祝文은 입으로 외워야
어느 큰 동네에서의 일이다.
거의가 다 무식한 대중이고, 윗도리로 양반이 몇 집 섞여 사는데, 그들은 글을 배워서 제법 유식하다.
그런 중에도 이진사라는 노인이 있었는데 글도 출중할 뿐만 아니라 행신이 점잖고 또 까다로와 대하기에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하지만 같은 일가에 이생원 이란 분은 그래서 소과(小科)하나 못했는지 몰라도 사람이 무던하고 텁텁하여 누가
뭐래도 개의치 않고 마을사람들의 문서 치닥거리를 많이 해 준다.
택일(擇日)은 물론 사주(四柱).혼서지(婚書紙)서부터 지방(紙榜),축문(祝文) 까지 그의 손을 빌지 않은 이가없다.
그리고 자신이 밤중에 직접가서 친히 읽어 까지 주고 또 술잔간에 대접하면 달게 자시고 하니 어찌 보면 수더분
하고 평민적인 것 같기도 하지만, 또 어찌 보면 주책없는 늙은이 같기도 한 그런 분이다.
어떤 집에서 마침 제사를 당하였는데, 이생원에게 가 보았더니, 이 양반이 전에 없이 출입하여 댁에 안 계시다.
그렇다고 예년 쓰던 것을 축문이나 지방없이 지낼 수도 없고 일이 매우 난처하게 되었다.
그래 제관끼리 모여 상의를 하였는데, 이진사에게 라도 부탁해 보면 하는 의견이 나왔다.
『고 꼬장꼬장한 양반이 들어 줄라고?』
『아니야 우리가 공연히 그분을 멀리했지 누가 그분께 부탁이나 해 봤어?』
『하긴 그래. 그럼 성님이 좀 가서 말씀해 보시구려』
그중 나이 먹은 이가 대표로 이진사를 찾아보고 청을 했더니, 의외로 아주 선선하게 응해준다.
『내 이따 시간 되거든 내려가 주마. 다른 준비나 잘 해 둬라』
『거봐. 내 뭐랬어? 우리가 공연히 서먹서먹해 했지. 얼마나 속이 트이신 분이시라구?』
모두들 칭찬해 마지 않으며, 시간이 되자 진설(陳設)까지 마치고, 이진사가 오기만 기다린다.
성큼성큼 들어오는데 보니까 빈손이다.
『어서 참신(參神)해라』
(지방도 안 붙이고?)
그러나 제사 도중에 따질 수도 없고 그래 참신을 하고 모두 꿇어 앉으니까,
이진사가 축문을 외운다.
『 「쇠돌아 많이 먹고 가거라」이제 됐다. 어서들 지내라』
하더니 휘적휘적 나가서 가 버린다.
(그러나 이럴 법이 있나? 아무리 제집 심부름이나 해 주더라도 우리에게는 아버지 제산데)
그런 대로 제사절차를 다 마치고 음복하는 자리에 불근불근 야단들이다.
젊은 축들은 이 길로 찾아가서 따지자 커니 밝은 날 떼거리로 몰려가 단단히 본때를 보여야 한다는 둥 술기운도
있고하여 기염을 올리다가, 내일 새벽에 일어나 다시 상의하기로 하고 들 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아침이다. 맨 큰형이 지난 꿈 이야기를 섞어서 말한다.
『이진사를 찾아가 따진다느니 보다 약주병이나 들고 가 사례해야겠네.
꿈에 아버님을 뵈었는데「예야 오늘제사 참 잘 먹었다」그러지 않으시겠어 글쎄!
다른 때는 모처럼 제사날이라고 찾아와도 대청에 삑 둘러섰느니 모두 양반들이라 감히 올라 서지도 못하고 기웃
기웃하다 말고서 돌아가고 하였는데, 엊저녁에는 이진사께서 양반들 밀어 제끼고 많이 먹고 가라고 까지 해 주셔
서 참 잘 잡수셨다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