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주 풍남문, 전동성당, 경기전, 최명희문학관, 오목대와 이목대, 전주향교
산청 선비대학 2차 현장학습의 일환으로 전주에 간다.
오전 일정으로 보물 제 308호로 지정된 풍남문, 서울의 명동성당과 외형상 유사한 점이 많으나 건축 양식상으로는 상당한 차이점이 있는 전주 전동성당, 조선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신 경기전을 둘러보고 한국관에서 전주 비빔밥으로 점심식사를 했다. 오후엔 한옥마을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한옥마을을 내에있는 최명희문학관과 이웃한 전주부채문화관, 교동미술관을 중심으로 둘러보고, 오목대와 이목대, 전주 향교와 장현식고택을 둘러보는 일정이다. 오고 가고 하는 길에 한옥마을은 자연스럽게 둘러보게 된다.
▷가는 길
지도를 확대하면 라한호텔 북쪽 근거리에 공영주차장 및 전주한옥마을 관광안내소가 조성되어 있다.
▷탐방후에
▣풍남문
호남제일성 풍남문을 둘러본다.
우리 일행을 태운 버스는 풍남문 인근 도로변에 잠시 정차를 하고 하차한다.
풍남문
이 문은 조선시대 전라감영의 소재지였던 전주를 둘러싼 남쪽 출입문이다. 전주성에는 동서남북에 각각 출입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이 문만 남아 있다. 1389년(고려 공양왕1년)애 관찰사 최유경이 처음 세웠으며, 정유재란 때 화재로 불타 조현명이 3층 누각(명견루)으로 수축하였다. 이후 영조 44년(1768)?에 다시 불타 전라감사 홍락인이 다시 세우면서 풍남문이라 이름하였다.
<풍남>이란 풍패(豊沛 /늪 패)의 남쪽이란 뜻이며, <풍패>란 중국 한나라 고조가 태어난 곳으로, 조선왕조 발원지인 전주를 그 곳에 비유한 것이다. 성문 위에 세운 누각 위층의 기둥이 아랫층의 기둥과 하나로 연결되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도심에 자리한 단아한 성문에서 옛 전주성의 모습을 엿볼수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성문 바깥인 셈이다.
일제강점기에 대부분의 성벽과 나머지 성문은 자취를 감추고 이 문만 남게 되었다. 1980년 중수공사때 풍남문 양쪽에 있었다는 포루와 종각을 옹성과 함께 복원했다.
한바퀴 돌아 성 안쪽에서 되돌아 왔다.
앞쪽에 공사칸막이가 설치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문루성벽을 쌓은 돌이 튀어나와 H빔으로 지탱하였다,
2층 문루 측면에 다람쥐처럼 보이는 하얀 동물은 코끼리이다. 몇 번 화재로 소실된 적이 있어서인지
화재를 대비하고자 코끼리 코로 물을 뿜어내는 형상을 그렸다고 한다,
품남문을 한바퀴 둘러보고 전동성당으로 간다.
풍남문에서 전동성당 또는 경기전으로 가는 길은 가깝다.
풍남문 옆에 풍남문 광장이 있고, 평화의 소녀상이 설치되어 있다. 사진에는 없지만 뒷쪽에 전주 대건신협 건물이 특이하여 시선이 자주 간다.
▣ 전주 전동성당
전동성당은 몇 번 찾은 적이 있지만 오늘도 입구에서 외형만 바라 본다. 예배시간 때문에 12시 이후에 개방한다고 한다.
조선시대 전주는 전라감영과 진영이 있었으므로 천주교회사에서 전동은 자연 순교지의 하나가 되었으며,
이 성당은 전주교인들이 처형되었던 풍남문이 있던 곳에 있다.
1891년(고종 28)에 보두네 신부가 남문 밖에 집을 매입하고 정착하였고, 그 뒤 1908년 프와넬 신부의 설계로 성당 건축에 착수하여 1914년 준공을 보았다.
