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령 자굴산치유수목원, 호암 이병철생가. 일붕사. 곽재우 생가. 불양암 탑바위
가족 모임이다.
코로나19로 인해 두어해 미루다가 의령에서 만났다.
계매의 농가가 의령 가례면에 있어 그곳에서 2박한다. 카카오 지도를 보면 숙소 바로 뒷편에 자굴산치유수목원이 있는데 현재는 영업을 하지 않는다.
오후 의령 정곡면 일원으로 이동하여 호암 이병철생가와 궁류면의 일붕사, 유곡면의 곽재위장군 문화공원 주변을 둘러보고 귀가길 불양암 탑바위에 잠시 들러는 일정이다.
▷ 가는 길
다음지도를 확대하여 오늘 일정을 가늠할 수 있다.
▷ 탐방코스 (2022. 5. 14.)
자굴산치유수목원 - 정곡면 호암 이병철 생가 - 궁류면 일붕사 - 유곡면 곽재우장군 문화공원 - 정곡면 불양암 탑바위
▷ 탐방후에
▣ 자굴산치유수목원, 일준부채박물관
계매의 농가주택이 의령 가례면 괴진마을에 있다.
마침 집 뒷편에 자굴산치유수목원이 있어 둘러본다.
괴진마을앞에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고,
수목원을 알리는 표지석도 있다.
하지만 이내 문이 폐쇄되어 있다,
인근에서 농사일을 하시는 분의 말로는, 수목원과 부채박물관은 폐쇄로 인해 둘러볼 수 없다한다.
괴진마을 앞으로 흐느는 개울가를 따라 마을 산책을 나선다,
뒤에 흰 건물이 부채박물관이다.
인터넷 카카오지도에 보면 자굴산치유수목원과 부채박물관이 있는 것으로 나와있다.
혹시 싶어 마을 아랫쪽 입구쪽으로 올라보았으나 이내 외부인출입금지 안내문이 위협적이다.
주변 다른 길을 따라 수목원 상부 인근으로 올라본다.
수목원의 나무는 그대로 나 둬도 자랄 것이나 구조물이 문제이다.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폐허는 되지 말았으면 좋겠다.
▣ 호암 이병철 생가
호암생가는 공영주차장에서 출발하는 것이 좋다,
주차장에서 생가까지는 약 200m 거리지만 마을 내에는 마땅히 주차할 곳이 없다. 따라서 주차장에 주차후 마을 구경하여가며 호암선생 생가로 가면 된다.
호암생가는 오래 전 늦은 오후 시간에 잠시 들런적이 있는데 오랫만에 다시 찾았다.
이후 호암 생가를 두어번 찾았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대문이 닫혀있어 내부를 둘러보지 못했다.
호암선생 생가 가는 길
마을 안길을 따라 호암선생 생가로 간다.
호암선생 생가 정문이다.
정문을 들어서면 사랑채가 있고,
사랑채를 지나면 안채가 정갈하게 들어서 있다.
살짝 사면에서 본 안채.
호암 이병철(1910~1987)선생은 경주이씨 찬우 공과 안동 권씨의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1926년 순천박씨 두을여사(사육신의 한 분인 백팽년의 후손)와 혼인하였다.
여섯 살 때부터 조부 문산 홍석 공이 세운 서당 문산정에서 유학경전을 익히고, 신학문에 입문하여 진주의 지수보통학교에 다니다, 서울로 옮겨 수송보통학교, 중동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30년 일본 와세다 대학에 유학하여 경제학을 공부하였으며 귀국 후 일제식민지 시대에 민족경제 육성의 절실함을 깨달아 1938년 삼성을 창업하였다. 선생은 창업이래 사업보국, 인재제일, 합리추구의 경영철학과 신념을 바탕으로 삼성을 한국 최고의 기업으로 발전시켜 국가경제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또한 성균관대학교 운영을 통해 인재육성에 앞장섰으며, 삼성문화재단을 설립하여 문화, 예술,언론 및 사회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후 삼성은 선생의 유지를 계승하여 경영을 이어받은 이건희 회장의 '질 중시 신경영', '창업경영'을 바탕으로 하여 세계초일류 기업으로 성장하였다. 선생이 1987년 78세를 일기로 타계하자 정부는 한국경제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높이 평가하여 대한민국 최고의 훈격인 국민훈장무궁화장을 추서하였다. 호암 선생이 태어난 의령군 중교리 장내마을의 이 곳은 1851년 선생의 조부께서 전통 한옥양식으로 손수 지었으며, 그 동안의 몇 차례의 증.개축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풍수지리에 의하면 곡식을 쌓아 놓은 것 같은 노적봉 형상을 하고 있는 주변 산의 기가 산자락 끝에 위치한 생가 터에 혈이 되어 맺혀 있어 그 지세가 융성할 뿐만 아니라, 멀리 흐르는 남강의 물이 빨리 흘러가지 않고 생가를 돌아보며 천천히 흐르는 역수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재물이 앃일 수 밖에 없는 명당중의 명당으로 알려지고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안채 옆에 창고?가 있어 박물관 역할을 한다,
농기구 등 농사관련 물건들을 볼 수 있다.
