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해 노도 가는 길
서포 김만중의 유허가 있는 곳,
남해 노도에 간다,
노도는 지금 변신 중이다.
썰렁한 김만중 유허지가 있는 섬에 공원이 조성된다,
내년쯤이면 변모된 노도를 볼 수 있을 것 같다,
▷ 가는 길
▷ 노도행 배편, (벽련 ↔ 노도)
회차 | 벽련출발 | 노도출발 | 왕복요금 |
1 | 9:00 | 8:30 | 일반인 4,000원 |
2 | 12:30 | 12:00 | 단체(15인 이상) 3,000원 |
3 | 14:30 | 14:00 | 중고생 2,000원 |
4 | 16:30 | 16:00 | 초등학생 1,000 |
▲ 연락처 010 - 2808 - 1954, 010 - 4045 - 2720
매표는 도선에서 합니다.
정기 휴항일 : 매월 두번째 수요일,
승선정원 13명으로 승선 인원이 많을 때는 수시 운항합니다.
기상악화시 운항하지 않습니다,
▷ 탐방코스 ( 2017. 11. 5.)
노도마을 - 김만중 허묘 - 급수탱크 - 문학공원 - 김만중 유허(초옥) - 노도마을 (보통걸음으로 약 1시간 20분 소요)
(요즘 노도를 찾는 분들을 위해 실제 다닌 코스를 재구성했다, 위 코스대로 찾으면 가장 무난할 것 같다.
김만중 허묘로 가는 길은 현재 공사 중으로 경사도 심하고 많이 미끄럽다)
▷ 탐방안내도
▲ 현 노도의 산 능선에 문학공원? 조성중으로 년말이면 완공될 듯,
김만중 유허(초옥)에서 뒷편 능선으로 오르는 도로는 현 공사중인 차량이 다니고 있으며,
급수탱크에서 문학공원으로 오르는 길은 작은 탐방로(등산로)로 생각외로 길이 또렸하다,
▷ 탐방후에
△ 노도 선착장이 있는 남해 상주면 양아리 벽련마을,
남해에서 상주로 가는 도로변에서 살짝 비켜 있어 한적한 마을이다.
한 곳의 음식점과 몇몇 펜션들이 보인다
△ 마을앞 선착장 주변을 둘러본다,
△ 벽련항
△ 마을을 바라보았을때 우측편 방파제 쪽으로 이동하여 마을을 본다,
뒷쪽으로 보이는 도로는 상주가는 길이다,
△ 노도호,
승선정원 13명의 크지않은 배이다,
△ 오후 2시 30분 배로 들어갔다 4시배로 나올 것이다.
섬에서의 시간은 1시간 20분 남짓이다,
노도로 들어갈때는 우리 부부와 다른 한분 합해서 3사람이 타고 들어갔고,
나올때는 고향에 다니러온 분과 함께 4명이 나왔다,
매표는 1인당 4,000원씩, 선상에서 왕복요금을 지불했다.
△ 위 시간표상의 정시에 출항한다,
따라서 5분쯤 전까지는 선착장에 도착하여야 한다,
△ 건너편 노도가 지척이다,
△ 남해섬과 노도섬 사이,
△ 벽련항에서 노도까지 소요시간은 약 5분,
금새 닿는다,
△ 노도 선착장.
△ 노도항 포구에 서포 김만중 유허비가 있다,
서포 김만중(1637 ∼1692)은 문벌(文閥)가문의 후손으로 정치적으로는 서인에 속한다,
부친 김익겸은 병자호란때 강화도에서 청나라와 전투를 벌이다 자결하였고, 조부 김반은 참판을 지냈고 사후 영의정
으로 추증되었다, 증조부는 서인의 영수로 문묘에 배향된 동방 18현의 한사람으로 문원공 사계 김장생이다,
또한 김만중의 친형 김만기는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의 아버지이다,
대사간, 승지, 대사성, 홍문관제학, 대사헌, 부제학, 대사성, 이조참판, 공조판서, 대제학 등을 역임했다,
기사환국으로 남해로 유배된다,
△ 마을로 오르는 길,
숙종은 즉위후 김만기(김만중의 친형)의 딸을 왕비(인경황후) 로 삼았으나 사망한다,
이에 민유중의 딸을 계비(繼妃)로 정하니 이가 인현왕후이다, 이때 김만기나 민유중은 노론계이다.