벽돌로 된 완전한 격식을 갖춘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 건물은 회색과 적색의 이형(異形)벽돌을 사용하여 섬세한 모양으로 꾸몄다.
▣경기전
경기(慶基)라는 이름은 조선의 국성(國姓)인 전주 이씨의 발상지이므로 '경사스러움(慶)이 터잡은(基)곳'이라는 뜻으로 지은 것이다.
입구에 하마비가 있다.
경기전 하마비
하마비는 누구든지 이곳을 지나는 사람은 말에서 내려야 한다고 적혀있는 비석으로 조선시대에 궁궐, 종묘, 문묘, 향교 등의 문앞에 세웠다.
경기전 하마비는 광해군 6년(1614)에 경기전을 고쳐 지을 때 처음 세웠고, 철종7년(1856)에 고쳐서 다시 세웠다. 비석의 앞면에는 '지차개하마 잡인무득입(至此皆下馬 雜人毋得入)이라고 새겨, 계급의 높고 낮음, 신분의 귀천을 떠나 모두 말에서 내리고, 잡인의 출입을 금한다'라고 적혀있다.
하마비는 일반적으로 사각의 받침돌과 비석 몸체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경기전 하마비는 사자(혹은 해치) 암수 두 마리가 직사각형 받침돌에 세운 비석 몸체를 등으로 떠받치고 있는 보기 드문 형태이며, 말에서 내리도록 하는 기능뿐 아니라 경기전을 수호하는 의미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지 안내문에서>
경기전은 전주에 건립한 태조 진전(眞殿/어진을 모신 처소)으로 조선 왕조를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어진(御眞/왕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을 모신 곳이다. 현재 남아 있는 태조 진전으로는 경기전이 유일하다.
태종 19년(1410)에 전주, 평양, 경주, 개성, 영흥에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모시는 어용전(御容典)을 세웠으며, 세종 24년(1442)에 전주의 태조의 진전을 경기전으로, 경주는 집경전(輯慶殿), 평양은 영숭전(永崇殿)이라 이름하였다, <경기>는 조선왕조가 일어난 경사스러운 터라는 의미이다. 경기전은 선조 30년(1597)에 일어난 정유재란 때 불에 타 사라졌는데, 광해군 6년(1614)에 이를 다시 건립하였다. 숙종2년(1676)에 옛 전주사고 자리에 별전을 세웠다. 별전은 유사시 태조어진을 임시로 모시는 곳이다. 일제강점기에 부속 건물과 별전을 철거하였는데, 1991년 별전이 있던 자리에 전주사고를, 2004년에는 부속 건물을 복원하였다.
경기전 진전은 중앙에 태조어진을 모신 정전이 있고, 진전 동편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전주사고가 있으며, 진전 서편에는 태조어진을 수호하고 제사를 지내기 위한 부속 건물들이 있다. 경기전 북편으로는 조선 왕실의 시조 사당 조경묘가 있고, 그 옆으로 태조어진의 역사를 탐은 어진박물관이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궁궐로 들어서는 느낌이다.
경기전,
조선 태조 어진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이다,
전주는 대조 이성계의 선조들이 살았던 조선 왕실의 본향이다. 조선은 건국 후 태종 10년(1410)에 조선 왕실이 일어난 전주에 태조의 어진을 봉안하였다. 그 후 경기전에 모신 태조 어진이 낡아서, 고종9년(1872)에 영희전 (조선시대 태조.세조. 원종.숙종. 영조. 순조의 어진을 모셨던 한양의 전각) 의 태조 어진을 모사(어떤 그림을 본보기로 그와 똑같이 본을 떠서 그림)하여 다시 모셨다,
태조 어진은 전주를 비롯해 태조가 태어난 영흥, 고구려의 왕도 평양, 신라의 왕도 경주, 고려의 왕도 개경 등 지방 5곳에 모셨으나 현재는 전주 경기전의 태조 어진만이 유일하게 남아있다.
