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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 중산 두류생태탐방로, 덕산재

정헌의 티스토리 2024. 8. 26. 23:43

■산청 중산 두류생태탐방로, 덕산재

 

두류산은 지리산의 또 다른 이름이다. 산청 중산리 계곡에 생태탐방로를 만들고  그 이름을 붙였다.

중산리 주차장 옆 중산1교에서 시작하여 중산리 생태체험장(칼바위와 자연학습원 갈림길)까지 깊은 계곡, 집채만한 바위와 소 등 여타의 계곡에선 보기 힘든 경관을 보며 걸을 수 있다.

덕산재는 시천면 외공리에 조성된 명암 정식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서원(덕화서원)과 재실(명덕재)이다. 후손 중 재력과 성의가 있는 분이 주도하지 않았겠느냐 싶은데 그 규모가 상당해 보인다.

 

 

▷가는 길

 

중산리 주차장(중산1교 입구)에서  중산리 생태체험장(칼바위와 자연학습원 갈림길이 있는 곳)까지 계곡을 따라 조성되어 있다.

 

 

▷탐방코스

중산리 주차장 - 중산리 카페(20분) - 중산리 생태체험장 (카페에서 20분 제외하고 1시간 10분) - 도로를 따라 중산리 주차장(25분)  (천천히 총 1시간 55분 소요,  /  2024. 8. 25.)

 

 

▷탐방후에

 

▣중산 두류생태탐방로

 

중산리 주차장에서 출발한다.

주변 빨치산토벌전시관 등이 있고 지리산 등산의 들머리여서 주차 공간은 넓직하다.

 

 

 

 

상가 우측에 바로 들머리가 있다.

 

 

 

 

 

들머리 조그만 공원에 물소리빛공원으로 이름붙였다.

 

 

 

 

 

공원엔 몇 화초를 심었으나 일부 구간엔 잡풀이 무성하다.

 

 

 

 

 

공원을 거처 간다.

 

 

 

 

 

오늘 여기오길 잘했다.

 

 

 

 

 

살짝 언덕을 오르면 모래소 전망대가 있다.

 

 

 

 

 

모래소 전망대

 

 

 

 

 

모래소

 

모래소는 원래 건너편 골짜기 바른골과 중산 계곡에서 흘러내려 온 모래가 쌓였던 곳으로 물도 깊어 모래소라고 이름 붙였다. 특히 큰 비가 내린 뒤에는 모래사장을 이룰 정도로 쌓였으며, 마을에서 모래가 필요할 때는 여기 모래를 파다가 사용하여 모래 채취장이 될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 2011년 홍수로 인해 중산계곡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는데 모래소도 예전의 모습을 잃어 모래가 거의 없어졌다. 그러나 지금도 여름에는 많은 피서객들이 찾는 곳 중의 하나다.

<현지 안내문에서>

 

 

 

 

 

모래소 전망데크에서 바라본 계곡 상부쪽.

중간쯤 사람들이 많이 보이는 곳이 너럭바위.

 

 

 

 

 

지리산 탐방안내소 첫 갈림길이 있다.

이곳은 중산리 마을 뒷편 도로로 이어지며, 이곳 도로변에 주차후 이 길을 이용하는 분들이 있다.

 

 

 

 

 

 

 

 

 

 

 

 

너럭바위 들머리 주변이다.

여름철 한시적으로 취사를 허용? 하나 보다.

 

 

 

 

 

넓은 바위 주변을 둘러보고 간다.

 

 

 

 

 

 

 

 

 

 

 

 

 

 

 

 

 

 

 

 

 

 

 

 

 

 

되돌아 나와 탐방로를 이어간다.

 

 

 

 

 

꽃을 보듯 너를 본다.

 

 

 

 

 

이곳은 구시소폭포 입구이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계속 데크길을 따라 오른다.

 

 

 

 

 

 

 

 

 

 

 

 

 

 

 

 

 

 

 

구시소 폭포 상부의 전망테크.

 

 

 

 

 

데크에서 잠시 주변을 조망하고 간다.

 

 

 

 

 

소 구시(구유의 사투리 )처럼 생겨 구시소 폭포라 한다,

상부에서 내려다 본 모습이다.

 

 

 

 

 

주변 계곡,

 

 

 

 

 

아랫쪽,

너럭바위는 멀지않은 곳에 있다.

 

 

 

 

 

데크로드를 이어간다.

 

 

 

 

 

대밭을 지나기도 한다.

 

 

 

 

 

빽빽하게 자란 제법 규모의 대밭이다.

 

 

 

 

 

 

 

 

 

 

 

 

사잔상으로 보기보단 거대한 바위다.

집채만하다.

