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이야기

<중앙신인문학상> 평론부분 당선작

정헌의 티스토리 2013. 9. 24. 23:50

          [중앙신인문학상] 평론 부문 당선작

           [중앙일보] 입력 2013.09.23 00:16 / 수정 2013.09.23 16:02

           우리가 만날 수 있는 단 하나의 가능성, 소설 - 김연수의 근작들에 관한 몇 가지 독법 -노태훈-

 


 0. 이것은 소설이다, 소설이 아니다

 작가란 모름지기 이야기의 힘을 믿는 사람일 것이다. 동시에 그 이야기를 어떻게 전달하고, 공유할 것인지를 누구보다 고민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이야기가 그것을 읽는 사람의 삶을 변화시킬 수도 있을까. 물론 그럴 것이라고, 그래왔다고 전통적인 문학관은 응답할 것이다. 우리의 성장 아래에는 무수한 이야기들이 깔려 있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소설이라면 어떨까. 이야기가 곧바로 소설일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일군의 쿨한 작가들은 이야기가 가진 근본적 속성에 회의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이야기가 소설이라는 옷을 입는 순간 그것은 예술 장르의 일종으로 속박당하고, 다만 작가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얼마나 잘 가지고 놀 수 있는지를 보여줄 따름이라는 듯이 작품을 써나간다. 다시 말해 이들은 소설 그 자체에 관심이 있는 작가이다. 그런가 하면 소설가는 소설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인생에 관심이 있는 것이라 말하는 작가도 있다. 이들은 한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혹은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세계를 올바로 바라보기 위해 소설에 복무한다. 이들에게 이야기는 곧바로 소설이 되어야 하는 것이며 소설이라는 외피는 드러내지 않을수록 좋은 것이다. 물론 이 두 부류가 옳고 그름의 문제로 판별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님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될 터. 그러나 전자를 장르로서의 서사 즉 소설이라 명명하고, 후자를 근본으로서의 서사 즉 이야기라고 부를 수 있다면 김연수의 근작들이 소설과 소설 아닌 것(이야기) 사이를 줄타기하고 있음은 언급해야 한다. 이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은 전위적인 실험성이 아니다. 그는 무의식에 의존하거나 비의식적 글쓰기를 통해 소설 아닌 소설을 만들어버리는 흔한 방법이 아니라 전통적인 소설관에 깊숙이 뿌리박은 채 “소설-되기”를 실현해 자신만의 소설을 만들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이제 그의 소설들은 소설이면서 소설이 아닌, 그저 김연수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끊임없이 침잠해 들어가고 있다.

 

1. 이야기의 풍경 혹은 풍경의 이야기-그때, 그곳에서


 김연수의 소설은 풍경의 소설이다. 그에게서는 항상 인물이나 사건보다 배경이 앞선다. 세계가 먼저 있고, 그 이후 모든 것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세계는 항상 완벽하다. 윤리적인 의미가 아니라 그것은 다만 자족적이라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원더보이』에서 세계의 모든 것을 기억해버리는 이수형은 하나의 풍경 속에 그가 기억해야 할 모든 것을 입력한다. 색깔과 어휘들이 숫자로 변환되는 과정을 넘어 여기에 이르면 인간이라는 개체마저도 세계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펼쳐진 풍경의 일부로, 세계를 구성하는 이미지로 인물은 기능할 뿐이다. 따라서 이때의 풍경이란 인물과 사건을 보조하는 ‘배경’으로서가 아니라 이 모두를 포괄하는 “커다란 풍경”이다. 과거의 기억은 그것이 떠오르는 순간 그 자체로 완벽함을 보장하며 그 완벽함을 비집고 들어갈 인간은 결코 없다. 그저 그 풍경 속에 존재하고 있을 뿐, 어느 누구도 과거로 돌아가 그 기억을 부술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어떤 인물의 이야기가 가능해지려면 그 이야기가 가능해질 수 있는 풍경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김연수 소설의 핵심 중 하나는 같은 사건에 대한 각자의 기억이 모두 다르다는 것이다. 그것은 한 사람의 인생을 총체적으로 재구성하는 수준이기도 하고(『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엄마의 마음을 돌리려고 아버지와 함께 내려왔던 20년 전 통영의 어느 날이기도 하며(‘우는 시늉을 하네’), 둘이서 같이 봤던 영화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벚꽃 새해’). 그 서로 다른 이야기들이 겹쳐질 때 비로소 세계의 풍경은 완성되는데, 이를 가능하게 하려면 또 하나의 풍경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과거의 기억이나 사건이 하나의 ‘원 풍경’으로 존재한다면 이를 지금 여기로 소환할 수 있게 하는 또 하나의 ‘현 풍경’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풍경들은 다시 “커다란 풍경”이 되어 세계를 이어가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이 풍경 속에서 인물들은 서로의 이야기를 공유하고 그것이 겹치는 지점에서 일종의 깨달음을 얻는다. 그것은 대체로 사랑의 외피를 걸치고 있지만 각성이기도 하고, 성장이기도 하며, 연대이기도 하다.