어진 속의 태조 이성계는 평상시 집무할 때 입는 청색의 곤룡포에 모자인 익선관을 쓰고 검은 가죽신을 신고 정면을 바라보고 있으며, 그 위엄과 권위가 돋보이게 그려져 있다, 가슴과 어깨에는 왕을 상징하는 다섯 발톱을 가진 용이 그려져 있으며, 비단의 뒷편에 색을 칠하여 색감이 앞으로 배어나오게 하는 배채법으로 그려 색감이 은은하고 깊은 것이 특징이다. 또한 테조 어진은 경기전의 태조 어전을 옮겨 그린 한양 영희전의 어진을 고종 9년에 다시 옮겨 그린 것으로, 조선 초기의 어진 제작 기법을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다.
조선 태조 어진은 현재 국보로 지정되어 어진 박물관에 모셔져 있으며, 경기전 정전에 있는 것은1999년에 원본을 그대로 옮겨 그린 복제본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약갼 측면에서 바라본 경기전
경기전을 앞에서 바라 보았을때 좌측에 경기전 부속 건물이 있다.
부속 건물들이 있는 곳으로 들어오는 입구는 앞쪽의 정문과 경기전쪽 샛문이 있어 아무곳으로 들어서도 된다.
수복청
이곳은 경기전의 제사에 관한 일을 맡아 보는 낮은 직급의 벼슬아치들이 있던 곳이다. 살림집은 안채와 같은 형식이지만 주로 큰 일이 있을 때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일정 기간 임시로 거쳐하는 곳이다. <세조실록>에 세조8년8월6일조에 의하면 전주경기전에 수복의 수가 관노(官奴, 종)1명, 양민(良民, 일반 백성)18명이 교대로 지켰다고 한다, 이를 미루어 볼 때 수복청에는 항상 몇 명이 거주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수복청 마루에는 이런 그림도 있다.
서재
이곳은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지어진 집으로 재각(齋閣, 무덤이나 사당의 옆에 제사의 소용으로 지은 집)이라고도 하며 제향(祭享, 제사)을 맡은 관원들이 재계의식을 하기 위한 곳이다 재계의식(齋戒儀拭)은 제사에 임하기 전에 몸과 마을을 깨끗이 하여 신을 맞을 준비를 하는 의식이다.
동재
서재와 같은 용도이다.
제기고
제향(祭享, 제사) 때 사용하는 각종 그릇, 기구 등을 보관하는 장소이다. 제사 때 사용하는 그릇은 일반 그릇과 달리 정갈하고 성스러운 물건이어서 별도의 건물에 보관하여야 하는 것이다. 대개 제기고와 같은 건물은 바닥을 마루바닥으로 만든다. 마루바닥은 지면과 분리되어 있어 습기가 차지않아 기물을 보관하는데 적합하기 때문이다.
어정(御井)
임금의 음식을 만들거나 임금이 마실 물을 기르는 우물을 말한다, 종묘. 사직단 등 임금이 참여하는 제례에 사용하는 우물도 어정이라고 한다.
진사청
조병청(造餠廳)
떡이나 유밀과(튀겨서 꿀을 발란 약과와 비슷한 과자), 다식(곡물 가루를 꿀에 반죽하여 판에 박아 만드는 과자)등의 제사음식을 만들고 보관하는 장소이다.
용실(舂室/찧을 용)
용실은 제사에 사용할 음식을 만드는 방앗간이다.
디딜방아와 절구를 두고 경기전 제례에 사용되는 음식을 만드는 곳으로 경건하고 신성한 장소로 여기는 곳이다.
부속 건물들이 있는 곳에서 경기전 뒷편으로 이어가면 이내 어진박물관이 있다,
현 박물관 증축공사(2023.3월 ~2024년 1월 중 개관) 인하여 휴관중이다.
어진박물관은 태조어진실, 어진실, 가마실,역사실과 기획전시실로 꾸며져 있으며, 관람요금은 어른 1인당 3,000원이다.
현 증축 공사는 이만큼 진행중이다.
어진 박물관을 앞에서 바라보았을때 우측편에 조경묘가 있다.
