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지역의 산

영주 소수서원, 부석사

정헌의 티스토리 2025. 11. 10. 20:13

 

■영주 소수서원, 부석사

 

지역 유림분들과 함께한 가을 소수서원 탐방입니다.

얼마 전 소수서원과 선비촌, 소수박물관, 효진흥원, 선비세상등은 가볍게 둘러보고 본 티스토리에서 소개한 바 있기대문에 오늘은 건성입니다.

중식후 부석사를 둘러보았습니다. 역시 처음은 아니기에 대충 소개해 봅니다/

 

 

▷일정

소수서원, 선비촌, 소수박물관 - 부석사 (2025. 11. 6.)

 

 

▷탐방후에

 

◐소수서원

 

소수서원에 도착합니다.

미리 요청한 문화관광해설사분이 마중나오셨습니다.

친절하고  정감가는 분입니다.

 

 

 

 

 

들머리 당간지주,  입구의 정자와  경자바위, 성생단 등에대해 요약하여 설명하여 주십니다.

 

 

 

 

 

정문은 지도문입니다.

정문 밖 좌측에 성생단이 있습니다.

 

 

 

 

안향선생 사당에 봉심례를 갖습니다.

 

 

 

 

 

봉심례를 갖는 바람에 서원을 둘러볼 시간이 줄어들었지만 얼마전 다녀간 곳입니다.

이곳은 강학당입니다.

 

 

 

◐ 자미가 식당.

 

부석사 들머리에 넓은 주차장이 조성되어 있고, 몇 상가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오늘 중식은 이 식당에서 합니다.

 

 

 

 

 

산채정식(15,000원),

청국장에 고등어 구이가 주 메뉴로 맛집입니다.

 

 

 

 

◐ 부석사

 

중식후 부석사로 갑니다.

 

 

 

 

 

부석사로 올라가는 길 양쪽에 은행나무가 식재되어 있습니다.

여타 다른 지역보다는 살짝 일찍 단풍이 듭니다.

 

 

 

 

 

 

 

 

 

 

 

 

태백산 부석사 현판을 달고있습니다.

 

 

 

 

 

 

 

 

 

 

 

 

 

 

 

 

 

 

 

 

 

 

 

 

 

 

 

 

 

 

 

 

 

당간지주

절에 법회나 기도 등의 행사가 있을 때 절의 입구에 당(幢/기 당)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깃대를 당간이라 하며,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합니다.

 

 

 

 

천왕문

 

 

 

 

 

사천왕상 중 1분입니다.

 

 

 

 

 

 

 

 

 

 

 

 

봉황산 부석사 현판을 달고 있습니다.

종루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줌으로 안양루를 당겨봅니다.

잘 보면 부처님 5분을 찾을 수 있습니다.

 

 

 

 

 

 

 

 

 

 

 

 

 

 

 

 

 

 

 

 

 

 

 

 

 

 

 

 

 

 

 

 

부석사 안양루 / 보물

안양루는 부석사의 문루로 16세기 사찰 문루 건축물의 대표적 사례이다. 원래 강운각(羌雲閣/종족 이름 강)이라는 단층 건물이었으나, 명종 10년(1555)에 불에 타서 없어졌고, 이후 선조 9년(1576)에 그 자리에 중층으로 안양루를 지었다.

건물의 아래층은 모두 기둥으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가운데 칸에 계단을 두어 무량수전으로 향하는 누하진입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극락왕생을 의미하는 안양문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위층 사방은 벽체가 없이 트여 있으며, 내부 바닥 전체가 우물마루로 되어 있다. 일주문에서 무량수전에 이르는 사찰의 동선을 범종각과 안양각 구간에서 살짝 꺽어 무량수전 영역으로 진입하게 하고 있어, 조화로운 자연미를 극대화한 것이 특징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안양문과 석등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  / 국보

석등은 불을 켜서 어두운 곳을 밝히는 돌로 만든 등으로 광명등이라고도 한다. 보통 대웅전이나 탑 앞에 석등을 세운다. 석등은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받침돌이 있고 위에는 지붕돌과 머리 장식이 얹혀 있는 구조이다.