마당가 한 켠의 단풍나무가 싱싱하다.
호암선생 생가 좌.우에 범상치 않은 한옥이 있다.
이 건물은 호암선의 형과 동생의 집이라 하나 개방하지는 않아 대문 밖에서 외견만 본다.
▣ 일붕사
궁류면에 위치한 일붕사에 왔다.
이 절의 외견상 특징은 거대한 절벽 아래 위치하며 동양 최대의 동굴법당이 있어 볼 만 하다.
사천왕문을 지나,
경내로 들어서면,
거대한 절벽 아래 대웅전이 위치한다.
제1동굴법당인 대웅전은 그 넓이가 1,260㎡에 이르고 높이가 8m로서 동양 쵀대의 동굴법당으로 영국 기네스북에 등재되어 있다.
제2 동굴법당인 무량수전도 300㎡에 이른다.
좌측 절벽아래 위치한 건물은 독성각.
일붕사가 소재한 봉황산은 신라시대 삼국을 통일한 신라 태종무열왕 김추추 장군의 첫 요새지로서 신라 최고의 군부대였던 봉황대의 이름을 따 봉황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서기 727년 신라 성덕대왕 26년에 신라의 혜초 스님이 중국과 인도의 불교 성지를 순례하고 돌아오던 중 끔에 기암괴석으로 둘러싸인 절벽에서 지장보살님이 환하게 웃으며 이곳에 호국영령들을 위로해 줄 불사를 하면 훗날 큰 보배가 될 것이라 하여 귀국하는 길로 성덕대왕께 고하고 전국의 명산을 찾아 헤매다가 꿈에 본 기암절벽과 모습이 흡사한 이곳 봉황산에 사찰을 건립하여 당시 성덕대왕의 이름을 따 성덕하라고 하던 것이 현재 일붕사의 전신이다.
용왕전, 약사전, 산신각,
그 후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로 사찰이 자주 소실되어 감히 복원을 못하고 있던 터에 1987년 혜운스님이 산의 정기가 너무 강하여 화기를 빼야한다는 큰스님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대웅전의 위치를 현재의 위치로 바꾸고 화재로 소실될 염려가 없는 자연그대로의 거대한 바위를 이용하여 동굴법당의 대불사를 하게 됐으며 사찰명 또한 일붕사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현지 안내문에서>
대웅전 동굴법당 내부.
무량수전 내부
대웅전 건물뒤 절벽에는 일붕호국기원처?
도로를 따라 서담암 향하면서 바라본 대웅전과 무량수전.
"세상살이는 늘 보편적 상식과 질서란 무언의 약속이 있습니다."
서담암 봉선당 앞 부도.
포대화상
중국의 고승
법명은 계차, 별호 포대화상,
누구에게나 이름이 있는데 그가 하는 행위에 따라 호칭이 하나 더 생기기도 한다.
지팡이에 자루를 걸어메고 다니면서 나누어 주는 것을 좋아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포대화상이 크게 웃을 때 그 웃음을 따라 함께 웃으면 무병, 장수, 부귀의 세 가지 복이 생긴다 한다. 세간에는 미륵보살의 화신으로 알려져 있다. 사는 옹안 우리도 저런 자루 하나 장만하면 좋지 않을까.
서담암 극락보전
서담암 우측 뒷편에 독성각과 용왕당
뒷쪽에서 바라본 서담암.
산신각
서담암 극락보전 내부
서담암을 둘러보고 되돌아 간다.
일붕사 입구에 봉황대가 있어 올라본다.
봉황루
봉황새가 날면서 입을 벌려 운다고 해서 붙여진 봉황대의 유일한 누각이다.
봉황대?에서 내려다 본 일붕사 들머리
암벽 아래로 산책로가 있어 이곳으로 내려간다.
봉황대
산책로는 주차장 입구에 있다.
▣ 유곡면 곽재장군 문화공원
곽재우장군 문화공원으로 왔다.
