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창 성령산, 수승대 트레킹 길 (성령산 448m)
거창 위천면, 북상면 일원은 남덕유산 자락에 위치하며 경관이 수려하다.
그중 수승대는 접근과 시설에 있어서 편리한 점이 많다.
트래킹이 아니더라도 금원산 자연휴양림과 월성계곡을 차량으로 이동하면서 군데 군데 경관좋은 곳을 둘러볼수
있다.
성령산은 금원산, 현성산에서 수승대 쪽으로 뻗어내린 지능선상의 봉우리다.
산 자체야 별 볼품이 없지만 수승대와 연계하여 산책하듯 다녀올수 있다.
수승대 트래킹길은 성령산을 비롯하여 주변 문화재와 자연 경관을 연계하여 길을 다듬어 탐방할수 있게하였다.
▷ 가는 길
산청 - 함양 안의 - 거창 마리면 - 위천면, 수승대
▷ 탐방코스
동계 정온 종택 - 성령산 - 말목고개 - 입상 석불 - 갈계숲 - 행기숲 - 용암정 - 수승대 - 동계 정온 종택
( 쉬엄 쉬엄, 시간은 별 의미가 없음 약 4시간 30분 / 2015. 6. 20 )
▷ 탐방 안내도
▷ 탐방 후에
△ 거창군 위천면 강천리 50-1에 위치한 동계(洞溪) 정온 (1596-1641) 종택이다.
오늘 탐방의 시작을 수승대 주차장에서 시작할까 하다가,
성령산 끝자락에서 부터 시작하자 싶어, 동계 종택 앞 도로변에 주차를 한다.
특별히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지는 않지만, 외부 탐방객이 많은 곳이 아니어서 도로변에 주차의 여지는
충분하다.
이정표에 따라 어떤곳은 동계 종택으로, 어떤 곳은 정온 종택으로 표시되어 있으나 같은 집이다.
△ 현 주거를 하고 있는 것 같아 조심스레 엿본다.
주인장,
어디서 오셨소 ?
아! 예..... 인근에서 왔습니다.
잠시 둘러보러 왔습니다.
.........................
주인이 살고 있는 집을 둘러볼 때에는 미안스럽다.
동계종택
조선 중기의 문신 동계 정온(1569~1641)이 태어난 집으로, 후손들이 순조 20년(1820)에 다시 짓고 정온의
신위를 사당에 모셔 오늘에 이르고 있다.
솟을대문의 대문간채를 들어서면 ‘ㄱ’자형의 사랑채가 있고, 사랑채 안쪽으로 ‘一’자형의 안채가 자리하였다.
안채의 오른쪽에는 뜰아래채가, 왼쪽에는 곳간채가 있다.
안채의 뒷쪽에 따로 담장을 두르고 3문을 설치한 후 사당을 세웠다.
사랑채는 꺾인 부분을 누마루로 꾸미고 눈썹지붕을 설치한 점이 특이하다.
△ 동계 종택 대문앞에 이정표가 있다.
모리재, 강선대 쪽은 도로를 따라 가는 길이다.
수승대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 동계 종택을 뒤로 한다.
△ 반구헌 (反球軒)
야옹野翁 정기필鄭夔弼(1800~1861)의 주택으로 1870년대에 건립 또는 중건되었다.
정기필은 헌종과 철종 연간에 영양현감을 역임하였는데 청렴한 인품과 덕행으로 명망이 높았다.
관직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재산과 거처가 없자 당시 안의현감의 도움으로 이 반구헌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반구헌이란 ‘스스로 자신을 뒤돌아보고 반성한다는 의미인 반구어제심反求於諸心’에서 유래한다.
동계 종택 옆집이다.
공사 중으로 어수선 하다.
물론 위 두집은 초행은 아니다
△ 담장이 정갈하다
△ 강동마을 회관앞을 지나 도로를 따라 내려간다.
△ 진행 방향으로 벗나무 숲과 다리가 보이는 곳에 안내도가 있다.