 인물이나 사건들을 풍경 속에 가려놓고 그 풍경이 아니면 절대 가능하지 못할 소설을 써내면서, 김연수는 이를 플롯의 차원으로 확장하고 있다. 풍경이 단순히 인물과 사건의 배경이라는 개념이 아님은 여기서 명확해진다. 이를테면 여러 개의 사건들이나 여러 명의 인물이 풍경이 될 수 있다는 것인데,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에서 정지은이 곧 카밀라이자 희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이 세 명을 제외한 모든 것들은 일종의 풍경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1980년대의 진남이라는 정지은과 이희재의 세계를 만들어놓고 정희재를 그저 그 속에서 ‘걸어가게 만들기만 하면’ 된다는 것. 그리하여 그 거대한 풍경이 독자로 하여금 쓰지 않은 이야기를 읽을 수 있게 하고, 이때 비로소 하나의 소설은 완성된다.

 

2. 두 개의 이야기, 그리고 소설가의 일


 여기에서 다루고 있는 작품들의 특징 중 하나는 “소설가”의 등장이다. 거의 모든 작품에서 끊임없이 쓰는 자를 등장시키는 김연수의 소설들은 “변신”하는 인간들에게 숨겨진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찾는 과정이다. 다르게 말하면 변신의 가능성이 이야기에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우는 시늉을 하네’에서 부재한 사람은 아버지다. 어머니가 소설가의 지위를 부여받았다.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아버지를 이해해보고자 마음먹은 자는 이들의 아들 영범이다. 그런데 영범은 아버지의 진심을 아버지의 행동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읽었던 책으로 이해한다. 예컨대 아버지가 읽었다던 책을 어머니인 윤경의 서가에서 발견할 때, 소설 속 남녀가 사랑을 확인하는 유치한 사랑 묘사에 그어진 밑줄을 확인했을 때, 영범은 아버지의 “평범한 진심”과 그 순간의 “최선”을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이럴 때 우리는 텍스트에 대한, 소설에 대한 김연수의 도저한 믿음이 어디서 오는지 질문할 수밖에 없다. 핵심은 여기에 있다. 하나의 인간을 이해하려면 내가 모르는 다른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것. 그것은 노력이 요구되는 일이면서도 벼락처럼 다가오는 것이기도 하며 그 이해의 이면에는 나와 당신을 둘러싼 이야기들이 있다는 것이다.

 ‘푸른색으로 우리가 쓸 수 있는 것’에서 소설가 정대원이 실연의 고통을 잊기 위해 치과를 찾아가 생니를 뽑았지만 전혀 아프지 않았다는 언급을 상기해보자. 고통이란 언제나 단수였으며 그 고통을 사라지게 한 것은 “세계의 겹침”이었다는 부분 말이다. 단층의 시공간은 딱 그만큼의 세계를 보여준다. 설령 그것이 “진심”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온전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은 그것이 “한 번”이기 때문이다. 세계에 대한 다른 이야기가 겹쳐 들어와 그것이 다층의 시공간으로 바뀔 때, 풍경은 변화한다. 이것이 다른 인간, 다른 삶에 대한 이해의 단초로 기능함은 물론이다. 그리고 어김없이 그러한 깨달음은 소설가에 의해, 소설을 통해 발생한다.

 ‘파주로’는 이러한 관점에서 상당히 인상적인 작품이다. 소설가로서의 자의식과 현실에의 인식이라는 두 문제에 대한 김연수의 태도 때문이다. 소설가는 어떤 사람인가. 다른 사람들을 “좋은 길로 인도”하는, “사회 현실에 예민”한 사람이다. 또 소설가는 “어떤 도그마에도 갇히고 싶지 않다면서” “다른 길을” 걸어가는 “남다른” 사고의 소유자이다. 일반적으로 그러하다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김연수에게 소설가는 진리를 설파하거나 현실을 벗어나 영혼의 자유를 꿈꾸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속세에 뿌리박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눈여겨보는 존재다. 여기서 김연수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내겠다는, 소설가는 결국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존재이며, 마지막에 남는 것은 타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임을, 그리하여 그것이 바로 “소설가의 일”임을 말하고 있다.