 

 

 

 

 

 

 

 

 

 

 

 

지금 여기서 행복할 것

 

 

 

 

 

지나온 곳, 중산마을 0.65km, 구시소 폭포 0.3km,

진행할 곳, 용소계곡 0.35km,  신선너덜 0.45?km.

 

 

 

 

 

실소

실소는 지금은 겉모습만 보고 소(沼)라고 하면 실소(失笑)가 나올지 모르겠다. 그러나 2011년 수해 이전에는 무명실에 돌을 달아 넣으면 한 타래가 다 들어갈 정도로 깊었다고 한다.

실 한타래의 길이가 정확히 몇 미터가 되는지 알 수는 없으나 결코 허무맹랑한 과장은 아닐 것이다. 여기 계곡처럼 큰 돌이 바닥에 쌓인 곳에는 돌들 사이로 틈이있고, 수직이 아닌 비스듬히 하류로 이어질 것이다. 그곳을 통해 물이 빠지면 수면 위에서는 빙빙돌며 회오리를 일으카고 물이 빠지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을 것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실소 및 활량소 폭포 전망대

 

 

 

 

 

활량소폭포 (한량소폭포?)

 

한량(閑良)이라는 뜻은 원래 돈도 잘 쓰고 잘 노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한량은 직업은 없으나 가진 돈은 많았으므로 차림새도 항상 깔끔했고, 소란스럽지 않았다.

이곳에서 내리깔린 하얀 반석위로 미끌어지듯이 물이 흘러내리는 모습을 보면 마치 한량의 자태를 보는 곳 같아 붙여진 이름이다. 2011년 홍수 이전에는 이상하리만치 여기는 물소리가 들리지 않고 조용히 흘렀다고 한다. 지금도 물소리는 그렇게 크지 않으며, 긴 스커트가 바람에 날리듯 물줄기가 작은 폭포를 만들고, 기암괴석이 그 옆을 살짝 가려 주고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함께라서 좋은 날

 

 

 

 

 

갈림길

 

 

 

 

 

산청분소(탐방안내소) 갈림길 이정표,

 

 

 

 

 

 

 

 

 

 

 

 

용소,

 

 

 

 

 

현 별로 용소다움은 없다.

 

용소 

예로부터 깊은 소에는 용이 살았으며, 천둥 번개가 요란하게 치는 어느 날, 용은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그런데 이 용소에서는 특이하게 용이 바로 하늘로 올라가지 않고, 물에서 나와 바위를 딛고 신선너덜 방향으로 걸어 올라가다가 승천했다고 한다. 바위에는 용이 걸어가며 디뎌서 패였다는 발자국 흔적이 남아있다.

여름철 수량이 많을 때는 푸르스름한 빛깔을 띠며 그 속에서 용이 꿈틀거리는 것 같은 장관이 연출되고, 가을에는 주변의 단풍이 그대로 물속에 비치는 매우 아름다운 곳이다. 특히 금슬이 좋은 원앙부부와 수달, 담비 등이 놀이터로 삼는 곳이기도 하다.

<현지 안내문에서>

 

 

 

 

 

주변

 

 

 

 

 

 

 

 

 

 

 

 

 

 

 

 

 

 

 

 

 

 

 

 

 

 

 

 

 

 

 

 

 

 

 

 

 

 

 

 

카페 중산리 갈림길이 있다.

과거 생태탐방로 1차 공사가 이곳 인근까지 조성되었는데 추후 생태학습원까지 마져 완공되었다.

 

 

 

 

 

중산리 카페에서 잠시 쉬었다 가기로 한다.

 

"여기 카페 있음, 

자리 꽤나 넓음."

 

 

 

 

 

 

 

 

 

 

 

 

카페 중산리

 

 

 

 

 

내부

 

 

 

 

 

 

 

 

 

 

 

 

 

 

 

 

 

 

 

되돌아 탐방로를 이어간다.

 

 

 

 

 

이내 너덜지대가 나타난다.

갈림길로 조성되어 있지만 어느 쪽이나 마음내키는 대로 가면 된다.

너덜지대 상부에서 서로 만나게 되어있다.

 

 

 

 

 

너덜지대

돌이 많이 흩어져 있는 비탈을 '너덜지대' 또는 '너덜겅'아라고 한다. 산꼭대기 암석 틈 속의 물이 겨울에 얼면서 부피를 증가시키는데 그 힘이 암석을 쪼갤 수 있을 만큼의 큰 압력을 만든다. 압력을 받은 암석이 쪼개져 떨어져 나오면 중력에 의해 굴러 떨어져 생성된 지대를 너덜지대라고 하며, 영어로는 테일러스(Talus)라고 한다.

 

 

 

 

 

 

 

 

 

 

 

 

 

 

 

 

 

 

 

 

 

 

 

 

 

 

다리를 건넌다.