주변 확인차 다리목으로 쬐끔 진행해 본다.
△ 수승대로 가기위해서는 이 다리를 건너,
좌측 다리를 건너, 강을 따라 1km쯤 도로변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 안내도상에도 나타나는 벗나무 숲이다.
안내도에 올리기에는 좀 민망하다.
울타리가 쳐져 있어 들어 갈수도 없고,
또한 그렿게 정갈하거나 넓은 숲으로 보이지 않는다.
△ 몇걸음 되돌아 가,
안내도 옆에서 들머리를 잡는다.
빨간, 사과모양의 이정표가 있다.
△ 입구를 올라서면 일련의 묘지가 있다.
수풀 무성하고,
인적은 드물다.
△ 멋진 소나무숲을 기대하며 지능선을 따른다.
△ 요즘 ? 좀전 ?
여느 지자체에서 너도 나도 둘레길을 만들었다.
별 인기없는 길은 묵어 관리도 안된다.
△ 야트막한 봉우리를 넘으면,
동계종택이 있는 강동마을에서 수승대 썰매장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있다.
△ 위 고개에서 바라본 강동마을쪽이다.
혹시 하는 마음으로 조그만 봉우리를 넘어 왔지만 별것도 없다.
마을에서 이 길을 따라 오르면 지름길이 된다.
△ 너머로는 썰매장의 상부가 보인다.
나중,
트래킹을 마칠때 이 고개를 넘어 동계종택으로 갔다.
△ 이 고개에 이정표가 있다.
△ 능선을 따라 오른다.
△ 전날 내린 비로,
나무가 싱싱하다.
△ 현수교, 야영장 쪽에서 올라오는 갈림길을 만난다.
현수교 앞쪽에서 오르는 길도 있고, 썰매장 바로 앞에서 오르는 길도 있다.
현수교쪽에서 오르는 길로 생각하면 되겠다.
이 이정표 직전에 이정표는 없지만 갈림길이 있다. 이 길이 썰매장 앞으로 이어지는가 보다.
전망대는 조금 윗쪽의 팔각정을 말하는 것 같다.
△ 비온후에는
쭉쭉 곧은 리기다 소나무가 매력있게 보인다.
△ 팔각정이다.
이정표에 전망대로 표시된 곳인가 싶다.
△ 이곳 팔각정에서의 조망이다.
△ 시야가 제한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수승대쪽으로 조망이 트인다.
한참(25분쯤)을 쉬었다 간다.
△ 이곳 팔각정의 이정표이다.
원각사, 요수정으로의 갈림길이 있다.
아마 수승대 쪽에서 이곳 성령산으로 오르는 길은 5-6곳 있는 것 닽다.
△ 정상으로 향한다.
△ 헬기장이 있다.
오른쪽 헬기장 건너로 길이 보인다.
성령산 정상은 저곳에 있다.
이곳 헬기장 입구의 이정표에는 정상표시가 없다.
무심코 아래 이정표를 따라 모재재, 현성산쪽으로 향하면 정상을 못볼 수도 있겠다.
△ 위 헬기장에 오르면 보이는 이정표이다.
정온 종택( = 동계 종택) 쪽에서 올라왔다.
△ 헬기장에서 오른쪽으로 들어서면 이내 성령산 정상이다.
높은 산이 아니어서 특별히 정상의 의미는 없지만,
나무로 된 정상 표지판이 있다.
동계 종택에서 1시간 10분쯤 소요되었으나 팔각정에서 과한 휴식을 제외하면 40분이면 오를수 있다.
△ 정상 주변이다.
높이가 낮아 정상이랄것도 없지만 소나무 아래로 약간 시야가 트인다.
△ 또한,
정상에서 수승대로 내려가는 길이 보이나 이정표는 없다.
△ 운무로 시계가 불량하다.
△ 헬기장으로 되돌아가 모리재, 현성산 방향으로 향한다.
△ 잠시 잘록한 고개로 내려선다.