 


3. 이야기라는 신앙, 소설이라는 신학

 『원더보이』는 공감과 이해라는 것이 ‘초능력’을 통해서라야 가능함을 보여준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하고, 또 그걸 다른 사람들에게 그대로 전달할 수 있는 능력”(『원더보이』, 192면)을 가지고 있는 소년 정훈이 작가가 되겠다고 결심하고 결국 『원더보이』를 써낸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라 할 수도 있겠다.

“네게는 고통받는 이들의 삶과 완벽하게 공감하는 능력이 있으니 이미 절반은 작가나 마찬가지지.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독자들에게 자신이 보고 듣고 맛보고 경험한 것들을 그대로 전달할 수 있는 재능이야. 넌 그걸 가지고 있어.”(『원더보이』, 224면)

이럴 때 소설 쓰기란 초능력의 실천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이야기가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 이야기를 통해 “혼자가 아니라”(『원더보이』, 320면)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 이러한 신앙이야말로 김연수 소설을 지탱하는 힘이다. 이야기가, 아니 소설이 우리를 구원해줄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다만 이를 통해 서로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소박하지만 절실한 믿음. 이때 소설 읽기란 “날개 달린 희망”이자 “심연을 건너가는 것”이며, “우리가 두 손을 맞잡거나 포옹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327면).

 이 지점에서 김연수가 놓치지 않은 것은 소설 쓰기만큼이나 소설 읽기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백지의 공포 앞에서 떨고 있는 사람이 작가라면 무수한 문자들 앞에서 절망하는 사람은 독자이다. 그러므로 읽는다는 것은 두렵고 무서운 일이다. 나아가 “벌거벗은 형태의 읽기”, 혹은 최대의 독서란 읽을 수 없는 책을 읽는 것이며 이는 곧 타인의 꿈을 꾸는 것인데, 이것이 실현된다면 우리는 누구라도 미쳐버릴 수밖에 없다고, 사사키 아타루는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무의식에 문득 닿는 그 청명한 징조만을 인연으로 삼아 선택한 책을 반복해서 읽을 수밖에” 없다. 여기까지 오면 우리는 ‘김연수’라는 서사의 반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짐작 가능해진다. 요컨대 독자의 지위는 서로 초능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작가의 그것과 같다고 볼 수 있고, 소설은 곧 그것 자체로 삶이거나 인간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삶을 읽어나간다는 것은 그래서 단순한 독서가 아니라 세계와 맞서는 투쟁이 될 수 있다. 그러니 이렇게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우리’가 있다면, 나의 이야기와 당신의 이야기가 만나 ‘우리’의 이야기가 된다면, “뭐라도 할 것이라고.”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원더보이』, 320면)

 


4. 쓰지 않은 이야기, 끝나지 않는 독서

 ‘푸른색으로 우리가 쓸 수 있는 것’에서 소설가 정대원은 검은색 볼펜으로 쓴 자신의 소설이 실제의 경험이나 현실에 비하면 너무나 보잘것없는 것임을 깨닫고 이를 빨간색으로 다시 고쳐 쓴다. 이를 통해 그는 구원받았다고 느끼지만 자신이 믿었던 어떤 진실이 거대한 환상임을 깨닫게 되었고 다시 푸른색 볼펜으로 소설을 고쳐 쓰려 한다. 그러나 그는 단 한 줄의 문장도 쓰지 못했고, 푸른색 볼펜으로 쓸 수 있는 문장은 그저 “아무도 없는 동물원을 가득 메운 침묵 같은 문장들”이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니 푸른색으로 쓰인 혹은 씌어지지 않은 문장은 “우리”가 쓸 수밖에 없지 않은가.

 밀란 쿤데라는 소설을 “작가가 실험적 자아(인물)를 통해 실존의 중요한 주제를 끝까지 탐사하는 위대한 산문 형식”이라 정의했다. 이러한 문학사적 정의와 또 이를 위해 빽빽하게 채워 넣은 서사 안에는 그러나, 독자의 자리는 거의 마련되어 있지 않다. 커다란 풍경 속에서 결국 소설가도 한 명의 독자로서 자리하는 김연수의 소설들은 그래서, 성글지만 미덥다. 이러한 지점에서 “우리는 믿어야 할 충분한 이유를 발견했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며, 확신에서 비롯된 복종은 이미 우리의 주체성을 통해 ‘매개된’ 것이기 때문에 진정한 복종이 아니”라는 지젝의 언급을 음미할 만하다. 요컨대 소설은 믿음을 전제로 한 만남의 한 형식이기도 하면서, 어쩌면 이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단 하나의 가능성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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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심사평
작가의 ‘미지의 공간’ 탐색하는 비평적 태도 높이 평가