문이 닫혀있어 내부로 들어 갈 수는 없다.
조경(肇慶 / 비롯할 조)은 '조선왕조 창업의 경사가 시작되다'라는 뜻을 담고있다. 조경묘는 전지 이씨의 시조인 이한과 시조비 경주 김씨의 위패(죽은 사람의 이름을 적은 나무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조선 왕실의 시조 사당이다.
이한(?~754?/ 전주이씨 시조, <선원계보>에 따르면 신라말기 사공(司空)을 지냈다 함)은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의 21대조이다. 전주는 태조 이성계의 고조할아버지인 이안사가 강원도 삼척을 거쳐 함경도 의주로 옮겨갈 때까지 전주 이씨가 대대로 살았던 곳이다.
조경묘는 영조 47년(1771) 경기전 북쪽에 세워, 영조가 세손(정조)에게 쓰게 한 전주 이씨 시조 내외의 위패를 모셨다. 태조의 초상화인 어진을 모신 경기전, 이한의 묘역인 조경단, 세조의 고조할아버지인 목조가 살던 이목대와 함께 전주가 조선왕조의 발원지임을 상징하는 곳이다.
실록각은 경기전 우측(앞에서 바라보았을 때)편에 있다,
우리나라는 고려시대부터 춘추관과 예문관을 상설하고 사관을 두어 날마다 시정(時政)을 기록하였으며 한 임금이 전왕시대의 역사를 편찬하여 이를 실록이라 하고 특별히 설치한 사고에 봉안하여 왔었다.
조선왕조 실록을 편찬한 것은 1409년(태종9)부터 1413년(태종13)까지 4년간 태조실록 15권을 편찬한 것이 처음이며 1426년(세종8)에 정종실록 6권을 편찬하고 1431년(세종13) 태종실록 36권을 편찬한 후 태조, 정종.태종의 3조실록 각 2부씩 등사하여 1부는 서울의 춘추관과 1부는 충주사고에 봉안하였다,
1592년(선조250 임진왜란 때 춘추관. 충주. 성주의 3사고 실록은 모두 소실되고 오직 전주사고의 실록만이 병화를 면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손홍록. 안의 등이 실록을 내장산 용굴암에 이안, 사수하였기 때문이다. 전주사고에는 실록 784권 514책 47궤, 기타 전적이 64종 556책 15궤가 봉안되어 있었다.
1597년 정유재란때 실록각은 소실되었는데 1991년 이를 복원하였으며, 조선왕조실록(국보제151호)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누각에 오르듯이 2층으로 오를 수 있다.
실록각을 뒤로 하고,
이곳은 매화나무,
수령은 상당히 되었을 것 같으나 휘어져 오른 모습이 약해 보인다.
경기전과 경기전 외곽을 좌에서 우로 한바퀴 둘러보았다.
숲 또한 무성하다.
이곳은 경기전 앞쪽 한옥마을로 이어가는 도로이다.
일행들을 기다리며 이곳 노천카페에서 차한잔 한다,
▣ 한국관 본점
점심 먹으러 전주 한국관(본관)에 왔다.
전주 비빔밥으로 유명한 집이어서 손님들이 많다.
파전에 모주,
전주 육회비빔밥으로 점심식사를 했다.
▣ 전주 한옥마을
전주 한옥마을 공영주차장이자 관광안내소에 왔다.
주차시설이 넉넉하여 웬만하면 이곳에 주차하면 된다,
한옥마을길을 따라 도보로 최명희 문학관으로 간다.
▣최명희 문화관
찾다보니 최명희 문학관 후문이다.
초행이라면 후문이 더 찾기 쉽다
1층 전시관인 독락재(獨樂齋), 지하층에는 강연장 겸 기획전시장인 비시동락지실(非時同樂之室)로 이루어져 있다.
독락이란 당호는 홀로 자신과 대면하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즐기는 경지에서 이룩한 문학의 높은 정신을 기리는 의미다.