인현왕후가 왕자를 낳지 못한 가운데 소의 장씨가 왕자 윤(昀)을 낳았다, 왕은 크게 기뻐하여 원자로 삼고 장소의를
희빈으로 책봉하려 하였으나 서인들이 반대하므로 남인들의 도움을 얻어 왕자를 원자로 세우려 하니 서인들은 노·소
론(老少論)을 막론하고 왕비 민씨(閔氏. 인현왕후)가 아직 젊으니 후일까지 기다리자고 주장했다.
숙종은 1689년(숙종 15)에 서인의 요청을 묵살하고 원자의 명호(名號)를 정하고 장소의를 희빈으로 책봉하였다.
노론계의 영수 송시열이 상소를 하자 숙종은 분노한다,
△ 이 길이 조금 빠르다,
이때 남인계인 승지 이현기(李玄紀) 등이 상소하여 송시열의 주장을 반박하고, 숙종은 송시열의 관직을 삭탈하여
제주도로 유배하고, 영의정 김수흥을 파직시켰다. 그밖에 송시열의 주장을 따른 많은 노론계 인사를 파직·유배되고
남인계가 대거 등용되었다. 그 뒤 남인들은 서인의 죄를 계속 추궁하여, 송시열은 제주도에서 정읍으로 유배지를
옮기던 중 사약을 받았고, 김만중(金萬重) · 김익훈 · 김석주등은 보사공신의 호를 삭탈당하거나 유배당했다.
마침내 숙종은 이듬해(숙종 16) 5월 2일 중전을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만들고, 6월에는 원자를 세자로 책봉한 뒤
10월에 희빈장씨를 왕비로 책립(冊立)했다.
이렇게 서인이 집권 10년 만에 남인에게 정권을 빼앗긴 국면을 기사환국이라 한다.
이후 갑술옥사 때까지 남인이 정권을 잡았으며, 서인에서 노론,소론으로 분리되었다고 보면 이해가 쉬울 것 같다,
△ 덩굴식물을 제거?
칡덩굴인가 보다,
△ 마을로 오르는 길,
△ 이 건물은 ?
개인 주택은 아닌것 같다.
△ 김만중 유허지 가는 길은 단순하다,
마을로 올라서 좌측편으로 돌아가면 된다,
△ 모퉁이를 돌아가면서,
건너편 출발지 벽련마을이 보인다,
△ 벽련 마을을 줌으로 당겨본다,
△ 유허지 가는 길은 임도수준의 길이다,
이 길은 현재 능선상부의 공원까지 계속된다,
△ 이정표가 있다,
△ 노도 선착장에서 서포선생 유허까지는 0.85km,
△ 길도 대체로 완만하다,
△ 갈림길이 있다,
이럴땐 대략 난감한게 어느쪽을 먼저가느냐? 이다,
사실 들머리 노도 선착장의 안내도를 유심히 보았다면 헷갈릴 이유가 없다,
△ 노도 선착장 (0.6km)에서 왔다,
우측(직진)방향으로 서포 김만중 유허(허묘) 0.2km를 가리키고,
좌측(아랫쪽)으로 서포 김만중 유허(초옥) 0.25km를 알린다,
△ 김만중 허묘쪽으로 먼저 간다,
옆에 있는 다른 이정표엔 0.2km로 표시되어 있다.
△ 이내 또 갈림길이다,
허묘는 어느 쪽으로 가야 하냐?
우측, 현재 공사중인 길을 따라야 한다,
보이는 저곳에서 우측 능선 상부에 허묘가 있다,
좌측길로 직진하면 커다란 급수탱크가가 있다,
△ 허묘 가는 길,
차후 계단길로 정비될것 같다,
현재는 사진상으로 보기보다 경사가 심해 많이 미끄럽고 다니가가 어렵다,
△ 김만중 허묘,
보이는게 전부다,
△ 차후 이 허묘로 오르는 길이 정비되면,
이곳에서 조성중인 문학공원?으로 이어지는 길이 생겨질런지 모르겠다.
△ 김만중 허묘를 둘러보고 갈림길로 되돌아 내려와
갈림길에서 직진을 하면 급수탱크가 있다,
사실은 허묘를 찾아 이곳에 먼저왔다. 허묘가는 길이 파헤쳐져 다른 길인 줄 알았다,
근데, 이 급수탱크 앞을 지나가니 오솔길이 선명하다,
무슨 길이지 ?