무량수전 앞 석등은 맨 아래에 네모난 바닥돌이 있고 그 위에는 3단의 받침돌, 화사석, 지붕돌이 차례로 놓여있는 모습이다. 바닥돌의 옆면에 꽃 모양의 장식을 새겼다. 바닥돌 위에 있는 아래받침돌에는 큼직한 8개의 연꽃잎을 표현하였다. 아래받췸돌 위에 놓인 팔각기둥 받침돌은 굵기와 높이에서 매우 아름다은 비례를 보인다. 팔각기동 위에 있는 윗받침돌에는 부드러운 연꽃잎 8개를 새겼다. 8각의 화사석은 불빛이 나오도록 4개의 창을 만들었고 창이 없는 나머지 4개 면에는 세련된 모습의 보살상을 새겼다. 지붕돌 역시 8각이며 모서리 끝이 살짝 들려 있는 모습이다. 지붕돌 위에는 머리 장식의 일부만이 남아있다. 석등 앞에는 향을 피우는 데 사용히는 향로를 놓았던 배례석(배례석)이 있다,무량수전 앞 석등은 통일신라시대 석등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석등 중 하나로서 각 부분의 정교한 조각솜씨와 전체적인 비례감이 매우 아름답고 조화로우며, 화려한듯하면서도 단아란 멋을 지니고 있어 통일신라의 석조 예술 수준을 가늠해 볼 수 있는 귀중한 석등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과 내부 불상이 동향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사진촬영 금지라고 표시되어 있어 불상의 사진을 촬영하지 않았습니다.

건물 내부의 소조여래좌상은 나무로 앉아 있는 모습의 골격을 만들고 그 위에 진흙을 붙여 부처의 모습을 표현한 불상이다. 

불상은 높이 2.78m의 크기로 우리나라 소조불상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것이다. 부처에게서 품어져 나오는 진리의 빛을 표현한 광배는 불상 뒷편에 따로 나무로 만들었는데, 가장자리에 불꽃이 타오르는 모습을 잘 표현하였다. 얼굴은 풍만하고 두꺼운 입술과 날카로은 코 등에서 근엄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손모양은 무릎 위에 올린 오른손의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는 항마촉지인인데 이러한 손모양은 석가모니불에서 많이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소조여래좌상이 있는 전각 이름이 극락정토에 머물면서 불법을 설파하는 아미타불을 모시는 무량수전이라는 점과 '원웅국사비'에 "좌우에 다른 보처(補處)보살을 모시지 않고 아미타불 한 분만 모셨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미타불임이 확실하다.

부석사 소조여래좌상은 다른 사찰의 불상과 달리 법당 중앙의 정면이 아닌 서쪽에 모셔져 있고 시선을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이러한 배치에 대해서는 아미타여래가 서방정토에 계시기 때문에 서쪽에 모셨다는 설, 인도나 중국의 석굴과 유사한 느낌의 공간감을 만들고자 의도했다는 설 등 다양한 견해가 있다.

부석사 소조여래좌상은 통일신라 불상 양식을 이어받은 고려 시대 초기의 불상 양식을 알려주는 귀중한 불상이며, 웅장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져 예술적 가치도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부석(浮石)

신리 문무왕 1년(661) 의상대사가 화엄학을 공부하기 위해 당나라에 갔을 때 의상대사를 연모한 선묘라는 여인이 있었다. 의상대사는 깨달음을 얻고자 오직 부처님의 가르침에만 마음을 두었다. 의상대사는 중국 장안에 있는 종남산 지상사의 지엄삼장에게서 10년간 화엄의 도리를 배우고 깨달음을 얻은 후 귀국길에 올랐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선묘가 부두로 달려갔을 때 대사가 탄 배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선묘는 바다에 몸을 던져 용으로 변신하여 의상대사가 탄 배를 호위하여 무사히 귀국하게 하였다.

그 후 신라 문무왕 16년(676) 의상대사가 화엄의 도리를 널리 펴기 위하여 이곳 봉황산 기슭에 절을 지으려고 할 때, 많은 이교도들이 방해하였다. 이때 선묘 신룡이 나타나 바위를 공중으로 들어 올리는 기적을 보여 이교도를 물리쳤다. 그래서 이 돌을 부석이라 불렀으며 사찰 이름도 부석사라 불렀다고 한다. 그 후 선묘 신룡을 영원토록 부석사를 지키기 위해 석룡으로 변신하여 무량수전 뜰아래 깃들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조선 영조 때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위아래 바위 사이에 약간의 틈이 있어 줄을 넣어 당기면 걸림 없이 드나들어 떠있는 돌임을 알 수 있다."라는 내용이 실려있다.

<현지 안내문에서>

 

 

 

 

 

부석 아랫쪽입니다.

