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망우당 곽종석 선생 유적답사 /
망우당 묘소, 예연서원, 망우정, 거름강, 망우당생가 및 현고수, 정암진, 정암루, 충익사
곽재우는 경남 의령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현풍, 호는 망우당으로 당시 황해도 관찰사 곽월(郭越) 의 세째 아들이다,
남명 조식 문하에서 공부했고, 그 인연으로 조식의 외손녀와 혼인했다, 1585년 (선조18) 34세의 나이로 정시문과에
응시해 뽑히기도 했으나, 얼마 후 글의 내용이 선조의 마음에 들지않는다고 해서 합격이 취소되었다, 곽재우는 그때
벼슬에 대한 뜻을 접었다, 그런 그가 칼을 들고 세상에 나서게 된것은 임진년에 수십만 일본군이 조선땅을 유린하며
침략해 왔기 때문이다, 곽재우는 무인 출신은 아니지만 임진왜란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왜군에 맞서 싸웠다,
그의 발차취를 따라 산청 선비대학생들과 함께 몇 유적지를 둘러본다,
이곳 대부분의 글은 남명학연구소 (이영숙 교수) 현장학습 자료집에서 발췌했다,
▷ 가는 길
산청 - 달성 - 현풍 - 남지 - 의령 - 산청
▷ 탐방코스
망우당 묘소 - 예연서원 - 망우정 - 중식 - 거름강 - 망우당생가 및 현고수 - 정암진, 정암루 - 충익사
▷ 탐방후에
▣ 망우당 묘소
먼저 망우당 묘소로 왔다,
지역별로 달성 - 현풍 - 창녕 - 의령 순으로 코스를 그리다 보니 먼저오게 되었다,
⑧ 번이 망우당 묘이다,
망우당 묘소는 선조와 나란히, 형보다는 지형상 높은쪽에 위치한다,
관직의 지위에 따라 지형상 높은 곳에 묘를 쓰기도 한단다,
아직은 벌초시기가 아니어서 개망초 무성하다.
먼저 참배.
증 병조판서 행함경도 관찰사 망우당 선생 곽 충익공 묘(贈兵曹判書 行咸鏡道 觀察使 忘憂堂 先生 郭 忠翼公 墓)
정부인 상산 김씨 부( 貞夫人 商山金氏 袝)
여기서 贈은 사후 추증했다는 의미이며 살아 있을때 실제로 받은 직함보다 높아 앞에 썼으며,
行은 실제로 제수받아 행한 직함 앞에 붙인다 한다,
마지막 袝자는 합장했다는 뜻이며 앞에서 바라보았을때 남자가 왼쪽, 여자는 오른쪽에 두는 일반 예에 따랐다는
(정상) 뜻이라 한다,
오른쪽에는 '장자 통덕랑 형 묘재계하십보내' (長子 通德郞 瀅 墓在階下十步內)
비문을 지은 사람은 조문명이며, 글씨를 쓴 사람은 이덕수다,
비문의 뒷면에 적힌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망우당 곽선생은 임진년 섬 오랭캐들의 변란을 당하자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켜 영남에서 적군을 격파함에 그 전공은
매우 특수했으며, 만년에 관직을 버리고 산속에 들어가 솔잎을 복용하며 음식을 들지 않았으니 그 행적 또한 기이했도다,
.............