비시동락은 따로 때를 정하지 않고 노소동락(老少同樂), 교학상전(敎學相傳)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최명희 문학관은 2006년 전주시 풍남동 67-5번지에 부지 509평, 총면적 160평 지상1층 지하 1층 규모로 세워졌다.
이 문학관은 작가 최명희의 문학세계를 체계적으로 정리 보존하고, 전통문화의 인류사적 의미 연구를 통해 직접 학습하는 강동과 느낌이 있는 시민밀착형 문학관, 전주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고 문화콘텐츠를 개발하는 문학관, 문학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도시형 문학관을 추구한다,
전시관에는 작가의 원고와 지인들에게 보낸 엽서. 편지들을 비롯해 <혼불>이나 생전의 인터뷰 문학강연 등에서 추려낸 말들로 이뤄진 동영상과 각종 패널을 만나 볼 수 있다.
최명희 문학관 정문쪽으로 나선다.
최명희(1947~1998)작가의 세세한 삶의 흔적과 치열했던 문학 혼을 볼 수 있는 문화시설로 문학강연, 토론회, 혼불낭독회, 혼불문학기행 등을 하는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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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희 문학관 앞 조형물
최명희 문학관을 정면에서 바라 볼 때 우측 전주부채문화관이 있고, 좌측에 교동미술관이 있다.
두곳 다 무료로 둘러볼 수 있다.
우측의 전주부채문화관은 전주부채의 역사적 가치를 밝히고 부채 장인들의 예술혼을 재조명헌 문화시설로 부채를 테마로 한 기획 상설전시, 부채만들기체험, 선면화그리기 체험, 전통놀이 등을 체험하는 공간이다.
이곳에서 부채를 만드는 과정과 다양한 부채의 모양을 볼 수 있다.
교동 미술관으로 왔다,
교동미술관 또한 무료로 관람할 수 있고, 사진 촬영로 허락한다.
무위적 자연풍경의 美
자연의 원초적 아름다움을 담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적인 화풍을 재현하기 위해 전국을 다니며
자연의 풍광을 관조하고 순수한 모습을 진실하게 화폭에 담아 낸다.
기계문명이 가져온 각박함 속에서 잊혀져 가는 태초의 자연을
예술적 가치로 재현 및 보존하는 것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집중있는 직관력과 관찰력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화폭에 담아 자연의 원초적 모습을 진실하게 재현하고자 하였다.
결코 인위적이지 않는 무위의 풍경
자연이 원래 가지고 있는 모습에 어떠한 것을 첨가하거나 가공해서 그리지 않는
있는 그대로의 원초적 자연이야말로 인간의 심신을 치유하는 장소로서의 자연
바쁜 현실에서 벗어나 힐링할 수 있는 장소로서의 자연,
우리의 고향이자 안식처로서의 풍경임을 느낄 수 있는 작품세계를 펼치고자 하였다.
아름다운 이 강산, 자연의 속삭임 속에서 자연의 이치를 거스리지 않고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가야 함은 께닫는다.
작가노트 中에서
가운데 작품, 자작나무 숲길 따라 / 2023
이우철님은 남성고등학교를 미술대학 미술교육학과를 졸업했다.
2021 개인전 '자연풍경의 무의를 비롯하여 다양한 단체전, 초대전을 개최했고, 제10회. 11회 전라북도 미술전람회 특선등 다수의 수상 경력이 있다.
벚꽃의 자태 2
최명희문학관, 부채문화관, 교동미술관을 차례로 둘러보고 오목대로 간다,
우와 !
오목대는 한옥마을 동편 아담한 동산위에 위치함을 기억하면 찾아가기 쉽다. 오르는 길은 몇 군데 있어 편한 대로 오르면 된다.
우리 일행은 선비길 안내표지판이 있는 오목대 서쪽방향에서 오르는 길을 택했다.
