 연못과 동대, 서대 등의 연희무대를 조성하는 등 일반적인 은일처사와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원근의 자연 지형지물에 옥소대(옥피리 부는 곳), 혁희대(궁궐을 연모하는 마음이 드러남) 등의 명칭을 부여하여 자연을 인문학적으로 탈바꿈시킴으로써 부용동 정원의 범위를 확대했다.       

  

 

 

 

 

 

세연정은 부용동 정원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어서 사방의 풍광이 모두 이곳으로 집중된다,

정자 동편에는 일명 굴뚝다리라고 불리는 판석보에 의해 같힌 격자봉의 계류가 제담을 이루고 있다,

바위들은 원래 그 자리에 있다가 물이 들어차면서 잠긴 것으로 크고 괴기스럽거나 눈에 띄게 잘생겼다,          

 

 

 

 

 

 

사투암 (射鬪岩)

 

 

 

 

 

 

 

 

 

 

 

 

 

 

 

정자 서편에는 동백꽃과 영산홍이 아름다운 방지가 있는데 연못 가운데 둥근 섬이 있고, 그 옆에 표면이 반반하고 네모난 바위가 물에 잠긴 듯 떠 있다,

북쪽을 행해 돌아 앉아보면 오른쪽에 동대, 왼쪽에 서대가 보인다, 둘다 경물로 조성된 것은 아니고, 연희 무대와 같은 시설물이다,

 

 

  

 

 

 

윤선도의 5대손인 윤위가 남긴 보길도지를 보면 부용동에서의 윤선도의 생활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한다,

그는 아침식사 뒤에는 네 바퀴 수레에 풍악을 대동하여 곡수에서 놀기도 하고, 동천석실에 오르기도 했다. 날씨가 좋으면 반드시 세연정에 들렀는데 이때 자제들이 시립하고 있는 가운데 기희(妓姬)들이 그를 모셨다. 때로는 연못에 작은 배를 띄우고 아이들로 하여금 자신이 지은 가사를 노래하게 하기도 했다,  정자 위에서는 관현악을 연주하고,  동.서대에서는 여럿이 춤을 추게 하였으며  때로는 옥소암에서 피리를 불고 춤을 추게 하기도 했다, 해가 지면 촛불을 밝히고 밤놀이를 했는데 이런 일과는 그가 아프거나 걱정할 일이 없는 이상 거른적이 없었다한다,

 

 

  

 

 

 

세연정은 자연 감상의 장소이기도 하면서 연회장 겸 연회 관람석 역할을 한 정자였다,

드넓은 정원속에서 무도암, 유도암을 마련해 놓고 가무와 시를 즐긴다는 것은 보통 호사가 아니다, 정원의 경물들은 자연과의 조화를 크게 해치지는 않으나 그에 붙여진 이름은 세속을 초월한 은일자의 고아한 정신세계가  아니라 아직도 식지않은 출세의 욕망을 느끼게 한다, 이것은 윤선도가 호남의 세도가 집안에서 태어나 성장했고, 평생을 경제적으로 풍족하게 살아왔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 이상 세연정 부분은 허균님의 누와 정에서 가져왔다>     

  

 

 

 

 

 

뒷편의 바위

 

약암(惑躍岩)

세연지 계담(溪潭)에 있는 칠암(七岩)중의 하나 이다.

이 바위는 역경(易經)의 건(乾)에 나오는 혹약제연(惑躍在淵)이란 효사(爻辭)에서 따온 말로  "뛸듯 하면서 아직 뛰지 않고 못에 있다"는 뜻이다. 즉 혹약암은 마치 힘차게 뛰어갈것 같은 큰 황소의 모습을 닮은 바위를 말한다.

 

  

 

 

 

 

 

 

 

 

 

 

 

 

 

 

  

 

 

 

 

 

 

 

 

 

 

 

 

 

 

 

  

 

 

 

 

 

 

  

 

 

 

 

 

 

  

 

 

비홍교 (비홍교)

보길도지에는 세연정이 못의 중앙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정자 서쪽, 제방 동쪽 겨우 한 칸쯤의 넓이에 물이 고여 있으며, 중앙에는 거북이가 엎드려 있는 형상의 암석이 있다. 거북이 등에 다리를 놓아 누(樓)에 오른다고 기록하고 있어 이 다리를 비홍교라 불렀다.  지금은 그 자리에 잡석을 쌓아 호안과 방단(方壇)이 연결되어 있어 흔적을 찾기 어렵다.

 

  

 

 

 

 

 

 

 

 

 

 

 

 

 

 

 

 

  

 

 

 

세연정 주변 경관이 깨끗하고 단정하여 기분이 상쾌해 지는 곳이다,

아름들이 소나무와 정원이 잘 조화되어 있다.

 

 

  

 

 

 

 

 

 

 

  

 

 

 

 

 

 

 

 

  

 

 

판석보(板石洑)

 

우리나라 조원 유적 중 유일한 석조보(石造洑)로 일명 굴뚝다리라 부르며, 세연지의 저수를 위해 만들었다. 건조할 때는 돌다리가 되고 우기에는 폭포가 되어 일정한 수면을 유지하도록 만들었다. 보(洑)의 구조는 양쪽에 판석을 견고하게 세우고 그 안에 강회를 채워서 물이 새지 않게 한 다음 그 위에 판석으로 뚜껑돌을 덮었다.

 

 

 

 

 

 

이곳 세연정은 아주 넓은 정원은 아니어서, 구석 구석 둘러 본다.

이로서 아쉬운 곳 두어군데 (격자봉 종주산행과 , 동천석실 ) 빼고 대충 둘러보고 보길도 여행을 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