좌.우 길의 흔적은 보이나 다니기에는 곤란해 보인다.
△ 살짝 오르는 곳에 이정표가 있다.
좌측은 정온 종택쪽이고,
우측 모리재 쪽으로 향한다.
△ 농산교 갈림길이 있다
용암정 인근에 삼거리가 있더니, 그곳으로 이어지는 것일까?
△ 말목고개 상부이다.
생태통로 좌우로 철망이 쳐져있다.
모리재까지 가지않고 이곳 말목고개로 내려설 건데.......
순간적으로 사방 철망이 쳐져있어 내려갈 곳이 보이지 않는다.
어디로 내려서야 하나? 하며 터널상부를 지난다.
△ 터널 상부에서 바라본 북상면 쪽이다.
이곳 말목고개로 내려서 저 도로를 따라 한동안 진행할 것이다.
△ 위천면 쪽이다.
이 길을 따라가면 출발지인 동계 정온 종택이 있다.
아래로 내려다 보니, 도로변 커브가 진곳(우측 철망의 끝지점)에 이정표가 보인다.
저곳으로 내려가면 되겠구나..........
△ 터널 상부를 건너 도로변으로 내려섰다.
성령산 정상에서 약 40분쯤 소요되었다.
도로를 따라 정온 종택 3.16km를 알리는 이정표가 있다.
△ 내려온 곳과,
통과할 터널을 바라본다.
△ 말목고개 표지석을 확인하고,
△ 터널을 통과하여,
되돌아 본다.
△ 이내,
도로 좌측편에 표지판이 보인다.
△ 이런 집들을 보면 정겹다.
△ 석불 입상의 들머리이다.
△ 이정표가 있어 길찾기는 어렵지 않다.
이곳 도로변에서 100m로 표시되어 있다.
△ 농산리 석불입상으로 가는 길이다.
길은 완만하다.
△ 석불이 산 능선에 있을까? 중턱에 있을까? 하며 진행하니
금새 뒷모습이 보인다.
△ 석불입상의 옆모습이다.
△ 농산리 석불입상.
거창 농산리의 낮은 야산 기슭에 있는 이 석불은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불상 양식을 따르고 있다.
입불상으로 자연석을 적당히 다듬어 윗면에 두 발을 새겨 놓은 1매의 대석과, 대석에꽂아 세울 수 있도록 한 돌
에 광배를 함께 조성한 불신 등 두 개의 돌로 구성되었다.
신체에 비하여 다소 머리부분이 큰데 얼굴이 부분적으로 손상되었지만 전체적으로 후덕한 느낌을 준다.
양어깨를 덮어 내린 통견(通肩)의 법의는 가슴에서 ‘U’자형 옷주름을 이루다 잘록한 허리 부분으로부터 ‘Y’자형
으로 갈라져 양 대퇴부에서 대칭적인 의문(衣紋)을 이루는 이른바 우전왕(Udyana王)식 옷주름의 형태를 나타
내고 있다.
이와 같은 형태는 통일라 700년 전후 추정의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사암제불입상을 비롯하여 719년 감산사상,
730년~760년경 추정 경주 굴불사지 사면석불 남면 불입상 등 8세기 이후 상들에서 나타나는 양식적 특징으로
이 불상의 조성시기를 추정하게 해 준다.
두 발은 불신과 별도로 대석 위에 조각되어 있는데 마멸과 손상이 심하여 왼쪽 발가락 일부만 형태를 유지한다.
우측 상단부가 깨어져 나간 광배는 불신과 한 돌로 이루어진 배 모양의 주형거신광舟形擧身光으로 어느 정도의
형태는 유지하고 있으나 화염문 등 구체적인 문양 표현은 알 수 없다.
비록 부분적인 파손이 있으나 이 불상은 야산의 구릉에서 원위치를 지키고 있는 귀중한 불상으로 규모가 비교적
크고 정제된 조각수법을 보여주고 있으며 비슷한 예가 많지 않은 점에서가치가 있다.