칼바위 쪽에서 내려오는 계곡이다..저쪽 교각은 집채만한 자연석 바위를 교각의 일부로 이용했다.

 

 

 

 

 

다리를 넓게 조성했다.

 

 

 

 

 

다리 건너편에 직진과 아랫쪽으로 돌아서 올라가늘 길로 나뉘어져 있다.

아랫쪽 길을 택해 돌아서 가면  직진길과 만나므로 아랫쪽으로 내려가길 권하고 싶다.

 

 

 

 

 

교각으로 이용된 바위의 상부가 이만큼 돌출되어 있다.

 

 

 

 

 

칼바위 내지는 유안청 폭포쪽에서 내려오는 계곡이다..

 

 

 

 

 

주변에 한국전쟁 이전부터 화전민들이 살았던 삶의 흔적이 있는데 이곳 또한 그 흔적 중 한 곳이다. 앞에 보이는 돌무더기는 집터의 일부였던 곳으로 재래종 돼지를 키우던 화장실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위 다리에서 아랫쪽으로 내려가는 데크로드를 따른다.

칼바위쪽 계곡과 순두류 자연학습원에서 내려오는 계곡이 이곳에서 만난다.

 

 

 

 

 

좀 뜬금없다 싶은 조형물을 세웠다.

 

 

 

 

 

계곡의 형성

지리산의 길게 뻗은 주능선에서 남과 북으로 15개의 지능선이 뻗어있고, 그 능선과 능선 사이에는 수십 개의 크고 작은 계곡들이 발달해 있다. 태평양판이 가한 횡압력을 받은 지리산이 북동~남서 방향으로 금이 가게 되고 금이 간 땅 사이로 흐르는 빗물이 지표를 깎아 내여 하천을 이루었다. 지리산 일대에 흐르던 하천이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지금의 깊은 꼴짜기를 이루고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이 주변이 조금 난해하게 느껴질 수 있으나 크게 한바퀴 돌면 서로 이어지게 되어 있다.

 

 

 

 

 

아랫쪽 길을 따라 한바퀴 돌아서 왔다.

 

 

 

 

 

화전민이란 화전농업을 통해 농업을 하는 농민을 말하며 화전 농업은 산에 불을 지펴 들풀과 잡목을 태운 뒤 그곳에다 농사를 짓는 농업이다. 산간지대에 초목이 자라던 땅을 태우면 겉흙이 부드러워 갈이를 할 필요가 없고 오랫동안 낙엽 등의 유기물이 축적되어 토양이 비옥할 뿐만 아니라 초목을 태운 재가 비료가 되기 때문에 작물이 잘 자란다. 하지만 산림의 황폐화를 야기시켜 산사태, 홍수 등 여러 자연재해가 일어나자, 정부가 1968년에 자연재해 방지 및 산림황폐화 예방을 위해서 <화전정리법>을 공포하였다. 정부는 화전민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키고 화전을 금지시켰으며, 그 결과 1970년대 말에는 우리나라에 화전민이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현지 안내문에서>

 

 

 

 

 

빨치산(파르티잔)이란 말은 프랑스어로 파르티 즉 '동지',  '당원'애서 유래한 말로 일정한 조직체계에 속하지 않는 비정규군을 일컫는 말이다. 우리나라의 빨치산은 사회주의 사상을 따르며 조선인민유격대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는데, 제주도 4.3사건, 여수.순천 사건 등을 통해 표면화되었다. 그들은 1950년부터 1956년까지 지리산공비토벌작전의 종료에 이르는 기간 동안 주로 지리산과 태백산 일대 산지에 근거를 두고 활동했다. 지리산 인근 주민들은 식량문제를 해결하려는 빨치산들과 그들의 위치를 알아내려는 국군 사이에서 이중고를 겪으며 살았다. 주민 중 일부는 빨치산의 회유로 자진해서 빨치산이 되거나 생명연장의 길로 빨치산을 선택하기도 하였다. 이념이 다르다고 하여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던 빨치산과 토벌대(국군), 무고한 주민들까지 모두가 피해자였고 우리 민족사의 최대 비극이라 할 수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멸종위기종 야생생물 복원사업

한반도 전역에 서식하던 반달가슴곰은 서식지 파괴, 보신 문화, 밀렵 등으로 멸종위기에 처해 있으며 2004년 지리산국립공원에서 복원사업이 시작되었다.

지리산의 반달가슴곰 복원사업은 곰 한 종을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백두대간을 잇는 생태 축을 복원하는 사업으로 인간과 야생동물이 공존하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월악산 국립공원에서는 서식지 단절과 자연재해, 밀렵, 질병, 근친교배 등으로 멸종위기에 처해 있는 산양복원사업이 2006년부터 시작되었고,

60년대 시행되었던 쥐잡기 운동과 서식지 감소로 개체수가 급감한 여우는 현재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 생물 1급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으며 소백산 국립공원에서 2012년부터 멸종위기종 복원사을을 시작하였다.