세간리 은행나무 (천연기념물 제302호)
의령 세간리 은행나무는 나이가 약600년 정도 되는 나무이다. 높이는 약24.5m, 가슴높이는 둘레는 약 10.2m에 이른다,
예부터 주민들은 마을 뒷산 중턱에 있는 참나무(산신나무)를 신성히 여겨 산신제를 올렸으며 마을 어귀에 있는 헌고수(느티나무)와 세간리 은행나무 주위를 돌며 마을의 풍요와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동신제를 지냈다.
세간리 은행나무는 열매를 맺는 암나무로 모양이 아름답고 우람하여 가을 단풍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특히 남쪽 가지에는 두개의 짧은 돌기가 있는데 그 모양이 마치 여인의 젖가습과 닮아 아이를 낳은 뒤 젖이 잘 나오지 않는 산모가 이곳에 찾아와 정성을 들여 빌면 효험이 있다고 전한다. 살아있는 화석이라고도 불리는 은행나무는 가을 단풍이 아름답고 병충해가 없으며, 넓고 깊은 그늘을 제공하는 장점이 있어 선조들이 향교나 서원. 사찰. 정자 주변에 많이 심었다.
<현지 안내문에서>
곽재우 생가를 둘러본다.
사진은 사랑채.
곽재우 의병장은 본관은 현풍, 자는 계수, 호는 망우당, 시호는 충익이다.
조선 명종 7년(1552) 음력 8월 28일 이곳 의령현 세간리에서 아버지 곽월과 어머니 진주 강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세간마을은 그의 어머니의 친정으로 부친이 결혼과 함께 당시의 혼인풍속에 따라 본가가 있는 현풍현 솔례촌을 떠나와 살면서 태어나고 자라게 되었다.
선조 25년(1592) 4월 13일(음력)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의 대륙침략 야욕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쟁발발 9일만인 4월 22일에 이곳 세간마을에서 전국 최초로 의병을 일으켰다. 가동 10여명에서 출발한 그의 의병부대는 첫 전투인 5월 4일의 기강전투와 5월 하순의 정암진대첩 승리 이후로 군세가 급격하게 늘어나 2,000여명에 달하였다. 그는 백마을 타고 항상 붉은 옷을(홍의) 입고 선봉에서 전장을 누볐으므로 천강홍의장군이라고도 불렀다.
정유재란 때는 밀양.영산. 창녕. 현풍 등 네 고을의 군사를 이끌고 화왕산성을 지켜 적의 접근을 막았다. 유곡찰방과 성주목사, 경상우도 방어사, 경상좌도병사, 한성부좌윤. 삼도통제사 등 29회에 걸쳐 관직이 제수되었으나 대부분 사직하거나 부임하지 않았다.
1617년 4월 10일 상사에서 66세의 일기로 서거하였다. 활달한 필체에 글씨. 시문에 능하였으며 문집으로 <망우당집>이 있다. 이곳 생가는 조선중기 남부지방 일반 사대부의 전형적인 가옥구조로 안채와 사랑채, 별당, 큰곳간채, 작은 곳간채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2005년에 복원정비 되었다.
<현지 안내문에서>
곳간채,
역시 곳간채이다.
별당
▣ 의령 세간리 현고수
헌고정
이 정자나무는 곽망우당선생의 탄생하신 집앞에 있었다한다.
임진왜란에 선생이 이 나무에 북을 달아 치면서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을 이루었다.
세월이 오래되자 고목이 되었으나 한가지 푸른기운이 봄이오면 어린나무보다 더 성하였다. 이것은 우리마을 사람들이 축대를 쌓고 나무로 바쳤기 때문이고 오늘에 와서 문화재로 인정하여 더욱 보호하게 되었다.
단기 사천삼백이년 을유 소춘일
천연기념물 제 483호.
의령 세간리 현고수는 나이가 약600년 정되 되는 느티나무이다. 높이는 약15m, 가슴높이의 둘레는 7m에 이른다.
현고수는 북을 매단 나무라는 뜻으로 임진왜란 때 곽재우가 이 나무에 큰 북을 매달고 의병을 모아 훈련시켯다는 것에서 유래되었다,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9일 뒤 곽재우가 이곳에서 전국 최초로 의병을 일으켰다. 곽재우의 의병부대는 이곳에 본진을 두고 낙동강과 남강을 오르내리며 왜군의 진격을 막고 보급로를 차단하여 왜군을 격퇴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매년 열리는 의병제전에서는 의병의 희생정신을 기리고자 이곳에서 성화의 불을 붙여 의병제전을 시작한다. 의령 세간리 현고수는 임진왜란 의병 발상지라는 역사적 의미와 더불어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으로서 민속학정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 불양사 탑바위
고갯마루에 주차장이 위치하여 찾아 가는데 도움을 준다.
크지 않은 바위이나
바위의 생긴 모습이 기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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