△ 좀더 가까이서.
△ 되돌아 나와 도로를 따른다.
이곳은 도로 좌측으로 쬐끔 떨여져 있는 비닐하우스로, 야생화를 재배하고 있다,
이곳 도착 직전에 트래킹 길은 좌측 어느 농장쪽으로 올라 강선대로 가도록 되어있지만,
도로를 따라 직진하여 북상면으로 향한다.
△ 장야교를 건너면
강선대로 돌아서 내려오는 수승대 트래킹 길을 다시 만나게 된다.
갈계숲은 북상면 소재지 내에 있다.
중간 도로변에 만월당이 있다.
△ 만월당 정종주 선생이 문인들과의 교류 장소이다.
△ 면소재지 쪽으로 이동하여 갈계숲으로 향한다.
△ 숲 아래 여러군데 상사화 군락지를 조성중이다.
△ 두세군데
어려운 글이 보인다.
△ 숲은 사람들이 많이 왕래하여
하단 부분이 깨끗할때가 좋다.
한적한 곳 주인을 기다리는 다인승 자전거만 덩거리니 있다.
△ 갈계숲,
덕유산 기슭에서 발원한 원천이 송계를 지나 갈천(葛川)에 이르러 동서로 나뉘어 흐르면서
시냇물이 자연섬을 만들고 수목이 우거져 아름다운 풍치를 이루고 있는 곳이다.
조선조 명종때 유현(儒賢) 석천 임득번(林得蕃)과 그의 아들 효간공, 갈천 임훈 등 삼형제와
문인들이 시를 지으며 노닐던 곳으로 숲안에는 가선정, 도계정, 병암정, 신도비 등이 세워져
지조 높은 선비들의 학덕을 기리고 있다.
갈천선생 호를 따서 세워진 가선정이 있어 가선림이라고도 하고 마을 이름을 따 치내숲이라
고도 부르며 청학교가 놓인 뒤 청학림이라고도 하는데, 임정 가선림 청학림 모두 학덕 놓은
선비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 갈계숲을 지나 면소재지로 들어간다.
북상초등학교 앞이다.
△ 도로변엔 표지석이 더 예쁘다.
△ 면사무소 앞 삼거리로 내려왔다.
삼거리 한반도를 닮은 바위에 면민의 상으로 표시되어 있다.
△ 북상면에는 몇군데 음식점이 있다.
주로 면민들이 이용하는 것 같다.
분위기 있어 보이는 맛집은 보이지 않는다.
△ 북상면에 위치한 만월당과 갈계술을 둘러보고 장야교로 되돌아와,
위천변을 따라 트래킹 길은 이어진다.
△ 하천가.
선녀와 나뭇꾼 길 안내표지판이 보인다.
건너편이 행기숲인가 싶은데 이곳에서 보니 숲다움이 별로 없다.
북상면앞 차도변에서 보면 숲다운 숲으로 보일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행기숲
월성계곡의 성천(= 위천)과 송계사 계곡의 갈천(=소정천)이 만나는 북상면 초입에 자연숲의 섬을 이루면서
빚어낸 명소이다.
옛날 백제 서동과 신라 선화공주가 백제로 가면서 머물렀던 곳이라는 전설을 지니고 있다
△ 위천변 농로를 따라 내려오면 소나무 숲에서 도로는 끝이난다.
△ 조그만 동산에 소나무 숲이 좋다
△ 위 소나무 숲이 끝나는 곳 강변에 용소가 있다.
숲에서 줌으로 거리를 당겨본 추정 용소이다.
△ 이곳 수풀 가려진 곳에 선녀와 나뭇꾼길 안내표지판이 있다.
현위치 용소의 들머리,
주변 수풀이 무성하여 길도 보이지 않고,
무었보다도 이때쯤이면 강물이 탁해 주변 경관이 매력은 반감된다.
저곳이 용소이구나 쯤으로 생각하고 지난다.
△ 쬐금 곤란하다.