<현지 안내문에서>

 

 

 

 

 

 

 

 

 

 

 

 

 

 

 

 

 

 

 

 

 

 

 

 

 

 

 

 

 

 

 

 

 

 

 

 

 

 

 

 

 

 

 

 

 

 

 

 

 

 

 

 

 

 

 

지리산 수호여신 마고할미의 슬픈 사랑이야기

마고할미는 여신으로 선동성모 또는 노고할미, 천왕할미라 불리는 천신의 딸입니다. 마고할미는 지리산에서 불도를 닦고 있던 반야도사를 만나 결혼해 천왕봉에서 살았답니다. 그들은 딸만 8명을 낳았는데 그러던 중 남편 반야는 더 많은 깨우침을 얻기 위해 가족들과 떨어져 반야봉으로 떠났습니다.

반야는 마고할미가 백발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마고할미는 반야봉에서 외로이 수도하는 반야를 그리며 나무껍질을 벗겨 반야가 입을 옷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딸들을 한 명씩 팔도에 내려 보내고 홀로 남편을 기다렸습니다.

기다림에 지친 마고할미는 반야을 위해 만들었던 옷을 갈기갈기 찢어버린 뒤 숨지고 말았습니다. 찢겨진 옷은 바람에 날려 반야봉으로 날아가서 반야봉의 풍란이 되었다고 전합니다. 반야가 불도를 닦던 봉우리는반야봉이라 불리었고, 그의 딸들은 전국 팔도 무당의 시조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산울 위해 태어난 산사람

우천 허만수 주모비

 

 

 

 

 

생태탐방로는 중산리 생태체험장으로 연결된다.

좌측으로 보이는길은 칼바위쪽으로 가는 길이고, 우측  길은 자연학습원으로 가는 길이다.

 

 

 

 

 

생태탐방로 날머리자 들머리.

중산리 버스 정류장 가는 길 현수막이 걸려있다.

 

 

 

 

 

생태탐방로 끝에서 이번엔 도로를 따라 내려간다.

 

 

 

 

 

상당부분 데크 길을 별도로 마련했다.

현 중산리 상부 주차장은 공사중이어서 차량 진입은 허용되지 않고 있다.

 

 

 

 

 

중산리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주차장에서 중산리 생태체험장까지는 천천히 1시간 10분쯤 (중산리 카페에서 휴식 시간 20분 제외)쯤 소요되었고, 중산리 생태체험장에서 중산리 주차장까지는 천천히 25분쯤 소요되었으므로 카페에서의 시간을 제외하면  1시간 35분쯤 소요된 셈이다.

 

 

 

 

▣덕산재, 덕화서원, 명덕사.

 

시천면 외공리 104-2,

입구 덕화서원을 알리는표지석 아래로 명암 정식선생 명덕사 표시가 있다.

 

 

 

 

 

이웃하여 덕산재

 

 

 

 

 

제법 거창하게 조성되어 있어 둘러보러 갔으나,

 

 

 

 

창덕문

 

묻이 굳게 닫혀있어 내부로 들어갈 수 없었다,

명암 정식선생의 사당은 시천면 국동마을에 조금은 초라하게 있는데 이곳은 규모면에서 상당하다.

안에 들어갈 수 없어 건립 연혁에 대해 알수 없어 추후 다시 찾아봐야 겠다.

명암정식선생의 구곡에 대해선 본 블로그에 소개되어 있다.

 

 

 

 

 

朝奉大夫 行 司憲府 持平 (조봉대부 행 사헌부 지평)

大明處士 明庵 鄭栻先生  (대명처사 명암 정식선생 ) 遺墟碑 (유허비)

 

명암 정식(明庵 鄭栻 1683-1746)은 진주 옥봉동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명암, 본관은 해주이다. 

일찍 벼슬길을 멀리하고 명산을 유람하니  산청군 구곡산에 암자를 짓고 여생을 마친 조선조의 선비다. 명나라가 망한 것을 슬퍼하여 일생 동안 사환하지 않고 초야에서 포의로 지내다 일생을 마친 문학자이다. 그는 명나라를 숭상하는 인물 가운데서도 철저한 사람이엇다. 그는 청나라는 미개한 오랑캐로 간주하여 철저하게 배척하였다. 1746년 타계한 명암은 사후 21년, 조봉대부 사헌부 지평에 증직된 후 '명암 정식 선행 무이정사 유계'가 관장하는 무이정사에 배향되었으며, 유집으로 <명암집> 6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