선비길
선비에게 길울 묻다,
전주 한옥마을에는 선비들이 살았습니다. 효를 위해 입신양명을 버린 월당 최담부터 조선의 마지막 선비로 불리는 간재 전우와 그의 제자인 삼재(금재, 유재, 고재)까지, 특히 일제강점기 이곳 한옥마을은 선비들의 집합소였습니다. 역사의 순간마다 삶의 참 모습을 보여준 이들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안내문에서>
데크 계단길을 따라 오른다.
아담한 동산위에 오목대와 이목대가 나란히 있다.
오목대(梧木臺)는 고려 우왕6년 (1380)에 이성계가 남원 운봉 황산에서 왜구를 토벌하고 돌아가는 길에 잔치를 벌인 곳이다. 잔치에서 이성계는 한고조 유방이 불렀다는 대풍가(大豊歌)를 읊어 나라를 세우겠다는 야심을 보였고, 이를 눈치 챈 정몽주가 남고산성의 만경대에서 고려를 걱정하는 시를 읊었다고 한다.
이목대(梨木臺)는 이성계의 고조할어버지인 목조 이안사가 전주를 떠나기 전에 살았던 발산(鉢山) 자락에 있다.
1897년에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 황실의 뿌리를 성역화하는 사업을 펼치면서 1900년에 고종황제의 친필을 새긴 '태조고황제주필유지(太祖高皇帝駐蹕遺址, 태조가 잠시 머룰렀던 곳)비를 오목대 좌측편에, '목조대왕구거유지(穆祖大王舊居遺址, 목조대왕이 전에 살았던 터) 비를 이목대에 세웠다.
이목대 비각은 길을 넗히는 공사를 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현지 안내문에서>
이목대.
오목대
오목대는 한자로 梧木臺로 쓴다
신발을 벗고 누각에 오른다.
大風歌(대풍가)
大風起兮雲飛揚 (대풍기혜운비양 / 어조사 혜 날릴 양) 대풍(大風 /한나라군사,자산)이 일어나서 구름(진나라 성, 난세)을 날렸도다.
威加海內兮歸故鄉 (위가해내혜귀고향) 해내(海內)에 위엄을 떨치고 고향으로 왔도다!
安得猛士兮守四方 (안득맹사혜수사방) 이에 용맹한 장사를 얻어서 사방(四方)을 지키리라!
漢 高祖(劉邦) 한 고조(유방)이 자신의 고향 패현에서 불렀던 노래다.
오목대에서 바라본 전주시내
숲이 우거져 북쪽 방향으로만 조망이 약간 트인다,
▣전주향교
전주향교에 왔다.
오목대에서 옆으로 보이는 큰 도로변으로 내려서 약간 따르다 향교쪽으로 내려서면 가깝다. 중간 이정표를 따라도 되지만 큰 길을 따르는 것이 좀더 가까운 것 같다.
만화루(萬化樓)
만화루의 어원은 '공자지도 만물화생(孔子之道 萬物化生)'이라는 말에서 비롯된 것인데, 뜻은 공자님의 도로 만물이 교화된다는 말이다.
만화루의 건축되는 유래는 왕비나 정승 등 높은 사람이 출생한 곳에 세워졌으나, 본 건물은 전주향교의 정문에 세워진 2층 누각으로 유생들이 여름철 강학과 향시장으로 사용되어 왔다. 건물은 전면 3칸, 측면 2칸 2층이며, 건평은 73.4㎡로 중층 팔작지붕에 이익공 구조이며, 2층은 우물마루로 깔리고 계자난간으로 둘러있다.
일월문을 지나.
저만큼 대성전이 주변의 노거수 은행나무와 여타 건물대비 작은 듯 서 있다.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한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전주향교 대성전은 선조36년(1603)에 현재의 자리로 향교를 이전하면서 새로 지었고, 대한제국 융희 원년(1907)에 고쳐 지었다. 1987년에는 대성전과 동무. 서무를 해체 복원하였다.
전주향교 대성전에는 전면 중앙에 공자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하였고, 그 앞쪽으로 동편에 안자와 자사, 서편에 증자와 맹자를 배향하였다. 공자 위패 양 옆 동.서 벽으로는 설총과 최치원을 비롯한 18인의 우리나라 성현을 모셨다.