 

 

 

 

 

무량수전 측면

부처님의 등쪽인 셈입니다.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 국보

무량수전은 극락정토에 머물면서 중생들을 구제하는 아미타불을 모시는 전각으로 극락전 또는미타전이라고도 부른다. 부석사 무량수전은 아미타불을 모시고 있는 부석사를 중심법당으로, 무량수(無量壽)는 태어남과 죽음이 없은 영원한 생명을 뜻한다. 

무량수전은 의상대사(625~702)가 부석사를 창건할 때에 지었다고 추정되지만, 그것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고려현종 7년(1016)에 고쳐지었으며 공민왕 7년(1358)에 외적의 침입으로 불에 타서 우왕 2년(1376)에 다시 짓고 조선 광해군 3년(1611)에 수리하였다. 이후 일제강점기인 1916년에 해체하여 수리하였다.

무량수전은 앞면 5칸, 옆면 3칸 크기의 목조건물이다. 지붕은 옆면이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웅장한 느낌을 준다. 기둥은 배흘림기둥으로 중간이 두껍고 위래와 위로 가면서 점차 가늘어지는 모양이어서 시각적으로 안정감을 느끼게 해 준다. 지붕 처마를 받치는 부재인 공포를 기둥 위에만 짜서 올린 주심포 양식으로 전체적으로 간결한 인상을 준다. 무량수전 현판 글씨는 공민왕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량수전은 안동 봉정사 극락전과 함께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목조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 중 하나로 고려시대 사찰 건축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전각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무량수전 주변을 둘러보고 삼층 석탑을 거쳐 조사당으로 갑니다.

 

 

 

 

 

삼층 석탑 / 보물

탑은 원래 석가모니의 유골인 진신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축조물을 말한다. 한국의 석탑은 보톹 바닥돌의 기단부, 몸돌과 지붕돌의 탑신부, 머리 장식인 상륜부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부석사의 삼층석탑은 2단의 바닥돌 위에 3층의 탑신을 세운 구조이다. 기단부의 바닥돌은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가둥 모양을 조각하였다. 탑신부의 몸돌은 각 모서리에만 기둥 모양을 새겼고, 몸돌 위에 놓인 지붕돌은 밑면 받침을 5단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양식은 통일 신라 시대 석탑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상륜부의 머리 장식은 일부만 남아 있다. 1956년에 석탑을 해체하여 복원하였고, 석탑의 파손된 부분은 새로은 부재로 보충하였다. 이때 사리를 넣어 봉안하는 공간인 사리공을 확인하였으나 사리기는 없었다. 다만 기단부에서 소형 철제탑, 불상 파편, 구슬 등이 발견되었다.

탑은 법당 앞쪽에 세우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석탑은 부석사의 법당인 무량수전 동쪽 언덕에 위치해 있어 이채롭다, 

<현지 안내문에서>

 

 

 

 

 

 

조사당

응진전, 자인당

 

 

 

 

 

 

 

 

 

 

 

 

조사당 

내부엔 목조의상대사좌상(경상북도 유형문화자산)이 있습니다. 부석사를 세운 의상 대사를 숭배하고 그의 가르침을 기억하기 위해 앉은 모습을 형상화하여 나무로 만든 조사(후세의 사람들에게 경의를 받을 만한 승려이거나 불교 종파럴 개창했던 사람을 말함)상이다. 조사상을 만든 정확확 시기는 확인할 수 없으나, 17세기 전반에 승려상을 만드는 전통속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목조의상대사좌상은 부석사 조사당의 중앙 법단 위에 모셔져 있다. 청색인 승려 웃옷 위에 적색 가사를 걸친 모습을 하고 있다. 삭발한 머리를 하고 위아래로 긴 얼굴에 다소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어 독특한 인상을 준다. 이 조사상은 섬세한 조각 기법 등에서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2022년에 목조의상대사좌상의 보존 처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조사상 안에 있던 묵서 중수기가 발견되었다. 이를 통해 1882년에 목조의상대사좌상을 고치면서 다시 채색했다는 사실과 조사상 채색에 참여한 승려가 누구인지 밝혀졌다.

 

 

 

 

 

조사당 선비화

선비화의 학명은 골담초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 대사가 중생을 위하여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이곳 조사당 처마 밑에 꽂았더니 가지가 돋고 잎이 피었다고 한다. 1300년 이상 조사당 처마 밑에서 비와 이슬을 맞지 않고서도 항상 푸르게 자라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신바감을 주고 있다.