평론 본심 중인 문학평론가 황종연(왼쪽)·이광호씨. 김상선 기자
문학비평은 역설적인 글쓰기라고 할 수 있다. 비평은 어떤 대상이 있어야 글쓰기가 가능하다는 측면에서 수동적이지만, 그럼에도 다른 언어로 그 대상을 다시 태어나게 한다는 측면에서 창조적이며 자동적이다. 문학비평이 자동적인 글쓰기가 된다는 것은 대상의 안으로 들어가서 그 대상의 내적 영역을 확장시킨다는 측면에서 그러한 것이다. 투고된 원고들에서 가장 아쉬웠던 것은 비평의 창의성이 미흡했다는 점이다. 널리 알려진 익숙한 독법으로 텍스트를 재호명하거나 진부한 이론과 모호한 개념으로 텍스트를 정리하려는 태도였다. 이는 작품을 단순히 내용적인 차원으로만 환원시켜 버리는 문제와 연관돼 있었다. 중요한 것은 텍스트가 어떻게 문학적인가를 밝혀내려는 정밀한 노력이다.

 이번 투고작의 경우는 시를 대상으로 한 글들이 상대적으로 논리와 문장의 불안정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개별 시 작품이 어떻게 시적인가 하는 질문을 밀고 나가지 않으면 시 비평은 인상 비평에 머물 수밖에 없게 된다.

 소설을 대상으로 한 비평에서 마지막까지 논의된 것은 ‘심연을 향한 응시와 묵시적 글쓰기-박성원론’과 ‘우리가 만날 수 있는 단 하나의 가능성, 소설 -김연수의 근작들에 관한 몇 가지 독법’이었다. 두 편 모두 어느 정도의 논리와 문장의 안정성을 확보하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앞의 글의 경우 ‘심연’ ‘묵시록’ 같은 개념들이 대상 작품에만 해당된다고 할 수 없는 광범위한 것이고, 응시의 주체와 응시의 방법에 대한 비평적 분석이 뒷받침되지 못했다. 상대적으로 노태훈씨의 글은 김연수 소설의 문학성에 대한 창의적인 분석력을 보여주고 있었고, 비평적 글쓰기로서의 매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논리의 밀도가 아쉬움을 남겼지만 이 글을 당선작으로 결정하게 된 것은 작가가 쓴 것과 쓰지 않은 것 사이의 미지의 공간을 탐색하는 비평적 태도 때문이고, 그 태도는 이미 문학적인 것이다.

◆본심 심사위원=이광호·황종연(대표집필 이광호)
◆예심 심사위원=신형철·이수형

 

 


평론 당선 소감
치기를 패기로 여겨주신 듯 … 더 열심히 읽고 쓰겠습니다


어릴 적 읍내에 서점이라고는 두 군데밖에 없었습니다. 작은 서점과 그보다 조금 큰 서점. 만화책이라도 좋으니 책이라면 뭐든지 사보라 했던 아버지가 없었다면 서점보다는 운동장에 더 자주 갔을 겁니다. 그래도 운동장을 넘나들며 바깥으로 나가 놀기나 좋아했던 제게 문학적 감수성이라고 할 만한 게 있다면 모두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입니다. 두 분 모두 사랑하고 감사합니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형은 방황하고 동생들이 제 앞길을 척척 열어젖히는 신기한 집안 분위기를 조성해준 욱, 현에게도 고맙다는 인사를 처음으로 전합니다.

 제 10대와 20대를 함께했으나 30대도 또 같이 가야 하나 고민하게 만드는 엔비 친구들, 대학 생활을 외롭지 않게 해준 구국회 멤버들, 무엇보다도 저와 같은 책을 읽어주고 저의 시답잖은 장광설마저 들어준 황모, 이모, 현장문학읽기팀, 이하 대학원의 여러 동학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그다지 진중하지 못한 제자인데 따뜻하게 바라봐주시는 방민호 선생님과 모교의 여러 선생님들께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글 속에 어려 있는 치기를 패기로 보아 넘겨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도 인사를 드립니다. 권영민 선생님, 마지막 제자라는 과분한 감투를 주신 것도 모자라 항상 곁에 계셔주셔서 한 걸음씩 내디딜 수 있었습니다. 다시 선생님의 자취를 더듬으며 따라가겠습니다. 감사의 공간으로도 부족한 지면에 감히 제 다짐을 두 가지 적어 놓습니다. 열심히 읽고 더 열심히 쓰겠습니다. 그리고 지정은이라는, 아주 예쁜 사람의 옆자리를 계속해서 지키겠습니다.

◆ 노태훈=1984년 경남 산청 출생.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동대학원 박사 과정 재학 중.

사진=김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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