△ 따라가 본다,
△ 아랫쪽으로 임도도 보인다,
나중 저곳으로 내려오면 되겠다 싶다,
△ 앞쪽(남해쪽) 바다가 호수같다,
△ 오솔길을 따라 능선으로 오르니,
공원조성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 공원 이름이 뭔지는 모르겠다,
서포 김만중이 이곳에서 저술 활동을 하였으니 나름대로 김만중 문학공원으로 붙여본다,
△ 상부쪽,
중앙은 연못으로 꾸민다,
약간이지만 물도 고여있다,
△ 하부쪽,
△ 둥근 원형안엔 조각상이 들어설 것이다,
△ 세월질 곳도 여러 군데다,
△ 하부쪽을 둘러보고 윗쪽으로 간다,
능선 아래로 장비가 다닌 흔적인지 길이 보이나 경사가 제법이다,
△ 정자에도 올라본다,
△ 서쪽으로 바다 조망도 트인다,
△ 공원의 규모가 크다고는 할 수 없으나
아담한 느낌이다,
△ 근데 여기 연못에 물이 고일수 있을까?
상부쪽으로 간다,
△ 공사중,
△ 포장이 되어있어 알 수는 없지만, 중국적인 느낌이 많이 난다,
△ 내려다 보고 있다,
△ 석상 조각의 맨 상부쪽에서 내려다 본다,
△ 윗쪽에는 팔각정이 있다,
△ 앵강만,
△ 팔각정 뒷편 봉우리엔 수풀이 무성하다.
△ 되돌아 간다,
△ 공사중인 도로를 따라 내려간다,
△ 조금 생뚱맞은 곳에 서포 김만중 안내표지가 있다, 초옥과는 거리가 쬐끔 있는 곳이다, 원래 초옥이 있었던 자리인가? 서포 김만중(西浦 金萬重 1637 ∼ 1692) 서포 김만중은 역대 뛰어난 인물 가운데 누구보다도 효도의 인간으로 평가받고 있다. 선생은 1637년 (인조15)에 충렬공 익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병자호란때인 1637년 1월 22일 강화성이 함락되자 익겸공은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강화성 남문에서 순절하였다. 어머니 뱃속에서 아버지를 여윈 유복자 서포는 깅화도를 탈출하던 배 안에서 태어났다 하여 아명을 선생(船生)이라 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때 당시 상황으로 보아 조선 중기 남인과 서인, 노론과 소론의 치열한 당쟁속에서도 김만중은 정의감이 앞서 왕 에게 상소를 올리게 되자 반대편의 시기로 여러차례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기사환국 (1689년 숙종15)으로 남해에 유배를 오게 되었고, 이곳 노도에 가극안치 되었다. 남해에 유배를 오면서 남해향교에서 주자어류을 빌려 주자요어(朱子要語)를 엮어 내었고 3년이란 유배기간 동안 윤부인행장, 서포만필 등을 저술하였으며 사씨남정기도 이곳에서 저술하였다. 1692년 (숙종18년) 4월30일에 지병으로 동복(憧僕)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56세의 일기로 이곳에서 생을 마감하고 사(死)하여 이곳을 떠나게 된 곳이다, 같은해 5월에 사위인 강원도 관찰사 이이명이 남해로 유배되어 장인(김만중) 의 적소를 찾아보니 매화나무 2그루가 있어 자기 적소로 옮겨 심었다. 남해군, 남해문화원
△ 동쪽으로 조망이 트이는 조그만 골짜기를 따라 내려서는 셈이다,
건너 보이는 남해 본섬과 사이의 바다는 호수같은 느낌이 든다,
△ 잘 생긴 동백 몇 그루,
△ 도로를 따라 내려오면 김만중 유허(초옥)이 있다,
문론 근래에 복원한 것이리라,
△ 초옥 앞,
초옥 앞쪽 임도를 따르면 문학공원으로 오르게 되고,
좌측 길은 해안으로 내려간다,
△ 초옥 앞 이정표
노도 선착장 0.85km,
서포 김만중유허 (허묘) 0.45km
△ 임도를 따라 선착장 쪽으로 간다,
△ 당초 갈림길로 되돌아 왔다, 직진으로 보이는 길을 따라 문학공원에 오른 후, 임도를 따라 초옥을 둘러보고 좌측길을 따라 이곳으로 왔다,
△ 선착장으로 간다,
△ 노도 선착장으로 되돌아 왔다,
△ 서포 김만중 유허지외 문학공원을 둘러보고 되돌아 오는데 약 1시간 20분쯤 소요되었다,
배 시간을 맞출려다 보니 여유를 부릴 시간은 별로 없다.
제법 빠듯한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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