일짝이 퇴계 이황선생이 부석사를 찾아와 이 선비화를 보고 시를 짓기도 하였다.

 

擢玉森森倚寺門 (탁옥삼삼의사문) 빼어난 옥 같은 줄기 빽빽이 절문에 비꼈는데. / 뽑을탁, 나무빽빽할 삼, 의지할 의

僧言卓錫化靈根(승언탁석화령근) 지팡이 신령스레 뿌리내렸다 스님이 일러주네, /높을 탁, 주석 석,

杖頭自有曹溪水(장두자유조계수) 석장의 끝에 혜능 선사 조계의 물 닿아있는가. / 마을 조

不借乾坤雨露恩(불차건곤우로은) 천지의 비외 이슬 그 은혜를 빌리지 아니했네.

 

<현지 안내문에서>

 

 

 

조사당

조사당은 사찰에서 부처님의 법을 이어 온 조사(祖師) 스님 또는 사찰 창건주 등을 기리려고 만든 전각으로 조사전 또는 조당이라고도 한다.

부석사 조사당은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대사를 모시고 있는 전각이다. 처음 지은 시점은 분명하지 않으나 고려 신종 4년(1210)에 단청을 했다는 기록이 있어 그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고려 우왕 3년(1377)에 다시 지었으며, 조선 성종 21년(1490)에 고쳐지었다.

조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크기이고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이다. 지붕처마를 받치는 부재인 공포를 기둥 위에만 짜서 올린 주심포 양식이다. 출입문 좌우 벽 안쪽에는 고려 후기에 그린 벽화가 있다. 일제강점기인 1916년에 건물을 수리할 때 벽화를 떠어 내어 무량수전에 보관하다가 지금은 부석사 성보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이 벽화는 국보로 지정되어 있으며 우리나라 사찰 벽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제석천, 범천. 사천왕이 그려져 있다. 원래 벽화가 있던 자리에는 본뜬 그림을 복원해 두었다.

조사당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의 사찰 건축 연구에 매우 중요한 전각이다.

<현지 안내문에서>

 

 

 

 

 

응진전, 자인당으로 왔습니다.

 

 

 

 

 

 

 

 

 

 

 

 

 

 

 

 

 

 

 

 

 

 

 

 

 

 

북지리 석조여래좌상 / 보물

자인당에 있는 세 분의 불상은 원래 부석사 동쪽 절터에 있었던 것을 옯겨놓은 것인데, 보물로 지정된 불상은 석조여래좌상중에 양편에 모셔진 두 분의 비로자나불상이다.

대좌와 광배가 완벽하게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 석불로 8각의 하대석에는 향로와 사자상이, 중대석에 앉아 있는 형태의 불상과 연꽃 등을 공양하는 보살상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동쪽 불상은 얼굴이 타원형이며 약간의 미소를 머금은 흔적이 있으며, 서쪽 불상은 동쪽 불상보다 좀 더 당당하며 신체를 표현하는 선들이 부드러운 편이다.

세분의 불상 중에 가운데 모셔져 있는 불상은 2010년 2월 24일 보물로 지정된 '영주 부석사 석조석가여래좌상'이다. 동그란 얼굴, 항마촉지인의 수인과 꽃문양이 조각된 승각기(내의), 부드러우면서도 사실적인 옷 주름의 표현, 높은 삼단의 대좌에 부조된 향로와 사자, 합장한 보살상 등에서 통일신라 9세기의 불상 양식을 찾아 볼 수 있다. 세 불상 모두 부석사 인근의 절터에서 발견되었으며 조각수법이 같다는 점에서 같은 시기에 동일인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현지 안내문에서>

 

 

 

 

 

조그만 이 건물은 ?

 

 

 

 

 

단하각

 

 

 

 

 

내부엔 이렇습니다.

 

 

 

 

 

되돌아 내려갑니다.

 

 

 

 

 

 

 

 

 

 

 

 

 

 

 

 

 

 

 

 

 

 

 

 

 

 



 

 

 

 

 

관음전이든가?

과거 이곳을 찾았을때 앞쪽 경관이 좋아 다시 찾았습니다.

 

 

 

 

 

수목이 많이 자라서인지 옛날 기억의 모습은 아닙니다.

 

 

 

 

 

부석사를 둘러보고 내려갑니다.

 

 

 

 

 

주차장으로 내려와 오늘 일정을 마무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