선생의 묘소는 현풍 구지산에 있으니 선생은 일찍이 유언하되 '임진.계사년의 왜란으로 인해 선왕의 두 능이 훼손되고
구묘(九墓)가 불탔으니 신하의 치욕이 막대하도다, 때문에 나의 장례는 예법대로 치러지도 말고 겨우 흙이 덮일 정도로
뭍는데서 그치며, 봉분도 만들지 말고 묘비도 세우지 말라, 나의 뜻이 어김이 없도록 하라'고 했다,
이우인 공은 한음 이덕형 상고의 후손이다, 이 현풍에 수령으로 부임하여 먼저 선생의 묘를 배알, 두루 살펴보고 탄식하
며 말하되 봉분을 감히 더 높이지 못함은 진실로 선생의 유지를 따름이라 하겠으나, 묘소에 묘표(墓表)마저 없다면 뒷날
사람들이 어찌 능히 선생의 분묘임을 알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고을 유생들이 그렇다! 라고 말하면서 드디어 현 감사
조현명공에게 그 사실을 아룀에 조공이 그 말을 듣고 즉시 재물을 염출하여 비석을 마련함과 아울러 나에게 편지를 보내
와 그 일을 위해 글을 지어 달라고 하였다,
선생의 관직. 문벌. 사적등은 뒷날 마땅히 신도비의 기록이 있을 터이니 지금은 다만 선생의 분묘를 표시하는 까닭의
뜻만 기록하노라, 선생의 휘는 재우요 자는 계유며 포산사람이니 가정 임자년에 출생하여 만력 정사년에 별세하였다,
관직은 관찰사와 증병조판서였다, 이로써 표문으로 삼는다,
가선대부 행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이덕수 찬 / 대광보국 승록대부 의정부 우의정
겸 영경연감 춘추관사 풍릉부원군 수충갈성결기분무공신 조문명 서 / 승정 기원후 일백오년 임자 월 일립. 』
묘지에서 내려다 본 경관이다,
앞쪽 근거리에 공단이 조성중이라 한다,
▣ 예연서원(禮淵書院)
대구 달성군 유가면 가태리 구례마을,
서원앞 보호수,
예원서원에 왔다,
망우당 묘소에서 멀지않은 곳이다,
예연서원은 의병장 곽재우의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서원이다,
1618년(광해군10)에 충현사로 처음 세웠고,
1674년(현종15)에 규모를 확장하여 서원의 모습을 갖췄다,
1677년(숙종3) 나라에서 인정한 사액서원으로 '예연'이란 이름을 받았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 (고종 5) 에 폐쇄된 것을 1872년 (고종 9) 경의당을 건립하였고,
다시 한국전쟁으로 완전히 소실된 것을 1977년 강당. 삼문(三門)을 복원하고 1984년 사당을 복원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서원 옆의 부속건물이다,
역시 부속건물,
서원 뒷편에 사당이 있다,
충의문을 지나면,
충현사가 있다,
망우당 위패,
사당 내부에 곽재우의 재종숙으로 정유재란때 공을 세운 곽준의 위패를 추가로 모시고 있다,
앞에서 보았을때 재종숙 위패를 좌측에, 망우당 위패을 우측에 모시고 있다,
서열로 따지면 좌측이 높은 자리로, 유교적 관례로 볼때 망우당 위패가 좌측에 있어야 마땅하나
집압의 위계 질서상 우측에 모시고 있는걸로 보고 있다고 한다,
가태리 구례 마을앞,
정면 2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비각안에 망우당과 곽준의 신도비가 있다,
좌측의 비가 곽준, 우측의 비가 곽재우 신도비이다.
비의 우측면 내용에 의하면, 비는 1751년 (영조27) 이곳에 건립되었으나, 6.25 전쟁 당시 파괴되었던 것을
1957년 중수하였다 한다,
달성군 문화유적 지표 조사 보고서의 곽재우, 곽준 신도비 설명에 의하면 누구의 비인지 기술되지 않았지만
"6.25 전쟁때 파괴되었다고 보이는 비문 (높이 116cm, 너비 45cm, 두께 38cm)이 동쪽 담장 아래에 남아있
고, 귀갑문양이 양각된 귀부 편 (높이 110cm, 너비 160cm) 일부가 비각 서쪽에 유존하고 있다"고 하였으나
현재 주변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현재 비각은 최근 새롭게 건립되었거나 중수된 것으로 보이며 담장은 없어
졌다, 담장에 있던 남쪽 출입문은 담장없이 비각 우측에 서 있다,
이 비는 1984년 사당 복원시 신도비와 비각을 다시 세웠는데,
국가적으로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땀이 흐른다고 하여 '땀나는 신도비'라 한다,
신도비 앞쪽의 노거수,
▣ 망우정
다음 지도에서 망우정은 표시는 없다, (네이버 지도에는 있음)
가운데 보이는 정자가 망우정이다,
남지읍 앞쪽,
낙동강이 내려다 보이는 아담한 동산에 망우정이 있다,
백마를 탄 홍의장군으로 잘 알려진 망우당(1552 - 1617)은 백전백승의 전공만큼이나 인생관도 남다른 사람이었다,
그는 말년에 은거에 들어가 1602년 영산 창암(蒼巖)의 낙동강변에 江亭을 지었는데 세상에서 말하는 망우정이다.