농번기라 도랑에 물이 가득하다.
주변 수풀도 무성하고 돌아 가기엔 거리도 멀다.
방수 등산화를 믿고 건넌다.(방수 등산화가 아니면 물이 들어갈 수도 있다)
이후 하천변을 따라 저아래 보이는 농산교까지 길이 없다.
도랑을 건너 우회하여 농로를 따른다.
△ 논두렁으로, 농로로 돌아서 농산교에 도착한다.
△ 농산교 하부로 경관이 좋다.
저쪽 강변 오른쪽, 숲이 무성한 곳에 용암정이 있다.
△ 한나절 쉬기 좋은 곳이다.
△ 건너 도로변에서 줌으로 당겨본 용암정이다.
농산교 상.하로 약 200m 전후엔 트레킹길이 보이지 않는다.
논두렁이고,
강변으로도 수풀이 무성하여 길이 보이지 않는다.
△ 농산교에서 농로를 따라 우회하기 싫어,
하천변 밭을 지나, 논두렁을 거쳐 용암정으로 왔다.
용암정(龍巖亭)
1801년에 용암 임석형(1751~1816)이 건립한 정자이다.
임석형이 지은 『용암정 창건기』와 이휘준의 『중수기』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1864년(고종 1)에 보수 공사한
것으로 되어 있다. 임석형은 석천 임득번의 8세손으로 학문이 뛰어났다.
용암정은 위천 우측에 있는 자연 암반 위에 위천을 바라보는 동향으로 지어져 있으며 임씨 집성촌인 갈계리의
아래쪽에 위치한다.
정면 3칸, 측면 2칸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누하주樓下柱가 낮지만 중층 누각 형식이다.
평면은 중앙 배면에 사방 1칸의 온돌방을 들이고 나머지 3면은 모두 누마루로 구성하였다.
온돌방도 4면에 모두 문을 내어 필요시 모두 개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평면 양식은 요수정樂水亭(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23호)과 비슷하다.
출입은 배면에 있는 작은 나무 계단으로 하도록 하였다.
공포 양식은 초익공 양식이며 상부가구는 도리가 다섯 개인 5량가이다.
누각의 아랫 부분에는 용암정龍巖亭이라 음각되어 있다.
△ 용암정의 편액
청원문(聽猿門)?
△ 용암정 앞 암반과 계류,
△ 용암정을 지나니 길이 좋다.
수승대까지 이렇게 정비하여 놓았구나 !
△ 그러나 보이는 곳이 끝이다.
△ 짧은 구간이긴 하지만
늪지대 비슷하다.
이곳은 일주일 뒤 대충 정비되어 다니는데 별 지장은 없다.
△ 수풀을 헤집고 조금 진행하면 길은 좋아진다.
△ 삼거리 길이다.
오른쪽 산기슭으로 길이 제법 선명하다.
△ 위 삼거리에 있는 나무 밑둥치에 걸쳐져 있는 이 이정표의 방향이 헷갈리게 한다.
이 이정표가 맞다면 하천변을 따라 용암정을 거쳐 지나온 길이 트래킹 길이 아닌 셈이데..........
뒤에 곰곰 생각해 보니,
성령산에서 말목고개로 향하다 보면 농산교 갈림길이 있다.
아마 그 곳으로 이어지는 길인가 보다라고 추측한다.
△ 위천변을 따라 내려간다.
△ 꽃에 나비가 앉았는 것 같다.
△ 강정모리 ?
△ 험한 길은 정비되어 있다.
△ 강물이 휘감아 돌아가는 곳에 암반이 좋다.
△ 용암정에서 0.4km,
수승대 주차장까지는 1.3km남았다.
△ 중간,
성령산 정상으로 오르는 갈림길이 있다.
△ 삼강오륜,
수승대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 황산마을 앞 구연동이다.