대성전 앞뜰 양쪽의 동무와 서무에는 公門 10철과 송조6현, 중국의 7현을 나누어 모셨다,
동무(東廡 / 집 무)
대성전 앞 동쪽에 있는 건물을 동무라 하고, 명륜당 앞 동쪽에 있는 건물은 동재라 한다.
동무와 서무는 성현의 위패를 모시는 공간이고 동재와 서재는 향교에서 공부하는 유생이 기거하는 집이다.
서무
대성전 뒤 조그만 대문을 통과하면 명륜당이 있다.
일반적으로 언덕 등 경시진 곳에 향교가 위치할 경우 높은 곳에 대성전, 아랫쪽 낮은 곳에 명륜당이 있는 전학후묘의 양식을 많이 볼 수 있고, 대지가 평지일 경우에 전묘후학인 경우가 있으나 꼭 정해진 것은 아닌가 보다,
성균관과 나주향교, 전주향교가 전묘후학의 양식을 띠고 있다.
전주향교의 은행나무는 수령이 약 420여년이 된 것으로 추정한다, 전주향교가 이곳으로 1603년에 이전설립될 때 은행나무도 같은 해에 심으진 것으로 추정된다.
은행나무는 향교에는 필수적으로 심는데, 그 이유는 은행나무가 선비정신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은행나무는 오래 사는 나무, 나무 자체가 강하여 벌레를 타지않는다 해서 일명 선비 나무라고도 한다.
<현지 안내문에서>
전주향교는 전북대학교 산실
전주는 해방후 대학교가 하나도 없었다.
이에 전주향교는 대학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서기 1949넌 8월에 (재단법인) 명륜학원을 설립하였으며, 1950년4월13일에 초급대학인 명륜대학을 설립하여 법학과와 국어한문과를 두고 교육하였고, 1953년에 전북종합대학교로 격승 인가를 받아 교육시키다가 1955년에 향교에서 교육을 청산하고 현재의 덕진 캠퍼스를 지어 이전하였다.
<현지 안내문에서>
명륜당
명륜의 뜻은 인간사회의 윤리를 밝힌다는 의미로, 맹자 등문공편에 '학교을 세워 교육을 행함은, 모두 인륜을 밝히는 것이다' 에서 유래한 것으로 명륜당은 조선시대 인재양성과 학문부흥을 위하여, 유학을 가르치던 강당으로, 국민의 도의정신과 사회정의를 부식하고 교화하는 근원이 된 건물이다.
조선시대 관학의 성격을 띄고, 양반 자제 90명을, 정6품 교수1명과, 종9품 훈도를 두어 4서 5경을 가르쳤다.
건물은 전면 5칸 측면 3칸 일익공 맛배 가적지붕에, 전면은 교차무늬 창살문에, 눈썹천장에 도리가 길게 뻗어나온 114.4㎡의 건물로, 서기 1603년에 건축되어, 전국에서 가장 오래된 명륜당으로 유명하여, 드라마 성균관스캔들, 명창대첩 YMCA야구단 등을 촬영한 곳이기도 하다.
<현지 안내문에서>
동재
서재
계승사
5성위인 공자 안자. 증자. 자사. 맹자의 아버지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오성위의 고위는 공자의 아버지 제국공 공숙량흘, 안자의 아버지 곡부후 안무유, 증자의 아버지 나무후 증점, 자사의 아버지 사수후 공리, 맹자의 아버지 주국공 맹격을 모셨다.
계승사는 전국 234개소의 향교중에서 유일하게 제주향교와 이곳 전주향교에만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향교를 정면에서 바라보았을때 좌측편에 장현식 고택이 있다.
사랑채(대학문) 대문이 보이고,
안으로 들어서니 고택에 대한 안내문, 풍악헌으로 들어서는 입구 등이 있다.