그는 이곳에서 생식하며 흡사 도인과 신선처럼 여생을 보내다 1617년 4월 10일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한다,
충익공망우곽선생유허비
망우정 정문,
현재는 앞의 담장과 키큰 나무로 인하여 낙동강 조망이 시원스럽지는 않다,
망우정은 곽재우의 비범했던 행적만큼이다 증여 과정이 남달랐다,
여느 사람들처럼 곽재우도 자신의 강정(江亭)이 길이 보존되기를 갈망했지만 방법은 사뭇 남달랐다,
그는 진정 산수를 즐기고, 또 능히 이것을 수호할 수 있는 '어진 이(賢)에게 정자를 물려주어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곽재우는 두 아들과 여섯 손자를 제쳐두고 영산의 선비 이도순(李道純 1585-1625)을 적임자로
지목하게 된다,
망우정,
" 내가 보기에 강상에 들어선 정자들 가운데 잘 수호되는 것이 드문데, 그 까닭은 무었인가? 어진이에게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 내가 이 정자를 사사로운 재물로 여기지 않고 그대에게 주는 것은 그대가 산수를 즐기고 좋아하는
마음이 있어 나의 정자를 잘 수호할 수 있음음 알기 때문이다, 군은 나와 같은 마음으로 어진이를 얻어 이것을 넘겨
주고, 뒷날 어진이 또한 군과 같은 마음으로 수호할 만한 어진이에게 전수한다면 길이 보존될 수 있을 것이다."
(곽재우 '망우집' 권2, '망우정을 이도순에게 증여하는 글')
여현정,
곽재우의 정신이 담긴 이 글은 사림의 고사이자 미담이 되었고, 주변에서는 그의 택현증여(擇賢贈與)를 기려
망우정을 여현정(與賢亭)으로 부르기도 헸다.
하나의 정자에 두개의 이름을 갖는 예는 드물다 한다,
망우정을 둘러보는 것으로 오늘 오전일정을 마치고,
인근 도천면 소재지에 위치한 진짜순대집에서 중식이다,
도천면 소재지에 있다,
맛집으로 많은 분들이 찾는 곳이다,
순대를 좋아한다면 찾아도 후회하지 않을 집이다,
이집 메뉴,
모듬순대에 산청의 덕산막걸리를 겯들이고,
순대전골로 점심을 먹었다,
▣ 기강나루 / 거름강
이곳은 남지 개비리길이 시작되는 곳이다,
남지 유채공원?의 최 상부인 셈이다,
남강이 낙동강에 합류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 지점을 기강(岐江)이라 하는데 일명 거름강 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곳은 창녕군 남지읍 용산리,
간너 보이는 남강의 우측편은 의령군 지정면 성산리, 좌측 건너편은 함안군 대산면 구암리이다,
기강 나루는 예전에 남지읍으로 나룻배를 타고 이동하던 주요 나룻터 역할을 했던 곳으로 임진왜란 때 곽재우장군의
첫 승전지인 동시에 의병군의 첫 승전지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지지자료」(의령)에 기강진이라 표기되어 있다,
물길을 따라 내륙 깊숙이 적군이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군사적 요충지이다,
곽재우는 임진왜란 직전에 기강나루에서 5리 정도 떨어진 곳에 살았는데, 의병군을 조직한 후 제일 먼저 진을 쳤던
곳이 바로 기강나루였다,
이곳에서 태어난 곽재우는 강을 뛰어 넘을 정도로 비범했는데, 낙동강과 남강이 합쳐지는 가강나루에 왜병과 대적할 때
밤에 허수아비를 만들어 옷을 입혀놓고 줄을 매달아 불을 붙여 흔들어서 수백명이 강을 막고 서 있는것 처럼 위장전술을
썼다고 한다,
왜군의 주력부대가 북상하면서 낙동강을 이용해 병력과 군수물자를 운반하자 1592년 5월 4일 곽재우 장군은 10여명의
부하들과 함께 기강둑에 매복하고 있다가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왜선을 발견하고, 일제히 공격을 가해 14척을 격퇴
시켰다. 강 속에 목장(나무 말뚝)을 박아 병참선의 진로를 방해하고, 적선이 목장에 걸리면 강둑에 매복해 있던 복병들이
급습하는 식으로 싸웠다고 한다,