삼국시대에는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대였고 조선 때는 안의현에 속해 있다가 일제 때 행정구역 개편으로 거창군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
수승대는 삼국시대 때 백제와 신라가 대립할 무렵 백제에서 신라로 가는 사신을 전별하던 곳으로 처음에는 돌아오
지 못할 것을 근심하였다 해서 근심 수(愁), 보낼 송(送)자를 써서 수송대(愁送臺)라 하였다.
그 후 조선 중종 때 요수신권(愼權)선생이 은거하면서 구연서당을 이곳에 건립하고 제자들을 양성 하였고,
대의 모양이 거북과 같다하여 암구대(岩龜臺)라 하고 경내를 구연동(龜淵洞)이라 하였다.
지금의 이름은 1543년에 퇴계 이황(退溪 李滉)선생이 안의현 삼동을 유람차 왔다가 마리면 영승리에 머물던 중 그
내력을 듣고 급한 정무로 환정하면서 이곳에 오지는 못하고 이름이 아름답지 못하다며 음이 같은 수승대라 고칠것
을 권하는 사율시(四律詩)를 보내니 요수 신권선생이 대의 면에다 새김에서 비롯되었다.
경내에는 구연서원(龜淵書院) 사우(祠宇) 내삼문(內三門) 관수루(觀水樓) 전사청(典祠廳) 요수정(樂水亭) 함양제
(涵養齊) 정려(旌閭) 산고수장비(山高水長碑)와 유적비(遺蹟碑) 암구대(岩龜臺) 등이 있다.
< 녹색 글은 거창군청 문화 관광과 자료임, 이하 녹색 글씨도 같음>
△ 수승대 거북바위 윗쪽에 있다.
척수대?
△ 위 바위 상부에서 가까이 젊은이들과,
△ 거북바위를 본다,
수승대의 명물 거북바위는 바위가 계곡 중간에 떠있는 모습이 거북처럼 보인다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세월의 아픔을 견뎌낸 소나무들이 바위 곳곳에 자라고 있어, 마치 평지같은 인상을 준다.
바위둘레는 이황이 수승대라 이름지을 것을 권한 4율시를 비롯, 옛풍류가들의 시로 가득차있다.
△ 댓바위 앞의 휘몰아 도는 물굽이를 굽어보고 서있는 정자가 하나 있는데,
이름하여 요수정(樂水亭)이라 한다.
이곳은 요수 신권(愼權)이 제자들에게 강학하던 곳으로서 댓바위와 그 앞으로 흐르는 물,
그리고 정자 뒷편의 울창한 소나무 숲과 조화되어 이곳의 경관을 절경으로 만들고 있다.
△ 원각사 앞을 지나.
원각사는 60년대 지해스님이 수승대 골짜기 토굴에서 부처님의 계시를 받고 현재 위치에 창건하게 되었습니다.
수승대의 전설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할수 있으며, 토굴은 아직도 존재합니다.
기도를 하면 소원을 성취할 수 있다고 하여 불자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는 곳입니다.
△ 현수교 앞을 지난다.
△ 또한 현수교 인근에서 성령산으로 오르는 탐방로도 보인다.
△ 위 현수교와 이곳 사이에는 야영을 할 수 있는 많은 평상이 있다,
요즘 메르스로 인해 한적한 날,
조용히 휴식하는 분들이 보인다.
△ 썰매장 쪽으로 간다,
차도를 따라 동계종택으로 갈수도 있지만.
썰매장 뒤 고개를 넘어가면 가깝다.
△ 눈썰매장 아랫쪽,
이곳에도 등산로 들머리가 있다.
△ 썰매장 뒤편으로,
△ 고개를 넘어 동계 종택으로 간다,
△ 초행이라면,
수승대와 주변의 정자, 하천변 숲 등 경관이 좋다.
그러나 성령산은 마을 뒷산쯤으로 큰 기대는 않하는 것이 좋겠다.
미지의 길을 걷는다는 것이 좋다.
다음엔 다른 코스를 택해 모리재를 넘든지, 현성산과 연계하는 것도 고려하여 보아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