의로운 뜻을 품은 장현식 고택
이 고택은 민족의 지도자이자 사회사업가이며 정치가인 일송 장현식(1896~1950)선생이 1932년 고향인 김제시 금구면에 건축한 한옥을 2007년에 옮겨온 것이다. 일제 하 독립투사로 평생을 바친 일송 선생의 나눔과 섬김의 정신으로 대동 세상을 실현하였던 의로운 기상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일송 장현식,
한그루 소나무 같은 의인
김제 금구출신 장현식 선생은 당대 만석을 누렸던 부호 중의 부호였다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해 일생을 바친 민족의 지도자였으며 애국지사였다.
1919넌 4월 독립운동 비밀결사 대동단이 창단되자 군영자금을 제공하였고, 대동신문 재정 운영을 맡다 체포되어 1921년 징역 3년을 언도받고 투옥되어 고초를 겪었다. 이후 선생은 교육사업에 적극 뛰어들어 민족사학 재단법인 중앙학원을 설립했고, 고려대 설립 당시 본관 2층 8칸의 교실을 도맡아 지었으며, 동아일보 창간 때는 인쇄기 구입비를 기부하기도 했다. 민족어 보존을 위한 조선어 사전 편찬사업에 당시로써는 거금인 3,000원을 제공하였다. 이로 인해 이른바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정인승.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등과 함께 투옥되어 고초를 겪었다. 상해 임시정부 시절에 독립운동자금 수만원을 아낌없이 기부해 조국의 독립을 지원했으며, 이외에도 당대 예술가나 명망가들에게도 후원하여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다. 해방 후 전라북도 2대 도지사(1949년 8월~12월)를 역임했다.
1950년 6월 28일. 서울 명륜동 자택에서 납북돼 그해 10월 24일 평양에서 지병으로 사망했다. 선생의 유해는 평양의 재북 인사릉에 안장되어 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9년 건국포장)을 수여했다. 항일독립운동과 교육사업에 일생을 바친 애국투사 일송 장현식 선행, 흠결없는 의인으로 숭앙함이 마땅하다.
<현지 안내문에서>
고택
12대 전라북도 지사를 역임(1949~1949)했던 김제 출신의 독립운동가 장현식선생(한국전쟁때 납북)이 1932년에 건축한 근대한옥이다.
안채와 중간채는 당초 김제시 금구면 서도리에 위치했으나 장현식 선생의 아들 장?홍씨가 기부(2007)함으로써 현 위치로 이축하게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사랑채의 모과나무와 돌확(돌로 만든 절구)도 함께 가져왔다.
사랑채 건물은 임실군 임실읍 성가리에 소재한 신?참봉댁 고택 사랑채를 옮겨온 것으로 정확한 신축 연도는 알 수 없다, 안채는 용인 민속촌 조성시 매각되어 이축되었는데. 이 사랑채는 김봉순씨가 매수하여 생활해 오던 중 임실군 도시계획에 의한 도로개설사업 당시 철거 예정이던 건축물을 전주시가 온전하게 인수하여 현 위치에 이축하였다.
<현지 안내비문에서>
별채
별채 내부
저쪽에 상당한 건물의 한옥이 있고 마당도 넓찍하다,
풍악헌(風樂軒)
전통문화연수원인가 싶다.
선비들의 인사예절을 배우는 사상견례(士 相見禮), 선비의 술마시는 예법을 배우는 향음주례, 선비의 활쏘기 예를 배우는 향사례(鄕射禮)를 비롯한 藝.樂.射(쏠 사).御(거느릴 어). 書, 數의 육예(六藝)를 주 내용으로 하고 있다.
향교,장현식 고택 등을 둘러보고 주차장으로 되돌아 간다.
주변은 한옥마을이므로 대체로 낮은 집이 주를 이룬다.
공영주차장 위치 가늠은 라한호텔이 우뚝하여 이 호텔 북쪽 근거리에 있음을 기억하면 방향을 잡는데 도움이 될 듯 하다.
오늘 일정을 마무리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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