저곳 어디쯤
합강정이 있고, 또다른 정자도 있다,
개비리길 시작점,
몇년 전 이곳을 찾은 적이 있다,
이곳 남지 유채꽃이 필무렵 개비리길을 같이 찾으면 좋다,
▣ 망우당 생가(기념공원)와 현고수
망우당 생가로 왔다,
복원된 생가 앞쪽
일명 세간리 은행나무이다,
망우당 생가 사랑채를 거쳐,
안채로 왔다,
안채를 앞쪽에서 바라 보았을때 좌측 창고,
우측 건물,
해설사 님으로 부터
곽재우 장군의 무용담을 듣다,
의령 세간리 은행나무, / 천연기념물 제 302호
은행나무는 우리나라,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유교와 불교가 전해질 때 같이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곳 세간리 은행나무는 수령 60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24.5m, 둘레 10.1m 정도이다,
마을 어귀에 위치하고 있는 현고수와 함께 마을을 지켜주는 신성한 나무로 믿어지고 있다,
특히 남쪽 가지에서 자란 두개의 짧은 가지(돌기)가 여인의 젖꼭지 같이 생겼다고 해서 젖이 나오지 않는 산모들이
찾아와 정성을 들이면 효험이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세간리 은행나무 인근에서 약 300m,
걸어도 300 걸음 조금더,
마을앞에 있는 현고수를 보러 왔다,
현고정 이야기.
2008년 3월 12일 천년기념물 제 493호로 지정되었다,
수령은 약 450년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당시인 1592년 4월 13일
왜군이 부산포에 침입하자 당시 41세의 유생인 곽재우가 4월 22일에 이 느티나무에 북을 매달아놓고 치면서
전국 최초로 의병을 모아 훈련을 시켰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유서깊은 나무이다,
북을 매달았던 나무라는 뜻으로 현고수라고 불리게 되었다,
인근의 정자,
북을 달아놓았다,
▣ 정암진, 정암루
정암진 솥바위 보러 강변으로 내려간다,
숱바위 (정암, 鼎巖)
정암루와 어우러진 모습이 진주 촉석루와 의암과 비슷하다,
정암이란 이름은 바위의 뿌리가 솥다리처럼 세 개로 떠방치고 있는데서 유래했다,
각도를 달리하여,
정암나루는 임진왜란때 곽재우와 그의 의병들이 대승을 거둔 곳이다,
이떼 몰려온 왜적 2만명과 맞서 싸운 의병수는 고작 1,000여명, 20대 1의 전투에서 크게 이긴 것이다,
정암정은 이 승전을 기억하기 위해 지었다고 한다,
언덕으로 정암루에 오른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크지않은 규모이다,
정암루에서의 조망,
▣ 충익사.
시간적 여유가 된다면
이곳 충익사 , 의병박물관 등 주변을 둘러보고 남산 등산을 하는 것도 좋다,
남산 산행은 본 블로그 '의령 남산' 편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충익사로 간다,
외삼문인 충의문을 지난다,
명물 모과나무,
수령 약 500년, 원래 가례면 수성마을 하천변에 있던 것을 1987년 이곳으로 옮겨심었다고 한다,
충의각,
곽재우와 열일곱 의병장에게 사후에 내려진 관직명과 관향 등을 적어 모시고 있다,
충의각은 공포의 장식과 민화 병풍을 연상케 하는 벽체의 장식이 몹시도 화려하여 눈길을 잡아 끄는데.
건물 전체가 꽃상여 같은 느낌을 준다,
내삼문인 홍의문을 지나,
충익사를 참배한다,
충익사는 곽재우와 그 휘하 열일곱 의병장을 모신 사당이다,
충익(忠翼)은 숙종이 곽재우 장군에게 내린 시호로서
忠은 나라에 충절을 다한다, 翼은 생각이 깊고 멀다는 뜻이다,
충익사 주변에 기념관, 의병박물관 등이 있어 같이 둘러보면 된다,
같이하신 분들 중 일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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